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연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연도진을 바라보았다.“내가 몇 가지만 물어볼게.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대답해줘.”“네가 묻는 거라면 내가 아는 선에서 다 대답해줄게.”연도진의 미소에는 김시연의 비위를 맞추려는 기색이 역력했다.김시연이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아는 선에서 다 대답해주겠다고?그럼 그 전엔 뭐 했는데?“7년 전에 너 데려갔던 그 사람, 이엘리아 아빠야?”“맞아.”“그 사람이 너 입양한 거야?”그래서 이엘리아의 오빠가 된 건가?연도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했다.“그 사람이 내 친아빠야... 그때 그 사람이 날 찾은 다음에야 알았어. 사실은 내가 아빠로 알고 있던 사람이 날 입양했었다는 걸.”“그럼, 이엘리아가 네 친여동생이라는 뜻이야?”김시연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김시연의 눈을 마주친 연도진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맞아.”“왜 굳이 나한테까지 네 정체를 숨긴 거야?”“처음부터 숨길 생각은 없었어. 그냥 너한테 익숙한 연도진이라는 사람으로 너랑 다시 만나 천천히 얘기해주고 싶었어... 그런데 너랑 이엘리아의 사이가 점점 안 좋아지고 그 악감정이 가족한테까지 미치는 걸 보면서 네가 내 정체를 아는 게 두려워졌어. 나랑 아예 연을 끊으려고 할까 봐.”“시아는 네가 누군지 알잖아. 그래서 결혼식 때도 마침 필라에 있었던 거고. 그럼 네 가족이랑은 이미 얘기 끝났던 거야?”“...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은 다 내 손바닥 안에 있으니까.”“그래서, 시아가 돌아왔을 때 굳이 H 시로 출장 갔던 건? 그것도 다 계획되어 있던 거였어?”“응.”“네가 누구인지 언젠가는 밝혀질 테니까 H 시에 있을 때 갑자기 7년 전에 날 떠났던 이유를 알려줬던 거구나. 이것도 설마 다 네가 계획했던 거였니? 내가 굳이 안 물어봤어도 먼저 나한테 얘기해줄 거였어?”“응.”“어차피 알게 될 사실인데 왜 먼저 말 안 해줬어? 미리 말하고 나한테 용서를 구했으면 됐잖아.”“사실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도, 시아가 먼저 폭로할까 봐 얘기해준
“내 질문은 여기서 끝이야, 연도진 씨. 아니, 윌슨 씨.”김시연은 무미건조한 대답만을 남긴 채 몸을 돌려 위층으로 향했다.“...”연도진은 깊은 한숨만 푹 내쉬었다.그래도 당장 계약을 파기하고 이 집에서 연도진을 쫓아내지는 않았으니 다행인 걸까?“시연아, 점심 뭐 먹고 싶어? 내가 아주머니한테 말씀드려볼게.”“입맛 없어, 안 먹어!”“...”...온하랑은 부시아와 함께 다이닝룸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두 사람 모두 웃고 떠들 기분이 아니었던지라 조용히 식사를 마쳤고 온하랑은 부시아를 더원파크힐까지 데리고 갔다.오늘 휴무였던 부승민은 서재에서 개인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두어 번 들렸다.“아빠, 저 왔어요.”부승민은 하던 일을 바로 멈추고 대답했다.“들어와.”그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이를 바라보며 물었다.“숙모는? 갔어?”“네!”부시아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숙모 화났어요. 외삼촌이 시연 아줌마 남편인 거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안 알려줬다고.”부승민은 부시아의 말에 당황한 듯한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일으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럼 지금이라도 따라가야지, 어떻게든 사과를 해야 하니까.”“핑계잖아요. 제가 보기에 아빠는 그냥 숙모가 보고 싶은 것 같은데요.”“맞아, 아빠는 지금 숙모가 보고 싶어. 그러니까 전 집에서 도우미 할머니 말 잘 들어야 해.”부승민이 아이에게 당부하며 방문을 나섰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 이내 부승민의 걸음이 멈추었다.온하랑은 문 옆의 벽에 딱 달라붙어 입술을 꽉 깨문 채 부승민을 보며 웃고 있었다.부시아 이 계집애가 진짜!“왜 안 들어와?”부승민이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온하랑의 손을 잡아 서재 안으로 이끌자 부시아의 장난기 어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온하랑은 소파에 앉으며 등을 소파 등받이에 기댄 채 평온한 표정으로 손톱을 만지작댔다.“난 지금 네 죄를 물으러 온 거야!”부승민은 온하랑의 입에서 나올 말을 짐작했는지 부시아에게 시선을 옮겼다.부시아
부승민이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왜 억지야?”온하랑이 대답했다.“시연이가 도진 씨 정체를 일주일이나 늦게 알았잖아!”그 일주일은 김시연이 마침 연도진과 함께 H 시로 떠났을 때였다. 출장이라고는 했지만 신혼여행에 가까웠는데 어떻게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만약 김시연이 일주일 먼저 알게 됐다면 망설임 없이 연도진을 뻥 차버렸을 것이다. 그 일주일 동안 서로에게 깊어져 지금 김시연은 그저 망설이는 입장이 되어버렸지 않나?출장을 갔다 오면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날 것이라는 사실을 연도진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 곧 어떤 짓을 할 게 뻔했다.어쩌면 H 시에 있을 때, 두 사람은 이미 진짜 서로에 대한 감정을 싹틔웠을지도 몰랐다.“만약 정말 연도진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언제 알게 되든 결과는 똑같을 거야. 하지만 연도진을 좋아한다면 조금 더 일찍 알았다고 해도 연도진의 공세에 언젠가 타협하고 말겠지. 네가 봤을 땐, 시연 씨가 연도진 좋아하는 것 같아?”“...”연도진이 먼저 계약 결혼을 제안했을 때,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표정으로부터 뻔히 보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김시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 연도진의 제안을 받아들인 거로 미루어 봤을 때, 마음속으로는 분명 좋아하고 있는 게 맞았다.온하랑은 답답한 기분에 한숨을 푹 내뱉었다.“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어?! 도진 씨가 이엘리아 친오빠라니. 시연이가 분명 도진 씨는 혼혈이 아니라고 했단 말이야.”“듣기로는 예전에 서씨 가문 안주인이 먼저 세상을 뜨고 나서 윌슨 부인이 임신한 몸으로 한 살밖에 안 된 연도진을 끌어안고 강남으로 왔다고 하더라. 힘들었는지 그때 조산을 하게 됐는데 하필이면 병원에 불이 나서 그러다가 연도진을 잃어버렸대. 그렇게 연도진은 강남에서 농부한테 입양됐지.”온하랑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윌슨 부인이 출산한다고 해도 서 씨 가문의 회사를 이어받을 사람인데 연도진을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리도 없잖아. 그런데 그냥 잃어버렸다고? 게다가 병원은 왜 하필 그때
“시연이 남편이 고등학교 동창이라며? 진짜 너무 부럽다!”“냄새 좀 맡아봐. 분장실이 아주 그냥 커플들 냄새로 진동을 한다.”“시연아, 결혼하자마자 바로 이렇게 촬영팀 합류해도 돼? 남편이 뭐라 안 해?”“바보냐? 진짜 뭐라 하고 싶었으면 꽃을 보냈겠어?”“...”김시연은 자신과 연도진의 관계를 외부인들에게 알리기도 싫었고 연도진의 체면을 살려줄 마음도 없었다. 남들의 눈을 피해 연도진이 보내준 꽃다발을 쓰레기통에 박아버린 김시연은 그 사진을 찍어 연도진에게 전송했다.하지만 연도진에게서는 아무런 답장도 오지 않았다.이튿날, 김시연은 또 꽃다발을 받았다.꽃의 종류는 달랐지만 신선한 꽃들이 만개한 것이 여전히 아름다웠다.꽃다발 가운데는 여전히 엽서 한 장이 꽂혀있었다. 엽서에 적힌 내용도 어제와 같았고 또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김시연은 또 동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며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그녀는 또다시 기회를 엿봐 꽃을 쓰레기통에 버린 후, 그 사진을 찍어 연도진에게 전송했다.연도진은 여전히 답장이 없었지만 꽃다발은 계속해서 배송되었다.꽃다발이 오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자 동료들의 반응도 점점 식어갔다.“시연아, 남편이 너무 잘 해주는 거 아니야? 드라마 종영할 때까지 계속 보내주려는 건 아니겠지?”호텔로 돌아온 김시연은 연도진에게 카카오톡을 보냈다.“이제는 꽃다발 보내지 마. 정말 그렇게 주고 싶은 거라면 차라리 돈으로 줘.”“...”이튿날, 일을 마친 김시연이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연도진에게서 9만 9천 6백 원이 입금되어있었다. 그리고 추가요청사항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나의 예술가에게(내가 주고 싶어서)’산부인과 정기검진 날이 되자 부승민은 온하랑과 함께 병원을 방문했다.복도에서 휴식을 취하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온하랑의 눈에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수현 씨?”그 소리에 서수현이 고개를 돌려 조금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온하랑의 아랫배를 바라보며 말했다.“하랑 씨? 정기 검진받으러 오셨구나. 축하
다음날 오전, 부승민은 부시아와 함께 온하랑을 데리고 부현승의 집으로 향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온하랑은 서수현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수화기 너머의 서수현이 말했다.“하랑 씨, 죄송한데 지금 어디 계세요? 혜민이 집에 도착하셨어요?”온하랑은 창밖을 내다보더니 말했다.“아니요, 아직이요. 지금 봉천로 쪽인데, 무슨 일이세요?”“제가 탄 택시가 지금 교통사고가 나서요. 경인로랑 신림로 교차로 쪽에 있거든요. 지금 다른 택시를 탈 수가 없는 상황이라 같은 방향인데 저 좀 태워주실 수 있나 해서요.”서수현이 있는 위치는 온하랑이 부현승의 집으로 가기 위해 꼭 지나야만 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굳이 먼 길로 돌아갈 필요도 없는 곳이었다.“지금 큰아버지랑 같이 계세요?”“저 혼자예요. 아버지는 오늘 같이 못 오신대요.”“알겠어요.”온하랑은 긍정의 대답을 내놓았다.“그럼 거기서 잠깐 기다리실래요? 저희 10분 정도면 도착할 것 같거든요.”“다행이네요. 고마워요, 하랑 씨.”웃으며 전화를 끊은 서수현의 눈빛이 복잡해 보였다.만약... 만약 그녀의 생각이 맞다면 서혜민은 파티장에서 절대 자신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 할 것이다.서수현이 파티 현장에 나타난다고 해도 서혜민의 아이에게 다가갈 수는 없을 것이다.그러니 서수현은 꼭 온하랑과 함께 가야만 했다.15분 정도가 지나자 자동차 한 대가 천천히 서수현 앞에 멈춰 섰다.뒷좌석 창문이 내려가더니 온하랑의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수현 씨, 타요.”서수현은 그녀의 등 뒤로 보이는 부승민을 발견하자마자 침을 꿀꺽 삼켰다.“네.”온하랑, 부승민과 부시아는 뒷좌석에 앉았고 서수현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앉게 되었다.부현승과 서혜민은 한 층에 한 집뿐인 고급 아파트의 20층에서 살고 있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부현승은 온하랑과 부시아가 손을 잡고 내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 두 사람의 뒤로 부승민도 함께 등장했다.부현승은 그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며 부시아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형,
“...”서명철이 먼저 아이를 언급하며 서수현의 뜻대로 행동했다.“거참 잘된 일이네요. 요즘에 예쁘고 잘생긴 거 마다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아기 지금 깨어있나요? 가서 보고 싶은데.”“지금은 안 자고 있을 겁니다.”부현승이 안방을 가리키며 말했다.“안방은 저쪽이에요.”또 한 명의 손님이 집으로 방문하자 부현승은 부승민과 함께 손님맞이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서수현은 주위를 쓱 둘러보다가 온하랑이 기품 있는 한 중년의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 여인이라면 서혜민과 부현승의 결혼식장에서 본 적이 있었다. 부현승의 어머니였다.그때는 멀리서만 보고 자신이 사는 집의 집주인 아줌마와 닮았다고만 생각했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더 닮은 것 같았다.서수현이 그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하랑 씨.”온하랑과 안미영의 시선이 일제히 서수현에게로 향했다.안미영이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수현이? 네가 여긴 어쩐 일이니?”“아줌마, 정말 아줌마셨네요.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잖아요!”서수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저 혜민이랑 제 조카 보러 왔죠.”안미영은 서수현의 성씨를 떠올려보더니 뒤늦게 서혜민과 서수현이 친척 사이라는 것을 깨닫고 웃으며 말했다.“거긴 하랑이랑 같이 가면 되겠네. 난 계속 손님 맞이해야 해서.”“네, 알겠어요.”서수현은 그렇게 온하랑과 함께 안방으로 향했다.문을 열어준 것은 서혜민의 엄마인 정은경이었다.서수현은 정은경을 마주하자마자 인사를 건넸다.“숙모, 안녕하세요.”“수현이 왔구나.”그 말을 들은 서혜민의 표정이 미세하게 떨렸다.서수현이 여긴 왜 왔지?설마...“혜민이랑 아이 보러 왔어요.”온하랑을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던 정은경은 그녀가 부씨 가문 쪽의 친척이라는 것을 알고 웃으며 대답했다.“들어와요.”“언니, 아가씨.”서혜민이 웃는 얼굴로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서수현은 서혜민의 표정을 보며 은근슬쩍 책임을 물었다.“혜민아, 내 조카한테 이렇게 큰 행사가 있었으면서 왜 나한테
온하랑이 자신의 아랫배를 가볍게 문지르며 뭐라도 배우려는 듯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준서는 지금 모유랑 분유 섞어서 먹고 있는 건가요?”정은경이 입을 열려던 그때 서혜민이 먼저 입을 열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렇게 먹이는 게 아이랑 엄마한테 다 좋다고 들어서요.”서수현은 서혜민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발견하고 일부러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너무 이른 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 보니까 보통 6개월은 지나고 나서 분유 먹이던데.”“다 상황이 다르잖아. 이래도 문제없다고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어.”서혜민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싸늘해지더니 더는 이 주제에 관해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을 비쳤다.정은경이 급히 분위기를 바꾸려 노력했고 서수현도 다른 쪽으로 신경을 돌리며 방금 한 질문이 별 의미 없었던 것인 양 행동했다.하지만 온하랑은 그 가운데서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모유에는 아이에게 필요한 영양분과 면역 성분들이 들어있어 갓 태어난 아이에게는 최적의 음식이었다. 아무리 분유를 모유처럼 만들었다고 해도 결국 모유와는 어느 정도 차이가 존재하는 법이다.게다가 부준서는 조산으로 태어난 아이였던 탓에 태어난 후에도 인큐베이터에 며칠 동안 머물며 보살핌을 받았고 지금도 아이는 또래 아이들보다 말라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모유 수유가 분유보다 좋은 게 인지상정인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분유만 먹이기 시작했을까?이상한 생각이 뇌리를 잠깐 스쳤지만 온하랑은 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아마도 서혜민이 아이에게 먹이는 분유가 모유를 대체할 수 있을 만큼 비싸고 영양성분도 가득한 것이리라 생각했다.11시쯤 되자 손님들은 덕만각으로 이동해 파티를 시작했다.서수현은 밥을 먹으면서도 안미영의 동향을 살폈다.파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서수현은 안미영이 화장실 쪽으로 이동하는 걸 바라보았다.그녀는 곧장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두 사람은 화장실 세면대에서 우연히 마주쳤고 자연스레 인사를 주고받았다.안미영이 웃으며 물었다.“수현아, 오늘 음
안미영은 초반에 이 모든 일이 다 서혜민이 뭔가를 숨기기 위해 꾸민 것이 아닐까 싶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그 생각은 곧 사라지고 말았다. 친자확인 검사로 이 아이가 정말 부현승의 아이가 맞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아이가 몇 시에 태어났는데요?”안미영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대답해주었다.“저녁 7시.”서수현이 출산한 지 4시간이 지난 후였다.서수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왜 서혜민이 조산을 했던 걸까? 그것도 하필 부씨 가문 사람이 없을 때.왜 젖이 나오지 않는 걸까?그야 서혜민이 낳은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겠지!비록 실질적인 증거는 없었지만 이 모든 이상한 점들이 서수현에게 서혜민이 안고 있는 아이가 사실은 자신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했다.병원에서는 서수현에게 그녀의 아이가 사산되었다고 얘기해주었지만 그저 봉투만 살짝 열어 아이를 보여주었다.하지만 그 아이가 꼭 서수현의 아이일 것이라는 보장이 있을까?출산 전, 모든 검사가 순조로웠다.서수현이 실수로 넘어졌을 때, 그녀는 곧바로 구급차를 불러 제때 병원으로 옮겨졌고 병원 도착 골든타임도 늦지 않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구급차에 함께 올라탄 의사와 간호사가 차 안에서 그녀의 출산을 도와주었을 것이다.서혜민은 서수현의 임신 사실을 언제 알게 된 걸까?그리고 왜 그런 짓을 저지른 걸까?그 아이는 애초에 부씨 가문의 아이가 아니었다. 언젠가 부현승에게 들킬 것이 두렵지도 않았던 걸까?안미영은 멍하니 있는 서수현의 모습을 보며 물었다.“수현아, 내가 너무 쓸데없는 소리를 많이 했니?”안미영과 서혜민은 단순히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였지만 서수현과 서혜민은 함께 자라온 사촌 사이었다.안미영은 서수현이 서혜민에게 이 이야기를 할지 말지에 대해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지만 서수현이 자신을 심술궂은 시어머니로 볼까 봐 조금 걱정이 되었다.“그럴 리가요? 혜민이가 실수한 건 맞지만 아이는 무사하잖아요. 잘 먹이고 잘 키운다면 분명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