통증이 지나간 뒤에도 머리는 여전히 어지러웠고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온하랑은 애써 복잡한 생각을 집어던지고 이불을 덮고선 눈을 꼭 감고 잠을 청했다.오랫동안 뒤척이다가 결국 잠이 들었는데 금방이라도 깨어날 듯 깊게 잠들지 못했다.흐릿한 장면들이 하나둘씩 뇌리를 스쳐갔고 온하랑은 손에 잡히지 않는 뭔가를 잡으려 발버둥 쳤다.잠에서 깨어났을 땐 개운하긴커녕 전보다 더 피곤함을 느꼈다.점심을 다 차려놓은 아주머니는 방문을 두드리며 온하랑에게 밥을 먹으라고 했다침대에서 일어날 힘조자 없었던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아주머니에게 점심을 방까지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입맛이 없었지만 아이를 생각해 대충 배를 채웠다.젓가락을 내려놓은 온하랑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국제번호로 전화를 걸었다.통화가 연결되자마자 핸드폰 너머로 친숙한 벨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네가 웬일로 전화했지? 요즘 잘 지내?”“일도 많이 줄었고, 배가 많이 나와서 몸이 힘든 것 말고는 별일 없어. 너는 어때?”“난 아도니스랑 여행 중이야. 지금 바닷가 근처인데 엄청 예뻐.”“좋겠네.”온하랑은 부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여행하는 거 좋아하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같이 가자.”“기억해? 우리 졸업하고 나서 같이 여행 가기로 했잖아. 그런데 갑자기 귀국하자마자 연락이 안 될 줄 누가 알았겠어.”“갑자기 귀국한 후로 연락이 안 됐다고?”온하랑은 핵심적인 포인트만 잡았다.“응. 학기 말에 시험 준비 때문에 우리가 연락을 자주 한 편은 아니었어. 시험 끝나면 연락하려고 했는데 그 뒤로 아예 안됐던 거지.”“우리가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언제인지 아직 기억해?”벨라는 기억을 더듬었다.“아마 6월 말이었을걸? 그때 네가 많이 아팠잖아...”온하랑은 의아했다.“내가 아팠다고? 어디가?”“프라이버시 때문에 나도 자세하게 묻지는 못했는데 아마 신장 쪽에 문제가 있었을걸? 호르몬제를 복용해서 살이 엄청 쪘잖아.”BX 그룹에 입사한 후 매년 건강 검
온하랑은 부승민을 좋아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그 남자가 누구인지 문득 궁금해졌다.“갑자기 그런 걸 물어?”벨라가 입을 열었다.“최근에 건강검진 받을 때 의사 선생님이랑 수다를 떨다가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은 얘기가 나온 거야. 선생님이 뇌에 남아있던 핏덩이가 없어진 지 오래여서 기억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면 하나둘씩 떠오른다고 해서 물어본 거야.”온하랑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태연하게 핑계를 둘러댔다.“그래? 정말 잘됐다. 또 궁금한 거 있어? 내가 기억하고 있는 건 뭐든지 다 말해줄게.”“친구 하나는 잘 뒀네.”운전하던 진도원이 한마디 덧붙였다.“뭐든지 말만 해.”“내가 필라시에서 연애한 적이 있었나?”벨라는 어리둥절했다.“아니? 넌 남자 친구를 사귄 적이 없어. 널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는데 네가 다 거절했잖아.”“없었다고? 아예?”온하랑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그럼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냐는 말이다.“응. 나한테 엄청 오랫동안 좋아한 사람이 있다고 했어. 그 사람을 포기하기 전까지 다른 남자를 만날 생각이 없다고 했었거든.”“그럼... 나랑 친하게 지낸 남자는 있었어?”“알렉스.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너랑 자주 연락했을걸? 나중에 너한테 고백했는데 네가 거절했잖아. 알렉스를 제외한 다른 남자는 다 평범한 친구였어.”얘기를 들을수록 온하랑의 표정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더 없어? 내가 호감 가진 남자는 아예 없는거야?”“호감 가진 남자?”벨라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게 알렉스잖아. 네가 단톡방에서 알렉스한테 방 하나 알아봐달라고 했었거든? 그러고 나서 나랑 같이 방 보러 갔다가 그곳에서 알렉스를 처음 만났는데 소스라치게 놀랐잖아. 사람 잘못 봤다기에는 반응이 너무 이상했어. 지금 생각해 보면 네가 좋아하고 있던 그 사람이랑 너무 닮아서 놀란 것 같기도 해.”“나랑 알렉스... 많이 친했어?”“응. 알렉스는 한국인끼리 소통하며 지낼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했어. 가끔 파티도 주최하고 서로 도울
온하랑은 모든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때의 온하랑에게 부승민은 어두운 삶을 비춰주는 빛처럼 그녀를 따뜻하게 보살펴줬기에 단지 부승민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최동철에게 흔들릴 리가 없다.최동철의 도움을 받았다 한들 고마움을 넘어선 다른 감정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를 사랑하게 될 일은 더더욱 없었다.만약 그들 사이에 정말 아이가 생겼다면 왜 최동철은 재회한 이후로 단 한 번도 아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을까?하지만 최동철이 아니라면 누구일까?벨라의 말에 따르면 현재로선 최동철이 가장 유력하다.마음이 뒤숭숭해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온하랑은 심란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껐다.그해의 일을 회상하려고 애를 썼지만 그럴수록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다.어젯밤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접한 소식은 충격이지 않을 수가 없다.불과 하루 만에 온하랑은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필라시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의 아버지는 부승민의 이복형제인 최동철일 가능성이 크다.신의 장난이 아니고선 정말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심지어 누군가 서우현의 핸드폰을 훔쳐 일부러 그 사진들은 온하랑에게 전송했다. 도대체 왜?왜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에 사진을 보내준 걸까?온하랑은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팠다.당사자도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부승민이 알게 된다면...마냥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부승민이 퇴근해서 돌아오면 이 사진들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만약 부승민이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헤어짐을 택해야만 한다....부승민은 서정훈을 만나러 서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몇 마디 인사를 나눈 후 서정훈은 웃으며 물었다.“단순히 안부만 주고받으려고 찾아오진 않았을 테고... 무슨 일 때문에 온 거니?”부승민은 증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하랑이 지금 임신 중입니다. 만에 하나 이런 사진들을 보게 된다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시죠? 어린아이를 상대로 따지고 싶지 않네요. 제 아내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아 이번 한 번만은
겉모습과 달리 사랑에 진심인 부승민을 보며 서정훈은 웃음이 나왔다.“정말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하는구나. 알겠다. 내가 잘 처리하마.”“의원님의 말을 들으니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요.”얼마 지나지 않아 서상원이 서천우와 함께 찾아왔다.서천우의 얼굴에는 죄책감이 가득했고 테이블에 놓인 사진을 본 순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아이는 할아버지의 심문에 못 이겨 모든 일을 사실대로 털어놓았고 부승민의 짐작한 바와 같이 서천우는 이엘리아의 사주를 받았다.황당하고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낯선 사람에게 허세를 부리며 협박한 아들의 모습에 서상원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곧바로 손찌검하며 혼쭐을 냈다.이후 서상원은 부승민 앞에서 이엘리아에게 전화를 걸어 버럭 화를 냈다.전화를 끊은 후에는 부승민에게 사과했고, 서천우를 데리고 온하랑을 찾아가 직접 사죄하겠다고 말했다.부승민은 괜찮다고 말하며 제안을 거절했다.너그러워 보일지 몰라도 실은 온하랑이 이 사진들을 보게 될까봐 걱정되었던 것이다.이엘리아에 대해서 부승민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사람들이 이엘리아를 감쌀수록 윌슨의 조카인 노아의 존재감도 점점 더 커졌다. 손을 잡은 두 사람은 마치 친남매처럼 가깝게 지냈으나 윌슨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 채 그들을 방치했다.그리고 윌슨이 높이 평가했던 후계자 연도진은 현재 김씨 가문의 회사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참 이상한 구조다.순간 미심쩍은 낌새를 눈치챈 부승민은 알지 못한 배후가 일부러 이런 상황을 조성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엘리아와 노아는 현재의 상황을 즐기며 더 높은 곳에 올라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높이 올라갈수록 더 심하게 다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듯하다.누군가가 자처해 그를 도와 이엘리아를 처리하고 있으니 굳이 나서서 이 좋은 계획을 망칠 필요가 없다....한동안 안정을 취한 온하랑은 그제야 기운을 되찾았다.하지만 무의식적으로 그 사진들이 계속 떠올랐다.차라리 최동철에게 연락해 솔직하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온하랑은 귓가에서 핸드폰을 떼내 재빨리 카톡 설정의 ‘친구 관리’로 들어갔다.두 눈으로 모든 걸 확인한 순간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아니나 다를까 친구 추가 관련한 모든 옵션이 꺼진 상태였다. 그말인즉 번호를 검색하든, 단톡방에서 추가하든, QR 코드를 스캔하든 모든 경우의 수가 무용지물이었고 기존 연락처를 제외한 그 어떤 사람도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없었다.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온하랑은 곧이어 핸드폰 설정으로 들어갔고 역시나 ‘알 수 없는 번호 차단’ 등의 옵션이 켜져 있었다.문자 메시지도 마찬가지였다.이러한 옵션은 그녀가 설정한 게 아니니 누군가 핸드폰을 건드렸다는 확신이 들었다.핸드폰 너머의 남자는 온하랑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제 확인이 끝났나?”온하랑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다시 전화를 받았다.“첫 번째 질문도 답해야지. 사진은 어디서 구했어?”“내가 직접 찍은 거야.”대수롭지 않은 듯 무심하게 답하는 남자의 모습에 온하랑은 흠칫 놀랐다.“그 아이... 지금 어디에 있어?”말이 끝나자마자 남자는 박장대소를 터뜨렸다.“하하하...”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온하랑을 덮쳤다.“왜 웃어?”“그냥...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듣기로는 산부인과에 검사받으러 갈 때도 부승민이 앞뒤로 경호원을 배치한다며? 국내에서 실력이 가장 뛰어난 산부인과 의사를 모셨더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한테 이렇게 지극정성을 쏟아부으니 참 대단하네... 너도 고아로 자랐지만 부씨 가문에 입양된 후로 돈 걱정 없이 풍족한 삶을 누리며 살았잖아? 양반이네.”“아참, 부승민이 다른 여자랑 낳은 딸도 유명한 시립 유치원을 다닌다며? 네가 그 아이를 친자식처럼 예뻐한다는 건 들었어. 참 생각도 없다, 누가 보면 진짜 가족인 줄 알겠어. 네가 몇 개월간 품고 낳은 그 아이는 지금 어떤 삶은 살고 있는지 알긴 하나?”온하랑은 말문이 막혔다.그러자 남자는 이때다 싶어 비꼬듯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 애는
“환자분은 천성적으로 자궁벽이 얇은 편이라 태아의 위치가 정상이 아닐 가능성이 커요. 평소에 식단 조절 잘하고 운동도 빼먹지 마시고 항상 조심하는 게 좋아요.”의사가 말하면서 처방전을 작성하고 건네주었다.“자, 약 가지고 가세요.”“네, 감사합니다. 선생님.”온하랑은 처방전을 건네받고 천천히 일어섰다.이때, 의사가 한 마디 더 보탰다.“진짜 조심해야 해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큰일 날지도 몰라요.”자궁벽이 얇으면 유산하기 쉬웠다. 게다가 한 번 유산하면 다시 임신하지 못하는 임산부들이 대다수였다.“선생님, 감사합니다. 꼭 유의할게요.”온하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결혼 3년 차, 그녀만큼 아이의 탄생을 고대하는 사람도 없었기에 아이를 꼭 잘 지키겠다고 다짐했다.약을 받은 다음 온하랑은 병원에서 나와 차로 돌아갔다.기사가 시동을 걸고 백미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사모님, 도련님께서 오후 3시 비행기로 돌아오시는데 아직 20분 남았어요. 바로 공항으로 가실까요?”“네.”20분 뒤에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온하랑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고, 마음속은 기대로 가득 찼다.부승민이 한 달 가까이 출장 중이라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그녀는 공항으로 가는 내내 가방에서 임신 확인서를 꺼내 몇 번이고 들여다보고는 손으로 아랫배를 살짝 감쌌다.이곳에 그녀와 부승민의 아이가 있으며 8개월만 기다리면 곧 태어난다.지금은 당장 이 기쁜 소식을 부승민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뿐이다.공항에 도착하자 기사는 눈에 잘 띄는 곳에 차를 세웠다.“사모님, 도련님께 연락 한번 해보실래요?”온하랑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부승민이 이미 비행기에서 내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전화를 걸었지만, 휴대폰이 꺼져있다는 안내음만 흘러나왔다.“비행기가 연착된 것 같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봐요.”온하랑이 말했다.한참이 지나도 부승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온하랑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통하지 않았다.“더 기다려봅시다.”비행기 연착은 워낙 흔
“응.”“술 마셨어?”“친구랑 조금 마셨어.”욕실에서 샤워하는 소리가 들리자 온하랑은 찡그린 얼굴로 뒤척이며 편히 잠들지 못했다.이내 침대가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에 닿더니 우아한 곡선을 따라 점점 아래로 내려가며 만지작거렸다.“음... 오늘은 안 돼...”온하랑은 눈을 감고 비몽사몽인 채로 그를 밀어냈다.행여나 아이가 다칠까 봐 무의식적으로 걱정했다.큰 손이 우뚝 멈추더니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얼른 자.”졸음이 쏟아지는 탓에 그녀는 금세 잠이 들었다.아침에 일어난 온하랑의 곁에는 이미 온기가 사라지고 없었다. 단지 살짝 구겨진 침대 시트를 통해 어젯밤에 누군가 옆에 누워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그녀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대체 어제 왜 바로 잠이 들었냐는 말이다.물론 오늘 말해도 상관없었다.온하랑은 재빨리 씻고 옷장으로 걸어가서 부승민이 입을 흰색 슈트를 골라주었다. 그리고 어쨌거나 임신은 경사스러운 일이라 밝은 톤의 스프라이트 넥타이를 골라 침대맡에 놓았다.아침 조깅을 마친 부승민은 홈웨어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온하랑을 바라보며 손에 든 서류를 내려놓고 말했다.“밥 먹자.”아침 식사를 마치고 온하랑은 심호흡하더니 행복과 기대가 엿보이는 얼굴로 먼저 입을 열었다.“오빠한테 할 말이 있어.”둘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 부승민도 기뻐하겠지?“나도 할 말 있어.”부승민의 어조로 사뭇 가라앉았다.“그럼 오빠 먼저 해.”온하랑의 해맑은 미소에는 수줍음이 살짝 묻어났다.“온하랑, 우리... 이혼하자.”부승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들고 건네주었다.“이건 이혼 합의서야. 우선 읽어보고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최선을 다해 만족시켜 줄 테니까.”온하랑의 심장이 털컥 내려앉았고,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부승민을 멍하니 바라봤다.이내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니냐는 의심마저 들었다.한참이
3년 동안 두 사람의 사이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여느 평범한 부부와 다를 바 없었다.매일 아침 온하랑은 그의 슈트와 넥타이를 고르고, 함께 집을 나서 사무실로 출근했다.저녁 약속이 있을 때면 미리 알려주고, 취침 전에 루틴대로 스트레칭하고 샤워도 같이했다. 그리고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하는 굿나잇 키스도 있었다.결혼기념일이나 밸런타인데이, 생일 선물도 놓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그녀가 원하는 게 무엇이든 부승민은 전부 다 들어줬다.로맨틱함은 물론 이벤트까지 챙겨주지 않았는가?그는 완벽한 남편으로서 해야 할 일은 다 했다.심지어 앞으로 이렇게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하지만 추서윤이 돌아온 이상 모든 걸 끝내야 하는 시점이 다가왔다.그렇다면 어제 휴대폰에서 들려왔던 여자 목소리의 주인이 추서윤이라는 뜻인가?둘이 이미 연락을 주고받은 건가?설마 출장 간 한 달 동안 줄곧 함께 붙어 있었던 건 아니겠지?어제 같이 귀국해서 밤에 추서윤과 있다가 늦게 돌아왔단 말인가?이런저런 생각에 온하랑은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부승민 때문에 심장을 후벼파는 고통이 느껴져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온하랑, 걱정하지 마. 설령 이혼한다고 해도 우린 한 가족이야. 내가 제일 아끼는 여동생인 건 변함없어.”여동생이라니?3년의 결혼 생활 동안 같은 침대에 누워 함께 잠을 청했는데, 결국에는 여동생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인 건가?그녀는 결코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건 그때 가서 얘기해.”온하랑은 속으로 자조적인 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숙이고 대충 얼버무렸다.부승민이 손을 뻗어 옷깃을 잡아당기더니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참, 아까 무슨 말 하고 싶었던 거야?”온하랑은 무심하게 손에 든 서류를 넘기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아무것도 아니야. 다음 시즌 뉴컬렉션이 출시할 계획인데 아직 결정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오빠랑 상의하고 싶었어. 하지만 지금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거든.”어떤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