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는 세수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아침을 했다.음식을 식탁에 올릴 때까지만 해도, 지환에게 친구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지만, 고개를 들어 지환을 보는 순간 머릿속은 백지장이 되었다.평상복으로 입은 그는 평소의 정장 차림에서 볼 수 없었던 친근한 이미지가 더해졌다.“오늘 아침 메뉴는……?”지환아 의자 당기면서 말했다.이서는 황급히 시선을 거두었고, 가슴이 콩닥콩닥 나대기 시작했다.일순, 이서는 두 사람의 라이프 패턴이 오랜 세월 함께 지낸 노부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야채수프래요, 떠다 드릴게요.”“내가 할게요.” 지환이 먼저 주방으로 들어갔다.이서는 제자리에 서서 지환이 수프 뜨는 것을 지켜보았다.지환은 동작이 빠릿빠릿했다. 수프를 그릇에 담으면서 말을 꺼냈다. “며칠 있다가 우리 아버지 만나러 갈 거예요.”이서는 멍해졌다.“아버님 성격이 급하신가 봐요…….”‘수정의 디자인 시안 탈취 사건 의로 및 조사하는데도 며칠이 걸릴 텐데.’지환이 동작을 멈칫했다.그의 아버지가 급한 게 아니라 그가 급한 것이다.“가기 싫어요?”“아니요.”이미 승낙한 이상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는다.“다만 공모전에 작은 문제가 생겨서 처리하는데 며칠이 걸릴 수도 있어요.”지환이 찌푸렸던 눈살을 폈다.“작은 문제니 곧 처리되겠죠. 마무리되면 그때 갑시다.”이서는 가볍게 웃었다.‘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닌데.’아직 증거를 주최측에 보내지도 않았다.그리고 보내더라도 그쪽에서 조사하는 데 시일이 걸린다.적어도 일주일은 걸려야 결과가 나올 텐데…….식탁에 앉자마자 임하나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젠장, 정말 윤수정처럼 뻔뻔스러운 여자는 처음 본다!]임하나는 화가 나서 콧구멍으로 바람을 내쉬었다.[그년이 개인계정에, 얼마 전에 자기가 부주의로 너의 물건을 부쉈는데, 네가 변호사를 선임해서 자기를 고소하려고 한다는 글을 올렸더라!][썅, 부주의? 부주의라고? 부주의로 너희 집을 그 지경으로 다
그래서 최근 둘은 틈만 나면 같이 밥 먹으러 다녔다.둘은 밥 친구일 뿐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아니요.”이상언은 점잖게 웃었다.[그럼 무슨 일로 전화했을까나?]“이서요, 네티즌들이 이서 악플 달고 있어요.”임하나는 사건의 경위를 간단히 말했다.“지환 씨 어제 출장 다녀왔잖아요, 요 며칠은 집에서 이서랑 함께 있어 주면 안 될까요? 밖에 나가서 이 여자 저 여자 집적대지 말고…….”괜히 이서에 신경 안 건드리게…….[지환이가 밖에서 집적댄다고요? 언제?]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요. 이서도 직접 눈으로 봤어요.”임하나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잘생긴 남자를 좋아하는 하나도 절대 양다리는 걸치지 않는다.“언제 있었던 일이에요?”‘지환이 그 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막 나갔지?’“그날 이서가 나에게 도시락 배달 왔을 때…….”그 여자가 누군지 이서는 말하지 않았다.“나중에 얘기해요. 회의 시간 다 됐네. 아, 지환 씨한테 연락 좀 해줘요. 이서랑 같이 있어 주라고…….”이상언은 바로 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통화 중이었다. 다시 걸었을 때는 전원이 꺼진 상태였다.……하씨 그룹 산하 병원.윤수정은 온통 이서를 비방하는 댓글을 보면서, 눈이 안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효과가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어.”간병인이 옆에서 지켜보며 빙그레 웃었다.“조금만 더 있으면 송시묵 변호사라도 여론의 압력에 굴복해 소송을 취하할 거예요.”윤수정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이서의 똥 씹은 표정을 볼 수 없어서 아쉽다.”‘아주 가관일 텐데.’그녀는 고개를 들어 방에 가득 찬 선물 박스를 보며, 얼굴의 웃음이 더욱 환해졌다.어제 하은철이 개인계정에 축하 메시지를 남긴 뒤, 북성 4대 가문을 제외한 대부분 정∙재계 인사들이 다양한 선물을 보내왔다.다들 그녀를 미래의 하씨 집안 작은 사모님으로 추대하고 있었다.“내 핸드폰 좀 줘요, 사진 찍어서 올려야겠다.”간병인이 윤수정의 핸드폰을 갖다주었다.윤수정은 선물 보따리를 향해 찰
이 기사가 나오자마자 여론 방송가에 후폭풍이 일어났다.[무슨 소리야? 윤수정의 수상 작품이 윤이서 거라니? 그럼, 윤수정이 윤이서의 작품을 표절한 거야?][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닌 거 같은데……? 어제저녁, 윤이서가 주최 측에 시안 제작 과정 파일을 보냈대. 두 시안이 완전히 똑같다고 하던데? 윤수정이 윤이서의 시안을 탈취했다고 의심하는 관계자들도 있어.][……?][설마 훔쳤다고? 누가 그리 멍청한 짓을 해? 어차피 난 안 믿어. 주최자 측도 윤이서가 매수한 거 아니야? 윤수정, 뭐하냐? 저쪽이 조작한 거라는 증거 빨리 제시해!][나도 주최 측이 윤이서에게 매수됐다는 의견에 한 표! 틀림없이 윤수정을 질투한 윤이서가 주최 측을 매수하여 원작자 정정 어쩌고저쩌고 한 거야!][디자이너로서 한마디 하자면, 이 두 작품의 디자인 이념은 완전히 달라. 대상은 패키지 디자인의 외관적 미를 선호한 반면, 금상은 마케팅 이념 쪽에 더 많이 치우쳐 있어. 좀 더 성숙하달까? 딱 봐도 베테랑 디자이너 작품이야. 그런데 어떻게 동일 인물의 작품일 수 있겠어?]대중들의 질문세례에 주최 측은 이서의 작품 초고와 시안 완성 시간, 그리고 윤수정의 투고 시간도 같이 공개했다.시간상으로 봤을 때, 이서의 시안 완성이 먼저고, 윤수정의 투고는 그 뒤였다.대중이 아직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는데, 또 하나의 메가톤급 소식이 대중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몇 년 동안 언론과 미디어에서 잠적했던 송서묵, 송 대변호사가 뜻밖에도 자신의 인스타에 새 글을 게시했다.그의 첫 번째 소식은, ‘은퇴 후의 뷰티풀 라이프’가 아닌 윤수정의 변호사로 영입되었다는 내용이었다.[제가 바로 윤이서 님의 대리 변호사입니다.]짧은 한 줄의 새 글이 소동을 일으켰다.[……?][이게 무슨 상황이야? 송 대변호사, 은퇴했잖아? 게다가 하씨 그룹에서도 영입하지 못한걸, 윤이서가 무슨 수로?][어리둥절, 윤이서가 대체 송 대변호사한테 무슨 딜을 한거야? 송서묵, 빨리 도망가, 송 변님, 평생 이룬 명예…
이서는 눈을 들어 소파에서 태블릿을 보고 있는 지환을 쏘아보았다.그리고는 공식 사이트에서 제시한 디자인 스케치를 다시 한번 보았다.“당신이…….” 이서가 일어섰다.지환은 인기척을 듣고 눈꺼풀을 치켜떴다.“왜?”“당신이 어제저녁에 증거를 확보해서 주최 측에 보낸 건가요?” 이서가 목구멍을 뚫고 무엇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음.”이서의 마음속에는 만감이 교차했다.“그리고 송 변호사님…… 그것도 당신이 시킨 거예요?”지환은 침묵하며 이서의 눈동자를 응시했다.이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지환에 대한 고마움을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라 막막하기만 했다.민예지가 그들 사이에 끼어 있는 게 아니라면, 아마도 몸과 마음을 다 바쳤을 것이다.핸드폰 벨소리가 울리자, 이서는 생각을 거두었다.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한 번 보았다.임하나한테서 걸려온 것이었다.전화기 너머에서 흥분된 임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자기, 너 설마 진작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거 아니지?!]회의를 마친 임하나는 서둘러 컴퓨터를 켜서 네티즌들과 한바탕 싸울 계획이었다.그런데, 웬걸 언론이 바뀌었다.‘너무 빠른 거 아니야?’‘단지 잠깐 회의하고 나왔을 뿐인데.’이서는 빙그레 웃으며 몰래 눈을 들어 지환의 방향을 훔쳐보았다.“내가 어떻게 일의 진전을 예지할 수 있겠어?”[그런데 이렇게 빠르게 후속 조치가 이루어진 것은, 딱 봐도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는 얘긴데……. 보자, 정말 네가 한 거 아니냐?]“송 변호사 쪽은 그렇다 쳐도, 주최 측에 아는 사람이 하나 한 명도 없는데, 내가 뭘 할 수 있겠니?”임하나가 생각해도 그랬다. 그녀는 턱을 쓰다듬으며 깔깔거리며 웃었다.[자기, 혹시 이 몇 브랜드 중에 너를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거 아냐? 그래서 네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선뜻 나선 거 아니냐고?]“너 요즘 드라마 너무 많이 봤구나……?” 이서는 웃었다.저쪽에서 이서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맙소사!! 이서야, 빨리 기사 봐봐, 그 몇몇
이서는 ‘실없다’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자마자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낯선 번호였다.이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받았다.“여보세요?”[안녕하세요, 윤이서 씨 되십니까?]“네.”[저는 서우 그룹에 새로 부임한 CEO 김청용입니다. 우선 공모전 심의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로 윤이서 씨에게 피해를 드려서 진심으로 죄송합니다.]‘어라, CEO가 직접 사과하네.’‘급이 좀 많이 높은데?’“그래도 잘 해결됐으니 다행입니다.”[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김청용의 목소리는 매력적이었다.[회사 내부에서 상의한 결과, 윤이서 씨가 명실상부한 대상, 금상 수상자로 상금과 부상을 모두 윤이서 씨에게 지급할 예정입니다.][일전에 공표했듯이 대상 수상자에게는 특별 부상이 주어집니다. 바로 새 회사의 평생 총괄 디렉터로 초빙하는 것입니다. 혹시 윤이서 씨는 저희 회사에 입사할 의향이 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이서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그녀가 가장 원했던 게 바로 일자리다!‘대상의 특별 부상이 일자리 제공이라니!’‘대박! 죽인다!’ “그럼요, 귀사에 입사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인수 합병 그룹인 서우의 배후에는 하은철 둘째 삼촌이 있다.향후 나날이 발전할 것이다.입사는 이서가 꿈에도 생각 못 했던 일이었다.김청용은 한숨을 돌렸다.[윤이서 씨, 혹시 이 외에 다른 보상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이서는 웃으며 말했다.“아니요, 이렇게 신속하게 사건의 경위를 밝혀준 것에 대해 감사할 따름입니다.”김청용은 이서가 전화를 끊고 나서야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어젯밤, 새벽 3시에 불려 가 공모전 사건을 조사했다.사건 조사 과정에서 ‘뷰티 페이스’콘테스트 관련 책임자들은, 고위층이든 중층이든 심지어 몇 명의 대형 브랜드 CEO까지 모두 짤렸다.이 일로, 위에서 얼마나 진노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김청용은 이서의 자료를 찾아 보고서야, 그녀가 대표의 예비 조카며느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헐, 대박 면이 서겠구먼!][이렇게 대형 그룹의 첫 번째는 소식이 디자인 디렉터의 입사를 환영이라니.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소식통에 의하면, 서우 대표가 하은철 삼촌이래. 만약 하은철과 윤이서 사이가 틀어졌다면, 그의 삼촌도 굳이 이렇게 체면을 봐줄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맞아, 그래서 이 자료들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거야.]“…….”공식 사이트에 등장한 첫 번째 기사는 네티즌들의 눈에 심심풀이 땅콩, 팝콘각이었다.그러나 상류사회에서는 적지 않은 풍파가 일어났다.특히 4대 가문은 더 오리무중이었다.몇몇 대형 브랜드의 인수 합병은 하원철 큰집의 손이 대한민국 시장까지 뻗었음을 의미한다.그러나 그전에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이날의 여론 폭풍의 반전으로, 이서가 다시 하씨 집안과 혼약을 이어갈지에 대해서도 여론의 중심이 되었다.그 중에서도 가장 당황한 사람들은, 바로 어제 하루 종일 이서를 조롱하던 윤씨 집안 사람들이었다.그들은 채팅방에서 미친 듯이 이서에게 메시지를 남겼다.[내가 그랬잖아, 이서가 어떻게 수정에게 밀리겠어? 그러고 보니 이서가 자기 작품에 진 거야.][쯧쯧쯧쯧, 수정아, 네가 언니를 이기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알겠어. 하지만 어떻게 언니 작품을 훔칠 생각하니? 같은 윤씨 집안 사람인데 어떻게 수준 차이가 이렇게 날 수 있니?][윤씨 가문의 망신은 니가 다 시켰다. 너랑 한 집안 사람이라니, 정말 평생 재수가 없겠어!]“…….”우후죽순마냥 쏟아진 비난에 윤수정은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바람 부는 대로 돛 다는 천한 놈들!’상황을 지켜본 간병인은 얼른 윤수정의 휴대전화를 챙겼다.“아가씨, 화내지 마세요. 그 사람들, 승자 편이에요. 그런 인간들과 화낼 필요 없어요.”윤수정은 손톱이 살에 파이도록 주먹을 불끈 쥐었다.“나는 그 사람들에게 화 난 게 아니야. 윤이서, 그 썅년! 내가 그년 노트북을 완전히 박살냈는데 그 스케치들은 어디에서 되찾은 거지? 설마 그년, 내가 자기 작품으로 공모전에 참가할 것
윤수정은 비록 내키지 않았지만, 하은철 앞이라 어쩔 수 없이 그러겠노라고 했다.그녀는 이서가 분명히 자기를 비아냥거릴 거라고 확신했다.그때가 되면 또 억울한 척 모든 잘못을 이서에게 떠넘길 수 있으니 어찌 보면 일거양득인 셈이다.이서에게 카톡을 보낸 윤수정은 메시지 옆에 1이 계속 사라지지 않자,전화를 걸려고 시도했다가 핸드폰 번호도 차단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코를 들이마시며 ‘막막한’ 표정으로 하은철을 바라보았다.“언니가 화가 많이 났나 봐. 내 모든 연락처를 차단했어. 오빠, 핸드폰 좀 빌려줄 수 있어?”하은철은 휴대전화를 꺼내 윤수정에게 건네주었다.윤수정은 연락처에서 이서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그녀는 하은철의 카톡을 클릭했다.하은철은 그제야 자기 카톡도 차단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내 카톡도 차단됐어.”하지만 윤수정은 봤다.하은철이 지난번 보냈던 축하 메시지를…….[금상 수상 축하해.]윤수정은 눈을 깜박거리며 손가락을 꽉 쥐었다.그녀는 대상을 탔음에도 하은철에게 축하 메시지를 ‘구걸’했었다. 그런데 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하은철의 축하를 받았다.“오빠, 할아버지는…… 요즘도 오빠랑 언니 잘됐으면 해?”하은철은 그녀의 기분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응.”“그래서 오빠도…… 다시 시작하고 싶어?”하은철은 표정이 굳어지며 눈동자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할아버지 명령이니까. 근데, 수정아 걱정 마. 이서 마음이 돌아서면 그땐 내가 사정없이 그녀를 차버릴 테니까.”그는 단지 오기가 생겼을 뿐이다. 과거 그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던 꼬리가 보이지 않자 오기가 생겼다.주먹을 꽉 쥔 윤수정의 눈빛이 표독스러워 보였다.‘윤이서, 널 더 이상 가만둘 수 없어!’……거액의 상금에 일자리까지 보장받았으니 당연히 임하나에게 한 턱 내야 했다. 게다가 이 기회를 빌려 지환에게 감사를 표하려 했다.“그럼, 상언도 같이 데려가요.”하지환이 말했다.이서도 별 의견이
“그럼 왜…….”“이서야!” 이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하나의 업 된 목소리를 들었다.목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 바라보니 마침 이상언 차에서 내리는 임하나를 보았다.“둘이…… 같이?”“네.” 이상언이 말했다. “축하해요, 윤이서 씨.”이서는 이상야릇한 눈빛으로 임하나를 바라보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이상언에게 인사했다.“감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냥 편하게 이서라고 불러 주세요.”“이서?” 옆에 있던 하지환의 목소리가 콧방귀와 함께 터져나왔다.이상언은 지환을 한 번 힐끗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에이, 그럼 성은 빼고, 이서 씨라고 부를게요. 이서 씨도 저를 의사 선생님이 아닌 이름으로 불러주세요.”“네. 상언 씨.”말하는 사이, 네 사람은 포장마차 안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지환은 계속 고개를 숙여 플라스틱 의자를 살펴보았다.이서가 물었다.“왜요?”포장마차에 도착했을 때부터 지환은 이상했다.이상언이 농담을 던졌다.“쟤 신경 쓰지 마요. 큰집 도련님께서 처음으로 신분을 낮추고 이처럼 누추한 포장마차를 방문하시니 적응 못 하는 게 당연하지요.”임하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지환 씨, 포장마차에 처음 오는 거예요?”이상언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지환이 보내온 ‘그윽한’ 눈빛을 받았다.그는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지환이…… 이런 거 안 좋아해요.”“아…….” 임하나는 시선을 이서에게 돌리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자기, 먼저 서우의 평생 디렉터가 된 걸 축하해. 이제 철밥통 직장인이 되었네.”이서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고마워, 나도 대상 부상이 일자리일 줄은 몰랐어. 완전히 날 위한 맞춤 공모전 같아.”이상언은 별 내색하지 않고 지환을 흘겨보았다.지환은 눈꺼풀도 움직이지 않았다.“이제 하은철 삼촌 회사에 들어가니, 앞으로 그를 만날 기회가 있겠다.”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꼭 그렇지는 않을걸? 얼마나 바쁜 분인데…….”지난번에도 바람 맞았다.지환이
고이서는 두 사람이 단톡방에 보낸 메시지를 보고 꽤나 만족스러워하며 웃기 시작했다.하지만 자신이 아주 특별한 신분임을 잊지 않았고, 절대 외부인에게 자신이 원래의 ‘윤이서’라는 사실을 알리면 안 된다는 것을 되새겼다. ‘윤이서가 나와 엄마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다면, 분명히 의심할 거야.’고이서가 걱정을 털어놓자, 성지영이 무심히 말했다.[얘, 그렇게 우연히 만날 리가 없잖아. 이렇게 큰 도시에서 쇼핑하다가 윤이서를 만난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란다.]윤재하도 그런 우연이 일어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우리 딸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야. 곧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끝날 텐데,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서 골치 아픈 일을 만들 필요는 없잖아?][그래도 드레스가 사고 싶다면, 교외로 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군.][윤이서가 교외로 쇼핑가지는 않을 테니까.]성지영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교외에서 어떻게 그럴듯한 드레스를 살 수 있겠어요?] 고이서는 시내에서는 이서를 만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교외에서는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엄마, 교외에는 제대로 된 드레스가 없긴 하겠지만,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잖아요.][제가 윤씨 그룹의 대표가 되면, 시내의 드레스는 물론이고, 고급 럭셔리 브랜드의 드레스까지 전부 집으로 보내드릴게요, 네?]이 말은 성지영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어머, 우리 딸 말하는 것 좀 봐? 그래, 토요일에 시외에서 쇼핑하자꾸나.][네, 엄마.]고이서는 약속 시간을 정한 후에야 핸드폰을 내려놓고 업무에 집중했다. 한편, 최고층에 있던 이서는 전화하고 있었는데, 이는 소희가 걸어온 것이었다. [이서 언니, 긴급 상황이에요. 저 좀 도와주세요!]이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어젯밤에 부모님께 현태 오빠의 존재를 털어놓았잖아요.][그런데 오늘 아침에 아빠가 저를 서재로 부르셔서는 다음 주 월요일에 현태 오빠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셨어
“나는 과거에 살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요.”조용히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눈빛에서는 고통이 요동치고 있었고,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지환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울부짖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감정은 입술 끝에서 단 세 글자로 바뀌고 말았다.“알겠어.” 이서도 지환의 이런 모습에 마음이 괴로웠다.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마다 과거만 떠올릴 뿐, 그 누구도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그것은 그저 과거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그만 먹을래요.”이서는 황급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병실을 떠났다. 차에 오르자, 이서는 고통이 온몸으로 번지는 듯했다. ‘하지환 씨가 하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늘은 왜 우리한테 이런 장난을 친 걸까?’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차 안의 카펫을 바라보던 이서는 운전기사의 말을 듣고서야 회사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에서 내린 이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또 고이서를 마주쳤다.다시 고이서를 마주한 이서의 감정은 완전히 뒤바꾼 후였지만, 그러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고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고이서가 빙그레 웃으며 이서를 바라보았다.“윤 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젯밤에는 잘 주무셨나요?”“덕분에요.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를 마신 이후로 아주 잘 자고 있어요.” “참, 지난번에 꽃차가 부족하면 더 구해줄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큰 걸로 하나 더 구해주실 수 있을까요?”이서가 주동적으로 꽃차를 더 달라고 하자, 고이서의 눈동자에 기쁨이 번졌다.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서는 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윤씨 그룹에 들어온 거였구나.’‘재무팀 팀장을 다시 구해봐야겠어.’어쨌든 재무는 한 회사의 존망이 달린 것이지 않은가. “언제까지 구해드리면 될까요?”“어제저녁에 세어 보았는데, 아직 10포가 남았더라고요. 매일 저녁에 1포씩 먹는다고 가정하면, 10일분은 남은 셈이죠. 4일이나
“감사해요.”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구태우가 한 말을 곱씹자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날이 밝자마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알았어,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줄 여력이 없어.”‘미안해요, 소지태 씨.’이서는 평생 지태에게 대답을 줄 수 없을 것이었다.병실 문을 열자, 아침 식사를 들고 있는 이천이 보였다.“또 아침 식사를 가져오신 거예요?”‘역시 사모님이야!’놀란 이천은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뒤에서 몸을 일으킨 지환이 보였다.이서가 그를 마주하고도 표정이 구겨지지 않자, 이천이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사모님, 같이 드실래요?” “이 비서님, 말씀드렸잖아요.”“앞으로는 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시라고요.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떡해요?”이서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천은 곧장 지환의 안색을 살폈는데, 과연 이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환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지... 괜히 사모님께 식사하자고 해서 또 대표님의 기분을 나쁘게 했으니까!’ “그래도 아침은 같이 먹을게요.”이서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놀란 이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거든요.”이서가 싱긋 웃어 보였다. ‘식사하시겠다고?! 경사네, 경사야!’이천은 바삐 이서를 붙잡고 지환의 병실로 향하며 말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아니, 윤 대표님께서 같이 식사하시겠답니다!” “그래.”지환의 낯빛은 조금이나마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듯했지만, 여전히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서가 자리에 앉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천은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눈물이 눈 앞을 가렸다.‘이런 평화로운 모습이 얼마 만인 거지?’ “아, 더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이천이 음식을 내려놓고 말했다.“맛있게 드십시오. 부족하시면 더 사 오겠습니다.”이서는 멀어져가는 이천의 뒷모습을 보며
“이 꽃차를 장기간 이용할 경우, 중추신경이 손상돼서 심하면 치매를 일으킬 수 있어요.”“강력한 성분이 꽤 많이 들어 있더군요.”“음... 제 예상대로라면, 대략 보름 정도 사용하면 치매가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놀란 이서가 다시금 물었다.“그러니까, 제가 보름 동안 이 꽃차를 복용했다면, 치매에 걸렸을 거란 말씀이세요?”“네, 그래서 지인이 준 게 맞냐고 물었던 거예요.”의사가 설명서를 보고 말했다.“설명서에도 다른 나라 언어만 있잖습니까.”“그래서 그분도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에요.”“윤이서 씨, 이 꽃차를 복용하기 시작한 건 아니죠?”“그게...”이서는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고 팀장은 외국에서 자란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 나라의 언어를 모를 수 있겠어?’‘오히려 잘 알아서 이 꽃차를 사 온 걸 거야.’ 하지만 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고 팀장님이 왜... 나를 해치려 한 거지?’ ‘설마, 하도훈이 보낸 사람인 건가?’“윤이서 씨?”의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설마 벌써 며칠간 드신 겁니까?” 별안간 정신을 차린 이서가 말했다.“아니요, 딱 한 번 마셨어요.” 의사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딱 한 번만 마셨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이서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내 건강보다도 회사를 걱정할 때야.’‘고이서, 당신... 대체 누구야?!’의문을 품은 이서는 병실로 돌아간 후, 하늘에게 고이서의 모든 자료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하늘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으나, 곧장 고이서에 관한 자료를 보내왔다.이서는 한 장씩 뒤적거렸으나, 결국 고이서의 이력서에서는 어떠한 문제점도 찾지 못했다.‘지금 당장 고이서를 해고한다고 해도, 그 여자가 대체 누구인지, 왜 나를 찾아온 건지는 알 수 없을 거야.’ 이서는 별안간 지태의 곁에 있는 구태우를 떠올렸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구태우에게 연락을 취했고, 그는 두말없이 승낙했다.
병원에 도착한 이서는 우물쭈물하다가 차 안에 있는 지환을 향해 말했다.“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그 사람을 처리해 줘서?”“네.”“참,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어요? 왜 날 죽이려고 한 거죠?”“설마... 하도훈의 사람이었던 거예요?” 지환은 이서의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잠시 후에야 말했다.“하은철의 죽음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만, 하도훈은 우리 두 사람이 비밀을 누설했다고 생각하고, 우리를 죽여서 분풀이하려던 거야.” 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우리요? 누가 하지환 씨에게도 해를 가한 거예요?”“응.” 이 대답이 나오는 순간, 이서의 심장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괜찮아요?”그녀가 간신히 입을 뗐다.지환은 그런 이서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날 걱정하는 거야?” 이서는 붉게 물든 얼굴로 화를 냈다.“우... 우리는 지금 협력 관계예요! 하지환 씨한테 사고가 나면, 내가 어떻게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지환의 웃음기는 더욱 짙어졌다.“난 괜찮아. 어둠의 호리병이 있으니, 하도훈조차도 나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거거든.” “하지만...”이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어둠의 호리병은 한 사람이잖아요. 만약 하도훈이 동시에 두 사람을 보내면 어떡해요?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은 위험에 빠질 거라고요.” “걱정하지 마. 우리 곁에 고수가 있다는 걸 안 이상, 하도훈은 당분간 우리를 해치려 하지 않을 거야. 게다가 하도훈은 지금 여자를 찾아 하씨 가문의 후계자를 만드느라 바쁠걸?”이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차 안으로 돌아갔다.“하도훈이 찾는 여자한테 손을 쓸 수는 없을까요?”“무슨 뜻이야?” “하도훈은 대를 잇는 것에 집중하느라 상대의 출신은 전혀 개의치 않을 거예요. 오히려 그 사람이 더욱 중요시하는 건 상대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가 하는 거겠죠.”“만약 우리가 먼저 하도훈의 조건에 맞는 여자를 골라낸다면, 그 여자를 하도훈의 곁에 두고,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이지숙이 꽤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어머, 내 정신 좀 봐.”“나는 윤 대표더러 소희를 설득해 달라는 의미였어. 오해하지는 마.” 이서는 이미 고개를 돌려 심근영과 대화를 이어가던 지환을 흘겨보다가 이지숙을 향해 말했다.“알맞은 상대를 찾는 일은 제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이잖아요.” 이지숙이 말했다.“그거야 그렇지만... 윤 대표는 우리 소희의 친구잖아. 그러면 소희와 가치관이 잘 맞는다는 뜻이지 않겠어? 어쩌면 이 중에 두 사람 마음에 다 드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서는 소희를 힐끗 보았는데, 그녀는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현태 씨에 관해 말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네.’ 이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사진을 받고 진지하게 보기 시작했다.요리가 나오는 동안, 이서는 구실을 찾아 소희와 함께 룸을 나섰다.“소희 씨, 왜 현태 씨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거야?” 소희가 말했다.“아직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두 분이 현태 오빠를 받아들일지도 모르겠고요.”“만약 반대하신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소희의 긴장한 모습을 본 이서가 웃기 시작했다.“두 분이 현태 씨를 반대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 거야? 현태 씨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는 거네?” “이서 언니!”“그래, 인제 그만 웃을게.”“나는 두 분이 현태 씨의 출신을 전혀 개의치 않으실 거라고 생각해. 두 분에게는 현태 씨의 출신보다, 소희 씨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실 테니까.”“물론, 두 분이 소희 씨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현태 씨의 출신을 더 중요히 여기시겠지.”“그럼 소희 씨도 두 분의 의견을 신경 쓰지 않으면 되잖아?” “내 말이 틀렸어?”곰곰이 생각하던 소희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언니 말이 맞아요.”두 사람은 다시 룸으로 돌아왔다.이지숙이 다시금 중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소희는 이서를 힐끗 본 후에야 입을 열었다.“엄마, 사실... 제겐 남자 친구가 있어요.”놀란 이지숙은 대답도 잊은 채 소희를 바
이서의 심장 소리가 욕실 안을 가득 메웠다.거부할 수 없는 그의 손길, 오히려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은근한 기대가 피어올랐다.그 순간, 지환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이 많이 차갑네. 평소에 신경 좀 써.’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섰을 때는 5분이 흐른 후였다. 뺨에 오른 붉은 기운은 이미 옅어졌지만, 귓불의 붉은 기운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다시 운전석에 앉은 지환의 모습이 맑고 아름다운 풍경처럼 보이자, 이서는 방금 욕실에서 느꼈던 감정이 더욱 부끄럽게 느껴졌다. ‘지환 씨는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떨칠 수 없는 괴로움 속에서, 이서와 지환은 마침에 호텔에 다다랐다.심근영 부부와 소희는 이미 도착해 있었는데, 두 사람을 보고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게다가 심근영은 이 기회를 틈타 지환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하 대표님, 저희 체면을 세워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지환의 표정은 매우 담담했다. 하지만 심근영은 그의 행동 스타일을 일찌감치 들은 모양인지, 전혀 개의치 않고 이서와 악수를 하려 했다.그가 손을 뻗으려던 찰나, 지환이 이를 저지했다.“늦게 왔는데, 주문부터 하시죠.”심근영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지만, 곧 상황을 이해하고는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소희에게 두 사람의 일을 들은 상태였다.‘참, 두 사람이 싸우는 중이라 했었지?’‘그런데 상황을 보아하니, 곧 화해하겠는걸?’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심근영이 지환에게 메뉴를 건넸고, 지환은 이서에게 메뉴를 건넸다. 이서는 모두의 권유로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문하기 시작했다.그녀가 주문한 요리는 모두의 입맛을 고려한 것이었는데, 음식이 식탁에 오르자 모두가 만족했다. 다만, 심근영과 지환은 사업상의 일을 이야기했으며, 이지숙과 소희, 그리고 이서는 생활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의 끝은 ‘결혼’이었다.“소희야, 너도 나이가 적지 않으니, 곧 결혼해야 해.” “...엄마, 서두
‘내가 뭘 잘못했다고 저러는 거야?’‘맞는 말이었잖아.’‘당신들은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애정행각을 벌였다고!’한편, 차에 오른 이서가 지환에게 물었다.“소희 씨한테 전화해서 약속을 취소할까요?” 지환이 시계를 힐끗 보았다.“안 늦었어.”“안 늦었다고요? 하지만 나는...” 차가 갑자기 멈추자, 이서가 이상하다는 듯 지환을 바라보았다.“왜 그래요?”“도착했어.” 이서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집을 보고는 멍해졌다.순간, 지난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듯했다.‘여긴... 우리가 전에 살던 곳이잖아?’이서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익숙한 감정이 불쑥 다가와 그녀의 숨통을 조였다.‘여기서... 내 인생의 최고의 시간을 보냈었지.’“어서 들어가. 다른 사람이 보면 어쩌려고 그래?” 이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그녀는 자연스럽게 욕실로 들어가 몸에 묻은 핏자국을 씻어냈다.하지만 옷에 묻은 핏자국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옷을 갈아입어야겠어.’ ‘참, 이 집에도 옷이 있을 텐데...’잠시 머뭇거리던 이서는 욕실 문을 살며시 열었다.‘지환 씨는... 거실에 없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까치발을 들고 2층으로 향했다.하지만 계단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지환과 맞닥뜨렸다.이서는 아무 옷도 걸치지 않은 채 목욕 수건만 두른 상태였고, 한 손은 가슴 위에 얹고 있었다. 하지만 높은 곳에 서 있던 지환은 고개를 숙이기만 하면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그의 목젖이 힘겹게 미끄러지자, 이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비... 비켜요. 옷 가지러 갈 거라고요...!”지환은 힘겹게 시선을 돌려 2층을 바라보았다.“내가 가져다줄게. 너는 욕실로 돌아가.”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쏜살같이 욕실로 돌아갔다.그녀는 눈앞의 위기를 해결하느라, 이후의 어색함은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자, 한창 샤워하던 이서는 고개를 돌렸다.그 순간, 문
운전기사는 놀라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아직 의식이 남아 있던 이서는 잠시나마 그 남자의 눈동자를 응시했다.‘날 노리는 거구나.’ 이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문을 열어 도망치려 했다.하지만 문을 열기도 전에 남자의 차가운 손이 목덜미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뼈를 깎는 고통이 밀려오자, 이서는 눈을 크게 뜨고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남자는 커다란 손을 뻗어 이서의 눈을 가렸다.“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나도 너처럼 보기 드문 미인을 죽여야 하는 게 너무 안타깝거든? 그런데 어쩌겠어? 그게 내 임무인걸. 임무는...”이서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뜨거운 선혈이 자기 얼굴과 목, 그리고 온몸에 튀는 것을 느꼈다. 그 선혈은 뜨겁고 끈적거리기 그지없었다.하지만 분명히 이서의 피는 아니었다.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쿵!잠시 후, 그 남자가 굉음을 내며 그녀의 곁에 쓰러졌다. 이서는 그제야 남자의 손을 떨쳐내고 세상의 빛을 마주했다. 차량 지붕에는 굽은 칼을 현란하게 돌리고 있는 어둠의 호리병이 있었다. 그가 쥔 칼에 검붉은 선혈이 묻어 있는 것을 본 순간, 이서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당신이 죽인 거예요?!”이서는 자신이 보기에도 매우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하지만 어둠의 호리병은 개의치 않고 거들먹거리며 말했다.“왜요, 문제 있어요?” 이서는 재빨리 좌우를 살폈는데, 차가 한 대도 없었다. 그녀는 어둠의 호리병을 보며 말했다.“가능한 한 빨리 처리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거라고요!!” 어둠의 호리병은 의외라는 듯 이서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이런 일을 처리해 본 적이 있는 겁니까?”이서가 말했다.“그럴 리가요.”“아주 능숙해 보이는데요?”어둠의 호리병은 이서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라는 말, 정말입니까?” 이서는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다만, 이번에는 망설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전화 연결음이 이어지던 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