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는 거의 세 시간가량 지속되었다.회의가 끝나는 즉시 이상언은 하나에게로 갔다. 다가오는 케이티를 뒤로 한 채.“리셉션까지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나가서 산책이나 할까?”상언이 하나에게 말했다.“네, 좋아요.”두 사람은 입구로 걸어갔다.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본 케이티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이때 세마나의 또 다른 발표자 앤드류가 다가왔다. 앤드류는 심혈관 질환 방면의 전문가이다. 비록 이상언과 견줄 수 있는 그런 천재형 인물은 아니지만 젊은 나이에 심혈관 분야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는 건, 그도 충분히 뛰어난 사람인 셈이다.케이티의 눈빛이 상언을 쫓아가는 것을 본 앤드류는 얼굴에 음흉하고 악랄한 기운이 퍼졌다.“케이티.” 앤드류가 신사적으로 케이티에게 인사를 건넸다.애석하게도 케이티의 눈에는 다른 사람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순간 앤드류의 눈빛이 표독스러워졌다. 하지만 얼굴에는 더욱 진한 웃음을 지었다.“케이티는 저 여자를 질투하나 봐요?”앤드류에게 단번에 정곡을 찔린 케이티는 돌연 안색을 바꾸며 변명을 늘어놨다.“무슨 말씀이에요? 내가 뭐 하러 저런 여자를 질투해요? 난 외교관의 딸인 데다가, 최고의 의대를 졸업한 수재라고요. 그런 내가 왜 저 별볼일 없는 여자를 질투하겠어요?!”앤드류는 빙그레 웃었다.“네, 그렇죠? 저 별볼일 없는 여자를 질투할 리 없겠지만, 저 여자가 사라지면 당신 마음도 후련해지겠죠? 게다가 당신한테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일 테니..., 아닌가요?”케이티는 귀신이 홀린 듯 앤드류의 말에 반사적으로 반응했다.“어떻게요?”앤드류의 입가에 웃음기가 더 깊어졌다.“케이티, 그러면...”그는 케이티의 귀에 대고 낮게 말했다.앤드류의 얘기에 케이티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정말 이래도 되는 거예요?'‘괜히 이 선생님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득보다 실이 더 크면 어떡하지?’“그냥 겁만 주는 건데요 뭐, 혹시라도 정말 이 수법이 먹히면, 케이티는 손쉽게 이 선생을 손에 넣는 거구요..
이서는 몸을 돌려 2층으로 올라 갔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서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여러 번 고개를 돌려 재차 확인하고 나서야 방으로 돌아갔다.컴퓨터 앞에 앉아서도 계속 창가 쪽을 바라보았다.그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그녀는 초조한 듯 노트북을 덮었다.그러고는 일어나서 베란다 쪽으로 걸어갔다.오고 가는 차량은 많지만, 그녀의 눈길이 닿는 곳에 그가 찾는 그 차량은 보이지 않았다.한참을 멍하니 있는데 갑자기 방안에서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확인해 보니 또 낯선 번호였다. 그녀는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끊었다.끊자마자, 같은 번호로 문자 한 통이 왔다.[H선생님의 목숨이 위급합니다.]이서는 순간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난번에도 하나가 다쳤다는 수법으로 그녀를 유인해 내려 했으니 경계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그 범인은 이미 붙잡혔다고 할지라도.동일 수법을 이용한 함정은 아닌 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밑도 끝도 없는 문자를 무시하고 넘기려는 순간, 두 번째 문자가 또 들어왔다.한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진이었다.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도무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이서는 그 사람의 빨간 눈동자를 보았다.‘H선생님이다!’사진 속 시간으로 봐서는 약 한 시간 전쯤 일어난 것으로 보였다.이서는 당황했다.그녀는 황급히 상언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전화 통화가 되지 않았다.그녀는 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 역시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이서는 또 배미희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역시 전화를 받지 않았다.한창 넋이 나가 어쩔 바를 모르고 있는데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이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당신 누구예요? 지금 H선생님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남편인 지환은 까마득하게 잊고, 말끝마다 H선생만 찾는 이서를 보니, 조금 짠하기도 하고, 박예솔은 만감이 교차했다.[내가 누구인지는 중
하지호는 박예솔의 머리카락을 내려놓고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저 녀석 때문에... 정말 내 여자 되겠다는 거야?”“지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그녀의 확고한 눈빛을 본 하지호는 실눈을 떴다.“이렇게까지 하려는 이유가 뭐야? 쟤, 네 마음 몰라. 설령 알아도 널 거들떠보지도 않을 테고. 쟤 마음속에는 온통 윤이서뿐이거든.”박예솔은 몸을 휘청거렸다.하지만 곧 진정을 찾은 뒤 침착하게 말했다.“상관없어. 난 지환이 마음 같은 거 욕심내지 않아.”하지호는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탄복했다.박예솔은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다. 본인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있다. ‘마음은 딴 데 가 있어도, 사람만 가지면 된다...’책상 옆으로 간 그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는 박예솔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방금 그 대화 내용을 녹취해 두지 못한 게 아쉽네. 하지만 걱정 마. 난 너랑 달라. 마음 없는 빈 껍데기는 사양이거든. 난 네가 날 진심으로 사랑하게 만들 거야!”말하면서 그는 노트북 화면을 켰다.“이리 와 봐, 이번 계획의 타겟은 윤이서야.”박예솔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지호의 곁으로 다가갔다. 컴퓨터 화면 속에 지환이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피투성이가 되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모습으로.박예솔은 순간 얼음장이 되었다.“오빠 설마...”“아니야, 그냥 기절했을 뿐이야. 그렇게 쉽게 죽을 놈도 아니고...”하지호는 몸을 돌려 박예솔을 보았다.“하지만 난 인내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야. 윤이서가 지환이를 찾으러 먼저 올까, 아니면 지환의 부하들이 그가 실종된 걸 먼저 눈치챌까?”“지금 지환을 미끼로 윤이서를 유인하려는 거야?”하지호는 큰 소리로 호탕하게 웃었다.“하하하, 어때? 널 진심으로 생각하는 건 나뿐이지?”“윤이서가 올 거라고 생각해?”“기억을 잃은 데다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굳이 위험을 무릅쓸까? 그리고 잊지 마, 여기는 윤이서에게 낯선 곳이야. 이방인이라고.”말하면서 하지호는 키보드를 눌렀
의학 세미나 리셉션 현장.하나는 학술적 분위가 이렇게 다분한 장소는 정말 익숙지 않았다. 그녀는 상언이 화장실에 간 틈을 타 얼른 물을 한 모금 마셨다.물을 넘기기도 전에 옆에 누군가가 나타났다.그 자리는 원래 이상언이 있던 자리였다.하나는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그녀 앞에 자리 잡은 케이티를 바라보았다.케이티는 친절하게 손을 내밀며 인사를 청했다.“안녕하세요. 아직 자기소개를 못 했네요. 케이티라고 합니다. 외교관 셔면이 제 아버지세요.”임하나는 마음속 요동치는 강한 거부반응을 애써 숨기고자 했다.“네, 임하나입니다.”“알고 있어요.”케이티는 하나가 대화를 이어가 주기를 기다렸지만, 한참을 지나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혼자서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임하나 씨!”케이티는 범인을 취조하듯 딱딱한 말투로 불렀다.하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네, 케이티 씨, 무슨 일이세요?”케이티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노발대발했다.“정말 예의가 없군요. 이 선생님이 어떻게 당신같은 여자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는데...”하나는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려졌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다시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바로 이때, 귓가에 온화하고 박력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케이티, 내가 누구를 좋아하든지 케이티가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는 아닌 거 같은데? 다른 사람을 평가하기 전에 기본 매너부터 챙겨!”하나가 고개를 들어 화난 얼굴로 케이티를 째려보는 이상언을 보았다.그의 목소리는 비록 크지 않았지만, 워낙 주목받고 있는 인물이다 보니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쏠렸다.외교관의 딸로 태어나 어디를 가든 대접받고 자란 케이티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당하자 즉시 얼굴이 빨개졌다.“하나 씨한테 말을 걸었는데도 무시하고 대꾸도 하지 않고... 매너 없는 건 저쪽이라고요.”하나가 막 따지고 들려는데 상언이 다짜고짜 나섰다.“너랑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건 너를 싫어한다는
이씨 저택 앞.이서가 차량 제공을 요구하자, 입구의 경호원은 다급했다.“아가씨, 사모님이 외출하시기 전에 특별히 지시하셨습니다. 절대 아가씨를 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요. 우리를 난처하게 하지 마세요.”“H선생님에게 사고가 났어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집에 잠자코 있겠어요?” 이서는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다.“제발요, 차 좀 준비시켜 주세요. 두 시간 내에 가지 않으면 그 사람 큰일 나요.”이서가 얘기하는 그 H선생님이 바로 명성이 자자한 SY 대표라는 걸 이씨 집안 사람들은 모르는 이가 없었다.지환이 사고 났다는 얘기에 경호원의 안색이 변했다.“그럼... 아가씨, 도련님이나 사모님께 먼저 전화해 보세요. 죄송하지만 그분들 허락 없이는 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지금 그분들이랑 통화가 안 된다고요. 부탁해요. 나한테 무슨 일 생겨도 괜찮으니까 제발 내보내 주세요.”“통화가 안 된다고요?”이서는 경호원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보내주세요, 제발요.”울어 빨갛게 부은 눈을 본 경호원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래요, 아가씨, 그럼 제가 모셔다드릴게요.”이서는 그제야 기운을 차린 듯했다.“감사합니다,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경호원은 즉시 차를 몰고 박예솔이 보낸 주소로 출발했다.같은 시각, 줄곧 암암리에 이서를 보호하던 어둠의 세력도 이서를 따라나섰다. 그중 깍두기 머리를 한 남자가 손에 든 총기를 만지작거리며 불평을 늘어놨다.“아니, 보스가 외출하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는데 왜 또 한밤중에 외출이냐고?”옆에 있던 또 다른 나이가 좀 많은 남자가 그의 팔을 툭 건드렸다.“죽고 싶어? 보스 귀에 들어 갔다가는, 앞으로 우리 보스 곁에 못 있을 줄 알아...”별로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지만, 깍두기 머리 사내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많이 작아졌다.“형님, 우리는 보스의 그림자들이잖아요. 하루 종일 여자만 지키고 있는 거라면, 나는 정말이지, 보스랑 함께하지 않아도 괜찮을 듯합니다!”“너 이 자식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말을 마치고, 이서는 차를 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뒤 따라오던 어둠의 세력 조직원들도 이 장면을 목격하고는 멍해졌다.특히 깍두기 머리를 사내는 참지 못하고 낮은 소리로 불만을 늘어놓았다.“씨X, 저 여자 지금 뭐하는 거야?!”이서의 돌발 행동에 김겸도 어리둥절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목소리를 되찾았다.“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경호원도 두고. 정말 죽고 싶어 환장했나?”깍두기 머리를 사내는 다소 득의양양해서 말했다.“내가 뭐랬어요? 이 여자 요물 맞다니까요, 우리 보스를 유혹하는...”같은 시각, 경호원에게 자초지종 물으러 갔던 조직원이 다소 긴장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보스한테 뭔 사고가 난 것 같습니다.”“뭐라고?”차 안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깍두기 머리를 사내는 바로 일어섰다.“보스가? 그럴 리 없을 텐데...”“구체적인 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그 사람은 얼른 차에 올랐다.“빨리 아가씨 쫓아 갑시다.”깍두기 머리 사내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듯했다.“그럼 저 여자가 외출한 게 보스 때문이었어?”그 사람은 묵묵부답했다.하지만 답은 불 보듯 뻔했다.차 안의 사람들은 모두 침묵을 지켰다.한참 뒤에야 김겸이 말했다.“그러니까 경호원을 두고 간 것도 괜히 무고한 사람이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릴까 바였던 거였어?”그녀의 이런 무대포적 행위는 조직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위험천만한 행동이다.하지만 현재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아무도 이서의 행동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과감한 행동에 마음속 깊이 탄복했다.침묵의 차량 행렬은 어둠을 뚫고 끊임없이 앞으로 질주했다.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 이서는 목적지까지 최선을 다해 달려가고 있었다.그녀는 엑셀을 최대한 밟았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눈빛은 확고했다.결국 그녀는 마지막 1초를 남겨두고, 마침내 창고 입구
같은 시각, 차에 있던 ‘어둠의 세력’의 대장 앤서니는 지환이 하지호의 사람들에게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받았다.그에게 연락을 한 사람은 조백이었다.조백은 지환의 비서이다. 따라서 그가 보내온 정보는 틀림없다.‘그렇다면 창고에 있다던 그 사람은 누구지?’앤서니는 창고 쪽을 한 번 보고는, 지환을 구하는 게 더욱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명령을 내렸다. 차를 돌려 도시의 반대쪽으로 당장 출발한다고.깍두기 머리 사내가 있는 차량에도 명령이 전달되었다.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멍해졌다.“우리가 당했어. 우리를 이쪽으로 유인하기 위한 계략이었어.” 김겸이 말했다.“우리가 아가씨를 보호하고 있다는 걸 알고, 하지호가 일부러 아가씨를 이쪽으로 끌어들인 거야.”“나쁜 새끼! 정말 고약하군!”“...”모두가 하지호를 욕하고 있을 때, 깍두기 머리 사내는 창고의 방향을 바라보며 어눌하게 말했다.“우리 모두가 보스를 구하러 가면 아가씨는 어떻게 합니까? 여기 인적이 드문데 설마 혼자 두고 가실 겁니까?”그의 말을 들은 김겸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인적이 드물다는 건 아무도 이곳에 오지 않는다는 거야. 그래서 오히려 안전해. 아가씨는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그리고, 보스는 우리랑 반대쪽에 있어. 우리도 빨리 출발해야 해. 아가씨는 혼자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실 거야.”깍두기 머리 사내는 점점 멀어져 가는 창고 대문을 보며 마음 한 켠은 여전히 찝찝함이 남아있었다.같은 시각, 모든 차량이 출발한 걸 CCTV로 확인한 박예솔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역시! 어떻게 가짜 주소를 보내 그X을 처리해 버릴 생각을...”“내가 뭐랬어? 난 네 편이라고 했잖아.”박예솔의 얼굴에 드러난 승자의 웃음을 보며, 하지호도 입술을 보기 좋게 올렸다.“어때? 내가 준비한 선물은 마음에 들어?”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박예솔은 갑자기 유턴한 차량이 창고의 위치로 돌진하는 걸 보았다.마침 이서에게 손쓰려던 뚱보는 인기척을 듣고
방금 깍두기 머리 사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이서는 지금쯤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테다.이서는 고개를 저었다.“난 지금 당장 그 사람을 보고 싶을 뿐이에요.”이서의 눈동자에 맺힌 눈물을 본 깍두기 머리 사내는 말투가 다소 누그러들었다.“꼭 가셔야겠어요? 우리 팀... 아니, 동료들이 이미 그쪽으로 갔으니 H선생님은 틀림없이 무사할 겁니다.”“저도 갈래요. 그 사람이 무사한 걸 봐야 안심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부탁해요, 저 좀 데려다주세요요.”그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어서 가시죠.” 이서는 감격해서 말했다.“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가는 길에 두 사람은 어떤 대화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지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한 시간 여 지났을 때 깍두기 머리 사내는 전화를 받았다. 그는 스피커 폰으로 돌렸다.“형님, 보스... 아니, H선생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괜찮아, 병원으로 모셨어. 그런데 말이야, 우리가 여기 도착했을 때 아무도 없더라. 이상하지?]하지호의 부하들과 한바탕 격전을 버릴 생각으로 현장에 도착한 김겸은 현장에 개미 한 마리 안 보이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환의 몸에서도 상처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사진 속 얼굴의 피는 지환이 다쳤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쇼였다.“어느 병원으로 모셨어요? 아가씨가 H선생님을 뵙고 싶어 해서요...”깍두기 머리 사내는 긴장한 듯 김겸에게 이서가 같이 있다고 슬쩍 언질 줬다.김겸은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입을 뗐다.[아니 뭘 귀찮게... 응? 아가씨랑 같이 있다고?]“네.” 이서는 그를 따라 김겸을 불렀다.“저기... 안녕하세요, H선생님이 어느 병원에 계시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아, 그건...]“제발 알려주세요, 그분이 무사한 걸 제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이 될 거 같아요...”김겸은 이서의 상황을 십분 이해한 듯 잠깐 고민 후 대답했다.[그럼...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확인해 보고 말씀드릴게요.]김겸은 말을 마치고는 곧 전화를 끊었다.
“지금은 제가 윤씨 그룹의 대표니까요. 물론 부대표님께서 윤 대표님과 친분이 깊다는 건 잘 압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회사에서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회사에선 회사의 규정을 따라야죠.”고이서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는데, 이 말을 들은 우기광은 더 황당해졌다. “규정을 따라야 한다고요? 그럼 대체 어떤 규정을 근거로 날 해고하겠다는 겁니까?”고이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 대신 테이블 위에 해고 통보서를 내놓았다. “이만 돌아가 주시죠. 더 버티시면 보안팀을 부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고이서는 책상 옆에 놓인 전화기를 잡았지만, 우기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납득할 만한 이유를 내놓지 않으면,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우기광은 명예직이었으나, 고이서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일부러 우기광을 겨냥해 ‘본보기’로 삼으려는 것임이 분명했다. 게다가 우기광은 이서와 오래된 인연으로 잘 알려져 있었기에, 그를 해고하는 건 곧 이서를 겨냥한 행동이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고이서는 내선 전화를 걸며 덧붙였다. “보안팀이죠? 대표실로 와서 우기광 씨 좀 모시고 나가 주세요.” “당신...!” 분노로 가득 찬 우기광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고이서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사람들 보기에 좀 그렇지 않겠어요? 괜히 보안팀에 끌려 나가는 건 보기에 안 좋잖아요.” 우기광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허, 오늘 일을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 우기광이 이 말을 끝으로 사무실을 떠나자마자, 고위층 임원들이 우기광의 곁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대체 무슨 일입니까?”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우기광을 향하자, 그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침착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니 각자 자리로 돌아가서 일들 하세요. 그리고... 앞으로 당분간은 신중하게 행동해야 할 거 같습니다.” 우기광은 그렇게 한마디의 경고를 남기고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남은 사람들은 우기광
‘분명히 미쳐버린 거야!’ ‘절대 하지환 씨가 좋아서가 아니라고!’ 이서는 속으로 절박하게 외쳤지만, 머릿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비웃듯이 튀어나왔다.‘과연 그럴까?’ 하필이면 그때 아래층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서야, 포도 묘목이 도착했는데, 같이 심을래?”이서는 천천히 커튼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봤고, 여전히 셔츠를 단정히 입고 있는 지환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그냥 혼자 하세요.” “그래, 그럼 나 혼자 심을게.” 지환의 대답을 듣고 있자니, 이서는 어쩐지 지환이 불쌍하게 느껴져서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어차피 나도 할 일 없으니까 같이 심어요.” 지환은 이서를 향해 환히 웃어 보였고, 햇살 아래 지환의 미소는 마치 사람을 홀리는 듯한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했다. ‘차마 못 보겠어.’ 이서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빠르게 아래층으로 내려갔지만, 지환에게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가까워질수록 지환의 짙은 향기와 넘치는 남성미가 더 강하게 느껴져서 도망칠 곳조차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서는 최대한 멀리 떨어진 자리를 찾아 지환에게 말했다. “여기... 이쪽 벽 근처에 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중에 지지대를 세우기도 편하잖아요.” 지환은 이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네가 원하는 데다 심자.” 이서는 지환이 미소를 지을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져서, 애써 지환의 존재를 무시하고 급히 포도 묘목을 집어 들고 땅에 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듯, 지환은 이서의 속마음을 읽지 못한 듯 다가왔고, 이서가 열심히 묘목을 심는 모습을 보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포도는 그렇게 심는 거 아니야. 내가 가르쳐줄게.” 이서가 ‘괜찮아요’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지환이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봐, 이렇게 해야 해.” 이서는 이미 지환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온 신경은 어느새 등에
“아...” 이서가 순간 멍해졌고,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흘러나오는 것 같아서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지환의 눈을 피했다. “저기... 밥은 먹었어요?” 지환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응, 먹었어.” 지환은 이서의 얼굴에 번진 수줍음을 보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이서가 얼굴을 붉히는 모습은 변함없이 예쁘구나.’ 그 모습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포도 말고, 다른 건 필요 없어?” “필요 없어요. 그게... 아직 배가 덜 찼거든요. 먼저 가서 밥 좀 더 먹을게요!” 이서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황급히 자리를 떴는데, 지환이 또다시 심장을 뛰게 만드는 무언가를 말할까 봐 도망치듯 달아난 것이었다. 지환은 이서가 급히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사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지환도 이서가 자신을 완전히 미워하고 싫어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참이었다. 문제는 지환이 이서를 속였다는 점과 그가 하은철의 작은아버지라는 사실이었다. 하씨 가문이 과거에 이서에게 큰 상처를 준 만큼, 이서는 지환과 함께 있는 매 순간 하은철을 떠올릴 것이었으니 말이다.즉, 이서가 하은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지환과의 관계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지환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몸을 숙여 꽃을 심기 시작했다.‘그냥 흐름에 맡기라는 상언이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하지만...’지환은 흙 속에 심어진 꽃모종을 바라보며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이렇게 애매한 상태로 마음이 흔들리는 건 싫은데...’지환은 이서와의 관계에 분명한 경계를 짓고 싶었다. 한편, 주방에서 밥을 먹던 이서는 몸은 주방에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바깥 정원으로 날아가 있었다. 햇볕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지환을 본 순간, 지환의 셔츠 아래 단단한 근육과 팽팽한 가슴 근육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리고 그 위로 흐르는 땀방울이 주는 묘한 자극까지... ‘안 돼!’ 이서는 급
문이 닫히자마자 다른 임원들이 다급하게 물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왜 부대표님을 호출하는 거죠?” 우기광은 담담하게 답했다.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다들 걱정할 필요 없어요. 모두 자리로 돌아가서 일하세요. 별일 아닐 겁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임원들은 어쩐지 일이 단순하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모두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서 있자, 우기광은 다시 한번 차분하게 말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윤 대표님을 믿습니다. 그분이 고 팀장에게 그렇게 중요한 자리를 맡긴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우리는 고 대표와 일한 시간이 짧아서 그 사람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번 일로 그 사람을 섣불리 판단하는 건 옳지 않아요. 자, 여기서 이렇게 서 있어 봐야 해결될 일도 아니니,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서 상황을 직접 지켜봅시다. 고 팀장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이죠.” 다른 임원들은 우기광의 설득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그 시각, 이서는 위층에서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정원에서 분주히 일하고 있는 지환을 발견했다. 이서는 정원으로 내려가 다가가며 물었다. “벌써 출근한 줄 알았는데,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집안이 조용해서 당연히 지환이 출근한 줄 알았던 이서는, 지환이 정성스럽게 꽃과 나무를 손질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의아해했다. 지환은 막 심은 장미 한 송이를 다듬으며 일어섰다. “벌써 잊었어? 우리는 서로 떨어지지 않기로 했잖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혼자 출근할 수 있겠어?” 지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네가 기억을 잃고 난 이후로 여긴 방치돼 있었어. 이제 네가 돌아왔으니, 이곳을 멋진 정원으로 꾸미고 싶어. 사계절 내내 꽃이 피어 있는 정원, 정말 아름다울 것 같지 않아?” 이서는 지환에게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차피 모든 일이 끝나면, 그들과
이서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래요? 저는 왜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거죠?] 고이서는 능청스럽게 응수했다. “대표님, 아직 충분히 쉬지 못했다는 증거예요. 좀 더 시간을 갖고 푹 쉬셔야 할 것 같은데, 회사 일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하면 되니까요.”[네, 고 팀장님이 그렇게 말해 주니 마음이 놓이네요.]이서는 다시 중얼거렸다.[내가 왜 전화했을까...?] 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고, 고이서도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전화를 끊은 후, 고이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녹음해 놓길 잘했어. 본인 입으로 나더러 회사 사람들을 마음대로 해고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그렇다면 첫 번째로 할 일은...”고이서는 옆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김 비서, 들어오세요.” 김하늘이 잔뜩 긴장한 채 방으로 들어오자, 고이서가 날카롭게 물었다. “내가 회삿돈을 썼다는 거, 김 비서가 대표님께 알린 거죠?” 김하늘은 깜짝 놀라 거의 심장이 멎을 뻔했다. “아니에요, 고 팀장님! 제가 어떻게 그런 걸 대표님께 말씀드리겠어요!!” 고이서는 몇 초 동안 김하늘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만족스럽게 다리를 꼬고는 말했다. “하긴, 김 비서한테 그럴 깡은 없겠죠. 그럼 대체 누가 내가 회삿돈을 썼다는 걸 윤 대표님께 알린 거죠?”김하늘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고개만 숙였고, 고이서는 비꼬듯 말했다.“말하기 싫어요? 아, 그 사람한테 밉보일까 봐 겁나는 거예요? 그럼 말 안 해도 돼요.” 김하늘이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순간, 고이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재무팀에 가서 이번 달 월급이나 정산받으세요.” 김하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안 돼요, 그러시면 안 돼요! 저희 집엔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이 있고, 한 달에 수백만 원씩 대출금도 갚아야 하는데, 제가 직장을 잃으면 가족들이 다 굶어 죽게 된다고요. 제발 저를 내쫓지 말아 주세요!” 고이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는 법은 없었다.고이서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야 이를 악물고 전화를 받았는데, 손에 쥔 핸드폰이 그녀에겐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고이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수화기 너머의 이서에게 말했다. “네, 대표님.” 하지만 돌아온 이서의 목소리는 고이서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으며, 전혀 화가 난 기색을 띠지 않았다. 심지어 어딘가 즐거운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공금을 횡령했다면서요?]“그게... 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고이서는 더 이상 이서의 말투에 신경 쓸 여유도 없이 급하게 해명하려 들었다.[아니요, 해명할 필요 없어요. 고 팀장님이 그 돈을 쓴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요. 고 팀장님, 저는 고 팀장님을 친구로 생각하는 이상, 고 팀장님을 전적으로 믿을 생각이에요.]이서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어쨌든 회사를 위해 그 돈을 썼을 거잖아요, 그렇죠?]고이서는 얼어붙었다. ‘윤이서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방금 그 말은 치매가 오지 않은 이상 절대 할 수 없는 말이었어!’ 보아하니, 이서의 병세가 꽤 심각해진 것 같았다. ‘며칠만 더 지나면 내가 윤씨 그룹의 대표 자리를 확실히 굳힐 수 있을 것 같아.’“네, 맞습니다! 사실 진행이 안 되던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그 담당자에게 큰 선물을 보냈더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며칠 내로 프로젝트를 승인해 준다고 하더군요. 대표님, 제가 이렇게 한 게 회사 규정에 어긋나는 건 아니겠죠?”[그럼요, 지금은 고 팀장님이 윤씨 그룹의 대표니까 고 대표님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요. 제가 전화를 한 이유도 이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서였어요.][임원들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말아요. 대표 자리에 앉은 이상, 고 팀장님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요. 심지어 직원들을 해고하는 것도 가능하죠.]고이서의 눈이 커졌다. “제가 회사 직원들도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그렇다니까요? 아까 말했잖아요, 지금 회사의 실질적인 주
전화 건 사람은 우기광이었다. 이서는 우기광의 목소리를 듣고는 꽤 의외라는 듯 말했다.“웬일로 저한테 직접 전화하신 거죠?” 사실 우기광도 전화를 걸고 싶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몇몇 임원들이 회사에 우기광을 붙잡아 두는 바람에, 이서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윤 대표님, 혹시 지금 윤씨 그룹의 대표 업무를 수행하는 고이서 팀장이 공금을 횡령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아, 그게 언제 있었던 일이죠?]이서의 어조에서는 전혀 불쾌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되려 흥미로움이 묻어나는 듯했다. 우기광은 그런 이서의 반응에 잠시 의아해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 일입니다. 대표님께서 고이서 팀장에게 회사를 맡기자마자 그런 황당한 일을 저지른 거죠. 대표님, 저는 대표님께서 윤씨 그룹을 맡기 전부터 대표님과 함께 일해왔으니, 대표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표님의 능력은 누구나 인정할 정도니까요. 하지만 회사 운영을 재무팀 팀장에게 맡기신 건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이서가 웃으며 말했다.“제 결정을 무조건 지지해 줄 수 있으신가요?” 우기광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조심스러운 어조로 답했다. [그건 대표님의 결정이 회사에 이익이 되는 경우에 한합니다. 만약 회사에 손해가 되는 일이라면 저는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서의 미소가 더욱 밝아졌다. “그 말씀이면 충분합니다. 이제야 안심이 되네요. 하지만 고 팀장님의 일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임원들이 아무리 압박을 가하더라도 반드시 버텨 주셔야 하고요.” [대표님, 혹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며칠만 기다리시면 알게 될 겁니다.”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고, 곧장 김하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서의 전화가 걸려 오자, 김하늘은 겁에 질린 채 전화를 받을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몇 초 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김하늘은 전화를 받자마자 울먹이는
잠시 후, 소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서 언니, 솔직히 말해도 절대 화내면 안 돼요.]“그래, 어차피 내가 먼저 말하라고 했잖아. 소희 씨도 내가 무슨 성격인지 잘 알잖아? 말하라고 해놓고 화내는 일은 없을 거야.” 이서의 말에 하나와 소희, 나나는 용기를 내서 각자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하나가 먼저 운을 띄웠다. [이서야, 형부가 신분 문제로 널 속인 건 맞지만, 그 외의 다른 일에선 너를 진심으로 대했어.]“그러니까 네 말은 하지환 씨가 날 속인 걸 더 이상 문제 삼지 말라는 거야?”[응... 그런 셈이지.]“소희 씨 생각은 어때?”소희가 머뭇거리며 천천히 답했다.[그럼 저도 솔직히 말할게요. 형부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형부만큼 언니한테 잘해줄 사람은 찾기 어려울 거라고요.][만약 저라면 그 정도 잘못은 그냥 넘어갔을 것 같아요.]소희는 최대한 조심스레 말했고, 혹여나 이서가 기분 나빠할까 봐 머뭇거렸다.다행히 이서는 여전히 차분한 태도로 대답했다. “내가 괜히 별거 아닌 일로 예민하게 군다는 거네?”[언니,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소희가 급히 해명했지만, 이서는 한사코 소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소희 씨,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되고, 미안해할 필요도 없어. 소희 씨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게 소희 씨의 솔직한 생각인 거니까. 사람마다 문제를 보는 시각은 다르니, 결론도 다를 수 있어. 난 소희 씨의 의견을 존중하고, 그 말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것 같아. 잘 생각해 볼게.”소희는 이 말을 듣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나나가 나섰다. [언니, 아시다시피 저는 연애 경험이 없어서 딱히 할 말도 없어요. 그냥 시간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을까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답이 나올 것 같아요.]이서는 작게 중얼거렸다. “시간에 맡기라고...?”‘그래,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 어차피 하도훈 문제도 당장 해결될 게 아니고, 그때까진 고민할 시간이
윤재하와 성지영, 고이서 세 사람은 여전히 이서가 치매에 걸려 윤씨 그룹을 손에 넣을 꿈에 들떠 있었지만, 정작 이서는 지환과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고민에 빠져 있었다. 분명 병원에서 함께 지내던 때도 있어서 이번에도 별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집에서 같이 지내게 되니 묘하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이서는 귀를 바짝 세우고 문밖에서 나는 작은 소리 하나까지 신경 쓰면서도, 문밖에서 조금이라도 소리가 나면 그 소리가 금세 사라지길 바라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런 어이없는 감정에 시달리던 첫날 밤, 놀랍게도 이서는 오랜만에 불면증 없이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이서는 눈을 뜨자마자 하나의 문자 폭탄을 받았다. [너, 형부랑 다시 합친 거야?] [같이 살기 시작했다던데, 화해하고 다시 시작하려는 거냐고!]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 이 선생님이 말 안 해줬으면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나, 너한테 가장 친한 친구 아니었어?]이서는 할 말을 잃었다. 곧바로 소희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어제 두 사람이 손잡고 있는 거 보고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화해한 거였어요? 이렇게 큰일을 저한테도 숨긴 거예요?] 결국 이서는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환 씨랑 다시 화해한 거 아니야. 괜히 오해하지 마.] 그 순간, 나나도 단톡방에 뛰어들었다. [뭐라고요? 이서 언니가 형부랑 다시 화해했다고요? 대박! 들러리 자리 하나 예약할게요!]이서는 어이가 없어졌다. ‘대체 왜 내가 한 말은 안 보고 다들 자기 멋대로 상상하는 거야?’ 이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단체 영상 통화를 시도했다. “말했잖아, 화해한 거 아니라고.” 이서는‘화해한 적 없다’는 말을 특히 강조했다.그제야 세 사람은 조용해졌는데, 잠시 후에야 하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이 선생님 말로는 두 사람이 같이 산다고 하던데? 다시 화해한 게 아니면 왜 같이 사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