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목소리의 등장에 모두 웃음을 멈추고 정지화면을 연출했다.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하경철이 경호원에게 둘러싸여 병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멍해졌다.“어르신,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민예지는 얼른 앞으로 나가 하경철을 부축하려고 했다.하경철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바로 이서 앞으로 다가갔다.“이서야, 발을 접질려서 입원까지 했다고 들었다. 이런 일이 있으면 이 할애비한테 알려야지…….”이서는 감동한 나머지 눈시울이 붉어졌다.“할아버지, 저 괜찮아요. 곧 퇴원해요.”하경철은 고개를 숙이고 이서의 발목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정말 괜찮아?”“그럼요!”이서는 제자리에서 두어 걸음 걸었다.“사실 입원할 필요도 없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괜한 걱정을…….”말하면서 그녀는 얼굴이 발그스름해졌다.이서의 모습을 지켜본 하경철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그런 거였어? 이 할애비 깜짝 놀랐자녀.”그러고는 곧 몸을 돌려 민예지 등 일행을 바라보았다.“너희들, 여기서 웬 소란이야? 저 멀리까지 시끄럽더라…….”민예지는 입술을 깨물고 울며 겨자 먹기로 말했다.“어르신, 다름이 아니라 어르신 생신 때 이서가 선물한 그 도자기…… 글쎄, 그게 이서 물건이 아닌 둘째 삼촌 거를, 자기 거 인양 선물로 드렸다지 뭐예요…….”방금 이서 앞에서의 자상함이 완전히 사라지고, 눈썹을 찌푸린 하경철의 안색은 어둡다 못해 무서웠다.“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초조해진 민예지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할아버지, 남의 물건으로 생색내는 거, 이런 뻔뻔한 사기꾼을 까발려야 다른 사람한테 사기 못 치죠.”하경철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그는 뒷짐을 지고 이서의 부축을 받아 소파에 앉았다.그러고는 지팡이를 바닥에 ‘탁’치며 큰 소리로 호통쳤다.“이는 은철이 둘째 삼촌, 내 조카의 뜻이다. 내 생일날 네가 이서를 서슬 퍼렇게 몰아붙이니 보다 못한 내 조카가 절충 방안을 생각해 낸 게다. 근데 넌 오늘도 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이에 윤이서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둘째 삼촌이란 분은 정말 결혼하셨어요?”하경철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 녀석이 귀국하자마자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깜짝 결혼을 해버렸지 뭐야? 지금 보니 현명한 결정이었네.”‘깜짝 결혼?’‘둘째 삼촌도 깜짝 결혼?’“참…….”하경철이 불쑥 질문을 해왔다. “남편한테 식사 얘기해봤나?”화제가 갑자기 지환으로 바뀌자, 윤이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기왕 이렇게 된 거, 천해 호텔에서 식사 자리 마련해 놓을게.”“할아버지, 제가 정해서 말씀드릴게요. 요 며칠 은철 씨가 그 사람을 찾아다닌다고 혈안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말인데, 은철 씨한테 저희 식사…… 비밀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어?”하경철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은철이가 네 남편을 왜 찾아다녀?”윤이서는 입술을 오므렸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할아버지, 부탁드려요.”하경철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좋아, 알겠다. 입 꾹 다물고 있을 거구먼. 하지만, 이서야, 한 번 지나친 인연, 억지로 이어가라고는 강요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런데 말이다, 때로는 익숙한 게 최고일 때도 있단다.”윤이서는 뒷목을 꾹꾹 누르며 하경철의 의중이 무엇인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네.”하경철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윤이서를 바라보았다.어쨌든 하경철은 이서가 하씨 집안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골드리버파크 아파트.바 옆에 기대어 있던 이상언은 지환의 이마에 난 상처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잠깐 망설이다가 지환이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는 틈을 타서 일부러 음료수 한 병을 던져주었다.지환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병을 잡았다.이상언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역시 반사신경은 죽여 주는군. 이 이마에 있는 영광의 상처는 윤이서 씨 작품인가?” 지환은 음료수 뚜껑을 따서 한 모금 마셨다. 이상언의 말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의 이런 성질머리에 일
하지환이 하씨 집안의 하프 마운틴 별장에 도착했을 때, 하은철은 하경철과 이야기를 마치고 서재에서 나오는 길이었다.보아하니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삼촌 오셨어요?”하지환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할아버지가 뭔 일로 부르셨어?”하은철은 별로 탐탁지 않은 듯 얘기했다.“저더러 윤이서 남편을 그만 찾으라네요.”하지환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하은철의 다음 얘기를 기다렸다.“그러면, 내가 이서의 마음을 되돌리는데 차질이 생긴단 말이에요.”“…….”“큰 집 도련님, 어르신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사 주경모가 때마침 나타났다.하지환은 가볍게 ‘응’하고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얼굴에는 그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서재에 들어서서 의자에 앉아 있는 하경철에게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작은 아빠.”하경철이 웃으며 말했다.“왔어? 자, 앉아.”하지환은 별 내색없이 하경철 맞은편에 앉았다.“모레 이서 남편을 만날 예정이다.”하경철은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너희 쪽에 혹시 그 사람에 대한 정보 같은 게 있나?”하지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어흠, 너도 못 찾아낸다면, 그 사람 정말 대단한 사람인데…….” 하경철은 하지환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지환아, 너 혹시 모레 시간 되니?”하지환은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났다.“작은 아빠는 제가 그 자리에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하경철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그래, 너도 알아내지 못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은 아닌가 보다. 외국인일 가능성이 높아. 넌 외국에서 오래 살았으니, 어쩌면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네.”하지환은 입꼬리를 보기 좋게 올리며 웃음을 지었다.“그럴 수도요. 하지만 그날 정말 시간을 내기 힘들 거 같아요. 작은 아빠, 죄송해요. 도움을 못 드려서…….” 하경철도 굳이 강요하지 않았다.“그럼, 내가 만나보고 와서, 다시 너랑 상의하마.”“네. 그러시죠.”……이틀 뒤.불필요한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주경모는 즉시 호텔 직원에게 다기와 차를 준비하라고 했다.이서는 이 기회를 틈타 하지환에게 문자를 보냈다.[할아버지는 이미 도착하셨어요. 오시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하지환은 답장하지 않았다.호텔 직원이 다기 세트를 가져왔다.이서는 부득이하게 먼저 마음을 다잡고 온 정신을 집중하여 하경철에게 드릴 차를 끓이고자 준비했다.다도에도 순서와 예절이 있으니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되었다.직원이 가져온 것은 보이숙차였다.자사 다관에 찻잎을 넣고 끓는 물로 우리자, 찻잎이 동동 떠오르면서 차 향기가 룸 안에 가득 퍼졌다.이서는 재빨리 찻물을 퇴수기에 따라 버렸다.이렇게 두 번을 반복하고 세 번째가 되어서야 찻잔에 차를 부었다.검붉은 차탕에 차 향이 모락모락 피어났다.“할아버지, 어서 드세요.”하경철은 빙그레 웃으며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역시 이서가 우려낸 차야, 맛있어.”이서는 겸손했다.“과찬이세요. 할아버지는 늘 저를 놀리시는 걸 좋아하신다니까요.”할아버지는 손을 흔들었다.“영감쟁이가 할 일 없어서 널 놀리겠냐? 얘야, 할애비는 널 잘 알고 있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지. 이 다도만 봐도 그래. 네가 웬만한 다도가들보다 훨 낫다.”“할아버지…….”그러고는 한숨을 쉬었다.“아쉽게도…… 은철이 녀석이 복이 없어서…….”이서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하경철은 웃으며 하은철 얘기는 그만했다. 그의 시선은 이서의 손목의 착용한 팔찌에 가 있었다.“남편이 준 것이냐?”이서가 차를 우려낼 때부터 눈여겨봤다.윤이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이 팔찌는 오늘 자리를 위해 특별히 찬 것이다.하지환이 그녀에게 잘해 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하경철에게 점수를 좀 더 따게 해주려고.하경철은 두어 번 훑어보고는 아무 말없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방안은 침묵으로 조용했다. 하경철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이서는 하지환이 늦어서 화가 난 줄 알았다.그녀는 곧 핑계를
이서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하지환에게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서류는요?”하지환은 눈앞의 백설같이 하얗고 기다랗게 쭉 뻗은 이서의 손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슬쩍 쓰다듬었다.“차 안에 있어요.”“네.” 윤이서는 손이 찌릿찌릿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지만 굳이 손을 빼지 않고 웃으면서 물었다.“서류 받으러 오는 분은 어떻게 생겼어요?”“코 하나, 눈 두 개, 입 하나.”이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장난 그만 해요, 혹시라도 서류 전달이 잘못되면 안 되잖아요.”“걱정마요. 당신을 잘 찾아올 거예요. 그쪽에서 당신을 알아볼 테니까.”하지환은 이서에게 차 키를 건넷다. “먼저 올라갈게요. 서류 전달하고, 이서 씨도 올라와요.”“네.”이서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하지환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차에 타서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엘리베이터가 3층에서 멈추자, 하지환은 걸음을 내디디며 룸 방향으로 걸어갔다.지금껏 이렇게 긴장해 본 적은 없었다.그는 자조하며 웃었다.과거 수조, 수십조에 이르는 거래를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그가, 오늘은 왠지 조심스럽고 긴장되었다.‘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룸 앞까지 간 하지환은 문을 두드렸다.문이 열렸다.주경모는 밖에 서 있는 사람이 하지환인 것을 확인하고 한참 동안 멍해 서 있었다.“누구냐?”뒤에서 하경철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꿈에서 깨어난 듯 문 입구에서 자리를 비켜주었다.“큰 집 도련님이요.”하지환은 룸에 들어갔다.하지환을 보고 놀란 건 하경철도 마찬가지였다.“네가 어쩐 일이냐? 오늘 일이 있어서 못 온다고 하지 않았나? 왔네?”하지환의 표정이 복잡했다.“확실히 일이 있긴 하죠.”“그럼 어떻게 온 거야?”하지환은 옷매무시를 바로잡고는 예쁜 손목을 드러냈다.“왜냐하면, 작은 아빠께 말씀드려야 할 일이 있어서요…….”“설마 이서 남편 정보를 찾은 거야?”하경철이 흥분해서 말했다.하지환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문밖에서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덩달아 민씨 집안도 웃음거리가 되었다.그가 오늘 온 것은 바로 민씨 집안의 체면을 되찾기 위해서였다.하경철은 불쾌해하며 눈살을 찌푸렸다.“내가 맞선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긴 하지만, 지환이 이미 결혼한 걸 어쩌겠나? 그리고, 내가 맞선을 얘기한 거지, 둘의 혼약을 약속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결혼 얘기까지 나왔는지,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네.”민호일은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잠자코 당할 수만은 없었다.“그래도 보상은 해주셔야죠.”민호일은 하지환을 힐끗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큰 집 도련님은 이미 결혼했다고는 하나, 현재 주요 사업이 국내에 있으니…… 남자는 혼자 있으면 외롭기 쉽습니다. 차라리 한국에서…… 새 장가 한 번 더 드는 건 어떨까요?”말하면서 민예지를 하지환 곁으로 밀어붙였다.민예지는 수줍어하며 고개를 숙이고 하지환의 품속에 쓰러지려고 했다.하지환은 가볍게 옆으로 피했다.헛발 디딘 민예지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가까스로 똑바로 서자, 하지환의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우리 집사람이 원치 않아서, 저는 새 장가 못 갑니다.”‘집사람’이라는 세 글자는 하지환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자상함과 온화함이 묻어났다.민예지는 갑자기 일면식도 없는 하지환의 아내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질투를 느꼈다.그녀는 어색한 억지웃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삼촌을 모실 수 있는 건 제 영광입니다. 혼인 신고 안 해도 상관없어요. 당신 곁에서 말 잘 듣고 있을게요.”하경철의 눈살이 더욱 찌푸려졌다.하지환은 오히려 흥이 나서 입꼬리를 올렸다.“정말?”민예지는 눈동자가 밝아지자 황급히 말을 이어갔다.“네, 시키는 일이면 뭐든지 할게요.”“그럼, 바닥에 엎드려 개 짖는 소리나 두 번 해보던가.”무심코 뱉은 말이었다. 눈가에 있는 점이 불빛 아래에 사악한 기운을 더해주었다.민호일과 민예지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도련님……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이건 너무하네요.” 민호일은 하마터면 화가 나서 돌아가
방금 하지환에서 된통 당한 민예지는 이서를 보자 분풀이할 대상을 찾은 듯 두말없이 다짜고짜 이서의 팔을 잡고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 설마 하은철 둘째 삼촌한테 꼬리 치려는 거니?!”이서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민예지에게 잡힌 팔을 힐끗 쳐다보고 말했다.“손 놔!”미쳐 날뛰는 민예지한테 이서의 소리가 들리기 만무했다.‘내가 못 가지는 걸 네가 뭔데 가져?’그녀가 손을 놓지 않자, 이서는 민예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자 손톱이 민예지의 살을 파고들었다.강한 통증을 느낀 민예지는 이서를 밀어냈다. 손목에 생긴 손톱자국을 보고는 또 달려들었다.이서는 재빨리 피하고, 고개를 들어 CCTV를 한 번 훑어보고는 말했다.“민예지, 이미지 챙기는 게 좋을 걸?”민호일도 이곳이 그들의 바운더리가 아니라는 것을 의식했는지 급급히 민예지를 막아섰다. CCTV가 폭로되어 민예지의 악행이 만천하에 알려지면 자기들에게 득이 되는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예지야.”민호일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이런 뜨내기들에게 손 더럽히지 마. 그건 네 신분을 깎아 먹는 거나 마찬가지다. 우리 가자.”민예지는 내키지 않은 듯 얘기했다.“그런데 아빠, 쟤가 뭔데 둘째 삼촌이랑 같이 밥 먹냐고?”이미 엘리베이터에 들어온 이서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하은철 둘째 삼촌도 오셨다고?’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혔다. 치덕대는 민씨 부녀가 눈앞에서 철저히 사라지자, 이서는 그제야 기분이 다소 홀가분 해지는 것 같았다.하은철의 둘째 삼촌도 계신다고, 심지어 살짝 설레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하였다.곧 3층에 도착했다.이서는 가벼운 걸음으로 룸으로 향했다.“할아버지…….”문을 밀고 들어온 윤이서는 텅 빈 룸을 보고 얼떨떨했다.그녀는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하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하지환을 보았다.그녀는 전화를 끊고 쏜살같이 달려가 긴장한 듯 하지환의 옷을 잡고 물었다.“괜찮아요?”하지환은 어리둥절했
윤이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하경철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그 어떤 감정도 없다.“그래, 알았어. 나중에 얘기해. 나 대리 불러야 해.”이서는 전화를 끊고 대리운전 기사를 불렀다.다행히 아직 시내를 벗어나지 않아, 대리기사가 바로 출발했다.이서가 북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오후 5시가 넘는 시간이었다.붉게 물들어 가는 서쪽 하늘, 석양이 산꼭대기에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만물이 고요하고 아름다웠다.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평온하지 않았다.집에 돌아와 신발 선반 위에 놓인 남성 슬리퍼를 보니 더욱 심란해졌다.그녀는 아예 신발을 신발장에 넣어버렸다.앉자마자 주경모 집사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아저씨, 무슨 일이세요?”“아가씨, 북성에 돌아오셨나요?”“네, 방금 도착했어요.”“어르신께서 병원에 잠깐 들르라고 합니다.”이서는 방금 임하나가 했던 말이 떠올라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할아버지 괜찮으세요?”“어르신이 아닙니다.”주경모는 그녀가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알아차린 듯 굳이 숨기지 않았다.“도련님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지금 병원에 있습니다.”가기 싫었지만, 하경철의 체면을 봐서 가겠다고 승낙했다.병원에 도착하니, 입원병동 앞에 고급세단이 줄지어 서 있었다.윤이서는 곧 정문에 도착했다.정문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은 윤이서를 보자 막아 서지도 않고, 그녀가 들어가도록 내버려 두었다.이서는 자기집 드나들 듯 쉽게 하은철의 병실을 찾아냈다.‘참, 세상도 요지경이다. 지난번에는 그녀가 하마터면 여기서 죽을 뻔했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그녀가 하은철을 병문안 왔다.’하은철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분쇄성 골절로, 한쪽 다리를 통깁스하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이서를 보자 하은철은 심기가 불편한 듯 콧방귀를 뀌었다.“할아버지.”이서는 얌전하게 하경철 앞으로 다가갔다.이서의 얼굴을 보자 하경철 얼굴에 근심이 사라지고 환하게 웃었다.“이서야, 널 여기까지 불러서 미안타.”“할아버지, 이게…… 뭔 일이래요?”하경철은 못마땅하게
고이서는 두 사람이 단톡방에 보낸 메시지를 보고 꽤나 만족스러워하며 웃기 시작했다.하지만 자신이 아주 특별한 신분임을 잊지 않았고, 절대 외부인에게 자신이 원래의 ‘윤이서’라는 사실을 알리면 안 된다는 것을 되새겼다. ‘윤이서가 나와 엄마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다면, 분명히 의심할 거야.’고이서가 걱정을 털어놓자, 성지영이 무심히 말했다.[얘, 그렇게 우연히 만날 리가 없잖아. 이렇게 큰 도시에서 쇼핑하다가 윤이서를 만난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란다.]윤재하도 그런 우연이 일어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우리 딸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야. 곧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끝날 텐데,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서 골치 아픈 일을 만들 필요는 없잖아?][그래도 드레스가 사고 싶다면, 교외로 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군.][윤이서가 교외로 쇼핑가지는 않을 테니까.]성지영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교외에서 어떻게 그럴듯한 드레스를 살 수 있겠어요?] 고이서는 시내에서는 이서를 만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교외에서는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엄마, 교외에는 제대로 된 드레스가 없긴 하겠지만,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잖아요.][제가 윤씨 그룹의 대표가 되면, 시내의 드레스는 물론이고, 고급 럭셔리 브랜드의 드레스까지 전부 집으로 보내드릴게요, 네?]이 말은 성지영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어머, 우리 딸 말하는 것 좀 봐? 그래, 토요일에 시외에서 쇼핑하자꾸나.][네, 엄마.]고이서는 약속 시간을 정한 후에야 핸드폰을 내려놓고 업무에 집중했다. 한편, 최고층에 있던 이서는 전화하고 있었는데, 이는 소희가 걸어온 것이었다. [이서 언니, 긴급 상황이에요. 저 좀 도와주세요!]이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어젯밤에 부모님께 현태 오빠의 존재를 털어놓았잖아요.][그런데 오늘 아침에 아빠가 저를 서재로 부르셔서는 다음 주 월요일에 현태 오빠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셨어
“나는 과거에 살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요.”조용히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눈빛에서는 고통이 요동치고 있었고,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지환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울부짖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감정은 입술 끝에서 단 세 글자로 바뀌고 말았다.“알겠어.” 이서도 지환의 이런 모습에 마음이 괴로웠다.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마다 과거만 떠올릴 뿐, 그 누구도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그것은 그저 과거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그만 먹을래요.”이서는 황급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병실을 떠났다. 차에 오르자, 이서는 고통이 온몸으로 번지는 듯했다. ‘하지환 씨가 하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늘은 왜 우리한테 이런 장난을 친 걸까?’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차 안의 카펫을 바라보던 이서는 운전기사의 말을 듣고서야 회사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에서 내린 이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또 고이서를 마주쳤다.다시 고이서를 마주한 이서의 감정은 완전히 뒤바꾼 후였지만, 그러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고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고이서가 빙그레 웃으며 이서를 바라보았다.“윤 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젯밤에는 잘 주무셨나요?”“덕분에요.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를 마신 이후로 아주 잘 자고 있어요.” “참, 지난번에 꽃차가 부족하면 더 구해줄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큰 걸로 하나 더 구해주실 수 있을까요?”이서가 주동적으로 꽃차를 더 달라고 하자, 고이서의 눈동자에 기쁨이 번졌다.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서는 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윤씨 그룹에 들어온 거였구나.’‘재무팀 팀장을 다시 구해봐야겠어.’어쨌든 재무는 한 회사의 존망이 달린 것이지 않은가. “언제까지 구해드리면 될까요?”“어제저녁에 세어 보았는데, 아직 10포가 남았더라고요. 매일 저녁에 1포씩 먹는다고 가정하면, 10일분은 남은 셈이죠. 4일이나
“감사해요.”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구태우가 한 말을 곱씹자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날이 밝자마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알았어,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줄 여력이 없어.”‘미안해요, 소지태 씨.’이서는 평생 지태에게 대답을 줄 수 없을 것이었다.병실 문을 열자, 아침 식사를 들고 있는 이천이 보였다.“또 아침 식사를 가져오신 거예요?”‘역시 사모님이야!’놀란 이천은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뒤에서 몸을 일으킨 지환이 보였다.이서가 그를 마주하고도 표정이 구겨지지 않자, 이천이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사모님, 같이 드실래요?” “이 비서님, 말씀드렸잖아요.”“앞으로는 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시라고요.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떡해요?”이서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천은 곧장 지환의 안색을 살폈는데, 과연 이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환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지... 괜히 사모님께 식사하자고 해서 또 대표님의 기분을 나쁘게 했으니까!’ “그래도 아침은 같이 먹을게요.”이서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놀란 이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거든요.”이서가 싱긋 웃어 보였다. ‘식사하시겠다고?! 경사네, 경사야!’이천은 바삐 이서를 붙잡고 지환의 병실로 향하며 말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아니, 윤 대표님께서 같이 식사하시겠답니다!” “그래.”지환의 낯빛은 조금이나마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듯했지만, 여전히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서가 자리에 앉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천은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눈물이 눈 앞을 가렸다.‘이런 평화로운 모습이 얼마 만인 거지?’ “아, 더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이천이 음식을 내려놓고 말했다.“맛있게 드십시오. 부족하시면 더 사 오겠습니다.”이서는 멀어져가는 이천의 뒷모습을 보며
“이 꽃차를 장기간 이용할 경우, 중추신경이 손상돼서 심하면 치매를 일으킬 수 있어요.”“강력한 성분이 꽤 많이 들어 있더군요.”“음... 제 예상대로라면, 대략 보름 정도 사용하면 치매가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놀란 이서가 다시금 물었다.“그러니까, 제가 보름 동안 이 꽃차를 복용했다면, 치매에 걸렸을 거란 말씀이세요?”“네, 그래서 지인이 준 게 맞냐고 물었던 거예요.”의사가 설명서를 보고 말했다.“설명서에도 다른 나라 언어만 있잖습니까.”“그래서 그분도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에요.”“윤이서 씨, 이 꽃차를 복용하기 시작한 건 아니죠?”“그게...”이서는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고 팀장은 외국에서 자란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 나라의 언어를 모를 수 있겠어?’‘오히려 잘 알아서 이 꽃차를 사 온 걸 거야.’ 하지만 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고 팀장님이 왜... 나를 해치려 한 거지?’ ‘설마, 하도훈이 보낸 사람인 건가?’“윤이서 씨?”의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설마 벌써 며칠간 드신 겁니까?” 별안간 정신을 차린 이서가 말했다.“아니요, 딱 한 번 마셨어요.” 의사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딱 한 번만 마셨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이서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내 건강보다도 회사를 걱정할 때야.’‘고이서, 당신... 대체 누구야?!’의문을 품은 이서는 병실로 돌아간 후, 하늘에게 고이서의 모든 자료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하늘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으나, 곧장 고이서에 관한 자료를 보내왔다.이서는 한 장씩 뒤적거렸으나, 결국 고이서의 이력서에서는 어떠한 문제점도 찾지 못했다.‘지금 당장 고이서를 해고한다고 해도, 그 여자가 대체 누구인지, 왜 나를 찾아온 건지는 알 수 없을 거야.’ 이서는 별안간 지태의 곁에 있는 구태우를 떠올렸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구태우에게 연락을 취했고, 그는 두말없이 승낙했다.
병원에 도착한 이서는 우물쭈물하다가 차 안에 있는 지환을 향해 말했다.“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그 사람을 처리해 줘서?”“네.”“참,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어요? 왜 날 죽이려고 한 거죠?”“설마... 하도훈의 사람이었던 거예요?” 지환은 이서의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잠시 후에야 말했다.“하은철의 죽음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만, 하도훈은 우리 두 사람이 비밀을 누설했다고 생각하고, 우리를 죽여서 분풀이하려던 거야.” 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우리요? 누가 하지환 씨에게도 해를 가한 거예요?”“응.” 이 대답이 나오는 순간, 이서의 심장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괜찮아요?”그녀가 간신히 입을 뗐다.지환은 그런 이서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날 걱정하는 거야?” 이서는 붉게 물든 얼굴로 화를 냈다.“우... 우리는 지금 협력 관계예요! 하지환 씨한테 사고가 나면, 내가 어떻게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지환의 웃음기는 더욱 짙어졌다.“난 괜찮아. 어둠의 호리병이 있으니, 하도훈조차도 나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거거든.” “하지만...”이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어둠의 호리병은 한 사람이잖아요. 만약 하도훈이 동시에 두 사람을 보내면 어떡해요?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은 위험에 빠질 거라고요.” “걱정하지 마. 우리 곁에 고수가 있다는 걸 안 이상, 하도훈은 당분간 우리를 해치려 하지 않을 거야. 게다가 하도훈은 지금 여자를 찾아 하씨 가문의 후계자를 만드느라 바쁠걸?”이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차 안으로 돌아갔다.“하도훈이 찾는 여자한테 손을 쓸 수는 없을까요?”“무슨 뜻이야?” “하도훈은 대를 잇는 것에 집중하느라 상대의 출신은 전혀 개의치 않을 거예요. 오히려 그 사람이 더욱 중요시하는 건 상대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가 하는 거겠죠.”“만약 우리가 먼저 하도훈의 조건에 맞는 여자를 골라낸다면, 그 여자를 하도훈의 곁에 두고,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이지숙이 꽤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어머, 내 정신 좀 봐.”“나는 윤 대표더러 소희를 설득해 달라는 의미였어. 오해하지는 마.” 이서는 이미 고개를 돌려 심근영과 대화를 이어가던 지환을 흘겨보다가 이지숙을 향해 말했다.“알맞은 상대를 찾는 일은 제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이잖아요.” 이지숙이 말했다.“그거야 그렇지만... 윤 대표는 우리 소희의 친구잖아. 그러면 소희와 가치관이 잘 맞는다는 뜻이지 않겠어? 어쩌면 이 중에 두 사람 마음에 다 드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서는 소희를 힐끗 보았는데, 그녀는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현태 씨에 관해 말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네.’ 이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사진을 받고 진지하게 보기 시작했다.요리가 나오는 동안, 이서는 구실을 찾아 소희와 함께 룸을 나섰다.“소희 씨, 왜 현태 씨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거야?” 소희가 말했다.“아직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두 분이 현태 오빠를 받아들일지도 모르겠고요.”“만약 반대하신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소희의 긴장한 모습을 본 이서가 웃기 시작했다.“두 분이 현태 씨를 반대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 거야? 현태 씨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는 거네?” “이서 언니!”“그래, 인제 그만 웃을게.”“나는 두 분이 현태 씨의 출신을 전혀 개의치 않으실 거라고 생각해. 두 분에게는 현태 씨의 출신보다, 소희 씨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실 테니까.”“물론, 두 분이 소희 씨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현태 씨의 출신을 더 중요히 여기시겠지.”“그럼 소희 씨도 두 분의 의견을 신경 쓰지 않으면 되잖아?” “내 말이 틀렸어?”곰곰이 생각하던 소희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언니 말이 맞아요.”두 사람은 다시 룸으로 돌아왔다.이지숙이 다시금 중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소희는 이서를 힐끗 본 후에야 입을 열었다.“엄마, 사실... 제겐 남자 친구가 있어요.”놀란 이지숙은 대답도 잊은 채 소희를 바
이서의 심장 소리가 욕실 안을 가득 메웠다.거부할 수 없는 그의 손길, 오히려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은근한 기대가 피어올랐다.그 순간, 지환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이 많이 차갑네. 평소에 신경 좀 써.’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섰을 때는 5분이 흐른 후였다. 뺨에 오른 붉은 기운은 이미 옅어졌지만, 귓불의 붉은 기운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다시 운전석에 앉은 지환의 모습이 맑고 아름다운 풍경처럼 보이자, 이서는 방금 욕실에서 느꼈던 감정이 더욱 부끄럽게 느껴졌다. ‘지환 씨는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떨칠 수 없는 괴로움 속에서, 이서와 지환은 마침에 호텔에 다다랐다.심근영 부부와 소희는 이미 도착해 있었는데, 두 사람을 보고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게다가 심근영은 이 기회를 틈타 지환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하 대표님, 저희 체면을 세워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지환의 표정은 매우 담담했다. 하지만 심근영은 그의 행동 스타일을 일찌감치 들은 모양인지, 전혀 개의치 않고 이서와 악수를 하려 했다.그가 손을 뻗으려던 찰나, 지환이 이를 저지했다.“늦게 왔는데, 주문부터 하시죠.”심근영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지만, 곧 상황을 이해하고는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소희에게 두 사람의 일을 들은 상태였다.‘참, 두 사람이 싸우는 중이라 했었지?’‘그런데 상황을 보아하니, 곧 화해하겠는걸?’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심근영이 지환에게 메뉴를 건넸고, 지환은 이서에게 메뉴를 건넸다. 이서는 모두의 권유로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문하기 시작했다.그녀가 주문한 요리는 모두의 입맛을 고려한 것이었는데, 음식이 식탁에 오르자 모두가 만족했다. 다만, 심근영과 지환은 사업상의 일을 이야기했으며, 이지숙과 소희, 그리고 이서는 생활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의 끝은 ‘결혼’이었다.“소희야, 너도 나이가 적지 않으니, 곧 결혼해야 해.” “...엄마, 서두
‘내가 뭘 잘못했다고 저러는 거야?’‘맞는 말이었잖아.’‘당신들은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애정행각을 벌였다고!’한편, 차에 오른 이서가 지환에게 물었다.“소희 씨한테 전화해서 약속을 취소할까요?” 지환이 시계를 힐끗 보았다.“안 늦었어.”“안 늦었다고요? 하지만 나는...” 차가 갑자기 멈추자, 이서가 이상하다는 듯 지환을 바라보았다.“왜 그래요?”“도착했어.” 이서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집을 보고는 멍해졌다.순간, 지난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듯했다.‘여긴... 우리가 전에 살던 곳이잖아?’이서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익숙한 감정이 불쑥 다가와 그녀의 숨통을 조였다.‘여기서... 내 인생의 최고의 시간을 보냈었지.’“어서 들어가. 다른 사람이 보면 어쩌려고 그래?” 이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그녀는 자연스럽게 욕실로 들어가 몸에 묻은 핏자국을 씻어냈다.하지만 옷에 묻은 핏자국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옷을 갈아입어야겠어.’ ‘참, 이 집에도 옷이 있을 텐데...’잠시 머뭇거리던 이서는 욕실 문을 살며시 열었다.‘지환 씨는... 거실에 없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까치발을 들고 2층으로 향했다.하지만 계단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지환과 맞닥뜨렸다.이서는 아무 옷도 걸치지 않은 채 목욕 수건만 두른 상태였고, 한 손은 가슴 위에 얹고 있었다. 하지만 높은 곳에 서 있던 지환은 고개를 숙이기만 하면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그의 목젖이 힘겹게 미끄러지자, 이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비... 비켜요. 옷 가지러 갈 거라고요...!”지환은 힘겹게 시선을 돌려 2층을 바라보았다.“내가 가져다줄게. 너는 욕실로 돌아가.”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쏜살같이 욕실로 돌아갔다.그녀는 눈앞의 위기를 해결하느라, 이후의 어색함은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자, 한창 샤워하던 이서는 고개를 돌렸다.그 순간, 문
운전기사는 놀라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아직 의식이 남아 있던 이서는 잠시나마 그 남자의 눈동자를 응시했다.‘날 노리는 거구나.’ 이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문을 열어 도망치려 했다.하지만 문을 열기도 전에 남자의 차가운 손이 목덜미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뼈를 깎는 고통이 밀려오자, 이서는 눈을 크게 뜨고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남자는 커다란 손을 뻗어 이서의 눈을 가렸다.“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나도 너처럼 보기 드문 미인을 죽여야 하는 게 너무 안타깝거든? 그런데 어쩌겠어? 그게 내 임무인걸. 임무는...”이서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뜨거운 선혈이 자기 얼굴과 목, 그리고 온몸에 튀는 것을 느꼈다. 그 선혈은 뜨겁고 끈적거리기 그지없었다.하지만 분명히 이서의 피는 아니었다.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쿵!잠시 후, 그 남자가 굉음을 내며 그녀의 곁에 쓰러졌다. 이서는 그제야 남자의 손을 떨쳐내고 세상의 빛을 마주했다. 차량 지붕에는 굽은 칼을 현란하게 돌리고 있는 어둠의 호리병이 있었다. 그가 쥔 칼에 검붉은 선혈이 묻어 있는 것을 본 순간, 이서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당신이 죽인 거예요?!”이서는 자신이 보기에도 매우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하지만 어둠의 호리병은 개의치 않고 거들먹거리며 말했다.“왜요, 문제 있어요?” 이서는 재빨리 좌우를 살폈는데, 차가 한 대도 없었다. 그녀는 어둠의 호리병을 보며 말했다.“가능한 한 빨리 처리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거라고요!!” 어둠의 호리병은 의외라는 듯 이서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이런 일을 처리해 본 적이 있는 겁니까?”이서가 말했다.“그럴 리가요.”“아주 능숙해 보이는데요?”어둠의 호리병은 이서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라는 말, 정말입니까?” 이서는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다만, 이번에는 망설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전화 연결음이 이어지던 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