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는 한참이나 대답할 수 없었다. “팀장님은 조사만 열심히 해주시면 됩니다. 다른 건 신경 쓰지 마시고요.” 홍보팀 팀장은 대단히 난처했지만, 이서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전화를 끊은 이서는 인상을 찌푸린 채 계속해서 스크린 속의 기사를 보았다. 기사를 한참 동안 보았음에도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한 그녀는 휴대전화를 끈 채 차에서 내렸고, 이내 다른 회사로 걸어 들어갔다. 같은 시각.기사를 본 하은철이 차가운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던졌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눈앞의 부하를 바라보며 냉소했다. “허, 이 기사가 아니었으면 작은 아빠랑 윤이서가 돌아온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 아니야!” 부하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아무래도 하 대표님께서 귀국하시기 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희도 이 기사를 보고서야 하 대표님께서 돌아오셨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럼 이 기사가 없었으면, 너희는 작은 아빠가 돌아온 줄도 몰랐을 거란 말이네?”부하가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지금 당장 두 사람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아봐! 이 기사는 도대체 어떤 새X가 찌른 건지, 심가은이라는 여자는 어떻게 죽게 된 건지까지도!” “예!”부하는 얼른 몸을 돌려 떠났다.문이 닫히자, 급히 몸을 일으킨 하은철이 태블릿에 있는 이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돌아왔구나!’‘윤이서가 돌아왔어!’ ‘하지만 그 여자가 분명... 윤이서는 M국에서 잘 지낼 수 없을 거라고 했었는데?’‘지금 보아하니 그 여자도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던 거구나.’ ‘이왕 이렇게 된 거...’‘윤이서, 네가 기어코 나의 작은 아빠를 선택해야겠다면, 그 선택에 대한 결과는 혹독히 치러야할 거야.’ 이렇게 생각한 하은철의 눈빛이 더욱 어둡고 음산해졌다. 같은 시각.세트장에서 촬영하던 나나는 장희령에게 여섯 번째 따귀를 맞았고, 결국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감독과 제작진 등의 다른 스태프들은 더 이상 상황을 지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희령
여은아는 정말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나도 더 이상 은아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아이스팩을 든 채 그녀에게 말했다.“은아 언니,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다녀와서는 계속 대사를 외워야겠어요.” “그래, 다녀와.”대기실을 나선 나나는 두 개의 문을 지났는데, 그곳은 바로 희령의 대기실이었다. 그녀는 엄청난 자금을 가지고 팀에 합류한 배우로서 자연히 가장 호화스러운 대기실을 누리고 있었다. 나나가 그곳을 지나려던 찰나, 안에서 희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남의 말을 엿듣는 것에는 전혀 취미가 없는 사람이었으나, 희령이 이서를 언급하는 것을 들은 이상 발걸음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윤이서가 살인범이라는 기사가 인터넷에 퍼졌다고?” “그렇다니까? 인터넷에는 온통 그 이야기뿐이야.”대답한 사람은 희령의 매니저였다. “윤이서가 살인범이다? 하하, 그런 불법적인 범죄를 저질렀다는 뉴스가 퍼졌으니, 대중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어?” 희령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매니저가 희령을 따라 낮게 웃다가 약간은 걱정스러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령아, 근데 그 뉴스는 우리가 조작한 거잖아. 정말 윤이서가 심가은 씨를 죽인 건지도 확실하지 않고... 만약 윤이서가 심가은 씨를 죽인 게 아니고, 그 뉴스를 조작한 사람이 우리라는 사실이 모두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대체 뭐가 무서운 거야? 그 뉴스는 내가 심씨 가문의 미디어 계정을 통해 올린 거잖아. 설령 심씨 가문에 대한 조사가 시작된다고 하더라도 전혀 걱정할 거 없단 소리지.” “그리고 누가 감히 내가 그런 찌라시를 퍼뜨렸다고 떠들어댈 수 있겠어?” 희령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매니저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문밖에 서서 두 사람의 파렴치한 대화를 들은 나나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피가 솟구치는 듯했다. 그녀가 문을 박차고 들어가려던 찰나, 궁금증 섞인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맞다, 령아,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옆 대기실에서 인기척을 들은 은아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는 희령의 대기실로 다가왔고, 제작진들의 손에 붙들린 나나를 마주했다. 그녀가 얼른 비집고 들어가 물었다.“나나야, 무슨 일이야?” “허, 무슨 일이냐고요?”희령의 매니저가 은아에게 차갑게 말했다.“서나나 씨가 연기를 정말 잘하시더라고요. 분명 감독님 앞에서는 진실된 연기가 좋은 효과를 낼 수 있을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착한 령이는 그 말만 철석같이 믿고 진짜로 때렸을 뿐이에요. 그런데 이제 와서 마구 날뛰는 꼴을 좀 보시라고요!” “진짜로 맞는 게 싫다면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나중에 다른 소리 하지 마시고요!” 은아가 말했다.“말도 안 돼요, 나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요!” 희령의 매니저가 말을 이어 나갔다.“그런데 어쩌죠? 서나나 씨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여기 계신 분들이 똑똑히 다 봤는데요. 아, 참, 윤이서 씨가 살인범이라는 소문을 퍼뜨린 게 저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내뱉기도 하시더군요. 대체 윤이서 씨가 사람을 죽인 게 저랑 무슨 관련이 있다고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담당하는 연예인이면 똑바로 관리하세요!” “아무래도 계속 헛소리를 하시는 거 보니까 정신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은데...”“오빠, 됐어.”작은 소리로 매니저의 말을 끊은 희령이 나나를 위하는 척 위선을 떨었다.“나나 씨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야. 아무래도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있었던 것 같으니까 인제 그만 하라고.”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분분히 서로를 쳐다보았는데, 아무래도 그들은 얻어맞은 일로 앙심을 품은 나나가 괜히 트집을 잡아 희령을 모함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사실, 나나는 입이 아주 무거운 사람이었으며, 자신이 다른 이에게 오해를 받는 것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이서를 모함하는 것만큼은 절대 참을 수 없었다. “그런 게 아니었어요...” “그만 해.”은아가 나나를 붙잡았다.“얼른 따라 나오라고!” 이 말을 마친
[그동안은 서나나가 힘든 길을 걸어오면서도 나약해지지 않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유명한 스타가 되고 나서야 바닥난 인성이 드러나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아마 여태 겪었다던 고생도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거였을 거예요.] [가장 어이없는 게 뭔 줄 아세요? 소란을 들은 제작진이 달려오고 나서야 두 사람의 거리가 벌어졌는데, 그때도 서나나는 윤이서가 사람을 죽였다는 허위 보도를 낸 게 장희령 씨라는 헛소리를 내뱉었다는 거예요. 현장에서 그 말을 들었을 때, 어찌나 황당하던지... 정말이지 웃음이 다 나오더라고요.] [와, 그 여자가 정말 그런 말을 했다는 겁니까?] [예, 저도 현장에 있던 제작진입니다만, 서나나 씨가 정말 저렇게 말했습니다. 제 모든 걸 걸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할 말이 없네요, 그러니까 장희령 씨가 그 기사를 조작했다는 말을 하려던 거예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감히 그런 말을 내뱉다니, 설마 윤이서한테 세뇌당한 건 아닐까요?]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서나나 씨가 무명일 때부터 지켜봐 온 사람인데요. 이전의 그녀는 전혀 이렇지 않았어요.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서라면 차가운 연못에 하루 종일 몸을 담그고 있던 사람이었다고요. 확실히 윤이서를 만난 후로 사람이 바뀌었어요!] [쯧쯧, 윤이서가 사람을 다 망쳐놨네요. 훌륭한 인재의 싹을 완전히 잘라놨으니까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모든 댓글을 읽어본 희령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옆에 있던 매니저가 말했다.“령아, 윤이서를 그 살인사건에 연루시킨 사람이 너라는 게 밝혀지면, 윤이서 측에서 널 가만히 내버려둘까? 아마 스스로 너를 벌하려고 할지도 몰라.” “오빠가 뭘 안다고 그래?”희령이 경멸하며 말했다.“아마 서나나는 돌아가자마자 그 일의 배후가 나였다는 걸 윤이서한테 털어놓을 거야.” “분노를 느낀 윤이서가 내가 먼저 본인을 모함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여론을 움직이려고 한다면, 그 여자가 증거가 있
같은 시각.이 도시의 다른 한쪽에서는 이서의 앞에 앉은 나나가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이서 언니, 정말이지 일부러 장희령을 해치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 여자의 대기실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들었는데... 인터넷상에 퍼진 언니에 대한 그 터무니없는 소문을 낸 사람이 장희령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만...” 지금의 나나는 희령에게 조금의 호감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오늘의 일은 그야말로 그녀가 영화계의 선두 주자라는 나나의 환상을 완전히 깨버린 것이었다. 이서는 줄곧 침묵을 지키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고, 이를 본 은아는 더욱 마음을 졸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서가 기억을 잃은 것도, 그녀가 다시 윤씨 그룹을 되찾은 것도 아는 사람이었다. ‘윤 대표님은 기억을 잃었잖아. 분명히 나나를 기억하지 못하실 텐데... 하필 대표님께서 윤씨 그룹을 되찾자마자 이런 큰 일이 일어나다니...’은아는 이 일로 인해 이서가 나나를 향한 지지를 철회할까 봐 걱정되었다. 왜냐하면 일이 꽤 크게 벌어졌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서가 나나를 망가뜨린 것이라 여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서야...”하나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듣고 있어...?”이서가 마침내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이 모습을 지켜보던 은아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황홀함을 느끼기도 했다. ‘저 모습이 정말 기억을 잃은 사람의 모습이라고?’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걸 보면, 배후에 누군가가 있는 게 분명해. 상황을 보니까 두 가지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는 게 우선일 것 같네. 첫째는 내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거고, 두 번째는 나나가 사람을 때린 이유가 있다는 거지. 이 두 가지를 증명해 줄 증거나 증인만 찾으면 될 일이야.” “심가은 씨는 총에 맞아 죽었으니까 이에 대한 증거는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나나가 사람을 때린 이유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CCTV 녹화본이 꼭 필요한데... 이미 이를 예상한 장희령이 틀림없
‘어쩌면 나도 이서처럼 최면이나 전기 충격 치료를 받아서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으면, 더 이상 친밀한 관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될지도 몰라.’바로 이것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었다. 잠시 후. 하나가 실성한 듯 웃기 시작했다. ‘요즘 내가 왜 이러지? 늘 이런 생각을 한단 말이지...’ ...호텔 방 입구에 다다른 이서는 일부러 발걸음 소리를 낮췄는데, 그녀의 방 맞은편이 바로 지환의 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 종일 못 만났네... 지금 뭐 하고 계시려나?’ 잠시 생각하며 망설이던 이서가 지환의 방 앞으로 걸어갔고, 손을 들어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그의 방에서는 응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순간, 이서는 실의감을 느꼈다.‘방에 안 계신 건가?’다른 방법이 없었던 이서는 카드를 꺼내어 자기 방의 문을 열었다. 그녀는 문을 열자마자 텔레비전이 켜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순간적인 기쁨을 느낀 이서가 펄쩍펄쩍 뛰며 거실로 향했다. 하지만 그녀는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을 똑똑히 확인하는 순간,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은철, 네가 왜 여기 있어?”놀란 이서가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는데, 머릿속에는 그날 결혼식에서 있었던 수많은 일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하은철이 차갑고도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윤이서, 꼭꼭 숨었어야지.”이서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당장 내 방에서 안 꺼져? 경찰에 신고할 거야!” 핸드폰을 들어 전화번호부를 켠 이서의 눈에 지환의 전화번호가 들어왔다. 이서는 그의 이름을 수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핸드폰에 저장된 지환의 이름은 여전히 H선생님이었다. 그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바로 이때, 거대한 두 손이 포악하고 강한 힘으로 그녀의 손에 있는 핸드폰을 빼앗았다.핸드폰을 뺏긴 이서는 마음이 텅 비는 듯했다. 그녀가 입구 방향으로 물러나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당장 돌려줘!” 하은철이 이서의 핸드폰에 저장된 지환의 번호를 힐끗
이서는 두어 번 발버둥 쳤음에도 불구하고, 은철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단단히 화가 난 그녀가 외쳤다.“나는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도대체 지난 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전의 너는 나를 아주 미워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은 나랑 결혼하려 하는 거냐고! 하은철, 너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이서의 두 눈을 마주한 은철의 눈동자에 한 가닥의 고통이 스쳤다. 그녀의 눈에서는 더 이상 그를 사랑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은철이 이서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미쳐버렸다고 생각해도 좋아.”“마지막으로 물을게. 내 옆에 남을 거야, 아니면...”그가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네 핸드폰에 있는 H선생님의 곁으로 갈 거야?”이서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당연히 하 선생님이지!” “허.”사납게 웃은 은철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서의 턱을 들어올렸다.그는 그녀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또박또박 말했다.“정말 마지막 기회야... 잘 생각하고 대답해.” “또 한 번 만족할 수 없는 대답을 내놓는다면, 넌 영원히 H선생님을 볼 수 없게 될 거야!” 이서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졌다.“하 선생님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말을 들은 하은철이 웃음을 터뜨렸다.“아직도 그 사람을 걱정하는 거야?”“걱정할 거 없어. 지금쯤이면 다른 사람이랑 비즈니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내가 어떻게 감히 그 사람을 건들 수 있겠어?”“하지만...”그가 시선을 아래로 옮겨 이서를 경멸하듯 바라보았다.“너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넌 내 손바닥 위에 놓인 개미나 마찬가지야. 내가 너를 으스러뜨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지.” “윤이서,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나를 택할 건지, 아니면 그 사람을 택할 건지.”지환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서는 안정된 표정을 되찾을 수 있었으나, 고통은 곧 그녀의 안정감을 집어삼켰다.
“날 속이려는 거지?! 다 생각난 게 분명하다고!” “아니라고.”이서의 말투는 죽은 사람처럼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나한테 그 사람의 진짜 이름을 알려준 것도... 나를 자극하기 위해서였구나?” 그녀는 그날의 결혼식을 떠올렸다.‘그래, 그날도 이런 식으로 나를 자극했었지.’“물론 그 사람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는 큰 자극을 받았었어. 하지만 나는 그와 함께하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그 고통을 참아냈고, 기절하지도 않았지. 그래서 우리는 함께할 수 있었던 거야.”이서는 또 한 번 자신을 향한 지환의 배려를 떠올렸다. 그녀는 매우 풍자적이라고 느꼈다. ‘하 선생님은 내가 자극을 받지 않도록 늘 조심히 해주시는데...’ ‘하은철은...’“지난 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방금 있었던 모든 일 때문에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게 됐어.” “지난 일 년 동안 네가 나를 아주 많이 다치게 했을 거라는 거.”“하은철,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내 청춘을 너에게 바친 결과가 고작 이거라니... 하...”은철은 멍하니 제자리에 서서 이서를 바라보았다. 그는 순간 자신이 실패자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서의 남편이 자신의 작은 아빠이고, 자신이 그렇게 오랜 시간 속았다는 것을 떠올리면 솟아올랐던 일말의 양심은 다시 원한으로 바뀌는 듯했다. 그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문밖에서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은철이 방문을 열었고, 그곳에는 경호원이 서 있었다. “하 사장님, 목적을 이뤘으니 이제 철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은철이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이서를 한 번 보았다.“그래, 철수해!” 이 말을 마친 그는 뒤돌아서서 문을 쾅 닫고 떠났다. 이서는 온몸에 힘이 빠져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힘없이 무릎을 꼭 껴안은 이서는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듯 바삐 일어나 방 안을 꼼꼼히 살피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거실 소파에 앉아 자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