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연은 잠옷을 꺼내 아무렇게나 몸에 걸치고는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누가 알기나 했을까, 땅에 발이 닿자마자 다리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 다시 침대로 털썩 넘어질 줄은.김시연은 연신 속으로 연도진을 개자식이라고 욕하며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벽을 짚고 일어나 새 옷을 가지고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조심조심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이번에 하도 폭식을 한 탓에 제대로 질려버린 김시연은 생각했다. 앞으로 꽤 긴 시간 동안은 ‘고기’ 생각은 하지도 않을 것이라고.욕실까지 두 걸음 정도 남았을 때 갑자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문을 열고 들어오는 연도진의 손에는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방 중앙에 서 있는 김시연을 보고는 작게 웃었다. “깼어? 내 예상보다 더 일찍 깼네, 마침 너 먹이려고 점심 포장해왔는데.”그 미소속에는 쉽게 알아챌 수는 없지만 잘 보이려는 속셈이 분명히 녹아있었다.김시연은 차갑게 웃으며 대꾸했다. “너 아침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 왜 아직도 안 갔어?”연도진이 대답했다. “일정 조절했어.”“아 그래? 난 또 네가 나 먹고 버린 줄 알았지.”“내가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인 줄 알아?”연도진은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2인분의 포장 용기를 꺼냈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볶음밥으로 포장해왔는데, 배고프지?”말이 끝나기 바쁘게 김시연은 자신의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를 들었다.김시연은 자신의 위를 어루만지고는 계속해서 욕실로 향했다. “일단 거기 둬. 나 아직 못 씻었어.”연도진은 그런 김시연의 모습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뱉고 말았다. “너 지금 이대로라면 걷는 거 너무 느려.”“연도진…”김시연이 걸음이 늦은 게 누구 탓이던가?김시연이 아무리 제지를 해도 연도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김시연을 안아다 욕실까지 데려다주었다. “됐어, 이제 씻어.”“...”김시연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거라곤 목이며 쇄골이며 어깨며 할 것 없이 군데군데 늘어난 키스 마크들이었다.
“승민아, 내 컴퓨터 아직도 다 수리 못 했대?”온하랑의 컴퓨터가 고장 난 걸 알게 된 비서가 온하랑의 카카오톡으로 파일을 보내왔다. 하지만 휴대폰으로 검토하려니 여러모로 불편했다. 그래서 배를 매만지며 서재로 와서 물었고 그 모습을 본 부승민이 부축하면서 말했다.“글쎄, 연 비서한테 전화해서 물어볼 테니 먼저 내 컴퓨터로 해.”“내가 너 일하는 데 방해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괜찮아, 편하게 써.”부승민은 온하랑을 부축해서 의자에 앉힌 뒤, 한 손을 등받이에 올려놓고 다른 한 손으로 마우스를 잡고 업무를 보던 페이지를 하나둘 꺼버렸다. “고마워.”마우스를 건네받은 온하랑이 카카오톡에 로그인하려고 하자 이미 로그인된 부승민의 아이디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하랑은 BX그룹의 일원으로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부승민을 지켜보았기에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부승민은 업무를 볼 때 주로 메일을 사용하거나 직접 전화를 걸었다. 아무리 급하더라도 카카오톡보다는 연구개발 센터에서 만들어낸 BX그룹 직원 전용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했다.컴퓨터로 카카오톡에 로그인할 리 없다는 예상과 달리, 부승민은 연 비서와 카카오톡을 통해 연락했다. 연 비서는 평소에 곧바로 부승민한테 전화를 걸어 보고했었다.이때 부승민이 차분하게 물었다.“왜 그래?”온하랑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카카오톡 메시지를 훔쳐볼까 봐 겁나지도 않아? 이렇게 순순히 컴퓨터를 내어줄 리 없는데...”“보고 싶으면 봐도 돼.”부승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난 당당하니까 두렵지 않아. 정말 너한테 무언가를 숨기고 싶었다면 카카오톡에 증거를 남기지 않았겠지.”“그건 그래.”온하랑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부승민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지난번에 추서윤과 연관된 일에서도 부승민은 어쩔 수 없었다고 했지만 온하랑은 여태껏 부승민이 말한 사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지금도 그 일에 대해 해명하지 않았다.온하랑은 복잡한 생각을 뒤로 하고 부승민의 아이디를 로그아웃했고
[부승민: 조사해 보고 찾아내서 누가 지시한 건지 알아내.][연민우: 알겠어요.]씻고 나온 온하랑은 배에 튼살이 생기지 않도록 에센스 오일을 잘 발라주었다. 얼굴에 남아있던 흉터는 긴 시간 동안 세럼을 발라준 덕에 말끔히 사라졌다. 이때 카카오톡 문자 알림음이 울렸지만 온하랑은 신경 쓰지 않고 배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매만졌다.알림음이 또다시 울리자 온하랑은 손을 닦고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문자를 보낸 사람은 서우현이었고 온하랑은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추서윤이 죽은 뒤에 연락하고 나서 지금까지 무소식이었다. 추서윤은 죽기 전날, 아버지의 죽음에 숨겨진 사실이 있었고 자신도 이용당했다고 온하랑한테 말했었다. 더 자세한 얘기를 듣기 위해 만나려 했지만 그다음 날 추서윤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추서윤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단서는 끊어졌고 추서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한 셈이었다. 구치소에 있던 추서윤을 죽인 범인 배후에는 큰 세력이 뒷받침했을 것이고 상상하지 못할 이익을 두고 싸움이 벌어진 것이 확실했다.온하랑은 상대가 눈치채서 자신을 해하려 들까 봐 이 일에 대해 모르는 척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서우현을 고용해서 추서윤에 관한 일을 조용히 알아보라고 했고 시간은 몇 년이 걸려도 괜찮다고 했다. 몇 달이 지난 지금, 온하랑은 서우현이 단서를 찾아서 연락한 줄 알고 재빨리 대화창을 클릭했다. 하지만 서우현이 보낸 사진 두 장이 어딘가 이상했다.‘내 사진인 것 같은데, 왜 이걸 보낸 거지?’온하랑이 미간을 찌푸린 채 사진을 클릭하자 임신부처럼 보이는 온하랑이 거리에서 걷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 속 배경은 강남시가 아니었고 지금보다 더 앳된 모습이 담겨 있었는데 대학생 때 찍힌 사진 같았다. 그래서 온하랑은 누군가 사진을 합성한 줄 알았다. 두 번째 사진으로 넘기자 첫 번째 사진보다 배가 더 불렀고 만삭인 것 같았다. 간호사가 지나가는 복도에서 찍은 이 사진은 병원에서 찍은 것이 분명했다. 온하랑은 서우현의 의도가 궁금해서 물음표를 전송했
‘이게 뭐지?’경악도 잠깐일 뿐 온하랑은 사진 속에 숨겨진 포토샵의 흔적을 찾기 위해 뚫어져라 핸드폰을 쳐다봤다.그러나 예상과 달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베테랑 포토그래퍼의 작품이라도 해도 믿을 정도로 모든 게 자연스러웠고 살짝 젖어있는 듯한 아기의 머리카락마저도 생동감이 넘쳤다.어쩌면 딥페이크로 얼굴 바꿔치기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별안간 온하랑의 머릿속에 스쳤다.그녀는 재빨리 핸드폰으로 앱 하나를 다운받았다.이 앱은 파일의 내부 세부 사항을 검사하고 이미지의 원본 출처를 분석하여 진위 여부를 테스트하는 용도로 사용된다.온하랑은 사진을 저장하여 앱에 불러넣었다.그러나 곧이어 눈앞에 펼쳐진 결과에 할 말을 잃었다.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사진 두 장도 넣어보았으나 결과는 다를 바가 없었다.믿기지 않는 현실에 머릿속이 텅 비었고 표정마저 잔뜩 굳어졌다.세 장의 사진은 모두 원본이며 그 어떤 포토샵의 흔적도 없었다.앱에 떠오른 정보로 봤을 때 세 장 모두 5년 전의 사진이었다. 날짜는 달랐지만 모두 온하랑이 필라시에 있었을 때와 일치했다.특히나 마지막 사진은 촬영일이 6월 28일인데, 아마 출산일이었을 것이다.온하랑은 기억을 더듬어 본인이 8월 말에 귀국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당시 그녀는 조부모님께 여름 캠프에 참가한다고 얘기했는데 실은 교통사고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었다.그 기억만큼은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수술을 마쳤을 때 온하랑은 모든 기억을 잃은 상태였고 낯선 나라, 낯선 병원에서 눈을 떴다.그녀의 기억은 필라시로 떠나기 전 그곳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여러 가지 꿀팁을 찾았던 그 순간에 머물러 있었다.나중에 의사를 통해 필라시인 걸 알게 되었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일시적인 충격에 기억을 잃었다고 한다.온하랑은 자신에게 기억상실증 같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핸드폰에는 펜베티아 대학교에서 찍은 사진과 발급받은 인증서 사진이 남아있었다. 학점 표까지
그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인 부승민이 아니다.“같이 가자. 마음이 안 놓여서 그래.”부선월이 어딘가에 숨어서 지켜볼 수 있는 상황에 그녀를 위험을 빠뜨릴 수는 없었다.부승민의 고집을 꺾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온하랑도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지만 사진 속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라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누군가의 악의 섞인 장난일 수도 있기에 헛된 생각하지 말자고 수없이 다짐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자신의 몸과 뱃속의 아이에 집중해야 할 시기인 만큼 좋은 기분으로 새 생명을 맞이하는 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그러나 아무리 자기암시를 해도 여전히 헛된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그렇게 온하랑은 잠을 설쳤다.다음날 부승민은 양현수에게 연락했다. 운전대를 잡은 양현수의 곁에는 여자 경호원이 앉아 있었고 그들의 뒤를 지키는 차에도 경호원이 가득 배치되었다.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서야 온하랑은 비로소 차에 올랐다.이 상황이 웃긴지 온하랑은 미소를 머금고 부승민을 바라봤다.“왜 이렇게 난리야. 누가 보면 황금알을 임신한 줄 알겠어.”“말이 너무 심하네. 걱정돼서 이러는 거잖아.”이번 정기검진에는 체중, 혈압, 혈액검사를 제외하고 초음파도 포함되어 있었다.초음파실 입구에는 경호원이 지키고 있었다.부승민이 초음파실에 발을 딛은 순간 온하랑이 재빨리 몸을 돌려 손을 가로저었다.“그만. 넌 밖에서 기다려.”부승민은 어리둥절했다.“왜? 난 들어가도 되잖아.”그동안 검사를 받을 때마다 부승민은 줄곧 온하랑의 곁을 지켰고 가끔 의사가 초음파 화면을 가리키며 아이의 모습을 보여주곤 했었다.“내가 싫다고 하면 그냥 안 되는 거야.”온하랑은 그를 힐끗 째려보고선 일부러 진지하게 얘기했다.“의사 선생님한테 개인적으로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아무리 진지하게 말한다 한들 부승민의 눈에는 그저 귀여워 보였다. 애교 섞인 목소리에 똘망똘망 반짝이는 두 눈이 더해지자 비밀보다는 생리적인 문제로 의사한테 뭔가를 여쭤보고 싶은 모습이었다.
온하랑을 클래식 캐슬까지 바래다준 부승민은 그녀에게 푹 쉬라고 당부하고 회사로 향했다.대표 사무실. 연민우가 노크하고선 안으로 들어왔다.“대표님, 메일 발신자와 이 사건을 퍼뜨린 당사자를 잡았습니다.”부승민은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차분하게 물었다.“자백했어?”“네. 미끼를 던지니까 바로 물었습니다.”“뭐래?”“진술에 따르면 어느 날 낯선 라인 계정으로 친구 추가 요청을 받았다고 합니다. 신변 보호는 확실하게 해줄 테니 시키는 대로만 하면 문제없다고 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 것 같습니다. 실명 인증을 받은 계정이라 저희가 따로 조사해 봤는데 소유주는 서천우, 올해 일곱 살입니다...”“서천우...”부승민은 익숙한 이름에 흠칫하고선 여러 번 되뇌였다.그 반응에 연민우는 쭈뼛거리며 말을 이었다.“서정훈 의원님의 둘째 손자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서 의원님의 아들인 서상원입니다...”자기가 대단한 사람인양 허세를 부리는 건 어린아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이다.하지만 그 아이가 서천우라면 이 일의 배후에 이엘리아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부승민은 몇초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의원님 비서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직접 의원님 찾아뵐 생각이니까 사전에 선물 준비하고.”“알겠습니다.”...집에 돌아온 온하랑은 소파에 앉아 핸드폰 속의 사진을 멍하니 바라봤다.‘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서우현과의 대화창을 열어봤지만 아직 그 어떤 답장도 받지 못했다.참다못한 온하랑은 그의 연락처를 알아내 전화를 걸었다.얼마 후 통화가 연결되었고 핸드폰 너머로 서우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하랑 씨?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던 참이었어요.”이를 들은 온하랑은 다짜고짜 물었다.“저한테요? 무슨일로요?”“몇 달 전에 알아봐달라고 부탁하신 일 있잖아요. 단서를 찾았어요.”온하랑은 긴장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설마 추서윤...”“맞아요. 제가 섣불리 움직이면 꼬리가 잡힐 수도 있어서 일부러 부하한테 시켰어요. 추서윤
사실 이 내용만 들어보면 별 의미가 없다.식당 사장의 말을 토대로 추측하면 온강호가 사고를 당한 시간과 대략 일치한다. 당시 추서윤은 부승민과 만나고 있었으니 마스크를 쓴 남자가 추서윤의 남자 친구일 리가 없다.두 사람이 몰래 인적 드문 골목에서 만났으니 의심을 살 만도 하다.온하랑을 계속하여 물었다.“또 있어요? 그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고 있대요?”서우현은 한숨을 내쉬었다.“너무 오래된 일이라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했어요. 180cm의 키에 다부진 몸매를 가졌는데 나이는 20대로 보였대요.”180cm의 키에 균형 잡힌 몸매를 가진 남자는 길거리에 널리고 널렸다.“어쨌든 이제 단서도 보이기 시작하니 계속 알아봐 줘요.”실마리를 따라 조사하다 보면 반드시 더 많은 목격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그 남자가 골목에서 증발하지 않은 한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반드시 진실은 드러나게 된다.“알겠어요.”서우현은 곧바로 답했다.“아참, 무슨 일로 저한테 연락하려고 했어요?”온하랑은 그제야 자신이 연락하려던 목적이 생각났다.“어제 보낸 사진은 뭐예요? 누구한테서 얻은 거예요?”서우현은 당황해하며 물었다.“사진이요? 제가 사진을 보냈어요?”“어젯밤에 보냈잖아요.”“어젯밤이요?”서우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어제 저녁 먹으러 나갔다가 핸드폰을 잃어버렸어요. 오늘 아침에 경찰서에서 핸드폰 찾으러 오라고 연락왔는데... 설마 그사이에 누군가 사진을 보냈다는 거예요? 그럼 잃어버린 게 아니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훔쳤다는 거네요?”온하랑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그럴지도 모르겠네요.”“실례가 안 된다면 어떤 사진인지 물어봐도 될까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 일단 누가 핸드폰 훔쳤는지부터 조사해 봐요.”“네, 지금 바로 경찰서로 가서 알아봐야겠어요.”전화를 끊은 온하랑은 한숨이 나왔다.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었고 두통이 밀려와 어지러웠다.무거운 배를 잡고 간신히 일어선 그녀는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으나 좀처럼 진정
통증이 지나간 뒤에도 머리는 여전히 어지러웠고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온하랑은 애써 복잡한 생각을 집어던지고 이불을 덮고선 눈을 꼭 감고 잠을 청했다.오랫동안 뒤척이다가 결국 잠이 들었는데 금방이라도 깨어날 듯 깊게 잠들지 못했다.흐릿한 장면들이 하나둘씩 뇌리를 스쳐갔고 온하랑은 손에 잡히지 않는 뭔가를 잡으려 발버둥 쳤다.잠에서 깨어났을 땐 개운하긴커녕 전보다 더 피곤함을 느꼈다.점심을 다 차려놓은 아주머니는 방문을 두드리며 온하랑에게 밥을 먹으라고 했다침대에서 일어날 힘조자 없었던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아주머니에게 점심을 방까지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입맛이 없었지만 아이를 생각해 대충 배를 채웠다.젓가락을 내려놓은 온하랑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국제번호로 전화를 걸었다.통화가 연결되자마자 핸드폰 너머로 친숙한 벨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네가 웬일로 전화했지? 요즘 잘 지내?”“일도 많이 줄었고, 배가 많이 나와서 몸이 힘든 것 말고는 별일 없어. 너는 어때?”“난 아도니스랑 여행 중이야. 지금 바닷가 근처인데 엄청 예뻐.”“좋겠네.”온하랑은 부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여행하는 거 좋아하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같이 가자.”“기억해? 우리 졸업하고 나서 같이 여행 가기로 했잖아. 그런데 갑자기 귀국하자마자 연락이 안 될 줄 누가 알았겠어.”“갑자기 귀국한 후로 연락이 안 됐다고?”온하랑은 핵심적인 포인트만 잡았다.“응. 학기 말에 시험 준비 때문에 우리가 연락을 자주 한 편은 아니었어. 시험 끝나면 연락하려고 했는데 그 뒤로 아예 안됐던 거지.”“우리가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언제인지 아직 기억해?”벨라는 기억을 더듬었다.“아마 6월 말이었을걸? 그때 네가 많이 아팠잖아...”온하랑은 의아했다.“내가 아팠다고? 어디가?”“프라이버시 때문에 나도 자세하게 묻지는 못했는데 아마 신장 쪽에 문제가 있었을걸? 호르몬제를 복용해서 살이 엄청 쪘잖아.”BX 그룹에 입사한 후 매년 건강 검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