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무슨 일 있어요?” 이서가 웃으며 말했다.“말씀도 안 하셨는데 제가 어떻게 거절합니까? 흐흐흐.”하이먼 스웨이도 따라 웃었다. 목소리도 다소 진정되었다.[있잖아. 사설탐정 말로는 심씨 가문의 심가은이 내 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네.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 아가씨가 요 며칠 집에 틀어박혀 꼼짝 않고 있대. 탐정들이 DNA 샘플을 채취해야 하는데 말이야. 내가 마음이 급해서… 그래서 말인데 이서는 무슨 방법이라도 있을까?]“심가은이요?” 이서는 왠지 이 이름이 귀에 익었다. 한참을 생각해서야 드디어 기억났다. 이전에 소지엽과 맞선을 본 그 여자…“그분이 엄마 따님이었군요.” 이서는 놀랐다.[아는 사이야?]“아는 사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친구의 친구예요.”이서는 계속 말을 이었다.“혹시 가은 씨 모발이나 침 등으로 DNA 검사 의뢰하시려는 거죠?”[맞아, 맞아, 하지만 외출하지 않고 집에만 있으니 손을 쓸 수가 없네.]이서는 잠시 고민한 뒤 말했다.“방법 있어요.”[벌써? 빨리 말해봐.] 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나머지 평소의 차갑고 시크함을 잃었다.“방법은 아주 간단해요. 내가 그녀와 약속 잡을게요. 카페를 찾든 레스토랑을 찾든 사전에 가게의 종업원에게 컵이나 식기 챙겨 놓으라고 하면 되죠.”하이먼 스웨이도 즉시 이 방법에 동의했다.[좋아, 이 방법이 좋아, 이서야, 괜히 너를 귀찮게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아니예요. 엄마.”이서는 바로 말을 이었다.“그럼, 지금 약속 잡을게요.”[그래, 역시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이서뿐이야. 우리 모녀가 상봉하게 되면 그땐 내가 톡톡히 한 턱 쏠게.]“엄마, 그런 말씀 마세요. 약속 잡고 연락드릴게요.”이서는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심가은에게 전화를 걸었다.심가은은 한참 지나서야 전화를 받았다. 엄청 피곤한 목소리였다. 큰 충격을 받았거나.“가은 씨, 나 윤이서인데. 나 기억해… 요?”심가은은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다.[응, 무슨 일인데?
심가은도 이서의 의견이 필요 없었다. 오랫동안 마음에 억눌렸던 감정을 털어놓을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내가 좋아하는 거 맞아. 정말 많이 좋아해.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짝사랑해 왔거든. 비록 다들 그 사람이 사생아라고 가문의 천덕꾸러기라고 얘기해도 난 그래도 그 사람이 너무 좋았어. 맞선 자리에 나온다고 했을 때 얼마나 좋아했는데 글쎄… 그 사람 마음속에 이미 다른 사람이 있었어.]심가은은 또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계속 말을 아끼던 이서는 심가은이 지친 기색을 표하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한잠 푹 자. 아마 내일 자고 일어나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을 거야.” [정말 그럴까?] 심가은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이서는 계속 휴대전화를 들고 있다가 그곳에서 숨소리가 들려와서야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왜 이렇게 오래 이야기해?” 이서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지환은 2층에 올라가 일을 보았는데 글쎄 한시간이 넘도록 이서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실연당했으니 하소연할 곳이 필요했나 봐요.”전화기 너머에서 심가은의 울부짖음만 들어도 이서는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사랑으로 상처받은 모든 영혼들을 동정했다.그녀와 지환은 정말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이 행운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비록 지금은 악몽을 꾸지 않지만, 매번 행복하다고 느낄 때마다 귓가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윤이서, 너 양심이 있긴 한거니?!]“자기야…”“응?” 이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그래?”지환은 이서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이서의 시선을 막아섰다.“우리 당분간 아파트로 가서 살까?”“왜 갑자기 이사가요?”“작은 집에 살면 더 아늑하고…”그는 이서의 허리를 껴안았다.“자기야, 아파트 가서 살자. 난 자기와 더 많은 프라이버시를 가지고 싶어.”이서는 웃으며 말했다.“그래요.”그녀는 지환이 왜 이사를 하자고 하는지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하경철이 여기서 다쳐서 돌아가셨으니 이서에게 안 좋은 기억
심씨 본가.심가은은 1층 거실로 내려오자마자 찰싹 붙어 있는 심동과 장희령을 보았다.그녀는 일부러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인기척을 냈다.그제야 두 사람은 떨어져 고개를 들어 심가은의 방향을 바라보았다.심가은이 나오는 것을 보고 심동은 일어섰다.“가은아, 드디어 방에서 나왔구나.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말만 해 봐. 오빠가 다 사줄게.”“됐어, 약속 있어.”심가은은 장희령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바깥소문이 거짓은 아니었다.둘은 확실히 사이가 좋지 않다.그 이유도 간단했다.장희령이 원래는 소지엽을 좋아했는데, 후에 왠지 모르게 그녀의 오빠와 사귀게 되었다.‘말끝마다 오빠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래 봤자 오빠의 돈을 사랑하는 거다.’‘그렇지 않으면 지갑에 소지엽 대학 시절 졸업사진을 소장하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누구 만난다고?” 심동은 다정하게 물었다.장희령도 가식적으로 입을 열었다“가은아, 오빠가 데려다 줄까?”“아니야.”심가은은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정말이지 장희령과 같이 연기할 마음은 없었다.“이서랑 만나기로 했어. 좀 늦을 거야.”이서를 만난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장희령은 황급히 심가은의 팔을 잡아당겼다.“이서 만난다고? 둘이 친하니? 이전에 왜 네가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지?”듣다 못한 심가은은 폭발하고 말았다.“저기,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당신 지금 우리 오빠 여자 친구일 뿐이거든.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진 장희령은 아무 말 않고 잠자코 있다가 기분을 가라 앉히고 평온한 말투로 얘기했다.“가은아, 너 지금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 괜찮아. 그래도 너 혼자 보내는 건 마음이 안 놓인다. 이렇게 하자, 내가 같이 가줄게.”“맘대로 하든가.”말을 마치고는 휙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더는 장희령과 말 섞고 싶지 않았다.차에 오른 심가은은 창밖만 뚫어지게 내다보았다.장희령은 이서를 만나기 위해 말없이 참았다.차가 출발하자,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가
점원이 싱글벌글하며 말했다. “네, 손님, 잠시만요.”말하면서 점원은 수십 개의 넥타이를 모두 꺼내 장희령의 앞에 놓았다.“고객님, 어떤 것이 마음에 드세요. 말씀해 주시면 예쁘게 포장해 드릴게요!”장희령은 점원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이서에게 물었다.“이서 씨, 어느 게 좋을까?”“…”점원은 그제야 이서에게 시선을 돌렸다.“이분은?”이름이 귀에 익었지만, 얼굴을 봐서는 어느 집 대가규수인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심가은은 이서를 잡아당겼다.“내가 사줄게. 다른 매장 가보자.”“…”‘아니, 지금 이 둘 뭐하는 거야?’“있잖아.” 이서는 입을 열려고 했다.“두 사람 호의는 마음으로 받을 테니 선물은 그래도 내가 사는 걸로…”“안돼!”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입을 열었다.“우리 둘 중 누구야? 한 명만 골라 봐.”이서는 난처한 듯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앞다투어 대신 결제하겠다는 경우는 처음이었다.점원도 이런 상황을 처음 보는지 옆에 멍하니 서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안이 벙벙했다.“먼저 진정들 하시고.”“우리가 어때서?” 두 사람은 다시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이서 씨, 얼른 정해.”이서는 정말 두사람에게 소리라고도 지르고 싶었다. 그렇게 할 일 없는지, 왜들 이리 유치한지?!하지만 오늘 나온 목적을 생각하고는 인내심을 갖고 말했다. “그럼 가은 씨 부탁해. 고마워.”장희령을 화나게 해도 상관없다. 심가은이 홧김에 집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오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될 테니.역시나 장희령의 안색이 달라졌다.“이서 씨, 정말 가은 씨로 정한 거야?”이서는 다시 이마를 짚었다.“네.”사실 그녀에겐 선택권이 없었다.고르고 싶지도 않았다.승리한 심가은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들었지, 이서 씨가 나를 택했어, 당신이 졌다고!”장희령은 손을 꽉 잡으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래, 네가 이겼어.”장희령의 말에 심가은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렇게 빨리 패배를 인정할 줄은 생각지도
이렇게 된 이상 이서도 장희령과 계속 얽히고 싶지 않았다.“희령 씨가 나랑 갑자기 친한 척하는 거, 그 이유를 난 잘 알고 있어요.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확답을 듣고 싶다면 해드리죠. 우린 힘들 거 같아요!”장희령은 안색이 변했다.“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아? 나랑 친구하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고?”“그건 그들 사정이고, 나는 그럴 생각이 없어요.”말을 마치고 이서는 옆에서 좋은 구경거리 감상하고 있는 심가은에게 말했다.“우리 가자.”심가은은 앞으로 나가 득의양양하게 이서의 팔을 잡고 뒤돌아서서 장희령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속이 정말 시원했다.장희령은 화가 나서 얼굴이 일그러졌다.빌딩을 나서자마자 심가은은 참지 못하고 말했다.“이서 씨, 방금 너무 멋졌어! 장희령은 세상의 중심이 자기인 줄 아는 사람이야. 그래서 자기밖에 몰라!”이서는 가볍게 웃었다. 그녀는 굳이 두 사람의 원한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았다.“레스토랑은 이미 예약해 뒀으니, 거기로 가자.”“그래, 출발!”심가은은 완전히 흥분된 상태였다.장희령이 다른 사람 앞에서 코가 납작해진 걸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너무 통쾌했다. 이따가 축하주라도 한 잔 마셔야 하나?’ 장희령이 생각했다.레스토랑에 도착한 이서는 화장실에 가는 틈을 타 하이먼 스웨이에게 전화를 걸었다.“엄마, 우리 레스토랑에 도착했어요.”[알았어, 사람은 다 섭외했으니, 넌 밥 먹고 자연스럽게 가면 되.]이서는 ‘응’ 하고 전화를 끊었다.밖으로 나간 지 몇 걸음 안 되어 핸드폰 화면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확인해 보니, 낯선 번호였다. 게다가 외국에서 걸려온 전화였다.머뭇거리며 받았는데 전화기 너머는 조용했다.“여보세요?” 이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여전히 아무 소리가 없었다.“안 들리세요? 말씀 없으시면 전화 끊겠습니다…”이서가 전화를 끊으려 했다.저쪽에서 깨끗하고 맑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서야, 나야.]이서는 소지엽의 목소리라는 것을
소지엽은 아쉬운 기력이 역력했다.[그래, 그럼 끊을게.]이서는 ‘응’ 하고 핸드폰을 내려놓고 룸으로 걸어갔다.룸에 들어가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핸드폰 화면은 마침 꺼졌다.눈치 빠른 심가은은 액정에서 소지엽 세 글자를 보았다.순간 소지엽과 맞선 보던 날의 모습이 문득 떠올라 눈빛이 다소 차가워졌다.“지엽 씨와 아직 연락 있어?”“응. 아주 가끔.”“그쪽에서 연락 오는 거야, 아니면 이서 씨가 하는 거야?”이서는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음… 글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왜? 갑자기?”“아무것도 아냐…”심가은은 웃었다.다만 문득 소지엽과의 관계에서 매번 그녀가 연락했던 게 생각했다. 소지엽은 한번도 주동적으로 연락한 적이 없었다.그의 성격상 다른 사람에게 연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꼭 그런 건 아닌 듯했다.“지엽 씨가 자기한테는 좀 특별한 것 같은데…”심가은은 일부러 무심한 척 물었다.이서는 갑자기 속으로 움찔했다.“글쎄? 친구니까.”“지엽 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이서는 침착하게 손을 닦았다.“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 알 바는 아니고 간섭할 수 없고… 내 처신이나 잘하면 되지 뭐. 나 이미 결혼했잖아. 남편도 나 많이 아껴줘. 다른 사람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심가은은 턱을 괴고 이서를 보며 가식적으로 웃었다.아쉽게도 소지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그녀는 젓가락을 집고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이서는 눈치채지 못하고 열심히 밥만 먹었다.식사가 끝나자 두 사람은 문 앞에서 갈라섰다.이서의 차는 레스토랑 주변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레스토랑 입구에서 멈추었다.그녀는 차에서 내려 다시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매니저는 이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포장된 컵과 수저 등을 이서에게 건네주었다.“방금 그 아가씨가 사용했던 물건입니다.”“감사합니다.”매니저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천만에요.”“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네, 안녕히 가세요!”
10여 년 기다렸던 소식을 하이먼 스웨이는 드디어 듣게 되었다.그녀는 한동안 제자리에 서서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한참이 지나서야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돌려 이서에게 물었다.“이서야, 나 꿈 꾸는 거 아니지? 정말 내 딸 찾은 거 맞지?!”“엄마, 꿈 아니에요. 축하해요.”이서가 기뻐하며 말했다.“드디어 친딸을 찾았어요!”“나…”하이먼 스웨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서를 껴안았다.“이서야, 고마워. 다 네 덕이다. 네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친자 확인을 할 수 없었을 텐데.”이서는 하이먼 스웨이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녀가 마음을 가라앉히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엄마, 이제 어쩔 생각이에요? 그냥 신분을 밝힐 건가요?”하이먼 스웨이는 머뭇거렸다.“이서야, 가은이와 안지 오래 되었니? 우리 가은이는 어떤 아이야? 내가 지금 심씨 집 가서 진실을 밝힌다면 우리 가은이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하이먼 스웨이가 많은 질문을 연달아 하자 이서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엄마, 우선 조급해 말고 다시 잘 생각해봐요, 가능한 상처받지 않게 하면서 진실을 말해주는 게 좋을 거 같아요.”“그래, 네 말이 맞다. 나 서두르지 않을게, 하나도 안 급해.”입으로는 그렇게 말하지만 전혀 그럴 수 없었다. 십여 년 동안 찾아 헤맨 딸이다.잠자코 생각하니 또 가슴이 아파왔다.이서는 하이먼 스웨이를 호텔로 데려다 준 후에야 집으로 돌아갔다.오늘 하루 종일 뛰어다니다가 집에 돌아오자 이서는 바로 지쳐 쓰러졌다.지환의 품에 안긴 이서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정말 잘 됐죠. 엄마가 드디어 친딸을 찾았어요.” 이서는 지환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왠지 모르게 마음속은 허탈했다.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라 곧 엄마의 사랑을 잃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섭섭한 건 어쩔 수 없었다.하이먼 스웨이의 사랑은 따뜻하고 세심했다. 끝없이 주고도 바라지도 않았다.그녀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그녀도 점차 어머니 역할을 잘 할 수 있을 거는 자신감도 생기게 되었다.
지환도 이서의 비명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왜 그래?”지환이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 이서는 지환의 품에 와락 안겼다. 그의 품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은 이서에게 안도감을 주고 있었지만 두 팔은 자신도 모르게 여전히 덜덜 떨고 있었다.지환은 손으로 이서의 팔을 어루만졌다.그제야 악몽으로 인해 경직했던 몸이 서서히 풀렸다.“악몽 꿨어?” 지환은 이서를 꼭 껴안고 애처롭게 그녀를 바라보았다.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저었다.그녀는 악몽에 대해 얘기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환이 알게 되면 틀림없이 걱정할 테니.“자기야.” 지환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악몽 꾼 거 아니야?”“아니에요.” 그녀는 부인했다.“가위눌렸어요. 괜찮아요, 얼른 자요.”이서를 보고 침묵하던 지환은 이서의 머리를 어루만졌다.“응, 자기도 얼른 자.”그녀는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눈만 감으면 어르신이 침대맡에서 그녀를 쳐다보는 장면이 떠올랐다.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건 지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아침이 되자 이서는 구실을 만들어 외출했다. 지환도 그제야 일어나 이상언에게 전화를 걸었다.“마이클 천 의사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마이클 천은 이상언이 섭외한 정신건강 상담 전문의이다.그들은 이서의 상황에 대해 전화로 얘기한 적이 있다. 마이클 천은 의료진이 개입한 약물치료보다는 스스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그러나 현재의 상황으로 봤을 때 이서가 스스로 헤쳐 나올 수 있을지 지환은 심히 걱정이 되었다.[왜?]이상언이 되물었다.[이서 씨한테 뭔 일 있어?]“주소 줘!” 지환이는 이를 악물었다.이상언은 어쩔 수 없이 마이클 천의 주소를 지환에게 주었다.전화를 끊고 잠시 고민하던 이상언은 마이클 천이 있는 호텔로 향했다.두 사람은 호텔 1층 카페에서 만났다. 이상언은 지환을 뒤따라가며 물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급하게 마이클 천을 찾는
차가 심씨 가문의 고택에 다다르자, 이서는 가장 먼저 지엽을 발견했다.지엽 역시 차에서 내리는 지환을 보고 얼굴이 굳어 버렸는데, 특히 이서가 자연스레 지환의 팔짱을 낀 순간, 지엽의 눈썹이 몇 번이나 심하게 떨렸다. “두 사람...” 지엽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고택의 대문이 열리며 소희가 나왔다. “오셨네요!” 몇 초 후, 두 사람이 팔짱을 낀 모습을 본 소희는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두 분... 화해하신 거예요?” 이서는 지엽의 반응을 슬쩍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됐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엽이 떠난 뒤에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희는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하나 언니는 아직 모르죠? 지금 바로 알려줘야겠어요!” 이서는 다급하게 소희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 “잠깐만!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소희 씨 얘기부터 하자. 지엽아, 얼른 조사한 결과부터 소희 씨한테 보여줘.”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이 함께 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고, 이서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소희에게 조사 결과를 건넸다. “소희 씨에게 누명을 씌운 건 심태윤이었어요. 소희 씨가 여태 친동생인 줄 알았던 그 사람이요.”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 쪽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그 안에 다 적혀 있으니까 잘 읽어보면 돼요...” 지엽이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서야, 잠깐 나랑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서는 지환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서가 지환의 팔에서 손을 빼내려 하자, 지환은 더욱 강하게 이서의 손을 잡았다. 이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환을 올려다보며 눈빛으로 놓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 대표님, 제가 이서랑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면
이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같이 먹고, 같이 잔다고요?”지환은 그 말에 이서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지만,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응, 어쩔 수 없잖아. 어둠의 호리병을 반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당분간은 같이 지내야겠어요.” 지환의 미소는 더 깊어졌는데,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하도훈은 언제 처리할 수 있어요? 설마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죠?” 지환은 깊은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이 다크 웹의 1위와 2위의 위치만 알아낸다면, 하도훈과 정면 승부를 가릴 수 있을 텐데 말이지...”“어둠의 호리병은 그 둘의 위치를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둠의 호리병도 순위에 올라 있는 킬러일 뿐, 그 사람들과 친구는 아니거든.” “단서도 전혀 없어요?” 지환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없어.” 이서는 실망이라기보다는 하도훈이라는 골칫거리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럼, 우린 이제 어디로 가요?” “회사로.” 고개를 끄덕인 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이 탄 차는 윤씨 그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이서는 지엽의 전화를 받았다. “소희 씨에 대한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된 거야?”이서는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얼른 가서 소희 씨한테 알려줘. 분명히 엄청나게 기뻐할 거야.” 수화기 너머의 지엽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이서야, 난 소희 씨랑 이제 막 알게 된 사이라 조금 어색한데, 네가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이서는 곁눈으로 지환을 한 번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 순간, 이서를 태우고 있던 지환은 잠시 핸들을 놓칠 뻔했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
모두 반대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이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불만 있으면 사직서 쓰세요.” 이 한마디에, 회사 고위층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고 팀장님이 아닌 고 대표님이 된 거예요.”‘고 대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고이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새어 나오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기쁨에,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니 말이다.“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서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고, 고이서는 문이 닫힌 후에도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5분이 지나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의 책상으로 다가가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이 모든 건 다 내 거야...!’ 고이서는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대형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는 순간, 마치 가죽 의자가 아니라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만 차지하면... 다시 예전처럼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대로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반짝이는 보석도 망설임 없이 살 수 있고...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겠지! 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도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이서의 마음이 격렬히 요동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이서는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고,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김하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팀장님, 회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고 팀장’이라는 호칭에 고이서는 속으로 불쾌감을 느꼈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김하늘’이라는 이름을 새겨 두었다.‘며칠만 지나면 내가 정식으로 대표가 될 텐데, 그때 가장 먼저 잘라버릴 사람은 바로 네가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김하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
하지만 한 회사의 대표는 곧 하늘과도 같았다. “아직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서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한 김하늘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 사무실에도 CCTV가 있을 거 아니에요. 당장 영상 자료를 가져와 보라고요!” 김하늘은 당황하며 말했다. “대표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굳이 대표님께서 무안해지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아.’ 이 정도의 생각은 김하늘도 하고 있었으나, 이서는 아주 단호했다.“됐고, 당장 가져오세요.” 김하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고이서는 의아해졌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비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그럼 설마...’ ‘그 꽃차가 효과를 나타낸 건가?’이 가능성이 떠오르자 고이서는 속으로 흥분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대표님께서 CCTV를 보자고 하신다면 봐야죠. 만약 저희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대표님께서도 정확하게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렇죠, 대표님?”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니까요.” “만약 김 비서가 잘못 전한 거라면 엄하게 처벌하고, 정말 내가 말해놓고 잊어버린 게 맞다면, 그땐 분명히 사과할게요.” 이쯤 되니 김하늘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김하늘은 결국 CCTV 영상을 가져왔고, 영상 속에는 이서가 몇 번이나 김하늘에게 지시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고 팀장님을 불러주세요.”심지어 몇 분 간격으로 반복해서 지시하는 모습도 있었다. 이서는 그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내가 한 말이 맞다고...? 그런데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지?”“김 비서, 미안해요.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랬어요.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너무 미안해서 가방을 하나 선물로 주고 싶은데, 오늘 퇴근하기 전에 나한테 와서 받아 가요, 알겠죠?”김하늘은 이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애매하고 거절하기도
“진짜예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이서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지환은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이서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을 단순히 의례적인 질문으로 하지 않고, 정말 진심을 담아 묻곤 했다. 지환은 한동안 말없이 이서를 바라보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짜야. 생각해 봐. 네가 너희 가족 이야기를 고이서와 나눈 거잖아. 고이서 입장에선 너와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을 거야.” 이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그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병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고마워요.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어요.” 이서는 진심으로 말했고, 지환은 잠시 이서를 응시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응.”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요.” 이서는 문을 열고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서 내렸다. ...이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꽃차를 들고 의사를 찾아갔고, 의사는 꽃차를 검사한 뒤 말했다. “지난번과 성분이 똑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양이 더 많네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겠어요.” 의사는 몇 번 더 종이에 뭔가를 적더니 고개를 들었다.“3일이에요. 이 차를 마시면 3일 후에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서, 생각보다 더 조급했구나?’ 이서는 병실로 돌아가 꽃차를 우린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 덕분에 불면증이 해결됐어요. 요즘 정말 잘 자고 있답니다.]문구와 함께 사진을 올리자, 고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모든 걱정을 덜어냈다. 이제 남은 건 이서가 언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느냐였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고이서는 간절하게 속으로 외쳤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윤씨 그룹의 CEO 자리에 앉고 싶다고.’특히 이서가 회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주목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이서의 질투심이 극에 달했다.
고이서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참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듣고 있었어요. 대표님의 부모님께서 그렇게 하신 건, 뭔가 사정이 있으셨던 거 아닐까요?” 이서는 즉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짓을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어떤 부모가 자기 딸의 신장을 빼앗으려는 남자에게 딸을 내줄 수 있다는 거죠?” 고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서는 혼자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제가 두 사람의 친딸이 아니라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한 걸지도 모르죠.” 고이서는 숨이 잠시 멎는 듯했고, 이마에서 흐르던 땀은 이미 목덜미까지 흘러내려 고이서의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 세상에 다양한 부모가 있듯이, 부모의 형태도 여러 가지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서는 이미 땀에 젖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고이서를 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지운 뒤, 사과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미안해요. 이렇게 더운 날씨에 괜히 말을 길게 했나 봐요. 이만 돌아가 보세요. 더 있다가 더위 먹으면 안 되잖아요?” 고이서는 마치 구원을 받은 듯 서둘러 고개를 숙인 후 떠났고, 이서는 그녀의 젖은 등 뒤를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지환은 이서의 눈가에 깃든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웃고 싶으면 그냥 웃어.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그제야 이서는 참지 않고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이서가 지환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진심 어린 웃음을 짓는 순간이었다. 지환은 이서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이서는 그제야 눈치를 채고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오랜만에 네가 그렇게 웃는 걸 보니까 기록해 두고 싶어서. 혹시라도 불편하면 바로 지울게.” 이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황급히 말했다. “잠시만요!” 사진 속 이서의 얼굴은 오랜만에 활짝 핀 미소로 가득했다. ‘그러게, 이렇게 웃
“그럼요, 지금 바로 갈게요.” 이서는 전화를 끊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바쁘면 나 혼자 택시 타고 가도 돼요.” 하지만 지환은 이미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난 괜찮아.” 이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십여 분쯤 지나, 두 사람은 고이서를 마주했다.이서에게 꽃차를 건네주던 고이서는 지환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물론 지환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마주한 지환은 자료 속의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왠지 모르게 지환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품격이 있었다. 그 품격은 마치 높은 자리에 있는 왕처럼 다가왔고, 고이서는 알 수 없는 질투심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성지영과 윤재하는 분명 여러 번 말했었다. “윤이서 남편은 돈도 없는 놈이야.” 그런데도 고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야. 하은철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안녕하세요.” 고이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지환에게 인사를 건넸고, 이서의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윤 대표님, 꽃차가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고이서는 이곳에 더 머물렀다가 의심을 살까 싶어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럼, 별일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고이서가 돌아서려는 순간, 이서가 그녀를 불렀다. “고 팀장님.” 고이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물었다. “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고 팀장님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고이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묘한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아마 자신이 꺼림칙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었다. 이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고 팀장님이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