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이 힐끗 쳐다보자 부승민은 말을 이었다.“내 기억이 맞다면 이 집에 시연 씨의 지분도 있지? 두 사람이 같이 사는 게 나쁜 건 없지만... 아이가 생기면 산후 도우미로 불러야 하고 나랑 시아도 자주 올 텐데 시연 씨가 불편해하지 않을까?”온하랑은 고민하는 부승민의 모습이 웃긴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갑자기 그게 걱정됐어?”“응.”부승민은 사뭇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시연 씨가 지금 당장 들어와서 사는 건 아니지만 나중에라도 민폐가 되면 안 되잖아.”그 말을 들은 온하랑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아이가 태어난다면 육아용품도 점점 늘어날 테고 나중에 방도 만들어 줘야 하는데 제멋대로 인테리어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고민이 많았다.김시연에게서 다시 이 집을 사 올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지금은 연도진과 함께 그린 빌리지에 살고 있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아직 단단하지 않으니 언제가 싸우게 될 상황을 고려해 개인공간을 남겨주고 싶었다.“네 생각은 어떤데?”“더원파크힐로 들어가는 건 어때? 아니면 위층으로 옮기던지.”“첫번째는 싫어. 두번째도... 싫어.”온하랑은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시원하게 모든 제안을 거절해 버린 온하랑을 보며 부승민이 허무함이 밀려왔다.“그럼 다른 생각이 있는 거야?”“한 채 살 거야. 괜찮은 게 있는지 한번 알아봐 줘. 이 건물이면 제일 좋은 데 없으면 다른 곳도 괜찮고.”“알겠어. 내놓는 사람이 있는지 한번 확인해 볼게.”...부승민이 무슨 방법을 썼는지 이틀도 안 되어 집을 내놓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10층에 살고 있는 청년인데 지금은 해외에서 근무하고 있고 앞으로 그곳에 정착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번에 집 정리하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어 귀국했다고 한다.중개사를 통해 온하랑과 부승민은 내일 집 보러 가기로 집주인과 약속을 잡았다.저녁을 먹고 산책을 다녀온 온하랑은 가벼운 음악을 틀고 소파에 앉아 책을 읽으며 여유로운 분위기를 한껏 만끽했다.그런데
최근 휴가를 내고 귀국한 집주인은 당장이라도 집을 내놓기 위해 정상 시세보다 훨씬 낮은 금액으로 제시했다.모든 일이 너무 순조롭게 진행되자 온하랑의 의심은 점점 커져만 갔고 끝내 부승민을 한쪽으로 끌어당겨 나지막하게 물었다.“솔직히 말해봐. 나 때문에 섭외한 연기자지?”온하랑은 부승민이 몰래 그녀의 은행카드를 확인했다고 생각했다. 재단 설립을 위해 400억을 기부하고 수중에 남은 돈이 얼마 없는 상태에서 스튜디오까지 차렸으니 총제적 난국이다. 그런 상황에 집주인 정말 딱 들어맞는 가격을 제시했으니 의심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었고 솔직히 조금만 더 높게 불렀다면 되레 김시연에게 돈을 빌려야 할 입장이었다.부승민은 웃으며 답했다.“가서 직접 물어봐. 나랑 아는 사이인지.”온하랑은 그를 힐끗 째려보고선 쿨하게 집주인과 계약한 후 돈을 송금했다.집주인은 시원시원한 그들의 성격을 보고선 먼저 식사를 제안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후 부동산으로 향해 양도 절차를 밟았다.부동산 증명서와 집 키를 가지고 나온 온하랑과 부승민은 다시 10층으로 돌아가 집 전체를 꼼꼼히 훑어봤다.“이런 인테리어는 어때? 마음에 안 들면 싹 다 갈아엎어야지.”부승민이 물었다.“인테리어를 새로 하는 건 너무 번거로워. 거슬리는 곳만 살짝 손보면 될 것 같아.”온하랑은 방문 앞에 서서 여기저기 살폈다.“여기가 햇볕이 잘 들어오니까 아기방으로 꾸미면 되겠다. 서재는 그냥 저렇게 쓸래.”말을 하며 걸음을 옮기던 온하랑은 곧바로 안방으로 향했다.“안방은 일단 이 침대를 바꾸고 저기에 화장대 하나 추가해야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네.”“아기방은 어떤 인테리어로 하고 싶어? 아기가 태어나고 바로 들어와 살 수 있게 지금 바로 공사를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거든?”“인테리어 컨셉 한번 찾아볼게.”온하랑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태블릿을 들고 이것저것 검색하며 래퍼런스 자료를 찾았다. 어찌나 집중했는지 몇 시간 동안 손에서 태블릿을 내려놓지 않았다.저녁에는 서재로 들어오더니
“아기 침대는 여기에 두고 아기가 더 크면 좀 더 큰 침대로 바꿔. 여기에는 카펫을 깔고 울타리를 만들어 안에서 마음껏 놀게 해줘... 그리고 이것들은 분위기 내는데 필요한 가벼운 실내장식 소품들…” 온하랑은 열심히 본인의 도안을 소개했다.부승민은 스케치북을 집어 들고 몇 번을 들여다보았다. “우리 하랑이가 이런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네.”“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부승민은 두어 번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설계 나쁘지 않아. 아이는 최근 몇 년간은 아직 어리니까 우리 미감으로 꾸밀 수밖에 없어. 아이가 좀 더 커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때 가서 바꿔도 되니까.”온하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일단은 이렇게 하고 내일 내가 다시 한번 봐볼 테니까 그때 또 고칠 게 있는지 봐 줘.”“응.”온하랑은 스케치북을 덮어 책장에 다시 끼워 넣었다. “그럼 하던 거 마저 해. 난 먼저 쉬러 갈게.”“그래.”침실로 돌아온 온하랑은 블루투스 스피커로 잔잔한 음악 한 곡을 선곡하고는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씻고 나온 온하랑은 평소와 다름없이 아이의 심장박동을 느끼고 싶었다.테이블로 다가가 서랍을 열고 안에 놓인 청진기를 본 순간, 그날 밤의 기억이 자기도 모르게 떠올랐다. 그 순간 온하랑은 귀가 달아올랐고 안색은 노랗게 변했으며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청진기를 잡으려고 뻗은 손가락은 허공에 머문 채, 그 청진기를 차마 마주할 엄두가 안 나기까지 했다.온하랑은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저으며 생생하다 못해 색까지 입혀진 머릿속의 화면을 떨쳐버리고는 청진기를 집어 들었다.온하랑은 적응이 되자 뱃속 아이의 심장박동을 듣는 것이 사뭇 신비롭게 느껴졌다. 자신의 핏줄을 가진 아이의 심장박동이란 사실이, 그 생명이 바로 자신의 배 속에 있다는 사실이, 곧 있으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될 생명이라는 사실이 온하랑을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만든 것이었다.한참 동안 아이의 심방박동을 느낀 온하랑은 청진기를 빼고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비
“아 그게 고데기였구나! 시연 씨, 내가 고데기랑 면도기도 본 적 없을까 봐 이러는 거야?”그 면도기는 부승민이 쓰던 것과 똑같은 것으로 표식이 아주 눈에 띄었다.온하랑은 일부러 실눈을 뜨고는 김시연에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봐.”김시연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어쩔 수 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나 그럼 다 말할게. 연도진이 불쌍해서라도 하나하나 따지지 못하겠어.”온하랑은 잔뜩 의아해하며 물었다. “불쌍하다고? 이게 무슨 소리야?”“너 연도진이 왜 돌아왔는지 알아?”“왜 돌아왔는데?”“쫓겨난 건 아니야. 이엘리아가 집에서 꾀병을 부리면서 부모님 관심과 걱정은 혼자 다 받았거든, 뭐가 어찌 됐든 집에서 애지중지 키운 딸이니까. 그리고는 병이 다 나으니까 마음도 다잡고 회사에 들어가서 배우겠다고 했대. 결국, 연도진네 아버지는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연도진과 함께했던 직원은 물론이고 그동안 맡아온 프로젝트도 모두 이엘리아한테 넘겼어.”“하!” 온하랑은 기가 찬 듯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연도진 아버지가 그렇게 무능했다고?”“무능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엘리아 같은 딸을 키울 수 있겠어.”아무튼, 김시연은 연도진을 제외한 그의 가족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래서, 연도진은 그냥 이렇게 뒷전으로 밀려난 거야?”“모르겠어. 일단 우리 회사로 들어올 거라고 했어, 계약도 이미 했고…. 그다음 일은 때가 되면 다시 생각해볼 계획이야, 지금으로서는 연도진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고 말이야.”김시연은 슬며시 화제를 전환했다. “출산까지 석 달 남았지? 먼저 예약해둬야지, 난 아기의 수양어머니가 돼줄 거야.”“그래, 일단 사례금부터 내 봐.”“하하하! 하랑아 임신 힘들지?”“임신 초기에는 괜찮아 후반부로 갈수록 힘들어. 잘 때도 불편하고 가끔은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저려. 근데 관리 잘 해주면 나름 견딜 만해.”김시연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온하랑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나 아직 짐 정
“흥, 너한테만 착해서 무슨 소용 있는데? 완전 맛도 못 보는 그림의 떡이 따로 없다고. 아쉽지만 앞으로도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선을 베풀면서 사는 수밖에.” 김시연은 또 입을 삐죽이고는 연도진을 눈으로 흘겼다.연도진은 머쓱하게 웃었다. “고기 맛은 못 봤지만 어젯밤 네 표정으로 봐서는 곁들어진 채소도 먹을 만 해 보이던데?”“하지만 난 고기를 먹고 싶은걸.” 김시연은 여전히 투덜거리며 완탕 하나를 입에 넣었다.“... 채소 요리도 종류가 다양해, 고기 요리에 뒤처지지 않는다고.”“네가 한 건 맛이 없어.”“뭐라고?”김시연은 코웃음을 쳤다. “흥, 네가 한 채소 요리는 별로라니까? 어젯밤은 다 연기였다고!”도발하는 듯한 김시연의 눈빛을 알아챈 연도진은 작게 웃었다. “연기한 거라고?”“그래, 내 연기 봐줄 만 하지?”“좋아, 이따가 그 연기 다시 보여줘.”이 말을 하는 연도진은 한치 흔들림 없이 너무나 평온했다. 하지만 무서우리만치 차분한 그의 태도에서 오히려 김시연은 직감적으로 위험한 무언가를 느꼈다.김시연은 눈썹을 들썩였다. “어림도 없지. 아무리 채소 요리라지만 너무 담백해서 연기할 마음도 사라지는걸? 고기를 대접한다면 모를까.”“연기하고 싶지 않은 거야, 아니면 애초에 연기가 아니었던 거야?”“당연히 전자지.”김시연은 표정의 변화도 없이 입가를 닦고는 포장 용기를 연도진 앞으로 밀었다. “너 먹어, 난 씻고 자야겠어. 내일도 일찍 촬영장 나가야 하거든.”씻고 나온 김시연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욕실에서 나왔다. 금방 말린 머리를 빗으며 거울 앞에 서서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 가며 이리저리 돌아보았다.방은 에어컨을 켜놓은 탓에 아주 따뜻했다. 김시연이 입은 잠옷은 얇은 검은색 미니 원피스였다. 흰 어깨에는 얇은 원피스 끈이 걸려있었고 흰 피부와 검은 원피스는 흑백의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깊게 파인 넥라인은 얇은 천 아래 가슴을 보일 듯 말 듯하게 했다. 허벅지는 하얗고 길었으며 조금의 군살도 없었다.김시연은 또다
한창 실망하고 있던 순간, 커다란 손이 김시연의 허리를 감싸고 살며시 쓰다듬어왔다. 얇은 잠옷의 천을 뚫고 전해지는 뜨거운 온기는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했다.김시연은 쌀쌀맞게 그 손을 쳐내며 말했다. “협조도 안 하고, 고기는 더 없고.”연도진은 잠시 망설이는 듯싶더니 김시연을 와락 끌어안았다. 데일 듯한 뜨거운 숨을 끌어안은 목에 내뱉으며 속삭인다. “네 협조가 필요한 게 아니야. 넌 그냥 자면 돼.”“...”연도진은 대답 대신 귓불을 가볍게 물며 김시연을 돌려 눕혔다.김시연은 순간 숨이 가빠졌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얕은 신음을 애써 억눌렀다.뜨겁고 축축한 숨은 김시연의 아래턱에 머물렀다가 목을 타고 내려오는 동안 애타게 간지럽히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사라지곤 했다.간지러운 깃털처럼 김시연의 피부 위에서 마음껏 거닐었고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달아오르게 했다.김시연은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흘렀고 기분은 붕 떠버린지 오래였고 연도진의 입맞춤만을 기다렸다.하지만 연도진은 그런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입맞춤은 고사하고 얼굴에 바람이나 불며 김시연을 놀렸다.큰 손은 미끄러지듯 김시연의 잠옷 원피스 안으로 들어갔다.“응…”연도진은 낮게 웃었다. “연기에는 협조할 마음이 없다며?”야릇한 분위기는 삽시에 깨져버렸다. 김시연은 어이가 없는 듯 이를 깨물며 대꾸했다. “흥... 아까는 네가 날 아프게 해서 그랬던 거야,”“오...” 연도진은 말끝을 길게 늘였다. “그럼 살살할게.” 그렇게 말하며 연도진은 아까보다도 더 힘을 풀었다.김시연은 심장이 가려운 느낌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참는 것도 슬슬 한계였다.‘이건 너무 수동적이야.’ 김시연은 주객전도를 원했다.결국 김시연은 손을 뻗어 연도진의 잠옷 아랫단을 밀어 올리곤 탄탄한 복근을 쓰다듬다가 잠옷 바지밴드를 한번 튕겼다.연도진은 코웃음을 한번 치고는 다급히 김시연의 손을 잡아 세웠다. “함부로 만지지 마.”김시연은 샐쭉 웃었다. 자신의 손을 잡은 연도진의 손을 끌어내
“글쎄, 지금은 고기 맛이 영 별로네.”김시연은 체념한 듯 한숨을 쉬었다. 점점 더 위험해지는 연도진의 눈은 애초에 보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김시연은 느끼는 바가 많았다. “음... 고등학생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성장은 했어. 근데 동시에 퇴보했어.”김시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연도진에게서 떨어지려고 할 때 억센 손아귀가 그녀를 잡아 침대로 눕혔다.김시연은 너무 놀라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한바탕 야단법석을 떨고 난 후 제정신이 들었을 때 김시연은 천장이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도 정신없이 돌아가는 나머지 괴로울 정도였다.“도진아, 너... 이러지 마, 잠깐만... 멈춰 제발!”연도진은 잔뜩 가라앉은 얼굴로 아래턱에 힘을 잔뜩 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던 땀방울은 어느새 흥건히 이마를 적셨고 땀 줄기가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네가 원하던 게 이런 거 아니었어?” 연도진은 낮게 읊조렸다.“아니야... 내가 잘못했어...”그 순간, 김시연은 자신이 바다에 내던져진 작은 조각배 같다고 생각했다. 바다의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고 이따금 매서운 파도가 덮쳐오기도 했다. 항행할수록 파도는 더 심해졌고 결국 김시연의 온몸을 적셔 물기가 뚝뚝 떨어지게 했다. 끝끝내 거센 바다의 폭풍을 견뎌내지 못한 김시연은 울먹이며 연도진의 팔뚝을 잡았다. “도진아, 멈춰... 나 못 참겠어... 나 진짜 못 참겠어.”배가 항행을 너무 빨리한 것이다.연도진의 목울대가 또 한 번 세차게 요동친다.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풀고 배의 항행속도를 늦추며 물었다. “지금 고기가 맛이 영 별로야?”“맛있어, 맛있고말고!” 김시연은 놓칠세라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나.”“내가 퇴보를 했어?”“아니야! 어떻게 그러지? 퇴보는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엄청나게 진보했는걸!”“엄청나게? 그게 어떤 정도지?”김시연은 정말 한마디 톡 쏘아붙이고 싶었다. 딱 네 그릇만큼.하지만 아
김시연은 잠옷을 꺼내 아무렇게나 몸에 걸치고는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누가 알기나 했을까, 땅에 발이 닿자마자 다리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 다시 침대로 털썩 넘어질 줄은.김시연은 연신 속으로 연도진을 개자식이라고 욕하며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벽을 짚고 일어나 새 옷을 가지고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조심조심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이번에 하도 폭식을 한 탓에 제대로 질려버린 김시연은 생각했다. 앞으로 꽤 긴 시간 동안은 ‘고기’ 생각은 하지도 않을 것이라고.욕실까지 두 걸음 정도 남았을 때 갑자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문을 열고 들어오는 연도진의 손에는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방 중앙에 서 있는 김시연을 보고는 작게 웃었다. “깼어? 내 예상보다 더 일찍 깼네, 마침 너 먹이려고 점심 포장해왔는데.”그 미소속에는 쉽게 알아챌 수는 없지만 잘 보이려는 속셈이 분명히 녹아있었다.김시연은 차갑게 웃으며 대꾸했다. “너 아침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 왜 아직도 안 갔어?”연도진이 대답했다. “일정 조절했어.”“아 그래? 난 또 네가 나 먹고 버린 줄 알았지.”“내가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인 줄 알아?”연도진은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2인분의 포장 용기를 꺼냈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볶음밥으로 포장해왔는데, 배고프지?”말이 끝나기 바쁘게 김시연은 자신의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를 들었다.김시연은 자신의 위를 어루만지고는 계속해서 욕실로 향했다. “일단 거기 둬. 나 아직 못 씻었어.”연도진은 그런 김시연의 모습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뱉고 말았다. “너 지금 이대로라면 걷는 거 너무 느려.”“연도진…”김시연이 걸음이 늦은 게 누구 탓이던가?김시연이 아무리 제지를 해도 연도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김시연을 안아다 욕실까지 데려다주었다. “됐어, 이제 씻어.”“...”김시연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거라곤 목이며 쇄골이며 어깨며 할 것 없이 군데군데 늘어난 키스 마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