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환의 말투는 냉랭했다.“아직은 시기상조야.”“네? 시기상조라니요?” 앤서니는 초조하게 말했다.“대표님, 설마 그 배후의 조직이 두려우신 겁니까?”SY에게 ‘어둠의 세력’가 있다면, 하지호 배후에는‘늑대’라는 조직이 있다.하지호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가 거느리고 있는‘늑대’에도 불법이나 범법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심지어는 살인범까지도.하지만 앤서니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지환에게 충성을 맹세한 순간부터 이미 자신의 목숨은 내놓은 지 오래되었다. 지환을 위해서러면 전혀 아깝지 않았다.“대표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뿐만 아니라 저희 어둠의 세력 맴버들 모두 목숨을 걸고 싸울 겁니다.”“무의미한 희생은 할 필요 없어.”지환의 말투는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그리고 너희들... 모두 나한테 오면 이서는 누가 지켜?”지환의 물음에 앤서니와 조백은 눈이 마주쳤다.한참이 지나서야 앤서니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대표님, 지금 하지호 씨를 치지 않으실 거라면, 어둠의 세력 조직원의 절반을 대표님이 계신 쪽으로 돌리셔야 합니다. 이번에 하지호 씨한테 당했던 것도...”지환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답했다.“아니야, 이번에는 내가 방심했어.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거야.”“하지만...” 앤서니는 포기하지 않았다.“대표님...”“그만!”지환은 차갑게 그의 말을 끊었다.“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더이상 왈가왈부하지 마. 맞다, 내가 듣기로는 어젯밤 일은 이서를 겨냥한 거라고 들었는데?”지환은 화제를 돌렸다. 즉, 이 일은 이미 확정된 거라 더 이상 되돌릴 가능성은 없다는 얘기다.앤서니는 입이 댓발만큼 튀어나왔다.옆에 있던 조백이 상황을 살피고 얼른 대답했다.“네, 대표님, 조사해 봤는데, 창고에 있는 그 시체는 늑대 조직의 사람이었습니다. 일찍이 하룻밤에 사람 다섯을 죽였다고 해서 살인마라고 불리는 놈이었는데...어젯밤, 산이가 아가씨 있는 곳으로 돌아
방금 앤서니와 조백이 왔을 때, 그녀는 이미 깼다.그래서 그 때 그들이 나눈 얘기를 얼핏 들었다.정확하지는 않지만, 앞뒤 맥락을 연결해 보면 H선생님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 사람들을 모두 그녀에게 동원했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H선생님은 어젯밤에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젯밤 일은 분명히 그녀를 겨냥한 것이었다.이서의 이상을 눈치채지 못한 지환은 그녀가 본인 신분에 관한 얘기를 듣지 못한 게 다행이라며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덩달아 걱정도 함께 내려놓았다.“잘못 들은 거야.”“아니요, 분명히 들었어요.”이서는 고개를 숙였다.“어젯밤, 저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요. 이제야 모든 게 이해되네요. 제가 그렇게 타이밍 맞게 구조된 건... 저를 암암리에 지켜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지환은 마음속에서 소리 없이 탄식했다.가끔은 정말 이서가 좀만 덜 똑똑했으면 했다.“그 사람들... 모두 철수시켜 주세요.”이서는 고개를 들어 지환의 눈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만약 저 때문에 H선생님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저는 평생 자책하며 살 거 같아요.”그 말에, 지환은 하경철이 생각났다.“그렇게 해주세요. 부탁해요.” 이서는 지환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애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지환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지환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며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그는 이서를 속이고 싶지 않았지만, 어둠의 세력을 철수시킬 생각은 없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하지호가 이서를 노리고 있다는 게 확실해졌으니.“절반만이라도... 안 될까요?” 이서는 다시 입을 열었다.“앞으로는 집에 얌전히 있을 게요. 아무데도 가지 않을 거예요. 지진이 났다고 해도 꼼짝 안 할 거라고요. 이씨 저택은 매우 안전해요. 그러니까 굳이 그 많은 사람들을 저한테 보내지 않아도 돼요.”이서의 작은 손은 지환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지환의 마음도 흔들릴 것만 같았다. 그는 몸을 숙여 갑자기 이서에게 다가갔다.깜짝 놀란 이서는 지환의 옷자락을 잡은
배미희는 집에 도착해서야 이서에게 일이 생겼음을 알았다. 바로 병원에 달려가려는 걸 이상언이 겨우 설득해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병원에 가기로 했다.이튿날 아침,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병원으로 출발했다. 배미희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지환이 병상 앞에 서서 이서를 정겹게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하나에게 말했다.“상언이 얘기를 듣길 잘 했네. 두 사람, 간만에 둘만의 시간을 가졌을 거예요. 우리가 어제 왔더라면, 두 사람은 이런 시간을 가지지 못했을 거예요.”하나의 입꼬리도 예쁘게 올라갔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 들어가고 뭐하세요?”마실 거리를 사 들고 온 상언은 노모와 ‘여자친구’가 병실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말했다. 현재 상황으로 봤을 때, 하나는 지금의 이 ‘여자친구’라는 신분이 싫지는 않은 듯했다. 상언의 큰 목소리는 병실에 있던 이서와 지환에게도 들렸다. 문밖에 사람이 있는 걸 눈치챈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곧 다시 시선을 피했다.이서의 볼이 빨갛게 상기되었다.지환도 곧 평상시 모습으로 돌아갔다.“오셨어요, 아주머니.”“그래.” 배미희가 빙그레 웃으며 지환에게 다가가 일부러 물었다.“화해한 거야?”“네? 두 사람, 싸웠어?” 하나는 듣자마자 긴장한 듯 이서에게 물었다.“설마 H선생님이 널 괴롭힌 거야?”이서는 빙그레 웃었다.“아니야.”배미희가 옆에서 장난 섞인 말투로 얘기했다.“농담이야. H선생님이 어떻게 이서를 괴롭히겠어? 이서야, 이제 좀 괜찮니? 어제 밤에 엄마가 널 혼자 집에 두는 게 아니었는데, 다음에는 절대 이런 일 없을 거야.”“엄마요?”하나와 상언은 이구동성으로 물었다.“그래, 아이고, 내가 깜빡했다. 이제부터 이서는 내 딸이야, 상언아, 너 여동생 생겼다.”배미희는 이상언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건 우리 집안 경사야. 그래서 말인데, 조만간 파티를 열어 정식으로 이서를 모든 사람에게 소개할 생각이야!”“엄마, 그렇게까지 안 하셔
방금 팜플렛에서 국제단편소설연구팀이라는 글귀를 보았다.이 팀은 배미희가 얘기한 것처럼 아마추어들의 공모전이 아닌 인터넷소설을 전문으로 하는 국제적인 유명한 단편 소설가들이 결성한 팀이었다.대중의 시선을 단편소설로 돌리기 위한 인문학자들의 노력이라고나 할까?이번에 공모전을 개최하는 것도 물론 하이먼 스웨이의 명성을 이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시덥잖은 그런 공모전은 아니었다.아마도 이서가 부담감을 가질까 봐 일부러 그렇게 얘기한 거라고 상언은 위안 삼았다.“그럼... 저 이번 공모전에 나가 볼까요?”말을 하며, 이서의 눈은 지환을 바라보았다.지환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는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음... 마감일이 다음 달 15일이니 아직 20여 일이나 남았네요. 20여 일이면 충분히 다 쓸 수 있어요.”이서의 눈빛이 반짝이는 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특히 이서와 가장 오래 알고 지낸 하나는, 활력을 다시 찾은 이서를 보고 엄청 뿌듯해했다....하이먼 스웨이의 별장.따가운 햇살이 하이먼 스웨이의 미간을 비추었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이미 컴퓨터 앞에서 무려 하룻밤을 꼬박 앉아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눈앞의 모니터는 이미 꺼진 지 오래되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가은이 한 살 때 가족을 잃어버렸다는 얘기가 맴돌았다.그녀는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컴퓨터 화면 속 자료를 똑똑히 보고 싶어도 손은 천근만근이 되어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그럼 가은이는 내 딸 아닌건가?’‘난 분명히 다섯 살 때 잃어버렸는데, 만약 메일의 내용이 전부 사실이라면, 내 딸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이야?’‘딸’을 찾은 뒤로 하이먼 스웨이는 마치 오랜 가뭄에 단비를 맞은 사람처럼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단비로 알고 있었던 게 태풍이 되어 휘몰아쳤다. 그것도 초특급 울트라 태풍으로...“빵빵!”아래층에서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가은이 외출했다가 돌아온 게 틀림없다.
가은은 서운한 표정으로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엄마, 도대체 왜 그러세요? 깜짝 놀랐잖아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순간 자신이 하이먼 스웨이를 속이고 있던 많은 일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심장이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하이먼 스웨이는 손을 흔들었다.“나... 난 괜찮아. 어젯밤에 밤을 꼴딱 샜더니 정신이 하나도 없네.”그러자 가은은 아무 일 없는 듯 덤덤하게 답했다.“그래요? 그럼 편히 쉬세요. 저는 이만 돌아가 볼게요.”자리를 뜨는 가은의 뒷모습을 보며, 하이먼 스웨이는 마음속에 심어진 의심의 씨앗이 다시 싹트기 시작했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이서가 생각났다. 이서라면, 어젯밤 자신이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렇게 덤덤하게 돌아서지 않았을 것이다. 따뜻한 물을 한 잔 따라주었을 것이고,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 어린 모습으로 물었을 것이다.어젯밤의 이메일은 마치 한 자루의 날카로운 칼처럼 무자비하게 그녀의 마음을 후벼 팠다. 그로 인해 그녀는 이전에 신경쓰지 않았던 사소한 부분까지 유의하게 되었다.예컨대 가은과 함께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가은은 그녀에게 친근하게 다가온 적이 거의 없었다. 돈이 필요하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빼고는.즉 이전에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던 부분들이 조금씩 수면 위로 올라왔다.하이먼 스웨이는 다시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에는 당시 심씨네 하인이 어떻게 가은을 잃어버렸고, 또 어떻게 가짜 가은을 데려왔는지 모든 과정을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작은 부분까지도 디테일하게 적은 걸 보니, 지어낸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그렇다면 가은은 그녀의 진짜 딸이 아니라는 얘기다.‘그럼 내 딸은?’‘내 딸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하이먼 스웨이는 무기력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건 절망이 아니라 희망적 고문이다.같은 시각, 옆방의 가은은 욕실에 들어가 모든 물건들을 전부 땅바닥으로 쓸어버렸다.그녀가 이렇게 화가 난 건 하이먼 스웨이가
“윤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 대단한 거죠.”박예솔이 주먹을 꽉 쥐었다.[윤이서의 배후에 있는 사람을 떼어내기만 한다면, 그 여자 하나쯤 처리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거라고요.] “윤이서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 누군데요?” 긴장한 심가은이 불안하다는 듯 물었다. ‘매번 윤이서를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오는 걸 보면 보통 사람은 아닌 게 분명해.’ ‘설마... 이씨 가문인가?’ ‘하지만 이상언이 사랑하는 사람은 임하나잖아... 임하나는 윤이서의 친구일 뿐이고...’ [그건 알 필요 없어요.] 박예솔이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최근 윤이서가 단편대회에 참가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요. 그런데 그 단편대회의 심사위원이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이시더라고요. 심가은 씨도 알고 있었어요?] 하이먼 스웨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가져본 적 없던 가은이 이런 일을 알 리 없었다. [난 심가은 씨도 그 대회에 참가했으면 좋겠어요.]가은은 이 말을 듣자마자 즉시 거절했다.“싫어요, 나는 글을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나는 사람이에요. 글쓰기는 말할 것도 없고요.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을 거예요.” [걱정할 거 없어요. 심가은 씨가 대회에 참가할 작품은 내가 준비할 테니까요. 심가은 씨가 해야 할 일은 결과를 발표하는 날에 잘 대응해서 내가 고용한 사람들이 회의장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돼요.] “결과를 발표하는 날 윤이서를 죽일 생각인 거예요?” [맞아요.]박예솔은 윤이서의 실력이라면 틀림없이 상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윤이서는 반드시 그 현장에 있을 거야. 그때가 되면 보안이 더 강화되겠지만, 사람이 많이 몰리는 회의장은 별수 없을 거야.’ ‘어차피 지호 오빠의 늑대 조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이니까 윤이서를 죽이는 임무에만 집중을 다 할 거야.’ 심가은은 순간 흥이 났다.“알겠어요, 대회에 참석할게요.” ‘나는 윤이서를 죽일 수만 있다면 뭐든 할 거야.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진 지엽의 방에는 아무런 빛도 없었으나, 책상 위의 컴퓨터 화면만이 그의 눈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화면 속의 사람은 그것으로 하여금 그가 잠들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 돼, 대체 왜 심가은의 자료를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께 드리라는 건데? 물론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는 심가은이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의 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지만, 확실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잖아.][만약 바뀐 아이가 또 바뀌었다면?]컴퓨터 화면 속의 구태우는 술 한 잔을 들고 지엽과 잡담을 하며 그의 흥미를 끌려고 했으나, 지엽은 자신만의 감정에 빠져 혼자 술을 따를 뿐이었다. 흥미를 느끼지 못한 구태우가 아예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저기요, 소씨 가문 도련님, 청승 좀 떨지 마세요. 저를 부른 건 도련님이시잖아요. 잠까지 줄여가면서 도련님이랑 같이 드리려고 그러는데, 혼자서만 술을 드시면 어떡해요.”컵을 내려놓은 지엽이 태우를 한 번 보았다.“난 여기에 다른 친구가 없잖아. 당연히 널 부를 수밖에 없지.”태우가 말했다.“외국에만 친구가 없는 건 아니잖아. 국내에도 없으면서... 말해봐, 윤이서 씨 일은 아직도 진전이 없는 거야?” 태우 역시 이서가 기억을 잃은 일을 알고 있었다. 지엽이 알려줬기 때문이었는데,말하자면 무심코 알게 된 셈이었다. 이전에 이서가 태우에게 조사를 부탁한 일들은 모두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그는 그 일을 포기하려고 할 때, 심씨 가문의 아가씨가 한 살 때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서가 가은의 일을 언급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사실에 깊이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태우는 그 사실을 깊이 파헤친 후에야 하인에 의해 가은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하이먼 스웨이의 자료를 찾아보고서야 하이먼 스웨이가 대여섯 살인 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상하다고 여긴 태우는 지엽에게 모든 사실을 알렸으나,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던 그는 계속 조사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
윤이서는 결혼했다.그러나 결혼 상대는 그녀가 8년 넘게 사랑을 했던 약혼자인 하은철이 아닌 만난 지 5분도 안 된, 기본적인 정보만 대충 아는 남자였다.“후회되시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사무소 대기실에서 남자는 조금 귀찮다는 눈빛으로 윤이서를 흘겨보았다.윤이서는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머릿속은 하은철의 차갑고 매정한 얼굴이 떠올랐다.3일전, 줄곧 윤이서를 피했던 하은철이 직접 그녀를 저녁식사에 초대를 했고, 전화를 받은 그녀는 순간 지난 8년간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정성껏 꾸미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하지만 약속장소에서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은철뿐만이 아니라 그와 손을 깍지를 낀 채 휠체어에 앉아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는 윤수정도 함께 있었다.--그녀의 사촌 여동생!그녀가 아직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고 있을 때, 하은철은 갑자기 폭탄발언을 했다.“네 신장을 수정이에게 주면 너와 결혼할게.”윤이서는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몸이 굳어지며 믿을 수 없단 듯이 하은철을 바라보았다.맞은편 남자의 눈빛은 시종 차갑고 증오로 가득 찼다. 마치 자신을 8년 동안 정성껏 뒷바라지 한 약혼녀가 아닌 아버지를 죽인 원수라도 보는 것 같았다.그녀는 마치 갈 곳을 잃어 절벽에서 추락하는 것 같았다.하은철과 어릴 때 약혼한 사이였고, 16살 되던 해 귀국한 후, 하은철을 걷잡을 수 없이 사랑하게 되었다.이 8년 동안 그를 뒷바라지 하기 위해 그녀는 빨래와 밥하는 것을 배웠고, 또 그에게 걸맞는 아내가 되기 위해 피아노, 그림 등을 배웠으며 심지어 그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오직 그가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와 결혼해주기 꿈꾸며.그러나 현실은 그녀에게 매몰찼다. 하은철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촌 여동생을 사랑하고 있었다.심지어 그의 애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전혀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