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는 몸을 돌려 2층으로 올라 갔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서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여러 번 고개를 돌려 재차 확인하고 나서야 방으로 돌아갔다.컴퓨터 앞에 앉아서도 계속 창가 쪽을 바라보았다.그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그녀는 초조한 듯 노트북을 덮었다.그러고는 일어나서 베란다 쪽으로 걸어갔다.오고 가는 차량은 많지만, 그녀의 눈길이 닿는 곳에 그가 찾는 그 차량은 보이지 않았다.한참을 멍하니 있는데 갑자기 방안에서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확인해 보니 또 낯선 번호였다. 그녀는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끊었다.끊자마자, 같은 번호로 문자 한 통이 왔다.[H선생님의 목숨이 위급합니다.]이서는 순간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난번에도 하나가 다쳤다는 수법으로 그녀를 유인해 내려 했으니 경계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그 범인은 이미 붙잡혔다고 할지라도.동일 수법을 이용한 함정은 아닌 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밑도 끝도 없는 문자를 무시하고 넘기려는 순간, 두 번째 문자가 또 들어왔다.한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진이었다.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도무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이서는 그 사람의 빨간 눈동자를 보았다.‘H선생님이다!’사진 속 시간으로 봐서는 약 한 시간 전쯤 일어난 것으로 보였다.이서는 당황했다.그녀는 황급히 상언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전화 통화가 되지 않았다.그녀는 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 역시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이서는 또 배미희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역시 전화를 받지 않았다.한창 넋이 나가 어쩔 바를 모르고 있는데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이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당신 누구예요? 지금 H선생님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남편인 지환은 까마득하게 잊고, 말끝마다 H선생만 찾는 이서를 보니, 조금 짠하기도 하고, 박예솔은 만감이 교차했다.[내가 누구인지는 중
하지호는 박예솔의 머리카락을 내려놓고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저 녀석 때문에... 정말 내 여자 되겠다는 거야?”“지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그녀의 확고한 눈빛을 본 하지호는 실눈을 떴다.“이렇게까지 하려는 이유가 뭐야? 쟤, 네 마음 몰라. 설령 알아도 널 거들떠보지도 않을 테고. 쟤 마음속에는 온통 윤이서뿐이거든.”박예솔은 몸을 휘청거렸다.하지만 곧 진정을 찾은 뒤 침착하게 말했다.“상관없어. 난 지환이 마음 같은 거 욕심내지 않아.”하지호는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탄복했다.박예솔은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다. 본인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있다. ‘마음은 딴 데 가 있어도, 사람만 가지면 된다...’책상 옆으로 간 그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는 박예솔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방금 그 대화 내용을 녹취해 두지 못한 게 아쉽네. 하지만 걱정 마. 난 너랑 달라. 마음 없는 빈 껍데기는 사양이거든. 난 네가 날 진심으로 사랑하게 만들 거야!”말하면서 그는 노트북 화면을 켰다.“이리 와 봐, 이번 계획의 타겟은 윤이서야.”박예솔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지호의 곁으로 다가갔다. 컴퓨터 화면 속에 지환이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피투성이가 되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모습으로.박예솔은 순간 얼음장이 되었다.“오빠 설마...”“아니야, 그냥 기절했을 뿐이야. 그렇게 쉽게 죽을 놈도 아니고...”하지호는 몸을 돌려 박예솔을 보았다.“하지만 난 인내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야. 윤이서가 지환이를 찾으러 먼저 올까, 아니면 지환의 부하들이 그가 실종된 걸 먼저 눈치챌까?”“지금 지환을 미끼로 윤이서를 유인하려는 거야?”하지호는 큰 소리로 호탕하게 웃었다.“하하하, 어때? 널 진심으로 생각하는 건 나뿐이지?”“윤이서가 올 거라고 생각해?”“기억을 잃은 데다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굳이 위험을 무릅쓸까? 그리고 잊지 마, 여기는 윤이서에게 낯선 곳이야. 이방인이라고.”말하면서 하지호는 키보드를 눌렀
의학 세미나 리셉션 현장.하나는 학술적 분위가 이렇게 다분한 장소는 정말 익숙지 않았다. 그녀는 상언이 화장실에 간 틈을 타 얼른 물을 한 모금 마셨다.물을 넘기기도 전에 옆에 누군가가 나타났다.그 자리는 원래 이상언이 있던 자리였다.하나는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그녀 앞에 자리 잡은 케이티를 바라보았다.케이티는 친절하게 손을 내밀며 인사를 청했다.“안녕하세요. 아직 자기소개를 못 했네요. 케이티라고 합니다. 외교관 셔면이 제 아버지세요.”임하나는 마음속 요동치는 강한 거부반응을 애써 숨기고자 했다.“네, 임하나입니다.”“알고 있어요.”케이티는 하나가 대화를 이어가 주기를 기다렸지만, 한참을 지나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혼자서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임하나 씨!”케이티는 범인을 취조하듯 딱딱한 말투로 불렀다.하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네, 케이티 씨, 무슨 일이세요?”케이티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노발대발했다.“정말 예의가 없군요. 이 선생님이 어떻게 당신같은 여자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는데...”하나는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려졌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다시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바로 이때, 귓가에 온화하고 박력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케이티, 내가 누구를 좋아하든지 케이티가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는 아닌 거 같은데? 다른 사람을 평가하기 전에 기본 매너부터 챙겨!”하나가 고개를 들어 화난 얼굴로 케이티를 째려보는 이상언을 보았다.그의 목소리는 비록 크지 않았지만, 워낙 주목받고 있는 인물이다 보니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쏠렸다.외교관의 딸로 태어나 어디를 가든 대접받고 자란 케이티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당하자 즉시 얼굴이 빨개졌다.“하나 씨한테 말을 걸었는데도 무시하고 대꾸도 하지 않고... 매너 없는 건 저쪽이라고요.”하나가 막 따지고 들려는데 상언이 다짜고짜 나섰다.“너랑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건 너를 싫어한다는
이씨 저택 앞.이서가 차량 제공을 요구하자, 입구의 경호원은 다급했다.“아가씨, 사모님이 외출하시기 전에 특별히 지시하셨습니다. 절대 아가씨를 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요. 우리를 난처하게 하지 마세요.”“H선생님에게 사고가 났어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집에 잠자코 있겠어요?” 이서는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다.“제발요, 차 좀 준비시켜 주세요. 두 시간 내에 가지 않으면 그 사람 큰일 나요.”이서가 얘기하는 그 H선생님이 바로 명성이 자자한 SY 대표라는 걸 이씨 집안 사람들은 모르는 이가 없었다.지환이 사고 났다는 얘기에 경호원의 안색이 변했다.“그럼... 아가씨, 도련님이나 사모님께 먼저 전화해 보세요. 죄송하지만 그분들 허락 없이는 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지금 그분들이랑 통화가 안 된다고요. 부탁해요. 나한테 무슨 일 생겨도 괜찮으니까 제발 내보내 주세요.”“통화가 안 된다고요?”이서는 경호원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보내주세요, 제발요.”울어 빨갛게 부은 눈을 본 경호원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래요, 아가씨, 그럼 제가 모셔다드릴게요.”이서는 그제야 기운을 차린 듯했다.“감사합니다,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경호원은 즉시 차를 몰고 박예솔이 보낸 주소로 출발했다.같은 시각, 줄곧 암암리에 이서를 보호하던 어둠의 세력도 이서를 따라나섰다. 그중 깍두기 머리를 한 남자가 손에 든 총기를 만지작거리며 불평을 늘어놨다.“아니, 보스가 외출하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는데 왜 또 한밤중에 외출이냐고?”옆에 있던 또 다른 나이가 좀 많은 남자가 그의 팔을 툭 건드렸다.“죽고 싶어? 보스 귀에 들어 갔다가는, 앞으로 우리 보스 곁에 못 있을 줄 알아...”별로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지만, 깍두기 머리 사내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많이 작아졌다.“형님, 우리는 보스의 그림자들이잖아요. 하루 종일 여자만 지키고 있는 거라면, 나는 정말이지, 보스랑 함께하지 않아도 괜찮을 듯합니다!”“너 이 자식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윤이서는 결혼했다.그러나 결혼 상대는 그녀가 8년 넘게 사랑을 했던 약혼자인 하은철이 아닌 만난 지 5분도 안 된, 기본적인 정보만 대충 아는 남자였다.“후회되시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사무소 대기실에서 남자는 조금 귀찮다는 눈빛으로 윤이서를 흘겨보았다.윤이서는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머릿속은 하은철의 차갑고 매정한 얼굴이 떠올랐다.3일전, 줄곧 윤이서를 피했던 하은철이 직접 그녀를 저녁식사에 초대를 했고, 전화를 받은 그녀는 순간 지난 8년간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정성껏 꾸미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하지만 약속장소에서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은철뿐만이 아니라 그와 손을 깍지를 낀 채 휠체어에 앉아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는 윤수정도 함께 있었다.--그녀의 사촌 여동생!그녀가 아직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고 있을 때, 하은철은 갑자기 폭탄발언을 했다.“네 신장을 수정이에게 주면 너와 결혼할게.”윤이서는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몸이 굳어지며 믿을 수 없단 듯이 하은철을 바라보았다.맞은편 남자의 눈빛은 시종 차갑고 증오로 가득 찼다. 마치 자신을 8년 동안 정성껏 뒷바라지 한 약혼녀가 아닌 아버지를 죽인 원수라도 보는 것 같았다.그녀는 마치 갈 곳을 잃어 절벽에서 추락하는 것 같았다.하은철과 어릴 때 약혼한 사이였고, 16살 되던 해 귀국한 후, 하은철을 걷잡을 수 없이 사랑하게 되었다.이 8년 동안 그를 뒷바라지 하기 위해 그녀는 빨래와 밥하는 것을 배웠고, 또 그에게 걸맞는 아내가 되기 위해 피아노, 그림 등을 배웠으며 심지어 그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오직 그가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와 결혼해주기 꿈꾸며.그러나 현실은 그녀에게 매몰찼다. 하은철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촌 여동생을 사랑하고 있었다.심지어 그의 애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전혀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도
“무슨 문제 있나요?” 하지환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윤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벌리고 있다가 또 하지환이 오해할까 봐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아니요, 가요.”어차피 언젠가 마주해야 할 문제였다.도중에 윤이서는 하은철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스크린이 끊임없이 반짝이는 것을 보면서 윤이서는 마치 지난 8년 동안 비굴했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전에는 모두 그녀가 먼저 하은철에게 전화를 걸며 그의 관심을 끌려했다.그러나 하은철은 단 한 번도 먼저 그녀에게 전화를 지 않았다.설령 그녀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한다 하더라도 그는 한 마디 관심도 없었다.그러나 지금, 윤수정을 위해 그는 몇 번이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두 사람 사이의 차이는 정말 컸다.“안 받아요?” 조수석에서 눈을 감고 쉬고 있던 하지환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윤이서는 남자의 완벽한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록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그가 짜증이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수신 버튼을 눌렀다.입을 열기도 전에 맞은편 하은철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윤이서! 너 당장 병원으로 오지 못해! 지금 얼마나 많은 전문가들이 너 기다리고 있는지 알아? 수정이는 얼마나 괴로운지 아냐고? 너 어떻게 이렇게 이기적일 수 있어? 나는 이미 너와 결혼하는 것에 동의했는데, 넌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윤이서의 입가에는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비록 하은철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하은철의 마음속에 있는 자신이 그렇게 형편없었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이왕 이렇게 된 이상…….“내가 원하는 게 뭔지 잘 알잖아?” 윤이서의 눈빛은 차가워졌다.“난 너의 사랑을 원하는데, 너는 줄 수 있어?”“뻔뻔한 년!”하은철은 그녀를 비꼬았다.“나는 절대로 너 같은 여자 사랑하지 않을 거야! 윤이서, 너 지금 오면 아직 하씨 집안 아
윤이서의 가슴은 놀라움에 줄곧 두근거렸다.마치 바다에서 떠 있다 마침내 부목을 잡은 것 같았다.고개를 들자 그녀는 마침 하지환의 눈빛과 부딪쳤다.그의 눈빛은 더 이상 장난기가 없었고, 오히려 무척 다정했다. 그 순간, 윤이서마저 하마터면 그에게 속아 넘어갈 뻔했다.그녀는 황급히 윤재하와 성지영을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놀라서 소파에 주저앉았다.한참 뒤, 윤재하는 먼저 반응하여 고개를 들어 윤이서에게 물었다.“이서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윤이서는 막 입을 열려고 했지만 하지환은 그녀를 자신의 뒤로 감쌌다.이런 전 없었던, 누군가에 의해 보호받는 느낌은 그녀의 머리를 하얗게 만들었고 이때 귓가에서 하지환의 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울렸다.“오늘 금방 혼인 신고를 했는데, 정말 너무 바빠서 두 분께 미처 알리지 못했네요.”윤재하는 화를 참으며 이성을 유지했다.“이서야!”윤이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말했다.“네, 저 사람 말이 모두 사실이에요. 난 결혼했고, 그 이유는 바로 하은철과 결혼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지영이 달려와 윤이서의 두 어깨를 쥐고 말했다.“이서야, 너 왜 그래? 너 줄곧 은철을 좋아했잖아, 지금 은철이 마침내 너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너 어떻게…….”그녀는 갑자기 경계하며 하지환을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낮추었다.“너 솔직히 말해봐, 누가 널 협박한 거 아니야?”성지영이 하지환을 오해했다는 것을 깨닫고 윤이서는 얼른 설명했다.“엄마, 아무도 나를 협박하지 않았어요. 나는 그냥 날 전혀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그녀는 지쳤다.그리고 더 이상 그에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성지영의 손톱은 윤이서의 살에 깊이 파고들었다.“이서야, 너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니? 네가 은철과 혼약을 맺었을 때부터 우리는 널 그의 미래의 아내로 키웠고, 네가 시집가는 것은 윤씨 가문을 되살리기 위한 것이지, 그 따위 사랑을 위한 것이 아니야!”윤이서는 통증에
하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사람을 조수석에 앉힌 다음 운전석으로 올라왔고 문을 쾅 닫았다.윤이서는 놀라서 몸을 움츠렸고 하지환의 보기 흉한 안색을 슬쩍 바라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화낼 사람은 분명히 그녀인데, 왜 하지환이 그녀보다 더 화가 난 것 같지?다음 순간, 하지환은 갑자기 차에 시동을 걸었고, 차는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윤이서는 하마터면 날아갈 뻔했다. 그녀는 안전벨트를 꽉 잡았고, 목소리는 바람에 의해 다르게 변했다.“도대체 뭐 하려는 거예요?”하지환은 그녀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 듯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았고, 검은 눈동자는 마치 어두운 밤의 야수처럼 앞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순간, 평범한 아우디 A6는 철장에서 벗어난 맹수처럼 조용한 거리를 거침없이 질주했다.윤이서는 창백한 얼굴로 온 힘을 다해 안전벨트를 잡았고, 큰 소리로 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거대한 바람소리는 마치 블랙홀처럼 그녀의 소리를 삼켰다.그렇게 윤이서는 차츰 발버둥 치는 것을 포기하고 광풍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불도록 내버려 두며 하지환이 미친 사람처럼 그녀를 어디론가 데려가도록 내버려 두었다.3일 전, 그녀는 이미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자살은 너무 아파서 그녀는 용기를 내지 못했다.그리고 그때, 그녀는 부모님이 아무리 자신을 하씨 집안으로 시집가게 만들고 싶어도 하은철의 황당한 요구만 들으면 반드시 자신을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이것 또한 그녀가 하지환을 데리고 부모님을 만나러 갈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그러나 부모님의 눈에는 윤씨 집안을 다시 정상으로 만드는 것이 그녀의 행복보다 훨씬 중요했다.20여 년의 모든 아름다운 기억은 지금 산산조각이 났다.바람은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향해 불었고, 그녀는 이미 눈물이 다 말랐다.마음은…… 죽었으니까.차 속도는 어느새 느려졌고 윤이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차는 해변에 도착했고, 노을에 물든 모래사장에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그들은 마치 작은 검은 점처럼 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