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씨 본가.심가은은 1층 거실로 내려오자마자 찰싹 붙어 있는 심동과 장희령을 보았다.그녀는 일부러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인기척을 냈다.그제야 두 사람은 떨어져 고개를 들어 심가은의 방향을 바라보았다.심가은이 나오는 것을 보고 심동은 일어섰다.“가은아, 드디어 방에서 나왔구나.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말만 해 봐. 오빠가 다 사줄게.”“됐어, 약속 있어.”심가은은 장희령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바깥소문이 거짓은 아니었다.둘은 확실히 사이가 좋지 않다.그 이유도 간단했다.장희령이 원래는 소지엽을 좋아했는데, 후에 왠지 모르게 그녀의 오빠와 사귀게 되었다.‘말끝마다 오빠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래 봤자 오빠의 돈을 사랑하는 거다.’‘그렇지 않으면 지갑에 소지엽 대학 시절 졸업사진을 소장하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누구 만난다고?” 심동은 다정하게 물었다.장희령도 가식적으로 입을 열었다“가은아, 오빠가 데려다 줄까?”“아니야.”심가은은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정말이지 장희령과 같이 연기할 마음은 없었다.“이서랑 만나기로 했어. 좀 늦을 거야.”이서를 만난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장희령은 황급히 심가은의 팔을 잡아당겼다.“이서 만난다고? 둘이 친하니? 이전에 왜 네가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지?”듣다 못한 심가은은 폭발하고 말았다.“저기,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당신 지금 우리 오빠 여자 친구일 뿐이거든.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진 장희령은 아무 말 않고 잠자코 있다가 기분을 가라 앉히고 평온한 말투로 얘기했다.“가은아, 너 지금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 괜찮아. 그래도 너 혼자 보내는 건 마음이 안 놓인다. 이렇게 하자, 내가 같이 가줄게.”“맘대로 하든가.”말을 마치고는 휙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더는 장희령과 말 섞고 싶지 않았다.차에 오른 심가은은 창밖만 뚫어지게 내다보았다.장희령은 이서를 만나기 위해 말없이 참았다.차가 출발하자,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가
점원이 싱글벌글하며 말했다. “네, 손님, 잠시만요.”말하면서 점원은 수십 개의 넥타이를 모두 꺼내 장희령의 앞에 놓았다.“고객님, 어떤 것이 마음에 드세요. 말씀해 주시면 예쁘게 포장해 드릴게요!”장희령은 점원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이서에게 물었다.“이서 씨, 어느 게 좋을까?”“…”점원은 그제야 이서에게 시선을 돌렸다.“이분은?”이름이 귀에 익었지만, 얼굴을 봐서는 어느 집 대가규수인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심가은은 이서를 잡아당겼다.“내가 사줄게. 다른 매장 가보자.”“…”‘아니, 지금 이 둘 뭐하는 거야?’“있잖아.” 이서는 입을 열려고 했다.“두 사람 호의는 마음으로 받을 테니 선물은 그래도 내가 사는 걸로…”“안돼!”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입을 열었다.“우리 둘 중 누구야? 한 명만 골라 봐.”이서는 난처한 듯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앞다투어 대신 결제하겠다는 경우는 처음이었다.점원도 이런 상황을 처음 보는지 옆에 멍하니 서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안이 벙벙했다.“먼저 진정들 하시고.”“우리가 어때서?” 두 사람은 다시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이서 씨, 얼른 정해.”이서는 정말 두사람에게 소리라고도 지르고 싶었다. 그렇게 할 일 없는지, 왜들 이리 유치한지?!하지만 오늘 나온 목적을 생각하고는 인내심을 갖고 말했다. “그럼 가은 씨 부탁해. 고마워.”장희령을 화나게 해도 상관없다. 심가은이 홧김에 집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오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될 테니.역시나 장희령의 안색이 달라졌다.“이서 씨, 정말 가은 씨로 정한 거야?”이서는 다시 이마를 짚었다.“네.”사실 그녀에겐 선택권이 없었다.고르고 싶지도 않았다.승리한 심가은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들었지, 이서 씨가 나를 택했어, 당신이 졌다고!”장희령은 손을 꽉 잡으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래, 네가 이겼어.”장희령의 말에 심가은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렇게 빨리 패배를 인정할 줄은 생각지도
이렇게 된 이상 이서도 장희령과 계속 얽히고 싶지 않았다.“희령 씨가 나랑 갑자기 친한 척하는 거, 그 이유를 난 잘 알고 있어요.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확답을 듣고 싶다면 해드리죠. 우린 힘들 거 같아요!”장희령은 안색이 변했다.“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아? 나랑 친구하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고?”“그건 그들 사정이고, 나는 그럴 생각이 없어요.”말을 마치고 이서는 옆에서 좋은 구경거리 감상하고 있는 심가은에게 말했다.“우리 가자.”심가은은 앞으로 나가 득의양양하게 이서의 팔을 잡고 뒤돌아서서 장희령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속이 정말 시원했다.장희령은 화가 나서 얼굴이 일그러졌다.빌딩을 나서자마자 심가은은 참지 못하고 말했다.“이서 씨, 방금 너무 멋졌어! 장희령은 세상의 중심이 자기인 줄 아는 사람이야. 그래서 자기밖에 몰라!”이서는 가볍게 웃었다. 그녀는 굳이 두 사람의 원한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았다.“레스토랑은 이미 예약해 뒀으니, 거기로 가자.”“그래, 출발!”심가은은 완전히 흥분된 상태였다.장희령이 다른 사람 앞에서 코가 납작해진 걸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너무 통쾌했다. 이따가 축하주라도 한 잔 마셔야 하나?’ 장희령이 생각했다.레스토랑에 도착한 이서는 화장실에 가는 틈을 타 하이먼 스웨이에게 전화를 걸었다.“엄마, 우리 레스토랑에 도착했어요.”[알았어, 사람은 다 섭외했으니, 넌 밥 먹고 자연스럽게 가면 되.]이서는 ‘응’ 하고 전화를 끊었다.밖으로 나간 지 몇 걸음 안 되어 핸드폰 화면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확인해 보니, 낯선 번호였다. 게다가 외국에서 걸려온 전화였다.머뭇거리며 받았는데 전화기 너머는 조용했다.“여보세요?” 이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여전히 아무 소리가 없었다.“안 들리세요? 말씀 없으시면 전화 끊겠습니다…”이서가 전화를 끊으려 했다.저쪽에서 깨끗하고 맑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서야, 나야.]이서는 소지엽의 목소리라는 것을
소지엽은 아쉬운 기력이 역력했다.[그래, 그럼 끊을게.]이서는 ‘응’ 하고 핸드폰을 내려놓고 룸으로 걸어갔다.룸에 들어가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핸드폰 화면은 마침 꺼졌다.눈치 빠른 심가은은 액정에서 소지엽 세 글자를 보았다.순간 소지엽과 맞선 보던 날의 모습이 문득 떠올라 눈빛이 다소 차가워졌다.“지엽 씨와 아직 연락 있어?”“응. 아주 가끔.”“그쪽에서 연락 오는 거야, 아니면 이서 씨가 하는 거야?”이서는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음… 글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왜? 갑자기?”“아무것도 아냐…”심가은은 웃었다.다만 문득 소지엽과의 관계에서 매번 그녀가 연락했던 게 생각했다. 소지엽은 한번도 주동적으로 연락한 적이 없었다.그의 성격상 다른 사람에게 연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꼭 그런 건 아닌 듯했다.“지엽 씨가 자기한테는 좀 특별한 것 같은데…”심가은은 일부러 무심한 척 물었다.이서는 갑자기 속으로 움찔했다.“글쎄? 친구니까.”“지엽 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이서는 침착하게 손을 닦았다.“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 알 바는 아니고 간섭할 수 없고… 내 처신이나 잘하면 되지 뭐. 나 이미 결혼했잖아. 남편도 나 많이 아껴줘. 다른 사람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심가은은 턱을 괴고 이서를 보며 가식적으로 웃었다.아쉽게도 소지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그녀는 젓가락을 집고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이서는 눈치채지 못하고 열심히 밥만 먹었다.식사가 끝나자 두 사람은 문 앞에서 갈라섰다.이서의 차는 레스토랑 주변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레스토랑 입구에서 멈추었다.그녀는 차에서 내려 다시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매니저는 이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포장된 컵과 수저 등을 이서에게 건네주었다.“방금 그 아가씨가 사용했던 물건입니다.”“감사합니다.”매니저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천만에요.”“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네, 안녕히 가세요!”
10여 년 기다렸던 소식을 하이먼 스웨이는 드디어 듣게 되었다.그녀는 한동안 제자리에 서서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한참이 지나서야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돌려 이서에게 물었다.“이서야, 나 꿈 꾸는 거 아니지? 정말 내 딸 찾은 거 맞지?!”“엄마, 꿈 아니에요. 축하해요.”이서가 기뻐하며 말했다.“드디어 친딸을 찾았어요!”“나…”하이먼 스웨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서를 껴안았다.“이서야, 고마워. 다 네 덕이다. 네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친자 확인을 할 수 없었을 텐데.”이서는 하이먼 스웨이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녀가 마음을 가라앉히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엄마, 이제 어쩔 생각이에요? 그냥 신분을 밝힐 건가요?”하이먼 스웨이는 머뭇거렸다.“이서야, 가은이와 안지 오래 되었니? 우리 가은이는 어떤 아이야? 내가 지금 심씨 집 가서 진실을 밝힌다면 우리 가은이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하이먼 스웨이가 많은 질문을 연달아 하자 이서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엄마, 우선 조급해 말고 다시 잘 생각해봐요, 가능한 상처받지 않게 하면서 진실을 말해주는 게 좋을 거 같아요.”“그래, 네 말이 맞다. 나 서두르지 않을게, 하나도 안 급해.”입으로는 그렇게 말하지만 전혀 그럴 수 없었다. 십여 년 동안 찾아 헤맨 딸이다.잠자코 생각하니 또 가슴이 아파왔다.이서는 하이먼 스웨이를 호텔로 데려다 준 후에야 집으로 돌아갔다.오늘 하루 종일 뛰어다니다가 집에 돌아오자 이서는 바로 지쳐 쓰러졌다.지환의 품에 안긴 이서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정말 잘 됐죠. 엄마가 드디어 친딸을 찾았어요.” 이서는 지환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왠지 모르게 마음속은 허탈했다.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라 곧 엄마의 사랑을 잃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섭섭한 건 어쩔 수 없었다.하이먼 스웨이의 사랑은 따뜻하고 세심했다. 끝없이 주고도 바라지도 않았다.그녀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그녀도 점차 어머니 역할을 잘 할 수 있을 거는 자신감도 생기게 되었다.
지환도 이서의 비명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왜 그래?”지환이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 이서는 지환의 품에 와락 안겼다. 그의 품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은 이서에게 안도감을 주고 있었지만 두 팔은 자신도 모르게 여전히 덜덜 떨고 있었다.지환은 손으로 이서의 팔을 어루만졌다.그제야 악몽으로 인해 경직했던 몸이 서서히 풀렸다.“악몽 꿨어?” 지환은 이서를 꼭 껴안고 애처롭게 그녀를 바라보았다.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저었다.그녀는 악몽에 대해 얘기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환이 알게 되면 틀림없이 걱정할 테니.“자기야.” 지환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악몽 꾼 거 아니야?”“아니에요.” 그녀는 부인했다.“가위눌렸어요. 괜찮아요, 얼른 자요.”이서를 보고 침묵하던 지환은 이서의 머리를 어루만졌다.“응, 자기도 얼른 자.”그녀는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눈만 감으면 어르신이 침대맡에서 그녀를 쳐다보는 장면이 떠올랐다.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건 지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아침이 되자 이서는 구실을 만들어 외출했다. 지환도 그제야 일어나 이상언에게 전화를 걸었다.“마이클 천 의사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마이클 천은 이상언이 섭외한 정신건강 상담 전문의이다.그들은 이서의 상황에 대해 전화로 얘기한 적이 있다. 마이클 천은 의료진이 개입한 약물치료보다는 스스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그러나 현재의 상황으로 봤을 때 이서가 스스로 헤쳐 나올 수 있을지 지환은 심히 걱정이 되었다.[왜?]이상언이 되물었다.[이서 씨한테 뭔 일 있어?]“주소 줘!” 지환이는 이를 악물었다.이상언은 어쩔 수 없이 마이클 천의 주소를 지환에게 주었다.전화를 끊고 잠시 고민하던 이상언은 마이클 천이 있는 호텔로 향했다.두 사람은 호텔 1층 카페에서 만났다. 이상언은 지환을 뒤따라가며 물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급하게 마이클 천을 찾는
“대표님, 사모님의 경우 현재 가장 좋은 방법은 자가 치유입니다. 지금 약물 치료나 물리 치료를 진행한다면 향후 더 큰 고통이 따를 겁니다.”이상언은 지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지환아, 우리 모두 이서 씨가 빨리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길 바라고 있어. 너도 알다시피 마이클 천은 이 분야 최고의 정신과 의사야. 그분은 PTSD 방면에서 최고권의자라고. 이서 씨는 분명히 자가 치유로 완쾌할 수 있을 거야. 현재로선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고. 이런 경우 굳이 약물을 사용할 필요 없어. 심적 육체적 고통을 겪을 필요 없거든. 친구야, 이서 씨가 빨리 고통 속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너의 마음은 잘 알아. 하지만 지금 이 과정은 이서 씨 스스로 이겨내야 해. 정말 부득이하게 물리치료나 약물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옆에서 이서 씨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데 어쩌면 그게 지금보다 훨씬 괴롭고 힘들 수 있어.”지환은 주먹을 들어 앞에 있는 책상을 쾅 쳤다.그 진동으로 책상 위에 놓인 물컵의 물이 넘쳐흘렀다.마이클 천은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겁에 질려 불안한 눈빛으로 이상언을 바라보았다.이상언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나가라고 표시했다.마이클 천은 이때다 싶어 얼른 방문을 나섰다.문이 닫히자 이상언은 지환의 뒤로 가서 말했다.“친구야, 지금 너의 심경을 잘 알겠지만, 나도 친구로서 한 마디 해야겠어. 지금 이서 씨를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니가 이성을 잃지 않는 거야. 진정 좀 하고! 난 마이클 천이랑 밥 먹고 올게.”말이 끝나자 이상언도 문을 열고 나갔다.방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지환만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로 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하경철, 작은아빠, 정말 대단하다.’‘이렇게 큰 폭탄을 던져주고 돌아가시다니.’‘죽어서도 기어코 이서를 하씨 집안에 들이려고 하네. 기왕 이렇게 된 이상 더는 하씨 가문을 봐줄 필요가 없어졌어. 민씨 그룹을 인수한 후 인적 물적 자원을 이용
이서는 눈썹을 찡그렸다.‘미친 놈!’‘윤수정이 생명의 은인이든 아니든 내 어렸을 적 기억이랑 무슨 상관 있다고.’“그러니까... 어렸을 때 수정이가 네 목숨을 구했으니 지금 걔가 무슨 짓을 하든 무조건 다 봐 준다는 거야? 날 죽이려고 드는데도?”하은철은 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어렸을 때 기억 전혀 없어?”“어렸을 때? 무슨 일?”“우리가 납치되었던 일말이야.” 하은철은 십여 년 전 일어난 일을 이서에게 낱낱이 말했다. 그러고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이서의 얼굴에서 약간의 얼굴 변화를 볼 수 있기를 기대했다.그러나 그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이서는 고개를 저었다.“아무 기억이 없는데?”“아마 그 때 힘들었던 기억 때문에 부분적인 기억상실증이 생겼을 수도 있어. 그 일 이후 네가 출국했다고 할아버지한테 들었거든...”이서의 머릿속에 몇 개의 희미한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그런데 기억의 파편들을 쫓으려 하자 오히려 그 기억들이 자취를 감추었다.“그랬어? 전혀 기억이 없는데? 그럼 내가 너 때문에 해외 나간 거야?”이서가 어렸을 때부터 성지영은 매일 그녀에게 장차 커서 하씨 집안의 며느리가 되어야 한다고 세뇌시켰다.해외에 나가는 것도 더 나은 교육을 받기 위해서였고,하씨 집안에 걸 맞는 며느리가 되기 위해서였다.“너 잘못 기억한 거 아니야...?”하은철은 잠시 침묵하다가 문득 깨달은 기색을 드러냈다.“기억 못하는 게 아니고, 해리성 기억상실증도 아니야. 누군가가 너의 기억을 조작한 거야.네가 출국한 것도 그 납치 사건 때문이거든. 할아버지도 네가 심리상담이 필요할 거라 말씀하셨어.”“심리 상담?”이서의 머릿속에 또 일부 화면이 스쳐 지나갔다.이번에는 또렷했다.그녀가 대여섯 살 때인 것 같았다.어느 날 성지영이 그녀를 데리고 의사에게 갔다.그 때 그녀는 정신과 의사라는 몇 글자를 정확하게 읽어냈다.성지영은 그런 그녀를 똑똑하다고 칭찬까지 했다.그때의 성지영은 정말 따뜻했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