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환이 하씨 집안의 하프 마운틴 별장에 도착했을 때, 하은철은 하경철과 이야기를 마치고 서재에서 나오는 길이었다.보아하니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삼촌 오셨어요?”하지환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할아버지가 뭔 일로 부르셨어?”하은철은 별로 탐탁지 않은 듯 얘기했다.“저더러 윤이서 남편을 그만 찾으라네요.”하지환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하은철의 다음 얘기를 기다렸다.“그러면, 내가 이서의 마음을 되돌리는데 차질이 생긴단 말이에요.”“…….”“큰 집 도련님, 어르신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사 주경모가 때마침 나타났다.하지환은 가볍게 ‘응’하고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얼굴에는 그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서재에 들어서서 의자에 앉아 있는 하경철에게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작은 아빠.”하경철이 웃으며 말했다.“왔어? 자, 앉아.”하지환은 별 내색없이 하경철 맞은편에 앉았다.“모레 이서 남편을 만날 예정이다.”하경철은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너희 쪽에 혹시 그 사람에 대한 정보 같은 게 있나?”하지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어흠, 너도 못 찾아낸다면, 그 사람 정말 대단한 사람인데…….” 하경철은 하지환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지환아, 너 혹시 모레 시간 되니?”하지환은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났다.“작은 아빠는 제가 그 자리에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하경철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그래, 너도 알아내지 못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은 아닌가 보다. 외국인일 가능성이 높아. 넌 외국에서 오래 살았으니, 어쩌면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네.”하지환은 입꼬리를 보기 좋게 올리며 웃음을 지었다.“그럴 수도요. 하지만 그날 정말 시간을 내기 힘들 거 같아요. 작은 아빠, 죄송해요. 도움을 못 드려서…….” 하경철도 굳이 강요하지 않았다.“그럼, 내가 만나보고 와서, 다시 너랑 상의하마.”“네. 그러시죠.”……이틀 뒤.불필요한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주경모는 즉시 호텔 직원에게 다기와 차를 준비하라고 했다.이서는 이 기회를 틈타 하지환에게 문자를 보냈다.[할아버지는 이미 도착하셨어요. 오시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하지환은 답장하지 않았다.호텔 직원이 다기 세트를 가져왔다.이서는 부득이하게 먼저 마음을 다잡고 온 정신을 집중하여 하경철에게 드릴 차를 끓이고자 준비했다.다도에도 순서와 예절이 있으니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되었다.직원이 가져온 것은 보이숙차였다.자사 다관에 찻잎을 넣고 끓는 물로 우리자, 찻잎이 동동 떠오르면서 차 향기가 룸 안에 가득 퍼졌다.이서는 재빨리 찻물을 퇴수기에 따라 버렸다.이렇게 두 번을 반복하고 세 번째가 되어서야 찻잔에 차를 부었다.검붉은 차탕에 차 향이 모락모락 피어났다.“할아버지, 어서 드세요.”하경철은 빙그레 웃으며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역시 이서가 우려낸 차야, 맛있어.”이서는 겸손했다.“과찬이세요. 할아버지는 늘 저를 놀리시는 걸 좋아하신다니까요.”할아버지는 손을 흔들었다.“영감쟁이가 할 일 없어서 널 놀리겠냐? 얘야, 할애비는 널 잘 알고 있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지. 이 다도만 봐도 그래. 네가 웬만한 다도가들보다 훨 낫다.”“할아버지…….”그러고는 한숨을 쉬었다.“아쉽게도…… 은철이 녀석이 복이 없어서…….”이서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하경철은 웃으며 하은철 얘기는 그만했다. 그의 시선은 이서의 손목의 착용한 팔찌에 가 있었다.“남편이 준 것이냐?”이서가 차를 우려낼 때부터 눈여겨봤다.윤이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이 팔찌는 오늘 자리를 위해 특별히 찬 것이다.하지환이 그녀에게 잘해 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하경철에게 점수를 좀 더 따게 해주려고.하경철은 두어 번 훑어보고는 아무 말없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방안은 침묵으로 조용했다. 하경철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이서는 하지환이 늦어서 화가 난 줄 알았다.그녀는 곧 핑계를
이서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하지환에게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서류는요?”하지환은 눈앞의 백설같이 하얗고 기다랗게 쭉 뻗은 이서의 손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슬쩍 쓰다듬었다.“차 안에 있어요.”“네.” 윤이서는 손이 찌릿찌릿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지만 굳이 손을 빼지 않고 웃으면서 물었다.“서류 받으러 오는 분은 어떻게 생겼어요?”“코 하나, 눈 두 개, 입 하나.”이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장난 그만 해요, 혹시라도 서류 전달이 잘못되면 안 되잖아요.”“걱정마요. 당신을 잘 찾아올 거예요. 그쪽에서 당신을 알아볼 테니까.”하지환은 이서에게 차 키를 건넷다. “먼저 올라갈게요. 서류 전달하고, 이서 씨도 올라와요.”“네.”이서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하지환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차에 타서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엘리베이터가 3층에서 멈추자, 하지환은 걸음을 내디디며 룸 방향으로 걸어갔다.지금껏 이렇게 긴장해 본 적은 없었다.그는 자조하며 웃었다.과거 수조, 수십조에 이르는 거래를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그가, 오늘은 왠지 조심스럽고 긴장되었다.‘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룸 앞까지 간 하지환은 문을 두드렸다.문이 열렸다.주경모는 밖에 서 있는 사람이 하지환인 것을 확인하고 한참 동안 멍해 서 있었다.“누구냐?”뒤에서 하경철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꿈에서 깨어난 듯 문 입구에서 자리를 비켜주었다.“큰 집 도련님이요.”하지환은 룸에 들어갔다.하지환을 보고 놀란 건 하경철도 마찬가지였다.“네가 어쩐 일이냐? 오늘 일이 있어서 못 온다고 하지 않았나? 왔네?”하지환의 표정이 복잡했다.“확실히 일이 있긴 하죠.”“그럼 어떻게 온 거야?”하지환은 옷매무시를 바로잡고는 예쁜 손목을 드러냈다.“왜냐하면, 작은 아빠께 말씀드려야 할 일이 있어서요…….”“설마 이서 남편 정보를 찾은 거야?”하경철이 흥분해서 말했다.하지환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문밖에서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덩달아 민씨 집안도 웃음거리가 되었다.그가 오늘 온 것은 바로 민씨 집안의 체면을 되찾기 위해서였다.하경철은 불쾌해하며 눈살을 찌푸렸다.“내가 맞선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긴 하지만, 지환이 이미 결혼한 걸 어쩌겠나? 그리고, 내가 맞선을 얘기한 거지, 둘의 혼약을 약속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결혼 얘기까지 나왔는지,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네.”민호일은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잠자코 당할 수만은 없었다.“그래도 보상은 해주셔야죠.”민호일은 하지환을 힐끗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큰 집 도련님은 이미 결혼했다고는 하나, 현재 주요 사업이 국내에 있으니…… 남자는 혼자 있으면 외롭기 쉽습니다. 차라리 한국에서…… 새 장가 한 번 더 드는 건 어떨까요?”말하면서 민예지를 하지환 곁으로 밀어붙였다.민예지는 수줍어하며 고개를 숙이고 하지환의 품속에 쓰러지려고 했다.하지환은 가볍게 옆으로 피했다.헛발 디딘 민예지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가까스로 똑바로 서자, 하지환의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우리 집사람이 원치 않아서, 저는 새 장가 못 갑니다.”‘집사람’이라는 세 글자는 하지환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자상함과 온화함이 묻어났다.민예지는 갑자기 일면식도 없는 하지환의 아내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질투를 느꼈다.그녀는 어색한 억지웃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삼촌을 모실 수 있는 건 제 영광입니다. 혼인 신고 안 해도 상관없어요. 당신 곁에서 말 잘 듣고 있을게요.”하경철의 눈살이 더욱 찌푸려졌다.하지환은 오히려 흥이 나서 입꼬리를 올렸다.“정말?”민예지는 눈동자가 밝아지자 황급히 말을 이어갔다.“네, 시키는 일이면 뭐든지 할게요.”“그럼, 바닥에 엎드려 개 짖는 소리나 두 번 해보던가.”무심코 뱉은 말이었다. 눈가에 있는 점이 불빛 아래에 사악한 기운을 더해주었다.민호일과 민예지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도련님……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이건 너무하네요.” 민호일은 하마터면 화가 나서 돌아가
방금 하지환에서 된통 당한 민예지는 이서를 보자 분풀이할 대상을 찾은 듯 두말없이 다짜고짜 이서의 팔을 잡고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 설마 하은철 둘째 삼촌한테 꼬리 치려는 거니?!”이서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민예지에게 잡힌 팔을 힐끗 쳐다보고 말했다.“손 놔!”미쳐 날뛰는 민예지한테 이서의 소리가 들리기 만무했다.‘내가 못 가지는 걸 네가 뭔데 가져?’그녀가 손을 놓지 않자, 이서는 민예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자 손톱이 민예지의 살을 파고들었다.강한 통증을 느낀 민예지는 이서를 밀어냈다. 손목에 생긴 손톱자국을 보고는 또 달려들었다.이서는 재빨리 피하고, 고개를 들어 CCTV를 한 번 훑어보고는 말했다.“민예지, 이미지 챙기는 게 좋을 걸?”민호일도 이곳이 그들의 바운더리가 아니라는 것을 의식했는지 급급히 민예지를 막아섰다. CCTV가 폭로되어 민예지의 악행이 만천하에 알려지면 자기들에게 득이 되는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예지야.”민호일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이런 뜨내기들에게 손 더럽히지 마. 그건 네 신분을 깎아 먹는 거나 마찬가지다. 우리 가자.”민예지는 내키지 않은 듯 얘기했다.“그런데 아빠, 쟤가 뭔데 둘째 삼촌이랑 같이 밥 먹냐고?”이미 엘리베이터에 들어온 이서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하은철 둘째 삼촌도 오셨다고?’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혔다. 치덕대는 민씨 부녀가 눈앞에서 철저히 사라지자, 이서는 그제야 기분이 다소 홀가분 해지는 것 같았다.하은철의 둘째 삼촌도 계신다고, 심지어 살짝 설레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하였다.곧 3층에 도착했다.이서는 가벼운 걸음으로 룸으로 향했다.“할아버지…….”문을 밀고 들어온 윤이서는 텅 빈 룸을 보고 얼떨떨했다.그녀는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하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하지환을 보았다.그녀는 전화를 끊고 쏜살같이 달려가 긴장한 듯 하지환의 옷을 잡고 물었다.“괜찮아요?”하지환은 어리둥절했
윤이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하경철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그 어떤 감정도 없다.“그래, 알았어. 나중에 얘기해. 나 대리 불러야 해.”이서는 전화를 끊고 대리운전 기사를 불렀다.다행히 아직 시내를 벗어나지 않아, 대리기사가 바로 출발했다.이서가 북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오후 5시가 넘는 시간이었다.붉게 물들어 가는 서쪽 하늘, 석양이 산꼭대기에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만물이 고요하고 아름다웠다.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평온하지 않았다.집에 돌아와 신발 선반 위에 놓인 남성 슬리퍼를 보니 더욱 심란해졌다.그녀는 아예 신발을 신발장에 넣어버렸다.앉자마자 주경모 집사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아저씨, 무슨 일이세요?”“아가씨, 북성에 돌아오셨나요?”“네, 방금 도착했어요.”“어르신께서 병원에 잠깐 들르라고 합니다.”이서는 방금 임하나가 했던 말이 떠올라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할아버지 괜찮으세요?”“어르신이 아닙니다.”주경모는 그녀가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알아차린 듯 굳이 숨기지 않았다.“도련님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지금 병원에 있습니다.”가기 싫었지만, 하경철의 체면을 봐서 가겠다고 승낙했다.병원에 도착하니, 입원병동 앞에 고급세단이 줄지어 서 있었다.윤이서는 곧 정문에 도착했다.정문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은 윤이서를 보자 막아 서지도 않고, 그녀가 들어가도록 내버려 두었다.이서는 자기집 드나들 듯 쉽게 하은철의 병실을 찾아냈다.‘참, 세상도 요지경이다. 지난번에는 그녀가 하마터면 여기서 죽을 뻔했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그녀가 하은철을 병문안 왔다.’하은철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분쇄성 골절로, 한쪽 다리를 통깁스하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이서를 보자 하은철은 심기가 불편한 듯 콧방귀를 뀌었다.“할아버지.”이서는 얌전하게 하경철 앞으로 다가갔다.이서의 얼굴을 보자 하경철 얼굴에 근심이 사라지고 환하게 웃었다.“이서야, 널 여기까지 불러서 미안타.”“할아버지, 이게…… 뭔 일이래요?”하경철은 못마땅하게
윤이서는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보았다.“왜? 용건은?”“할아버지가 날 돌봐 주라고 했잖아.”하은철은 긴장한 표정으로 윤이서를 쳐다보았다.“설마 고새 마음이 바뀐 건 아니겠지?”윤이서는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 문을 나서서 경호원에게 주방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경호원은 이서를 주방으로 안내했다.주방에는 각양각색의 채소와 육류, 생선 등이 가득 쌓여 있었다. 모두 깨끗이 손질해 두어서 조리하기만 하면 됐다.이전에는 하루 삼시 세끼를 다 이서가 챙겼기에 당연히 하은철의 입맛에 대해 똑똑히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서는 굳이 하은철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자기 입맛에 맞는 음식을 할 예정이었다.30분 뒤, 경호원이 요리 두 접시를 내왔다.하나는 김치찜, 다른 하나도 김치찜이었다.하은철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그리고?”“없는데…….”이서는 김치찜을 테이블 위에 놓고, 혼자 소파에 앉아 느릿느릿 먹기 시작했다.점심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실은 지금도 별로 입맛은 없었다. 그래서 가볍게 김치찜을 2인분 만들었던 것이다.하은철은 화가 나서 젓가락을 내던지며 말했다.“나 환자야, 이런 김치 쪼가리 먹으라고?!”예전의 이서는 이렇지 않았다.윤이서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중얼거렸다.“먹든가 말든가…….”“…….”하지환 거주 아파트.이상언은 단정하게 앉아 필사적으로 긴장한 모습을 연출하려고 했지만, 이 노력은 0.1초를 유지하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하하하하하, 네가 윤이서한테 ‘섹파’라고 얘기했다고? 하하하…….”하지환의 얼굴이 어둡다 못해 탁해 보였다.웃음 코드가 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눈빛이었다.‘계약 규정에 따르면, 그들은 서로를 사랑할 수 없다.’‘그렇다면, 섹파 관계로 둘 사이를 정의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지 않은가?’‘육체적으로 연결된 사이라면, 한 장의 종이 쪼가리로 연결된 계약관계보다 훨씬 나을 거 같은데?’하은철의 베프인 이상언은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너무 잘 알기에 가
하지환은 핸드폰을 들고 번호를 눌렀다.“블루문(Blue Moon) 보내주세요.”이상언은 냉기를 한 모금 들이켰다.‘블루문,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다이아몬드 반지.’하경수는 힘든 시간을 꿋꿋하게 옆에서 지켜주고 함께해 준 아내에게 감사를 표하고자 60억 원의 거금을 들여 이 다이아몬드반지를 샀었다. 아내가 사망하기 전 다이아몬드반지를 하경수에게 주면서 훗날 며느리에게 전해주라고 유언을 남겼었다.‘하지환, 이 녀석 설마…….’수화기 너머의 하경수도 감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알았어, 곧 전용기 띄워 보낼게!]……병원.하은철은 투덜거리며 김치찜을 다 먹었다.이서는 경호원들과 같이 그릇이랑 뒷정리를 마치고, 다시 일어섰다.하은철은 재빨리 물었다.“너 또 어디 가게?”“집에 가야지.”“그런데 할아버지가 날 돌보라고 했잖아.”“할아버지는 단지 내게 너의 삼시 세끼를 챙기라고 하셨을 뿐이야. 내일부터는 도시락 싸다 줄게.”서운한 마음이 순식간에 좋아졌다.이서가 틀림없이 자기에게 맛있는 밥을 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집에 돌아온 이서는 피곤한 나머지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마음은 피곤했지만, 머리는 더없이 맑았다.머릿속은 하지환이 낮에 얘기한 ‘섹파’단어로 가득했다.그녀는 귀를 막고 침대에서 엎치락뒤치락했지만, 잠들지 않았다.이서는 아예 일어나 디자인 콘테스트에 출품한 작품을 완성하기로 마음먹었다.화장품 패키지 디자인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서는 경험에 비춰, 요 며칠간 수정과 보정을 더해가며 작업을 해왔다. 거의 다 완성되어가는 중이었다.마감일이 아직 일주일 남았는데, 금요일 전에 충분히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이서는 수정을 마친 시안을 컴퓨터에 저장하고, 의자에서 일어서서 기지개를 폈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벌써 5시가 넘었다.마침 아침밥을 하면 될 시간이었다.하은철에게 아침밥을 챙겨줘야 한다는 생각에 윤이서는 짜증이 났다.하지만 하경철의 부탁이라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막 두 걸음 걷자마자 메스꺼움이 치밀어 오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