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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김정학 옆에 있던 부하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르신, 따라가서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그냥 보내실 셈입니까?”

부하의 말에 김정학은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귀싸대기를 갈겼다. 어찌나 세게 후려쳤는지 부하가 땅에서 뒹굴 정도였다.

“이런 쓸모없는 머저리 같은 것들! 썩 꺼져버려! 내 눈앞에서 사라지란 말이야!”

김정학은 분노로 끓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텅 빈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땅에 널브러져 있는 부하들을 보면서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S시에서 감히 김씨 가문을 대적할 상대가 있다니……

김정학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 형님한테 가야겠어. 앞장서!”

김정학은 이 일을 한시라도 빨리 김씨 가문의 주인인 김정필한테 알려 그가 나서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김태우는 감히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존재인데…… 한지훈이 그리도 막강한 실력을 갖춘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다니 마음이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낭월 산장.

강우연은 지프차에서 뛰어내리다시피 했고 온통 피투성이인 몸을 하고 비틀거리며 침실로 돌진했다.

그녀는 병상에 누워 편히 잠든 고운이를 보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고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고운이가 울음소리를 들을세라 입을 가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침대 앞으로 걸어가 조심스레 쪼그리고 앉아 고운이의 조그마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울먹였다.

“고운아, 엄마 왔어. 고운아, 엄마야……”

옆에 있던 세 명의 의사는 갑자기 들이닥친 피투성이 강우연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분이 사령관님 부인이신가? 이렇게 다친 몸으로 지금까지 견디다니, 이게 바로 엄마의 힘인가?’

강우연은 급기야 침대 앞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그녀는 정신이 혼미해진 뒤에도 여전히 고운이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정신 차리세요! 얼른 방으로 모셔!”

세 명의 의사는 강우연을 옆 방에 눕히고 동시에 그녀의 상처를 치료했다. 강우연의 총상을 발견하고 세 명의 의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연약한 강우연이 이렇게 심한 총상을 입고도 지금까지 버티다니! 더욱 놀라운 것은 피를 많이 흘렸을 텐데 지금까지 버텼다는 것이었다.

수술 중 혼미한 상태에서도 강우연은 고통스러운 듯 중얼중얼했다.

“고운아, 무서워하지 마. 엄마가 꼭 구해줄게. 꼭……”

“지……지훈 씨, 꼭 살아야 해요. 난 당신을 잃을 수 없어요. 고운이도 아빠를 잃을 수 없어요……”

이 말을 들은 세 의사는 감정이 북받쳐 하나같이 눈물을 흘렸다. 죽음의 문턱에 있는 지금도 강우연은 여전히 딸을 생각하고 있었고 5년 동안 얼굴 한번 보지 못한 한지훈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날, 강우연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긴장한 표정으로 이불을 걷어차더니 분홍색 잠옷 바람으로 병상을 내려왔다. 그녀는 맨발로 뛰어나가며 안달 난 얼굴로 소리쳤다.

“고운아! 고운아! 어딨어?”

용오가 그녀를 향해 달려오더니 다급하게 외쳤다.

“진정하세요! 고운이 괜찮아요. 옆방에 있어요.”

그 말을 듣고 강우연은 용오를 밀치고는 곧장 고운이가 있는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고운이를 보는 순간, 그녀는 가슴이 바닥까지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강우연은 한참 멍하니 있다가 살금살금 침대 옆으로 걸어가 다정하게 고운이를 쓰다듬고 얼굴을 비볐다. 그녀의 눈가에서는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엄마…… 고운이 괜찮아. 고운이 아빠 봤어. 아빠 봤어……”

고운이의 말에 강우연은 다급함에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고 더욱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고운아, 일어났어? 엄마 진짜 너무 무서웠어. 다시는 고운이 못 보게 될까 봐……”

“엄마, 울지 마…… 고운이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겨우 혈색이 돌아온 고운이는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어 강우연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

겨우 네 살인 고운이의 의젓한 모습에 강우연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고 머리를 끄덕이며 눈물을 닦았다.

“응. 엄마 안 울어. 고운이 진짜 너무 기특해. 고운이는 엄마 보물이고 자랑이야.”

“엄마…… 아빠는? 고운이 아빠 보고 싶어…… 아빠 어디 갔어? 아빠 또 고운이 보러 안 오는 거야……?”

고운이는 엄마가 걱정할까 두려워 아주 작게 울먹거렸다. 어린 고운이는 마음속으로 줄곧 한지훈을 생각하고 있었고 어렵게 만난 아빠를 다시 잃을까 봐 매우 두려웠다.

강우연은 한지훈이 살아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 고운이를 위로했다.

“아빠 괜찮아. 아빠 꼭 다시 올 거야. 고운이 착하지? 잘 자고 치료 잘 받으면 아빠 만날 수 있어.”

잠시 후, 용오가 다가와 말했다.

“이제 쉬셔야 합니다. 고운이도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고요.”

강우연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돌아서려 했다.

그 순간, 고운이가 물었다.

“아저씨, 아빠 고운이 때문에 안 오는 거예요? 아빠 찾아주시면 안 돼요?”

평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사나이 용오도 고운이의 말에 무너졌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고운이 착하지? 아빠 괜찮아. 꼭 돌아오실 거야! 고운이가 한숨 푹 자고 다시 일어나면 아빠 만날 수 있어!”

“고운이 말 잘 들을게요…… 고운이 잘게요……”

고운이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이내 잠이 들었다.

강우연은 방을 나와 초조한 얼굴로 용오를 쳐다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훈 씨 어디 있어요? 왜 오지 않는 거냐고요. 혹시 이미……”

그녀는 차마 말을 채 하지 못하고 견디기 힘든 표정으로 말을 가슴을 움켜잡았다.

“형수님, 걱정하지 마세요. 형님 괜찮아요. 곧 오실 겁니다.”

용오는 그녀가 어디라도 갈까 봐 졸졸 따라다녔고 그의 말에 강우연은 침실로 가며 다시 물었다.

“정말이에요?”

그녀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용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말했다.

“따라오지 마요. 곧 돌아올게요. 지훈 씨가 돌아오면 꼭 말해주세요. 제가 많이 사랑한다고…… 우리 딸 잘 돌봐달라고도 전해주세요.”

강우연은 지친 몸을 이끌고 거리로 나가 택시를 잡고는 본가로 향했다.

그녀는 한지훈이 뭔가 큰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감히 김씨 가문의 도련님을 건드렸기에 지원군이 필요했다. 지금 강우연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곳은 강씨 가문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쫓겨난 뒤 5년동안 한번도 이 곳에 온 적이 없었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녀는 초조한 눈빛으로 옷자락을 꼭 움켜쥐고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강우연이 나간 지 10분이나 지났을까, 한지훈이 허둥지둥 쳐들어와 소리쳤다.

“우연아, 나 돌아왔어!”

그는 한시라도 빨리 강우연을 만나고 싶었다. 일초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 한지훈을 바라보며 용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령관님, 지금 사모님 안 계세요……”

그 말을 들은 한지훈의 안색은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그는 용오를 향해 소리쳤다.

“없다고? 우연이 어딨어? 왜 따라 나가지 않은 거야!”

용오가 다급히 해명했다.

“사령관님, 사모님이 따라오지 말라고 하셔서요. 아마 본가에 가셨을 거예요. 아마 도움을 청하러 가신 것 같아요. 사람을 보냈으니 진정하세요.”

“뭐라고?”

한지훈이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옆에 있던 용삼한테 명령했다.

“빨리! 앞장서!”

그는 강우연에게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되었다. 연약한 여자인데다 심하게 다치기까지 했는데 왜 또 그곳에 갔는지 걱정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만약 강우연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한지훈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한편, 강우연이 본가 입구에서 내리자, 눈 앞에는 화려하고 웅장한 광경이 펼쳐졌다. 문 양쪽에는 용봉이 그려져 있는 돌담이 있었고 금빛 대문 앞에는 돌사자 두 마리까지 있었으며 광장 한복판에는 돌용이 달린 분수대가 장관을 이루었다.

강우연은 심호흡하고는 천천히 대문 쪽으로 걸어가 가볍게 대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계…… 계세요?”

대문이 열리자, 강우연의 눈에 들어온 것은 도도하고 차가운 눈빛의 한 여인의 얼굴이었다.

“아이고.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강씨 가문에서 쫓겨났던 년이 감히 어디라고 찾아와?”

강우연의 언니 강희연이 팔짱을 끼고는 얕보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 미안해. 나…… 나 할아버지 만나게 해줘. 부탁할 일이 있어서 그래……”

강우연은 이따금 느껴지는 오른쪽 어깨 통증과 어지럼증에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강희연은 피식 웃더니 곧바로 강우연을 확 밀쳤고 상처가 부딪친 탓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미안하다고? 나한테 미안한 게 다야? 우리 집안에 미안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딴 잡종을 낳겠다고 하던 년이…… 우리 집안이 얼마나 우스워졌는지 알아? 할아버지를 뵙고 싶다고? 꼴에 부탁할 일이 있는 모양이지? 무릎 꿇고 머리 조아려 봐. 그러면 내가 말 전해줄지도 모르잖아? 조아려 보라고!”

강우연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강희연을 바라봤고, 모욕당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퍽! 퍽! 퍽!”

그녀는 이마로 바닥을 세 번이나 쳤고 어느새 피가 줄줄 배어 나왔다. 그녀는 피가 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희연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언니, 내가 이렇게 빌게. 들어가게 해줘. 제발 부탁이야!”

강희연은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강우연을 내려다보며 짜증 섞인 말투로 소리쳤다.

“이런 미친년, 이렇게 비천한 년인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 시키는 건 다 할 셈이야? 허허. 쓸모없는 년 같으니라고!”

강우연은 열 번이나 바닥을 세게 치고 나서야 머리를 들었다. 희고 깨끗했던 이마는 차가운 피범벅이 됐고 그녀의 아름다운 목과 볼을 따라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언니, 이제 됐어?”

강우연은 몸을 가누지 못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음이 조급해 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었다.

한지훈과 고운이를 구하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촤르르!

하지만 강우연의 바람과 달리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더러운 구정물뿐이었다. 그 순간, 그녀는 온몸이 흠뻑 젖었고 어깨의 상처는 형언 못 할 정도로 쓰라렸다.

강희연은 그런 강우연을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보며 멀찌감치 떨어져 소리쳤다.

“너같이 천한 년이 감히 할아버지를 뵙겠다고? 꿈도 크다? 얼른 썩 꺼지지 못해? 너 같은 미친년은 본 적이 없어!”

강희연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강우연의 뺨을 후려갈겼다.

강우연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고통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그녀는 실망감과 좌절감이 극치로 달했고, 머리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지……지훈 씨, 나 너무 힘들어요…… 어디 있어요? 고운아,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널 지키지 못 해줬어. 엄마가 나빴어……”

강우연은 희미해져만 가는 의식을 힘겹게 붙들고 있었다. 모호한 시선 사이로 강희연이 또다시 그녀의 뺨을 때렸다.

그때, 지프차 한 대가 멈춰 섰다. 한지훈은 차창 너머로 강희연이 구정물을 붓는 장면을 보고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살기가 넘치는 눈으로 차 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감히 내 여자를 건드리다니…… 누구든 우연이를 건드린다면 다 부숴버릴 거야!’

짝!

강우연의 뺨을 갈겼던 강희연의 손을 한지훈이 죽일 듯이 꽉 움켜쥐었다. 강희연은 고통에 몸부림쳤고 한지훈이 차가운 말투로 소리쳤다.

“감히 우연이를 건드리다니! 강씨 집안이 무릎 꿇고 우연이한테 용서를 빌게 할 거야!”

강씨 가문 대문 앞에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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