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은철 씨 입원했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에요?”주경모는 가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서의 표정을 보며 떠보듯 물었다.“모르셨어요?”이서는 주경모의 질문에 고개를 갸우뚱했다.“네? 제가…… 알아야 하는 건가요?”“아…… 그런 뜻이 아니라 온 북성시에 도련님이 입원하셨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아가씨만 모르시는 것 같아 저도 좀 의아한 것뿐입니다.”“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마음 추스린다고 다른 일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요.”주경모는 이서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평생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었다.이서 또한 어렸을 때부터 지켜본 터라 이서에 대해 나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거짓말에 능한 아이는 아니다.그날 밤에 일어난 일을 정말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주경모는 계속 묻고 싶었지만 두 사람은 어느덧 하경철의 관 앞에 도착했다.주경모는 문득 하경철의 죽음이 그리 간단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다.“제가 뭐 하면 될까요?”“하관식의 장소, 시간 등은 이미 풍수사 선생님께 여쭤 보고 모두 준비해 두었습니다.다만 요 며칠 도련님이 병원에 계셔서 집안일을 돌볼 겨를이 없었습니다.모래가 하관식인데 아직 식당과 메뉴를 정하지 못했습니다.”보통 이런 일들은 집안의 여자 주인이 나서서 하기 마련이다.그러나 하도훈의 아내는 일찍이 이혼하고 해외로 나갔다.전 시아버지인 하경철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도 애도의 문자 달랑 한 통 보낸 게 전부였다.게다가 하은철은 아직 미혼이다.어쨌든 집에는 안주인이 있으면 한다.“저에게 맡겨요. 제가 할 게요.” 말이 끝나자마자 밖에서 차량 소리가 들려왔다.곧 하은철이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며 들어왔다.“왔어?” 그는 애써 눈가의 기쁨을 감추려 했지만 살짝 치켜든 입꼬리가 그를 마음을 들키게 만들었다.이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하은철을 바라보았다.“다리가 왜 그래?”“괜찮아. 거의 다 나았어.”하은
이서는 하은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얼굴 상처는……?”‘왜 지환 씨 상처랑 똑 같은 거 같지?’상처 크기가 아니라 다친 상태가.‘둘 다 맞아서 그런가?’그러고 보니 지환과 하은철이 동시에 맞은 것은 정말 공교롭다.“왜, 왜?”이서가 갑자기 이렇게 가까이 오자, 하은철은 어쩔 바를 몰랐다.이전에는 늘 색안경을 끼고 이서를 보았기에 이서에 대해 별 느낌이 없었다. 물론 그 뒤 몇 번은 그녀의 미모에 조금 놀란 적이 있긴 했지만 지금처럼 반응이 크지는 않았다.예쁘고 맑은 눈은 마치 샘물 같다.이목구비도 뛰어나게 예쁘건 아니지만, 선이 완만하다 보니 부드럽고 우아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심지어 보면 볼수록 빠져들 만큼 아름다웠다.왠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이때 이서가 뒤로 크게 물러서며,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하은철을 바라보았다.“왜 그래? 갑자기 얼굴이 왜 빨개져?”하은철은 어색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얼굴을 돌렸다.“어…… 그게……그냥 좀 덥네.”이서는 하은철을 바보처럼 바라보았다.‘벌써 늦가을인데 덥긴 뭐가 더워?’“도련님.”그 사이 주경모는 메뉴 리스트를 가져왔다.“이건 식사 관련 메뉴입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메뉴는 모두 3가지로 분류했다하나는 하씨 가문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고,또 하나는 조문객 접대용이고, 마지막 하나는 직원과 집안 직원을 위한 것이었다.하은철은 이서에게 메뉴를 건넸다.“이서야, 부탁해, 난 봐도 잘 모르겠다.”메뉴 리스트를 받아 든 이서는 그 자리에 서서 진지하게 보기 시작했다.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하은철은 슬그머니 주경모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얘기했다.“이서에게 과일 좀 준비해 주세요.”하은철의 변화에 주경모는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도련님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네.’“네, 지금 바로…….”“쉿!” 하은철은 메뉴 리스트를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는 이서를 다시 한번 슬쩍 보고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얼른요.”주경모는 재빨리
“응.” 하은철은 왠지 모르게 갑자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미안, 요 며칠 병원에만 있다 보니 아무 일도 하지 못했어.”이서는 놀란 표정으로 하은철을 바라보았다.“왜?”“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네 입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니 신기하고 어색해서.”이서는 다시 되물었다.“맞다, 네 작은아빠도 그날 오신대?”하은철은 침묵했다.이서는 의아했다.“안 와?”‘설마? 할아버지 하관식에도 안 온다고?’“아니, 아직 확실하지 않대.”“아무리 바빠도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는 참석해야지.”하은철은 조급한 듯 일어섰다.“넌 몰라. 우리…… 우리 관계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이서는 눈을 깜박거렸다.그녀는 확실히 잘 모른다.하지만 그래도 돌아가신 분의 하관식만큼 중요한 건 없다.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하관식에는 와야지.“사실, 내 얼굴에 상처도 바로 작은아빠한테 맞아서 생긴 거야.”이 말을 갑자기 왜 내뱉었는지 모른다. 다만 말을 뱉은 하은철은 본인 스스로도 어리둥절했다.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음속에 꼭 담아두는 스타일이었다. 정말 막막하고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답답할 때는 지환에게 마음을 털어놓았다.그런데 지환과 한바탕 싸웠으니 앞으로 어떻게 풀어야 할지 답답했는데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이서에게 터놓고 말할 줄은 몰랐다.느낌이 이상했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에게 털어놓는 것 같았다.사실, 따지고 보면, 그와 이서도 친구 사이는 맞다.다만, 그의 편집증 때문에…….하은철은 생각할수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이서는 오히려 좀 의아해했다.“네 말인즉슨 네 몸에 있는 상처는 네 작은아빠의 작품이라는 거지?”‘이건 좀 심했는데?’‘그래도 내 속은 후련하네.’“음.”새로운 소울 메이트를 찾았다고 생각한 하은철은 고통스럽다는 듯 이마에 손을 올렸다.“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한바탕 두들겨 맞았어. 자기의 소중한 걸 빼앗긴 사람처럼. 그런데, 난 그런 적 없거든!”하은철은 억울했다.“잘 생각해봐, 있을지
이서는 문 밖으로 나와서야 전화를 받았다.“집에 들어갔어요?”[음.]이서는 뒤를 한 번 보았다.“나도 방금 도착했어요.”[여보.]“응?”[보고 싶어.]이서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일찍 들어갈 거예요.”[정말? 당신이 얘기한 거다.]지환의 목소리가 단번에 숙연해졌다. [본인 입으로 얘기해놓고 번복하면 안 돼.]이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아, 무서운데요? 왜 돌아가면 다시는 못 나올 거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까요?”[자기야, 나 무서워…….]“뭐가요?” 이서는 이해가 안 되었다. 그리고 지환이 무섭다는 말을 한 건 처음인 듯했다.지환은 잠시 침묵하다가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여보, 집에 오는 길 기억하지?]“그럼요.”이서의 얼굴에 웃음기가 옅어졌다. 그는 지환이 틀림없이 무엇을 알았을 것이라고 느꼈다.“걱정 마요, 일이 끝나는 대로 갈게요, 나도 당신이 보고 싶어요.”수화기 너머에서 지환은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두 사람은 조용히 휴대전화를 들고 서로의 호흡을 들으며 서로의 존재를 느꼈다.한참이 지나서야 이서는 몸을 곧게 펴고 거실에서 궁금한지 두리번거리는 하은철을 보았다. 그녀는 아쉬워하며 말했다.“나 가봐야 해요. 당신도 몸 잘 챙겨요.”수화기 너머에서 지환의 ‘응’ 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이서는 아쉬워하며 전화를 끊었다잠시 후 그녀는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하은철은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이서가 아무리 불러도 미동도 없었다. 그녀는 그의 눈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하은철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시선은 멍해 있었다. 마치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이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왜 그래? 무슨 일이야!”‘갑자기 바보라도 되었나?’하은철은 이서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버벅거리며 말했다.“그…… 하…… 지환…….”인내심을 갖고 한참이나 기다리던 이서는 하은철이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는 걸 보고 귀찮은 듯 말했다.“네 모습을 보니 괜찮은 것 같네. 그럼 난 일 보
“아저씨, 혹시 뭐 아시는 거 있어요?”주경모는 얼른 하은철의 눈을 피했다.“아…… 아니…… 모릅니다.”“분명히 뭔가 있는데?!”“빨리 얘기해 줘요!”주경모는 어쩔 수 없었다.“도련님,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름만 같은 거 아닐까요?”“동명이인?”“네.” 자신의 팔을 잡은 하은철의 힘이 다소 느슨해진 걸 느낀 주경모는 계속 말했다.“도련님, 지금은 어르신 하관식에 전념해야 합니다. 지금 뭐니뭐니 해도 어르신 하관식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하은철도 주경모의 말에 100% 수긍했다.“하관식 끝나고 다시 물어봐야겠어요.”주경모는 뭔가 얘기하려다 멈추었다.그러고는 잠시 생각을 마친 뒤 다시 말을 꺼냈다.“도련님, 어쩌면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습니다.”“네?” 하은철은 의아한 눈빛으로 주경모를 보았다.“이서랑 삼촌이랑 정말 알고 있다고 해도…… 별 일 아니잖아요.”그는 겉으로는 이렇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불안하기 그지없었다.왠지 모르게 누군가에게 한 방 제대로 얻어 맞은 느낌이었다.‘삼촌과 이서가 어떤 관계인지 아직 잘 모르지만…….’‘삼촌이…… 삼촌이 설마…….’솔직히 말해 이서 남편은 전혀 두렵지 않다.가장 염려되는 건 삼촌도 이서를 좋아할까 봐였다.하은철이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잡다한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주경모는 그의 의심을 무마시킬 멘트를 생각해 두었다.“어차피 아가씨 일이잖습니까, 꼬치꼬치 캐물으면 아가씨가 싫어할 겁니다.”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게다가 지금 이서에게 따져 물어볼 입장도 아니었다.“이서는요?”주경모는 1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반응했다.“아가씨는 지금 서재에서 손님 명단을 정리 중입니다.”“저도 가볼게요.”하은철은 지팡이를 짚고 서재로 향했다.이서는 이미 손님의 좌석을 다 배정했다. 하은철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리스트를 그에게 건네 주었다.“봐봐, 괜찮은지?”리스트를 받은 하은철은 명단이 아닌 이서를 곁눈질로 훑어보았다.이서는 눈치채지
한참 걸어 나갔지만 이서는 여전히 화가 가시지 않았다.‘쟤 미친 거 아냐?’‘이전에 내가 결혼할 마음이 있을 때는 백방 거부하고 날 벌레 취급하더니만 이제 다시 기회를 달라고?’‘할아버지의 유언 때문이래도 굳이 그럴 것까지는 없는데.’어쨌던 그녀는 지환과 이혼할 수 없다.이서는 진정이 된 후에 다른 일처리 하러 갔다.저녁식사 끝날 때까지 이서는 더 이상 하은철과 마주치지 않았다.눈에 안 보이니 속 편하고 너무 좋았다. 그녀는 곧 주경모에게 얘기하고 위층에 쉬러 올라갔다.이서는 2층의 게스트 룸으로 갔다.문을 열어보니 익숙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하은철과 헤어지기 전에 가끔 이곳에 왔었다.오랜만에 왔는데도 방은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마치 여기에 묵던 사람이 여태껏 떠난 적이 없는 것처럼.이서는 생각에 잠겨 침대에 앉았다.이 집에는 할아버지만이 진심으로 그녀를 대했었다.그녀는 침대에 누워 곧 꿈나라에 빠졌다.꿈 속에서 어렴풋이 안개 속에 있는 거 같았다.주위에 온통 뿌연 안개가 펼쳐져 있다.곧이어 한 줄기 사람의 그림자가 그녀의 뒤에서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다. 다만 남자의 목소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이를 납치했다! 아이를 납치했다!”곧 세상은 고요하고 조용해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그녀는 서서히 눈을 떴다. 자신이 뜻밖에도 다른 곳에 와있다는 것을 알았다.이곳도 온통 뿌옇고 잘 보이지 않았다.주위에서 아이들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엄마 보고 싶어요. 집에 데려다 주세요…….”아이들은 울면서 엄마 아빠를 찾고 있었다.이서는 이해가 되지 않아 막 앞으로 나가 물어 보려는데 갑자기 큰 손이 그녀를 끌고 갔다.귓가의 울음 소리도 속삭임으로 바뀌었다.“과거 잊고 새로 태어나는 거야. 과거 잊어…….”그러나 그녀는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또 하나의 강력한 힘에 의해 다른 곳으로 끌려갔다.눈앞은 더 이상 안개가 자욱한 곳이 아닌
그러나 그녀는 지환과 이혼하고 싶지 않았다.그들은 어렵사리 여기까지 왔다.그리고 하이먼 스웨이를 만난 후, 서서히 용기를 내어 엄마라는 역할도 해보려고 용기를 조금씩 얻고 있는 중이었다.모든 것이 다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이서야, 너 정말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이뤄줄 수 없겠니?”하경철은 거친 손을 들어 이서의 손을 잡았다.“이서야, 할애비 마지막 소원인데, 마지막 가는 길 마음 편히 가게 해주면 안 되겠니?”“이서야, 은철이를 너한테 맡겨야 내가 안심하고 갈 수 있어. 할애비 마음 편하게 해주면 안 되겠어?”“…….”이서는 하경철의 간절한 눈빛을 고통스럽게 바라보았다.귓가에 애원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할아버지, 저를…… 강요하지 마세요…… 제발요……. 아악!”비명을 지르며 일어난 이서는 익숙한 품을 찾으려 했다.그러나 옆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그녀는 코를 훌쩍거리다 점차 이성을 되찾았다. 그제야 자신의 집이 아닌 하씨 본가라는 걸 깨달았다.“이서야, 왜 그래?”문밖에서 하은철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답 안 하면, 문 부수고 들어간다!”“하나, 둘, 셋…….”말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억지로 밀려 열렸다.이서는 비틀거리며 한쪽 다리를 절고 있는 하은철을 보며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왜 그래?”한바탕 시끌벅적 난리 치고 나니 이서도 방금 전의 악몽을 잊었다.하은철도 그제야 자신의 몰골이 초라한 걸 알아차렸다.그는 소파 손잡이를 짚었다.“비명 소리를 들었어. 그래서 누군가가 방에 침입한 줄 알았어.”“하씨 집안의 보안 시스템이 전국에서 가장 좋기로 소문이 자자한데, 누가 쳐들어올 수 있겠어?”하은철은 여전히 걱정이 되는 듯 물었다.“너 정말 괜찮아?”이서가 하은철을 쳐다보았다.그러고 보니 이 악몽의 시발점도 하은철인 셈이다.“괜찮아.” 이서는 본의 아니게 대답했다.“그만 나가줘. 나 유부녀야. 외간 남자랑 둘이 한 방에 있으면 괜한 오해만 생겨.”하은철은 이서
“알았어. 나 나갈게, 푹 쉬어.”하은철은 잠시 망설이다가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문이 닫히자, 이서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침대에 쓰러졌다.그녀는 지환이 너무 보고 싶었다.그의 품속에 푹 안기고 싶었다.이서는 휴대전화를 들고 시간을 확인하고는 결국 지환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침대에 누워 눈을 감자, 또 꿈속에서 할아버지 했던 말이 떠올랐다.또 불면의 밤이 될 운명이다.이튿날 아침 일어난 이서는 머리가 어지러웠다.하지만 아직도 그녀가 처리할 일이 태산이라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정신을 가다듬었다.“어젯밤에 잘 못 잤어?” 하은철은 머뭇거리며 커피 한 잔을 건넸다.이서는 고개를 들어 잠깐 고민하다가 받아 들었다.“남은 일 내가 처리할게. 들어가서 쉬어.” 이서의 모습을 보니 하은철은 마음이 아팠다.“아니야, 커피 한잔 마시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들 거야. 아직 처리할 일이 태산인데……. 내일이 할아버지 하관식이니까. 할아버지께서 마음 편히 가셨으면 좋겠어.”말을 마치자 이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 듯 멍하니 땅만 바라보았다.하은철은 조용히 이서 옆에 앉았다.“수고했어.”“수고하긴, 당연히 해야 하는 건데.” 이서는 일어섰다. “일 처리할 게 남아서…… 먼저 간다.”하은철은 그녀의 손에서 아직도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이서는 정말 그를 조금도 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이서의 지시하에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하도훈 조차도 입이 마르도록 이서를 칭찬했다.“이서야, 정말 고생했다. 네가 없었으면 하관식은 엉망이 되었을 거야.”이서는 겸손했다.“아저씨 별 말씀을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내일이 하관식이네. 아버지가 살아 생전에 너를 가장 아끼셨는데. 네가 하씨 집안 가족이 되기를 그렇게 바라셨는데……. 너무 아쉽다…….”하도훈은 잠깐 멈췄다가 계속 말을 이었다.“이서야, 내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겠니?”“아저씨, 말씀하세요.”“있잖아. 내일 네가 하씨 집안 며느리 신분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