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환의 말투는 냉랭했다.“아직은 시기상조야.”“네? 시기상조라니요?” 앤서니는 초조하게 말했다.“대표님, 설마 그 배후의 조직이 두려우신 겁니까?”SY에게 ‘어둠의 세력’가 있다면, 하지호 배후에는‘늑대’라는 조직이 있다.하지호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가 거느리고 있는‘늑대’에도 불법이나 범법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심지어는 살인범까지도.하지만 앤서니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지환에게 충성을 맹세한 순간부터 이미 자신의 목숨은 내놓은 지 오래되었다. 지환을 위해서러면 전혀 아깝지 않았다.“대표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뿐만 아니라 저희 어둠의 세력 맴버들 모두 목숨을 걸고 싸울 겁니다.”“무의미한 희생은 할 필요 없어.”지환의 말투는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그리고 너희들... 모두 나한테 오면 이서는 누가 지켜?”지환의 물음에 앤서니와 조백은 눈이 마주쳤다.한참이 지나서야 앤서니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대표님, 지금 하지호 씨를 치지 않으실 거라면, 어둠의 세력 조직원의 절반을 대표님이 계신 쪽으로 돌리셔야 합니다. 이번에 하지호 씨한테 당했던 것도...”지환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답했다.“아니야, 이번에는 내가 방심했어.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거야.”“하지만...” 앤서니는 포기하지 않았다.“대표님...”“그만!”지환은 차갑게 그의 말을 끊었다.“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더이상 왈가왈부하지 마. 맞다, 내가 듣기로는 어젯밤 일은 이서를 겨냥한 거라고 들었는데?”지환은 화제를 돌렸다. 즉, 이 일은 이미 확정된 거라 더 이상 되돌릴 가능성은 없다는 얘기다.앤서니는 입이 댓발만큼 튀어나왔다.옆에 있던 조백이 상황을 살피고 얼른 대답했다.“네, 대표님, 조사해 봤는데, 창고에 있는 그 시체는 늑대 조직의 사람이었습니다. 일찍이 하룻밤에 사람 다섯을 죽였다고 해서 살인마라고 불리는 놈이었는데...어젯밤, 산이가 아가씨 있는 곳으로 돌아
방금 앤서니와 조백이 왔을 때, 그녀는 이미 깼다.그래서 그 때 그들이 나눈 얘기를 얼핏 들었다.정확하지는 않지만, 앞뒤 맥락을 연결해 보면 H선생님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 사람들을 모두 그녀에게 동원했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H선생님은 어젯밤에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젯밤 일은 분명히 그녀를 겨냥한 것이었다.이서의 이상을 눈치채지 못한 지환은 그녀가 본인 신분에 관한 얘기를 듣지 못한 게 다행이라며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덩달아 걱정도 함께 내려놓았다.“잘못 들은 거야.”“아니요, 분명히 들었어요.”이서는 고개를 숙였다.“어젯밤, 저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요. 이제야 모든 게 이해되네요. 제가 그렇게 타이밍 맞게 구조된 건... 저를 암암리에 지켜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지환은 마음속에서 소리 없이 탄식했다.가끔은 정말 이서가 좀만 덜 똑똑했으면 했다.“그 사람들... 모두 철수시켜 주세요.”이서는 고개를 들어 지환의 눈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만약 저 때문에 H선생님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저는 평생 자책하며 살 거 같아요.”그 말에, 지환은 하경철이 생각났다.“그렇게 해주세요. 부탁해요.” 이서는 지환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애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지환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지환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며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그는 이서를 속이고 싶지 않았지만, 어둠의 세력을 철수시킬 생각은 없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하지호가 이서를 노리고 있다는 게 확실해졌으니.“절반만이라도... 안 될까요?” 이서는 다시 입을 열었다.“앞으로는 집에 얌전히 있을 게요. 아무데도 가지 않을 거예요. 지진이 났다고 해도 꼼짝 안 할 거라고요. 이씨 저택은 매우 안전해요. 그러니까 굳이 그 많은 사람들을 저한테 보내지 않아도 돼요.”이서의 작은 손은 지환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지환의 마음도 흔들릴 것만 같았다. 그는 몸을 숙여 갑자기 이서에게 다가갔다.깜짝 놀란 이서는 지환의 옷자락을 잡은
배미희는 집에 도착해서야 이서에게 일이 생겼음을 알았다. 바로 병원에 달려가려는 걸 이상언이 겨우 설득해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병원에 가기로 했다.이튿날 아침,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병원으로 출발했다. 배미희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지환이 병상 앞에 서서 이서를 정겹게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하나에게 말했다.“상언이 얘기를 듣길 잘 했네. 두 사람, 간만에 둘만의 시간을 가졌을 거예요. 우리가 어제 왔더라면, 두 사람은 이런 시간을 가지지 못했을 거예요.”하나의 입꼬리도 예쁘게 올라갔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 들어가고 뭐하세요?”마실 거리를 사 들고 온 상언은 노모와 ‘여자친구’가 병실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말했다. 현재 상황으로 봤을 때, 하나는 지금의 이 ‘여자친구’라는 신분이 싫지는 않은 듯했다. 상언의 큰 목소리는 병실에 있던 이서와 지환에게도 들렸다. 문밖에 사람이 있는 걸 눈치챈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곧 다시 시선을 피했다.이서의 볼이 빨갛게 상기되었다.지환도 곧 평상시 모습으로 돌아갔다.“오셨어요, 아주머니.”“그래.” 배미희가 빙그레 웃으며 지환에게 다가가 일부러 물었다.“화해한 거야?”“네? 두 사람, 싸웠어?” 하나는 듣자마자 긴장한 듯 이서에게 물었다.“설마 H선생님이 널 괴롭힌 거야?”이서는 빙그레 웃었다.“아니야.”배미희가 옆에서 장난 섞인 말투로 얘기했다.“농담이야. H선생님이 어떻게 이서를 괴롭히겠어? 이서야, 이제 좀 괜찮니? 어제 밤에 엄마가 널 혼자 집에 두는 게 아니었는데, 다음에는 절대 이런 일 없을 거야.”“엄마요?”하나와 상언은 이구동성으로 물었다.“그래, 아이고, 내가 깜빡했다. 이제부터 이서는 내 딸이야, 상언아, 너 여동생 생겼다.”배미희는 이상언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건 우리 집안 경사야. 그래서 말인데, 조만간 파티를 열어 정식으로 이서를 모든 사람에게 소개할 생각이야!”“엄마, 그렇게까지 안 하셔
방금 팜플렛에서 국제단편소설연구팀이라는 글귀를 보았다.이 팀은 배미희가 얘기한 것처럼 아마추어들의 공모전이 아닌 인터넷소설을 전문으로 하는 국제적인 유명한 단편 소설가들이 결성한 팀이었다.대중의 시선을 단편소설로 돌리기 위한 인문학자들의 노력이라고나 할까?이번에 공모전을 개최하는 것도 물론 하이먼 스웨이의 명성을 이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시덥잖은 그런 공모전은 아니었다.아마도 이서가 부담감을 가질까 봐 일부러 그렇게 얘기한 거라고 상언은 위안 삼았다.“그럼... 저 이번 공모전에 나가 볼까요?”말을 하며, 이서의 눈은 지환을 바라보았다.지환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는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음... 마감일이 다음 달 15일이니 아직 20여 일이나 남았네요. 20여 일이면 충분히 다 쓸 수 있어요.”이서의 눈빛이 반짝이는 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특히 이서와 가장 오래 알고 지낸 하나는, 활력을 다시 찾은 이서를 보고 엄청 뿌듯해했다....하이먼 스웨이의 별장.따가운 햇살이 하이먼 스웨이의 미간을 비추었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이미 컴퓨터 앞에서 무려 하룻밤을 꼬박 앉아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눈앞의 모니터는 이미 꺼진 지 오래되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가은이 한 살 때 가족을 잃어버렸다는 얘기가 맴돌았다.그녀는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컴퓨터 화면 속 자료를 똑똑히 보고 싶어도 손은 천근만근이 되어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그럼 가은이는 내 딸 아닌건가?’‘난 분명히 다섯 살 때 잃어버렸는데, 만약 메일의 내용이 전부 사실이라면, 내 딸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이야?’‘딸’을 찾은 뒤로 하이먼 스웨이는 마치 오랜 가뭄에 단비를 맞은 사람처럼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단비로 알고 있었던 게 태풍이 되어 휘몰아쳤다. 그것도 초특급 울트라 태풍으로...“빵빵!”아래층에서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가은이 외출했다가 돌아온 게 틀림없다.
가은은 서운한 표정으로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엄마, 도대체 왜 그러세요? 깜짝 놀랐잖아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순간 자신이 하이먼 스웨이를 속이고 있던 많은 일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심장이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하이먼 스웨이는 손을 흔들었다.“나... 난 괜찮아. 어젯밤에 밤을 꼴딱 샜더니 정신이 하나도 없네.”그러자 가은은 아무 일 없는 듯 덤덤하게 답했다.“그래요? 그럼 편히 쉬세요. 저는 이만 돌아가 볼게요.”자리를 뜨는 가은의 뒷모습을 보며, 하이먼 스웨이는 마음속에 심어진 의심의 씨앗이 다시 싹트기 시작했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이서가 생각났다. 이서라면, 어젯밤 자신이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렇게 덤덤하게 돌아서지 않았을 것이다. 따뜻한 물을 한 잔 따라주었을 것이고,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 어린 모습으로 물었을 것이다.어젯밤의 이메일은 마치 한 자루의 날카로운 칼처럼 무자비하게 그녀의 마음을 후벼 팠다. 그로 인해 그녀는 이전에 신경쓰지 않았던 사소한 부분까지 유의하게 되었다.예컨대 가은과 함께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가은은 그녀에게 친근하게 다가온 적이 거의 없었다. 돈이 필요하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빼고는.즉 이전에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던 부분들이 조금씩 수면 위로 올라왔다.하이먼 스웨이는 다시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에는 당시 심씨네 하인이 어떻게 가은을 잃어버렸고, 또 어떻게 가짜 가은을 데려왔는지 모든 과정을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작은 부분까지도 디테일하게 적은 걸 보니, 지어낸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그렇다면 가은은 그녀의 진짜 딸이 아니라는 얘기다.‘그럼 내 딸은?’‘내 딸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하이먼 스웨이는 무기력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건 절망이 아니라 희망적 고문이다.같은 시각, 옆방의 가은은 욕실에 들어가 모든 물건들을 전부 땅바닥으로 쓸어버렸다.그녀가 이렇게 화가 난 건 하이먼 스웨이가
“윤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 대단한 거죠.”박예솔이 주먹을 꽉 쥐었다.[윤이서의 배후에 있는 사람을 떼어내기만 한다면, 그 여자 하나쯤 처리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거라고요.] “윤이서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 누군데요?” 긴장한 심가은이 불안하다는 듯 물었다. ‘매번 윤이서를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오는 걸 보면 보통 사람은 아닌 게 분명해.’ ‘설마... 이씨 가문인가?’ ‘하지만 이상언이 사랑하는 사람은 임하나잖아... 임하나는 윤이서의 친구일 뿐이고...’ [그건 알 필요 없어요.] 박예솔이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최근 윤이서가 단편대회에 참가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요. 그런데 그 단편대회의 심사위원이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이시더라고요. 심가은 씨도 알고 있었어요?] 하이먼 스웨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가져본 적 없던 가은이 이런 일을 알 리 없었다. [난 심가은 씨도 그 대회에 참가했으면 좋겠어요.]가은은 이 말을 듣자마자 즉시 거절했다.“싫어요, 나는 글을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나는 사람이에요. 글쓰기는 말할 것도 없고요.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을 거예요.” [걱정할 거 없어요. 심가은 씨가 대회에 참가할 작품은 내가 준비할 테니까요. 심가은 씨가 해야 할 일은 결과를 발표하는 날에 잘 대응해서 내가 고용한 사람들이 회의장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돼요.] “결과를 발표하는 날 윤이서를 죽일 생각인 거예요?” [맞아요.]박예솔은 윤이서의 실력이라면 틀림없이 상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윤이서는 반드시 그 현장에 있을 거야. 그때가 되면 보안이 더 강화되겠지만, 사람이 많이 몰리는 회의장은 별수 없을 거야.’ ‘어차피 지호 오빠의 늑대 조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이니까 윤이서를 죽이는 임무에만 집중을 다 할 거야.’ 심가은은 순간 흥이 났다.“알겠어요, 대회에 참석할게요.” ‘나는 윤이서를 죽일 수만 있다면 뭐든 할 거야.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진 지엽의 방에는 아무런 빛도 없었으나, 책상 위의 컴퓨터 화면만이 그의 눈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화면 속의 사람은 그것으로 하여금 그가 잠들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 돼, 대체 왜 심가은의 자료를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께 드리라는 건데? 물론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는 심가은이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의 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지만, 확실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잖아.][만약 바뀐 아이가 또 바뀌었다면?]컴퓨터 화면 속의 구태우는 술 한 잔을 들고 지엽과 잡담을 하며 그의 흥미를 끌려고 했으나, 지엽은 자신만의 감정에 빠져 혼자 술을 따를 뿐이었다. 흥미를 느끼지 못한 구태우가 아예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저기요, 소씨 가문 도련님, 청승 좀 떨지 마세요. 저를 부른 건 도련님이시잖아요. 잠까지 줄여가면서 도련님이랑 같이 드리려고 그러는데, 혼자서만 술을 드시면 어떡해요.”컵을 내려놓은 지엽이 태우를 한 번 보았다.“난 여기에 다른 친구가 없잖아. 당연히 널 부를 수밖에 없지.”태우가 말했다.“외국에만 친구가 없는 건 아니잖아. 국내에도 없으면서... 말해봐, 윤이서 씨 일은 아직도 진전이 없는 거야?” 태우 역시 이서가 기억을 잃은 일을 알고 있었다. 지엽이 알려줬기 때문이었는데,말하자면 무심코 알게 된 셈이었다. 이전에 이서가 태우에게 조사를 부탁한 일들은 모두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그는 그 일을 포기하려고 할 때, 심씨 가문의 아가씨가 한 살 때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서가 가은의 일을 언급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사실에 깊이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태우는 그 사실을 깊이 파헤친 후에야 하인에 의해 가은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하이먼 스웨이의 자료를 찾아보고서야 하이먼 스웨이가 대여섯 살인 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상하다고 여긴 태우는 지엽에게 모든 사실을 알렸으나,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던 그는 계속 조사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
지엽은 충격을 받은 태우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 술을 따랐다. ...이서는 전심전력으로 원고를 써야 했기에, 연회를 개최하는 일은 모두 하나와 상언에게 맡겼다. “이 선생님은 연회를 언제 개최하는 게 좋을 것 같으세요?”달력을 손에 든 하나는 가장 적합한 날을 고르고 있었다. 하지만 상언은 하나의 분홍색 뺨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설렘을 느낀 상언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입 맞추고 싶다.’“이 선생님, 제 말 듣고 계세요?”상언이 대답을 하지 않자, 하나가 불만스럽게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정신을 차린 상언이 미소를 지으며 하나의 허리를 껴안았다.“하나 씨는 언제가 좋을 것 같아요?” “왜 이렇게 얼버무리는 거예요?” 하나가 불만스러워하며 말했다.“앞으로는 이서를 여동생처럼 여겨줬으면 좋겠어요.”상언이 하나의 귓가에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만약 우리의 결혼 날짜를 정하는 거였다면,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봤을 거예요.”그는 또 한 번 설렘을 느꼈다. 하지만 하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그의 옆을 지나갈 뿐이었다. “이서가 연회에 몇 명이나 초대할 생각이라고 했었죠?”옅은 미소를 지은 상언이 대답하려던 찰나 휴대전화가 울렸는데, 그것은 실험실에서 온 전화였다. 전화를 받고 안색이 변한 상언은 몸을 일으켜 베란다로 향했는데,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이미 말을 마치고 상언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았어요, 금방 갈게요.”상언은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지금 가봐야 하는 거예요?”하나는 여전히 달력을 보면서 상언의 표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상언이 아주 부자연스럽게 대답했다.“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그래요, 그럼 저는 다른 거 먼저 보고 있을게요. 날짜는 이 선생님 오시면 다시 이야기해요.”“날짜도 하나 씨가 정해도 돼요.” 상언은 뒤에 덧붙이려던 말을 꾹 삼켰다.‘하나 씨가 안주인인 것처럼요.’호텔을 나온 상언은 곧장 실험실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
모두 반대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이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불만 있으면 사직서 쓰세요.” 이 한마디에, 회사 고위층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고 팀장님이 아닌 고 대표님이 된 거예요.”‘고 대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고이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새어 나오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기쁨에,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니 말이다.“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서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고, 고이서는 문이 닫힌 후에도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5분이 지나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의 책상으로 다가가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이 모든 건 다 내 거야...!’ 고이서는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대형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는 순간, 마치 가죽 의자가 아니라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만 차지하면... 다시 예전처럼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대로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반짝이는 보석도 망설임 없이 살 수 있고...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겠지! 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도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이서의 마음이 격렬히 요동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이서는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고,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김하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팀장님, 회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고 팀장’이라는 호칭에 고이서는 속으로 불쾌감을 느꼈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김하늘’이라는 이름을 새겨 두었다.‘며칠만 지나면 내가 정식으로 대표가 될 텐데, 그때 가장 먼저 잘라버릴 사람은 바로 네가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김하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
하지만 한 회사의 대표는 곧 하늘과도 같았다. “아직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서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한 김하늘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 사무실에도 CCTV가 있을 거 아니에요. 당장 영상 자료를 가져와 보라고요!” 김하늘은 당황하며 말했다. “대표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굳이 대표님께서 무안해지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아.’ 이 정도의 생각은 김하늘도 하고 있었으나, 이서는 아주 단호했다.“됐고, 당장 가져오세요.” 김하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고이서는 의아해졌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비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그럼 설마...’ ‘그 꽃차가 효과를 나타낸 건가?’이 가능성이 떠오르자 고이서는 속으로 흥분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대표님께서 CCTV를 보자고 하신다면 봐야죠. 만약 저희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대표님께서도 정확하게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렇죠, 대표님?”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니까요.” “만약 김 비서가 잘못 전한 거라면 엄하게 처벌하고, 정말 내가 말해놓고 잊어버린 게 맞다면, 그땐 분명히 사과할게요.” 이쯤 되니 김하늘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김하늘은 결국 CCTV 영상을 가져왔고, 영상 속에는 이서가 몇 번이나 김하늘에게 지시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고 팀장님을 불러주세요.”심지어 몇 분 간격으로 반복해서 지시하는 모습도 있었다. 이서는 그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내가 한 말이 맞다고...? 그런데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지?”“김 비서, 미안해요.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랬어요.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너무 미안해서 가방을 하나 선물로 주고 싶은데, 오늘 퇴근하기 전에 나한테 와서 받아 가요, 알겠죠?”김하늘은 이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애매하고 거절하기도
“진짜예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이서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지환은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이서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을 단순히 의례적인 질문으로 하지 않고, 정말 진심을 담아 묻곤 했다. 지환은 한동안 말없이 이서를 바라보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짜야. 생각해 봐. 네가 너희 가족 이야기를 고이서와 나눈 거잖아. 고이서 입장에선 너와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을 거야.” 이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그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병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고마워요.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어요.” 이서는 진심으로 말했고, 지환은 잠시 이서를 응시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응.”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요.” 이서는 문을 열고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서 내렸다. ...이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꽃차를 들고 의사를 찾아갔고, 의사는 꽃차를 검사한 뒤 말했다. “지난번과 성분이 똑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양이 더 많네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겠어요.” 의사는 몇 번 더 종이에 뭔가를 적더니 고개를 들었다.“3일이에요. 이 차를 마시면 3일 후에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서, 생각보다 더 조급했구나?’ 이서는 병실로 돌아가 꽃차를 우린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 덕분에 불면증이 해결됐어요. 요즘 정말 잘 자고 있답니다.]문구와 함께 사진을 올리자, 고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모든 걱정을 덜어냈다. 이제 남은 건 이서가 언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느냐였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고이서는 간절하게 속으로 외쳤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윤씨 그룹의 CEO 자리에 앉고 싶다고.’특히 이서가 회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주목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이서의 질투심이 극에 달했다.
고이서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참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듣고 있었어요. 대표님의 부모님께서 그렇게 하신 건, 뭔가 사정이 있으셨던 거 아닐까요?” 이서는 즉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짓을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어떤 부모가 자기 딸의 신장을 빼앗으려는 남자에게 딸을 내줄 수 있다는 거죠?” 고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서는 혼자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제가 두 사람의 친딸이 아니라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한 걸지도 모르죠.” 고이서는 숨이 잠시 멎는 듯했고, 이마에서 흐르던 땀은 이미 목덜미까지 흘러내려 고이서의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 세상에 다양한 부모가 있듯이, 부모의 형태도 여러 가지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서는 이미 땀에 젖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고이서를 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지운 뒤, 사과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미안해요. 이렇게 더운 날씨에 괜히 말을 길게 했나 봐요. 이만 돌아가 보세요. 더 있다가 더위 먹으면 안 되잖아요?” 고이서는 마치 구원을 받은 듯 서둘러 고개를 숙인 후 떠났고, 이서는 그녀의 젖은 등 뒤를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지환은 이서의 눈가에 깃든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웃고 싶으면 그냥 웃어.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그제야 이서는 참지 않고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이서가 지환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진심 어린 웃음을 짓는 순간이었다. 지환은 이서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이서는 그제야 눈치를 채고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오랜만에 네가 그렇게 웃는 걸 보니까 기록해 두고 싶어서. 혹시라도 불편하면 바로 지울게.” 이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황급히 말했다. “잠시만요!” 사진 속 이서의 얼굴은 오랜만에 활짝 핀 미소로 가득했다. ‘그러게, 이렇게 웃
“그럼요, 지금 바로 갈게요.” 이서는 전화를 끊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바쁘면 나 혼자 택시 타고 가도 돼요.” 하지만 지환은 이미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난 괜찮아.” 이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십여 분쯤 지나, 두 사람은 고이서를 마주했다.이서에게 꽃차를 건네주던 고이서는 지환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물론 지환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마주한 지환은 자료 속의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왠지 모르게 지환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품격이 있었다. 그 품격은 마치 높은 자리에 있는 왕처럼 다가왔고, 고이서는 알 수 없는 질투심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성지영과 윤재하는 분명 여러 번 말했었다. “윤이서 남편은 돈도 없는 놈이야.” 그런데도 고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야. 하은철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안녕하세요.” 고이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지환에게 인사를 건넸고, 이서의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윤 대표님, 꽃차가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고이서는 이곳에 더 머물렀다가 의심을 살까 싶어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럼, 별일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고이서가 돌아서려는 순간, 이서가 그녀를 불렀다. “고 팀장님.” 고이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물었다. “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고 팀장님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고이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묘한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아마 자신이 꺼림칙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었다. 이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고 팀장님이 준
하지만 그 누구도 사다리를 건네주지 않아서, 이서는 계속 지붕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아슬아슬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며 떨고 있을 뿐이었다.이 순간 누군가 사다리를 건네준다면, 이서는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서는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30분이나 지났네.’ 이서가 발을 닦고 나서 계단으로 나가 아래층을 내려다보니, 지환은 거실에서 서류를 펼쳐놓고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하지환 씨가 사다리를 건네준다면... 나는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하지환 씨를 용서하게 될까?’ 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이서는 마음이 복잡해져서 서둘러 시선을 돌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일하는 중이에요?” 이서가 묻자 지환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응.” 이서는 지환과 한 발짝 떨어진 소파에 앉았고, 두 사람은 말없이 함께 앉아 있었다. 어색함도 없었고, 굳이 대화를 만들어낼 필요도 없었다. 이런 평온한 순간은 회사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것이었다. 이서는 문득 표정을 풀고,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이서는 성지영의 딸이야. 이번에 돌아온 것도 분명 윤씨 그룹을 노리고 돌아온 거겠지.” 지환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죠.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윤씨 그룹에 입사해서 나한테 약을 먹일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요. 고작 그런 방식으로 날 바보로 만들려고 하다니, 어이가 없어요.” 고이서 했던 짓을 떠올리자 이서는 코웃음을 쳤다. 이서의 예상이 맞다면, 고이서가 처음부터 자신이 윤재하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것은, 그것만으로는 효과가 없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윤씨 그룹은 과거의 윤씨 그룹이 아니었다. 윤씨 그룹이 MH 그룹과 통합한 후, 이서는 쓸모없는 윤씨 일가들을 모두 몰아내고 필요한 사람들만 남겼다. 설령 윤재하가 자신이 윤씨 가문의 친딸이 아니라며 이서의 자격을 문제
지환은 몸을 숙여 이서 뒤에 있던 이불을 집어 들고 이서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서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상황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방금 하지환 씨는 나한테 뭘 하려던 게 아니라, 그냥 이불을 덮어주려던 거였어?’ 이서는 닫힌 방문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고, 생각은 어느새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환 씨가... 나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일까?’ 이서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마음속에서는 아무런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지환은 이미 아래층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서는 지환이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예전에도 지환은 자주 이렇게 아침을 준비하곤 했다. 물론 처음에는 요리 실력이 썩 좋지 않았고, 아주 서툴렀다. 하지만 그때의 이서는 눈치가 없어서 지환이 원래 요리와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지환이 이서를 위해 요리를 배우고 준비했다는 사실은 참 감동적인 것이었다.지환은 두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밥 짓고, 반찬을 만들고, 살림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하지환 씨가... 나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일까?’ 밤새 이서의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이 또다시 떠올랐지만, 이번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바로 그때, 부엌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밥이 다 됐어.” 이서는 자연스럽게 지환의 옆으로 다가가 아침 식사를 식탁으로 옮겼고, 자리에 앉고서야 문득 깨달았다. ‘꼭 오래된 부부 같은 모습이네.’ “왜 그래?” 이서의 시선을 느낀 지환이 고개를 들어 미소 지었고, 이서는 하트 모양으로 구운 계란을 한 입 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찾지 못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