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다음 순간, 큰 손 하나가 이서의 손목을 잡았다. 차갑고 서늘한 촉감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가면은 가볍게 ‘툭’ 소리를 내며, 이내 원래 자리로 되돌아갔다.이서는 손을 빼며, 불안한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안 잤어요?”“아니.” 지환은 몸을 곧게 펴고 이서와 거리를 두었다.비록 이미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처한다고 했지만, 이서는 여전히 눈치채 버렸다.“그럼 누가 다가오는지 어떻게 알았어요?”지환의 두 눈동자는 가면을 뚫고 이서를 빠르게 한 번 훑어보았다.이서의 몸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났다.그녀가 다가오자마자, 그녀의 냄새를 맡았다.처음에는 이서가 너무 그리워서 스스로 만들어낸 착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서의 불안한 손이 그의 가면에 떨어졌을 때 그는 소스라쳐 깼다.“왜 나왔어?”지환이 화제를 돌렸다.“저...”지환의 거리를 두는 듯한 모습에 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지금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그녀가 바라던 바인데, 왜, 그녀의 심장이 이토록 아플까? 더군다나 H선생님의 이러한 냉담한 태도를 그녀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안에 너무 오래 있어서 좀 답답해서요.” 그녀는 대충 거짓말로 둘러댔다.지환은 고개를 돌려 고택을 보았다.이씨 고택이 크긴 하지만, 아무리 커도 정해진 공간이다.하루 종일 안에 있는 것은 감옥에 있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며칠 있다가... 시간 봐서 사람 보낼게, 잠깐 바람 쐬러 다녀와.”그는 부하들에게 익명의 발신자를 조사하라고 지시해 뒀다. 머지않아 이서를 저택에서 유인하려는 자의 정체를 알게 될 것이다.그 사람만 찾으면 이서는 앞으로 이씨 고택에서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으며 여기에 계속 ‘감금’되어 있을 필요가 없다.“사람 보낸다고요?” 이서의 심장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입을 열자, 말투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날카로웠다.“공사다망하신 H선생님을 제가 어떻게 귀찮게 하겠어요?”말을 마치고는 곧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렸다.지환은 이서가 왜 화가 났는지
이서는 배미희의 목소리를 듣고, 얼른 눈물을 닦았다. 재차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네, 들어오세요.”배미희는 웃으며 문을 밀고 들어왔다. 이서가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본 그녀의 얼굴에 웃음기가 더 깊어졌다.“왜 그래? 방금 그 H선생님과 싸운 거야?”“아니요.” 이서는 고개를 저었다.“싸우는 게 정상이야. 남자와 여자는 달라. 특히 마음의 섬세한 면에서 절대 우리 여자를 따라올 수 없지...”배미희는 이서를 위로하면서 이서 옆에 앉았다.“이서야, 나에게 속마음 말해봐. H선생님, 어때?”이서는 멍하니 배미희를 바라보았다.“H선생님은 아주 좋으신 분이에요. 다만, 다만...”“다만 뭐?”이서는 입술을 깨물었다.“다만 그분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서, 자꾸 저를 찾아오니까...”배미희는 참지 못하고‘풉’하고 웃었다.“어째 난 네 말 속에서 질투가 느껴지는 것처럼 들리지?”“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감히 질투하겠어요. 질투를 한다는 건 제가, 제가...”배미희는 애처로운 듯 이서의 머리를 어루만졌다.“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거야. 하물며 H선생님처럼 훌륭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지. 난 네가 착한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그래서 다른 사람의 감정을 파괴하는 일은 하지 못한다는 것도... 하지만 H선생님의 그 사랑하는 사람은 아마 당분간은 돌아오지 못할 것 같구나.”“왜 못 돌아오는 거예요? H선생님이 그분을 엄청 많이 좋아하는 것 같던데, 그분은 왜 H선생님을 버리고 떠난 거예요?”“미안하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는 여기까지야. 이서야, 너 아줌마 믿지?”이서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앞으로 H선생님한테 화내지 마. 네가 그에게 화내면 그는...”배미희는 망설이다가 끝내 말을 계속하지 않았다.이서는 약간의 기대를 안고 추궁했다.“그는 어떤데요?” “아무것도 아니야.”배미희는 웃으며 말했다“어쨌든, 나를 믿는다면 그에게 화내지 마라.”이서는 왜 그런지
하이먼 스웨이는 친구들끼리 얼굴 보는 것보다, 자기 딸을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그녀의 친구들은 모두 재벌가 아니면 권세가들이었다. 이 사람들 앞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건 심가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일인 셈이니.어휴,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예전 같으면 이런 목적성을 띤 모임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바로 하이먼 스웨이였다.지금은 자신의 딸을 위해 그동안 쌓아온 인맥을, 연줄을 총동원하고 있다.이렇게 생각하니, 배미희는 이서가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뒷배 믿고 교만한 심가은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서는 너무 겸손하다. 지난번에 그녀가 친구를 손님으로 초대하지 않았으면 아마 다들 이서라는 인물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이씨 집안 손님이라는 권세를 믿고 나대거나 사람을 무시한 적도 없다.지환이 이서를 그렇게 좋아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제가 쓴 글을 작가님께 보여드리고 싶어요.”지난번 하이먼 스웨이의 강연을 듣고, 이서는 재미 삼아 써보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문사가 샘솟듯 솟아 사흘도 안 되어 만여 자를 써냈다.이상하게도 마치 이전에 썼던 것처럼 술술 써졌다.그런데 이서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글 쓰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았다.“썼어, 이렇게 빨리?” 배미희는 계속 말을 이었다.“마침 잘됐네, 내가 갖고 가서 보여 줄까?”“좋아요.” 이서는 컴퓨터에 있는 파일을 복사해서 배미희에게 건넸다.배미희의 말에 따르면 이서는 이전에 스웨이 작가와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서의 기억 속에서 하이먼 스웨이를 처음 만난 건 지난번 이씨 가문의 바비큐 파티에서였다.그래서 줄곧 경솔하게 자신의 작품을 들고 가르침을 청하지 못했다.지금 배미희가 다리를 놔주니,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감사합니다, 엄마.”“아이고...”엄마라는 소리에 배미희는 심신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곧 토요일이 다가왔다. 임하나는 아침 일찍부터 침대에 앉아 캐리어 안의 옷을
아주 예쁜 롱 드레스였다.하나는 드레스를 꺼내 보았다. 빨간색의 롱 드레스는 우아하고 세련된 느낌을 자아냈다. 특히 촤르르 떨어지는 질감은 딱 봐도 일반 소재는 아닌 듯했다. 게다가 모든 디테일 하나하나까지도 모두 정성껏 디자인한 것이 보였다.단아하면서도 심플한 느낌이지만 곳곳에 숨은 디테일 때문에 클래식하면서도 모던한 느낌을 연출했다.바로 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상언에게서 걸려 온 것이었다.하나는 얼른 받았다.[드레스는 받았어요?]“이 선생님이 보냈어요?” 하나는 무척 마음에 들어 손에서 놓지도 않았다.“네, 받았어요.”[마음에 들어요?]그녀는 눈물을 글썽이었다.“마음에 들어요.”가벼운 한마디에 상언의 마음은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았다.[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에요.]잠시 멈췄다가 이상언은 다시 말을 이었다.[준비해요. 호텔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이 순간 하나는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뱉었다.“벌써 도착했어요? 그럼 그냥 올라와서 기다릴래요? 저... 준비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아서요...”이상언은 크게 기뻐하며 답했다.[네, 지금 올라갈게요.]전화를 끊었지만, 하나의 볼은 여전히 뜨거웠다.두 사람은 단순한 친구 사이가 아니었으나 해야 할 건 이미 다 한 사이이다. 하지만, 이번에 M국에서는, 이국 타향이어서인지, 낯선 땅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상언에 대한 느낌이 크게 바뀌었다.왠지... 이전보다 조금 더 의존적으로 변한 듯했다.하나가 옷을 갈아입자마자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아마도 상언이 도착했을 것이다.긴장한 마음으로 문 입구까지 걸어가서야 하나는 거울도 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문밖에서 계속 들리는 노크 소리에 당황한 나머지 바로 문을 열었다.문밖에 덩그러니 서 있는 사람은 역시나 상언이었다. 하나는 무의식중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긴장한 손은 치맛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이상언이 아무 말없이 멍하니 서 있자, 임하나는 더욱 긴장했다. 그녀는 고개를
솔직히 말하자면, 케이티도 예쁜 여자 축에 속했다. 수많은 의학계 거물들과 한자리에 있음에도 전혀 기죽지 않는 당당한 존재였다.어린 나이임에도 이런 세미나에 참가하고, 게다가 무대 위에 앉아 있다는 건 학술과 능력 면에서도 인정받고 있다는 걸 설명한다.그녀가 지나치게 증오의 눈빛을 발산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는 그녀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다녀올게요.” 이상언은 외투를 벗어 하나의 몸에 걸쳤다. 늑대들의 호시탐탐 시선도 막을 겸.“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요.”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상언은 갑자기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에 뽀뽀했다.하나는 멍해졌다.그녀는 결코 보수적인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왜 상언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에게 키스하는지는... 의도가 다분한 행동이었다.상언은 하나에게 키스한 후 황급히 자리를 비웠다.솔직히 하나가 화낼까 봐 좀 걱정이 됐다.어쨌든 그녀는 줄곧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무대 위의 케이티는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상언이 H국에서 여자 친구를 사귀었다고 했을 때도 그녀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상언이 잠시 외롭고 심심해서 만나는 여자라고 생각했으니까.하나의 개인 자료를 확인했을 때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한 마디로 배경도, 돈도 별로 없는 그런 집안의 자제였으니.그래서 상언이 곧 하나를 질려할 것으로 생각했다. M국으로 돌아오면 틀림없이 자신과의 결혼에 착수할 것이라는 강한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 여자가 M국까지 따라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게다가 상언의 태도를 보니 전혀 심심풀이 땅콩으로 만나는 사이는 아닌 듯했다.그녀가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상언이 무대에 올라왔다.케이티는 곧 표독스러운 눈빛을 숨기고, 일부러 상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녀가 다가가기도 전에 상언은 마치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아는 것처럼 슬그머니 피했다. 갑자기 그는 그녀의 경쟁상대에게 악수를 청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상대방도
세미나는 거의 세 시간가량 지속되었다.회의가 끝나는 즉시 이상언은 하나에게로 갔다. 다가오는 케이티를 뒤로 한 채.“리셉션까지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나가서 산책이나 할까?”상언이 하나에게 말했다.“네, 좋아요.”두 사람은 입구로 걸어갔다.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본 케이티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이때 세마나의 또 다른 발표자 앤드류가 다가왔다. 앤드류는 심혈관 질환 방면의 전문가이다. 비록 이상언과 견줄 수 있는 그런 천재형 인물은 아니지만 젊은 나이에 심혈관 분야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는 건, 그도 충분히 뛰어난 사람인 셈이다.케이티의 눈빛이 상언을 쫓아가는 것을 본 앤드류는 얼굴에 음흉하고 악랄한 기운이 퍼졌다.“케이티.” 앤드류가 신사적으로 케이티에게 인사를 건넸다.애석하게도 케이티의 눈에는 다른 사람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순간 앤드류의 눈빛이 표독스러워졌다. 하지만 얼굴에는 더욱 진한 웃음을 지었다.“케이티는 저 여자를 질투하나 봐요?”앤드류에게 단번에 정곡을 찔린 케이티는 돌연 안색을 바꾸며 변명을 늘어놨다.“무슨 말씀이에요? 내가 뭐 하러 저런 여자를 질투해요? 난 외교관의 딸인 데다가, 최고의 의대를 졸업한 수재라고요. 그런 내가 왜 저 별볼일 없는 여자를 질투하겠어요?!”앤드류는 빙그레 웃었다.“네, 그렇죠? 저 별볼일 없는 여자를 질투할 리 없겠지만, 저 여자가 사라지면 당신 마음도 후련해지겠죠? 게다가 당신한테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일 테니..., 아닌가요?”케이티는 귀신이 홀린 듯 앤드류의 말에 반사적으로 반응했다.“어떻게요?”앤드류의 입가에 웃음기가 더 깊어졌다.“케이티, 그러면...”그는 케이티의 귀에 대고 낮게 말했다.앤드류의 얘기에 케이티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정말 이래도 되는 거예요?'‘괜히 이 선생님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득보다 실이 더 크면 어떡하지?’“그냥 겁만 주는 건데요 뭐, 혹시라도 정말 이 수법이 먹히면, 케이티는 손쉽게 이 선생을 손에 넣는 거구요..
윤이서는 결혼했다.그러나 결혼 상대는 그녀가 8년 넘게 사랑을 했던 약혼자인 하은철이 아닌 만난 지 5분도 안 된, 기본적인 정보만 대충 아는 남자였다.“후회되시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사무소 대기실에서 남자는 조금 귀찮다는 눈빛으로 윤이서를 흘겨보았다.윤이서는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머릿속은 하은철의 차갑고 매정한 얼굴이 떠올랐다.3일전, 줄곧 윤이서를 피했던 하은철이 직접 그녀를 저녁식사에 초대를 했고, 전화를 받은 그녀는 순간 지난 8년간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정성껏 꾸미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하지만 약속장소에서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은철뿐만이 아니라 그와 손을 깍지를 낀 채 휠체어에 앉아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는 윤수정도 함께 있었다.--그녀의 사촌 여동생!그녀가 아직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고 있을 때, 하은철은 갑자기 폭탄발언을 했다.“네 신장을 수정이에게 주면 너와 결혼할게.”윤이서는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몸이 굳어지며 믿을 수 없단 듯이 하은철을 바라보았다.맞은편 남자의 눈빛은 시종 차갑고 증오로 가득 찼다. 마치 자신을 8년 동안 정성껏 뒷바라지 한 약혼녀가 아닌 아버지를 죽인 원수라도 보는 것 같았다.그녀는 마치 갈 곳을 잃어 절벽에서 추락하는 것 같았다.하은철과 어릴 때 약혼한 사이였고, 16살 되던 해 귀국한 후, 하은철을 걷잡을 수 없이 사랑하게 되었다.이 8년 동안 그를 뒷바라지 하기 위해 그녀는 빨래와 밥하는 것을 배웠고, 또 그에게 걸맞는 아내가 되기 위해 피아노, 그림 등을 배웠으며 심지어 그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오직 그가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와 결혼해주기 꿈꾸며.그러나 현실은 그녀에게 매몰찼다. 하은철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촌 여동생을 사랑하고 있었다.심지어 그의 애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전혀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도
“무슨 문제 있나요?” 하지환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윤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벌리고 있다가 또 하지환이 오해할까 봐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아니요, 가요.”어차피 언젠가 마주해야 할 문제였다.도중에 윤이서는 하은철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스크린이 끊임없이 반짝이는 것을 보면서 윤이서는 마치 지난 8년 동안 비굴했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전에는 모두 그녀가 먼저 하은철에게 전화를 걸며 그의 관심을 끌려했다.그러나 하은철은 단 한 번도 먼저 그녀에게 전화를 지 않았다.설령 그녀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한다 하더라도 그는 한 마디 관심도 없었다.그러나 지금, 윤수정을 위해 그는 몇 번이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두 사람 사이의 차이는 정말 컸다.“안 받아요?” 조수석에서 눈을 감고 쉬고 있던 하지환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윤이서는 남자의 완벽한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록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그가 짜증이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수신 버튼을 눌렀다.입을 열기도 전에 맞은편 하은철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윤이서! 너 당장 병원으로 오지 못해! 지금 얼마나 많은 전문가들이 너 기다리고 있는지 알아? 수정이는 얼마나 괴로운지 아냐고? 너 어떻게 이렇게 이기적일 수 있어? 나는 이미 너와 결혼하는 것에 동의했는데, 넌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윤이서의 입가에는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비록 하은철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하은철의 마음속에 있는 자신이 그렇게 형편없었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이왕 이렇게 된 이상…….“내가 원하는 게 뭔지 잘 알잖아?” 윤이서의 눈빛은 차가워졌다.“난 너의 사랑을 원하는데, 너는 줄 수 있어?”“뻔뻔한 년!”하은철은 그녀를 비꼬았다.“나는 절대로 너 같은 여자 사랑하지 않을 거야! 윤이서, 너 지금 오면 아직 하씨 집안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