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 세미나 리셉션 현장.하나는 학술적 분위가 이렇게 다분한 장소는 정말 익숙지 않았다. 그녀는 상언이 화장실에 간 틈을 타 얼른 물을 한 모금 마셨다.물을 넘기기도 전에 옆에 누군가가 나타났다.그 자리는 원래 이상언이 있던 자리였다.하나는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그녀 앞에 자리 잡은 케이티를 바라보았다.케이티는 친절하게 손을 내밀며 인사를 청했다.“안녕하세요. 아직 자기소개를 못 했네요. 케이티라고 합니다. 외교관 셔면이 제 아버지세요.”임하나는 마음속 요동치는 강한 거부반응을 애써 숨기고자 했다.“네, 임하나입니다.”“알고 있어요.”케이티는 하나가 대화를 이어가 주기를 기다렸지만, 한참을 지나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혼자서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임하나 씨!”케이티는 범인을 취조하듯 딱딱한 말투로 불렀다.하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네, 케이티 씨, 무슨 일이세요?”케이티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노발대발했다.“정말 예의가 없군요. 이 선생님이 어떻게 당신같은 여자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는데...”하나는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려졌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다시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바로 이때, 귓가에 온화하고 박력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케이티, 내가 누구를 좋아하든지 케이티가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는 아닌 거 같은데? 다른 사람을 평가하기 전에 기본 매너부터 챙겨!”하나가 고개를 들어 화난 얼굴로 케이티를 째려보는 이상언을 보았다.그의 목소리는 비록 크지 않았지만, 워낙 주목받고 있는 인물이다 보니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쏠렸다.외교관의 딸로 태어나 어디를 가든 대접받고 자란 케이티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당하자 즉시 얼굴이 빨개졌다.“하나 씨한테 말을 걸었는데도 무시하고 대꾸도 하지 않고... 매너 없는 건 저쪽이라고요.”하나가 막 따지고 들려는데 상언이 다짜고짜 나섰다.“너랑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건 너를 싫어한다는
이씨 저택 앞.이서가 차량 제공을 요구하자, 입구의 경호원은 다급했다.“아가씨, 사모님이 외출하시기 전에 특별히 지시하셨습니다. 절대 아가씨를 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요. 우리를 난처하게 하지 마세요.”“H선생님에게 사고가 났어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집에 잠자코 있겠어요?” 이서는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다.“제발요, 차 좀 준비시켜 주세요. 두 시간 내에 가지 않으면 그 사람 큰일 나요.”이서가 얘기하는 그 H선생님이 바로 명성이 자자한 SY 대표라는 걸 이씨 집안 사람들은 모르는 이가 없었다.지환이 사고 났다는 얘기에 경호원의 안색이 변했다.“그럼... 아가씨, 도련님이나 사모님께 먼저 전화해 보세요. 죄송하지만 그분들 허락 없이는 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지금 그분들이랑 통화가 안 된다고요. 부탁해요. 나한테 무슨 일 생겨도 괜찮으니까 제발 내보내 주세요.”“통화가 안 된다고요?”이서는 경호원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보내주세요, 제발요.”울어 빨갛게 부은 눈을 본 경호원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래요, 아가씨, 그럼 제가 모셔다드릴게요.”이서는 그제야 기운을 차린 듯했다.“감사합니다,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경호원은 즉시 차를 몰고 박예솔이 보낸 주소로 출발했다.같은 시각, 줄곧 암암리에 이서를 보호하던 어둠의 세력도 이서를 따라나섰다. 그중 깍두기 머리를 한 남자가 손에 든 총기를 만지작거리며 불평을 늘어놨다.“아니, 보스가 외출하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는데 왜 또 한밤중에 외출이냐고?”옆에 있던 또 다른 나이가 좀 많은 남자가 그의 팔을 툭 건드렸다.“죽고 싶어? 보스 귀에 들어 갔다가는, 앞으로 우리 보스 곁에 못 있을 줄 알아...”별로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지만, 깍두기 머리 사내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많이 작아졌다.“형님, 우리는 보스의 그림자들이잖아요. 하루 종일 여자만 지키고 있는 거라면, 나는 정말이지, 보스랑 함께하지 않아도 괜찮을 듯합니다!”“너 이 자식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말을 마치고, 이서는 차를 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뒤 따라오던 어둠의 세력 조직원들도 이 장면을 목격하고는 멍해졌다.특히 깍두기 머리를 사내는 참지 못하고 낮은 소리로 불만을 늘어놓았다.“씨X, 저 여자 지금 뭐하는 거야?!”이서의 돌발 행동에 김겸도 어리둥절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목소리를 되찾았다.“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경호원도 두고. 정말 죽고 싶어 환장했나?”깍두기 머리를 사내는 다소 득의양양해서 말했다.“내가 뭐랬어요? 이 여자 요물 맞다니까요, 우리 보스를 유혹하는...”같은 시각, 경호원에게 자초지종 물으러 갔던 조직원이 다소 긴장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보스한테 뭔 사고가 난 것 같습니다.”“뭐라고?”차 안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깍두기 머리를 사내는 바로 일어섰다.“보스가? 그럴 리 없을 텐데...”“구체적인 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그 사람은 얼른 차에 올랐다.“빨리 아가씨 쫓아 갑시다.”깍두기 머리 사내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듯했다.“그럼 저 여자가 외출한 게 보스 때문이었어?”그 사람은 묵묵부답했다.하지만 답은 불 보듯 뻔했다.차 안의 사람들은 모두 침묵을 지켰다.한참 뒤에야 김겸이 말했다.“그러니까 경호원을 두고 간 것도 괜히 무고한 사람이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릴까 바였던 거였어?”그녀의 이런 무대포적 행위는 조직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위험천만한 행동이다.하지만 현재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아무도 이서의 행동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과감한 행동에 마음속 깊이 탄복했다.침묵의 차량 행렬은 어둠을 뚫고 끊임없이 앞으로 질주했다.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 이서는 목적지까지 최선을 다해 달려가고 있었다.그녀는 엑셀을 최대한 밟았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눈빛은 확고했다.결국 그녀는 마지막 1초를 남겨두고, 마침내 창고 입구
같은 시각, 차에 있던 ‘어둠의 세력’의 대장 앤서니는 지환이 하지호의 사람들에게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받았다.그에게 연락을 한 사람은 조백이었다.조백은 지환의 비서이다. 따라서 그가 보내온 정보는 틀림없다.‘그렇다면 창고에 있다던 그 사람은 누구지?’앤서니는 창고 쪽을 한 번 보고는, 지환을 구하는 게 더욱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명령을 내렸다. 차를 돌려 도시의 반대쪽으로 당장 출발한다고.깍두기 머리 사내가 있는 차량에도 명령이 전달되었다.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멍해졌다.“우리가 당했어. 우리를 이쪽으로 유인하기 위한 계략이었어.” 김겸이 말했다.“우리가 아가씨를 보호하고 있다는 걸 알고, 하지호가 일부러 아가씨를 이쪽으로 끌어들인 거야.”“나쁜 새끼! 정말 고약하군!”“...”모두가 하지호를 욕하고 있을 때, 깍두기 머리 사내는 창고의 방향을 바라보며 어눌하게 말했다.“우리 모두가 보스를 구하러 가면 아가씨는 어떻게 합니까? 여기 인적이 드문데 설마 혼자 두고 가실 겁니까?”그의 말을 들은 김겸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인적이 드물다는 건 아무도 이곳에 오지 않는다는 거야. 그래서 오히려 안전해. 아가씨는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그리고, 보스는 우리랑 반대쪽에 있어. 우리도 빨리 출발해야 해. 아가씨는 혼자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실 거야.”깍두기 머리 사내는 점점 멀어져 가는 창고 대문을 보며 마음 한 켠은 여전히 찝찝함이 남아있었다.같은 시각, 모든 차량이 출발한 걸 CCTV로 확인한 박예솔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역시! 어떻게 가짜 주소를 보내 그X을 처리해 버릴 생각을...”“내가 뭐랬어? 난 네 편이라고 했잖아.”박예솔의 얼굴에 드러난 승자의 웃음을 보며, 하지호도 입술을 보기 좋게 올렸다.“어때? 내가 준비한 선물은 마음에 들어?”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박예솔은 갑자기 유턴한 차량이 창고의 위치로 돌진하는 걸 보았다.마침 이서에게 손쓰려던 뚱보는 인기척을 듣고
방금 깍두기 머리 사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이서는 지금쯤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테다.이서는 고개를 저었다.“난 지금 당장 그 사람을 보고 싶을 뿐이에요.”이서의 눈동자에 맺힌 눈물을 본 깍두기 머리 사내는 말투가 다소 누그러들었다.“꼭 가셔야겠어요? 우리 팀... 아니, 동료들이 이미 그쪽으로 갔으니 H선생님은 틀림없이 무사할 겁니다.”“저도 갈래요. 그 사람이 무사한 걸 봐야 안심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부탁해요, 저 좀 데려다주세요요.”그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어서 가시죠.” 이서는 감격해서 말했다.“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가는 길에 두 사람은 어떤 대화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지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한 시간 여 지났을 때 깍두기 머리 사내는 전화를 받았다. 그는 스피커 폰으로 돌렸다.“형님, 보스... 아니, H선생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괜찮아, 병원으로 모셨어. 그런데 말이야, 우리가 여기 도착했을 때 아무도 없더라. 이상하지?]하지호의 부하들과 한바탕 격전을 버릴 생각으로 현장에 도착한 김겸은 현장에 개미 한 마리 안 보이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환의 몸에서도 상처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사진 속 얼굴의 피는 지환이 다쳤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쇼였다.“어느 병원으로 모셨어요? 아가씨가 H선생님을 뵙고 싶어 해서요...”깍두기 머리 사내는 긴장한 듯 김겸에게 이서가 같이 있다고 슬쩍 언질 줬다.김겸은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입을 뗐다.[아니 뭘 귀찮게... 응? 아가씨랑 같이 있다고?]“네.” 이서는 그를 따라 김겸을 불렀다.“저기... 안녕하세요, H선생님이 어느 병원에 계시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아, 그건...]“제발 알려주세요, 그분이 무사한 걸 제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이 될 거 같아요...”김겸은 이서의 상황을 십분 이해한 듯 잠깐 고민 후 대답했다.[그럼...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확인해 보고 말씀드릴게요.]김겸은 말을 마치고는 곧 전화를 끊었다.
같은 시각, 하이먼 스웨이의 집에 머물고 있는 배미희는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깜깜 모른 채 하이먼 스웨이와 함께 이서의 글을 보고 있었다.비록 전문가는 아니지만, 배미희는 독자로서 소설에 푹 빠져 있었다. 뒷이야기가 궁금해 좀처럼 손을 놓을 수 없었다.“너무 재밌네요. 그런데 왜 이서의 글속에서 스웨이 여사의 문필이 보이는 거 같죠? 설마 이서에게 특별 과외라도 해준 거예요?”이미 한 번 다 읽었지만, 배미희는 아쉬운 듯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이 원고를 처음 봤을 때, 나도 같은 생각이었어요.”“처음 봤을 때라니요? 이 원고 본 적 있는 거예요?”“네, 이서가 전에 썼던 내용이에요.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이서가 옛날 기억을 잊고 다시 한 번 이 원고를 쓴 것 같아요.”배미희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똑 같은 내용인가요?”“네.”하이먼 스웨이가 한숨을 내쉬었다.“이야기 줄거리를 마음속 깊이 새겨놨었나 보네요.”배미희도 따라서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게요, 얼마나 좋아했으면... 기억 잃은 게 아쉬울 따름이예요. 안 그랬으면 아마도 스웨이 여사처럼 작가의 길을 걸었을 텐데.”맞장구를 치려던 하이먼 스웨이는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했다.“아, 저는 다음 달에 열릴 세계적인 대공모전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하잖아. 이서에게 공모전에 참가해보라고 하는 건 어때요?”“그래요, 아무래도 재능을 썩히기는 너무 아깝죠. 알겠어요, 내가 집에 가서 얘기해 볼게요. 아마 좋아할 거예요.”하이먼 스웨이의 얼굴에 서글픈 웃음기가 돌았다.“난 이서에게 미안한 게 많아요...”“네? 그게 무슨 말이예요?”“이서를 처음 만났을 때 나랑 마음이 참 잘 맞는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수양딸로 삼았던거고요. 그런데 가은이를 찾고 난 뒤, 그녀가 별로 좋아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서와 인연을 끊다시피 했어요. 그래서 이서를 생각할 때마다 늘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배미희는 솔직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내가 보기에 스웨이 여
그가 이번에 함정에 빠진 것은 전적으로 인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상대방이 그를 죽이지 않은 것도 그의 신분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한 것이다.이서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죄송해요, 괜히 저때문에...”지환은 더는 잠자코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손을 들어 이서의 얼굴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말투는 가볍고 부드러웠다.“너랑 아무 상관없는 일인데...”“저를 유인하기 위해 H선생님을 납치했잖아요.”‘내가 아니었다면 H선생님도 다치지 않았을 텐데.’지환 얼굴의 웃음기가 더 깊어졌다.“너 때문이 아니라 나를 겨냥한 거야. 난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야. 그간 알게 모르게 원한을 산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어?”이서는 고개를 저었다.“저도 다 알아요. 애쓸 필요 없어요. 모두 저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저한테 전화를 했겠죠...”지환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는 가늘게 실눈을 떴다.“전화를 했다고?”“네.”그의 안색은 순식간에 다시 원래 모습대로 되돌아왔다.“괜찮아, 어쨌든 나는 지금 멀쩡하잖아.”지환의 눈을 보고 있자니, 이서는 자꾸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자신 때문에 H선생님이 죽을 뻔했다는 생각에 그녀는 미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지환의 침대 머리맡에서 얘기를 나누던 이서는 고단했는지 그대로 침대 옆에 엎드려 곤히 잠이 들었다.지환은 살그머니 침대에서 내려와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곤히 잠든 이서는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조용히 잠을 자고 있었다.지환은 가면을 벗고 이서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이서는 여전히 단잠에 빠져 있었다.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환은 자상하게 웃으며 옆에 놓인 수건을 들어 이서의 눈물을 닦았다.그러고는 소파에 가서 누웠다.창밖의 밝은 달빛이 휘영청 방 안을 부드럽게 비췄다. 세상 만물을 이렇듯 고요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지환은 자신의 팔을 베고 조용히 이서를 바라보았다.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가까이 다가오기 전까지. 병실 안 정적은
지환의 말투는 냉랭했다.“아직은 시기상조야.”“네? 시기상조라니요?” 앤서니는 초조하게 말했다.“대표님, 설마 그 배후의 조직이 두려우신 겁니까?”SY에게 ‘어둠의 세력’가 있다면, 하지호 배후에는‘늑대’라는 조직이 있다.하지호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가 거느리고 있는‘늑대’에도 불법이나 범법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심지어는 살인범까지도.하지만 앤서니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지환에게 충성을 맹세한 순간부터 이미 자신의 목숨은 내놓은 지 오래되었다. 지환을 위해서러면 전혀 아깝지 않았다.“대표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뿐만 아니라 저희 어둠의 세력 맴버들 모두 목숨을 걸고 싸울 겁니다.”“무의미한 희생은 할 필요 없어.”지환의 말투는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그리고 너희들... 모두 나한테 오면 이서는 누가 지켜?”지환의 물음에 앤서니와 조백은 눈이 마주쳤다.한참이 지나서야 앤서니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대표님, 지금 하지호 씨를 치지 않으실 거라면, 어둠의 세력 조직원의 절반을 대표님이 계신 쪽으로 돌리셔야 합니다. 이번에 하지호 씨한테 당했던 것도...”지환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답했다.“아니야, 이번에는 내가 방심했어.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거야.”“하지만...” 앤서니는 포기하지 않았다.“대표님...”“그만!”지환은 차갑게 그의 말을 끊었다.“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더이상 왈가왈부하지 마. 맞다, 내가 듣기로는 어젯밤 일은 이서를 겨냥한 거라고 들었는데?”지환은 화제를 돌렸다. 즉, 이 일은 이미 확정된 거라 더 이상 되돌릴 가능성은 없다는 얘기다.앤서니는 입이 댓발만큼 튀어나왔다.옆에 있던 조백이 상황을 살피고 얼른 대답했다.“네, 대표님, 조사해 봤는데, 창고에 있는 그 시체는 늑대 조직의 사람이었습니다. 일찍이 하룻밤에 사람 다섯을 죽였다고 해서 살인마라고 불리는 놈이었는데...어젯밤, 산이가 아가씨 있는 곳으로 돌아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
하지만 한 회사의 대표는 곧 하늘과도 같았다. “아직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서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한 김하늘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 사무실에도 CCTV가 있을 거 아니에요. 당장 영상 자료를 가져와 보라고요!” 김하늘은 당황하며 말했다. “대표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굳이 대표님께서 무안해지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아.’ 이 정도의 생각은 김하늘도 하고 있었으나, 이서는 아주 단호했다.“됐고, 당장 가져오세요.” 김하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고이서는 의아해졌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비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그럼 설마...’ ‘그 꽃차가 효과를 나타낸 건가?’이 가능성이 떠오르자 고이서는 속으로 흥분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대표님께서 CCTV를 보자고 하신다면 봐야죠. 만약 저희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대표님께서도 정확하게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렇죠, 대표님?”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니까요.” “만약 김 비서가 잘못 전한 거라면 엄하게 처벌하고, 정말 내가 말해놓고 잊어버린 게 맞다면, 그땐 분명히 사과할게요.” 이쯤 되니 김하늘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김하늘은 결국 CCTV 영상을 가져왔고, 영상 속에는 이서가 몇 번이나 김하늘에게 지시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고 팀장님을 불러주세요.”심지어 몇 분 간격으로 반복해서 지시하는 모습도 있었다. 이서는 그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내가 한 말이 맞다고...? 그런데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지?”“김 비서, 미안해요.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랬어요.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너무 미안해서 가방을 하나 선물로 주고 싶은데, 오늘 퇴근하기 전에 나한테 와서 받아 가요, 알겠죠?”김하늘은 이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애매하고 거절하기도
“진짜예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이서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지환은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이서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을 단순히 의례적인 질문으로 하지 않고, 정말 진심을 담아 묻곤 했다. 지환은 한동안 말없이 이서를 바라보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짜야. 생각해 봐. 네가 너희 가족 이야기를 고이서와 나눈 거잖아. 고이서 입장에선 너와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을 거야.” 이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그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병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고마워요.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어요.” 이서는 진심으로 말했고, 지환은 잠시 이서를 응시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응.”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요.” 이서는 문을 열고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서 내렸다. ...이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꽃차를 들고 의사를 찾아갔고, 의사는 꽃차를 검사한 뒤 말했다. “지난번과 성분이 똑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양이 더 많네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겠어요.” 의사는 몇 번 더 종이에 뭔가를 적더니 고개를 들었다.“3일이에요. 이 차를 마시면 3일 후에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서, 생각보다 더 조급했구나?’ 이서는 병실로 돌아가 꽃차를 우린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 덕분에 불면증이 해결됐어요. 요즘 정말 잘 자고 있답니다.]문구와 함께 사진을 올리자, 고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모든 걱정을 덜어냈다. 이제 남은 건 이서가 언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느냐였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고이서는 간절하게 속으로 외쳤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윤씨 그룹의 CEO 자리에 앉고 싶다고.’특히 이서가 회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주목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이서의 질투심이 극에 달했다.
고이서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참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듣고 있었어요. 대표님의 부모님께서 그렇게 하신 건, 뭔가 사정이 있으셨던 거 아닐까요?” 이서는 즉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짓을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어떤 부모가 자기 딸의 신장을 빼앗으려는 남자에게 딸을 내줄 수 있다는 거죠?” 고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서는 혼자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제가 두 사람의 친딸이 아니라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한 걸지도 모르죠.” 고이서는 숨이 잠시 멎는 듯했고, 이마에서 흐르던 땀은 이미 목덜미까지 흘러내려 고이서의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 세상에 다양한 부모가 있듯이, 부모의 형태도 여러 가지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서는 이미 땀에 젖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고이서를 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지운 뒤, 사과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미안해요. 이렇게 더운 날씨에 괜히 말을 길게 했나 봐요. 이만 돌아가 보세요. 더 있다가 더위 먹으면 안 되잖아요?” 고이서는 마치 구원을 받은 듯 서둘러 고개를 숙인 후 떠났고, 이서는 그녀의 젖은 등 뒤를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지환은 이서의 눈가에 깃든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웃고 싶으면 그냥 웃어.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그제야 이서는 참지 않고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이서가 지환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진심 어린 웃음을 짓는 순간이었다. 지환은 이서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이서는 그제야 눈치를 채고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오랜만에 네가 그렇게 웃는 걸 보니까 기록해 두고 싶어서. 혹시라도 불편하면 바로 지울게.” 이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황급히 말했다. “잠시만요!” 사진 속 이서의 얼굴은 오랜만에 활짝 핀 미소로 가득했다. ‘그러게, 이렇게 웃
“그럼요, 지금 바로 갈게요.” 이서는 전화를 끊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바쁘면 나 혼자 택시 타고 가도 돼요.” 하지만 지환은 이미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난 괜찮아.” 이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십여 분쯤 지나, 두 사람은 고이서를 마주했다.이서에게 꽃차를 건네주던 고이서는 지환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물론 지환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마주한 지환은 자료 속의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왠지 모르게 지환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품격이 있었다. 그 품격은 마치 높은 자리에 있는 왕처럼 다가왔고, 고이서는 알 수 없는 질투심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성지영과 윤재하는 분명 여러 번 말했었다. “윤이서 남편은 돈도 없는 놈이야.” 그런데도 고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야. 하은철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안녕하세요.” 고이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지환에게 인사를 건넸고, 이서의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윤 대표님, 꽃차가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고이서는 이곳에 더 머물렀다가 의심을 살까 싶어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럼, 별일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고이서가 돌아서려는 순간, 이서가 그녀를 불렀다. “고 팀장님.” 고이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물었다. “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고 팀장님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고이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묘한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아마 자신이 꺼림칙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었다. 이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고 팀장님이 준
하지만 그 누구도 사다리를 건네주지 않아서, 이서는 계속 지붕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아슬아슬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며 떨고 있을 뿐이었다.이 순간 누군가 사다리를 건네준다면, 이서는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서는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30분이나 지났네.’ 이서가 발을 닦고 나서 계단으로 나가 아래층을 내려다보니, 지환은 거실에서 서류를 펼쳐놓고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하지환 씨가 사다리를 건네준다면... 나는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하지환 씨를 용서하게 될까?’ 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이서는 마음이 복잡해져서 서둘러 시선을 돌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일하는 중이에요?” 이서가 묻자 지환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응.” 이서는 지환과 한 발짝 떨어진 소파에 앉았고, 두 사람은 말없이 함께 앉아 있었다. 어색함도 없었고, 굳이 대화를 만들어낼 필요도 없었다. 이런 평온한 순간은 회사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것이었다. 이서는 문득 표정을 풀고,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이서는 성지영의 딸이야. 이번에 돌아온 것도 분명 윤씨 그룹을 노리고 돌아온 거겠지.” 지환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죠.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윤씨 그룹에 입사해서 나한테 약을 먹일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요. 고작 그런 방식으로 날 바보로 만들려고 하다니, 어이가 없어요.” 고이서 했던 짓을 떠올리자 이서는 코웃음을 쳤다. 이서의 예상이 맞다면, 고이서가 처음부터 자신이 윤재하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것은, 그것만으로는 효과가 없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윤씨 그룹은 과거의 윤씨 그룹이 아니었다. 윤씨 그룹이 MH 그룹과 통합한 후, 이서는 쓸모없는 윤씨 일가들을 모두 몰아내고 필요한 사람들만 남겼다. 설령 윤재하가 자신이 윤씨 가문의 친딸이 아니라며 이서의 자격을 문제
지환은 몸을 숙여 이서 뒤에 있던 이불을 집어 들고 이서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서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상황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방금 하지환 씨는 나한테 뭘 하려던 게 아니라, 그냥 이불을 덮어주려던 거였어?’ 이서는 닫힌 방문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고, 생각은 어느새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환 씨가... 나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일까?’ 이서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마음속에서는 아무런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지환은 이미 아래층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서는 지환이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예전에도 지환은 자주 이렇게 아침을 준비하곤 했다. 물론 처음에는 요리 실력이 썩 좋지 않았고, 아주 서툴렀다. 하지만 그때의 이서는 눈치가 없어서 지환이 원래 요리와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지환이 이서를 위해 요리를 배우고 준비했다는 사실은 참 감동적인 것이었다.지환은 두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밥 짓고, 반찬을 만들고, 살림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하지환 씨가... 나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일까?’ 밤새 이서의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이 또다시 떠올랐지만, 이번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바로 그때, 부엌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밥이 다 됐어.” 이서는 자연스럽게 지환의 옆으로 다가가 아침 식사를 식탁으로 옮겼고, 자리에 앉고서야 문득 깨달았다. ‘꼭 오래된 부부 같은 모습이네.’ “왜 그래?” 이서의 시선을 느낀 지환이 고개를 들어 미소 지었고, 이서는 하트 모양으로 구운 계란을 한 입 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찾지 못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처음에 그 약속을 할 때, 왜 이런 상황까진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이서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지환은 그런 이서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마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조용히 말했다. “술집에 가고 싶으면, 가자.” 이서의 눈이 반짝였다. “진짜요?”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서는 스크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영화는 다 보고 나가는 걸로 해요. 그리고 술 마시고 나서는 밤거리를 좀 걷는 게 어때요? 한밤중에 조용한 거리를 걷는 거, 진짜 재밌거든요. 혹시 해본 적 있어요?”지환이 대답하기도 전에 이서는 스스로 신이 나서 말했다.“아마 해본 적 없겠죠? 진짜 재밌어요. 가끔 차가 몇 대 지나가면 더 재밌는데, 고요한 밤에 갑자기 누군가가 정적을 깨는 것 같다니까요?” 바로 그때, 지환이 이서의 말을 부드럽게 끊었다. “네가 하고 싶은 건 뭐든 같이 해줄게. 오늘 밤 집에 안 가는 것까지도.” 이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괜찮겠어요?” “괜찮고말고. 뭐가 문제겠어?” 어둠 속에서 지환의 시선은 한결같았다. 오히려 이서는 괜히 의심하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혹시 내가 너무 깊이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집에 가서 단둘이 있게 될 상황을 떠올리니, 이서의 마음이 다시 복잡해졌다. 이서는 다시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환 씨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죠.” 두 사람은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술집으로 향했다. 술을 마시며 11시가 넘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하루 종일 돌아다녔던 탓인지 이서는 이미 지쳐 있었다. 술집에서 나와 밤거리를 걷겠다고 했던 말이 무색하게, 이제는 도저히 걸을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남은 시간 동안 지환과 단둘이 밤거리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서는 겨우 정신을 붙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자정이 다가오자 이서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결국 졸음을 이기지 못한 이서는 눈을 감았다가, 스스
단톡방은 한동안 조용했는데, 한참 지나서야 하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대체 뭐가 네 눈을 흐리게 만든 거야? 형부가 인기가 없다고 생각한 이유가 대체 뭐냐고.]이서가 당황하던 찰나, 소희도 메시지를 보내왔다.[언니가 싫어할 말인 건 알지만, 형부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줄 세우면, H국에서 M국까진 이어질걸요?]나나도 끼어들며 한마디 했다. [솔직히 말해서 형부가 원한다면 매일 여자 친구를 바꾸는 것도 가능할 거예요. 매번 다 다른 사람일 거고, 죄다 아주 예쁜 여자들이겠죠... 아, 물론 형부가 원한다는 전제가 있어야겠지만요!]“...” 이서는 조용히 지환을 쳐다보았고, 이서의 시선을 느낀 지환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이서는 지환을 몇 번 더 흘깃 본 후,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서는 지환이 정말로 인기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그저 닭고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이 나쁘진 않았지만 그렇게 대단한 정도는 아니었다. 이서는 이 식당이 이렇게 인기 있는 건 순전히 ‘속설’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한 입 더 먹은 이서는 문득 지환과 두 시간 넘게 줄은 선 게 별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 먹고 나서는 뭐 할 거예요?”이서가 물었다. “영화 보러 가자.” 이서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 “우리 같이 영화 본 적은 없지 않아요?” “정확히 말하면,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한 적이 없었지.” 지환은 조용히 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 이서야.” 이서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런 일로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난 늘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 내가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우리 사이는 달라졌을지도 모르잖아.” 지환은 속눈썹을 내리깔며 말했다. 이서는 지환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묘하게 불편해졌다. “다 지나간 일일 뿐이에요. 오늘은 그런 얘기하지 말고... 우리 그냥 제대로... 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