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목소리의 등장에 모두 웃음을 멈추고 정지화면을 연출했다.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하경철이 경호원에게 둘러싸여 병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멍해졌다.“어르신,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민예지는 얼른 앞으로 나가 하경철을 부축하려고 했다.하경철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바로 이서 앞으로 다가갔다.“이서야, 발을 접질려서 입원까지 했다고 들었다. 이런 일이 있으면 이 할애비한테 알려야지…….”이서는 감동한 나머지 눈시울이 붉어졌다.“할아버지, 저 괜찮아요. 곧 퇴원해요.”하경철은 고개를 숙이고 이서의 발목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정말 괜찮아?”“그럼요!”이서는 제자리에서 두어 걸음 걸었다.“사실 입원할 필요도 없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괜한 걱정을…….”말하면서 그녀는 얼굴이 발그스름해졌다.이서의 모습을 지켜본 하경철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그런 거였어? 이 할애비 깜짝 놀랐자녀.”그러고는 곧 몸을 돌려 민예지 등 일행을 바라보았다.“너희들, 여기서 웬 소란이야? 저 멀리까지 시끄럽더라…….”민예지는 입술을 깨물고 울며 겨자 먹기로 말했다.“어르신, 다름이 아니라 어르신 생신 때 이서가 선물한 그 도자기…… 글쎄, 그게 이서 물건이 아닌 둘째 삼촌 거를, 자기 거 인양 선물로 드렸다지 뭐예요…….”방금 이서 앞에서의 자상함이 완전히 사라지고, 눈썹을 찌푸린 하경철의 안색은 어둡다 못해 무서웠다.“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초조해진 민예지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할아버지, 남의 물건으로 생색내는 거, 이런 뻔뻔한 사기꾼을 까발려야 다른 사람한테 사기 못 치죠.”하경철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그는 뒷짐을 지고 이서의 부축을 받아 소파에 앉았다.그러고는 지팡이를 바닥에 ‘탁’치며 큰 소리로 호통쳤다.“이는 은철이 둘째 삼촌, 내 조카의 뜻이다. 내 생일날 네가 이서를 서슬 퍼렇게 몰아붙이니 보다 못한 내 조카가 절충 방안을 생각해 낸 게다. 근데 넌 오늘도 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이에 윤이서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둘째 삼촌이란 분은 정말 결혼하셨어요?”하경철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 녀석이 귀국하자마자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깜짝 결혼을 해버렸지 뭐야? 지금 보니 현명한 결정이었네.”‘깜짝 결혼?’‘둘째 삼촌도 깜짝 결혼?’“참…….”하경철이 불쑥 질문을 해왔다. “남편한테 식사 얘기해봤나?”화제가 갑자기 지환으로 바뀌자, 윤이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기왕 이렇게 된 거, 천해 호텔에서 식사 자리 마련해 놓을게.”“할아버지, 제가 정해서 말씀드릴게요. 요 며칠 은철 씨가 그 사람을 찾아다닌다고 혈안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말인데, 은철 씨한테 저희 식사…… 비밀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어?”하경철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은철이가 네 남편을 왜 찾아다녀?”윤이서는 입술을 오므렸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할아버지, 부탁드려요.”하경철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좋아, 알겠다. 입 꾹 다물고 있을 거구먼. 하지만, 이서야, 한 번 지나친 인연, 억지로 이어가라고는 강요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런데 말이다, 때로는 익숙한 게 최고일 때도 있단다.”윤이서는 뒷목을 꾹꾹 누르며 하경철의 의중이 무엇인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네.”하경철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윤이서를 바라보았다.어쨌든 하경철은 이서가 하씨 집안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골드리버파크 아파트.바 옆에 기대어 있던 이상언은 지환의 이마에 난 상처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잠깐 망설이다가 지환이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는 틈을 타서 일부러 음료수 한 병을 던져주었다.지환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병을 잡았다.이상언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역시 반사신경은 죽여 주는군. 이 이마에 있는 영광의 상처는 윤이서 씨 작품인가?” 지환은 음료수 뚜껑을 따서 한 모금 마셨다. 이상언의 말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의 이런 성질머리에 일
하지환이 하씨 집안의 하프 마운틴 별장에 도착했을 때, 하은철은 하경철과 이야기를 마치고 서재에서 나오는 길이었다.보아하니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삼촌 오셨어요?”하지환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할아버지가 뭔 일로 부르셨어?”하은철은 별로 탐탁지 않은 듯 얘기했다.“저더러 윤이서 남편을 그만 찾으라네요.”하지환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하은철의 다음 얘기를 기다렸다.“그러면, 내가 이서의 마음을 되돌리는데 차질이 생긴단 말이에요.”“…….”“큰 집 도련님, 어르신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사 주경모가 때마침 나타났다.하지환은 가볍게 ‘응’하고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얼굴에는 그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서재에 들어서서 의자에 앉아 있는 하경철에게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작은 아빠.”하경철이 웃으며 말했다.“왔어? 자, 앉아.”하지환은 별 내색없이 하경철 맞은편에 앉았다.“모레 이서 남편을 만날 예정이다.”하경철은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너희 쪽에 혹시 그 사람에 대한 정보 같은 게 있나?”하지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어흠, 너도 못 찾아낸다면, 그 사람 정말 대단한 사람인데…….” 하경철은 하지환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지환아, 너 혹시 모레 시간 되니?”하지환은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났다.“작은 아빠는 제가 그 자리에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하경철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그래, 너도 알아내지 못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은 아닌가 보다. 외국인일 가능성이 높아. 넌 외국에서 오래 살았으니, 어쩌면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네.”하지환은 입꼬리를 보기 좋게 올리며 웃음을 지었다.“그럴 수도요. 하지만 그날 정말 시간을 내기 힘들 거 같아요. 작은 아빠, 죄송해요. 도움을 못 드려서…….” 하경철도 굳이 강요하지 않았다.“그럼, 내가 만나보고 와서, 다시 너랑 상의하마.”“네. 그러시죠.”……이틀 뒤.불필요한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주경모는 즉시 호텔 직원에게 다기와 차를 준비하라고 했다.이서는 이 기회를 틈타 하지환에게 문자를 보냈다.[할아버지는 이미 도착하셨어요. 오시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하지환은 답장하지 않았다.호텔 직원이 다기 세트를 가져왔다.이서는 부득이하게 먼저 마음을 다잡고 온 정신을 집중하여 하경철에게 드릴 차를 끓이고자 준비했다.다도에도 순서와 예절이 있으니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되었다.직원이 가져온 것은 보이숙차였다.자사 다관에 찻잎을 넣고 끓는 물로 우리자, 찻잎이 동동 떠오르면서 차 향기가 룸 안에 가득 퍼졌다.이서는 재빨리 찻물을 퇴수기에 따라 버렸다.이렇게 두 번을 반복하고 세 번째가 되어서야 찻잔에 차를 부었다.검붉은 차탕에 차 향이 모락모락 피어났다.“할아버지, 어서 드세요.”하경철은 빙그레 웃으며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역시 이서가 우려낸 차야, 맛있어.”이서는 겸손했다.“과찬이세요. 할아버지는 늘 저를 놀리시는 걸 좋아하신다니까요.”할아버지는 손을 흔들었다.“영감쟁이가 할 일 없어서 널 놀리겠냐? 얘야, 할애비는 널 잘 알고 있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지. 이 다도만 봐도 그래. 네가 웬만한 다도가들보다 훨 낫다.”“할아버지…….”그러고는 한숨을 쉬었다.“아쉽게도…… 은철이 녀석이 복이 없어서…….”이서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하경철은 웃으며 하은철 얘기는 그만했다. 그의 시선은 이서의 손목의 착용한 팔찌에 가 있었다.“남편이 준 것이냐?”이서가 차를 우려낼 때부터 눈여겨봤다.윤이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이 팔찌는 오늘 자리를 위해 특별히 찬 것이다.하지환이 그녀에게 잘해 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하경철에게 점수를 좀 더 따게 해주려고.하경철은 두어 번 훑어보고는 아무 말없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방안은 침묵으로 조용했다. 하경철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이서는 하지환이 늦어서 화가 난 줄 알았다.그녀는 곧 핑계를
이서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하지환에게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서류는요?”하지환은 눈앞의 백설같이 하얗고 기다랗게 쭉 뻗은 이서의 손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슬쩍 쓰다듬었다.“차 안에 있어요.”“네.” 윤이서는 손이 찌릿찌릿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지만 굳이 손을 빼지 않고 웃으면서 물었다.“서류 받으러 오는 분은 어떻게 생겼어요?”“코 하나, 눈 두 개, 입 하나.”이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장난 그만 해요, 혹시라도 서류 전달이 잘못되면 안 되잖아요.”“걱정마요. 당신을 잘 찾아올 거예요. 그쪽에서 당신을 알아볼 테니까.”하지환은 이서에게 차 키를 건넷다. “먼저 올라갈게요. 서류 전달하고, 이서 씨도 올라와요.”“네.”이서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하지환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차에 타서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엘리베이터가 3층에서 멈추자, 하지환은 걸음을 내디디며 룸 방향으로 걸어갔다.지금껏 이렇게 긴장해 본 적은 없었다.그는 자조하며 웃었다.과거 수조, 수십조에 이르는 거래를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그가, 오늘은 왠지 조심스럽고 긴장되었다.‘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룸 앞까지 간 하지환은 문을 두드렸다.문이 열렸다.주경모는 밖에 서 있는 사람이 하지환인 것을 확인하고 한참 동안 멍해 서 있었다.“누구냐?”뒤에서 하경철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꿈에서 깨어난 듯 문 입구에서 자리를 비켜주었다.“큰 집 도련님이요.”하지환은 룸에 들어갔다.하지환을 보고 놀란 건 하경철도 마찬가지였다.“네가 어쩐 일이냐? 오늘 일이 있어서 못 온다고 하지 않았나? 왔네?”하지환의 표정이 복잡했다.“확실히 일이 있긴 하죠.”“그럼 어떻게 온 거야?”하지환은 옷매무시를 바로잡고는 예쁜 손목을 드러냈다.“왜냐하면, 작은 아빠께 말씀드려야 할 일이 있어서요…….”“설마 이서 남편 정보를 찾은 거야?”하경철이 흥분해서 말했다.하지환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문밖에서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덩달아 민씨 집안도 웃음거리가 되었다.그가 오늘 온 것은 바로 민씨 집안의 체면을 되찾기 위해서였다.하경철은 불쾌해하며 눈살을 찌푸렸다.“내가 맞선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긴 하지만, 지환이 이미 결혼한 걸 어쩌겠나? 그리고, 내가 맞선을 얘기한 거지, 둘의 혼약을 약속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결혼 얘기까지 나왔는지,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네.”민호일은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잠자코 당할 수만은 없었다.“그래도 보상은 해주셔야죠.”민호일은 하지환을 힐끗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큰 집 도련님은 이미 결혼했다고는 하나, 현재 주요 사업이 국내에 있으니…… 남자는 혼자 있으면 외롭기 쉽습니다. 차라리 한국에서…… 새 장가 한 번 더 드는 건 어떨까요?”말하면서 민예지를 하지환 곁으로 밀어붙였다.민예지는 수줍어하며 고개를 숙이고 하지환의 품속에 쓰러지려고 했다.하지환은 가볍게 옆으로 피했다.헛발 디딘 민예지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가까스로 똑바로 서자, 하지환의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우리 집사람이 원치 않아서, 저는 새 장가 못 갑니다.”‘집사람’이라는 세 글자는 하지환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자상함과 온화함이 묻어났다.민예지는 갑자기 일면식도 없는 하지환의 아내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질투를 느꼈다.그녀는 어색한 억지웃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삼촌을 모실 수 있는 건 제 영광입니다. 혼인 신고 안 해도 상관없어요. 당신 곁에서 말 잘 듣고 있을게요.”하경철의 눈살이 더욱 찌푸려졌다.하지환은 오히려 흥이 나서 입꼬리를 올렸다.“정말?”민예지는 눈동자가 밝아지자 황급히 말을 이어갔다.“네, 시키는 일이면 뭐든지 할게요.”“그럼, 바닥에 엎드려 개 짖는 소리나 두 번 해보던가.”무심코 뱉은 말이었다. 눈가에 있는 점이 불빛 아래에 사악한 기운을 더해주었다.민호일과 민예지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도련님……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이건 너무하네요.” 민호일은 하마터면 화가 나서 돌아가
방금 하지환에서 된통 당한 민예지는 이서를 보자 분풀이할 대상을 찾은 듯 두말없이 다짜고짜 이서의 팔을 잡고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 설마 하은철 둘째 삼촌한테 꼬리 치려는 거니?!”이서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민예지에게 잡힌 팔을 힐끗 쳐다보고 말했다.“손 놔!”미쳐 날뛰는 민예지한테 이서의 소리가 들리기 만무했다.‘내가 못 가지는 걸 네가 뭔데 가져?’그녀가 손을 놓지 않자, 이서는 민예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자 손톱이 민예지의 살을 파고들었다.강한 통증을 느낀 민예지는 이서를 밀어냈다. 손목에 생긴 손톱자국을 보고는 또 달려들었다.이서는 재빨리 피하고, 고개를 들어 CCTV를 한 번 훑어보고는 말했다.“민예지, 이미지 챙기는 게 좋을 걸?”민호일도 이곳이 그들의 바운더리가 아니라는 것을 의식했는지 급급히 민예지를 막아섰다. CCTV가 폭로되어 민예지의 악행이 만천하에 알려지면 자기들에게 득이 되는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예지야.”민호일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이런 뜨내기들에게 손 더럽히지 마. 그건 네 신분을 깎아 먹는 거나 마찬가지다. 우리 가자.”민예지는 내키지 않은 듯 얘기했다.“그런데 아빠, 쟤가 뭔데 둘째 삼촌이랑 같이 밥 먹냐고?”이미 엘리베이터에 들어온 이서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하은철 둘째 삼촌도 오셨다고?’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혔다. 치덕대는 민씨 부녀가 눈앞에서 철저히 사라지자, 이서는 그제야 기분이 다소 홀가분 해지는 것 같았다.하은철의 둘째 삼촌도 계신다고, 심지어 살짝 설레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하였다.곧 3층에 도착했다.이서는 가벼운 걸음으로 룸으로 향했다.“할아버지…….”문을 밀고 들어온 윤이서는 텅 빈 룸을 보고 얼떨떨했다.그녀는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하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하지환을 보았다.그녀는 전화를 끊고 쏜살같이 달려가 긴장한 듯 하지환의 옷을 잡고 물었다.“괜찮아요?”하지환은 어리둥절했
윤이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하경철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그 어떤 감정도 없다.“그래, 알았어. 나중에 얘기해. 나 대리 불러야 해.”이서는 전화를 끊고 대리운전 기사를 불렀다.다행히 아직 시내를 벗어나지 않아, 대리기사가 바로 출발했다.이서가 북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오후 5시가 넘는 시간이었다.붉게 물들어 가는 서쪽 하늘, 석양이 산꼭대기에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만물이 고요하고 아름다웠다.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평온하지 않았다.집에 돌아와 신발 선반 위에 놓인 남성 슬리퍼를 보니 더욱 심란해졌다.그녀는 아예 신발을 신발장에 넣어버렸다.앉자마자 주경모 집사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아저씨, 무슨 일이세요?”“아가씨, 북성에 돌아오셨나요?”“네, 방금 도착했어요.”“어르신께서 병원에 잠깐 들르라고 합니다.”이서는 방금 임하나가 했던 말이 떠올라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할아버지 괜찮으세요?”“어르신이 아닙니다.”주경모는 그녀가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알아차린 듯 굳이 숨기지 않았다.“도련님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지금 병원에 있습니다.”가기 싫었지만, 하경철의 체면을 봐서 가겠다고 승낙했다.병원에 도착하니, 입원병동 앞에 고급세단이 줄지어 서 있었다.윤이서는 곧 정문에 도착했다.정문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은 윤이서를 보자 막아 서지도 않고, 그녀가 들어가도록 내버려 두었다.이서는 자기집 드나들 듯 쉽게 하은철의 병실을 찾아냈다.‘참, 세상도 요지경이다. 지난번에는 그녀가 하마터면 여기서 죽을 뻔했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그녀가 하은철을 병문안 왔다.’하은철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분쇄성 골절로, 한쪽 다리를 통깁스하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이서를 보자 하은철은 심기가 불편한 듯 콧방귀를 뀌었다.“할아버지.”이서는 얌전하게 하경철 앞으로 다가갔다.이서의 얼굴을 보자 하경철 얼굴에 근심이 사라지고 환하게 웃었다.“이서야, 널 여기까지 불러서 미안타.”“할아버지, 이게…… 뭔 일이래요?”하경철은 못마땅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