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더 이상 눈 뜨고 지켜볼 수가 없었어.”하은철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너랑 결혼한 이상,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장인, 장모인데, 어떻게 처가 식구들에게 이렇게 무례할 수 있지?! 윤이서, 빨리 네 남편 불러와 사과시켜. 그럼, 이 일은 그냥 없던 일로 넘어갈게.”“잘못한 것도 없는 사람을, 내가 왜 불러?”“너 지금 작정하고 네 남편 두둔하는 거니?” 하은철은 갑자기 다가와 윤이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윤이서는 고개를 들어 태연하게 하은철을 돌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그렇다, 왜?”그녀의 당당함에 살짝 당황한 하은철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여기는 북성이고, 내 지역인 거 알지? 네 남편이 아직 북성에 있는 한, 땅을 파서라도 내가 그 새끼 찾아낸다. 그때 되면, 이렇게 쉽게 끝내지 않는다는 거 알고 있어!”말이 끝나자, 하은철은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갔다.성지영과 윤재화도 눈치껏 하은철의 뒤꽁무니를 따라 황급히 병실을 나갔다.그들이 꽤 멀리 떠난 걸 확인한 이서는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 하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때 하지환은 어두컴컴한 룸에 앉아 있었다. 넥타이는 목덜미에 느슨하게 걸려 있었고, 몸에는 술기운이 가득했다. 술이 곤죽이 되었어도 고귀함을 잃지 않았다.주위에는 이미 몇몇 여자들이 이 잘생긴 남자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술잔을 들고 지환의 옆에 오려던 그녀들은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주눅이 들어 고분고분 제자리에 잠자코 앉아있었다.이 상황을 지켜본 이상언은 술잔을 들고 하지환의 곁에 가서 앉았다.“즐기러 오자고 한 사람도 너고, 싫다고 하는 사람도 너고…… 아이고, 도련님, 도대체 원하는 게 뭡니까?”하지환은 눈앞의 투명 유리잔을 주시하며 마지막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고개를 들었을 때 맑고 투명한 눈동자에 한 줄기 막막함이 스쳐 지났다.“대체 뭔 일이야?”이상언이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설마…… 이서 씨와 관련 있는 건 아니겠지?”윤이서와 결혼한 이후로, 이 남자 비
이상언은 눈이 빠지도록 하지환을 기다렸다. 5시간 같은 5분이었다.다시 돌아온 지환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눈치 없는 여자들이 다시 다가오려고 하자, 하지환의 차가운 눈빛을 쏘아붙였다. 그러자 여자들은 그의 안색을 살피고 다들 스리슬쩍 물러났다.이상언도 하지환에게 몇 마디 하려다가 하지환의 눈빛을 보고 그만두었다.그는 어쩔 수 없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화제를 본론으로 돌렸다.“지난번에 네가 윤수정의 신장이식 공여자를 찾아 달라고 했잖아. 계속 해?”하지환의 머릿속에 울어서 빨개진 이서의 눈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혐오스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됐어. 안 찾아도 돼.”“그럼, 다행이다. 며칠 전에 윤수정 병력을 확인해 봤는데, 문제점이 꽤 많더라고…….”이상언은 술을 한 모금 마셨다.“그래서 너랑 상의 좀 하려고 했는데……. 찾을 필요 없다니, 귀찮은 일 하나 줄었네.”하지환은 가볍게 ‘응’하고 대답했다.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어서 이상언이 한 말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병원.하은철은 이서의 치료를 담당한 주치의를 찾아갔다.이서를 언급하자 의사는 정확하게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물론 기억하죠.”하은철의 눈동자가 밝아졌다.“그럼 윤이서 씨 옆에 있던 남자,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요?”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 남자요, 기품이 범상치 않았고, 검은 눈썹에 카리스마 넘치는 눈동자, 키도 크고 잘 생겼어요. 그리고 그 윤이서 환자에게 아주 지극정성이더라고요. 딱 봐도 좋은 남편이었어요!”하은철의 미간이 아래로 내려앉았다.“정말 당신이 말한 것처럼 그렇게 훌륭한가요?”의사는 웃으며 말했다.“도련님, 제가 과대포장한 게 아니라 오랜 기간 병원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렇게 아내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남편은 정말 오랜만인 듯합니다. 게다가 두 사람 선남선녀가 따로 없더구먼요. 천생연분이에요. 참 잘 어울렸어요.”“그만, 그만 해요!”하은철은 초조하게 의사의 말을 끊었다.의사는 제자리에 서서 어쩔 바를 몰랐다.하은철은 눈
“미안해요, 당신인 줄 몰랐어요.”이서는 긴장한 표정으로 하지환을 끌어서 소파에 앉혔다. 불을 켜고 상처를 보니 심장이 아파왔다. 그녀는 곧 병실에서 재빨리 구급상자를 찾아냈다.작은 상처이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하지환의 눈길은 상자 안에 널려 있는 속옷 쪽으로 갔다.대뇌가 갑자기 다운된 것 같았다.이 옷들은 그가 사람을 시켜 보내라고 한 것이다.부하직원들이 골라서 바로 보낸 거라 확인할 길이 없었다.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몸에서 오는 괴로움은 마치 곧 분출할 화산처럼 용암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하필 이때 이서는 구급상자를 들고 그의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소녀 특유의 살냄새가 코끝을 간질이며 그의 이성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었다.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알코올을 묻힌 면봉을 들고 하지환의 이마에 난 상처를 닦았다.“좀 아파도 참아요.”이서는 부드럽고 섬세한 동작으로 이마의 상처를 처치했다.지환의 목젖이 힘겹게 미끄러졌다. 그의 시선은 눈앞의 풍경에서 고정되었다. 얼굴에서 시작된 홍조는 슬그머니 귓볼까지 빨개졌다.뜨거운 시선에 윤이서는 동작을 멈칫했다. 고개를 숙이고서야 두 사람의 자세가 얼마나 야릇한 지를 깨달았다.“아, 네…… 다 됐어요…….”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공기 중에는 여전히 이상야릇한 기운이 감돌았다.이서는 아무 말이라도 해야 이 기괴한 분위기를 깨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어떻게 올라왔어요?”윤이서는 베란다를 한 번 보았다. 여기는 2층이다.‘설마 파이프를 타고 올라온 건 아니겠지?’“타고 올라왔죠.”“…….”‘정말 그렇다.’“여긴 2층인데요?!”지환이 웃었다. ‘이 정도 높이는, 식은 죽 먹기지.’“어때요? 발목은…….” 그는 윤이서의 발목을 보며, 소파에 널브러진 속옷을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아직은 좀 아프지만, 그래도 걸을 수 있어요. 이제 퇴원해도 될 거 같아요.”매일 고액의 입원비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지난번에 물어보긴 했는데 아직 확답을 못 받았어.”“설마 어르신한테 꼬리라도 밟힐까 봐 그런 건 아니겠지?”“밟힐 게 뭐 있어?”이서는 임하나가 너무 앞섰다고 생각했다.“그 사람이 정말 명문가 귀공자라면…… 윤씨 집안 사람들이 못 알아볼 리 있겠어?”임하나는 턱을 매만졌다.“그건 그렇네. 어르신이 보고 싶어 하시니까 걍 데리고 가서 어르신께 보여드려. 어르신이 아마 알아서 잘 봐주실 거야.”“됐어…….”윤이서는 고개를 숙였다.“하은철이 지금 전 북성시를 이 잡듯이 뒤지고 있어. 괜히 지환 씨를 할아버지께 데려갔다가 독 안에 든 쥐 만들 필요 없잖아.”“그건 쉽지. 어르신이 널 그렇게 예뻐하시는데 뭐가 걱정이야? 하은철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어르신께 부탁하면 되지. 그리고…….”임하나는 이서 가까이 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어르신의 인정을 받고 싶은 거 아니었어?”역시 베프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서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고 있다.대답보다는 침묵을 선택한 이서를 화장실에서 끌고나온 임하나는 침대 옆자리에 서 있는 지환을 불렀다.“지환 씨.”지환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인 채 수줍게 얼굴을 붉힌 윤이서를 바라보았다.임하나는 이서를 지환 앞으로 밀며 이서의 어깨를 툭툭두드렸다.“얘기해, 밖에서 기다릴게.”말을 마치고 병실을 나섰다.방에는 이서와 지환만 남았다.“할 얘기가……?” 고개를 숙이자, 헐렁한 환자복 속으로 가려진 소녀의 탄력 있는 몸매가 언뜻 보였다. 지환은 부자연스럽게 헛기침하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그게…… 지난번에 할아버지를 뵈러 가자고 했던 일이요…….”이서는 숨도 돌리지 않고 단숨에 말을 뱉었다. 예쁜 눈동자는 긴장한 듯 지환을 쳐다보았다.지환의 눈동자가 약간 굳었다.“내가 이미 그러자고 하지 않았나요?”“그런가요? 언제?”“내가 갔으면 좋겠냐고 물었을 때.”이서는 눈을 깜빡이며, 빨간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믿기 어려운 듯 재차 확인했다.“그래서, 내가 가자고 하면 간다는 얘기인
갑작스러운 목소리의 등장에 모두 웃음을 멈추고 정지화면을 연출했다.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하경철이 경호원에게 둘러싸여 병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멍해졌다.“어르신,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민예지는 얼른 앞으로 나가 하경철을 부축하려고 했다.하경철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바로 이서 앞으로 다가갔다.“이서야, 발을 접질려서 입원까지 했다고 들었다. 이런 일이 있으면 이 할애비한테 알려야지…….”이서는 감동한 나머지 눈시울이 붉어졌다.“할아버지, 저 괜찮아요. 곧 퇴원해요.”하경철은 고개를 숙이고 이서의 발목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정말 괜찮아?”“그럼요!”이서는 제자리에서 두어 걸음 걸었다.“사실 입원할 필요도 없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괜한 걱정을…….”말하면서 그녀는 얼굴이 발그스름해졌다.이서의 모습을 지켜본 하경철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그런 거였어? 이 할애비 깜짝 놀랐자녀.”그러고는 곧 몸을 돌려 민예지 등 일행을 바라보았다.“너희들, 여기서 웬 소란이야? 저 멀리까지 시끄럽더라…….”민예지는 입술을 깨물고 울며 겨자 먹기로 말했다.“어르신, 다름이 아니라 어르신 생신 때 이서가 선물한 그 도자기…… 글쎄, 그게 이서 물건이 아닌 둘째 삼촌 거를, 자기 거 인양 선물로 드렸다지 뭐예요…….”방금 이서 앞에서의 자상함이 완전히 사라지고, 눈썹을 찌푸린 하경철의 안색은 어둡다 못해 무서웠다.“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초조해진 민예지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할아버지, 남의 물건으로 생색내는 거, 이런 뻔뻔한 사기꾼을 까발려야 다른 사람한테 사기 못 치죠.”하경철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그는 뒷짐을 지고 이서의 부축을 받아 소파에 앉았다.그러고는 지팡이를 바닥에 ‘탁’치며 큰 소리로 호통쳤다.“이는 은철이 둘째 삼촌, 내 조카의 뜻이다. 내 생일날 네가 이서를 서슬 퍼렇게 몰아붙이니 보다 못한 내 조카가 절충 방안을 생각해 낸 게다. 근데 넌 오늘도 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이에 윤이서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둘째 삼촌이란 분은 정말 결혼하셨어요?”하경철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 녀석이 귀국하자마자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깜짝 결혼을 해버렸지 뭐야? 지금 보니 현명한 결정이었네.”‘깜짝 결혼?’‘둘째 삼촌도 깜짝 결혼?’“참…….”하경철이 불쑥 질문을 해왔다. “남편한테 식사 얘기해봤나?”화제가 갑자기 지환으로 바뀌자, 윤이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기왕 이렇게 된 거, 천해 호텔에서 식사 자리 마련해 놓을게.”“할아버지, 제가 정해서 말씀드릴게요. 요 며칠 은철 씨가 그 사람을 찾아다닌다고 혈안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말인데, 은철 씨한테 저희 식사…… 비밀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어?”하경철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은철이가 네 남편을 왜 찾아다녀?”윤이서는 입술을 오므렸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할아버지, 부탁드려요.”하경철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좋아, 알겠다. 입 꾹 다물고 있을 거구먼. 하지만, 이서야, 한 번 지나친 인연, 억지로 이어가라고는 강요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런데 말이다, 때로는 익숙한 게 최고일 때도 있단다.”윤이서는 뒷목을 꾹꾹 누르며 하경철의 의중이 무엇인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네.”하경철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윤이서를 바라보았다.어쨌든 하경철은 이서가 하씨 집안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골드리버파크 아파트.바 옆에 기대어 있던 이상언은 지환의 이마에 난 상처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잠깐 망설이다가 지환이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는 틈을 타서 일부러 음료수 한 병을 던져주었다.지환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병을 잡았다.이상언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역시 반사신경은 죽여 주는군. 이 이마에 있는 영광의 상처는 윤이서 씨 작품인가?” 지환은 음료수 뚜껑을 따서 한 모금 마셨다. 이상언의 말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의 이런 성질머리에 일
하지환이 하씨 집안의 하프 마운틴 별장에 도착했을 때, 하은철은 하경철과 이야기를 마치고 서재에서 나오는 길이었다.보아하니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삼촌 오셨어요?”하지환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할아버지가 뭔 일로 부르셨어?”하은철은 별로 탐탁지 않은 듯 얘기했다.“저더러 윤이서 남편을 그만 찾으라네요.”하지환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하은철의 다음 얘기를 기다렸다.“그러면, 내가 이서의 마음을 되돌리는데 차질이 생긴단 말이에요.”“…….”“큰 집 도련님, 어르신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사 주경모가 때마침 나타났다.하지환은 가볍게 ‘응’하고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얼굴에는 그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서재에 들어서서 의자에 앉아 있는 하경철에게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작은 아빠.”하경철이 웃으며 말했다.“왔어? 자, 앉아.”하지환은 별 내색없이 하경철 맞은편에 앉았다.“모레 이서 남편을 만날 예정이다.”하경철은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너희 쪽에 혹시 그 사람에 대한 정보 같은 게 있나?”하지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어흠, 너도 못 찾아낸다면, 그 사람 정말 대단한 사람인데…….” 하경철은 하지환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지환아, 너 혹시 모레 시간 되니?”하지환은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났다.“작은 아빠는 제가 그 자리에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하경철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그래, 너도 알아내지 못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은 아닌가 보다. 외국인일 가능성이 높아. 넌 외국에서 오래 살았으니, 어쩌면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네.”하지환은 입꼬리를 보기 좋게 올리며 웃음을 지었다.“그럴 수도요. 하지만 그날 정말 시간을 내기 힘들 거 같아요. 작은 아빠, 죄송해요. 도움을 못 드려서…….” 하경철도 굳이 강요하지 않았다.“그럼, 내가 만나보고 와서, 다시 너랑 상의하마.”“네. 그러시죠.”……이틀 뒤.불필요한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주경모는 즉시 호텔 직원에게 다기와 차를 준비하라고 했다.이서는 이 기회를 틈타 하지환에게 문자를 보냈다.[할아버지는 이미 도착하셨어요. 오시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하지환은 답장하지 않았다.호텔 직원이 다기 세트를 가져왔다.이서는 부득이하게 먼저 마음을 다잡고 온 정신을 집중하여 하경철에게 드릴 차를 끓이고자 준비했다.다도에도 순서와 예절이 있으니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되었다.직원이 가져온 것은 보이숙차였다.자사 다관에 찻잎을 넣고 끓는 물로 우리자, 찻잎이 동동 떠오르면서 차 향기가 룸 안에 가득 퍼졌다.이서는 재빨리 찻물을 퇴수기에 따라 버렸다.이렇게 두 번을 반복하고 세 번째가 되어서야 찻잔에 차를 부었다.검붉은 차탕에 차 향이 모락모락 피어났다.“할아버지, 어서 드세요.”하경철은 빙그레 웃으며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역시 이서가 우려낸 차야, 맛있어.”이서는 겸손했다.“과찬이세요. 할아버지는 늘 저를 놀리시는 걸 좋아하신다니까요.”할아버지는 손을 흔들었다.“영감쟁이가 할 일 없어서 널 놀리겠냐? 얘야, 할애비는 널 잘 알고 있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지. 이 다도만 봐도 그래. 네가 웬만한 다도가들보다 훨 낫다.”“할아버지…….”그러고는 한숨을 쉬었다.“아쉽게도…… 은철이 녀석이 복이 없어서…….”이서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하경철은 웃으며 하은철 얘기는 그만했다. 그의 시선은 이서의 손목의 착용한 팔찌에 가 있었다.“남편이 준 것이냐?”이서가 차를 우려낼 때부터 눈여겨봤다.윤이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이 팔찌는 오늘 자리를 위해 특별히 찬 것이다.하지환이 그녀에게 잘해 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하경철에게 점수를 좀 더 따게 해주려고.하경철은 두어 번 훑어보고는 아무 말없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방안은 침묵으로 조용했다. 하경철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이서는 하지환이 늦어서 화가 난 줄 알았다.그녀는 곧 핑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