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는 눈썹을 찌푸렸다.“너 괜찮아?”‘단지 서류를 준비하는 것뿐인데 왜 오버하는 거야? 뭔 큰 충격이라도 받은 줄 알겠어?’ ‘그리고 지금은 단지 서류를 제출하는 단계일 뿐이잖아. 비록 네 삼촌의 지지가 있지만, 반드시 민씨 그룹을 인수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하은철 설마 지금 윤수정이 질 거라고 맥이 빠진 거야?’하은철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배서는 누가 해주는 거야?”이서는 의아해했다.“너 몰랐어?”‘이렇게 큰일을 조카에게 알리지 않았다니?’‘하은철과 삼촌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가 보네.’“나... 모르는데...”‘내가 알아야 하는 건가?’이서는 어깨를 올렸다. 하은철의 삼촌이 말하지 않은 걸 그녀가 굳이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아직 내 질문에 대답 안 했다. 대체 배서는 누가 하는 거야?”“공시하면 알 수 있겠지.”하은철은 이서를 응시했다.이서는 태연하게 자리에 앉았다.“째려봐도 소용없어. 너도 아는 사람이야. 그런데 네가 모르는 거 보니 너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건가 봐. 그럼 나도 굳이 너에게 말할 필요 없지.”그녀는 하은철에게 분명하게 말했다.괜히 여기로 자주 들락거리지 않게.하은철은 얼굴이 살짝 변했다.“설마...”그는 머릿속에 예상 답안이 있었다.하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궁금한 거 더 있어? 없으면 이만 가 봐.”하은철은 천천히 몸을 돌려 문어귀로 걸어갔다.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 단호한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윤이서, 네 남편이 누구든 난 할아버지 마지막 소원을 이뤄드릴 거야. 누구도 날 막을 수 없어.”이서의 미간이 있는 대로 찌푸렸다.하은철이 나간 뒤 그녀는 한참 동안 그의 말속에 사로잡혀 멍하니 있었다.“언니, 괜찮아요?”심소희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제자리에 앉아 창백한 얼굴로 멍하니 있는 이서를 보고 놀라서 물었다.이서는 얼떨결에 정신을 차렸다.“아, 아니야, 괜찮아!”“언니...”“무슨 일이야?”심소희는 그제야 그가 들어온 목적을 떠올렸다.“아,
뭔가 소중한 걸 잃은 것처럼.“네! 좋아요.” 이서는 애서 태연한 척 말을 이었다.“그럼, 우리 있다가 봐요.”[응. 그래.]하이먼 스웨이과의 전화를 끊고 이서는 실의에 빠져 휴대전화를 꺼냈다.사실 그녀는 하이먼 스웨이가 H 국을 떠날 것이라는 일찌감치 예감했다. 다만 이렇게 빠를 줄은 예상치 못했다.그녀는 지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지환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지환이 보낸 문자를 보면서 이서는 고통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머릿속에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할아버지는 그녀를 위해 돌아가셨다.’이 말이 줄곧 그녀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다.할아버지가 유언으로 남긴 아쉬움이 이서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만약 지환과 함께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벌써 하은철과 결혼했을 것이다.반평생을 꼭두각시처럼 사는 한이 있더라도.그러나 지금은 지환이 있다.그를 버릴 수 없다.이건 그에게 너무 불공평하다.이서는 다시 한번 숨을 깊이 내쉬었다.설령...하루하루 악몽을 꾸는 고통을 참더라도 그녀는 계속 지환의 곁에 있을 것이다.다른 방식으로 용서를 구할 수는 있지만 절대로 지환을 배신할 수 없었다.할아버지가... 싫어한대도.이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퇴근한 후 이서는 1층으로 내려갔다. 임현태가 차를 회사 입구에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보나마나 지환이 차 안에 있을 것이다.차 문을 열자, 역시 지환이 눈에 들어왔다.“일찍 오셨네요?” 이서는 아무 일도 없는 척 태연하게 자리에 앉았다.그러나 지환은 이서의 기분이 다운되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방금 왔어. 뭔 일 있어?” 지환은 이서의 손을 잡고 걱정스레 물었다.“혹시 회사 일?”“아니요.”“그럼, 우리 자기 오늘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을까나?”“아니에요.” 지환에게 단번에 들켜 버리다니, 이서는 얼른 시선을 피하며 아닌 척했다.“엄마가 한동안 떠난대요, 좀 아쉬워서요.”그녀의 기분이 가라앉은 데는 확실히 이
이서는 지환을 자기 뒤에 숨기고 싶었다. 하지만 키 차이가 많이 나는 지라 다 가릴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지환의 손을 꼭 잡고 주도권을 행사했다.“응.”장희령은 시큰시큰하게 말했다.“잘 생겼네. 하지만 얼굴이 밥 먹여 주나. 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니면서.”한 마디로 분위기를 깼다.심가은도 그제야 눈길을 거두었다.“아직도 이서 씨가 집안 가장이야? 남편 먹여 살리는 거야?”말을 마치고는 비아냥거리는 시선으로 이서를 쳐다보았다.이렇게 해서라도 평정심을 찾으려고 했다.그렇지 않으면 이서의 얼굴을 볼 때마다 짜증이 올라올 것 같았다.이서가 예쁜 걸 그녀도 인정한다. 하지만 소지엽이 그녀만 좋아하고,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건 받아들일 수 없었다.이서는 다소 불쾌한 듯 얼굴을 길게 늘어뜨렸다. 오늘은 비록 하이먼 스웨이를 위해 식사 자리에 나온 것은 맞지만, 그러나 지환에게 함부러 하는 건 그 누구라도 절대 참을 수 없었다.“어떻게 내 일에 대해 그렇게 잘 알지? 우리 집 침대 밑에 숨어 사니?”심가은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하이먼 스웨이도 심가은이 지나쳤다고 생각했다.“가은아, 이건 이서 언니 집안일이잖니, 다른 사람 얘기를 함부로 입에 올리는 거 아니다.”심가은이 반박하려고 들자, 장희령이 눈빛을 보냈다.“오늘 기분 좋은 날인데, 다들 흥분 좀 가리앉힙시다.”장희령은 일어나서 사람들에게 물을 따라주었다.하이먼 스웨이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게 아니라면, 장희령은 절대 물 따르는 잔일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자, 물 한 잔 드시고 진정합시다.”이서와 지환은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착석하자 하이먼 스웨이가 말을 꺼냈다.“오늘 내 딸과 한자리에 있게 되어 너무 행복하네요. 우선 이 자리를 빌려 이서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어요. 이서가 그동안 적극적으로 나를 도와 딸을 찾아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가은이와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이서야, 정말 고마워.”이서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엄마, 당
상황을 지켜본 심가은은 일부러 달콤하게 말했다.“이서 씨 이해해 줘서 고마워.”이서의 안색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고맙긴, 이제부터는 가은 씨가 작가님을 잘 챙겨줬으면 좋겠어.”“당연한 걸.” 심가은은 하이먼 스웨이의 팔을 껴안았다.이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식사가 끝나자, 이서의 마음은 더욱 우울해졌다.하이먼 스웨이가 일부러 쫓아와 사과했지만, 이서의 마음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그녀가 기분이 나쁜 건, 심가은이 하이먼 스웨이에 대한 호칭을 바꾸게 해서가 아니라하이먼 스웨이에 대한 심가은의 태도 때문이었다.그분의 친딸이라는 걸 믿고 제멋대로인 태도.오늘은 단지 수양딸이 싫다고 하지만, 앞으로는...?“자기야, 아직도 저녁 식사 때 일 생각하고 있어?”지환은 손을 들어 이서의 관자놀이를 살살 문질렀다.이서는 지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응.”“심가은이 작가님의 사랑을 등에 업고 제멋대로 나댈까 봐... 지환 씨, 내가 너무 오지랖인가?”지환은 이서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녀가 좀 진정되자 입을 열었다.“자기야, 어떤 일이든 객관적이어야 해. 자신의 시각을 대입시키지 말고.”“하지만...” 이서는 고개를 들어 말했다.“나는 작가님이 방금 매우 불쾌해하신 걸 느꼈거든요.”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건지 그녀도 모른다.그냥 하이먼 스웨이가 이런 취급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는 지금 기껏해야 하이먼 스웨이의 지인일 뿐, 다른 말할 자격이 없다.지환은 이서의 허리를 애틋하게 껴안았다.그의 아내는 다 좋은데 때로는 너무 착해서 탈이다.집에 돌아온 이서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지환이 방에 들어와 보니 이서가 이불에 들어가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는 것을 보았다.그는 가까이 다가가서야 이서의 안색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얼굴이 빨갛고 얼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자기야...”지환은 몸을 웅크리고 이서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이서의 이
“이서 씨.”이상언은 이서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마치 무엇에 홀린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한참 뒤, 그녀는 무언가에 자극받은 듯 미친 듯이 소리쳤다.“윤이서, 너 왜 이렇게 양심 없는 애였어? 내가 누구 때문에 죽었는데?”평소에 간담이 크고, 식견이 넓은 임하나도 이서의 모습에 모골이 송연해졌다.그녀는 이상언의 손을 잡았다.“무슨 일이에요? 이서야, 너 왜 그래?”“해리성 장애 같아요.” 이상언이 고개를 들어 지환을 보았다. “지환아, 마이클 천 불러와야겠다.”지환의 입술은 경직되어 있었다.이상언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마이클 천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를 마친 이상언은 지환에게 말했다.“지환아,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게 좋을 거 같다. 이서 씨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면 앞으로 약물이나 물리치료를 받아야 할 수도 있어. 그 과정은 고통스럽고 길어질 거야...”지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차가운 손끝으로 이서의 손을 힘껏 잡았다.조용히 누워있던 이서는 갑자기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더니 입에 거품을 물었다.“상언 씨!”임하나가 절박한 목소리로 소리쳤다.이상언은 몸을 돌려 부엌으로 가서 젓가락을 가져갔다.그가 돌아왔을 때, 이서가 지환의 팔을 물고 있는 것을 보았다.팔에는 이미 피가 배어 있었다.“지환아.” 이상언이 지환에게 젓가락을 건네주었다.지환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심지어 신음소리도 하나 내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는 마침내 경련을 멈추고 점차 가라앉았다.지환은 그제야 천천히 손을 뺐다.임하나는 지환의 팔에 선명한 이빨 자국이 여러 개 있는 것을 보았다.지환에게 상처를 처리하라고 얘기하기도 전에 마이클 천이 도착했다.방에 들어서자, 마이클 천의 시선은 이서에게 떨어졌다. 그는 이서의 상황을 살피고는 곧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치챘다.그의 안색이 극도로 굳어졌다.“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마이클 천이 한숨을 쉬었다.“대표님...”마이클 천이 말을 꺼내기 바쁘게
“합리적인 치료 방안을 제시해. 그렇지 않으면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을 테니.”지환은 난간을 잡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극히 차가웠다.마이클 천은 전전긍긍하며 이상언을 바라보았다.이상언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말해봐요, 이서 씨 상황이 왜 갑자기 이렇게 악화되었는지?”마이클 천은 고개를 저었다.“나도 모르겠어요. 대표님 얘기에 따르면 요 며칠 사모님은 민씨 그룹을 인수하는 데 모든 관심을 돌렸는데.”“이는 자가 치료에 아주 긍정적인 표현이거든요.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요?”이상언은 지환을 바라보았다.“지환아, 오늘 무슨 특별한 일 있었어?”지환은 눈살을 찌푸렸다.“하이먼 스웨이가 딸을 찾았어.”이서의 집이 어떤 상황인지 이상언과 마이클 천은 잘 알고 있었다. 이 말을 들은 두 사람은 모두 확신의 기색을 드러냈다.“아마도 그 일로 스트레스를 받은 듯합니다.”마이클 천이 말했다.“대표님, 제가 전에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시나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외적 치료를 건의하지 않는다고.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지환은 가늘게 눈을 떴다. 목소리는 더없이 무거웠다.“치료 과정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그건, 명확하게 대답하기 힘듭니다. 사람마다 받아들여지는 정도가 다릅니다. 그리고... 먼저 사모님과 상의하셔야 해요. 환자가 치료를 거부하면 과정은 더욱 고통스러워질 겁니다.”지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마이클 천은 침묵하며 이상언을 바라보았다.이상언은 손을 흔들었다. 마이클 천이 잠깐 자리를 비울 것을 암시했다.마이클 천은 즉시 나갔다.이상언은 그제서야 지환의 뒤로 걸어갔다.“치료가 필요하다고 언제쯤 이서 씨에게 말할 작정이야?”지환은 차가운 난간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살인을 저지를 만큼 음험했다.아쉽게도 하경철은 이미 죽었고...“오늘 이서가 당한 고통을 하씨 집안 사람들한테 백배, 천 배로 돌려받을 거다!”이상언은 상황을 보고 어쩔 수 없이 지환의 어깨
임하나의 몸은 더욱 심하게 떨렸다. 그는 이상언의 품에 기대었다.“왜? 도대체 왜? 이제야 가까스로 하씨 집안을 벗어났는데 또 그 불구덩이에 빠지다니.”이상언은 임하나의 등을 가볍게 다독이 소리 없이 탄식했다.밤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들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이상언과 임하나도 밤새 이서를 지켰다.이튿날 잠에서 깬 이서는 집안에 한가득한 사람들을 보고 의아했다.“어떻게 다 여기 있지?”어제 일어난 일에 대해 이서는 전혀 기억이 없었다.임하나는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보고 눈물을 참지 못하고 먼저 달려갔다.“이서야, 드디어 깨어났구나. 좀 어때?”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이서는 의아한 눈빛으로 지환을 봤다가 다시 임하나한테 떨어졌다.“내가 왜?”이서는 땀을 흠뻑 흘린 것 같았다.온몸이 끈적하고 찝찝했다.임하나의 눈시울이 또 붉어졌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이상언을 쳐다보았다.이상언은 이서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지환에게 말했다.“우리 먼저 갈게. 이서 씨 잘 챙겨.”말을 마치고는 임하나와 집을 나섰다.방 안에는 순식간에 이서와 지환만 남았다.이서는 의아한 듯 지환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옅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지환 씨, 다들 왜 그래요? 안색은 왜 이렇게 굳었어?”이서 옆에 앉은 지환은 밤새 잠을 자지 못한 관계로 눈 밑에는 청회색 다크서클이 진하게 나타났다.지환의 안쓰러운 모습을 보니 이서의 심장이 아파왔다.“어르신 돌아가시기 전에 한 말, 나도 알고 있어.”이서의 안색이 돌변했다.“그동안 자기가 자꾸 악몽을 꾸는 것도 알고 있었고...”이서는 급히 입을 열었다.“지환 씨, 걱정 마요. 나 당신 없으면 안 돼, 당신 떠날 생각 없어요.”지환은 가볍게 웃었지만, 눈 밑에는 애처로운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자기야, 내 말 좀 들어봐.”이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나, 자기 위해 정신과 의사를 섭외해 놓았어.”이서는 지환을 바라보며 순순히 뒷말을 기다렸다.한참 뒤 뒷말이 없다고 여겼을
“자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이야. 자기만의 가족 울타리를 만들겠다는 건데 이 작은 소원도 들어주지 않네. 자기가 얘기해 봐. 하늘이 무심한 거야, 자기가 이기적인 거야?”이서는 또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다.“지환 씨 그만해요.”얘기할수록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지환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지환은 가볍게 웃으며, 이서의 코를 살짝 내리 쓸었다. 그녀의 기분이 좀 진정되자, 계속 입을 열었다.“자기야,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나한테 얘기해, 지금은 자기 자신만 생각해. 내 생각은 나중에... 알았지?”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당신은... 내가 떠날까 봐 걱정되지 않아요?”이서가 말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지환이 오해할까 봐서였다.“아니.” 지환은 이서의 손가락에 키스했다.“우린 평생 함께할 거니까.”드디어 이서의 얼굴에 웃음이 돌았다.“당신이 방금 말한 심리치료...”그녀는 얼굴의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그거 뭐예요?”“약물치료나 물리치료를 병행하는 치료인데... 치료 과정이 많이 힘들대.”말을 한마디 뱉을 때마다 지환의 심장은 칼로 에는 것 같았다.“자기야...”이 험난한 과정을 겪지 않게 하려고지환은 마이클 천에게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치료할 것을 요구했었다.그러나 지금 보니 그의 이런 결정이 오히려 이서의 고통을 가중시키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그녀의 병세가 악화되었으니.이성적으로는 치료받는 게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줄곧 결심을 내리지 못했다.이서가 고통받는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어서.지환이 걱정하는 바를 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 괜찮아요. 치료받고 싶어요. 당신 곁에만 있을 수만 있다면, 어떤 치료도 다 받을 수 있어요.”말하고 나니 오히려 그녀의 죄책감도 줄어드는 것 같았다.지환은 이서의 손을 꼭 잡았다.두 사람은 묵묵히 마주 보며 아무 말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무언의 침묵 속에 녹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