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하은철은 자신을 구한 생명의 은인을 그녀로 잘고 잘해 준 것이다. 일단…….윤수정은 진실이 밝혀진 뒷일은 상상조차 하기 끔찍했다. 그는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며 하은철을 바라보았다.이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는 절대로 그날의 진실을 밝힐 수 없다.그녀는 눈을 꾹 눌렀다.“……그러니까, 나와 함께하고, 나에게 잘해 주고……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오빠를 구했기 때문이야?”하은철은 더 이상 숨기고 싶지 않았다.“응.”윤수정은 더욱 슬프게 울었다.“알았어. 그럼…… 두 사람이 행복하길 바랄게.”말하면서 그녀는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가려고 했다.하은철은 바삐 그녀를 불렀다.“잠깐만, 수정아, 어디 가?”“나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내가 뭘 하든 무슨 상관이야?!” 윤수정은 코를 훌쩍거렸다.“내 삶의 의미가 없어졌어……. 죽고 싶어!”윤수정의 폭탄 발언에 하은철은 얼른 병상에서 뛰어내려 그녀를 붙잡았다.“지금 무슨 얘기하는 거야?”윤수정은 하은철의 팔을 뿌리치며 울면서 말했다.“오빠 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뭔 상관이야?! 내가 죽던 말던 신경 쓰지 마!”하은철은 죽겠다는 윤수정을 보고 차마 가만 있을 수만 없었다.어쨌든 그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니, 혹시라도 그녀가 정말 죽게 되면 평생 양심의 가책을 받을 것이다.자신의 고육지책에 하은철이 반응을 보이자, 윤수정은 더욱 안간힘을 썼다.“놔, 오빠, 오빠 없는 나날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그냥 죽게 둬!”윤수정은 격렬하게 발버둥쳤다. 하은철은 어쩔 수 없이 윤수정의 허리를 안아 진정시켰다.“진정해, 누구 때문에 살고 못 살고 그런 건 없어!”윤수정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오빠는 전혀 모를 거야. 오빠가 나한테 어떤 의미인지! 오빠 없으면 난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어!”하은철은 윤수정과의 실랑이에 기가 다 빠졌다. 그는 한발자국 물러섰다.“일단 진정해. 내가 지금 당장 이서와 결혼한다는 건 아니잖아. 할아버지 돌아가신 지 얼마되지도 않았어. 하씨 집안 장손으
이튿날 이른 아침, 잠에서 깬 이서는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지환에게 허리를 잡혀 꼼짝할 수 없었다.한편 그녀의 사소한 움직임에 지환이 잠에서 깼다.“왜 이렇게 일찍 깼어?” 지환은 게슴츠레 눈을 떴다.“잊었어요? 나 오늘 하씨 본가에 가야 해요.”지환의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그는 이서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안았다.“응, 생각났어. 좀만 더 있자. 이제 겨우 6시 좀 넘었잖아. 좀 더 자자.”말하면서 지환은 다리를 들어 이서의 허벅지를 눌렀다.이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당신은 내가 거기 안 갔으면 하죠?”“아니야.” 지환은 이서의 목덜미에 머리를 파묻고 문질렀다. 마치 앙탈부리는 고양이처럼.이서의 마음도 삽시간에 약해졌다.“알았어요, 좀 더 있을 게요.”지환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이서는 갑자기 목덜미 뒤의 호흡이 점점 가빠지는 걸 느꼈다.그리고 그의 큰 손도 그녀의 허리에서 점차 위로 더듬으며 올라갔다.그녀는 웃으며 말했다.“지환 씨, 스톱! 잠깐만요……. 손 좀…….”지환은 억울한 듯 투정했다.“내가 뭐 어쨌다고?”그의 말투에 이서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러면서 그를 밀어냈다.“장난 그만 해요. 조금 있다가 나가야 한단 말이에요.”“그럼 최대한 빨리 할게.”이서는 얼굴을 붉혔다.“당신 말의 신뢰도가 몇 점이나 될까요?”지환은 웃으며 이서의 잠옷 깃을 입으로 물었다.“그럼 확인해보면 되지?”말과 다르게 몸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이서도 결국 지환의 성화에 못 이겨 그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이서가 외출할 때는 이미 9시가 넘는 시간이었다.다행히 임현태의 운전 솜씨는 뛰어나 주말이지만 시간을 별로 지체하지 않았다.가는 길 내내 임현태는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마치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듯.이서는 농담 반 진담반으로 물었다.“현태 씨, 혹시 뭔 일 있어요? 사랑싸움 중인가요?”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그런 일 때문에…….”“정말 아니에요?” 이서는 그동안
“아가씨.”“은철 씨 입원했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에요?”주경모는 가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서의 표정을 보며 떠보듯 물었다.“모르셨어요?”이서는 주경모의 질문에 고개를 갸우뚱했다.“네? 제가…… 알아야 하는 건가요?”“아…… 그런 뜻이 아니라 온 북성시에 도련님이 입원하셨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아가씨만 모르시는 것 같아 저도 좀 의아한 것뿐입니다.”“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마음 추스린다고 다른 일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요.”주경모는 이서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평생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었다.이서 또한 어렸을 때부터 지켜본 터라 이서에 대해 나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거짓말에 능한 아이는 아니다.그날 밤에 일어난 일을 정말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주경모는 계속 묻고 싶었지만 두 사람은 어느덧 하경철의 관 앞에 도착했다.주경모는 문득 하경철의 죽음이 그리 간단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다.“제가 뭐 하면 될까요?”“하관식의 장소, 시간 등은 이미 풍수사 선생님께 여쭤 보고 모두 준비해 두었습니다.다만 요 며칠 도련님이 병원에 계셔서 집안일을 돌볼 겨를이 없었습니다.모래가 하관식인데 아직 식당과 메뉴를 정하지 못했습니다.”보통 이런 일들은 집안의 여자 주인이 나서서 하기 마련이다.그러나 하도훈의 아내는 일찍이 이혼하고 해외로 나갔다.전 시아버지인 하경철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도 애도의 문자 달랑 한 통 보낸 게 전부였다.게다가 하은철은 아직 미혼이다.어쨌든 집에는 안주인이 있으면 한다.“저에게 맡겨요. 제가 할 게요.” 말이 끝나자마자 밖에서 차량 소리가 들려왔다.곧 하은철이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며 들어왔다.“왔어?” 그는 애써 눈가의 기쁨을 감추려 했지만 살짝 치켜든 입꼬리가 그를 마음을 들키게 만들었다.이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하은철을 바라보았다.“다리가 왜 그래?”“괜찮아. 거의 다 나았어.”하은
이서는 하은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얼굴 상처는……?”‘왜 지환 씨 상처랑 똑 같은 거 같지?’상처 크기가 아니라 다친 상태가.‘둘 다 맞아서 그런가?’그러고 보니 지환과 하은철이 동시에 맞은 것은 정말 공교롭다.“왜, 왜?”이서가 갑자기 이렇게 가까이 오자, 하은철은 어쩔 바를 몰랐다.이전에는 늘 색안경을 끼고 이서를 보았기에 이서에 대해 별 느낌이 없었다. 물론 그 뒤 몇 번은 그녀의 미모에 조금 놀란 적이 있긴 했지만 지금처럼 반응이 크지는 않았다.예쁘고 맑은 눈은 마치 샘물 같다.이목구비도 뛰어나게 예쁘건 아니지만, 선이 완만하다 보니 부드럽고 우아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심지어 보면 볼수록 빠져들 만큼 아름다웠다.왠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이때 이서가 뒤로 크게 물러서며,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하은철을 바라보았다.“왜 그래? 갑자기 얼굴이 왜 빨개져?”하은철은 어색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얼굴을 돌렸다.“어…… 그게……그냥 좀 덥네.”이서는 하은철을 바보처럼 바라보았다.‘벌써 늦가을인데 덥긴 뭐가 더워?’“도련님.”그 사이 주경모는 메뉴 리스트를 가져왔다.“이건 식사 관련 메뉴입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메뉴는 모두 3가지로 분류했다하나는 하씨 가문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고,또 하나는 조문객 접대용이고, 마지막 하나는 직원과 집안 직원을 위한 것이었다.하은철은 이서에게 메뉴를 건넸다.“이서야, 부탁해, 난 봐도 잘 모르겠다.”메뉴 리스트를 받아 든 이서는 그 자리에 서서 진지하게 보기 시작했다.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하은철은 슬그머니 주경모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얘기했다.“이서에게 과일 좀 준비해 주세요.”하은철의 변화에 주경모는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도련님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네.’“네, 지금 바로…….”“쉿!” 하은철은 메뉴 리스트를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는 이서를 다시 한번 슬쩍 보고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얼른요.”주경모는 재빨리
“응.” 하은철은 왠지 모르게 갑자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미안, 요 며칠 병원에만 있다 보니 아무 일도 하지 못했어.”이서는 놀란 표정으로 하은철을 바라보았다.“왜?”“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네 입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니 신기하고 어색해서.”이서는 다시 되물었다.“맞다, 네 작은아빠도 그날 오신대?”하은철은 침묵했다.이서는 의아했다.“안 와?”‘설마? 할아버지 하관식에도 안 온다고?’“아니, 아직 확실하지 않대.”“아무리 바빠도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는 참석해야지.”하은철은 조급한 듯 일어섰다.“넌 몰라. 우리…… 우리 관계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이서는 눈을 깜박거렸다.그녀는 확실히 잘 모른다.하지만 그래도 돌아가신 분의 하관식만큼 중요한 건 없다.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하관식에는 와야지.“사실, 내 얼굴에 상처도 바로 작은아빠한테 맞아서 생긴 거야.”이 말을 갑자기 왜 내뱉었는지 모른다. 다만 말을 뱉은 하은철은 본인 스스로도 어리둥절했다.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음속에 꼭 담아두는 스타일이었다. 정말 막막하고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답답할 때는 지환에게 마음을 털어놓았다.그런데 지환과 한바탕 싸웠으니 앞으로 어떻게 풀어야 할지 답답했는데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이서에게 터놓고 말할 줄은 몰랐다.느낌이 이상했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에게 털어놓는 것 같았다.사실, 따지고 보면, 그와 이서도 친구 사이는 맞다.다만, 그의 편집증 때문에…….하은철은 생각할수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이서는 오히려 좀 의아해했다.“네 말인즉슨 네 몸에 있는 상처는 네 작은아빠의 작품이라는 거지?”‘이건 좀 심했는데?’‘그래도 내 속은 후련하네.’“음.”새로운 소울 메이트를 찾았다고 생각한 하은철은 고통스럽다는 듯 이마에 손을 올렸다.“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한바탕 두들겨 맞았어. 자기의 소중한 걸 빼앗긴 사람처럼. 그런데, 난 그런 적 없거든!”하은철은 억울했다.“잘 생각해봐, 있을지
이서는 문 밖으로 나와서야 전화를 받았다.“집에 들어갔어요?”[음.]이서는 뒤를 한 번 보았다.“나도 방금 도착했어요.”[여보.]“응?”[보고 싶어.]이서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일찍 들어갈 거예요.”[정말? 당신이 얘기한 거다.]지환의 목소리가 단번에 숙연해졌다. [본인 입으로 얘기해놓고 번복하면 안 돼.]이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아, 무서운데요? 왜 돌아가면 다시는 못 나올 거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까요?”[자기야, 나 무서워…….]“뭐가요?” 이서는 이해가 안 되었다. 그리고 지환이 무섭다는 말을 한 건 처음인 듯했다.지환은 잠시 침묵하다가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여보, 집에 오는 길 기억하지?]“그럼요.”이서의 얼굴에 웃음기가 옅어졌다. 그는 지환이 틀림없이 무엇을 알았을 것이라고 느꼈다.“걱정 마요, 일이 끝나는 대로 갈게요, 나도 당신이 보고 싶어요.”수화기 너머에서 지환은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두 사람은 조용히 휴대전화를 들고 서로의 호흡을 들으며 서로의 존재를 느꼈다.한참이 지나서야 이서는 몸을 곧게 펴고 거실에서 궁금한지 두리번거리는 하은철을 보았다. 그녀는 아쉬워하며 말했다.“나 가봐야 해요. 당신도 몸 잘 챙겨요.”수화기 너머에서 지환의 ‘응’ 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이서는 아쉬워하며 전화를 끊었다잠시 후 그녀는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하은철은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이서가 아무리 불러도 미동도 없었다. 그녀는 그의 눈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하은철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시선은 멍해 있었다. 마치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이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왜 그래? 무슨 일이야!”‘갑자기 바보라도 되었나?’하은철은 이서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버벅거리며 말했다.“그…… 하…… 지환…….”인내심을 갖고 한참이나 기다리던 이서는 하은철이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는 걸 보고 귀찮은 듯 말했다.“네 모습을 보니 괜찮은 것 같네. 그럼 난 일 보
“아저씨, 혹시 뭐 아시는 거 있어요?”주경모는 얼른 하은철의 눈을 피했다.“아…… 아니…… 모릅니다.”“분명히 뭔가 있는데?!”“빨리 얘기해 줘요!”주경모는 어쩔 수 없었다.“도련님,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름만 같은 거 아닐까요?”“동명이인?”“네.” 자신의 팔을 잡은 하은철의 힘이 다소 느슨해진 걸 느낀 주경모는 계속 말했다.“도련님, 지금은 어르신 하관식에 전념해야 합니다. 지금 뭐니뭐니 해도 어르신 하관식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하은철도 주경모의 말에 100% 수긍했다.“하관식 끝나고 다시 물어봐야겠어요.”주경모는 뭔가 얘기하려다 멈추었다.그러고는 잠시 생각을 마친 뒤 다시 말을 꺼냈다.“도련님, 어쩌면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습니다.”“네?” 하은철은 의아한 눈빛으로 주경모를 보았다.“이서랑 삼촌이랑 정말 알고 있다고 해도…… 별 일 아니잖아요.”그는 겉으로는 이렇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불안하기 그지없었다.왠지 모르게 누군가에게 한 방 제대로 얻어 맞은 느낌이었다.‘삼촌과 이서가 어떤 관계인지 아직 잘 모르지만…….’‘삼촌이…… 삼촌이 설마…….’솔직히 말해 이서 남편은 전혀 두렵지 않다.가장 염려되는 건 삼촌도 이서를 좋아할까 봐였다.하은철이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잡다한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주경모는 그의 의심을 무마시킬 멘트를 생각해 두었다.“어차피 아가씨 일이잖습니까, 꼬치꼬치 캐물으면 아가씨가 싫어할 겁니다.”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게다가 지금 이서에게 따져 물어볼 입장도 아니었다.“이서는요?”주경모는 1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반응했다.“아가씨는 지금 서재에서 손님 명단을 정리 중입니다.”“저도 가볼게요.”하은철은 지팡이를 짚고 서재로 향했다.이서는 이미 손님의 좌석을 다 배정했다. 하은철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리스트를 그에게 건네 주었다.“봐봐, 괜찮은지?”리스트를 받은 하은철은 명단이 아닌 이서를 곁눈질로 훑어보았다.이서는 눈치채지
한참 걸어 나갔지만 이서는 여전히 화가 가시지 않았다.‘쟤 미친 거 아냐?’‘이전에 내가 결혼할 마음이 있을 때는 백방 거부하고 날 벌레 취급하더니만 이제 다시 기회를 달라고?’‘할아버지의 유언 때문이래도 굳이 그럴 것까지는 없는데.’어쨌던 그녀는 지환과 이혼할 수 없다.이서는 진정이 된 후에 다른 일처리 하러 갔다.저녁식사 끝날 때까지 이서는 더 이상 하은철과 마주치지 않았다.눈에 안 보이니 속 편하고 너무 좋았다. 그녀는 곧 주경모에게 얘기하고 위층에 쉬러 올라갔다.이서는 2층의 게스트 룸으로 갔다.문을 열어보니 익숙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하은철과 헤어지기 전에 가끔 이곳에 왔었다.오랜만에 왔는데도 방은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마치 여기에 묵던 사람이 여태껏 떠난 적이 없는 것처럼.이서는 생각에 잠겨 침대에 앉았다.이 집에는 할아버지만이 진심으로 그녀를 대했었다.그녀는 침대에 누워 곧 꿈나라에 빠졌다.꿈 속에서 어렴풋이 안개 속에 있는 거 같았다.주위에 온통 뿌연 안개가 펼쳐져 있다.곧이어 한 줄기 사람의 그림자가 그녀의 뒤에서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다. 다만 남자의 목소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이를 납치했다! 아이를 납치했다!”곧 세상은 고요하고 조용해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그녀는 서서히 눈을 떴다. 자신이 뜻밖에도 다른 곳에 와있다는 것을 알았다.이곳도 온통 뿌옇고 잘 보이지 않았다.주위에서 아이들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엄마 보고 싶어요. 집에 데려다 주세요…….”아이들은 울면서 엄마 아빠를 찾고 있었다.이서는 이해가 되지 않아 막 앞으로 나가 물어 보려는데 갑자기 큰 손이 그녀를 끌고 갔다.귓가의 울음 소리도 속삭임으로 바뀌었다.“과거 잊고 새로 태어나는 거야. 과거 잊어…….”그러나 그녀는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또 하나의 강력한 힘에 의해 다른 곳으로 끌려갔다.눈앞은 더 이상 안개가 자욱한 곳이 아닌
“형, 안녕.”소민찬은 소지엽의 질문을 피하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소지엽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소민찬을 바라보았다.“민찬아, 아직 내 질문에 대답 안 했잖아. 네가 왜 여기 있냐니까?” 소민찬은 이제 마냥 대답을 회피할 수 없었다.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분명히 실마리가 드러날 것이니 말이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나만 보고 있어...’소희는 소민찬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며 의문을 제기했다.“모르셨어요? 소민찬 씨는 유인 언니의 남자 친구예요. 오늘 여기 온 이유도 사실상 저희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온 거죠.” “심유인 씨랑 사귄다고?”지엽이 눈살을 찌푸렸다.“며칠 전에 우리 집에 와서 밥을 먹은 여자는 심유인 씨가 아니었잖아?” 소민찬과 심유인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형, 아무래도 잘못 기억하는 것 같아. 그날 같이 밥을 먹은 사람도 유인이었어.” 소지엽은 지난번에 집에서 함께 식사한 여자가 심유인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여자의 성이 뭔지는 기억 안 나지만, 어떻게 생겼는지는 어렴풋이 기억나.’‘그 여자는 절대 심유인 씨가 아니었어.’ “아니, 그 여자는 심유인 씨가 아니었어!” 소지엽이 눈살을 찌푸렸다.“그리고 그 여자가 우리 집에 와서 밥을 먹은 건 불과 며칠 전의 일이잖아. 지금은 왜 또 심유인 씨와 사귄다는 거지?” 소민찬은 한참 동안 우물쭈물하며 말하지 못하다가 한참 후에야 다소 역정을 내며 말했다.“형, 이건 내 사적인 일이라, 형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닌 것 같아. 부모님도 내가 여자 친구를 몇 명을 사귀는지 신경 쓰지 않으시는데, 형이 무슨 자격으로 이러는 거야?”“그래, 나는 네 사적인 일에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어. 하지만 계속 본사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본사에 들어가고 싶다면 절대 스캔들을 만들면 안 돼! 그런 일은 큰 파장을 일으킬 거라고!” 소민찬은 당황하기 시작했다.‘아버지는 나를 좋아하지
소민찬이 비웃으며 말했다.“허, 천재다운 모습이 조금이라도 있습니까?” 심근영이 말했다.“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군요.” “천재답게 생긴 게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런 규칙은 누가 정한 거죠?” “어차피 임현태 씨는 허풍을 떠는 거지 않습니까? 시험에 합격에서 하버드에 들어갔을 리가 없다는 말입니다.”“두 사람, 문맹이거나 눈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에요?”소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현태 오빠의 소개란에 당시 오빠의 성적을 적어둔 게 있잖아요. 클릭해서 좀 보세요. 현태 오빠는 수석으로 하버드에 들어갔다고요.”“그리고 오빠에게 추천서를 써준 사람은 하버드에서 공정하기로 유명한 물리학 교수라고요.”“설마 그 교수님보다 두 사람이 더 대단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죠?” 소민찬과 심유인은 그제야 상세 내용을 확인하고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가 또 빨갛게 달아올랐다.두 사람은 확인도 하지 않고 성급하게 큰소리를 친 것을 후회했다.‘처음부터 제대로 확인했다면, 임현태를 다른 방식으로 비웃을 수 있었을 텐데.’“그게 뭐 어떻다고 그래?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보통 어리석고, 융통성이 없잖아. 하지만 우리 민찬 씨는 달라. 단순히 해외 유학파일 뿐만 아니라, 자동차 경주, 승마, 골프도 할 줄 안다니까?” “소희야, 네 남자 친구는 그렇게 고상한 취미는 즐길 줄 모르지?” 현태가 말했다.“하 대표님의 곁에 있는 경호원에겐 기본인 것들입니다. 만약 그것도 할 줄 모른다면, 하 대표님은 저를 곁에 두지 않으시겠죠.”‘기본’이라는 말은 소민찬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완전히 짓밟는 것이었다. 자동차 경주, 승마, 골프...이런 것들은 흔히 ‘재산을 낭비하며 점차 타락하는 부잣집 도련님들의 기본 패키지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훌륭한 실력을 갖추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이 모든 것들이 현태에게는 그저 기본일 뿐이었다.‘감히 날 모욕해?’소민찬이 일어서서 자리를 떠나겠다고 말하려던 참에 고용인이 뛰어와 말했다.“윤 대표님
심유인과 소민찬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가까스로 하버드에 합격했다고?’‘허풍 떠는 거 아니야?’ “정말 하버드 대학교 졸업생이라고요? 하버드 학원 출신이 아니고요?” 현태는 진심 어린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저는 하버드 대학교 졸업생이 맞습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직접 조사해 보셔도 되고, 홈페이지에서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두 사람은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핸드폰을 꺼내 하버드 대학교 홈페이지를 검색했다.두 사람은 약간의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으나, 홈페이지 링크를 누르자마자 우수한 동문의 행렬에 있는 현태의 얼굴을 발견했다.이를 믿을 수 없는 것은 이지숙도 마찬가지였다.‘정말... 사진 속의 사람이 현태 씨라고?!’ ‘말도 안 돼!’‘소민찬이 어느 대학교에 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Y국에 있는 대학교 출신일 거야. 학문도, 능력도 없는 재벌 2세들이 어디서 신분 세탁을 하는지는 불 보듯 뻔한 거니까.’ Y국의 학위는 이수하기가 가장 수월해서 누구나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외부 사람은 분명히 알지 못해서 겁을 먹기 일쑤였다.심유인은 원래 소민찬의 학력을 빌미로 현태를 놀라게 하려 했다.하지만 놀래키기는커녕 본인이 놀라게 된 셈이었다. 심유인은 곧 문제점을 발견했다.“... 하버드 대학교에 체육생으로 입학한 게 아니네요? 전공은 물리학이랑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아니, 임현태 씨는 체육에 타고난 거 아니었나요? 왜 물리학을 전공한 거죠?”“아, 시험 봐서 들어간 게 아니라, 부정 입학이었나 보네요, 그렇죠?” 소민찬은 심유인의 말을 듣고, 혈색을 띠며 현태의 학력을 비웃었다.“하하, 유인아, 그런 건 부정 입학이나 비리가 아니라 기부라고 하는 거야.”“임현태 씨, 입학하는 데 얼마가 필요하던가요?”“하하, 하 대표님과 대체 무슨 사이길래 그렇게 아낌없이 돈을 쓰는 거죠?” “저는 학력을 산 적도, 학력을 위해서 돈을 쏟아부은 적도 없습니다. 정당하게 시험으로 합
심근영이 얼른 말했다.“그래, 내가 경솔했군. 하지만 현태는 내 말의 뜻을 알 거야.” “우리 소희는 어깨를 들지도, 손을 쓰지도 못해. 이 아이와 서로 보완될 수 있는 사람을 찾았으니, 아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모두 화기애애한 웃음을 짓는 반면, 옆에 있던 심유인과 소민찬만이 웃지 못했다. 더욱이 소민찬은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 사실, 소민찬이 여기에 온 것은 심유인이 돈을 주면서 자신의 남자 친구 역할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즉, 소민찬은 여기에 와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만 하면 된다는 것. 하지만 지금의 소민찬은 웃음거리로 전락했으니, 그가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생각한 소민찬은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하지만 심유인은 곧장 가서 소민찬을 끌어당겼다.“어디 가요?” 소민찬은 이미 주방에 도착한 심근영 일가를 힐끗 보았는데, 그들은 소민찬과 심유인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소민찬이 목소리를 낮추었다.“당연히 가야지! 왜, 계속 남아서 네 사촌 동생의 남자 친구한테 굴욕이라도 당하라는 거야?!” “저는... 저 사람이 그저 운전기사인 줄 알았다고요.”“일단 진정해 봐요. 어쨌든 민찬 씨는 소씨 가문의 사람이잖아요.” “소씨 가문의 도련님이 한낱 경호원보다 못하겠어요?” 소민찬은 분명 소씨 가문의 사람이지만, 소태성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더군다나 소지엽이야말로 소태성 같은 사람인데, 소민찬이 어떻게 명함을 내밀 수 있겠는가? 이것은 소민찬이 가족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외국으로 내몰린 이유이기도 했다. 심지어 이번에는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또 소태성에게 즉시 떠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지만 심유인이 시선과 체면이 하늘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 소민찬은 난감해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봤자 나는 소씨 가문의 도련님일 뿐이야. 사람을 죽일 듯이 때리는 사람은 당해낼 수 없다고.” 심유인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가요, 저 사람들의 기세를 제대로 꺾어놓자고요.”
“엄마, 뭔가 오해하신 것 같아요. 현태 씨가 왜 그 돈을 은행에서 대출받았다고 생각하세요? 현태 씨의 돈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소희의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심유인이었다.“소희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운전기사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이 있겠어?” 소희도 심유인을 따라 웃기 시작했다.“언니, 현태 오빠가 누구의 운전기사인 줄 알고나 말하는 거예요?” “뭐?”심유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이서 언니예요.”“이제 이해가 좀 되세요?”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심유인의 표정을 보고 말을 덧붙였다.“현태 오빠가 운전기사인 건 명백한 사실이에요. 하지만 또 다른 직업도 있어요. 그건 바로 이서 언니를 보호하는 거죠.” “운전기사일 뿐만 아니라, 경호원이란 말이에요.” 심유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시큰둥하게 말했다.“흥, 그게 뭐 어쨌다고 그래? 기껏해야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하는 사람인 거잖아. 우리 집에도 경호원이 있어. 경호원이라 해봤자 한달에 몇백만원을 버는 게 전부일 텐데, 90억짜리 헤어샵을 사는 게 말이나 돼?” 소희는 일부러 자랑하는 것 같아서 망설였지만, 현태의 진짜 과거를 털어놓기로 했다.“허, 몇 년 동안 UFC의 챔피언 자리를 지킨 사람한테, 몇십억이 무슨 대수라고 그러세요? 혹시 꿈이라도 꾸는 거예요?” “UFC?!”심유인은 격투기 분야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UFC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소희는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듯 말했다.“모르면 인터넷에 찾아보시던가요.”“언니, 제가 언니의 속셈을 모를 줄 알아요? 현태 오빠가 평범한 운전기사라고 생각해서 일부로 언니의 남자 친구도 부른 거잖아요.” “저희 부모님께는 남자 친구를 소개하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은 언니의 남자 친구와 제 남자 친구를 비교하고 싶은 거잖아요, 안 그래요?” “이런 말까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언니가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것 같아서 말씀해 드릴게요. 제 남자 친구가 언니의 남자 친구보다 돈이 더 많을
현태는 설명하기 시작했다,“제가 그 헤어샵을 인수하긴 했지만, 사모님께 드릴 거거든요.” “앞으로는 사모님께서 그 샵의 사장님이십니다. 미용은 하고 싶을 때 하시면 됩니다.”심씨 가문에는 전속 미용사가 있었지만, 꽤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게다가 이지숙이 미용 기계를 사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어떤 시술을 두세 달이나 반년 정도 지나야 다시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미용 기계에 먼지만 앉지 않겠는가?결국 이지숙은 헤어샵에 가서 시술받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헤어샵에 가는 것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시간을 예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가끔 일이 생겨서 시간을 놓치면, 다시 예약을 잡아야만 했다.이지숙은 진작에 헤어샵을 인수하려고 했는데, 줄곧 자신에게 적합한 헤어샵을 찾지 못했다.이지숙은 현태가 선택한 헤어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하지만 그 샵의 사장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외국에서도 적지 않은 명성을 떨치던 터라 온 가족이 외국으로 이사하기도 했다. 이지숙은 이미 그 사람과의 연락을 시도했지만, 끝내 연락이 닿지는 않았고, 모든 일은 흐지부지되었다. 그런데 바로 오늘, 생각하던 일이 이루어진 것이었다.심유인은 ‘말도 안 돼’ 라는 말만 연신 해댔다.“말도 안 돼요! 임현태 씨는 그냥 운전기사잖아요. 대통령을 위해 운전한다고 해도 헤어샵을 살 수는 없을 거라고요!”그 헤어샵은 심유인도 아는 곳이었다.‘거긴 적어도 100억은 있어야 인수할 수 있는 곳이라고!’ 이지숙도 마음속에 품었던 호기심을 드러냈다.“이 샵의 사장이 계속 외국에 있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그 사람하고 연락한 거죠?” “아, 그 부분은 하 대표님께서 힘써주셨습니다. 마침 하 대표님께서 그 샵의 사장님과 구면이라고 하시더군요. 제가 하 대표님의 곁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장님께서 흔쾌히 샵을 양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지숙이 물었다.“하 대표가 이 일에 직접 나섰다고요?” “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순조롭
심유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고작 한 세트가 다예요?”“그래도 이해는 해드릴게요. 이게 능력 범위 내에서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제품이었을 테니까요. 800만원, 900만원을 저축하려면 몇 개월은 걸려야 하잖아요, 그렇죠?” 이지숙이 곧장 입을 열었다.“유인아, 그게 무슨 말이니? 선물은 금액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거란다.” “그래.”심근영도 현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네 숙모를 위해 스킨케어 제품을 골랐다는 건, 충분히 마음을 썼다는 증거란다.”심유인이 입을 삐죽거리자,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아무리 값비싼 선물보다 마음이 중요하다지만, 조금 쑥스러워서 다른 선물도 준비해 왔습니다.”심유인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그 선물도 화장품은 아니겠죠? 또 몇백만원짜리인 건가요?”“유인아!”이지숙은 다소 불쾌해졌지만, 성격이 좋은 현태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아닙니다, 이번 선물은 스킨케어 제품보다 조금 비싼 거거든요.”현태는 이 말을 끝으로 작은 선물 상자를 꺼냈다.심유인이 목을 길게 빼며 재촉했다.“숙모, 어서 열어보세요. 목이 빠질 것 같은데, 대체 뭐예요?” 이지숙은 손에 쥔 작은 상자를 묵묵히 바라보았다.‘꽤 가벼워. 아무래도 큰 선물은 아닌 것 같아.’“밥부터 먹고 열어보자꾸나.” “지금 열어보시죠. 심유인 씨도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신 모양인데요.” 현태가 이지숙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심유인이 경멸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방금 그 스킨 케어 제품보다 조금 더 비싼 선물을 꺼내면, 내가 감탄한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허, 정말 웃겨.’‘저것도 고작 몇백 만원짜리 선물일 뿐일 거야.” “숙모, 선물한 사람도 저렇게 말하잖아요. 어서 열어보세요!”이지숙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선물 상자를 열자마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스킨케어 제품이 아니라...’‘작은 증서?’상자를 또 한 번 확인한 이지숙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이건.
“그래, 네 남자 친구도 같이 봐주마.”심근영이 대답했다.“같이 식사하자꾸나, 그럼 된 거지?” 심근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심유인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감사합니다, 삼촌, 역시 제게 정말 잘해주시네요.”소희는 그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연기가 계속될 모양이군.’ “삼촌, 민찬 씨가 선물도 사 왔어요. 이것 좀 보세요!”심유인은 심근영을 끌고 선물 더미 앞에 다다랐고, 이지숙에게 보여줬던 선물 세 개를 집어 들었다.심유인은 현태가 가져온 선물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심근영은 심유인의 말을 듣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마음은 고맙지만, 우리는 네 친부모가 아니잖니. 네 남자 친구가 우리를 위해 이렇게 많은 돈을 쓰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구나.”“우리 회사에 가서 돈을 받고, 같은 값어치의 답례품을 사주도록 하렴.” 심유인은 순간적으로 너무 기뻐서 눈꼬리를 치켜들었다.사실 그 선물들을 산 사람은 심유인이었는데, 그녀는 수중에 그렇게 큰돈이 없어서 모두 신용카드와 할부로 결제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심씨 가문의 회사에 가서 돈을 받으라니!심유인은 이 기회에 카드 빚을 메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 더 챙길 수도 있었다. 나중에 누군가 물어본다면, 민찬에게 답례 선물을 산 것이라고 하면 그만일 테니 말이다.생각할수록 심유인은 점점 더 흥분했고, 심근영이 이미 허리를 숙여 선물 상자를 하나 집어 든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 안에는 뭐가 들었지?”심유인은 심근영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말했다.“삼촌!” 심근영이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왜?” “그게...”심유인은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안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는 다른 사람이 절대 알면 안 돼.’ ‘적어도 심소희의 남자 친구라는 사람은 절대 알면 안 된다고!’ “소희의 남자 친구분도 선물을 가져왔다고 들었어요. 아직 그 선물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했는데, 그것부터 열어 보는 게 어떨까요?” 심근영은 현태를 바라보았다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심유인은 즐거워했다.“와, 가난하긴 해도 염치는 있으신가 보네요. 하지만 그게 유일한 장점이겠죠?” 선물은 현태가 스스로 준비한 것이기에, 소희도 현태가 무슨 선물을 샀는지 몰랐다.그래서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 소희는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오빠, 무슨 선물을 샀는데요?”‘소민찬보다 못한 선물이면 큰일인데.’ 소희는 선물로 심유인과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어쨌든 현태가 부모님을 보러 오는 날이니, 선물의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현태가 심씨 가문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소희는 현태가 심씨 가문의 권세나 재물 탓에 손가락질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우선 들어가자. 곧 알게 될 거야.”이지숙도 계속 밖에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말했다.“그래요, 무슨 얘기든 들어가서 하자고요.”고개를 끄덕인 소희가 현태의 선물을 들어주려 하자, 현태가 말했다.“괜찮아, 내가 들게.”이 세심한 배려는 곧장 이지숙의 눈에 띄었는데, 여자는 본래 본능적인 행동을 가장 신경 쓰기 마련이지 않은가?현태의 행동을 본 이지숙은 소희가 거짓말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겉으로 보기에는 덩치도 크고 투박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의외로 세심한 면이 있네?’이렇게 생각한 이지숙은 현태를 다소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하지만 현태는 이지숙의 반응이 조금 변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거실로 들어서자, 이지숙은 고용인에게 심근영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사실, 심근영은 일찍 깨어났기에,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심근영이 시간을 질질 끌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2층에서 현태를 관찰했기 때문이었다.고용인의 동정을 들은 심근영이 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곧 나가도록 하지.” 심근영은 고용인이 떠난 후에야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그제야 현태의 생김새를 똑똑히 보았다. 현태는 키가 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