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용이 엄숙하게 말했다.“명왕님, 엄씨 어르신의 뒤에 제경의 거물이 존재하는 것 같으니 그쪽에 미리 말이라도 해둘까요?”“용이야,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하는 소리야?”엄진우는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순간 청용은 온몸에 소름이 끼쳐 털썩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죄송합니다, 명왕님. 제가 잠시 머리가 좀 어떻게 됐나 봅니다.”잠시 잊고 있었다. 명왕은 여태 누구에게도 자기의 움직임을 알린 적 없다는 것을.죽이고 싶으면 죽이는 거지 이유는 필요 없다.단지 죽이고 싶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이유일 것이다.“됐으니까 가서 계속 조사해.”엄진우가 분부했다.“너무 티 나니까 더는 네 기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해. 내가 제때 커버했으니 말이지, 아니면 큰일나.”“네!”말을 끝낸 청용은 순식간에 사라졌다.엄씨 저택 입구.예우림이 막 밖으로 나가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제수 씨 왜 벌써 가? 엄진우랑 싸웠어?”임영우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몸을 훑어보더니 저도 몰래 혀를 날름거렸다.예우림은 싸늘하게 상대를 흘겨보며 대답했다.“그쪽과 무슨 상관이죠?”“내 말이 맞았나 보네. 하하하!”임영우는 큰 소리로 깔깔 웃어댔다.“제수씨, 내 사촌 동생 엄진우 말인데. 걔 춤추는 여자가 낳은 천한 놈이야. 돈도 없고 권력도 없어. 글쎄 할아버지가 걔 인정한다면 운이 좋은 거지. 하지만 이 가문에 들어와봤자 제일 하찮은 존재야.”“그래서 더 할 말 있어요? 없으면 이만.”예우림의 얼굴은 서리가 앉은 듯 싸늘해졌다.그녀는 엄진우를 마음껏 욕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엄진우는 다급히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엄진우는 예우림 씨와 어울리지 않아. 차라리 나한테 오는 건 어때? 나 엄씨 가문 장손이야. 엄씨 가문 미래의 소주, 더 나아가 이 가문 가주가 될 몸이지. 때가 되면 예우림 씨는 엄씨 가문의 주모이자 이인자가 될 거야.”그 말에 예우림은 차갑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아, 그거였어
순간 엄영우는 저만치 날아가 벽에 부딪히며 바닥에 떨어졌는데 귀가 터져서 빨간 피가 뚝뚝 떨어졌다. “영우 도련님!”하인들은 깜짝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엄진우는 여유롭게 손을 거두고 예우림을 안아 들더니 하인 몇 명을 발로 걷어차 날려버렸다.“죽고 싶어? 유부녀 꼬시는 게 취미야?”엄진우는 엄영우의 꿍꿍이를 미리 눈치채고 시시각각 그를 관찰했었다.“비천한 새끼! 어디서 감히 하극상이야! 나 네 형님이야!”뒤로 벌렁 넘어진 엄영우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엄진우를 단단히 혼내주려고 했지만 바닥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온몸 곳곳의 뼈가 부러졌다!그럴 리가! 난 무도종사야!어떻게 엄진우의 한방에 이렇게 부러지지?엄진우는 엄영우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그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내가 말했지? 개가 또 짖으면 대가리 깨버린다고.”예우림은 숨을 크게 몰아쉬며 엄진우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엄진우, 바보 같은 짓 하지 마.”엄진우가 버럭하며 말했다.“그렇다고 보고만 있으라고요?”예우림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노발대발했다.“뭐라는 거야! 패지 말라고 한 적 없어! 엄씨 가문의 장손이라 적당히 해라는 거지.”“걱정 말아요. 내가 알아서 할 게요.”엄진우는 눈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다가가 손바닥을 휘둘렀고 엄영우는 강냉이가 제대로 털려 합죽이가 되어버렸다.“그래도 나 꽤 교양 있는 사람이라 막무가내는 아니야.”“이 씨발! 엄진우, 나 너 가만두지 않아!”엄영우는 화가 나서 온몸이 다 떨렸다.“왜 벌써 사람을 욕하고 그래?”엄진우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나 아직 할 거 하나 남았어. 그때 다시 쫑알거리면 안 될까?”엄진우의 손이 점차 엄영우의 하반신으로 다가가자 엄영우는 대경실색하며 소리를 질렀다.“엄진우! 너 하지 마! 거긴 건드리면 안 돼! 아니면 너 내 손에 죽는다!”부득!경쾌한 파열음이 들리더니 엄영우의 하반신은 이미 피범벅이 되어버렸다.엄영우는 얼굴이 일그러져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너
“누구 짓이야!”엄영우의 피투성이가 된 하반신을 보고 엄씨 어르신은 버럭 화를 냈다.엄씨 어르신은 평소 손아랫사람들의 암투를 아주 넓은 마음으로 관용했다. 어쨌든 적당한 경쟁을 통해 나은 자는 이길 것이고 못한 자는 패할 것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인명피해가 생기는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엄진우가 당당하게 말했다.“저요.”“일부러? 아니면 실수로?”엄씨 어르신의 안색은 이미 극도로 어두워졌다.“일부러요! 제 와이프한테 수작을 부린 이 새끼 가만둬서 되겠어요? 그나마 할아버지 체면을 보고 목숨은 남겨둔 겁니다.”엄진우의 싸늘한 대답에 엄비룡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아버지! 들으셨어요? 이 자식 완전 무법천지예요! 감히 아버지 앞에서 엄씨 가문 사람을 이렇게 만들다니. 누가 봤으면 저 자식이 이 엄씨 가문의 주인인 줄 알겠네요!”그러자 엄비호가 걸걸하게 웃으며 말했다.“말을 그렇게 하면 어떡해요? 형님 아들이 남의 집 마누라 건드렸다가 보복당한 거잖아요.”“엄비호, 너 평소 유부녀 잘 갖고 노는 거 아니었어? 쓸데없는 소리 작작 좀 해!”엄비룡은 바로 쏘아붙였다.“오늘 일은 반드시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야. 엄진우, 내 아들에게 무릎 꿇고 빌어. 지금 당장!”그러자 엄진우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무릎은 개뿔. 당신이 뭔데?”쿵!엄비룡의 얼굴에 순식간에 살기가 치솟았다.“나 오늘 너 반드시 죽여서 갈아 마신다.”최악의 상황에 예우림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어르신, 4대 고대 무가인 엄씨 가문에서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무분별하게 대할 수 있죠? 저 같은 외부인이 봐도 한심할 정도네요.”하수희도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아버님, 무녀 신분 때문에 저 무시하는 거 다 알아요. 하지만 우림이는 명문가 딸이에요! 그런데도 취급할 수 없는 건가요?”“엄비룡, 적당히 해!”엄씨 어르신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싸늘하게 명령했다.‘성지’가 내려지자 엄비룡은 내키지 않았지만 하는 수 없이 뒤로 물러섰다."이번에는 확실히 유부녀를 건
이 순간, 예우림은 단단히 겁에 질려 떨리는 손으로 엄진우의 옷깃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강렬한 공포감은 삽시에 그녀의 뇌를 지배했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 거물들의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잘것없는 여자로 보인단 말인가?이때 하수희가 창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진우야. 이거...... 나......”진퇴양난에 놓인 하수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조바심을 냈다.엄씨 어르신이 제시한 조건은 그 누구도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그 대가로 며느리인 예우림을 내놓아야 한다.엄비룡과 엄비호는 비록 질투심이 폭발했지만 감히 반대 의견을 제기할 수 없었다.이런 큰일에 공개적으로 엄씨 어르신을 거역하면 그 후과는 매우 비참할 것이다. 물론 친아들이라고 해도 소용없었다.마치 옛날의 소주였던 엄비왕처럼 말이다......이때 엄영우가 이를 악물고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큰소리로 깔깔 웃어댔다.“푸하하하! 이 거래 괜찮네요. 전 좋습니다! 저 여자는 그럼 저한테 주시는 거죠? 저년 매일 밤 아주 호되게 박을 겁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제 아버지, 그리고 친구와 부하들에게까지 빌려줄 겁니다.엄진우, 안심해. 그 정채로운 장면은 내가 반드시 성실하게 촬영해서 너한테 보내 줄게.”엄영우는 두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사악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지!널 이기지 못한다면 네 여자라도 제대로 짓밟아 줄 거야. 네가 사랑하는 여자가 내 침대에서 음탕하게 몸을 흔들며 신음하는 모습 꼭 보여줄게.이때 엄진우는 고개를 돌려 예우림에게 물었다.“부대표님은 찬성해요?”예우림은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내 아내가 싫다네요. 그러면 나도 싫어요.”엄진우는 몸을 돌려 큰 소리로 외쳤다.그 말은 또다시 거센 파도를 일으켰다.“엄진우, 너 지금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알고나 있어?”“엄씨 가문의 최고 권력자인 어르신의 말을 거절하는 사람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어!”엄진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그건 당신들이 배
엄씨 어르신은 단단히 화가 났다.“아버지, 명령만 내려주시면 엄씨 가문의 무도종사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저 대역무도한 후레자식을 죽일 겁니다.”엄비룡이 음침하게 말했다.찰나의 순간, 수백 명의 무도종사가 한쪽에 서서 햇빛을 가렸다.하수희와 예우림은 너무 놀라 넋이 다 나갔다.이게 고대 무가의 진짜 실력이란 말인가? 강자가 노하면 백만의 사람이 시체가 되어버리는데 돈이나 권세도 이 앞에서는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엄진우, 그냥 그러겠다고 해.”잠시 머뭇거리던 예우림은 의연하게 말했다.혼자 죽는 것이 다 같이 죽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러긴 뭘 그래? 나만 믿어.”심쿵.엄진우는 몸을 풀며 담담하게 말했다.“사람 많으면 뭐 해? 온통 토종닭과 개들이 뭐 어쩌겠다고.”“하하하! 132명의 무도종사를 지금 토종닭과 개라고 했어?”엄비룡은 이젠 화도 나지 않았다.“아버지, 들으셨죠? 저놈이 비왕이 그 자식보다 더 건방지네요. 아주 저러다 하늘을 뚫을 기셉니다.”엄영우도 개처럼 짖어댔다.“엄비왕은 죽어 마땅하네요. 아들이 더 건방지잖아요!”“그 냄새 나는 입으로 감히 내 아버지를 입에 올려?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뭐 하고 계셨는 지 알아요? 이건 우리 아버지 유품이에요!”엄진우는 싸늘하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내 엄씨 어르신의 발밑에 던져줬다.“탄광이 무너진 뒤 병원으로 실려 갔을 때도 이 사진을 손에 꼭 쥐고 있었죠. 정말 가치도 없는 짓을 생명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고 계시더라고요.그런데 아버지가 가족들이 저런 개돼지보다 못한 모습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기라도 한다면 땅속에서라도 아주 벌떡 일어나겠네요.나 오늘 할 일이 있어서 여기까지 왔어요. 바로 우리 아버지를 위해 복수하는 일이죠. 난 당신 엄씨 가문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는 거예요.다들 잘 들어. 당신들 대가리 깨끗이 씻고 나 기다리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아버지 죽음을 주도한 자, 가담한 자, 그리고 방관자까지
한바탕 우여곡절 끝에 예우림은 엄진우를 다시 보게 되었다.“우림아,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하수희의 따뜻한 걱정에 싸늘했던 예우림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잔뜩 서렸다.그녀는 종래로 고부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었다.“아주머니...... 어머님. 제가 오늘 너무 급하게 나오다 보니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어요. 여기 5천만 원 들어있으니 차라도 사드세요.”분위기를 풀기 위해 예우림은 카드 한 장을 꺼내 하수희에게 내밀며 진지하게 말했다.“부족하시면 말씀하세요. 제가 계좌로 이체해 드릴게요.”하수희는 다급히 예우림의 손을 밀며 말했다.“내가 네 돈을 어떻게 받아. 우림아, 넌 아무 걱정하지 마. 나 혼자 돈 벌어도 충분해. 중요한 건 두 사람의 행복이야. 그리고 빨리 떡두꺼비 같은 아들 낳아서 나 할머니 만들어 줘.”예우림은 흠칫했다.“할머니요?”“그럼. 너 이제 내 며느리가 되었으니 당연히 나 할머니 만들어 줘야지. 경험 없어서 그래? 괜찮아. 처음엔 다 그래. 때가 되면 내가 다 가르쳐줄게.”하수희는 인자하게 웃었다.그러자 예우림의 아름다운 얼굴에 홍조가 뜨겁게 떠올랐다.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이 나이 먹도록 처음 겪어보는 난감한 상황이다.“켁켁! 엄마, 늦었으니 일단 집에 데려다줄게.”상황이 심상치 않자 엄진우가 급히 끼어들었다.“우림아, 너 오늘 회사 급한 일 있다고 하지 않았어?”예우림은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머리를 끄덕였다.“아아! 맞다! 내 정신 좀 봐. 내가 회의 있다고 그랬지?”말을 마친 그녀는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황급히 차를 몰고 떠나갔다.하수희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정말 좋은 애야. 일도 참 성실하게 하나 보네.”엄진우는 너무 웃겨 입이 다 삐뚤어질 뻔했다.“나 저 여자가 저렇게 당황한 모습 처음 봐.”빙산녀도 이럴 때가 있다니. 너무 희한해서 보면 볼 수록 웃음이 나온다.이내 엄진우도 하수희를 데리고 오션 아파트로 향했다.절반쯤이나 갔을까? 인행도로를 건너는데
“동창회?처음 듣는 소리에 엄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대학 입시 후 그는 바로 북강에서 군인이 되었고 그렇게 고등학교 친구들과 천천히 연락을 끊게 되었다.하지만 눈앞의 이 두 사람은 생각이 전혀 다른 곳으로 뻗어가고 있었다.한사나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설마, 설마! 우리 반 1등을 아무도 안 불렀어?”김명휘는 한사나의 잘록한 허리를 거칠게 끌어안고 옆구리를 살짝 꼬집으며 음흉하게 웃었다.“1등은 개뿔, 다 지나간 일이야. 과거는 그저 과거일 뿐이라고.야, 엄진우 너 수능 끝나고 갑자기 사라진 게 혹시 시험 망쳐서 그런 거 아니야? 너 설마 고졸이야?”엄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뭘 하든, 아무한테도 보고할 필요 없어.”당시 그의 점수는 아주 높았으며 심지어 청북대에서도 암암리에 그에게 연락해 등록금 면제와 석박사 과정을 보장한다는 조건을 제시했었다.하지만 그때 국가군사최고관리부서의 사람이 그에게 북강으로 가서 나라를 위해 일하라고 찾아왔다.그 사람이 바로 전직 용국 수호신이다.많은 사람 속에서 한눈에 엄진우를 알아보고 후계자로 선택했던 것이다.그렇게 그는 외롭고 영광스러운 길을 떠나게 되었다.“입만 살아서는. 지금 세상은 말이야, 돈이고 세력이야. 말만 잘해서 뭐 해!”김명휘는 시가를 꺼내더니 졸부의 기세를 뿜어댔다.“엄진우, 동창회 저 앞에 필문 호텔에서 하는데, 너도 갈래?”한사나는 약간 비꼬는 듯한 표정으로 엄진우를 바라봤다.이때 하수희가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미안하지만 안 가는 게 좋겠다. 우리 진우 나 집에 데려다줘야 하거든.”당시 엄진우가 학업을 포기하고 북강으로 떠난 데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바로 하수희의 불치병 때문이다.당시 부대 측에서는 엄진우가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무료로 하수희의 병을 고쳐줄 것을 약속했다.그래서 하수희는 늘 자기가 아들의 앞길을 망쳤다고 자책했다.“아니야, 엄마! 멀지도 않은데 엄마 먼저 들어가. 나가서 동창들 좀 만나고 올게.”엄진우가
그 말에 다들 흠칫하더니 엄진우를 바라보는 눈빛은 더욱 경멸에 차올랐다.들어오자마자 먹을 것을 찾는다고? 구제 불능이네!최고의 우등생이 어쩌다 저 지경이 됐을까.이때 청초한 얼굴에 옅은 화장을 한 긴 생머리의 여자가 간식을 앞으로 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일단 이거 먹고 요기라도 해.”고개를 들어보니 짝꿍이었던 호가연이었다. 그녀도 엄진우에게 고백했다 거절당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아주 쿨하게 친구로 지내자고 했다.고3 때, 두 사람은 함께 수능을 준비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셈이다.졸업 후에야 엄진우도 사실 그녀에게 호감이 있었다는 걸 발견했지만 애석하게도 풍경은 여전한데 사람은 달라졌다.“고맙다, 가연아.”엄진우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호가연은 유감스럽다는 표정으로 엄진우를 향해 물었다.“잘 지내고 있어?”“뭐, 그럭저럭. 난 괜찮은 것 같아.”엄진우가 대답했다.오늘 보니 고등학교 동창 중에 오직 호가연만 엄진우를 진심으로 대하려고 했고 나머지 동창들은 이미 완전히 변해있었다.하위성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말했다.“호가연, 너 저 새끼랑 말 섞지 마! 아까 한사나와 김명휘 말 못 들었어? 저 새끼 스쿠터 타고 다니며 고급 차나 공갈하는 사기꾼이라잖아. 저런 인간 말종이 잘살면 얼마나 잘 살겠어? 숨만 붙어있어도 대단한 거지.”그러자 호가연이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하 사장, 어쨌든 우리 회사 위기만 넘길 수 있게 나 5억만 빌려줄래? 우리 회사 지금 고객의 악의적인 잔금 연체 때문에 파산 직전이야. 돈만 빌려주면 내가 원리금까지 꼭 다 갚을게. 차용증 써줄게.”돈을 빌리겠다는 말에 하위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기침을 했다.“가연아, 내가 비록 돈은 존나 많지만 사업은 유동자금이 필요한 거야. 그래서 나도 현금은 얼마 없어. 물론 그 5억을 못 내놓는 게 아니라 시간이 필요하다, 이거야. 돈 돌리려면 적어도 2, 3개월은 걸려.”호가연은 시선을 김명휘에게로 돌렸다.“명휘야, 그러면 사나와 넌......”두 사람은
남자는 여전히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이때, 서관림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남자는 순간 멍해지더니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엄진우를 힐끗 쳐다보았다. 설마... 진짜일 리가 없겠지? 전화를 받자마자 쏟아지는 것은 거친 욕설이었다. 한편 제경에는 피를 동반한 권력 변화가 대대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보수파는 이용진을 잡은 후 야망이 커져 이 기회에 급진파의 장로들을 모두 제거하려 했다. 급진파의 장로들은 이용진 사건에서 이미 한발 물러섰지만 보수파의 끝없는 욕심을 보고 더는 참기 어려웠다. 양측은 격렬한 충돌을 벌이다 큰 전쟁으로 번졌다. 결국 제경 전역을 봉쇄하고 계엄령을 내렸지만 양측의 교전으로 제경 내부는 화약 냄새가 자욱했다. 하지만 이 충돌은 전 국토로 확산되어 전국적인 전란의 위기를 몰고 왔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대장로가 깨어났다. 몇 년 전, 대장로는 북강 명왕을 해임한 후 깊은 잠에 빠졌었다. 그러다 오늘 드디어 깨어난 것이다. 혼란스러운 제경과 서로 죽일 듯이 싸우는 두 파벌을 본 그는 상황이 되돌릴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반쪽짜리 명왕령을 당장 엄진우에게 가져가고 제경으로 불러들여라! 그때의 일은 내가 친히 설명할 것이다.” 대장로는 수십 년을 함께한 심복을 불러 명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진우는 반쪽짜리 명왕령을 손에 쥐게 되었다. 수년 전 그날, 엄진우는 명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이 반쪽 명왕령을 회수당했다. 이 순간, 명왕령은 드디어 온전한 하나가 되었고 이는 명왕이 다시 자리에 올랐음을 알리는 것이다. 제경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알게 된 엄진우는 아무 말 없이 갑옷을 입고 무장했다. 전투의 기운은 살벌하게 하늘을 찔러댔다. 그는 급히 북강으로 향했다. 북강 잠룡곡. 그곳에는 50만 북강 군대가 수년간 매복해 있었다. “북강군이여, 명령을 받들라!” 긴 외침과 함께 전쟁의 신, 북강 명왕의 모습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50만 북강군은 흥분에 휩싸여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시암은 용국의 동남쪽에 위치한 작은 나라인데 용국 이민자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나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시암의 많은 재벌은 지난 100~200년 동안 용국에서 이민으로 건너간 사람들이다. 현재 시암의 갑부 역시 그중 하나였다. “아버지 성이 서씨야?” 엄진우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뭐 좀 아는구나? 얼마면 되겠어? 가격부터 말해.” 남자는 손을 휘저으며 수표를 꺼냈고 엄진우의 얼굴은 순간 싸늘해졌다. “네 아버지 그까짓 재산으론 내 엉덩이를 닦기도 부족해. 그런데 어디서 감히 큰소리야? 당장 꺼져!” 엄진우는 이 재벌 2세가 그저 방탕한 자식일 뿐, 실지 가문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인간이란 걸 바로 알아챘다. 단지 남을 괴롭히고 돈으로 해결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저렴한 사람이니 더는 상대할 필요도 없었다.남자는 멍하니 엄진우를 쳐다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신 미쳤어? 우리 아버지 시암 갑부라고! 그런데 그까짓 재산이라고?”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맞아! 네 아버지 말이야! 서씨 가문 자산을 합쳐도 200조를 넘지 못해!” 엄진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아, 이 새끼 허세 장난 아니네? 너 200조가 어떤 개념인 줄 알기나 해? 현금으로 바꾸면 너 같은 건 몇천 번도 깔아 죽일 수 있어.” 남자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됐고... 애송이, 당장 여기서 꺼지지 않는다면 시암에 있는 네 아버지가 당장 날아와 널 혼내줄 거야.” 엄진우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남자를 쫓아냈다. “이 새끼 봐라? 감히 누구 앞에서 잘난 척이야? 너 돈에 깔려 죽고 싶어?” “말귀 못 알아듣는 놈이군, 당장 네 아버지를 불러줄게.” 엄진우는 휴대폰을 꺼내 바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서관림 알죠?” 엄진우가 물었다. “선생님, 서관림은 무슨 일로 찾으시는지요? 당장 연락드리라 알리겠습니다.” 전화기 너머의 사람은 다급하게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서관림의 아들이
그녀는 아들이 대체 밖에서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런 원수를 사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고 아들이 정말 수많은 사람을 죽였는지도 궁금했다. 그리고 아들이 그 수단들을 어디서 배웠는지, 긴 세월 동안 이렇게 숨 막히는 날들을 보냈는지 너무 걱정되었다. “집에 가서 얘기하자.” 엄진우는 하수희를 번쩍 안아 들고 회사를 떠났다. 가는 길에 엄진우는 가볍게 하수희의 머리를 쳤고, 곧 하수희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엄진우는 그녀의 일부 기억을 지워버렸다. 집에 돌아와 한참이 지나자 하수희도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진우야, 어쩐 일로 갑자기 돌아왔어?” 엄진우를 본 하수희는 반가움에 어쩔 줄 몰랐다. “나 일 때문에 먼 길 떠나기 전에 집에 좀 들러보려고. 근데 엄마는 왜 소파에서 자? 방에서 편히 자지.” 하수희는 몸을 일으켰다. 이상하다? 몸이 왜 이렇게 뻐근하지? “네 동생이랑 전화하다가 잠들었나 봐. 참 이상하네. 어떻게 말하다 말고 잠들었지?” 하수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손강호에게 납치된 기억은 전부 엄진우에 의해 지워졌다. 하수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이젠 예전 같지가 않아. 좀 쉬고 있어. 엄마가 곧 밥 해줄게.” 말을 마친 하수희는 바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집에서 점심을 먹은 후, 엄진우는 바로 회사로 돌아갔다. 소지안은 아주 신속하고 깔끔하게 회사를 정리했다. 엄진우가 부순 벽은 이미 수리되었고 회사 로비도 완벽하게 청소가 끝나 있었다. “손강호는 창고에 가뒀어. 어떻게 처리할지는 진우 씨가 결정해.” 엄진우가 오자 소지안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손강호가 창고에서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회사에 영향이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요양원으로 보내. 쉽게 죽으면 안 되지.” 엄진우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손강호가 제대로 남은 삶을 ‘즐길’ 수 있게, 엄진우는 돈을 들여서라도 그를 요양원에 보내 죽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래, 바로 연락해
“그래, 빠져나간 쥐새끼가 없다면 지금쯤 손씨 가문은 16세 이하의 어린애와 70세 이상의 노인을 빼고 다 시체가 되었을걸.” 엄진우는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 무자비한 수단을 쓰지 않으면 어느 날인가 상대도 같은 방식으로 그를 해치려고 할 것이다. 손강호의 안색은 그대로 굳어져 버렸고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이때 엄진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남궁민희였다. 엄진우는 전화를 연결하고 스피커폰을 켰다. “상황은 어때? 여기 손씨 가문의 장손이 들을 수 있게 상세하게 말해줘.” “손씨 가문 혈통 총 173명, 노인과 아이 52명을 제외한 나머지 100여 명은 이미 처단한 상탭니다.” 남궁민희가 단호하게 말했다. 풉! 손강호는 분노와 공포가 치솟아 피를 토해냈다. “말도 안 돼! 그럴 수 없어! 제경 손씨 가문이 어떻게!” 손강호는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허겁지겁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전화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지옥에서 확인해.” 엄진우가 싸늘하게 웃었다. “미친놈! 미친 새끼야!” 손강호는 넋을 잃고 절규했다. “난 단지 네 엄마를 납치했을 뿐 해치지 않았어. 하지만 넌 우리 가문 전부를 죽여버렸어. 넌 악마야! 이 개새끼야!!” “너 같은 쓰레기를 낳은 손씨 가문도 도긴개긴이야. 손씨 가문 사람이 천 명이든 만 명이든 우리 엄마의 땀 한 방울보다 하찮다는 걸 기억해. 그리고 이건 너한테 대한 내 보복일 뿐이야. 감히 내 가족을 건드렸으면 이만한 각오는 했었어야지.” 엄진우는 손강호의 욕설도 무시하고 차갑게 말했다. 미리 후과를 생각하지 못한 손강호의 어리석음 때문에 손씨 가문은 이대로 전멸했다. “그렇다면 다 같이 죽어!” 손강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기폭 장치를 눌렀다. 사람들은 너무 놀라 하나같이 두려움에 빠져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불타는 기운이 휘몰아치기 시작했지만 엄진우는 태연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용진 말이야... 끌려가기 직전까지 왜 나랑 정면으로 맞
“그 손 놔!” 이때,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강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두 눈을 의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름답다! 너무 아름답다! 심지어 소지안보다 더 아름다운 자태를 가졌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존재하다니! “나경 씨, 여긴 왜 내려왔어!” 소지안은 너무 놀라 두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내려오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건만. “제가 어떻게 마음 놓고 숨어있어요.” 공나경의 몸은 가늘게 떨렸다.비록 마음속엔 두려움이 가득했지만 그녀는 용감하게 나서기로 했다. 절대 소지안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다. “좋아, 아주 좋아. 엄진우 아주 복이 많은 놈이군. 하지만 이젠 다 내 여자들이야. 용국을 떠나기 전에 이런 행운이 생기다니.” 손강호는 저도 몰래 침을 흘렸다. 그는 소지안을 놓고 다급히 공나경에게로 다가갔다. 공나경은 뒷걸음질 쳤지만 곧 코너에 몰리게 되었다. “하하, 아주 곱군!” 손강호는 두 팔을 벌리고 공나경에게로 달려들었다. 곧 공나경을 품에 안으려는데...쿵!회사 건물 외벽이 갑자기 무너지더니 무너진 틈 사이로 엄진우가 빠르게 다가와 손강호를 향해 발길질을 날렸다. 손강호는 저만치 날아가며 빨간 피를 뿜어댔다. “네가 어떻게?” 엄진우를 본 손강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긴, 엄진우가 이용진을 무너뜨린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상대는 무려 용국 궁정의 장로인 이용진으로 엄진우의 가장 강력한 적수였다. 금방 승리를 거뒀으니 제경에서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어야 하는데... “널 빨리 죽이고 싶어서 말이야.” 엄진우가 싸늘하게 말했다. 여태 손강호를 살려둔 이유는 손강호가 창해시에 있는 한 이용진은 그를 어떻게 처리할지 계속 고민하느라 손을 대지 못할 것이고 그 사이에 엄진우는 이용진을 무너뜨릴 준비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용진이 무너졌으니 더는 손강호를 남겨둘 이유가 없기에 그는 빠르게 비행기를 타고 창해시로 돌아왔다. “아쉽지만 늦었어
엄진우가 탄 비행기는 곧 착륙했고 휴대폰을 켜자마자 엄혜우에게서 온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를 발견했다. 순간 엄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큰일이 아니면 엄혜우가 이렇게 많은 전화를 할 리 없었다. 엄혜우에게 전화를 걸려던 찰나, 엄혜우의 전화가 다시 걸려 왔다. 엄진우는 다급히 전화를 받았는데 입을 떼기도 전에 엄혜우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엄마가 납치당했어!” 순간 엄진우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졌고 주변의 공기마저 살기로 가득 찼다. “알았어. 걱정하지 마. 엄마는 무사할 거야.” 엄진우는 바로 전화를 끊고 남궁민희에게 연락했다. 남궁민희는 아직 제경에 있었는데 아직도 침대에 나른하게 누워있었다. “제경 손씨 가문 정보 가진 거 있어?” 엄진우는 이를 악물며 물었다. 그는 하수희를 납치한 사람이 손강호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창해시에 그와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에 용의자는 단 한 사람, 바로 손강호였다. 더군다나 이용진이 방금 체포된 상황에서 그의 어머니가 납치되었다면 손강호 이외에는 범인이 따로 없다. “있어요!” 화가 난 엄진우의 목소리에 남궁민희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손씨 가문은 이씨 가문 라인이죠. 우리가 날려 보낸 몇천 명의 사람 중에는 손씨 가문 사람도 있었어요.” “16세 이하의 애들과 70세 이상의 노인을 제외하고 전부 처형해.” 엄진우의 얼굴은 사나운 기색으로 가득 찼다. 이것이 무고한 사람을 해치는 것이냐는 문제에 대해서 엄진우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북강의 지배자였고 천 리를 피로 물들인 적이 있었다. 그의 행동은 항상 그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손강호 같은 패륜아를 길러낸 가문에 무고한 사람이 있을 리 없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노인과 어린아이를 살려둔 것만 해도 큰 자비였다. 만약 그가 여전히 북강을 통치하던 때였다면 손씨 가문의 개조차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네, 주인님.” 남궁민희는 굳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손씨 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소지안이 걸어 나왔다. 손강호는 소지안의 미모에 놀라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전에 사진으로 본 적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욱 아름다워 감탄한 것이다. “소 대표, 참 오래 걸리네.” 손강호는 소총을 들고 소지안에게 다가갔다. “날 찾은 이유가 뭐죠?” 소지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싸늘하게 물었다. 그녀는 이런 무법자들에게 겁에 질린 모습을 보여주면 그들이 더욱 날뛸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소 대표가 한 번 맞춰보지, 그래?” 손강호는 소지안의 턱에 총구를 대고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소지안은 전혀 두려운 기색 없이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돈이 필요해요? 회사에 현금 20억이 있으니 당장 가져가도 좋아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고 신고도 안 할 테니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약속해요. 회사 계좌의 돈은 내가 당신에게 이체하려고 해도 그 돈을 가져갈 수 없어요.” 소지안이 침착하게 말했다. “소 대표 아주 대단하네. 이런 상황에서도 이렇게 침착할 수 있다니. 아쉽지만 내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니야.” 손강호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뭘 원하죠?” 소지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내가 원하는 건 바로 당신이야.” 말을 끝낸 손강호는 바로 손을 뻗어 소지안의 얼굴을 어루만지려고 했다. 하지만 소지안은 그의 손을 거칠게 밀어내며 두 눈을 부릅떴다. “내 몸에 손댄다면 당신은 이 창해시를 살아 나갈 수 없어요.” “소 대표 아주 강단 있네. 근데 그 우월함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설마 엄진우?” 손강호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 진우 씨를 노리고 왔네요.” 소지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차갑게 물었다. “역시 소 대표 정말 똑똑해. 어쩔 수 없어. 그 자식이 날 궁지로 몰았으니 나도 이럴 수밖에.” 손강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엄진우가 그를 궁지로 몬 건 사실이다. 창해시에서 그가 저지른 일들을 생각하면 엄진우는 그를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쾅!굉음과 함께 문이 강제로 열리더니 손강호가 부하들을 데리고 집으로 쳐들어왔다. “당신들... 당신들 누구야?” 하수희는 깜짝 놀라 크게 소리쳤다. “누구냐고? 아줌마 납치하려고.” 손강호는 앞으로 세 걸음 다가와 하수희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단숨에 부숴버렸다. “잘 묶어서 끌고 가!” 손강호는 바람처럼 나타나 바람처럼 사라졌다. 엄혜우는 깜짝 놀랐다. 방금 그 사람들 도대체 누구지? 다행히 엄혜우는 침착함을 잃지 않고 떨리는 손으로 바로 엄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엄진우는 비행기에 탑승 중이라 휴대폰이 꺼져 있었다. “그쪽은 잘 진행되고 있어?” 손강호가 부하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비담 컴퍼니 외벽에 이미 폭약을 설치했습니다. 터트리는 동시 건물 전체는 완전히 잿더미가 될 겁니다.” 손강호의 부하가 보고했다. “좋아, 곧 갈게.” 손강호는 그제야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빠르게 비담 컴퍼니에 도착해 손에 배낭을 든 채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소 대표 만나러 왔어.” 예우림은 지금 제경에 있지만 손강호는 비담 컴퍼니의 부대표인 소지안도 엄진우의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예약은 하셨을까요?” 프런트 데스크 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손강호는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예약하지 않으셨다면 먼저 예약부터 하셔야 합니다. 일단 부대표님에게 보고드린 후 전화로 시간 알려드리겠습니다.” 말을 끝낸 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예약 표를 손강호에게 내밀었다. 손강호는 직원의 손을 내치며 들고 있던 배낭을 프런트 데스크에 던지며 지퍼를 확 열었다. “이걸로 예약할 수 있을까?” 배낭 안의 물건을 확인한 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배낭 안에는 뇌관이 가득했다. 손강호는 배낭에서 소총을 꺼내 들더니 천장에 무차별로 사격을 퍼부었다. “다들 쪼그리고 앉아! 소리 지르는 것들은 바로 죽여버릴 거야!” 사람들이 비명을 지
이용진은 공허하고 멍한 눈빛으로 뒤로 한 걸음 휘청거리며 물러섰다. “데려가!” 검찰청 고위 책임자가 명령을 내렸다. 곧 용국 궁정의 원로였던 이용진은 증인과 증거물과 함께 경찰정으로 연행되었다. “오늘이 지나면 이씨 가문은 더는 존재하지 않아. 당신도 이젠 자유야.” 엄진우는 쓴웃음을 지은 채 한숨을 내쉬며 오동방에게 말했다. 오동방은 멍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응시했다. 갑작스러운 자유에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왜? 인생의 목표를 못 찾겠어?” 엄진우가 장난스럽게 묻자 오동방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3년 넘는 시간 동안 모든 포부와 열정이 사라져서 앞길이 막막하네요.” “그럼 내가 일자리 구해줘?” 엄진우가 가볍게 말했다. “선생님과 함께할 수 있다면 당연히 좋죠!” 오동방은 눈빛을 반짝이며 재빨리 대답했다. “내 손에 제약회사가 하나 있는데, 원한다면 수석 연구원의 자리를 주지.” 엄진우는 단지 농담으로 던진 말인데 오동방은 진심으로 그와 함께하길 바랐다. 비록 오동방의 의술은 엄진우의 지도하에 발전한 것이지만 그가 이를 완벽히 소화하고 응용하는 것을 보면 그의 의학적 재능과 능력은 충분히 입증된 것이다. 이런 인재가 합류한다면 회사는 반드시 더욱 강해질 것임이 분명했다. “좋아요! 전 무조건 선생님을 따를게요!” 오동방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엄진우의 말을 수락했다. “예우림이 지금 안강제약 인수 절차 때문에 제경으로 갔으니 오늘 바로 가서 합류하면 돼. 절차가 끝나면 함께 창해시로 돌아와 바로 취임해도 좋아.” 엄진우가 웃으며 말했다. 오동방이 합류한 건 생각지 못한 수확이었다. “선생님은 같이 하지 않는 건가요?” 오동방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난 마무리해야 할 일이 좀 있으니 먼저 가 있어야겠어.” 엄진우는 살짝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창해시. 손강호의 부하들은 완전히 당황한 기색이다. “도련님, 이용진은 이미 몰락했습니다! 듣자니 엄진우라는 그놈이 한 짓이랍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