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서는 아침을 먹고 나니 임하나로부터 문자가 왔다.[이서야! 너 설마 어르신 생신날에 네 결혼 사실을 선포한 거야?]가볍게 ‘응’이라고 답장한 지 1초도 되지 않아, 임하나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임하나의 들뜬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대박! 이서야, 너 초특급 울트라 캡 짱 용감한데? 용감한 거니, 무모한 거니? 그나저나 어르신은 화 안 내셨어? 너 괜찮지?]“아니, 화 안 내셨고 오히려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하셨어.”하지환을 언급하자 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임하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깜짝 놀랐잖아. 난 어르신이 노발대발하실 줄 알았는데…… 어쨌든 잘 됐다. 너 드디어 하은철 그 인간쓰레기한테서 탈출했네.]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하은철의 분노한 목소리가 들렸다.“윤이서, 너 나와!”이서는 잠깐 멍해졌다.핸드폰 저편의 임하나도 긴장한 듯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야?]“괜찮아.” 이서가 임하나를 안심시키며 말했다.“나 먼저 끊는다,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그녀는 말을 마치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휴대전화를 내려놓자마자, 초라한 모습의 윤재하와 부부가 눈앞에 나타났다.이서는 눈썹을 찌푸리며 이해할 수 없는 눈빛으로 그들 뒤에 서 있는 하은철을 바라보았다.하은철이 앞으로 한 걸음 나오며 물었다.“네 남편은?!”그러고 보니 아직 윤이서의 남편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이름조차도.이서는 무심코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무슨 일인데?”“너 눈멀었어? 네 부모님이 무슨 꼴 당했는지 안 보여?”이서는 고개를 살짝 돌려 벌벌 떨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미간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혹이 남아있었다.“네 잘난 남편이 택시 기사를 시켜 네 부모들을 야산 산꼭대기까지 데려가서 옷이랑 소지품 다 뺏고, 밤새 찬바람을 맞게 하고…….”듣다 못 한 이서가 하은철의 말을 끊었다.“사람 모함하지 마! 증거 있어?”이서의 반격에 하은철은 무려 반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
“내가 더 이상 눈 뜨고 지켜볼 수가 없었어.”하은철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너랑 결혼한 이상,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장인, 장모인데, 어떻게 처가 식구들에게 이렇게 무례할 수 있지?! 윤이서, 빨리 네 남편 불러와 사과시켜. 그럼, 이 일은 그냥 없던 일로 넘어갈게.”“잘못한 것도 없는 사람을, 내가 왜 불러?”“너 지금 작정하고 네 남편 두둔하는 거니?” 하은철은 갑자기 다가와 윤이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윤이서는 고개를 들어 태연하게 하은철을 돌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그렇다, 왜?”그녀의 당당함에 살짝 당황한 하은철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여기는 북성이고, 내 지역인 거 알지? 네 남편이 아직 북성에 있는 한, 땅을 파서라도 내가 그 새끼 찾아낸다. 그때 되면, 이렇게 쉽게 끝내지 않는다는 거 알고 있어!”말이 끝나자, 하은철은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갔다.성지영과 윤재화도 눈치껏 하은철의 뒤꽁무니를 따라 황급히 병실을 나갔다.그들이 꽤 멀리 떠난 걸 확인한 이서는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 하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때 하지환은 어두컴컴한 룸에 앉아 있었다. 넥타이는 목덜미에 느슨하게 걸려 있었고, 몸에는 술기운이 가득했다. 술이 곤죽이 되었어도 고귀함을 잃지 않았다.주위에는 이미 몇몇 여자들이 이 잘생긴 남자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술잔을 들고 지환의 옆에 오려던 그녀들은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주눅이 들어 고분고분 제자리에 잠자코 앉아있었다.이 상황을 지켜본 이상언은 술잔을 들고 하지환의 곁에 가서 앉았다.“즐기러 오자고 한 사람도 너고, 싫다고 하는 사람도 너고…… 아이고, 도련님, 도대체 원하는 게 뭡니까?”하지환은 눈앞의 투명 유리잔을 주시하며 마지막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고개를 들었을 때 맑고 투명한 눈동자에 한 줄기 막막함이 스쳐 지났다.“대체 뭔 일이야?”이상언이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설마…… 이서 씨와 관련 있는 건 아니겠지?”윤이서와 결혼한 이후로, 이 남자 비
이상언은 눈이 빠지도록 하지환을 기다렸다. 5시간 같은 5분이었다.다시 돌아온 지환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눈치 없는 여자들이 다시 다가오려고 하자, 하지환의 차가운 눈빛을 쏘아붙였다. 그러자 여자들은 그의 안색을 살피고 다들 스리슬쩍 물러났다.이상언도 하지환에게 몇 마디 하려다가 하지환의 눈빛을 보고 그만두었다.그는 어쩔 수 없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화제를 본론으로 돌렸다.“지난번에 네가 윤수정의 신장이식 공여자를 찾아 달라고 했잖아. 계속 해?”하지환의 머릿속에 울어서 빨개진 이서의 눈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혐오스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됐어. 안 찾아도 돼.”“그럼, 다행이다. 며칠 전에 윤수정 병력을 확인해 봤는데, 문제점이 꽤 많더라고…….”이상언은 술을 한 모금 마셨다.“그래서 너랑 상의 좀 하려고 했는데……. 찾을 필요 없다니, 귀찮은 일 하나 줄었네.”하지환은 가볍게 ‘응’하고 대답했다.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어서 이상언이 한 말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병원.하은철은 이서의 치료를 담당한 주치의를 찾아갔다.이서를 언급하자 의사는 정확하게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물론 기억하죠.”하은철의 눈동자가 밝아졌다.“그럼 윤이서 씨 옆에 있던 남자,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요?”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 남자요, 기품이 범상치 않았고, 검은 눈썹에 카리스마 넘치는 눈동자, 키도 크고 잘 생겼어요. 그리고 그 윤이서 환자에게 아주 지극정성이더라고요. 딱 봐도 좋은 남편이었어요!”하은철의 미간이 아래로 내려앉았다.“정말 당신이 말한 것처럼 그렇게 훌륭한가요?”의사는 웃으며 말했다.“도련님, 제가 과대포장한 게 아니라 오랜 기간 병원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렇게 아내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남편은 정말 오랜만인 듯합니다. 게다가 두 사람 선남선녀가 따로 없더구먼요. 천생연분이에요. 참 잘 어울렸어요.”“그만, 그만 해요!”하은철은 초조하게 의사의 말을 끊었다.의사는 제자리에 서서 어쩔 바를 몰랐다.하은철은 눈
“미안해요, 당신인 줄 몰랐어요.”이서는 긴장한 표정으로 하지환을 끌어서 소파에 앉혔다. 불을 켜고 상처를 보니 심장이 아파왔다. 그녀는 곧 병실에서 재빨리 구급상자를 찾아냈다.작은 상처이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하지환의 눈길은 상자 안에 널려 있는 속옷 쪽으로 갔다.대뇌가 갑자기 다운된 것 같았다.이 옷들은 그가 사람을 시켜 보내라고 한 것이다.부하직원들이 골라서 바로 보낸 거라 확인할 길이 없었다.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몸에서 오는 괴로움은 마치 곧 분출할 화산처럼 용암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하필 이때 이서는 구급상자를 들고 그의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소녀 특유의 살냄새가 코끝을 간질이며 그의 이성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었다.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알코올을 묻힌 면봉을 들고 하지환의 이마에 난 상처를 닦았다.“좀 아파도 참아요.”이서는 부드럽고 섬세한 동작으로 이마의 상처를 처치했다.지환의 목젖이 힘겹게 미끄러졌다. 그의 시선은 눈앞의 풍경에서 고정되었다. 얼굴에서 시작된 홍조는 슬그머니 귓볼까지 빨개졌다.뜨거운 시선에 윤이서는 동작을 멈칫했다. 고개를 숙이고서야 두 사람의 자세가 얼마나 야릇한 지를 깨달았다.“아, 네…… 다 됐어요…….”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공기 중에는 여전히 이상야릇한 기운이 감돌았다.이서는 아무 말이라도 해야 이 기괴한 분위기를 깨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어떻게 올라왔어요?”윤이서는 베란다를 한 번 보았다. 여기는 2층이다.‘설마 파이프를 타고 올라온 건 아니겠지?’“타고 올라왔죠.”“…….”‘정말 그렇다.’“여긴 2층인데요?!”지환이 웃었다. ‘이 정도 높이는, 식은 죽 먹기지.’“어때요? 발목은…….” 그는 윤이서의 발목을 보며, 소파에 널브러진 속옷을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아직은 좀 아프지만, 그래도 걸을 수 있어요. 이제 퇴원해도 될 거 같아요.”매일 고액의 입원비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지난번에 물어보긴 했는데 아직 확답을 못 받았어.”“설마 어르신한테 꼬리라도 밟힐까 봐 그런 건 아니겠지?”“밟힐 게 뭐 있어?”이서는 임하나가 너무 앞섰다고 생각했다.“그 사람이 정말 명문가 귀공자라면…… 윤씨 집안 사람들이 못 알아볼 리 있겠어?”임하나는 턱을 매만졌다.“그건 그렇네. 어르신이 보고 싶어 하시니까 걍 데리고 가서 어르신께 보여드려. 어르신이 아마 알아서 잘 봐주실 거야.”“됐어…….”윤이서는 고개를 숙였다.“하은철이 지금 전 북성시를 이 잡듯이 뒤지고 있어. 괜히 지환 씨를 할아버지께 데려갔다가 독 안에 든 쥐 만들 필요 없잖아.”“그건 쉽지. 어르신이 널 그렇게 예뻐하시는데 뭐가 걱정이야? 하은철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어르신께 부탁하면 되지. 그리고…….”임하나는 이서 가까이 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어르신의 인정을 받고 싶은 거 아니었어?”역시 베프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서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고 있다.대답보다는 침묵을 선택한 이서를 화장실에서 끌고나온 임하나는 침대 옆자리에 서 있는 지환을 불렀다.“지환 씨.”지환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인 채 수줍게 얼굴을 붉힌 윤이서를 바라보았다.임하나는 이서를 지환 앞으로 밀며 이서의 어깨를 툭툭두드렸다.“얘기해, 밖에서 기다릴게.”말을 마치고 병실을 나섰다.방에는 이서와 지환만 남았다.“할 얘기가……?” 고개를 숙이자, 헐렁한 환자복 속으로 가려진 소녀의 탄력 있는 몸매가 언뜻 보였다. 지환은 부자연스럽게 헛기침하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그게…… 지난번에 할아버지를 뵈러 가자고 했던 일이요…….”이서는 숨도 돌리지 않고 단숨에 말을 뱉었다. 예쁜 눈동자는 긴장한 듯 지환을 쳐다보았다.지환의 눈동자가 약간 굳었다.“내가 이미 그러자고 하지 않았나요?”“그런가요? 언제?”“내가 갔으면 좋겠냐고 물었을 때.”이서는 눈을 깜빡이며, 빨간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믿기 어려운 듯 재차 확인했다.“그래서, 내가 가자고 하면 간다는 얘기인
갑작스러운 목소리의 등장에 모두 웃음을 멈추고 정지화면을 연출했다.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하경철이 경호원에게 둘러싸여 병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멍해졌다.“어르신,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민예지는 얼른 앞으로 나가 하경철을 부축하려고 했다.하경철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바로 이서 앞으로 다가갔다.“이서야, 발을 접질려서 입원까지 했다고 들었다. 이런 일이 있으면 이 할애비한테 알려야지…….”이서는 감동한 나머지 눈시울이 붉어졌다.“할아버지, 저 괜찮아요. 곧 퇴원해요.”하경철은 고개를 숙이고 이서의 발목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정말 괜찮아?”“그럼요!”이서는 제자리에서 두어 걸음 걸었다.“사실 입원할 필요도 없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괜한 걱정을…….”말하면서 그녀는 얼굴이 발그스름해졌다.이서의 모습을 지켜본 하경철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그런 거였어? 이 할애비 깜짝 놀랐자녀.”그러고는 곧 몸을 돌려 민예지 등 일행을 바라보았다.“너희들, 여기서 웬 소란이야? 저 멀리까지 시끄럽더라…….”민예지는 입술을 깨물고 울며 겨자 먹기로 말했다.“어르신, 다름이 아니라 어르신 생신 때 이서가 선물한 그 도자기…… 글쎄, 그게 이서 물건이 아닌 둘째 삼촌 거를, 자기 거 인양 선물로 드렸다지 뭐예요…….”방금 이서 앞에서의 자상함이 완전히 사라지고, 눈썹을 찌푸린 하경철의 안색은 어둡다 못해 무서웠다.“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초조해진 민예지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할아버지, 남의 물건으로 생색내는 거, 이런 뻔뻔한 사기꾼을 까발려야 다른 사람한테 사기 못 치죠.”하경철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그는 뒷짐을 지고 이서의 부축을 받아 소파에 앉았다.그러고는 지팡이를 바닥에 ‘탁’치며 큰 소리로 호통쳤다.“이는 은철이 둘째 삼촌, 내 조카의 뜻이다. 내 생일날 네가 이서를 서슬 퍼렇게 몰아붙이니 보다 못한 내 조카가 절충 방안을 생각해 낸 게다. 근데 넌 오늘도 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이에 윤이서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둘째 삼촌이란 분은 정말 결혼하셨어요?”하경철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 녀석이 귀국하자마자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깜짝 결혼을 해버렸지 뭐야? 지금 보니 현명한 결정이었네.”‘깜짝 결혼?’‘둘째 삼촌도 깜짝 결혼?’“참…….”하경철이 불쑥 질문을 해왔다. “남편한테 식사 얘기해봤나?”화제가 갑자기 지환으로 바뀌자, 윤이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기왕 이렇게 된 거, 천해 호텔에서 식사 자리 마련해 놓을게.”“할아버지, 제가 정해서 말씀드릴게요. 요 며칠 은철 씨가 그 사람을 찾아다닌다고 혈안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말인데, 은철 씨한테 저희 식사…… 비밀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어?”하경철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은철이가 네 남편을 왜 찾아다녀?”윤이서는 입술을 오므렸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할아버지, 부탁드려요.”하경철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좋아, 알겠다. 입 꾹 다물고 있을 거구먼. 하지만, 이서야, 한 번 지나친 인연, 억지로 이어가라고는 강요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런데 말이다, 때로는 익숙한 게 최고일 때도 있단다.”윤이서는 뒷목을 꾹꾹 누르며 하경철의 의중이 무엇인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네.”하경철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윤이서를 바라보았다.어쨌든 하경철은 이서가 하씨 집안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골드리버파크 아파트.바 옆에 기대어 있던 이상언은 지환의 이마에 난 상처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잠깐 망설이다가 지환이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는 틈을 타서 일부러 음료수 한 병을 던져주었다.지환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병을 잡았다.이상언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역시 반사신경은 죽여 주는군. 이 이마에 있는 영광의 상처는 윤이서 씨 작품인가?” 지환은 음료수 뚜껑을 따서 한 모금 마셨다. 이상언의 말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의 이런 성질머리에 일
하지환이 하씨 집안의 하프 마운틴 별장에 도착했을 때, 하은철은 하경철과 이야기를 마치고 서재에서 나오는 길이었다.보아하니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삼촌 오셨어요?”하지환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할아버지가 뭔 일로 부르셨어?”하은철은 별로 탐탁지 않은 듯 얘기했다.“저더러 윤이서 남편을 그만 찾으라네요.”하지환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하은철의 다음 얘기를 기다렸다.“그러면, 내가 이서의 마음을 되돌리는데 차질이 생긴단 말이에요.”“…….”“큰 집 도련님, 어르신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사 주경모가 때마침 나타났다.하지환은 가볍게 ‘응’하고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얼굴에는 그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서재에 들어서서 의자에 앉아 있는 하경철에게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작은 아빠.”하경철이 웃으며 말했다.“왔어? 자, 앉아.”하지환은 별 내색없이 하경철 맞은편에 앉았다.“모레 이서 남편을 만날 예정이다.”하경철은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너희 쪽에 혹시 그 사람에 대한 정보 같은 게 있나?”하지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어흠, 너도 못 찾아낸다면, 그 사람 정말 대단한 사람인데…….” 하경철은 하지환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지환아, 너 혹시 모레 시간 되니?”하지환은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났다.“작은 아빠는 제가 그 자리에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하경철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그래, 너도 알아내지 못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은 아닌가 보다. 외국인일 가능성이 높아. 넌 외국에서 오래 살았으니, 어쩌면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네.”하지환은 입꼬리를 보기 좋게 올리며 웃음을 지었다.“그럴 수도요. 하지만 그날 정말 시간을 내기 힘들 거 같아요. 작은 아빠, 죄송해요. 도움을 못 드려서…….” 하경철도 굳이 강요하지 않았다.“그럼, 내가 만나보고 와서, 다시 너랑 상의하마.”“네. 그러시죠.”……이틀 뒤.불필요한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