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연은 잠옷을 꺼내 아무렇게나 몸에 걸치고는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누가 알기나 했을까, 땅에 발이 닿자마자 다리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 다시 침대로 털썩 넘어질 줄은.김시연은 연신 속으로 연도진을 개자식이라고 욕하며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벽을 짚고 일어나 새 옷을 가지고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조심조심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이번에 하도 폭식을 한 탓에 제대로 질려버린 김시연은 생각했다. 앞으로 꽤 긴 시간 동안은 ‘고기’ 생각은 하지도 않을 것이라고.욕실까지 두 걸음 정도 남았을 때 갑자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문을 열고 들어오는 연도진의 손에는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방 중앙에 서 있는 김시연을 보고는 작게 웃었다. “깼어? 내 예상보다 더 일찍 깼네, 마침 너 먹이려고 점심 포장해왔는데.”그 미소속에는 쉽게 알아챌 수는 없지만 잘 보이려는 속셈이 분명히 녹아있었다.김시연은 차갑게 웃으며 대꾸했다. “너 아침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 왜 아직도 안 갔어?”연도진이 대답했다. “일정 조절했어.”“아 그래? 난 또 네가 나 먹고 버린 줄 알았지.”“내가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인 줄 알아?”연도진은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2인분의 포장 용기를 꺼냈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볶음밥으로 포장해왔는데, 배고프지?”말이 끝나기 바쁘게 김시연은 자신의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를 들었다.김시연은 자신의 위를 어루만지고는 계속해서 욕실로 향했다. “일단 거기 둬. 나 아직 못 씻었어.”연도진은 그런 김시연의 모습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뱉고 말았다. “너 지금 이대로라면 걷는 거 너무 느려.”“연도진…”김시연이 걸음이 늦은 게 누구 탓이던가?김시연이 아무리 제지를 해도 연도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김시연을 안아다 욕실까지 데려다주었다. “됐어, 이제 씻어.”“...”김시연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거라곤 목이며 쇄골이며 어깨며 할 것 없이 군데군데 늘어난 키스 마크들이었다.
“승민아, 내 컴퓨터 아직도 다 수리 못 했대?”온하랑의 컴퓨터가 고장 난 걸 알게 된 비서가 온하랑의 카카오톡으로 파일을 보내왔다. 하지만 휴대폰으로 검토하려니 여러모로 불편했다. 그래서 배를 매만지며 서재로 와서 물었고 그 모습을 본 부승민이 부축하면서 말했다.“글쎄, 연 비서한테 전화해서 물어볼 테니 먼저 내 컴퓨터로 해.”“내가 너 일하는 데 방해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괜찮아, 편하게 써.”부승민은 온하랑을 부축해서 의자에 앉힌 뒤, 한 손을 등받이에 올려놓고 다른 한 손으로 마우스를 잡고 업무를 보던 페이지를 하나둘 꺼버렸다. “고마워.”마우스를 건네받은 온하랑이 카카오톡에 로그인하려고 하자 이미 로그인된 부승민의 아이디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하랑은 BX그룹의 일원으로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부승민을 지켜보았기에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부승민은 업무를 볼 때 주로 메일을 사용하거나 직접 전화를 걸었다. 아무리 급하더라도 카카오톡보다는 연구개발 센터에서 만들어낸 BX그룹 직원 전용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했다.컴퓨터로 카카오톡에 로그인할 리 없다는 예상과 달리, 부승민은 연 비서와 카카오톡을 통해 연락했다. 연 비서는 평소에 곧바로 부승민한테 전화를 걸어 보고했었다.이때 부승민이 차분하게 물었다.“왜 그래?”온하랑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카카오톡 메시지를 훔쳐볼까 봐 겁나지도 않아? 이렇게 순순히 컴퓨터를 내어줄 리 없는데...”“보고 싶으면 봐도 돼.”부승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난 당당하니까 두렵지 않아. 정말 너한테 무언가를 숨기고 싶었다면 카카오톡에 증거를 남기지 않았겠지.”“그건 그래.”온하랑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부승민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지난번에 추서윤과 연관된 일에서도 부승민은 어쩔 수 없었다고 했지만 온하랑은 여태껏 부승민이 말한 사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지금도 그 일에 대해 해명하지 않았다.온하랑은 복잡한 생각을 뒤로 하고 부승민의 아이디를 로그아웃했고
[부승민: 조사해 보고 찾아내서 누가 지시한 건지 알아내.][연민우: 알겠어요.]씻고 나온 온하랑은 배에 튼살이 생기지 않도록 에센스 오일을 잘 발라주었다. 얼굴에 남아있던 흉터는 긴 시간 동안 세럼을 발라준 덕에 말끔히 사라졌다. 이때 카카오톡 문자 알림음이 울렸지만 온하랑은 신경 쓰지 않고 배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매만졌다.알림음이 또다시 울리자 온하랑은 손을 닦고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문자를 보낸 사람은 서우현이었고 온하랑은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추서윤이 죽은 뒤에 연락하고 나서 지금까지 무소식이었다. 추서윤은 죽기 전날, 아버지의 죽음에 숨겨진 사실이 있었고 자신도 이용당했다고 온하랑한테 말했었다. 더 자세한 얘기를 듣기 위해 만나려 했지만 그다음 날 추서윤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추서윤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단서는 끊어졌고 추서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한 셈이었다. 구치소에 있던 추서윤을 죽인 범인 배후에는 큰 세력이 뒷받침했을 것이고 상상하지 못할 이익을 두고 싸움이 벌어진 것이 확실했다.온하랑은 상대가 눈치채서 자신을 해하려 들까 봐 이 일에 대해 모르는 척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서우현을 고용해서 추서윤에 관한 일을 조용히 알아보라고 했고 시간은 몇 년이 걸려도 괜찮다고 했다. 몇 달이 지난 지금, 온하랑은 서우현이 단서를 찾아서 연락한 줄 알고 재빨리 대화창을 클릭했다. 하지만 서우현이 보낸 사진 두 장이 어딘가 이상했다.‘내 사진인 것 같은데, 왜 이걸 보낸 거지?’온하랑이 미간을 찌푸린 채 사진을 클릭하자 임신부처럼 보이는 온하랑이 거리에서 걷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 속 배경은 강남시가 아니었고 지금보다 더 앳된 모습이 담겨 있었는데 대학생 때 찍힌 사진 같았다. 그래서 온하랑은 누군가 사진을 합성한 줄 알았다. 두 번째 사진으로 넘기자 첫 번째 사진보다 배가 더 불렀고 만삭인 것 같았다. 간호사가 지나가는 복도에서 찍은 이 사진은 병원에서 찍은 것이 분명했다. 온하랑은 서우현의 의도가 궁금해서 물음표를 전송했
‘이게 뭐지?’경악도 잠깐일 뿐 온하랑은 사진 속에 숨겨진 포토샵의 흔적을 찾기 위해 뚫어져라 핸드폰을 쳐다봤다.그러나 예상과 달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베테랑 포토그래퍼의 작품이라도 해도 믿을 정도로 모든 게 자연스러웠고 살짝 젖어있는 듯한 아기의 머리카락마저도 생동감이 넘쳤다.어쩌면 딥페이크로 얼굴 바꿔치기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별안간 온하랑의 머릿속에 스쳤다.그녀는 재빨리 핸드폰으로 앱 하나를 다운받았다.이 앱은 파일의 내부 세부 사항을 검사하고 이미지의 원본 출처를 분석하여 진위 여부를 테스트하는 용도로 사용된다.온하랑은 사진을 저장하여 앱에 불러넣었다.그러나 곧이어 눈앞에 펼쳐진 결과에 할 말을 잃었다.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사진 두 장도 넣어보았으나 결과는 다를 바가 없었다.믿기지 않는 현실에 머릿속이 텅 비었고 표정마저 잔뜩 굳어졌다.세 장의 사진은 모두 원본이며 그 어떤 포토샵의 흔적도 없었다.앱에 떠오른 정보로 봤을 때 세 장 모두 5년 전의 사진이었다. 날짜는 달랐지만 모두 온하랑이 필라시에 있었을 때와 일치했다.특히나 마지막 사진은 촬영일이 6월 28일인데, 아마 출산일이었을 것이다.온하랑은 기억을 더듬어 본인이 8월 말에 귀국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당시 그녀는 조부모님께 여름 캠프에 참가한다고 얘기했는데 실은 교통사고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었다.그 기억만큼은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수술을 마쳤을 때 온하랑은 모든 기억을 잃은 상태였고 낯선 나라, 낯선 병원에서 눈을 떴다.그녀의 기억은 필라시로 떠나기 전 그곳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여러 가지 꿀팁을 찾았던 그 순간에 머물러 있었다.나중에 의사를 통해 필라시인 걸 알게 되었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일시적인 충격에 기억을 잃었다고 한다.온하랑은 자신에게 기억상실증 같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핸드폰에는 펜베티아 대학교에서 찍은 사진과 발급받은 인증서 사진이 남아있었다. 학점 표까지
그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인 부승민이 아니다.“같이 가자. 마음이 안 놓여서 그래.”부선월이 어딘가에 숨어서 지켜볼 수 있는 상황에 그녀를 위험을 빠뜨릴 수는 없었다.부승민의 고집을 꺾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온하랑도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지만 사진 속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라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누군가의 악의 섞인 장난일 수도 있기에 헛된 생각하지 말자고 수없이 다짐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자신의 몸과 뱃속의 아이에 집중해야 할 시기인 만큼 좋은 기분으로 새 생명을 맞이하는 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그러나 아무리 자기암시를 해도 여전히 헛된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그렇게 온하랑은 잠을 설쳤다.다음날 부승민은 양현수에게 연락했다. 운전대를 잡은 양현수의 곁에는 여자 경호원이 앉아 있었고 그들의 뒤를 지키는 차에도 경호원이 가득 배치되었다.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서야 온하랑은 비로소 차에 올랐다.이 상황이 웃긴지 온하랑은 미소를 머금고 부승민을 바라봤다.“왜 이렇게 난리야. 누가 보면 황금알을 임신한 줄 알겠어.”“말이 너무 심하네. 걱정돼서 이러는 거잖아.”이번 정기검진에는 체중, 혈압, 혈액검사를 제외하고 초음파도 포함되어 있었다.초음파실 입구에는 경호원이 지키고 있었다.부승민이 초음파실에 발을 딛은 순간 온하랑이 재빨리 몸을 돌려 손을 가로저었다.“그만. 넌 밖에서 기다려.”부승민은 어리둥절했다.“왜? 난 들어가도 되잖아.”그동안 검사를 받을 때마다 부승민은 줄곧 온하랑의 곁을 지켰고 가끔 의사가 초음파 화면을 가리키며 아이의 모습을 보여주곤 했었다.“내가 싫다고 하면 그냥 안 되는 거야.”온하랑은 그를 힐끗 째려보고선 일부러 진지하게 얘기했다.“의사 선생님한테 개인적으로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아무리 진지하게 말한다 한들 부승민의 눈에는 그저 귀여워 보였다. 애교 섞인 목소리에 똘망똘망 반짝이는 두 눈이 더해지자 비밀보다는 생리적인 문제로 의사한테 뭔가를 여쭤보고 싶은 모습이었다.
온하랑을 클래식 캐슬까지 바래다준 부승민은 그녀에게 푹 쉬라고 당부하고 회사로 향했다.대표 사무실. 연민우가 노크하고선 안으로 들어왔다.“대표님, 메일 발신자와 이 사건을 퍼뜨린 당사자를 잡았습니다.”부승민은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차분하게 물었다.“자백했어?”“네. 미끼를 던지니까 바로 물었습니다.”“뭐래?”“진술에 따르면 어느 날 낯선 라인 계정으로 친구 추가 요청을 받았다고 합니다. 신변 보호는 확실하게 해줄 테니 시키는 대로만 하면 문제없다고 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 것 같습니다. 실명 인증을 받은 계정이라 저희가 따로 조사해 봤는데 소유주는 서천우, 올해 일곱 살입니다...”“서천우...”부승민은 익숙한 이름에 흠칫하고선 여러 번 되뇌였다.그 반응에 연민우는 쭈뼛거리며 말을 이었다.“서정훈 의원님의 둘째 손자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서 의원님의 아들인 서상원입니다...”자기가 대단한 사람인양 허세를 부리는 건 어린아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이다.하지만 그 아이가 서천우라면 이 일의 배후에 이엘리아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부승민은 몇초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의원님 비서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직접 의원님 찾아뵐 생각이니까 사전에 선물 준비하고.”“알겠습니다.”...집에 돌아온 온하랑은 소파에 앉아 핸드폰 속의 사진을 멍하니 바라봤다.‘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서우현과의 대화창을 열어봤지만 아직 그 어떤 답장도 받지 못했다.참다못한 온하랑은 그의 연락처를 알아내 전화를 걸었다.얼마 후 통화가 연결되었고 핸드폰 너머로 서우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하랑 씨?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던 참이었어요.”이를 들은 온하랑은 다짜고짜 물었다.“저한테요? 무슨일로요?”“몇 달 전에 알아봐달라고 부탁하신 일 있잖아요. 단서를 찾았어요.”온하랑은 긴장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설마 추서윤...”“맞아요. 제가 섣불리 움직이면 꼬리가 잡힐 수도 있어서 일부러 부하한테 시켰어요. 추서윤
사실 이 내용만 들어보면 별 의미가 없다.식당 사장의 말을 토대로 추측하면 온강호가 사고를 당한 시간과 대략 일치한다. 당시 추서윤은 부승민과 만나고 있었으니 마스크를 쓴 남자가 추서윤의 남자 친구일 리가 없다.두 사람이 몰래 인적 드문 골목에서 만났으니 의심을 살 만도 하다.온하랑을 계속하여 물었다.“또 있어요? 그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고 있대요?”서우현은 한숨을 내쉬었다.“너무 오래된 일이라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했어요. 180cm의 키에 다부진 몸매를 가졌는데 나이는 20대로 보였대요.”180cm의 키에 균형 잡힌 몸매를 가진 남자는 길거리에 널리고 널렸다.“어쨌든 이제 단서도 보이기 시작하니 계속 알아봐 줘요.”실마리를 따라 조사하다 보면 반드시 더 많은 목격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그 남자가 골목에서 증발하지 않은 한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반드시 진실은 드러나게 된다.“알겠어요.”서우현은 곧바로 답했다.“아참, 무슨 일로 저한테 연락하려고 했어요?”온하랑은 그제야 자신이 연락하려던 목적이 생각났다.“어제 보낸 사진은 뭐예요? 누구한테서 얻은 거예요?”서우현은 당황해하며 물었다.“사진이요? 제가 사진을 보냈어요?”“어젯밤에 보냈잖아요.”“어젯밤이요?”서우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어제 저녁 먹으러 나갔다가 핸드폰을 잃어버렸어요. 오늘 아침에 경찰서에서 핸드폰 찾으러 오라고 연락왔는데... 설마 그사이에 누군가 사진을 보냈다는 거예요? 그럼 잃어버린 게 아니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훔쳤다는 거네요?”온하랑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그럴지도 모르겠네요.”“실례가 안 된다면 어떤 사진인지 물어봐도 될까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 일단 누가 핸드폰 훔쳤는지부터 조사해 봐요.”“네, 지금 바로 경찰서로 가서 알아봐야겠어요.”전화를 끊은 온하랑은 한숨이 나왔다.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었고 두통이 밀려와 어지러웠다.무거운 배를 잡고 간신히 일어선 그녀는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으나 좀처럼 진정
통증이 지나간 뒤에도 머리는 여전히 어지러웠고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온하랑은 애써 복잡한 생각을 집어던지고 이불을 덮고선 눈을 꼭 감고 잠을 청했다.오랫동안 뒤척이다가 결국 잠이 들었는데 금방이라도 깨어날 듯 깊게 잠들지 못했다.흐릿한 장면들이 하나둘씩 뇌리를 스쳐갔고 온하랑은 손에 잡히지 않는 뭔가를 잡으려 발버둥 쳤다.잠에서 깨어났을 땐 개운하긴커녕 전보다 더 피곤함을 느꼈다.점심을 다 차려놓은 아주머니는 방문을 두드리며 온하랑에게 밥을 먹으라고 했다침대에서 일어날 힘조자 없었던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아주머니에게 점심을 방까지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입맛이 없었지만 아이를 생각해 대충 배를 채웠다.젓가락을 내려놓은 온하랑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국제번호로 전화를 걸었다.통화가 연결되자마자 핸드폰 너머로 친숙한 벨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네가 웬일로 전화했지? 요즘 잘 지내?”“일도 많이 줄었고, 배가 많이 나와서 몸이 힘든 것 말고는 별일 없어. 너는 어때?”“난 아도니스랑 여행 중이야. 지금 바닷가 근처인데 엄청 예뻐.”“좋겠네.”온하랑은 부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여행하는 거 좋아하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같이 가자.”“기억해? 우리 졸업하고 나서 같이 여행 가기로 했잖아. 그런데 갑자기 귀국하자마자 연락이 안 될 줄 누가 알았겠어.”“갑자기 귀국한 후로 연락이 안 됐다고?”온하랑은 핵심적인 포인트만 잡았다.“응. 학기 말에 시험 준비 때문에 우리가 연락을 자주 한 편은 아니었어. 시험 끝나면 연락하려고 했는데 그 뒤로 아예 안됐던 거지.”“우리가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언제인지 아직 기억해?”벨라는 기억을 더듬었다.“아마 6월 말이었을걸? 그때 네가 많이 아팠잖아...”온하랑은 의아했다.“내가 아팠다고? 어디가?”“프라이버시 때문에 나도 자세하게 묻지는 못했는데 아마 신장 쪽에 문제가 있었을걸? 호르몬제를 복용해서 살이 엄청 쪘잖아.”BX 그룹에 입사한 후 매년 건강 검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
의사는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이, 앞으로는 아내 말 잘 들어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여보, 들었지? 의사 선생님도 그러시잖아!”최동철은 잠시 입을 말없이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봉합이 끝난 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병원을 나서며 설윤은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누가 데리러 와요?”최동철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설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설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요.”그녀는 두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이 작은 도시는 꽤 조용하네요. 며칠 더 머물 생각인데, 동철 씨도 안 간다니까 같이 지낼까요? 서로 보호도 되고.”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호텔은 눈에 띄니까 단기 임대 민박을 찾는 게 더 안전하고 편리할 거예요.”“좋아요.”“근데 검색해 보니까 민박은 대부분 더블침대 방이더라고요. 괜찮으세요?”“설윤 씨가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럼 예약할게요.”최동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거예요?”대부분의 예약 앱은 신분증 정보를 입력해야 해서, 한 번 사용하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설윤은 그의 걱정을 알아채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이 폰은 제 이름으로 등록된 게 아니에요. 추적 못 할 거예요.”최동철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준비가 철저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임가희한테 이렇게 몰렸어요?”“임가희가 이렇게 빨리 제 존재를 눈치챌 줄 몰랐거든요. 그랬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요.”최동철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정보를 넘긴 장본인이 아니라는 듯이.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예약한 민박으로 향했다.민박은 단일 방 구조로, 면적은 47㎡. 방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고 가스레인지
이튿날 아침, 최동철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패딩 점퍼에 청바지, 스니커즈, 그리고 새로 정리한 헤어스타일까지 더해지니 몇 년은 젊어 보였다. 게다가 넉넉한 핏의 패딩은 그의 체형을 자연스럽게 감춰주었다.“자, 마스크도 잊지 말고 쓰세요.”“네.” 최동철은 대답하며 책상 위의 마스크를 집어 썼다.지금 이 모습이라면 자세히 보지 않는 한 그를 알아보긴 어려울 터였다.최동철은 설윤이 입고 있는 패딩 점퍼를 힐끗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설윤은 웃으며 설명했다. “작은 가게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어요. 그리고 커플룩이 신분을 숨기기에 더 좋아요.”“그렇군요.”“제가 먼저 내려가서 체크아웃하고 주변 상황을 살펴볼게요. 연락드리면 그때 내려오세요. 미리 택시도 불러놓을게요.”“알겠습니다.”“그럼 다녀오겠습니다.”“네.”설윤은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나갔는데 가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입었던 옷이 담겨 있었다. 이곳에 그냥 두면 흔적이 남을 수 있어 길 가다 버릴 생각이었다.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설윤은 무사히 로비에 도착해 체크아웃을 마쳤다. 거리로 나서며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면서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길 건너편 왼쪽, 작은 만두 가게에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가게 앞에는 접이식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중 한 테이블에는 건장한 남자가 앉아 가끔씩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그 자리는 아침을 먹으며 호텔을 감시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설윤은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감시자는 그 남자 한 사람뿐인 듯했다.아마도 어젯밤 이들이 호텔 방마다 수색했지만 최동철의 흔적을 찾지 못해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주변을 수색하러 간 모양이었다.2분쯤 지나 설윤이 부른 택시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설윤은 최동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차 문을 열며 짐을 싣다가 말했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 남편이 금방 내려올 거예요.”“네, 알겠습니다.”설윤은 다시 로비로 들어갔다.1분쯤
최동철이 말했다.“그럼 내일 병원에 다녀와야겠어요.”“제가 도와드릴게요.”약을 다 바른 뒤, 설윤은 그에게 거즈를 감아주며 말했다. “됐어요, 이제 좀 쉬세요. 전 잠깐 나갔다 올게요.”“어디 가려고요?” 최동철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임가희 쪽 사람들이랑 마주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요.”“필요한 물건을 좀 사야 하거든요. 걱정 마세요.” 설윤은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 “그 인간들 손아귀에서 도망쳐 나온 제가 다시 잡힐 것 같아요?”최동철은 그녀가 방금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을 힐끗 보며 물었다. “왜 아버지한테 연락해서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 거예요?”“이미 기회를 놓쳤어요. 제가 뭐라 해도 믿지 않을걸요?”“그럼 이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아요?”“당연히 괜찮지 않죠.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어요. 기회만 생기면 반드시 다시 돌아갈 거예요.”“성공하길 바라요.” 최동철이 씩 웃으며 말했다. “돈은 있어요? 부족하면 제 카드를 써요.”설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조금만 써도 돼요?”돈이야 많을 수록 좋은 법이니까.최동철은 벽에 걸린 외투를 가리켰다. “지갑은 저기 외투 주머니에 있으니까 직접 꺼내요. 현금은 많지 않지만 블랙카드는 비밀번호가 필요 없어요. 사람이 적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을 거예요.”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니 고급 가죽의 촉감이 손에 닿았다.“얼마든지 뽑아도 괜찮아요?” 그녀가 돌아보며 물었다.“물론이죠.”“최 대표님, 참 후하시네요.”“제 목숨은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까요.”설윤은 밖으로 나갔다.최동철은 항생제를 먹고 씻은 뒤 침대에 누워 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했던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깨어났다.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였다.설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최동철이 일어나 그녀를 찾으러 갈까 고민하던 찰나, 설윤이 돌아왔다. 그녀는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늦었네요.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없었어요.” 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최동철은 그 말을 듣고 샤워기를 틀었다.설윤은 간식이 담긴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그 위에 놓인 칼을 가렸고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걸어가 문을 여니 예상대로 복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그는 방 안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키우는 햄스터가 실수로 도망쳤는데, 혹시 보셨나요?”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방금 밖에 나갔다 와서요. 잘 모르겠네요. 남편한테 물어봐 드릴게요.”그녀는 욕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 혹시 햄스터가 들어오는 거 봤어?”샤워기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설윤은 욕실 문을 살짝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여보, 작은 햄스터가 들어온 거 못 봤어?”몇 초간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머리를 빼고 남자에게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못 봤대요. 다른 곳도 한번 찾아보세요.”“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남자는 의심 없이 돌아섰다.최동철처럼 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숨겨줄 이는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설윤은 차분히 문을 닫고 귀를 문에 붙여 조심스럽게 소리를 들었다. 남자가 정말로 떠났음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욕실 문을 열며 말했다. “갔으니 나와요.”그리고 테이블로 가서 비닐봉지 안에서 약들을 꺼냈다. “자요, 여기 이 약들이 충분한지 확인해봐요.”최동철은 뒤에서 걸어나와 약의 종류와 양을 살펴봤다. “고마워요.”“별말씀을요.” 설윤은 생수를 주전자에 붓고 버튼을 눌렀다. “제가 약 발라줄까요?”“그럼 부탁할게요. 고마워요.”최동철은 잠시 망설였으나 곧 수락하고 천천히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그가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자 설윤이 다가가 도와주었다. 그녀는 그의 겉옷을 벗기고 벽걸이에 걸었다.안에는 짙은 회색 니트가 있었고 상처 부위는 터져 피로 얼룩져 있었다. 니트를 벗으려면 팔을 들어야 했기에 설윤은 그의 어깨 상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잘라낼까요? 이 옷은 이미 알아본 사람들이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