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이어 부승민의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이러니까 잘 들리네. 규칙적인 거 보니 아주 건강하군.”그렇게 1분 동안 듣다가 청진기를 떼어냈다.온하랑은 그제야 온몸의 긴장이 풀렸고 막 잠이 들려던 찰나 차가운 청진판이 또다시 느껴졌다.온하랑은 심장이 마구 뛰었다.“우리 하랑이 심장 소리 듣고 싶네.”부승민은 말하면서 청진판을 점점 더 위로 올렸다.움직임은 매우 부드러웠는데 차가운 느낌이 깃털처럼 몸 곳곳을 어루만지자 예민함이 극에 달한 온하랑은 호흡이 가빠져 긴장한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청진판은 그녀의 가슴에서 정확히 멈췄다.“하랑아, 너 지금 심장이 엄청 빠르게 뛰어.”부승민은 온하랑에게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혼자말하는 것 같았다.“숨소리가 왜 이렇게 거칠어? 어디 아픈 거 아니야?”부승민은 청진판을 이리저리 움직였고 그의 가볍고도 부드러운 손길은 마치 간지럼을 태우는듯 온몸이 나른해졌다.심지어 잘 들리지 않는지 꾹꾹 눌렀다.그렇게 몇 분 후, 드디어 청진기를 벗었다.온하랑은 그가 이번에는 어떤 행동을 할지 예상이 가지 않아 조마조마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다.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에 무거운 물건이 올려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정말 청진기를 거뒀다는 생각에 온하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이때 또다시 차가운 뭔가가 가슴에 닿았고 안 그래도 잔뜩 예민해진 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그 느낌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어쩌면 긴장하면서도 내심 기대하는 것 같다.테이블 위에 청진기가 놓이는 털컥 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고 이내 뭔가를 삼키는듯한 소리도 들렸다.부승민이 물을 마시고 있는 게 분명한데 다 알고 있음에도 방심하지 못했다.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예상대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그러나 이번에는 청진판이 아닌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과 차가운 뭔가가 느껴졌다.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자 차가운 그 느낌도 같이 옮겨졌는데 몸 곳곳에 촉촉한 흔적이 남으니
온하랑이 힐끗 쳐다보자 부승민은 말을 이었다.“내 기억이 맞다면 이 집에 시연 씨의 지분도 있지? 두 사람이 같이 사는 게 나쁜 건 없지만... 아이가 생기면 산후 도우미로 불러야 하고 나랑 시아도 자주 올 텐데 시연 씨가 불편해하지 않을까?”온하랑은 고민하는 부승민의 모습이 웃긴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갑자기 그게 걱정됐어?”“응.”부승민은 사뭇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시연 씨가 지금 당장 들어와서 사는 건 아니지만 나중에라도 민폐가 되면 안 되잖아.”그 말을 들은 온하랑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아이가 태어난다면 육아용품도 점점 늘어날 테고 나중에 방도 만들어 줘야 하는데 제멋대로 인테리어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고민이 많았다.김시연에게서 다시 이 집을 사 올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지금은 연도진과 함께 그린 빌리지에 살고 있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아직 단단하지 않으니 언제가 싸우게 될 상황을 고려해 개인공간을 남겨주고 싶었다.“네 생각은 어떤데?”“더원파크힐로 들어가는 건 어때? 아니면 위층으로 옮기던지.”“첫번째는 싫어. 두번째도... 싫어.”온하랑은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시원하게 모든 제안을 거절해 버린 온하랑을 보며 부승민이 허무함이 밀려왔다.“그럼 다른 생각이 있는 거야?”“한 채 살 거야. 괜찮은 게 있는지 한번 알아봐 줘. 이 건물이면 제일 좋은 데 없으면 다른 곳도 괜찮고.”“알겠어. 내놓는 사람이 있는지 한번 확인해 볼게.”...부승민이 무슨 방법을 썼는지 이틀도 안 되어 집을 내놓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10층에 살고 있는 청년인데 지금은 해외에서 근무하고 있고 앞으로 그곳에 정착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번에 집 정리하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어 귀국했다고 한다.중개사를 통해 온하랑과 부승민은 내일 집 보러 가기로 집주인과 약속을 잡았다.저녁을 먹고 산책을 다녀온 온하랑은 가벼운 음악을 틀고 소파에 앉아 책을 읽으며 여유로운 분위기를 한껏 만끽했다.그런데
최근 휴가를 내고 귀국한 집주인은 당장이라도 집을 내놓기 위해 정상 시세보다 훨씬 낮은 금액으로 제시했다.모든 일이 너무 순조롭게 진행되자 온하랑의 의심은 점점 커져만 갔고 끝내 부승민을 한쪽으로 끌어당겨 나지막하게 물었다.“솔직히 말해봐. 나 때문에 섭외한 연기자지?”온하랑은 부승민이 몰래 그녀의 은행카드를 확인했다고 생각했다. 재단 설립을 위해 400억을 기부하고 수중에 남은 돈이 얼마 없는 상태에서 스튜디오까지 차렸으니 총제적 난국이다. 그런 상황에 집주인 정말 딱 들어맞는 가격을 제시했으니 의심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었고 솔직히 조금만 더 높게 불렀다면 되레 김시연에게 돈을 빌려야 할 입장이었다.부승민은 웃으며 답했다.“가서 직접 물어봐. 나랑 아는 사이인지.”온하랑은 그를 힐끗 째려보고선 쿨하게 집주인과 계약한 후 돈을 송금했다.집주인은 시원시원한 그들의 성격을 보고선 먼저 식사를 제안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후 부동산으로 향해 양도 절차를 밟았다.부동산 증명서와 집 키를 가지고 나온 온하랑과 부승민은 다시 10층으로 돌아가 집 전체를 꼼꼼히 훑어봤다.“이런 인테리어는 어때? 마음에 안 들면 싹 다 갈아엎어야지.”부승민이 물었다.“인테리어를 새로 하는 건 너무 번거로워. 거슬리는 곳만 살짝 손보면 될 것 같아.”온하랑은 방문 앞에 서서 여기저기 살폈다.“여기가 햇볕이 잘 들어오니까 아기방으로 꾸미면 되겠다. 서재는 그냥 저렇게 쓸래.”말을 하며 걸음을 옮기던 온하랑은 곧바로 안방으로 향했다.“안방은 일단 이 침대를 바꾸고 저기에 화장대 하나 추가해야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네.”“아기방은 어떤 인테리어로 하고 싶어? 아기가 태어나고 바로 들어와 살 수 있게 지금 바로 공사를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거든?”“인테리어 컨셉 한번 찾아볼게.”온하랑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태블릿을 들고 이것저것 검색하며 래퍼런스 자료를 찾았다. 어찌나 집중했는지 몇 시간 동안 손에서 태블릿을 내려놓지 않았다.저녁에는 서재로 들어오더니
“아기 침대는 여기에 두고 아기가 더 크면 좀 더 큰 침대로 바꿔. 여기에는 카펫을 깔고 울타리를 만들어 안에서 마음껏 놀게 해줘... 그리고 이것들은 분위기 내는데 필요한 가벼운 실내장식 소품들…” 온하랑은 열심히 본인의 도안을 소개했다.부승민은 스케치북을 집어 들고 몇 번을 들여다보았다. “우리 하랑이가 이런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네.”“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부승민은 두어 번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설계 나쁘지 않아. 아이는 최근 몇 년간은 아직 어리니까 우리 미감으로 꾸밀 수밖에 없어. 아이가 좀 더 커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때 가서 바꿔도 되니까.”온하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일단은 이렇게 하고 내일 내가 다시 한번 봐볼 테니까 그때 또 고칠 게 있는지 봐 줘.”“응.”온하랑은 스케치북을 덮어 책장에 다시 끼워 넣었다. “그럼 하던 거 마저 해. 난 먼저 쉬러 갈게.”“그래.”침실로 돌아온 온하랑은 블루투스 스피커로 잔잔한 음악 한 곡을 선곡하고는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씻고 나온 온하랑은 평소와 다름없이 아이의 심장박동을 느끼고 싶었다.테이블로 다가가 서랍을 열고 안에 놓인 청진기를 본 순간, 그날 밤의 기억이 자기도 모르게 떠올랐다. 그 순간 온하랑은 귀가 달아올랐고 안색은 노랗게 변했으며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청진기를 잡으려고 뻗은 손가락은 허공에 머문 채, 그 청진기를 차마 마주할 엄두가 안 나기까지 했다.온하랑은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저으며 생생하다 못해 색까지 입혀진 머릿속의 화면을 떨쳐버리고는 청진기를 집어 들었다.온하랑은 적응이 되자 뱃속 아이의 심장박동을 듣는 것이 사뭇 신비롭게 느껴졌다. 자신의 핏줄을 가진 아이의 심장박동이란 사실이, 그 생명이 바로 자신의 배 속에 있다는 사실이, 곧 있으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될 생명이라는 사실이 온하랑을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만든 것이었다.한참 동안 아이의 심방박동을 느낀 온하랑은 청진기를 빼고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비
“아 그게 고데기였구나! 시연 씨, 내가 고데기랑 면도기도 본 적 없을까 봐 이러는 거야?”그 면도기는 부승민이 쓰던 것과 똑같은 것으로 표식이 아주 눈에 띄었다.온하랑은 일부러 실눈을 뜨고는 김시연에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봐.”김시연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어쩔 수 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나 그럼 다 말할게. 연도진이 불쌍해서라도 하나하나 따지지 못하겠어.”온하랑은 잔뜩 의아해하며 물었다. “불쌍하다고? 이게 무슨 소리야?”“너 연도진이 왜 돌아왔는지 알아?”“왜 돌아왔는데?”“쫓겨난 건 아니야. 이엘리아가 집에서 꾀병을 부리면서 부모님 관심과 걱정은 혼자 다 받았거든, 뭐가 어찌 됐든 집에서 애지중지 키운 딸이니까. 그리고는 병이 다 나으니까 마음도 다잡고 회사에 들어가서 배우겠다고 했대. 결국, 연도진네 아버지는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연도진과 함께했던 직원은 물론이고 그동안 맡아온 프로젝트도 모두 이엘리아한테 넘겼어.”“하!” 온하랑은 기가 찬 듯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연도진 아버지가 그렇게 무능했다고?”“무능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엘리아 같은 딸을 키울 수 있겠어.”아무튼, 김시연은 연도진을 제외한 그의 가족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래서, 연도진은 그냥 이렇게 뒷전으로 밀려난 거야?”“모르겠어. 일단 우리 회사로 들어올 거라고 했어, 계약도 이미 했고…. 그다음 일은 때가 되면 다시 생각해볼 계획이야, 지금으로서는 연도진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고 말이야.”김시연은 슬며시 화제를 전환했다. “출산까지 석 달 남았지? 먼저 예약해둬야지, 난 아기의 수양어머니가 돼줄 거야.”“그래, 일단 사례금부터 내 봐.”“하하하! 하랑아 임신 힘들지?”“임신 초기에는 괜찮아 후반부로 갈수록 힘들어. 잘 때도 불편하고 가끔은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저려. 근데 관리 잘 해주면 나름 견딜 만해.”김시연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온하랑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나 아직 짐 정
“흥, 너한테만 착해서 무슨 소용 있는데? 완전 맛도 못 보는 그림의 떡이 따로 없다고. 아쉽지만 앞으로도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선을 베풀면서 사는 수밖에.” 김시연은 또 입을 삐죽이고는 연도진을 눈으로 흘겼다.연도진은 머쓱하게 웃었다. “고기 맛은 못 봤지만 어젯밤 네 표정으로 봐서는 곁들어진 채소도 먹을 만 해 보이던데?”“하지만 난 고기를 먹고 싶은걸.” 김시연은 여전히 투덜거리며 완탕 하나를 입에 넣었다.“... 채소 요리도 종류가 다양해, 고기 요리에 뒤처지지 않는다고.”“네가 한 건 맛이 없어.”“뭐라고?”김시연은 코웃음을 쳤다. “흥, 네가 한 채소 요리는 별로라니까? 어젯밤은 다 연기였다고!”도발하는 듯한 김시연의 눈빛을 알아챈 연도진은 작게 웃었다. “연기한 거라고?”“그래, 내 연기 봐줄 만 하지?”“좋아, 이따가 그 연기 다시 보여줘.”이 말을 하는 연도진은 한치 흔들림 없이 너무나 평온했다. 하지만 무서우리만치 차분한 그의 태도에서 오히려 김시연은 직감적으로 위험한 무언가를 느꼈다.김시연은 눈썹을 들썩였다. “어림도 없지. 아무리 채소 요리라지만 너무 담백해서 연기할 마음도 사라지는걸? 고기를 대접한다면 모를까.”“연기하고 싶지 않은 거야, 아니면 애초에 연기가 아니었던 거야?”“당연히 전자지.”김시연은 표정의 변화도 없이 입가를 닦고는 포장 용기를 연도진 앞으로 밀었다. “너 먹어, 난 씻고 자야겠어. 내일도 일찍 촬영장 나가야 하거든.”씻고 나온 김시연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욕실에서 나왔다. 금방 말린 머리를 빗으며 거울 앞에 서서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 가며 이리저리 돌아보았다.방은 에어컨을 켜놓은 탓에 아주 따뜻했다. 김시연이 입은 잠옷은 얇은 검은색 미니 원피스였다. 흰 어깨에는 얇은 원피스 끈이 걸려있었고 흰 피부와 검은 원피스는 흑백의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깊게 파인 넥라인은 얇은 천 아래 가슴을 보일 듯 말 듯하게 했다. 허벅지는 하얗고 길었으며 조금의 군살도 없었다.김시연은 또다
한창 실망하고 있던 순간, 커다란 손이 김시연의 허리를 감싸고 살며시 쓰다듬어왔다. 얇은 잠옷의 천을 뚫고 전해지는 뜨거운 온기는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했다.김시연은 쌀쌀맞게 그 손을 쳐내며 말했다. “협조도 안 하고, 고기는 더 없고.”연도진은 잠시 망설이는 듯싶더니 김시연을 와락 끌어안았다. 데일 듯한 뜨거운 숨을 끌어안은 목에 내뱉으며 속삭인다. “네 협조가 필요한 게 아니야. 넌 그냥 자면 돼.”“...”연도진은 대답 대신 귓불을 가볍게 물며 김시연을 돌려 눕혔다.김시연은 순간 숨이 가빠졌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얕은 신음을 애써 억눌렀다.뜨겁고 축축한 숨은 김시연의 아래턱에 머물렀다가 목을 타고 내려오는 동안 애타게 간지럽히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사라지곤 했다.간지러운 깃털처럼 김시연의 피부 위에서 마음껏 거닐었고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달아오르게 했다.김시연은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흘렀고 기분은 붕 떠버린지 오래였고 연도진의 입맞춤만을 기다렸다.하지만 연도진은 그런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입맞춤은 고사하고 얼굴에 바람이나 불며 김시연을 놀렸다.큰 손은 미끄러지듯 김시연의 잠옷 원피스 안으로 들어갔다.“응…”연도진은 낮게 웃었다. “연기에는 협조할 마음이 없다며?”야릇한 분위기는 삽시에 깨져버렸다. 김시연은 어이가 없는 듯 이를 깨물며 대꾸했다. “흥... 아까는 네가 날 아프게 해서 그랬던 거야,”“오...” 연도진은 말끝을 길게 늘였다. “그럼 살살할게.” 그렇게 말하며 연도진은 아까보다도 더 힘을 풀었다.김시연은 심장이 가려운 느낌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참는 것도 슬슬 한계였다.‘이건 너무 수동적이야.’ 김시연은 주객전도를 원했다.결국 김시연은 손을 뻗어 연도진의 잠옷 아랫단을 밀어 올리곤 탄탄한 복근을 쓰다듬다가 잠옷 바지밴드를 한번 튕겼다.연도진은 코웃음을 한번 치고는 다급히 김시연의 손을 잡아 세웠다. “함부로 만지지 마.”김시연은 샐쭉 웃었다. 자신의 손을 잡은 연도진의 손을 끌어내
“글쎄, 지금은 고기 맛이 영 별로네.”김시연은 체념한 듯 한숨을 쉬었다. 점점 더 위험해지는 연도진의 눈은 애초에 보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김시연은 느끼는 바가 많았다. “음... 고등학생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성장은 했어. 근데 동시에 퇴보했어.”김시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연도진에게서 떨어지려고 할 때 억센 손아귀가 그녀를 잡아 침대로 눕혔다.김시연은 너무 놀라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한바탕 야단법석을 떨고 난 후 제정신이 들었을 때 김시연은 천장이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도 정신없이 돌아가는 나머지 괴로울 정도였다.“도진아, 너... 이러지 마, 잠깐만... 멈춰 제발!”연도진은 잔뜩 가라앉은 얼굴로 아래턱에 힘을 잔뜩 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던 땀방울은 어느새 흥건히 이마를 적셨고 땀 줄기가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네가 원하던 게 이런 거 아니었어?” 연도진은 낮게 읊조렸다.“아니야... 내가 잘못했어...”그 순간, 김시연은 자신이 바다에 내던져진 작은 조각배 같다고 생각했다. 바다의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고 이따금 매서운 파도가 덮쳐오기도 했다. 항행할수록 파도는 더 심해졌고 결국 김시연의 온몸을 적셔 물기가 뚝뚝 떨어지게 했다. 끝끝내 거센 바다의 폭풍을 견뎌내지 못한 김시연은 울먹이며 연도진의 팔뚝을 잡았다. “도진아, 멈춰... 나 못 참겠어... 나 진짜 못 참겠어.”배가 항행을 너무 빨리한 것이다.연도진의 목울대가 또 한 번 세차게 요동친다.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풀고 배의 항행속도를 늦추며 물었다. “지금 고기가 맛이 영 별로야?”“맛있어, 맛있고말고!” 김시연은 놓칠세라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나.”“내가 퇴보를 했어?”“아니야! 어떻게 그러지? 퇴보는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엄청나게 진보했는걸!”“엄청나게? 그게 어떤 정도지?”김시연은 정말 한마디 톡 쏘아붙이고 싶었다. 딱 네 그릇만큼.하지만 아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
의사는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이, 앞으로는 아내 말 잘 들어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여보, 들었지? 의사 선생님도 그러시잖아!”최동철은 잠시 입을 말없이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봉합이 끝난 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병원을 나서며 설윤은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누가 데리러 와요?”최동철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설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설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요.”그녀는 두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이 작은 도시는 꽤 조용하네요. 며칠 더 머물 생각인데, 동철 씨도 안 간다니까 같이 지낼까요? 서로 보호도 되고.”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호텔은 눈에 띄니까 단기 임대 민박을 찾는 게 더 안전하고 편리할 거예요.”“좋아요.”“근데 검색해 보니까 민박은 대부분 더블침대 방이더라고요. 괜찮으세요?”“설윤 씨가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럼 예약할게요.”최동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거예요?”대부분의 예약 앱은 신분증 정보를 입력해야 해서, 한 번 사용하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설윤은 그의 걱정을 알아채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이 폰은 제 이름으로 등록된 게 아니에요. 추적 못 할 거예요.”최동철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준비가 철저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임가희한테 이렇게 몰렸어요?”“임가희가 이렇게 빨리 제 존재를 눈치챌 줄 몰랐거든요. 그랬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요.”최동철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정보를 넘긴 장본인이 아니라는 듯이.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예약한 민박으로 향했다.민박은 단일 방 구조로, 면적은 47㎡. 방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고 가스레인지
이튿날 아침, 최동철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패딩 점퍼에 청바지, 스니커즈, 그리고 새로 정리한 헤어스타일까지 더해지니 몇 년은 젊어 보였다. 게다가 넉넉한 핏의 패딩은 그의 체형을 자연스럽게 감춰주었다.“자, 마스크도 잊지 말고 쓰세요.”“네.” 최동철은 대답하며 책상 위의 마스크를 집어 썼다.지금 이 모습이라면 자세히 보지 않는 한 그를 알아보긴 어려울 터였다.최동철은 설윤이 입고 있는 패딩 점퍼를 힐끗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설윤은 웃으며 설명했다. “작은 가게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어요. 그리고 커플룩이 신분을 숨기기에 더 좋아요.”“그렇군요.”“제가 먼저 내려가서 체크아웃하고 주변 상황을 살펴볼게요. 연락드리면 그때 내려오세요. 미리 택시도 불러놓을게요.”“알겠습니다.”“그럼 다녀오겠습니다.”“네.”설윤은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나갔는데 가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입었던 옷이 담겨 있었다. 이곳에 그냥 두면 흔적이 남을 수 있어 길 가다 버릴 생각이었다.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설윤은 무사히 로비에 도착해 체크아웃을 마쳤다. 거리로 나서며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면서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길 건너편 왼쪽, 작은 만두 가게에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가게 앞에는 접이식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중 한 테이블에는 건장한 남자가 앉아 가끔씩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그 자리는 아침을 먹으며 호텔을 감시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설윤은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감시자는 그 남자 한 사람뿐인 듯했다.아마도 어젯밤 이들이 호텔 방마다 수색했지만 최동철의 흔적을 찾지 못해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주변을 수색하러 간 모양이었다.2분쯤 지나 설윤이 부른 택시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설윤은 최동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차 문을 열며 짐을 싣다가 말했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 남편이 금방 내려올 거예요.”“네, 알겠습니다.”설윤은 다시 로비로 들어갔다.1분쯤
최동철이 말했다.“그럼 내일 병원에 다녀와야겠어요.”“제가 도와드릴게요.”약을 다 바른 뒤, 설윤은 그에게 거즈를 감아주며 말했다. “됐어요, 이제 좀 쉬세요. 전 잠깐 나갔다 올게요.”“어디 가려고요?” 최동철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임가희 쪽 사람들이랑 마주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요.”“필요한 물건을 좀 사야 하거든요. 걱정 마세요.” 설윤은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 “그 인간들 손아귀에서 도망쳐 나온 제가 다시 잡힐 것 같아요?”최동철은 그녀가 방금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을 힐끗 보며 물었다. “왜 아버지한테 연락해서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 거예요?”“이미 기회를 놓쳤어요. 제가 뭐라 해도 믿지 않을걸요?”“그럼 이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아요?”“당연히 괜찮지 않죠.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어요. 기회만 생기면 반드시 다시 돌아갈 거예요.”“성공하길 바라요.” 최동철이 씩 웃으며 말했다. “돈은 있어요? 부족하면 제 카드를 써요.”설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조금만 써도 돼요?”돈이야 많을 수록 좋은 법이니까.최동철은 벽에 걸린 외투를 가리켰다. “지갑은 저기 외투 주머니에 있으니까 직접 꺼내요. 현금은 많지 않지만 블랙카드는 비밀번호가 필요 없어요. 사람이 적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을 거예요.”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니 고급 가죽의 촉감이 손에 닿았다.“얼마든지 뽑아도 괜찮아요?” 그녀가 돌아보며 물었다.“물론이죠.”“최 대표님, 참 후하시네요.”“제 목숨은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까요.”설윤은 밖으로 나갔다.최동철은 항생제를 먹고 씻은 뒤 침대에 누워 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했던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깨어났다.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였다.설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최동철이 일어나 그녀를 찾으러 갈까 고민하던 찰나, 설윤이 돌아왔다. 그녀는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늦었네요.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없었어요.” 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최동철은 그 말을 듣고 샤워기를 틀었다.설윤은 간식이 담긴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그 위에 놓인 칼을 가렸고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걸어가 문을 여니 예상대로 복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그는 방 안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키우는 햄스터가 실수로 도망쳤는데, 혹시 보셨나요?”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방금 밖에 나갔다 와서요. 잘 모르겠네요. 남편한테 물어봐 드릴게요.”그녀는 욕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 혹시 햄스터가 들어오는 거 봤어?”샤워기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설윤은 욕실 문을 살짝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여보, 작은 햄스터가 들어온 거 못 봤어?”몇 초간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머리를 빼고 남자에게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못 봤대요. 다른 곳도 한번 찾아보세요.”“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남자는 의심 없이 돌아섰다.최동철처럼 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숨겨줄 이는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설윤은 차분히 문을 닫고 귀를 문에 붙여 조심스럽게 소리를 들었다. 남자가 정말로 떠났음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욕실 문을 열며 말했다. “갔으니 나와요.”그리고 테이블로 가서 비닐봉지 안에서 약들을 꺼냈다. “자요, 여기 이 약들이 충분한지 확인해봐요.”최동철은 뒤에서 걸어나와 약의 종류와 양을 살펴봤다. “고마워요.”“별말씀을요.” 설윤은 생수를 주전자에 붓고 버튼을 눌렀다. “제가 약 발라줄까요?”“그럼 부탁할게요. 고마워요.”최동철은 잠시 망설였으나 곧 수락하고 천천히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그가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자 설윤이 다가가 도와주었다. 그녀는 그의 겉옷을 벗기고 벽걸이에 걸었다.안에는 짙은 회색 니트가 있었고 상처 부위는 터져 피로 얼룩져 있었다. 니트를 벗으려면 팔을 들어야 했기에 설윤은 그의 어깨 상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잘라낼까요? 이 옷은 이미 알아본 사람들이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