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표 데리고 나오세요.]이 문자를 보고 서찬영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이서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윤 대표님, 우리 먼저 여기서 나가실까요?”이서는 발밑에 여러 사람과 윤수정을 보고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 중 몇 사람은 뒷문을 통해 회의장을 떠났다.임현태의 차가 도착해서 이미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서찬영은 이서를 대신해 직접 차문을 열고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윤 대표님, 제 명함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나에게 전화하십시오.”이서는 지금 서찬영을 상대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대답을 얼버무리며 고개를 끄덕이고 명함을 받고는 차에 올랐다.서찬영은 멀어진 차를 보고 다시 휴대전화를 꺼냈다.아까 도착한 문자메시지가 아직 있었다.그는 핸드폰 번호를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이거 혹시 YS 대표님 번호 아닌가?‘윤이서가 민씨 그룹을 따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배후에 YS의 대표가 있었기 때문이야.’서찬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 번호를 저장해 두었다.차에 있던 임현태는 뒷좌석의 이서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좀 전에 하지환이 현태에게 직접 뒷문으로 가서 이서를 기다리라고 했는데, 아마도 이서가 뒷문으로 나올 것을 예상했던 것 같다.‘윤 대표님 원래 예민하신 분인데 만에 하나 눈치를 챈다면...’현태가 엉뚱한 여러 사람과 사이, 이서가 자신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오히려 창백하고 굳은 표정으로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 얼굴이었다.“윤 대표님?”현태가 연거푸 두 번 부르자 이서는 마침내 정신을 차렸다.“네, 현태 씨?”현태는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무슨 일이시냐고 물었죠. 무슨 일이 일어났는데 왜 넋이 나간 것 같아요?”여러 사람과 했지만 현태의 질문에 대답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수정이 한 말은 이서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내가 여러 사람과 딸도 아니고 윤씨 가문이 아니라고?’‘전에 나도 내가 윤재하의 딸이 아닐 수도 있겠다고 의심했지만 그게 사실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마이클 첸은 이서의 압박에 자기도 모르게 그 세 가지 방법을 다 이야기했다.말을 마치자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남편은 선생님께서 제시한 세 가지 방법 중에... 어떤 방법을 선택한다고 했나요?”“남편분은... 아무 말 없이 잘 생각해 보겠다고만 했습니다.”“그 세 가지 방법을 다시 한번 말해보세요.”마이클 첸은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첫 번째 방법은 최면을 다시 시도하는 것이지만 모든 기억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전기 충격 요법인데 이 방법은 아마도 할아버지의 죽음을 잊게 할 수 있겠지만 세 방법 중 가장 고통스러울 겁니다. 세 번째 방법은...”“저 혼자 이겨내는 것.”이서는 마이클 첸의 말을 이어 말했다.마이클 첸은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이서는 다시 한번 침묵에 잠겼다.오랫동안 그녀는 고개를 들어 마이클 첸을 바라보았습니다.“나는 두 번째 방법, 전기 충격 요법으로 할게요.”마이클 첸은 잠시 멈칫했다.“남편분과 먼저 상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아니요, 틀림없이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마이클 첸은 할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마이클 첸이 말했다.“윤이서 씨, 당신 남편이 전기 충격 요법 사용에 동의하지 않을 텐데 굳이... 게다가, 나도 당신 남편과 상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마이클 말 없이 분명히 알고 있었다.만약 이서에게 이런저런 문제가 생긴다면, 자신도 역시 살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제가 그렇게 결정했어요.”이서가 일어서며 대답했다.“남편에게 말하지 마세요. 만약 이 문제에 대해서 지환 씨가 추궁하기 시작하면 저한테 넘기면 됩니다.”“그렇지만...”“치료의 시간과 장소 등의 결정은 선생님께 맡기겠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이서는 말을 마치고 마이클 첸의 방을 떠났다.“...”이서가 이렇게 제멋대로인 것은 지환과
이서는 이번 생에 지환과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전부였다.이서는 잠시 하던 생각을 멈추고 현태에게 말했다.“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잖아요. 현태 씨랑 소희, 하나를 불러서 함께 축하하고 싶어요. 괜찮겠죠?”“저는 괜찮은데, 소희 씨 쪽은 어떨지...”“지금 물어볼게요.”이서는 휴대전화를 들고 단톡방에 글을 올렸고, 임하나에게는 이상언에게 따로 알리도록 부탁했다.하나가 바로 답장했다.[OK.]이서는 심소희에게 물었다.[소희야, 현태 씨도 올 건데, 너는?]소희는 재빨리 답장했다. [이렇게 기쁜 일에 내가 빠지면 안 되죠.]그 후 소희는 다시 한번 이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이서 언니, 현태 오빠랑 나 지금 거의 친남매예요, 우리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그래, 알았어.]이서도 답장을 보냈다.단톡방에서 서나나도 엄청 흥분해서 댓글을 올렸다.[너희들 너무 신 나겠다, 나도 거기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워!!]하나는 바로 장난스럽게 해외에서 고생하는 나나를 위로했다.[부럽긴, 너도 곧 성공할 거잖아. 이서는 지금 4대 기업 사장이야. 이서가 너를 곧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형 스타로 키울 텐데 그때가 곧 올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나나도 바로 답장을 보냈다.[하나 언니는 맨날 나 놀리는 거 재밌죠? 만약에 내가 정말로 세계적인 배우가 된다면 한 번만 만나겠어요? 매일 언니들 데리고 나가서 신 나게 놀 거야!]하나는 바로 신했다.[하하하, 너 오늘 말한 거 지켜야 해. 나나 말한 거 박제해 놔야지!]나나도 재빨리 대답했다. [맘대로 해, 난 약속 꼭 지킬 거야. 아, 맞다. 내가 며칠 전에 누구 만났는지 알아?]하나는 바로 궁금했다.[누구 만났는데?]이서와 심소희도 같이 궁금했다.[누구?]나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톡을 올렸다.[하이먼 스웨이 작가님 만났어요! 며칠 전에 갑자기 제작진을 만나러 와서 깜짝 놀랐잖아요. 그분은 H국에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지금 M국에 있지?]‘바다의 딸’은 최근 M국에서
[이서야, 그게 무슨 말이야?] 임하나는 단톡방에서 미친 듯이 이서에게 문자를 보냈다.다른 두 사람도 물음표를 여러 개 보냈다.이서는 오늘 회의장에서 윤수정이 한 말을 전했다.[윤수정이 한 얘기라면 좀 걸러서 들어야 하지 않을까?]심소희와 서나나도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했다.이서는 생각이 달랐다.[하나야, 전에도 얘기했듯이 난 대여섯 살 이전 기억은 전혀 없어. 난 내가 그때 어려서 기억을 못 하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얼마 전 최면 치료할 때, 선생님께서 과거에 누군가가 내 기억을 일부러 지우려고 했던 적이 있다고 말씀하셨어. 그래서 말인데, 난 내가 윤씨 집안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헐, 이게 뭔 일이래? 네 말대로라면 대여섯 살 이전 기억이 전혀 없으니, 아마 그때쯤 윤씨 집안에 데려간 건데..., 그런데 말이 안 되는 게, 그 큰 애가 바뀐 걸 윤씨 집안 다른 사람들이 모를 리 없잖아.][기억 안 나?]이서는 점차 냉철해졌다.[그때 윤재하 부부가 나 데리고 외국 나갔잖아.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16살이었어. 애들은 한 해가 다르게 크는데, 사람들이 애가 바뀐 걸 못 알아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거지.]이서의 말을 듣고 세 사람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진 것 같았다.할 말조차 잃었다.잠시 뒤 서나나가 말을 꺼냈다.[하나 언니, 언니랑 이서 언니는 어릴 때 소꿉친구잖아요. 언니 뭐 이상한 점 못 느꼈어요?][그게... 소꿉친구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고..., 우리도 윤씨 그룹이 몰락한 후에야 알게 되었어. 그때는 어렸잖아.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지... 그리고 이서가 갑자기 부모님 따라 해외에 나가서 특별하게 얘기 들은 것도 없어.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는 이서가 귀국한 그 다음해였을 걸? 맞다, 생각났다. 다시 만났을 때, 이서는 내 이름을 듣고도 전혀 모르는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어.][그렇다고 이서 언니가 바뀌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잖아요.] 서나나가 말했다.단톡방에 정적이 흘렀다.이때 차
메뉴판을 보고 있던 이서는 두 사람이 속닥거리는 걸 보고 궁금해하며 물었다.“무슨 비밀 얘기를 그렇게 하는 걸까요?”이상언은 즉시 웃는 얼굴을 하며 말했다.“아... 아니에요, 아무 얘기도 안 했어요.”“수상한데?”두 남자에게 별 관심 없는 듯 임하나가 이서의 팔짱을 끼고 말했다.“이서야, 저 사람들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주문이나 하자.”“응.” 이서와 임하나, 심소희 세 사람은 음식을 주문했다.지환과 두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재잘거리는 세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세 남자의 눈가에 옅은 웃음기가 피어났다.하지만 웃음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의미는 다 달랐다.식사를 마친 후 임하나는 이상언과 함께 돌아갔다. 재결합한 커플의 훼방꾼이 되기 싫은 심소희는 이서의 차에 올라탔다.운전석에 앉은 임현태는 조수석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소희 씨, 여기 앉아.”뒷좌석에서 손을 꼭 잡고 있는 이서와 지환을 본 심소희는 눈치 빠르게 조수석에 올라탔다.이서는 웃는 얼굴로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친남매로 지낼 수 있다고, 신경 안 쓸 거라고 하두만, 신경 제대로 쓰고 있네...’차 안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지환이었다.“오늘 인수인계식 봤어.”“하고 싶은 말씀은...?”“우리 와이프 참말로 예쁘더라.”지환은 말하면서 이서의 손에 가볍게 키스했다.이서는 어이없는 듯 말했다.“아이참, 장난 그만하고..., 다른 건?”앞좌석에 있던 임현태와 심소희는 스스로 주문을 외웠다.‘난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난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음.”이서는 웃었다.“회의장에서 나름 누군가를 위해 감동적인 얘기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괜한 짓 한 건가?”지환은 웃으며 이서의 머리를 가볍게 만졌다.“그럴 리가?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난 다 알아. 느낄 수 있어.”갑자기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줄었다.“그런데 거기서 그 여자가 한 얘기, 무슨 뜻이야?”“여자?” 이서는 어리둥절했다.“있잖아,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가 윤씨 그룹 사람이 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이서도 확실하게 해 두고 싶었다.“응, 결과 나오면 가장 먼저 알려줘요.”이서의 눈가에 아른거리는 웃음을 보며 지환도 웃음을 지었다.이서가 윤씨 핏줄만 아니라면... 모든 건 쉽게 해결된다.그와 이서에게도 드디어 좋은 날이 올 것이다.집에 도착하자, 임하나한테서 전화가 왔다.[이서야, 우리 한동안 놀러 간 기억이 없네.]그녀는 웃었다.“왜?”[우리 간만에 바람 쐬러 갈까?]전화기 너머에서 임하나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너 결혼한 뒤 우리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이 줄은 거 알지?]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순간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미안해...”[저기요, 따지러 전화한 게 아니고...]임하나는 이서의 말을 잘랐다.[난 단지 너랑 단둘이 놀러 가고 싶을 뿐이야. 마침 나한테 온천호텔 이용권 두 장 있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좋지.”회사 구조조정은 지환에게 맡길 생각이다.CEO라는 역할에 미리 적응할 기회도 되고.그녀도 마침 기분 전환하러 가고, 일석이조인 셈이다.최근 참 여러 가지 일이 많았다.나가서 바람도 쐬고 기분 전환하고 오면, 또 새로운 뭔가 생길지도 모른다.이서는 자신의 생각을 지환에게 말했다.지환도 같은 생각이었다.“그럼, 회사 쪽 일은 나한테 맡겨. 자긴 나가서 잘 놀고 오기만 하면 돼.”“응, 고마워.”이서는 지환의 얼굴에 가볍게 뽀뽀를 하고, 몸을 돌려 샤워실로 들어갔다.이서의 모습을 보며, 지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이서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자, 그의 눈동자에 서렸던 미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곧 휴대전화를 들고 베란다로 향했다.“방금 어디까지 얘기했지?”수화기 너머의 이천은 갑자기 이야기하다 말고 사라지는 지환의 대화법에 이미 익숙해졌다. 그는 아무 일 없었듯 보고를 계속했다.[방금 사모님과 윤씨 부부의 친자관계 확인해 보라고 하셨습니다.]지환은 ‘응’ 하고 다시 말을 있다.“내일 결과를 알아야겠다.”[...]‘성질 급
하지만 이서는 그걸 원하지 않았다. 본인이 모든 고통을 감내할지언정 지환을 잊고 살아갈 자신은 없었다.그녀의 문자를 본 마이클은 잠깐 침묵했다.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의사의 관점에서 그는 당연히 첫 번째 방식을 추천할 것이다.최면요법은 머릿속 지우개처럼 과거의 기억을 지우면서 고통을 더는 치료법이다.즉 깨끗한 도화지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거다.반면, 전기 충격 요법은 가장 비추하는 치료법이다.다른 방법이 있었더라면 심지어 언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왜냐면 치료과정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서에게 문자를 보냈다.[이서 씨, 전기 충격 치료법으로 치료한 환자들의 인터뷰 자료를 먼저 보내 드리겠습니다. 보시고 괜찮다고 생각된다면 그 때 다시 생각해 봅시다.][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서는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저도 전기 충격 요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저 이미 결정했습니다.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부탁컨데 제 남편한테는 절대 비밀로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이서의 확고한 태도에 마이클 천은 설득을 포기했다.“누구랑 그렇게 문자질이야?”운전 중이던 임하나가 고개를 돌려 이서를 한 번 보았다.이서는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아니야.”지환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혼자 조용히 그 고통을 감내할 생각이었다.“보나마나 남편이겠지.”임하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오늘 지환 씨가 소중한 아내를 내게 양보한 걸 봐서, 내가 네 남편 뒷담화는 하지 않겠어.”이서는 굳이 반박하지 않고 웃어넘겼다.“우리 어느 호텔로 가?”출발한지 벌써 한 시간이나 훌쩍 넘었지만, 아직 갈 길이 먼 듯했다. “다 왔어. 여기 온천 호텔인데, 내 고객의 말을 빌리자면 현지에서 꽤 유명하대. 타지 사람에게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이서는 이를 듣고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아주 외진 곳은 아니겠지? 그 고객, 남자야, 여자야?”임하나는 순간 마음이 덜컹했다.“남자인데.
“이서야, 신경 쓰지 마. 하은철 입에서 뭔 좋은 소리 들으려고? 가자!”이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임하나의 손을 지긋이 눌렀다.“말해봐.”그녀는 하은철을 보며 말했다. 드디어 제대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녀의 시선에 하은철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막 입을 열려다 임하나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우리 둘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이 사람 참...”이서는 짜증 난 임하나를 다독였다.“알았어, 다만 밀폐된 공간이 아닌 공공장소여야 해.”하은철은 기쁜 기색이 역력했지만, 곧 사그라들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호텔 부근의 분수대를 가리켰다.“저기 가서 이야기할까?”이서도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 그녀는 임하나더러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하은철과 분수대 쪽으로 걸어갔다.분수대에 도착하자, 이서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우리 남편이 왜? 뭐가 어쨌는데?”하은철은 마음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작은아빠 얘기를 꺼내야만 이서의 신경을 건드릴 수 있구나.’“네 남편이 누군지 알아냈어.”그의 얘기에 바로 경각심이 생긴 이서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그래서? 어쩌려고?”수호자의 신분으로 나서는 이서의 모습에 하은철은 어처구니없었다.그가 뭘 어쩌려는 게 아니라, 작은아빠가 그의 약혼녀를 빼앗은 셈이니.“너 아직도 모르지?”“뭘?”이서의 눈에 비친 경계심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네 남편이, 바로 내 작은아빠야.” 하은철은 한 글자 한 글자씩 뱉고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역시나 이서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그의 마음속에서 순식간에 희망이 되살아났다.“몰랐었구나...”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냥꾼이 인내심을 갖고 작은 동물이 함정에 빠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이서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은철을 바라보았다.입을 열자, 쉰 목소리가 나왔다.“거짓말!”하은철은 조급해했다.“정말이야, 네 남편이 정말 내 작은아빠이라니까!”“안 믿어!”이서는 믿지 않았다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