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먼 스웨이는 친구들끼리 얼굴 보는 것보다, 자기 딸을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그녀의 친구들은 모두 재벌가 아니면 권세가들이었다. 이 사람들 앞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건 심가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일인 셈이니.어휴,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예전 같으면 이런 목적성을 띤 모임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바로 하이먼 스웨이였다.지금은 자신의 딸을 위해 그동안 쌓아온 인맥을, 연줄을 총동원하고 있다.이렇게 생각하니, 배미희는 이서가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뒷배 믿고 교만한 심가은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서는 너무 겸손하다. 지난번에 그녀가 친구를 손님으로 초대하지 않았으면 아마 다들 이서라는 인물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이씨 집안 손님이라는 권세를 믿고 나대거나 사람을 무시한 적도 없다.지환이 이서를 그렇게 좋아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제가 쓴 글을 작가님께 보여드리고 싶어요.”지난번 하이먼 스웨이의 강연을 듣고, 이서는 재미 삼아 써보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문사가 샘솟듯 솟아 사흘도 안 되어 만여 자를 써냈다.이상하게도 마치 이전에 썼던 것처럼 술술 써졌다.그런데 이서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글 쓰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았다.“썼어, 이렇게 빨리?” 배미희는 계속 말을 이었다.“마침 잘됐네, 내가 갖고 가서 보여 줄까?”“좋아요.” 이서는 컴퓨터에 있는 파일을 복사해서 배미희에게 건넸다.배미희의 말에 따르면 이서는 이전에 스웨이 작가와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서의 기억 속에서 하이먼 스웨이를 처음 만난 건 지난번 이씨 가문의 바비큐 파티에서였다.그래서 줄곧 경솔하게 자신의 작품을 들고 가르침을 청하지 못했다.지금 배미희가 다리를 놔주니,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감사합니다, 엄마.”“아이고...”엄마라는 소리에 배미희는 심신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곧 토요일이 다가왔다. 임하나는 아침 일찍부터 침대에 앉아 캐리어 안의 옷을
아주 예쁜 롱 드레스였다.하나는 드레스를 꺼내 보았다. 빨간색의 롱 드레스는 우아하고 세련된 느낌을 자아냈다. 특히 촤르르 떨어지는 질감은 딱 봐도 일반 소재는 아닌 듯했다. 게다가 모든 디테일 하나하나까지도 모두 정성껏 디자인한 것이 보였다.단아하면서도 심플한 느낌이지만 곳곳에 숨은 디테일 때문에 클래식하면서도 모던한 느낌을 연출했다.바로 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상언에게서 걸려 온 것이었다.하나는 얼른 받았다.[드레스는 받았어요?]“이 선생님이 보냈어요?” 하나는 무척 마음에 들어 손에서 놓지도 않았다.“네, 받았어요.”[마음에 들어요?]그녀는 눈물을 글썽이었다.“마음에 들어요.”가벼운 한마디에 상언의 마음은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았다.[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에요.]잠시 멈췄다가 이상언은 다시 말을 이었다.[준비해요. 호텔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이 순간 하나는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뱉었다.“벌써 도착했어요? 그럼 그냥 올라와서 기다릴래요? 저... 준비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아서요...”이상언은 크게 기뻐하며 답했다.[네, 지금 올라갈게요.]전화를 끊었지만, 하나의 볼은 여전히 뜨거웠다.두 사람은 단순한 친구 사이가 아니었으나 해야 할 건 이미 다 한 사이이다. 하지만, 이번에 M국에서는, 이국 타향이어서인지, 낯선 땅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상언에 대한 느낌이 크게 바뀌었다.왠지... 이전보다 조금 더 의존적으로 변한 듯했다.하나가 옷을 갈아입자마자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아마도 상언이 도착했을 것이다.긴장한 마음으로 문 입구까지 걸어가서야 하나는 거울도 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문밖에서 계속 들리는 노크 소리에 당황한 나머지 바로 문을 열었다.문밖에 덩그러니 서 있는 사람은 역시나 상언이었다. 하나는 무의식중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긴장한 손은 치맛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이상언이 아무 말없이 멍하니 서 있자, 임하나는 더욱 긴장했다. 그녀는 고개를
솔직히 말하자면, 케이티도 예쁜 여자 축에 속했다. 수많은 의학계 거물들과 한자리에 있음에도 전혀 기죽지 않는 당당한 존재였다.어린 나이임에도 이런 세미나에 참가하고, 게다가 무대 위에 앉아 있다는 건 학술과 능력 면에서도 인정받고 있다는 걸 설명한다.그녀가 지나치게 증오의 눈빛을 발산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는 그녀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다녀올게요.” 이상언은 외투를 벗어 하나의 몸에 걸쳤다. 늑대들의 호시탐탐 시선도 막을 겸.“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요.”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상언은 갑자기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에 뽀뽀했다.하나는 멍해졌다.그녀는 결코 보수적인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왜 상언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에게 키스하는지는... 의도가 다분한 행동이었다.상언은 하나에게 키스한 후 황급히 자리를 비웠다.솔직히 하나가 화낼까 봐 좀 걱정이 됐다.어쨌든 그녀는 줄곧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무대 위의 케이티는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상언이 H국에서 여자 친구를 사귀었다고 했을 때도 그녀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상언이 잠시 외롭고 심심해서 만나는 여자라고 생각했으니까.하나의 개인 자료를 확인했을 때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한 마디로 배경도, 돈도 별로 없는 그런 집안의 자제였으니.그래서 상언이 곧 하나를 질려할 것으로 생각했다. M국으로 돌아오면 틀림없이 자신과의 결혼에 착수할 것이라는 강한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 여자가 M국까지 따라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게다가 상언의 태도를 보니 전혀 심심풀이 땅콩으로 만나는 사이는 아닌 듯했다.그녀가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상언이 무대에 올라왔다.케이티는 곧 표독스러운 눈빛을 숨기고, 일부러 상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녀가 다가가기도 전에 상언은 마치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아는 것처럼 슬그머니 피했다. 갑자기 그는 그녀의 경쟁상대에게 악수를 청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상대방도
세미나는 거의 세 시간가량 지속되었다.회의가 끝나는 즉시 이상언은 하나에게로 갔다. 다가오는 케이티를 뒤로 한 채.“리셉션까지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나가서 산책이나 할까?”상언이 하나에게 말했다.“네, 좋아요.”두 사람은 입구로 걸어갔다.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본 케이티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이때 세마나의 또 다른 발표자 앤드류가 다가왔다. 앤드류는 심혈관 질환 방면의 전문가이다. 비록 이상언과 견줄 수 있는 그런 천재형 인물은 아니지만 젊은 나이에 심혈관 분야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는 건, 그도 충분히 뛰어난 사람인 셈이다.케이티의 눈빛이 상언을 쫓아가는 것을 본 앤드류는 얼굴에 음흉하고 악랄한 기운이 퍼졌다.“케이티.” 앤드류가 신사적으로 케이티에게 인사를 건넸다.애석하게도 케이티의 눈에는 다른 사람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순간 앤드류의 눈빛이 표독스러워졌다. 하지만 얼굴에는 더욱 진한 웃음을 지었다.“케이티는 저 여자를 질투하나 봐요?”앤드류에게 단번에 정곡을 찔린 케이티는 돌연 안색을 바꾸며 변명을 늘어놨다.“무슨 말씀이에요? 내가 뭐 하러 저런 여자를 질투해요? 난 외교관의 딸인 데다가, 최고의 의대를 졸업한 수재라고요. 그런 내가 왜 저 별볼일 없는 여자를 질투하겠어요?!”앤드류는 빙그레 웃었다.“네, 그렇죠? 저 별볼일 없는 여자를 질투할 리 없겠지만, 저 여자가 사라지면 당신 마음도 후련해지겠죠? 게다가 당신한테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일 테니..., 아닌가요?”케이티는 귀신이 홀린 듯 앤드류의 말에 반사적으로 반응했다.“어떻게요?”앤드류의 입가에 웃음기가 더 깊어졌다.“케이티, 그러면...”그는 케이티의 귀에 대고 낮게 말했다.앤드류의 얘기에 케이티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정말 이래도 되는 거예요?'‘괜히 이 선생님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득보다 실이 더 크면 어떡하지?’“그냥 겁만 주는 건데요 뭐, 혹시라도 정말 이 수법이 먹히면, 케이티는 손쉽게 이 선생을 손에 넣는 거구요..
이서는 몸을 돌려 2층으로 올라 갔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서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여러 번 고개를 돌려 재차 확인하고 나서야 방으로 돌아갔다.컴퓨터 앞에 앉아서도 계속 창가 쪽을 바라보았다.그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그녀는 초조한 듯 노트북을 덮었다.그러고는 일어나서 베란다 쪽으로 걸어갔다.오고 가는 차량은 많지만, 그녀의 눈길이 닿는 곳에 그가 찾는 그 차량은 보이지 않았다.한참을 멍하니 있는데 갑자기 방안에서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확인해 보니 또 낯선 번호였다. 그녀는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끊었다.끊자마자, 같은 번호로 문자 한 통이 왔다.[H선생님의 목숨이 위급합니다.]이서는 순간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난번에도 하나가 다쳤다는 수법으로 그녀를 유인해 내려 했으니 경계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그 범인은 이미 붙잡혔다고 할지라도.동일 수법을 이용한 함정은 아닌 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밑도 끝도 없는 문자를 무시하고 넘기려는 순간, 두 번째 문자가 또 들어왔다.한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진이었다.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도무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이서는 그 사람의 빨간 눈동자를 보았다.‘H선생님이다!’사진 속 시간으로 봐서는 약 한 시간 전쯤 일어난 것으로 보였다.이서는 당황했다.그녀는 황급히 상언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전화 통화가 되지 않았다.그녀는 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 역시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이서는 또 배미희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역시 전화를 받지 않았다.한창 넋이 나가 어쩔 바를 모르고 있는데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이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당신 누구예요? 지금 H선생님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남편인 지환은 까마득하게 잊고, 말끝마다 H선생만 찾는 이서를 보니, 조금 짠하기도 하고, 박예솔은 만감이 교차했다.[내가 누구인지는 중
하지호는 박예솔의 머리카락을 내려놓고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저 녀석 때문에... 정말 내 여자 되겠다는 거야?”“지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그녀의 확고한 눈빛을 본 하지호는 실눈을 떴다.“이렇게까지 하려는 이유가 뭐야? 쟤, 네 마음 몰라. 설령 알아도 널 거들떠보지도 않을 테고. 쟤 마음속에는 온통 윤이서뿐이거든.”박예솔은 몸을 휘청거렸다.하지만 곧 진정을 찾은 뒤 침착하게 말했다.“상관없어. 난 지환이 마음 같은 거 욕심내지 않아.”하지호는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탄복했다.박예솔은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다. 본인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있다. ‘마음은 딴 데 가 있어도, 사람만 가지면 된다...’책상 옆으로 간 그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는 박예솔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방금 그 대화 내용을 녹취해 두지 못한 게 아쉽네. 하지만 걱정 마. 난 너랑 달라. 마음 없는 빈 껍데기는 사양이거든. 난 네가 날 진심으로 사랑하게 만들 거야!”말하면서 그는 노트북 화면을 켰다.“이리 와 봐, 이번 계획의 타겟은 윤이서야.”박예솔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지호의 곁으로 다가갔다. 컴퓨터 화면 속에 지환이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피투성이가 되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모습으로.박예솔은 순간 얼음장이 되었다.“오빠 설마...”“아니야, 그냥 기절했을 뿐이야. 그렇게 쉽게 죽을 놈도 아니고...”하지호는 몸을 돌려 박예솔을 보았다.“하지만 난 인내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야. 윤이서가 지환이를 찾으러 먼저 올까, 아니면 지환의 부하들이 그가 실종된 걸 먼저 눈치챌까?”“지금 지환을 미끼로 윤이서를 유인하려는 거야?”하지호는 큰 소리로 호탕하게 웃었다.“하하하, 어때? 널 진심으로 생각하는 건 나뿐이지?”“윤이서가 올 거라고 생각해?”“기억을 잃은 데다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굳이 위험을 무릅쓸까? 그리고 잊지 마, 여기는 윤이서에게 낯선 곳이야. 이방인이라고.”말하면서 하지호는 키보드를 눌렀
의학 세미나 리셉션 현장.하나는 학술적 분위가 이렇게 다분한 장소는 정말 익숙지 않았다. 그녀는 상언이 화장실에 간 틈을 타 얼른 물을 한 모금 마셨다.물을 넘기기도 전에 옆에 누군가가 나타났다.그 자리는 원래 이상언이 있던 자리였다.하나는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그녀 앞에 자리 잡은 케이티를 바라보았다.케이티는 친절하게 손을 내밀며 인사를 청했다.“안녕하세요. 아직 자기소개를 못 했네요. 케이티라고 합니다. 외교관 셔면이 제 아버지세요.”임하나는 마음속 요동치는 강한 거부반응을 애써 숨기고자 했다.“네, 임하나입니다.”“알고 있어요.”케이티는 하나가 대화를 이어가 주기를 기다렸지만, 한참을 지나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혼자서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임하나 씨!”케이티는 범인을 취조하듯 딱딱한 말투로 불렀다.하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네, 케이티 씨, 무슨 일이세요?”케이티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노발대발했다.“정말 예의가 없군요. 이 선생님이 어떻게 당신같은 여자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는데...”하나는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려졌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다시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바로 이때, 귓가에 온화하고 박력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케이티, 내가 누구를 좋아하든지 케이티가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는 아닌 거 같은데? 다른 사람을 평가하기 전에 기본 매너부터 챙겨!”하나가 고개를 들어 화난 얼굴로 케이티를 째려보는 이상언을 보았다.그의 목소리는 비록 크지 않았지만, 워낙 주목받고 있는 인물이다 보니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쏠렸다.외교관의 딸로 태어나 어디를 가든 대접받고 자란 케이티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당하자 즉시 얼굴이 빨개졌다.“하나 씨한테 말을 걸었는데도 무시하고 대꾸도 하지 않고... 매너 없는 건 저쪽이라고요.”하나가 막 따지고 들려는데 상언이 다짜고짜 나섰다.“너랑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건 너를 싫어한다는
이씨 저택 앞.이서가 차량 제공을 요구하자, 입구의 경호원은 다급했다.“아가씨, 사모님이 외출하시기 전에 특별히 지시하셨습니다. 절대 아가씨를 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요. 우리를 난처하게 하지 마세요.”“H선생님에게 사고가 났어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집에 잠자코 있겠어요?” 이서는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다.“제발요, 차 좀 준비시켜 주세요. 두 시간 내에 가지 않으면 그 사람 큰일 나요.”이서가 얘기하는 그 H선생님이 바로 명성이 자자한 SY 대표라는 걸 이씨 집안 사람들은 모르는 이가 없었다.지환이 사고 났다는 얘기에 경호원의 안색이 변했다.“그럼... 아가씨, 도련님이나 사모님께 먼저 전화해 보세요. 죄송하지만 그분들 허락 없이는 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지금 그분들이랑 통화가 안 된다고요. 부탁해요. 나한테 무슨 일 생겨도 괜찮으니까 제발 내보내 주세요.”“통화가 안 된다고요?”이서는 경호원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보내주세요, 제발요.”울어 빨갛게 부은 눈을 본 경호원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래요, 아가씨, 그럼 제가 모셔다드릴게요.”이서는 그제야 기운을 차린 듯했다.“감사합니다,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경호원은 즉시 차를 몰고 박예솔이 보낸 주소로 출발했다.같은 시각, 줄곧 암암리에 이서를 보호하던 어둠의 세력도 이서를 따라나섰다. 그중 깍두기 머리를 한 남자가 손에 든 총기를 만지작거리며 불평을 늘어놨다.“아니, 보스가 외출하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는데 왜 또 한밤중에 외출이냐고?”옆에 있던 또 다른 나이가 좀 많은 남자가 그의 팔을 툭 건드렸다.“죽고 싶어? 보스 귀에 들어 갔다가는, 앞으로 우리 보스 곁에 못 있을 줄 알아...”별로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지만, 깍두기 머리 사내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많이 작아졌다.“형님, 우리는 보스의 그림자들이잖아요. 하루 종일 여자만 지키고 있는 거라면, 나는 정말이지, 보스랑 함께하지 않아도 괜찮을 듯합니다!”“너 이 자식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