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환아!”자신에게로 걸어오는 임유환을 보는 서인아의 눈엔 다정함이 흘러넘쳤다.“응.”하지만 임유환의 말투에는 어색함이 묻어있었다.서인아와 눈을 마주치는 것도 기피하는 듯했다.서인아는 마음이 조금 아팠지만 여전히 다정하게 얘기했다. “타, 같이 갈 데가 있어.”“그래.”임유환이 차에 앉았다.“조 기사, 운전해.”서인아의 말투가 다시 차가워졌다.“네, 아가씨!”조 기사는 얼른 시동을 켰다. 아가씨가 이렇게까지 대하는 이 남자는 누구지? 왜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지?가는 길 내내 차에는 침묵이 흘렀다.임유환은 서인아와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은 채로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서인아의 눈은 때때로 임유환에게로 향했다.임유환을 바라보는 순간만 차가운 눈길이 아주 옅은 따뜻함으로 일렁이었다.7년이란 시간 동안 그는 예전보다 훨씬 성숙해져있었다.이렇게 가까이에서 임유환을 바라본 건 너무 오랜만이었다.이대로 시간을 멈출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서인아는 홀로 소망했다.임유환의 눈은 계속 창밖을 향했지만 마음은 온통 다른 곳에 있었다.서인아가 자기를 어디로 데려갈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후.속으로 한숨을 내뱉은 임유환은 이번에 그때의 진실을 알아낼 것이라 다짐했다.그는 고개를 돌렸다.다정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서인아와 눈이 마주쳤다.순간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서인아 역시 임유환이 갑자기 돌아볼 줄은 몰라서 눈에 당황스러움이 스쳤지만 곧 침착해졌다. “밖에 날씨 좋다. 계속 창밖만 바라보네.”“응.”임유환이 대꾸했다.머릿속엔 아까 서인아의 눈빛이 계속 떠올랐다.그리고 서인아 가방에서 떨어졌던 사진과... 서린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설마, 진짜 아직도 나를 좋아하는 건가?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임유환은 이마를 찌푸렸다.마음이 복잡해서 짜증이 났다.“유환아, 왜 그래?”서인아는 임유환이 불편한 줄 알고 다정하게 물었다.“아니야.”임유환이 머리를 저었다.지금 아무 사이도 아닌 서인아에게 사진에 대해서 묻
서인아의 눈동자가 움직였다.과거를 회상하다가 정신을 차리니 다시 현실이었다.해수욕장?임유환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서인아는 왜 날 여기로 데려온 거지?“유환아, 다 왔어. 내리자.”한참 생각하던 임유환에게 서인아가 다정하게 얘기했다.임유환은 숨을 한 번 고르고 서인아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둘은 해수욕장으로 걸어들어갔다.가장 먼저 꽃들과 나무들로 가득한 울창한 숲이 보였다.주위의 풍경이 아주 아름다웠다.조금 더 앞으로 가면 광활한 인공비치였다.모래사장과 맞닿아있는 인공 호수가 에메랄드빛으로 예쁘게 반짝이고 있었다.해변가 옆으로는 빌딩 두 채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솟아있었다.그게 바로 S시에서 유명한 호텔 글로리에스였다. 안에는 음식과 숙박을 포함한 초호화 시설이 갖춰져있었다.임유환은 눈앞의 빌딩과 바다를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평소 S시의 해수욕장은 늘 사람으로 붐볐었다.하지만 오늘은 본인과 서인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설마, 여길 통으로 빌린 건가?“서인아, 여기 전체를 대관한 거야?”임유환은 눈썹을 들썩이며 서인아를 바라봤다.“응.”서인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한테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그 사람들이 보는 것도 싫고.”“허, 역시 부잣집 아가씨라 그런지 통이 크시네.”임유환은 코웃음을 쳤다.나 같은 놈이랑 다니는 걸 보이기 싫은 거겠지. 명성이 자자한 S그룹 큰 아가씨가 나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이랑 있는 게 알려지면 자기 얼굴이 깎일 테니.“유환아, 오해하지 말아줘.”임유환의 차가운 말투에 서인아는 억울했다.그녀는 임유환의 성격을 잘 알기에 그가 지금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하지만 7년 전의 그 일을 겪는다면 누구라도 오해할 만했다.“서인아, 오해고 뭐고 이젠 중요하지 않아.” 임유환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할 말 있으면 그냥 해. 이렇게 전체 해수욕장을 통으로 빌리면서까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뭔데?”이제, 그는 그냥 용건이 끝나면 여길 떠나고 싶었다.서인아와 오래
임유환의 마음이 흔들렸다.서인아답지 않은 질문에 임유환이 말했다. “서인아, 너 어디 아파?”그로써는 가장 그럴듯한 이유라고 생각했다.그렇게 모질게 굴던 서인아가 왜 이제 와서 이런 걸 궁금해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아프냐고?”잠깐 멈칫했던 서인아가 이내 이해하고 살짝 웃으면서 얘기했다. “나 건강해.”“그냥, 이제 다시 볼일 없으면 네가 날 그리워할까 궁금해서.”서인아는 임유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임유환은 망설였다.그럴 리 없다고 대답하고 싶었다.하지만 서인아의 얼굴을 마주하니 도저히 그런 모진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휴.임유환은 깊게 한숨을 내뱉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서인아, 아무리 그래도 자기 인생에 나타났던 사람인데 기억에서 아예 지워버리는 건 불가능하지 않나?”“알겠어.”서인아의 눈에 옅은 웃음이 서렸다.임유환이 질문을 피한 건 맞지만 이 정도 대답으로 이미 충분했다.임유환은 그녀를 잊지는 않을 것이다.“너 진짜 괜찮은 거 맞아?”임유환은 이마를 찌푸리고 한 번 더 확인했다.기분이 이상했다.서인아가 물어볼 법한 질문이 아니었다.“진짜 괜찮아.”서인아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름다운 해변가를 둘러보면서 옅게 미소 지었다. “유환아, 여기 맘에 들어?”“꽤?”임유환은 서인아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대충 대꾸했다.그녀가 풍경이나 감상하자고 여기까지 데려온 것 같지 않았다.“그러면 여기에서 파티를 열라고 할게, 다섯 날 뒤에.”서인아는 마음먹었다.“파티?”임유환이 고개를 갸우뚱했다.“응.”서인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며칠 동안, 여기랑 저 호텔 다 대관할 거야. 그리고 엄청 성대한 파티를 열 거야.”“기대돼?”“내가 왜 기대를 해?”임유환이 미간을 찡그렸다.“너를 위한 파티니까.”서인아가 대답했다.“나?”임유환은 어안이 벙벙했다.자길 위해서 파티를 열다니? 그것도 여기 전체를 대관해서? “서인아, 마음은 고맙지만 난 필요 없어.
"서인아, 내가 말했잖아. 네 도움은 필요 없다고!” 임유환의 목소리가 낮아지며 서인아의 말을 끊었다."만약 네가 정말로 나를 돕고 싶다면 내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마, 그게 나한테 가장 큰 도움이 되니까!” 그가 정말로 저항한 것은 서인아가 자신의 일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었고, 서인아가 단지 이 방법을 통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죄책감을 덜어내려는 마음이었다. 서인아는 임유환의 짜증 나는 표정을 바라보며 진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유환아, 난 정말 널 돕고 싶어. 내가 마지막으로 도울 수 있게 해줘……” "말했잖아, 그럴 필요 없어!"임유환이 한 글자씩 강조하며 말했다."그리고 난 지금 너무 잘 살고 있어. 네가 걱정할 필요도 없다고!” "나는……” 서인아는 다른 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다. "서인아 씨, 더 볼일 없으면 난 이만 갈게. 그리고 축제 일은 신경 쓸 필요 없어, 나도 가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말한 후 임유환은 뒤돌아 해수욕장 입구로 걸어갔고, 그의 미간에는 어둠이 드리웠다. “유환아, 아직 가지 마!” 이를 본 서인아는 하이힐을 신은 채 재빨리 그를 쫓았고, 임유환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단지 가능한 한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유환아!” 서인아는 필사적으로 그를 쫓아갔지만, 하이힐을 신었기에 빨리 걸을 수 없었다. 임유환이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을 본 서인아는 조급해하며 다시 걸음을 재촉하려 했지만, 발목이 갑자기 심하게 흔들리며 삐끗하고 말았다.“아!”그녀는 고통스러워하며 소리를 냈고, 하이힐의 굽이 부러졌다. 서인아는 순간 균형을 잃고 땅바닥에 쓰러졌고, 그 순간 임유환은 뒤를 돌아보았다.그는 땅에 넘어져 있는 서인아를 발견했고, 한걸음에 다가가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싼 채로 자신의 품에 안았다. 여전히 익숙한 느낌이었고, 은은한 체취조차 전혀 변하지 않았다. 임유환의 마음이 떨려왔고, 그의 기억 속에 있던 상념이 갑자기 밀물처럼 쏟아져 나오며 완전히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임유환의
임유환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서인아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시작할게.” 말을 한 뒤, 그는 서인아의 발을 손에 쥐었다. 그녀의 발이 손에 닿는 느낌은 마치 고급스러운 옥을 만지는 듯했고, 서인아의 눈은 심하게 떨리며 가냘픈 몸은 눈에 띄게 긴장되어 있었다.발목은 여성에게 민감한 부위라고 했던가, 게다가 서인아는 누군가가 자신의 발을 만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임유환도 자연스럽게 서인아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느꼈고, 조금 어색했지만 서인아의 발목을 치료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빠르게 치료를 하는 수밖에는 없다고, 속으로 생각을 하며 임유환은 재빨리 마음을 가다듬었다.한 손은 서인아의 맨발을 가볍게 쥐고, 다른 한 손은 엄지, 검지, 중지 세 손가락을 편 뒤 부은 부위를 부드럽게 마사지했다. 임유환의 손가락이 움직이자, 희미한 숨결도 임유환의 손끝을 따라 흘러나와 조금씩 서인아의 부풀어 오른 발목까지 파고들었다.처음에 서인아는 여전히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며 이를 악물고 참았지만 ,점점 더 많은 숨결이 들어가자 따뜻한 기운이 발목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느낌이 매우 묘했고, 마치 노천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밖은 얼어붙을 만큼 추웠지만 물속은 유난히 따뜻했다.그녀의 몸은 점차 편안해졌고, 고개를 숙인 채 임유환의 진지한 표정을 바라봤다. 아름다운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유환아.”그녀는 붉은 입술을 가볍게 벌리고 임유환의 이름을 불렀다. "응?” 임유환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5일 후 축제에 꼭 오겠다고 약속해 줘.”서인아는 방금 전 대화를 이어나갔다. "서인아 씨, 방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난 당신 도움은 필요 없어. 난 지금 생활이 너무 좋고 만족해.” 임유환이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윤서린 씨가 함께 있어서 그런 거야?” 서인아가 물었고, 이내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솔직히 말해서, 서린 씨가 너무 부러울 때도 있어.” 만약 그녀
해수욕장. 서인아는 쪼그려 앉은 임유환을 바라보며 은근한 행복감을 느꼈고, 그녀는 임유환이 기꺼이 그녀를 업어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응!” 서인아는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고, 두 손으로 몸을 지탱한 채 벤치에서 일어나 상체 전체를 천천히 엎드렸다. 그녀의 가슴 앞쪽이 임유환의 등에 닿았고, 그의 심장은 저도 모르게 떨려오며 부드러운 느낌이 그의 등을 따라 빠르게 펴졌다. "후.” 임유환은 숨을 내쉬며 서인아를 등에 업고 해수욕장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7년 전과 똑같은 느낌이었다. 서인아의 몸은 매우 부드럽고 무게도 거의 나가지 않았으며, 서인아도 임유환의 등에서 단단함을 느꼈다. 아직도 그 익숙한 향기가 남아있다.하지만, 7년 전과 비교했을 때 지금 임유환의 근육은 확실히 더 튼튼해졌고 그녀는 여전히 예전처럼 임유환의 등에 머리를 가볍게 기대었다. 이 순간, 그녀는 더없이 편안하고 행복했다. 하지만 임유환의 눈이 떨려왔고, 그는 이 자세가 서인아가 그의 등에 업힐 때 가장 좋아하는 자세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서인아를 업을 때마다 그녀는 늘 그의 등에 머리를 기대는 것을 좋아했고,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했었다. 설마... 서인아는 아직도 둘 사이의 감정을 그리워하고 있는 걸까? 아니, 불가능하다! 만약 이 여자가 아직도 신경을 쓰고 있다면 왜 애초에 그에게 그렇게 차갑게 굴었고, 그를 다 써먹은 뒤에 매몰차게 버린 걸까! 그는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고, 다시는 이 여자에게 속지 않을 것이다! 임유환이 속으로 부인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서인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렸다. “유환아, 네가 처음 나를 업었을 때를 기억해?” 임유환의 눈이 꿈틀거렸다. 서인아가 이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기억나면, 어떡할 건데?” 하지만 그는 차갑게 대답했고, 그의 싸늘한 대답에도 서인아는 슬픈 감정이 들지 않고 오히려 애틋한 마음을 느꼈다. 그녀는 방금 임유환과의 대화를
임유환의 몸이 살짝 굳어졌다.도대체 이 여자는 뭘 하려는 거지!처음에는 과거에 관한 이상한 말을 하다가, 지금은 팔로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이건 커플끼리만 할 수 있는 애정 행각이지 않은가! 한때 그가 서인아를 업어줬을 때, 이렇게 그를 감싸 안는 것을 좋아했지만 지금 그들의 관계로는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서인아 씨, 지금 이러는 건 좀 맞지 않는 것 같은데?” 임유환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난… 그냥 팔이 너무 아파서, 이렇게 하면 편해서 그런 거야.” 서인아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그리고 이렇게 날 업으면 너도 더 편하지 않아?” "서인아 씨, 만약 이 장면을 누군가 목격해서 당신 명예를 실추해도 난 책임지지 않을 거야.” 임유환은 일부러 냉담하게 말했다. "상관없어, 보라고 그래.” 서인아가 대답했다. 이곳엔 그녀와 임유환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있다고 해도, 누군가가 봐도 무슨 상관이지? 그녀는 항상 가족을 위해 자신을 구속해왔고, 이번에 그녀가 S 시에 온 이상 자신만을 위해 행동할 것이다. 임유환은 약간 충격을 받은 듯했고, 서인아가 이렇게 대답할 줄은 몰랐다. 그는 잠시 복잡한 감정을 느꼈고, 그는 더 이상 서인아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죄책감인지, 아니면……분명히 몇 년 전에 헤어지자고 말한 사람은 그녀였고,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도 그녀다.이 여자 지금 나랑 장난 치려는 건가? 임유환의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졌고, 서인아도 계속 침묵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임유환과 단둘이 있는 이 드문 시간을 느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오늘 이후로는 그들 사이에 이런 기회가 더 이상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녀는 최선을 다해 임유환을 위한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줄 것이고, 그 후 그녀는 S 시를 떠나 냉담한 서 씨 집안 아가씨로 돌아갈 것이다.지금 이 시간은 그녀에게 유일한 뜻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좋은 시간은 항상 짧기 마련이다.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 하늘은 이미 캄캄했다. 임유환은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고, 조용히 누워서 좀 쉬고 싶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온통 오늘 오후 해수욕장에서 서인아와 있었던 일뿐이었다. 그는 오른손을 들고 손바닥을 바라보았고, 거기에는 아직도 은은한 촉감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임유환, 너 왜 그러는 거야?” 임유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분명 그는 서인아를 잊겠다고 했었고, 평생 그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그는 자신이 이미 마음을 다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의 마음은 여전히 서인아의 영향을 받고 있는 걸까? 특히나 발목을 삐어 애원하는 표정을 짓는 서인아를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매우 약해졌다. 혹시 그녀는 그 당시 어떤 고충이 있었던 걸까? "서인아, 나한테 숨기는 일이라도 있는 거야?” 임유환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는 진정하고 싶었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은 점점 더 요동쳤다. 특히 그는 방금 전 서인아가 그에게 보였던 친밀한 행동들이 생각났고, 7년 전 그녀와 함께 보냈던 시절이 그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했다. 그 당시 그는 아직 세계 최고의 부자도 아니었고, 세계 군부와 정계의 당수도 아니었다. 그는 스승인 모윤태의 명을 받아 서인아를 보호해야 했고,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은 연경공항이었다. 당시 서인아는 흰색 반팔 셔츠에 하늘색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머리는 풀어헤친 심플하고 세련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서인아에게 한눈에 반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눈빛에 끌렸던 것이다. 그전에는 사람의 눈이 이토록 차갑고 맑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마치 꽁꽁 얼어버린 푸른 호수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서인아와 가까워진 후, 그는 이 여자의 차가움을 진정으로 느꼈으며 그녀가 걷는 곳마다 공기의 온도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당시 서인아의 나이는 고작 열여덟 살이었다.그러나 단순히 고귀하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