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지금은 고기 맛이 영 별로네.”김시연은 체념한 듯 한숨을 쉬었다. 점점 더 위험해지는 연도진의 눈은 애초에 보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김시연은 느끼는 바가 많았다. “음... 고등학생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성장은 했어. 근데 동시에 퇴보했어.”김시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연도진에게서 떨어지려고 할 때 억센 손아귀가 그녀를 잡아 침대로 눕혔다.김시연은 너무 놀라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한바탕 야단법석을 떨고 난 후 제정신이 들었을 때 김시연은 천장이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도 정신없이 돌아가는 나머지 괴로울 정도였다.“도진아, 너... 이러지 마, 잠깐만... 멈춰 제발!”연도진은 잔뜩 가라앉은 얼굴로 아래턱에 힘을 잔뜩 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던 땀방울은 어느새 흥건히 이마를 적셨고 땀 줄기가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네가 원하던 게 이런 거 아니었어?” 연도진은 낮게 읊조렸다.“아니야... 내가 잘못했어...”그 순간, 김시연은 자신이 바다에 내던져진 작은 조각배 같다고 생각했다. 바다의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고 이따금 매서운 파도가 덮쳐오기도 했다. 항행할수록 파도는 더 심해졌고 결국 김시연의 온몸을 적셔 물기가 뚝뚝 떨어지게 했다. 끝끝내 거센 바다의 폭풍을 견뎌내지 못한 김시연은 울먹이며 연도진의 팔뚝을 잡았다. “도진아, 멈춰... 나 못 참겠어... 나 진짜 못 참겠어.”배가 항행을 너무 빨리한 것이다.연도진의 목울대가 또 한 번 세차게 요동친다.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풀고 배의 항행속도를 늦추며 물었다. “지금 고기가 맛이 영 별로야?”“맛있어, 맛있고말고!” 김시연은 놓칠세라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나.”“내가 퇴보를 했어?”“아니야! 어떻게 그러지? 퇴보는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엄청나게 진보했는걸!”“엄청나게? 그게 어떤 정도지?”김시연은 정말 한마디 톡 쏘아붙이고 싶었다. 딱 네 그릇만큼.하지만 아
김시연은 잠옷을 꺼내 아무렇게나 몸에 걸치고는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누가 알기나 했을까, 땅에 발이 닿자마자 다리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 다시 침대로 털썩 넘어질 줄은.김시연은 연신 속으로 연도진을 개자식이라고 욕하며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벽을 짚고 일어나 새 옷을 가지고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조심조심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이번에 하도 폭식을 한 탓에 제대로 질려버린 김시연은 생각했다. 앞으로 꽤 긴 시간 동안은 ‘고기’ 생각은 하지도 않을 것이라고.욕실까지 두 걸음 정도 남았을 때 갑자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문을 열고 들어오는 연도진의 손에는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방 중앙에 서 있는 김시연을 보고는 작게 웃었다. “깼어? 내 예상보다 더 일찍 깼네, 마침 너 먹이려고 점심 포장해왔는데.”그 미소속에는 쉽게 알아챌 수는 없지만 잘 보이려는 속셈이 분명히 녹아있었다.김시연은 차갑게 웃으며 대꾸했다. “너 아침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 왜 아직도 안 갔어?”연도진이 대답했다. “일정 조절했어.”“아 그래? 난 또 네가 나 먹고 버린 줄 알았지.”“내가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인 줄 알아?”연도진은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2인분의 포장 용기를 꺼냈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볶음밥으로 포장해왔는데, 배고프지?”말이 끝나기 바쁘게 김시연은 자신의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를 들었다.김시연은 자신의 위를 어루만지고는 계속해서 욕실로 향했다. “일단 거기 둬. 나 아직 못 씻었어.”연도진은 그런 김시연의 모습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뱉고 말았다. “너 지금 이대로라면 걷는 거 너무 느려.”“연도진…”김시연이 걸음이 늦은 게 누구 탓이던가?김시연이 아무리 제지를 해도 연도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김시연을 안아다 욕실까지 데려다주었다. “됐어, 이제 씻어.”“...”김시연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거라곤 목이며 쇄골이며 어깨며 할 것 없이 군데군데 늘어난 키스 마크들이었다.
“승민아, 내 컴퓨터 아직도 다 수리 못 했대?”온하랑의 컴퓨터가 고장 난 걸 알게 된 비서가 온하랑의 카카오톡으로 파일을 보내왔다. 하지만 휴대폰으로 검토하려니 여러모로 불편했다. 그래서 배를 매만지며 서재로 와서 물었고 그 모습을 본 부승민이 부축하면서 말했다.“글쎄, 연 비서한테 전화해서 물어볼 테니 먼저 내 컴퓨터로 해.”“내가 너 일하는 데 방해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괜찮아, 편하게 써.”부승민은 온하랑을 부축해서 의자에 앉힌 뒤, 한 손을 등받이에 올려놓고 다른 한 손으로 마우스를 잡고 업무를 보던 페이지를 하나둘 꺼버렸다. “고마워.”마우스를 건네받은 온하랑이 카카오톡에 로그인하려고 하자 이미 로그인된 부승민의 아이디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하랑은 BX그룹의 일원으로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부승민을 지켜보았기에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부승민은 업무를 볼 때 주로 메일을 사용하거나 직접 전화를 걸었다. 아무리 급하더라도 카카오톡보다는 연구개발 센터에서 만들어낸 BX그룹 직원 전용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했다.컴퓨터로 카카오톡에 로그인할 리 없다는 예상과 달리, 부승민은 연 비서와 카카오톡을 통해 연락했다. 연 비서는 평소에 곧바로 부승민한테 전화를 걸어 보고했었다.이때 부승민이 차분하게 물었다.“왜 그래?”온하랑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카카오톡 메시지를 훔쳐볼까 봐 겁나지도 않아? 이렇게 순순히 컴퓨터를 내어줄 리 없는데...”“보고 싶으면 봐도 돼.”부승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난 당당하니까 두렵지 않아. 정말 너한테 무언가를 숨기고 싶었다면 카카오톡에 증거를 남기지 않았겠지.”“그건 그래.”온하랑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부승민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지난번에 추서윤과 연관된 일에서도 부승민은 어쩔 수 없었다고 했지만 온하랑은 여태껏 부승민이 말한 사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지금도 그 일에 대해 해명하지 않았다.온하랑은 복잡한 생각을 뒤로 하고 부승민의 아이디를 로그아웃했고
[부승민: 조사해 보고 찾아내서 누가 지시한 건지 알아내.][연민우: 알겠어요.]씻고 나온 온하랑은 배에 튼살이 생기지 않도록 에센스 오일을 잘 발라주었다. 얼굴에 남아있던 흉터는 긴 시간 동안 세럼을 발라준 덕에 말끔히 사라졌다. 이때 카카오톡 문자 알림음이 울렸지만 온하랑은 신경 쓰지 않고 배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매만졌다.알림음이 또다시 울리자 온하랑은 손을 닦고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문자를 보낸 사람은 서우현이었고 온하랑은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추서윤이 죽은 뒤에 연락하고 나서 지금까지 무소식이었다. 추서윤은 죽기 전날, 아버지의 죽음에 숨겨진 사실이 있었고 자신도 이용당했다고 온하랑한테 말했었다. 더 자세한 얘기를 듣기 위해 만나려 했지만 그다음 날 추서윤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추서윤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단서는 끊어졌고 추서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한 셈이었다. 구치소에 있던 추서윤을 죽인 범인 배후에는 큰 세력이 뒷받침했을 것이고 상상하지 못할 이익을 두고 싸움이 벌어진 것이 확실했다.온하랑은 상대가 눈치채서 자신을 해하려 들까 봐 이 일에 대해 모르는 척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서우현을 고용해서 추서윤에 관한 일을 조용히 알아보라고 했고 시간은 몇 년이 걸려도 괜찮다고 했다. 몇 달이 지난 지금, 온하랑은 서우현이 단서를 찾아서 연락한 줄 알고 재빨리 대화창을 클릭했다. 하지만 서우현이 보낸 사진 두 장이 어딘가 이상했다.‘내 사진인 것 같은데, 왜 이걸 보낸 거지?’온하랑이 미간을 찌푸린 채 사진을 클릭하자 임신부처럼 보이는 온하랑이 거리에서 걷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 속 배경은 강남시가 아니었고 지금보다 더 앳된 모습이 담겨 있었는데 대학생 때 찍힌 사진 같았다. 그래서 온하랑은 누군가 사진을 합성한 줄 알았다. 두 번째 사진으로 넘기자 첫 번째 사진보다 배가 더 불렀고 만삭인 것 같았다. 간호사가 지나가는 복도에서 찍은 이 사진은 병원에서 찍은 것이 분명했다. 온하랑은 서우현의 의도가 궁금해서 물음표를 전송했
‘이게 뭐지?’경악도 잠깐일 뿐 온하랑은 사진 속에 숨겨진 포토샵의 흔적을 찾기 위해 뚫어져라 핸드폰을 쳐다봤다.그러나 예상과 달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베테랑 포토그래퍼의 작품이라도 해도 믿을 정도로 모든 게 자연스러웠고 살짝 젖어있는 듯한 아기의 머리카락마저도 생동감이 넘쳤다.어쩌면 딥페이크로 얼굴 바꿔치기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별안간 온하랑의 머릿속에 스쳤다.그녀는 재빨리 핸드폰으로 앱 하나를 다운받았다.이 앱은 파일의 내부 세부 사항을 검사하고 이미지의 원본 출처를 분석하여 진위 여부를 테스트하는 용도로 사용된다.온하랑은 사진을 저장하여 앱에 불러넣었다.그러나 곧이어 눈앞에 펼쳐진 결과에 할 말을 잃었다.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사진 두 장도 넣어보았으나 결과는 다를 바가 없었다.믿기지 않는 현실에 머릿속이 텅 비었고 표정마저 잔뜩 굳어졌다.세 장의 사진은 모두 원본이며 그 어떤 포토샵의 흔적도 없었다.앱에 떠오른 정보로 봤을 때 세 장 모두 5년 전의 사진이었다. 날짜는 달랐지만 모두 온하랑이 필라시에 있었을 때와 일치했다.특히나 마지막 사진은 촬영일이 6월 28일인데, 아마 출산일이었을 것이다.온하랑은 기억을 더듬어 본인이 8월 말에 귀국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당시 그녀는 조부모님께 여름 캠프에 참가한다고 얘기했는데 실은 교통사고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었다.그 기억만큼은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수술을 마쳤을 때 온하랑은 모든 기억을 잃은 상태였고 낯선 나라, 낯선 병원에서 눈을 떴다.그녀의 기억은 필라시로 떠나기 전 그곳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여러 가지 꿀팁을 찾았던 그 순간에 머물러 있었다.나중에 의사를 통해 필라시인 걸 알게 되었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일시적인 충격에 기억을 잃었다고 한다.온하랑은 자신에게 기억상실증 같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핸드폰에는 펜베티아 대학교에서 찍은 사진과 발급받은 인증서 사진이 남아있었다. 학점 표까지
그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인 부승민이 아니다.“같이 가자. 마음이 안 놓여서 그래.”부선월이 어딘가에 숨어서 지켜볼 수 있는 상황에 그녀를 위험을 빠뜨릴 수는 없었다.부승민의 고집을 꺾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온하랑도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지만 사진 속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라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누군가의 악의 섞인 장난일 수도 있기에 헛된 생각하지 말자고 수없이 다짐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자신의 몸과 뱃속의 아이에 집중해야 할 시기인 만큼 좋은 기분으로 새 생명을 맞이하는 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그러나 아무리 자기암시를 해도 여전히 헛된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그렇게 온하랑은 잠을 설쳤다.다음날 부승민은 양현수에게 연락했다. 운전대를 잡은 양현수의 곁에는 여자 경호원이 앉아 있었고 그들의 뒤를 지키는 차에도 경호원이 가득 배치되었다.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서야 온하랑은 비로소 차에 올랐다.이 상황이 웃긴지 온하랑은 미소를 머금고 부승민을 바라봤다.“왜 이렇게 난리야. 누가 보면 황금알을 임신한 줄 알겠어.”“말이 너무 심하네. 걱정돼서 이러는 거잖아.”이번 정기검진에는 체중, 혈압, 혈액검사를 제외하고 초음파도 포함되어 있었다.초음파실 입구에는 경호원이 지키고 있었다.부승민이 초음파실에 발을 딛은 순간 온하랑이 재빨리 몸을 돌려 손을 가로저었다.“그만. 넌 밖에서 기다려.”부승민은 어리둥절했다.“왜? 난 들어가도 되잖아.”그동안 검사를 받을 때마다 부승민은 줄곧 온하랑의 곁을 지켰고 가끔 의사가 초음파 화면을 가리키며 아이의 모습을 보여주곤 했었다.“내가 싫다고 하면 그냥 안 되는 거야.”온하랑은 그를 힐끗 째려보고선 일부러 진지하게 얘기했다.“의사 선생님한테 개인적으로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아무리 진지하게 말한다 한들 부승민의 눈에는 그저 귀여워 보였다. 애교 섞인 목소리에 똘망똘망 반짝이는 두 눈이 더해지자 비밀보다는 생리적인 문제로 의사한테 뭔가를 여쭤보고 싶은 모습이었다.
온하랑을 클래식 캐슬까지 바래다준 부승민은 그녀에게 푹 쉬라고 당부하고 회사로 향했다.대표 사무실. 연민우가 노크하고선 안으로 들어왔다.“대표님, 메일 발신자와 이 사건을 퍼뜨린 당사자를 잡았습니다.”부승민은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차분하게 물었다.“자백했어?”“네. 미끼를 던지니까 바로 물었습니다.”“뭐래?”“진술에 따르면 어느 날 낯선 라인 계정으로 친구 추가 요청을 받았다고 합니다. 신변 보호는 확실하게 해줄 테니 시키는 대로만 하면 문제없다고 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 것 같습니다. 실명 인증을 받은 계정이라 저희가 따로 조사해 봤는데 소유주는 서천우, 올해 일곱 살입니다...”“서천우...”부승민은 익숙한 이름에 흠칫하고선 여러 번 되뇌였다.그 반응에 연민우는 쭈뼛거리며 말을 이었다.“서정훈 의원님의 둘째 손자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서 의원님의 아들인 서상원입니다...”자기가 대단한 사람인양 허세를 부리는 건 어린아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이다.하지만 그 아이가 서천우라면 이 일의 배후에 이엘리아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부승민은 몇초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의원님 비서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직접 의원님 찾아뵐 생각이니까 사전에 선물 준비하고.”“알겠습니다.”...집에 돌아온 온하랑은 소파에 앉아 핸드폰 속의 사진을 멍하니 바라봤다.‘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서우현과의 대화창을 열어봤지만 아직 그 어떤 답장도 받지 못했다.참다못한 온하랑은 그의 연락처를 알아내 전화를 걸었다.얼마 후 통화가 연결되었고 핸드폰 너머로 서우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하랑 씨?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던 참이었어요.”이를 들은 온하랑은 다짜고짜 물었다.“저한테요? 무슨일로요?”“몇 달 전에 알아봐달라고 부탁하신 일 있잖아요. 단서를 찾았어요.”온하랑은 긴장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설마 추서윤...”“맞아요. 제가 섣불리 움직이면 꼬리가 잡힐 수도 있어서 일부러 부하한테 시켰어요. 추서윤
사실 이 내용만 들어보면 별 의미가 없다.식당 사장의 말을 토대로 추측하면 온강호가 사고를 당한 시간과 대략 일치한다. 당시 추서윤은 부승민과 만나고 있었으니 마스크를 쓴 남자가 추서윤의 남자 친구일 리가 없다.두 사람이 몰래 인적 드문 골목에서 만났으니 의심을 살 만도 하다.온하랑을 계속하여 물었다.“또 있어요? 그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고 있대요?”서우현은 한숨을 내쉬었다.“너무 오래된 일이라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했어요. 180cm의 키에 다부진 몸매를 가졌는데 나이는 20대로 보였대요.”180cm의 키에 균형 잡힌 몸매를 가진 남자는 길거리에 널리고 널렸다.“어쨌든 이제 단서도 보이기 시작하니 계속 알아봐 줘요.”실마리를 따라 조사하다 보면 반드시 더 많은 목격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그 남자가 골목에서 증발하지 않은 한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반드시 진실은 드러나게 된다.“알겠어요.”서우현은 곧바로 답했다.“아참, 무슨 일로 저한테 연락하려고 했어요?”온하랑은 그제야 자신이 연락하려던 목적이 생각났다.“어제 보낸 사진은 뭐예요? 누구한테서 얻은 거예요?”서우현은 당황해하며 물었다.“사진이요? 제가 사진을 보냈어요?”“어젯밤에 보냈잖아요.”“어젯밤이요?”서우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어제 저녁 먹으러 나갔다가 핸드폰을 잃어버렸어요. 오늘 아침에 경찰서에서 핸드폰 찾으러 오라고 연락왔는데... 설마 그사이에 누군가 사진을 보냈다는 거예요? 그럼 잃어버린 게 아니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훔쳤다는 거네요?”온하랑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그럴지도 모르겠네요.”“실례가 안 된다면 어떤 사진인지 물어봐도 될까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 일단 누가 핸드폰 훔쳤는지부터 조사해 봐요.”“네, 지금 바로 경찰서로 가서 알아봐야겠어요.”전화를 끊은 온하랑은 한숨이 나왔다.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었고 두통이 밀려와 어지러웠다.무거운 배를 잡고 간신히 일어선 그녀는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으나 좀처럼 진정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