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하나는 피식 웃었다.“지환 씨에 대해 아무 느낌이 없다면서, 벌써 그 사람 쪽으로 팔이 굽는 거야?”“하나야…….”이서의 얼굴이 붉어졌다.임하나는 정색하며 말했다.“그래, 알았어, 내가 널 봐서 그냥 놔둔다. 휴우, 잘생긴 남자를 잃었으니, 뭐로 날 보상해 줄 거야?”이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네가 원하는 건 내가 다 해줄게.”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룸으로 돌아왔다.이서가 들어가자 지환의 시선이 이서에게 쏠렸다.이상언은 상황을 보고 일어섰다.“시간도 아직 이른데 영화나 보러 갈까요?”“아니요.”임하나는 이상언과 얽히고 싶지 않아 태도를 분명하게 했다.“나와 이서는 쇼핑하러 갈 거에요. 오늘 맛있게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이상언의 눈동자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그럼 우리도 같이 가요. 쇼핑하면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잖아요.”말을 마치자, 그는 후회했다.지환이 언제 여자들의 가방 들었다고?하지만, 뜻밖에도 지환은 별말없이 순순히 양복을 들고 일어났다.그리하여 이날, 이상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손에 쇼핑백을 가득 든 하지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양손 가득 쇼핑백만 들려 있지 않았더라면, 이상언은 필히 지금 이 모습의 하지환을 찍어 SNS에 업로드했을 것이다.아마도 폭발적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것이다.저녁이 되자, 이서와 임하나는 발바닥이 아플 정도까지 쇼핑을 하고서야 집으로 돌아갔다.이상언은 임하나를 책임지고 데려다주고, 이서는 못 이기는 척 지환의 차에 올라탔다.차가 달리고 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정적만 흘렀다.별장에 도착하자, 이서는 차에서 내려 뒷좌석의 쇼핑백을 꺼내려고 했다.하지환이 한발 앞서 쇼핑백을 들었다.“가요.”이서는 두 벌만 샀다. 나머지는 전부 임하나의 전리품이었다.이서는 쇼핑백을 한 번 보고는 지환의 뒤에서 걸었다.달빛에 비친 두 사람의 그림자는 마치 목을 감고 뒤엉켜 있는 사람 보였다.그림자를 살펴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좀 더 천천히 걸었다
해산물 집에서 도망가듯 빠져나온 민예지는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지환 씨 보고 싶어도 만나러 가지도 못했는데, 이서 이년은 언제 또 지환 씨 절친과 붙어먹은 거야?’‘세상에, 어찌 이럴 수가 있어?’‘안돼.’‘이렇게 잠자코 기다릴 수만은 없어.’민예지는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최현우 씨?”[민예지 씨, 안녕하세요.]“이서 남편이 누군지 알아봐 줘!”그녀는 이서가 도처에서 남자를 꼬시고 다닌다는 증거를 이서 남편에게 보내서 자기 아내를 잘 단속하라고 할 속셈이었다.[아가씨!] 최현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저를 난처하게 하지 마세요. 지난번에 하씨 집안에서도 사람들을 총출동시켜서 며칠간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면서 알아봤는데, 다 헛물켰어요. 이서의 남편이 누군지 아무도 찾지 못했어요. 저한테 알아봐 달라고요? 정녕 알아낸다고 해도, 당신에게 알려줄 때까지 목숨이 붙어 있으려나 모르겠네요.]민예지는 옷깃을 모으며 물었다.“그런 일이 있었어?”[아이고, 아가씨, 단골이니까 알려드리는 거예요. 이 일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아는 사람들도 모두 입을 꼭 닫고 있으니……. 만약 이 얘기가 새어 나간다면 하씨 집안의 체면은 완전히 구기는 셈이지요.]“그럴 리가? 이서가, 자기 남편은 평범한 사람이라고 했는데…….”최현우는 이런 것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사설 정보업체 탐정이었다.[아가씨, 저는 능력이 안 되니 다른 능력자를 찾아보시죠. 하지만 아가씨가 나를 여러 번 챙겨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무료로 정보 하나 알려 드릴게요.]“뭔 데?”[윤씨네 두 자매가 최근에 어떤 화장품 패키지 디자인 콘테스트에 공모 중이라는 얘기가 있더라고요.]말을 마친, 최현우는 화를 자초할까 두려워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민예지는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갑자기 한 달 전에 국내의 몇몇 대형 브랜드 사가 연합하여 디자인 공모전을 진행한다는 뉴스를 봤던 게 기억났다.지금껏 없었던 일이었다.그때 소위 경제 전문가들이란 사람들이
며칠 동안 답답했는데, 디자인 콘테스트 주최 측의, 공모전 결과가 곧 발표된다는 연락을 받고, 이서는 그제야 기분이 다소 좋아졌다.몇몇 대형 브랜드가 연합하여 개최한 패키지 디자인 콘테스트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따라서 공모전 결과를 발표하는 연회장도 고급스럽고 웅장한 것이, 마치 연말 시상식 파티를 방불케 했다.임하나는 테이블 위에 준비된 정갈한 음식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역시 대형 브랜드가 주최하는 행사는 다르구나. 저 디저트들 좀 봐. 모두 유명 브랜드야.”이서는 그녀를 흘깃 쳐다보았다.“네가 언제부터 음식에 관심이 생겼니?”임하나는 뭔가 켕기는 게 있는 듯 말을 대충 얼버무렸다.“요 며칠간 매일 나가서 음식 먹었더니, 음식에 일가견이 생겨버렸네.”이서는 별다른 의심 없이 구석진 자리를 찾아 앉았다.오늘 초대된 사람은 공모전 입상 100위 안에 든 디자이너들이었고, 주최 측은 1인당 두 명의 친인척과 입장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이서는 원래 하지환도 함께 하길 바랬는데, 연회 시간이 다 때까지 출장에서 돌아오지 않아 부득이하게 하나랑 둘이 참석하게 되었다.임하나는 이서 곁에 자리를 잡았다.“이번 공모전에서 대상을 타게 된다면 두둑한 상금 외에 또 하나의 특별 부상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뭐야?”이서는 입상하는 것보다는 공모전 참가 경력을 더욱 중요시하기 때문에 시상내역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다.“난 일자리였으면 좋겠다.”가망이 없는 줄 알기에, 그냥 희망 사항을 말했을 뿐이었다.주최 측이 그녀의 뱃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임하나는 턱을 매만지며 물었다.“이서야, 너 지금 소녀가장 되려는 거 아니지?”이서의 귀밑이 슬그머니 빨개졌다.“무슨 가장이야, 난 이제 윤씨 집안과는 인연을 끊었으니, 내 코나 잘 닦으면 되지.”임하나는 히죽거리며 웃었다.“그나저나 얼굴은 왜 빨개져?”이서는 어색하게 화제를 돌렸다.“조용히 해. 곧 발표한다. 나 지금 긴장한 거 안 보여?”“긴장할 게 뭐 있어?”임
이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화난 임하나를 달래기 바빠 더 이상 깊이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곧 사회자가 무대에 오르며 연회장은 조용해졌다.사회자는 인사말과 개회사를 간단히 하고, 바로 수상자 발표를 진행했다.“다음은, 지안 브랜드의 CEO께서 공모전 격려상을 수상하신 디자이너에게 시상하시도록 하겠습니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대머리의 40대 남자가 무대에 올라, 수상자를 발표하기 시작했다.“격려상 수상자는…… 진루안 님, 축하드립니다.”단상 아래에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임하나는 이서의 귀에 대고 말했다.“정말 시상식 같다.”이서는 입을 앙다물고 무대 위를 보고 있었다. 아까는 전혀 긴장되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지금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이번 공모전은 그녀에게 매우 중요한 기회이다.눈 깜짝할 사이에 은상 수상자도 발표됐다.이서의 목구멍이 바싹바싹 타는 것 같았다.“이제 대상과 금상만 남았어.” 임하나는 이서의 손을 잡았다.“자기야, 나는 네가 반드시 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말이 막 떨어지자 무대 아래에서 더본 브랜드 CEO의 우렁차고 힘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금상 수상자는…… 윤이서 님!”이서는 깜짝 놀랐다.처음으로 선보인 디자인 작품이 금상을 받았다는 것은, 그녀의 작품에 대한 크나큰 긍정이었다.무대 아래에서 무대 위까지 이서는 가장 길고도 짧은 여정을 걸었다.무대에 올라 더본 CEO로부터 트로피를 건네받았을 때까지도, 이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네, 이제 마지막으로 대망의 대상만 남았습니다.”사회자의 목소리는 더없이 우렁찼다.“고연의 CEO인 이명인 여사님께서 대상 수상자를 발표해 주시겠습니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장내에 가장 열렬한 박수가 울려 퍼졌다.이서는 느릿느릿 걸어오는 이 여사를 보았다.이 여사는 시상대 앞에 서서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작은 카드를 펼쳤다.“제1회 ‘뷰티 페이스’ 패키지 디자인 콘테스트의 대상 수상자는…….”“윤수정 님입니다!”“
무대 아래의 임하나는 이서를 위해 손에 땀을 쥐었다.하지만 이서는 마치 함정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듯 가볍고 진솔한 말투로 답했다.“진정한 재능과 뛰어난 실기로, 받은 대상이니 당연히 축하해야죠!”윤수정 얼굴의 웃음기가 순간 굳어졌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는 이 대상을 어떻게 거머쥐었는지 잘 알고 있다. 속이 찔린 셈이다.무대 아래 사람들은 이서의 말을 듣고 박수를 쳤다.이서의 당당한 발언은, 윤수정의 소인배적 심보와 대조되어 더욱 정정당당해 보였다. 이에 사람들은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시상이 끝난 뒤, 상위 5위와 각 브랜드 CEO가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었다.윤수정은 일부러 이서의 곁에서 손에 든 트로피를 흔들었다.이서는 꿈쩍도 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바라보았다.카메라가 찰칵 소리를 내며, 사진사가 연달아 여러 장을 찍었다.촬영이 끝나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물러났고, 윤수정은 내려가려는 이서를 불러 세웠다.이서가 뒤를 돌아보았다.윤수정은 휠체어를 조정해서 이서 앞에 가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내가 말했지, 마지막까지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라고…… 너, 졌어.”이서는 그녀의 품에 든 트로피를 보고는, 허리를 굽혀 그녀의 귓가에 낮은 소리로 말했다.“윤수정, 네 수준이 어떤지 내가 잘 알지,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 지 모르지만, 내 눈은 못 속여.”어렸을 때부터, 수정의 그림 숙제는 매번 이서가 대신해 주었다.수정은 어렸을 때부터 늘 이서가 자기의 앞길을 막고 있다고 투덜거렸다.그러나 수정도, 이서가 하은철의 합격된 아내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잘 모르고 있다.피아노 연습을 하면서도, 손톱이 몇 번이나 빠졌다.노력 없이 높은 곳에 서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얼굴이 창백하고 가슴이 벌렁벌렁하던 윤수정은 한참이 지나서야 마침내 냉소를 지었다.“네가 아무리 인정 안 해도 대회 조직위원회는 내 수준을 높이 평가했어. 언니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원철 오빠처럼
아래의 댓글을 클릭하자 칭찬이 쏟아졌다.[와우, 윤수정 디자인 너무 예쁘다. 언제 출시되나요? 출시하면 무조건 구매각!][가성비를 따지는 소위 ‘똑똑한 소비자’인 나도 이번 디자인에 매료됨. 만약 이 시안으로 패키지 디자인이 나온다면, 나도 바로 구매각!][예전에 윤씨 집안에 윤이서라는 딸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다재다능한 윤수정도 있었군요. 게다가 이번 시합에서 윤수정이 대상, 윤이서가 금상…… 그럼 윤수정이 윤이서보다 더 뛰어나다는 뜻 아닌가?][말해 뭐해? 하씨 집안 도련님의 안목이 이미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듯!][그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상류층 사람들을 잘 모르지만, 하은철의 선택이 잘못될 리 없잖아? 비록 하씨 집안에서 아직 공식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최근 하은철이 윤수정 병문안 가는 사진이나 영상들이 종종 찍혀서 보도되긴 했지…….][더 대단한 것은, 이 작품은 윤수정이 투병 중에 창작한 시안이라는 점! 허허, 윤이서는 환자만도 못하네. 설마 또 하은철 마음 되돌린다고 매일 하은철 뒤꽁무니 쫓아다니는 거 아냐?]댓글을 확인한 임하나도 화가 나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댓글 설전에 참여할 기세였다.이서는 그녀를 말리며 웃었다.“서두르지 마. 재밌는 볼거리는 뒤에 있거든.”……병원 내.하은철은 윤수정이 품속에 안고 있는 트로피를 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수정아, 정말 대단하다. 대상이라니!”윤수정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오빠는 나한테 무슨 상을 줄 거야?”“뭘 원해? 뭘 받고 싶어?”윤수정은 고개를 숙였다.“음…… 오빠가 SNS에서 내게 축하한다는 글을 올려줬으면 좋겠어.”“고작 그거야?”“음.”“거야 쉽지.”하은철은 사진을 찍고 편집하면서 말했다.“이렇게 큰 경사는, 제대로 축하해야지. 앞으로 너 우리 삼촌 산하 기업에서 일할 수 있겠다.”윤수정은 눈을 깜박였다.“이번 콘테스튼 둘째 삼촌이랑 연관 있는 거야?”하은철은 축하 메시지를 업로드했다.“이건 기업기밀이야. 하지만 너에
한 시간 뒤.아래층.급하게 달려온 이천은 하지환 앞에 공손히 섰다.“대표님.”지환은 USB를 이천에게 건네주었다.이천은 받은 USB를 컴퓨터에 꽂았다. 확인해 보니 문서가 하나밖에 없었다.다시 클릭해서 확인해보니 바로 대상의 디자인 시안이었다. 문서 내에는 또 몇 개의 미완성 초안이 들어있었는데 이는 작품이 단계별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이천이 아리송한 눈빛으로 지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지환은 입을 열었다.“이건 이서의 시안 초고야. 조금씩 작업을 할 때마다 컴퓨터에 저장해 놓았더라고…….”하나씩 넘기면서 마지막 그림까지 확인해 보니, 최종 시안이었다.윤수정의 것과 똑같았다.이천은 순간 깨달았다.“이 대상이 사모님의 작품을 표절한 거군요. 아니, 필체가 똑같으니 무단 탈취네요!”‘그렇다면 대상 수상자가 사모님의 작품을 탈취해서 투고했다는 건가!?’침울한 지환의 눈동자에서는 그의 기분을 알아볼 수 없었다.“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히 조사하고, 경찰에 연락해서 이번 사건의 피해를 최소화할 방안이 없는지 확인해 봐.”“네.”이천이 떠나자 지환은 지친 듯 눈을 감았다.비행기에서 내려 지금까지 족히 5시간이 넘도록 그는 한시도 쉬지 못했다.이서를 생각하며,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가려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낯선 번호였다.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2층으로 곧장 달려갔다.대한민국을 떠났던 요 며칠 동안, 그는 매일 이서를 생각하며, 귀국하자마자 달려가서 안고 싶은 충동을 꾹 참느라 너무 힘들었다.집안 어른들은 이미 준비를 다 마쳤고, 일이 끝나는 대로 이서를 데리고 부모님 뵈러 갈 계획이다.차가운 밤, 지환의 온몸에는 정열의 피가 들끓었다.2층에 올라갔는데도 핸드폰이 끈질기게 울렸다.지환은 눈살을 찌푸리며, 번호를 차단했다.세상이 다시 조용해졌다.전화기 너머의 민예지는 자신의 핸드폰 번호가 차단당한 것을 알고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이서 그 쌍년이 차단한 게 틀림
이서는 세수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아침을 했다.음식을 식탁에 올릴 때까지만 해도, 지환에게 친구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지만, 고개를 들어 지환을 보는 순간 머릿속은 백지장이 되었다.평상복으로 입은 그는 평소의 정장 차림에서 볼 수 없었던 친근한 이미지가 더해졌다.“오늘 아침 메뉴는……?”지환아 의자 당기면서 말했다.이서는 황급히 시선을 거두었고, 가슴이 콩닥콩닥 나대기 시작했다.일순, 이서는 두 사람의 라이프 패턴이 오랜 세월 함께 지낸 노부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야채수프래요, 떠다 드릴게요.”“내가 할게요.” 지환이 먼저 주방으로 들어갔다.이서는 제자리에 서서 지환이 수프 뜨는 것을 지켜보았다.지환은 동작이 빠릿빠릿했다. 수프를 그릇에 담으면서 말을 꺼냈다. “며칠 있다가 우리 아버지 만나러 갈 거예요.”이서는 멍해졌다.“아버님 성격이 급하신가 봐요…….”‘수정의 디자인 시안 탈취 사건 의로 및 조사하는데도 며칠이 걸릴 텐데.’지환이 동작을 멈칫했다.그의 아버지가 급한 게 아니라 그가 급한 것이다.“가기 싫어요?”“아니요.”이미 승낙한 이상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는다.“다만 공모전에 작은 문제가 생겨서 처리하는데 며칠이 걸릴 수도 있어요.”지환이 찌푸렸던 눈살을 폈다.“작은 문제니 곧 처리되겠죠. 마무리되면 그때 갑시다.”이서는 가볍게 웃었다.‘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닌데.’아직 증거를 주최측에 보내지도 않았다.그리고 보내더라도 그쪽에서 조사하는 데 시일이 걸린다.적어도 일주일은 걸려야 결과가 나올 텐데…….식탁에 앉자마자 임하나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젠장, 정말 윤수정처럼 뻔뻔스러운 여자는 처음 본다!]임하나는 화가 나서 콧구멍으로 바람을 내쉬었다.[그년이 개인계정에, 얼마 전에 자기가 부주의로 너의 물건을 부쉈는데, 네가 변호사를 선임해서 자기를 고소하려고 한다는 글을 올렸더라!][썅, 부주의? 부주의라고? 부주의로 너희 집을 그 지경으로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