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서니가 하는 말이 재미있지 않은 거야?”이서의 뒤로 다가온 지환이 두 팔로 그녀를 끌어안으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이렇게 넋을 놓고 있는 거지?’ 이서가 고개를 들어 지환을 바라보며 억지 웃음을 지었다. “아니요, 앤서니 씨의 말씀은 아주 재미있었어요.”이서가 또 한 번 먼 곳을 바라보았다. “단지 H선생님의 총알이 조금이라도 빗나갔다면... 우리가 다시는 만나지 못했을 거란 생각에 심란했을 뿐이에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지환을 바라보았는데, 그녀의 고집스러운 눈빛은 답을 원하고 있는 듯했다. 순간, 지환의 마음이 살짝 일렁였다. ‘이서는 단 한 순간도 나를 향한 마음이 변한 적이 없었구나.’ 다른 사람들이 전설적인 무용담에 매료되어 있을 때, 이서는 마음속의 장애물을 뚫고 지환을 더욱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아니야,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났을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거예요?”이서가 손가락을 꽉 쥐었다.“만약에...” “만약이라는 건 없어.”지환은 이서의 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놓은 채 그녀가 자학하지 못하게 했다.“네가 반드시 무사히 돌아오라고 했잖아. 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무사히 돌아왔을 거야. 나에 대한 너의 믿음을 깨버리고 싶지는 않거든.” 지환의 눈동자를 응시하는 이서의 마음에 또 한 번 익숙한 느낌이 밀려왔다.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자, 수많은 장면이 주마등이 되어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는 듯했는데, 셀 수 없이 많은 손이 그녀의 머리를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아파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곧바로 이서의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지환이 그녀를 껴안으며 물었다.“이서야, 왜 그래?”한참 만에 이서의 괴로운 표정을 마주한 지환은 질문을 한 후에야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얼른 이서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며 목에 핏대를 세운 채 토론하는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어서 마이클 천 선생님에게 연락해 주세
다만, 이서의 일그러진 표정은 여전히 그녀가 얼마나 큰 고통을 받고 있는지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다 큰일이라도 나는 거 아니에요?”배미희는 애가 탔다.“선생님은 왜 아직도 안 오시는 걸까요?!”하이먼 스웨이도 수많은 칼이 심장에 박힌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순간, 서서히 평온한 표정을 되찾은 이서는 정신을 잃고 기절했고,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심지어 앤서니조차도 깜짝 놀랐다. 그는 이서와 지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으며, 다른 조직원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서의 등장으로 인해 조직 전체는 모든 자원을 이서에게 총동원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 이서는 한 명의 여자일 뿐이었고, 여자는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는 소모품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환이 왜 그렇게 그녀를 주시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보스가 여기로 오신 후에 내린 결정들은 온통 저 여자를 위한 거였어.’‘하지호를 상대하는 것도, 상대하지 않는 것도 다 여자를 위한 거였다고.’ ‘확실히 보스가 변했어. 정말이지 일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던 보스가 여자에게 빠져서 허우적대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단 말이지...’ 그러나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지환의 손을 놓지 않는 이서를 본 앤서니는 사랑에 대한 동경을 느꼈고, 마음이 움직이는 듯했다. ‘왜 보스의 모든 결정이 저 여자와 관련이 있는 건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해.’“무슨 일입니까?”급하게 들어온 마이클 천이 이서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서야 지환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안색이 약간 변했는데, 이서가 그의 팔을 꽉 잡고 있는 것을 보고는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방금 잠들었어요.”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는 마이클 천의 안색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초조하게 말했다. “얼른 진찰을 좀 해주세요.” 마이클 천이 침대에 누워있는 이서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지금은 기절하신 상태라 진찰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
마이클 천은 정신과 의사로서 지환이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운 심경일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섣불리 어떠한 말을 꺼낼 수 없었고, 잠시 후에야 침묵을 깨며 말했다. “대표님, 지금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침대에 누워 있던 이서가 서서히 깨어났다. 이서가 깨어난 것을 본 지환의 눈동자가 밝아졌는데, 그는 모든 것을 완전히 잊은 듯 몸을 낮추어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이서야...”그는 그제야 두 사람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지 깨달았고, 즉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이서가 그의 팔을 더욱 거세게 잡았다. “가지 마세요. 절대 가지 마세요.” 그녀는 조금도 힘이 없는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하고 있었다. 지환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어요...” 입술을 굳게 깨물었던 이서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왜... 왜 H선생님이 저에게서 멀어졌을까 생각을 해봤거든요... 제... 제가 기억을 잃은 이유가... 선생님이랑 관련이 있었던 거죠? 그렇죠?” 지환은 무언가에 홀린 듯 이서의 손을 꽉 잡고 말을 잇지 못했다. “선생님께서 마음에 품고 있다는 그 사람도... 저인 거죠?” 그렇다. 사랑이 담긴 눈빛만큼은 그녀를 속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서의 말을 들은 지환은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이서의 손을 놓으려 애썼지만, 그녀는 한사코 그의 손을 잡을 뿐이었다. 이서의 두 눈동자에는 이미 눈물이 고여 있었다. “H선생님, 도대체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제발 말씀 좀 해주세요! 저는 감당할 수 있단 말이에요!” ‘더 이상 바보처럼 살고 싶지 않아.’ ‘설령 고통을 겪게 될지라도... 내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야.’ ‘나는 단지... 나의 삶을 살고 싶을 뿐이라고!’ 지환이 모질게 이서를 밀쳤다.“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어. 우리의 감정이 시작된 건... 그 교통사고 이후였다고!”이서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아니잖아요! 저를 속이고 있는 게 분명해
이서가 불안을 느끼는 아이처럼 붉은 입술을 살짝 내밀고 지환을 바라보았다.“꼭 돌아오셔야 해요.”그녀의 안쓰러운 모습을 본 지환은 차마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입구에 도착하자, 하인은 즉시 의자를 들고 왔고, 이서가 두 사람을 편히 볼 수 있도록 창가에 자리를 잡아 주었다. 그녀는 두 사람이 입구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심하고 침대에 다시 누웠다. “말해보세요, 지금 도대체 어떤 상황인 겁니까?”먼저 침묵을 깬 지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행여나 이서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하게 하려는 듯했다. 마이클 천이 입술을 오므렸다.“솔직히... 이서 아가씨의 상태는 제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최면 치료를 하면 당분간의 기억은 잃게 되겠지만, 서서히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가씨의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인 하씨 가문 어르신의 사망에 관한 부분도 뇌의 자가 보호 기능을 통해 걸러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이렇게 되면 아가씨께서 언젠가 모든 것을 기억해 내더라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아가씨가 겪은 진실들은 이미 미화되고 걸러진 기억이 되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지금 상황은 좀...” “저도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곤란합니다.” “저도 최후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지환이 분노를 터뜨리며 마이클 천의 멱살을 잡았다.“최면, 그리고 전기 충격도 다 선생님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모르겠다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심리학 전문가조차 이런 태도를 보이면... 도대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겁니까?!” 마이클 천이 멋쩍게 웃었다.“대표님, 심리학은 원래 복잡한 학문입니다. 게다가 저는 의사일 뿐이지, 신선이 아니지 않습니까.”지환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마이클 천이 얼른 말했다.“대표님,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는 이서 아가씨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고심하는 겁니다.
‘다 알고 있었던 거야?’“고민하실 필요 없어요.”이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제가 선생님께서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으니까요.” “이서야...” “제 곁에 남아주세요. 저는 전혀 두렵지 않으니까... 제발, 제발 남아주세요.”이서가 지환의 팔을 힘껏 잡았다. “안돼.”굳은 결심이 무너져 내릴까 봐 두려웠던 지환이 거세게 고개를 내저었다.“이서야, 안돼... 넌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게 될 거야...” “저는 두렵지 않아요, 저는 정말 괜찮다고요...”이서의 눈동자에는 애원이 서려 있었다.“H선생님, 제발요... 선생님께서 이대로 저를 떠나시면, 저는 밤낮으로 고통스러울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제 곁에 남아주세요. 선생님과 함께라면 찰나의 고통만 겪으면 될 뿐이잖아요.”이 말을 마친 이서가 쓸쓸하고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잘 생각해 보세요, 제 곁에 남는 게 더 낫지 않겠어요? 선생님 생각은 어떠신데요?”이서의 쓸쓸한 미소를 본 지환은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리는 듯했으며, 그곳에서 새빨간 선혈이 콸콸 흘러넘치는 것만 같았다. “이서야, 우선 이것 좀 놔줘.”이서가 거절하려던 찰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가서 잘 생각해 볼게.” 이서는 그제야 순순히 지환의 손을 놓았다.“그럼 잘 생각해 보시고 대답해 주세요. 그리고... 제가 겪을 고통이 아니라 제 마음을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그녀가 말했다. 지환이 아무렇게나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섰다. 그가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는 거실에 앉아 있었는데, 인기척을 느낀 두 사람이 고개를 들어 지환을 바라보았다. 그의 온몸이 위축된 것을 본 두 사람이 목청을 돋우며 말했다.“왜 그래? 대체 무슨 일이야? 이서한테 문제라도 생긴 거야?”지환은 고개를 살짝 내저을 뿐,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에게 아무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니? 어서 말해봐, 정말 답답해 죽겠구나!”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는 그동안 지
이미 동요되었던 지환의 마음은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의 권유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몸을 돌린 지환이 2층의 열린 문을 바라보았는데, 그 문을 통해 간절히 고대하고 있는 이서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생각하자, 그의 발걸음은 절로 빨라졌다. 방으로 들어선 지환은 이서의 근처에 이르러서야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늦추었다. 돌아온 그를 본 이서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해졌다. “H선생님...”지환이 손끝으로 이서의 입술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결정했어, 네 곁에 남기로.” 이 말을 들은 이서의 아름다운 눈동자 반짝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웃음이 만연한 그녀의 눈동자를 본 지환이 모질게 말했다.“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무슨 조건이요?”이서가 물었다. 그녀가 기대할수록 지환의 마음은 더욱 괴로워졌다. “내 진짜 이름을 듣고도 후유증이 일으키지 않는다면... 네 곁에 남을게.”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이서는 정신이 멍해졌다. ‘그래서 여태 진짜 이름을 밝히지 않으셨던 거야?’‘그게 아주 중요한 거라서?’ ‘어쩌면 H선생님의 진짜 이름을 들으면... 내가 고통에 몸부림치게 될지도 몰라.’이서가 대답하지 않자, 지환이 목소리를 낮추었다.“두려운 거야?”“이서야, 두려우면 거절해도 돼.” 이서가 몸을 꼿꼿하게 세우며 말했다.“누가 무섭다고 했어요? 저는 괜찮을 거라고요!”지환은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는 이서를 보면서 더욱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몸을 일으킨 지환이 고개를 돌리며 이서의 시선을 피했다.“그럼 잘 들어, 내 이름은...”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던 이서는 이불 속에 숨겨진 손으로 허벅지 안쪽의 살을 한사코 쥐었는데, 물밀듯 밀려오는 통증은 지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집중할 수 없게 했다.이서는 아파 죽을 지경인데도 이를 악물고 버티며 줄곧 스스로를 상기시켰다. ‘꼭 버텨야 해, 꼭.’“하지환이야.”이 세 글자를 들은 이서의 머릿속에는 폭풍우와 비바람이 치는 듯했고, 숨이 멎는 것
이서가 지나치게 뚜렷한 시선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마른침을 삼키며 침묵을 지키던 지환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그래...그래.”이서는 그제야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콧방울에 맺힌 식은땀을 본 지환은 심장이 조여오는 듯했고, 손을 떨며 이서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지환의 마지막 선택을 본 마이클 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전혀 예상이 가질 않아.’‘기왕 이렇게 된 이상... 대표님께서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는 게 더 낫겠어.’ ...“두 사람, 이제 귀국할 생각이야?”소파에 앉은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거의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며칠 간의 휴식을 가진 이서는 이미 기력을 회복했으며, 지환이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그녀를 돌보는 동안 더 이상 자극을 받아 기절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지환이 마이클 천의 말을 상기시켰다.“아무래도 이서 아가씨의 한계치가 높아진 것 같습니다. 이전에는 과거의 인연이나 기억을 언급하는 게 그녀의 민감한 신경을 자극하는 요소가 되었다면, 지금은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 많이 접촉하면서 눈에 띄게 호전된 거죠.” “아마 대표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겁니다.”“그동안 대표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대표님에 대한 한계치가 많이 높아진 거죠. 대표님의 진짜 이름을 알고도 버틸 수 있었던 걸 보면...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아마... 조만간 이서 아가씨의 앞에서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될 겁니다.”“네, 귀국할 생각이에요.”이서가 말했다.“엄마, 그리고 스웨이 작가님, 두 분도 그날 대회장 밖의 상황을 보셨겠지만... 저희 손에 인질이 있지 않았다면 이렇게 순조롭게 집에 돌아올 수는 없었을 거예요.”이서는 아직도 지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지환과 마찬가지로 가면을 쓰고 있어서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남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그 느낌은 지환 선생님과는 완전히 다른 거
두 사람은 이 말을 끝으로 곧바로 결정을 내렸는데, 옆에 있던 이서와 지환을 할 말을 잃었다.“스웨이 여사, 지난번에 H국의 4대 가문 안에 스웨이 여사의 딸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번 기회에 진짜 딸을 찾을 수 있게 될지도 몰라요. 우리가 같이 꼼꼼히 알아봐 줄 수 있으니까요.” 딸을 찾는다는 말을 들은 하이먼 스웨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정말 진짜 딸을 찾을 수 있을까?’ 하이먼 스웨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간파한 배미희가 좋은 친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걱정할 거 없어요, 이번에는 진짜 딸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스웨이 여사, 우리 상언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잊은 거예요?”“이번 DNA 검사는 절대 문제가 없을 거예요.”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힐끗 바라보았다. ‘애초에 이서도 DNA 검사 결과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했었는데...’‘하지만 지금의 이서는 기억을 잃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전혀 기억하지 못해.’‘이서가 기억을 잃지만 않았더라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래요, 그럼 H국으로 갈 준비부터 해볼까요?”이 말을 마친 두 사람은 곧바로 각자의 방으로 향하여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의 행동력은 이미 귀국을 결정한 이서와 지환보다도 더 적극적이었다. 귀국을 결정한 이서가 이 소식을 하나에게 알려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하나와 소희, 그리고 나나는 매우 기뻐했는데, 특히 소희가 그러했다.‘이서 언니가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귀국하겠다는 걸 보면 언니한테 자기만의 생각이 생긴 게 분명해!’ ‘그동안은 이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에 하은철이 눈에 띄게 날뛰지 않았지만, 또 언제 갑자기 발톱을 드러낼지 모를 일이잖아?’ 은철을 떠올린 소희는 끓어오르는 경멸감을 느꼈다. ‘이전에는 하은철이 명망 높은 하씨 가문의 도련님이라고만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이서가 자신과 결혼하지 않고, 자신의 삼촌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미친 듯이 보복하는 구질구질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
모두 반대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이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불만 있으면 사직서 쓰세요.” 이 한마디에, 회사 고위층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고 팀장님이 아닌 고 대표님이 된 거예요.”‘고 대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고이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새어 나오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기쁨에,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니 말이다.“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서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고, 고이서는 문이 닫힌 후에도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5분이 지나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의 책상으로 다가가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이 모든 건 다 내 거야...!’ 고이서는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대형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는 순간, 마치 가죽 의자가 아니라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만 차지하면... 다시 예전처럼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대로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반짝이는 보석도 망설임 없이 살 수 있고...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겠지! 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도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이서의 마음이 격렬히 요동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이서는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고,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김하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팀장님, 회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고 팀장’이라는 호칭에 고이서는 속으로 불쾌감을 느꼈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김하늘’이라는 이름을 새겨 두었다.‘며칠만 지나면 내가 정식으로 대표가 될 텐데, 그때 가장 먼저 잘라버릴 사람은 바로 네가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김하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
하지만 한 회사의 대표는 곧 하늘과도 같았다. “아직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서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한 김하늘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 사무실에도 CCTV가 있을 거 아니에요. 당장 영상 자료를 가져와 보라고요!” 김하늘은 당황하며 말했다. “대표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굳이 대표님께서 무안해지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아.’ 이 정도의 생각은 김하늘도 하고 있었으나, 이서는 아주 단호했다.“됐고, 당장 가져오세요.” 김하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고이서는 의아해졌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비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그럼 설마...’ ‘그 꽃차가 효과를 나타낸 건가?’이 가능성이 떠오르자 고이서는 속으로 흥분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대표님께서 CCTV를 보자고 하신다면 봐야죠. 만약 저희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대표님께서도 정확하게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렇죠, 대표님?”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니까요.” “만약 김 비서가 잘못 전한 거라면 엄하게 처벌하고, 정말 내가 말해놓고 잊어버린 게 맞다면, 그땐 분명히 사과할게요.” 이쯤 되니 김하늘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김하늘은 결국 CCTV 영상을 가져왔고, 영상 속에는 이서가 몇 번이나 김하늘에게 지시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고 팀장님을 불러주세요.”심지어 몇 분 간격으로 반복해서 지시하는 모습도 있었다. 이서는 그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내가 한 말이 맞다고...? 그런데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지?”“김 비서, 미안해요.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랬어요.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너무 미안해서 가방을 하나 선물로 주고 싶은데, 오늘 퇴근하기 전에 나한테 와서 받아 가요, 알겠죠?”김하늘은 이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애매하고 거절하기도
“진짜예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이서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지환은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이서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을 단순히 의례적인 질문으로 하지 않고, 정말 진심을 담아 묻곤 했다. 지환은 한동안 말없이 이서를 바라보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짜야. 생각해 봐. 네가 너희 가족 이야기를 고이서와 나눈 거잖아. 고이서 입장에선 너와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을 거야.” 이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그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병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고마워요.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어요.” 이서는 진심으로 말했고, 지환은 잠시 이서를 응시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응.”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요.” 이서는 문을 열고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서 내렸다. ...이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꽃차를 들고 의사를 찾아갔고, 의사는 꽃차를 검사한 뒤 말했다. “지난번과 성분이 똑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양이 더 많네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겠어요.” 의사는 몇 번 더 종이에 뭔가를 적더니 고개를 들었다.“3일이에요. 이 차를 마시면 3일 후에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서, 생각보다 더 조급했구나?’ 이서는 병실로 돌아가 꽃차를 우린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 덕분에 불면증이 해결됐어요. 요즘 정말 잘 자고 있답니다.]문구와 함께 사진을 올리자, 고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모든 걱정을 덜어냈다. 이제 남은 건 이서가 언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느냐였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고이서는 간절하게 속으로 외쳤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윤씨 그룹의 CEO 자리에 앉고 싶다고.’특히 이서가 회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주목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이서의 질투심이 극에 달했다.
고이서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참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듣고 있었어요. 대표님의 부모님께서 그렇게 하신 건, 뭔가 사정이 있으셨던 거 아닐까요?” 이서는 즉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짓을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어떤 부모가 자기 딸의 신장을 빼앗으려는 남자에게 딸을 내줄 수 있다는 거죠?” 고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서는 혼자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제가 두 사람의 친딸이 아니라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한 걸지도 모르죠.” 고이서는 숨이 잠시 멎는 듯했고, 이마에서 흐르던 땀은 이미 목덜미까지 흘러내려 고이서의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 세상에 다양한 부모가 있듯이, 부모의 형태도 여러 가지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서는 이미 땀에 젖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고이서를 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지운 뒤, 사과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미안해요. 이렇게 더운 날씨에 괜히 말을 길게 했나 봐요. 이만 돌아가 보세요. 더 있다가 더위 먹으면 안 되잖아요?” 고이서는 마치 구원을 받은 듯 서둘러 고개를 숙인 후 떠났고, 이서는 그녀의 젖은 등 뒤를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지환은 이서의 눈가에 깃든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웃고 싶으면 그냥 웃어.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그제야 이서는 참지 않고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이서가 지환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진심 어린 웃음을 짓는 순간이었다. 지환은 이서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이서는 그제야 눈치를 채고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오랜만에 네가 그렇게 웃는 걸 보니까 기록해 두고 싶어서. 혹시라도 불편하면 바로 지울게.” 이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황급히 말했다. “잠시만요!” 사진 속 이서의 얼굴은 오랜만에 활짝 핀 미소로 가득했다. ‘그러게, 이렇게 웃
“그럼요, 지금 바로 갈게요.” 이서는 전화를 끊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바쁘면 나 혼자 택시 타고 가도 돼요.” 하지만 지환은 이미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난 괜찮아.” 이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십여 분쯤 지나, 두 사람은 고이서를 마주했다.이서에게 꽃차를 건네주던 고이서는 지환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물론 지환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마주한 지환은 자료 속의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왠지 모르게 지환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품격이 있었다. 그 품격은 마치 높은 자리에 있는 왕처럼 다가왔고, 고이서는 알 수 없는 질투심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성지영과 윤재하는 분명 여러 번 말했었다. “윤이서 남편은 돈도 없는 놈이야.” 그런데도 고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야. 하은철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안녕하세요.” 고이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지환에게 인사를 건넸고, 이서의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윤 대표님, 꽃차가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고이서는 이곳에 더 머물렀다가 의심을 살까 싶어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럼, 별일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고이서가 돌아서려는 순간, 이서가 그녀를 불렀다. “고 팀장님.” 고이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물었다. “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고 팀장님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고이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묘한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아마 자신이 꺼림칙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었다. 이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고 팀장님이 준
하지만 그 누구도 사다리를 건네주지 않아서, 이서는 계속 지붕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아슬아슬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며 떨고 있을 뿐이었다.이 순간 누군가 사다리를 건네준다면, 이서는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서는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30분이나 지났네.’ 이서가 발을 닦고 나서 계단으로 나가 아래층을 내려다보니, 지환은 거실에서 서류를 펼쳐놓고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하지환 씨가 사다리를 건네준다면... 나는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하지환 씨를 용서하게 될까?’ 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이서는 마음이 복잡해져서 서둘러 시선을 돌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일하는 중이에요?” 이서가 묻자 지환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응.” 이서는 지환과 한 발짝 떨어진 소파에 앉았고, 두 사람은 말없이 함께 앉아 있었다. 어색함도 없었고, 굳이 대화를 만들어낼 필요도 없었다. 이런 평온한 순간은 회사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것이었다. 이서는 문득 표정을 풀고,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이서는 성지영의 딸이야. 이번에 돌아온 것도 분명 윤씨 그룹을 노리고 돌아온 거겠지.” 지환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죠.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윤씨 그룹에 입사해서 나한테 약을 먹일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요. 고작 그런 방식으로 날 바보로 만들려고 하다니, 어이가 없어요.” 고이서 했던 짓을 떠올리자 이서는 코웃음을 쳤다. 이서의 예상이 맞다면, 고이서가 처음부터 자신이 윤재하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것은, 그것만으로는 효과가 없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윤씨 그룹은 과거의 윤씨 그룹이 아니었다. 윤씨 그룹이 MH 그룹과 통합한 후, 이서는 쓸모없는 윤씨 일가들을 모두 몰아내고 필요한 사람들만 남겼다. 설령 윤재하가 자신이 윤씨 가문의 친딸이 아니라며 이서의 자격을 문제
지환은 몸을 숙여 이서 뒤에 있던 이불을 집어 들고 이서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서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상황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방금 하지환 씨는 나한테 뭘 하려던 게 아니라, 그냥 이불을 덮어주려던 거였어?’ 이서는 닫힌 방문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고, 생각은 어느새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환 씨가... 나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일까?’ 이서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마음속에서는 아무런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지환은 이미 아래층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서는 지환이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예전에도 지환은 자주 이렇게 아침을 준비하곤 했다. 물론 처음에는 요리 실력이 썩 좋지 않았고, 아주 서툴렀다. 하지만 그때의 이서는 눈치가 없어서 지환이 원래 요리와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지환이 이서를 위해 요리를 배우고 준비했다는 사실은 참 감동적인 것이었다.지환은 두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밥 짓고, 반찬을 만들고, 살림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하지환 씨가... 나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일까?’ 밤새 이서의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이 또다시 떠올랐지만, 이번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바로 그때, 부엌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밥이 다 됐어.” 이서는 자연스럽게 지환의 옆으로 다가가 아침 식사를 식탁으로 옮겼고, 자리에 앉고서야 문득 깨달았다. ‘꼭 오래된 부부 같은 모습이네.’ “왜 그래?” 이서의 시선을 느낀 지환이 고개를 들어 미소 지었고, 이서는 하트 모양으로 구운 계란을 한 입 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찾지 못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