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수정은 온몸에 냉기를 두른 것 같은 하지환이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자 물끄러미 쳐다보았다.전에 성지영한테서 윤이서가 정신 나갔다며 평범한 남자와 결혼했다는 얘기를 들은 게 기억났다.그때 윤수정은, 이서의 남편이 못생기고 지지리 궁상인 남자일 거로 생각했는데……, 글쎄 하은철보다 훨씬 잘 생겼다.윤수정은 길쭉한 손톱으로 반대손 합곡 자리를 꾹 눌렀다. 눈동자는 질투로 인해 혈안이 되었다가 서서히 사라졌다.‘흥!’‘잘 생기면 뭐 해, 빚 좋은 개살구지!’……이서를 안은 지환은 그녀를 차 뒷좌석에 태웠다.이서는 몰래 그를 훔쳐보고 있었다. 얇은 입술을 앙다문 것을 보니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미안해요, 제가…… 또 폐 끼쳤죠?”원래 계획대로라면 무대에 오른 후, 하은철과의 결혼을 선포했어야 했다.그러나 단상에 서자, 하지환과의 여러 가지 추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에게 선물했던 별장 그리고 자기만의 집, 가정을 만들어 준 것……. 그녀는 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사실 대로 고백해 버린 것이었다.지환은 몸을 낮춰 그녀의 부은 복사뼈를 한 번 보았다.“병원에 데려다 줄게요.”이서는 붉은 입술을 벌리고 얘기했다.“미안해요!”지환은 고개를 들어 백미러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서를 바라보았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어린애처럼 안절부절못한 모습을 보니 안쓰러움이 밀려왔다.그는 그녀에게 화난 게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침묵을 택했을 뿐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만약 일찍이 그의 정체를 말했더라면, 아마도 오늘 밤 발을 삐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사람들이 난처하게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십여 분 뒤, 차는 북성 최고의 종합 병원에 도착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이 병원은 하씨 그룹 계열사 중 하나였다.지환은 이서를 안고 응급실로 향했다.두 사람의 등장에 사람들이 술렁이었다.이서는 지환의 탄탄한 품속에 움츠렸다. 작은 얼굴은
이서는 밤늦게야 겨우 잠이 들었다.욕실에 들어간 하지환은 두 시간 넘게 냉수욕하면서 몸의 열기를 식혔다.욕실에서 나온 그는 이서의 잠자는 얼굴을 조용히 지켜보았다.침대에 누워 있는 이서는 희고 작은 얼굴만 드러내고 있었다. 평상시처럼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아닌 뭔가 석연치 않은 듯 얼굴에 인상을 팍 쓰고 있었다.하지환은 그녀의 미간에 가볍게 키스했다.일어서려고 하는데 몸이 또 반응했다.그는 짜증난 듯 아래층으로 내려가 찬 바람을 쐬었다.1층에 도착하자 핸드폰이 울렸다.발신자 번호를 확인하고는 안색이 어두워졌다.“아버지.”[아직 안 자니? 그럴 줄 알았다.] 하지환의 아버지 하경수가 말을 이었다.[그쪽은 지금 어때? 일은 잘 되고 있는 게야?]“현재 몇몇 대형 화장품 회사를 인수 합병 추진 중입니다.”하지환의 목소리가 바람에 더욱 차가워졌다. “다음 달이면 아마 다 마무리될 듯합니다. 그때 가서 다시 말씀드리죠.”하경수는 웃으며 말했다.[네가 문제없이 잘 해낼 줄 알았다. 맞다. 언제 내 며느리 보여줄 거야?]드디어 본론으로 넘어갔다.하지환은 눈을 들어 입원병동의 방향을 바라보았다.“나중에요…….”하경수의 목소리가 갑자기 변했다.[지난 번에는 다음 달에 온다고 하지 않았어? 지환아, 너 설마 결혼했다는 거 거짓말은 아니지?]“발목을 접질렸어요. 다 나으면 그 때 갈게요.”하경수의 말투가 다시 걱정 어린 목소리로 바뀌었다.[괜찮아? 전문 의료팀을 보내줄까?]하지환은 미간을 꾹 누르며 말했다.“아버지,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녀는 제 신분도 모르고, 가정 배경도 모른다고요. 혹시 알게 되면…….”[알지, 알지…….]하경수가 말했다.[우리 며느리가 걱정되어서 그런 거지……. 됐다, 됐어. 이제 정신 차리고, 장가도 갔으니…… 나더러 평생 같이 연기하라고 해도 받아들여야지. 그건 그렇고, 그래도 내게 며느리 얼굴은 보여 줘야 하지 않겠니?]하지환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이쪽 일이 다 마무리되면 그때 만나게 해
“흥, 밀당의 귀재라고 해도 되겠어? 네가 그러고 간다고, 내가 너한테 없던 마음이 생길 거 같니?”하은철은 이서의 뒤통수를 보고 숨을 크게 들이쉬며 냉소했다.고개를 돌린 이서는 잔잔한 호수 같은 눈동자로 하은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치 그의 속마음을 간파하려는 것 같았다.“하은철, 낯짝이 두꺼운 거야? 아니면 뻔뻔한 거야? 똥 덩어리 같은 녀석아!”이렇게 상스러운 말이 윤이서의 입에서 나오자, 하은철은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했다. 한참 뒤에야 화가 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쌍스러워! 쌍스러워! 윤이서 너 너무 쌍스러워. ‘근묵자흑’ 이라더구만, 거렁뱅이한테 시집가더니 완전히 쌍스러워졌어!”이서도 질세라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야유를 퍼부었다.“맞아, 쌍스럽다. 어쩔 건데? 너처럼 인간의 탈을 쓴 짐승에 비하면, 난 적어도 떳떳하거든.” “너…….”화를 주체하지 못한 하은철은 손을 앞뒤로 내저으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그래, 윤이서, 너, 이렇게 말주변이 좋은 줄 몰랐네? 난 그래도 네가 발목이 삐었다고 여기까지 널 보러 왔는데…… 지금 보니, 너 완전 자업자득이야. 뿌린 대로 거둔 거라고!”말을 마치고, 화가 나서 떠났다.이서는 화가 난 하은철의 뒷모습을 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이전에는 화가 나서 자리 뜨는 건 그녀의 몫이었는데, 지금은 역지사지가 되었다.윤수정의 병실로 돌아온 하은철은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의자에 앉았다.“아, 열 받네! 젠장!”침대에 앉아 있던 윤서정은 일어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그냥 앉은 자리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오빠, 왜 그래?”“나 방금 윤이서 보고 왔거든!”일순 윤수정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그 여자가 글쎄 나보고, 나보고…….”하은철은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하고 아예 손을 흔들었다.“됐다 그래, 내가 평생 혼자 사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쌍스러운 여자는 사양이다. 에잇…….”윤수정은 그제야 다시 미소를 지었다.“오빠, 화내지 마. 어차피 할아버지도 이미 언니
윤이서는 아침을 먹고 나니 임하나로부터 문자가 왔다.[이서야! 너 설마 어르신 생신날에 네 결혼 사실을 선포한 거야?]가볍게 ‘응’이라고 답장한 지 1초도 되지 않아, 임하나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임하나의 들뜬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대박! 이서야, 너 초특급 울트라 캡 짱 용감한데? 용감한 거니, 무모한 거니? 그나저나 어르신은 화 안 내셨어? 너 괜찮지?]“아니, 화 안 내셨고 오히려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하셨어.”하지환을 언급하자 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임하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깜짝 놀랐잖아. 난 어르신이 노발대발하실 줄 알았는데…… 어쨌든 잘 됐다. 너 드디어 하은철 그 인간쓰레기한테서 탈출했네.]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하은철의 분노한 목소리가 들렸다.“윤이서, 너 나와!”이서는 잠깐 멍해졌다.핸드폰 저편의 임하나도 긴장한 듯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야?]“괜찮아.” 이서가 임하나를 안심시키며 말했다.“나 먼저 끊는다,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그녀는 말을 마치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휴대전화를 내려놓자마자, 초라한 모습의 윤재하와 부부가 눈앞에 나타났다.이서는 눈썹을 찌푸리며 이해할 수 없는 눈빛으로 그들 뒤에 서 있는 하은철을 바라보았다.하은철이 앞으로 한 걸음 나오며 물었다.“네 남편은?!”그러고 보니 아직 윤이서의 남편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이름조차도.이서는 무심코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무슨 일인데?”“너 눈멀었어? 네 부모님이 무슨 꼴 당했는지 안 보여?”이서는 고개를 살짝 돌려 벌벌 떨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미간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혹이 남아있었다.“네 잘난 남편이 택시 기사를 시켜 네 부모들을 야산 산꼭대기까지 데려가서 옷이랑 소지품 다 뺏고, 밤새 찬바람을 맞게 하고…….”듣다 못 한 이서가 하은철의 말을 끊었다.“사람 모함하지 마! 증거 있어?”이서의 반격에 하은철은 무려 반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
“내가 더 이상 눈 뜨고 지켜볼 수가 없었어.”하은철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너랑 결혼한 이상,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장인, 장모인데, 어떻게 처가 식구들에게 이렇게 무례할 수 있지?! 윤이서, 빨리 네 남편 불러와 사과시켜. 그럼, 이 일은 그냥 없던 일로 넘어갈게.”“잘못한 것도 없는 사람을, 내가 왜 불러?”“너 지금 작정하고 네 남편 두둔하는 거니?” 하은철은 갑자기 다가와 윤이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윤이서는 고개를 들어 태연하게 하은철을 돌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그렇다, 왜?”그녀의 당당함에 살짝 당황한 하은철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여기는 북성이고, 내 지역인 거 알지? 네 남편이 아직 북성에 있는 한, 땅을 파서라도 내가 그 새끼 찾아낸다. 그때 되면, 이렇게 쉽게 끝내지 않는다는 거 알고 있어!”말이 끝나자, 하은철은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갔다.성지영과 윤재화도 눈치껏 하은철의 뒤꽁무니를 따라 황급히 병실을 나갔다.그들이 꽤 멀리 떠난 걸 확인한 이서는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 하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때 하지환은 어두컴컴한 룸에 앉아 있었다. 넥타이는 목덜미에 느슨하게 걸려 있었고, 몸에는 술기운이 가득했다. 술이 곤죽이 되었어도 고귀함을 잃지 않았다.주위에는 이미 몇몇 여자들이 이 잘생긴 남자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술잔을 들고 지환의 옆에 오려던 그녀들은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주눅이 들어 고분고분 제자리에 잠자코 앉아있었다.이 상황을 지켜본 이상언은 술잔을 들고 하지환의 곁에 가서 앉았다.“즐기러 오자고 한 사람도 너고, 싫다고 하는 사람도 너고…… 아이고, 도련님, 도대체 원하는 게 뭡니까?”하지환은 눈앞의 투명 유리잔을 주시하며 마지막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고개를 들었을 때 맑고 투명한 눈동자에 한 줄기 막막함이 스쳐 지났다.“대체 뭔 일이야?”이상언이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설마…… 이서 씨와 관련 있는 건 아니겠지?”윤이서와 결혼한 이후로, 이 남자 비
이상언은 눈이 빠지도록 하지환을 기다렸다. 5시간 같은 5분이었다.다시 돌아온 지환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눈치 없는 여자들이 다시 다가오려고 하자, 하지환의 차가운 눈빛을 쏘아붙였다. 그러자 여자들은 그의 안색을 살피고 다들 스리슬쩍 물러났다.이상언도 하지환에게 몇 마디 하려다가 하지환의 눈빛을 보고 그만두었다.그는 어쩔 수 없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화제를 본론으로 돌렸다.“지난번에 네가 윤수정의 신장이식 공여자를 찾아 달라고 했잖아. 계속 해?”하지환의 머릿속에 울어서 빨개진 이서의 눈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혐오스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됐어. 안 찾아도 돼.”“그럼, 다행이다. 며칠 전에 윤수정 병력을 확인해 봤는데, 문제점이 꽤 많더라고…….”이상언은 술을 한 모금 마셨다.“그래서 너랑 상의 좀 하려고 했는데……. 찾을 필요 없다니, 귀찮은 일 하나 줄었네.”하지환은 가볍게 ‘응’하고 대답했다.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어서 이상언이 한 말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병원.하은철은 이서의 치료를 담당한 주치의를 찾아갔다.이서를 언급하자 의사는 정확하게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물론 기억하죠.”하은철의 눈동자가 밝아졌다.“그럼 윤이서 씨 옆에 있던 남자,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요?”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 남자요, 기품이 범상치 않았고, 검은 눈썹에 카리스마 넘치는 눈동자, 키도 크고 잘 생겼어요. 그리고 그 윤이서 환자에게 아주 지극정성이더라고요. 딱 봐도 좋은 남편이었어요!”하은철의 미간이 아래로 내려앉았다.“정말 당신이 말한 것처럼 그렇게 훌륭한가요?”의사는 웃으며 말했다.“도련님, 제가 과대포장한 게 아니라 오랜 기간 병원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렇게 아내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남편은 정말 오랜만인 듯합니다. 게다가 두 사람 선남선녀가 따로 없더구먼요. 천생연분이에요. 참 잘 어울렸어요.”“그만, 그만 해요!”하은철은 초조하게 의사의 말을 끊었다.의사는 제자리에 서서 어쩔 바를 몰랐다.하은철은 눈
“미안해요, 당신인 줄 몰랐어요.”이서는 긴장한 표정으로 하지환을 끌어서 소파에 앉혔다. 불을 켜고 상처를 보니 심장이 아파왔다. 그녀는 곧 병실에서 재빨리 구급상자를 찾아냈다.작은 상처이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하지환의 눈길은 상자 안에 널려 있는 속옷 쪽으로 갔다.대뇌가 갑자기 다운된 것 같았다.이 옷들은 그가 사람을 시켜 보내라고 한 것이다.부하직원들이 골라서 바로 보낸 거라 확인할 길이 없었다.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몸에서 오는 괴로움은 마치 곧 분출할 화산처럼 용암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하필 이때 이서는 구급상자를 들고 그의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소녀 특유의 살냄새가 코끝을 간질이며 그의 이성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었다.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알코올을 묻힌 면봉을 들고 하지환의 이마에 난 상처를 닦았다.“좀 아파도 참아요.”이서는 부드럽고 섬세한 동작으로 이마의 상처를 처치했다.지환의 목젖이 힘겹게 미끄러졌다. 그의 시선은 눈앞의 풍경에서 고정되었다. 얼굴에서 시작된 홍조는 슬그머니 귓볼까지 빨개졌다.뜨거운 시선에 윤이서는 동작을 멈칫했다. 고개를 숙이고서야 두 사람의 자세가 얼마나 야릇한 지를 깨달았다.“아, 네…… 다 됐어요…….”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공기 중에는 여전히 이상야릇한 기운이 감돌았다.이서는 아무 말이라도 해야 이 기괴한 분위기를 깨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어떻게 올라왔어요?”윤이서는 베란다를 한 번 보았다. 여기는 2층이다.‘설마 파이프를 타고 올라온 건 아니겠지?’“타고 올라왔죠.”“…….”‘정말 그렇다.’“여긴 2층인데요?!”지환이 웃었다. ‘이 정도 높이는, 식은 죽 먹기지.’“어때요? 발목은…….” 그는 윤이서의 발목을 보며, 소파에 널브러진 속옷을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아직은 좀 아프지만, 그래도 걸을 수 있어요. 이제 퇴원해도 될 거 같아요.”매일 고액의 입원비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지난번에 물어보긴 했는데 아직 확답을 못 받았어.”“설마 어르신한테 꼬리라도 밟힐까 봐 그런 건 아니겠지?”“밟힐 게 뭐 있어?”이서는 임하나가 너무 앞섰다고 생각했다.“그 사람이 정말 명문가 귀공자라면…… 윤씨 집안 사람들이 못 알아볼 리 있겠어?”임하나는 턱을 매만졌다.“그건 그렇네. 어르신이 보고 싶어 하시니까 걍 데리고 가서 어르신께 보여드려. 어르신이 아마 알아서 잘 봐주실 거야.”“됐어…….”윤이서는 고개를 숙였다.“하은철이 지금 전 북성시를 이 잡듯이 뒤지고 있어. 괜히 지환 씨를 할아버지께 데려갔다가 독 안에 든 쥐 만들 필요 없잖아.”“그건 쉽지. 어르신이 널 그렇게 예뻐하시는데 뭐가 걱정이야? 하은철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어르신께 부탁하면 되지. 그리고…….”임하나는 이서 가까이 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어르신의 인정을 받고 싶은 거 아니었어?”역시 베프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서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고 있다.대답보다는 침묵을 선택한 이서를 화장실에서 끌고나온 임하나는 침대 옆자리에 서 있는 지환을 불렀다.“지환 씨.”지환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인 채 수줍게 얼굴을 붉힌 윤이서를 바라보았다.임하나는 이서를 지환 앞으로 밀며 이서의 어깨를 툭툭두드렸다.“얘기해, 밖에서 기다릴게.”말을 마치고 병실을 나섰다.방에는 이서와 지환만 남았다.“할 얘기가……?” 고개를 숙이자, 헐렁한 환자복 속으로 가려진 소녀의 탄력 있는 몸매가 언뜻 보였다. 지환은 부자연스럽게 헛기침하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그게…… 지난번에 할아버지를 뵈러 가자고 했던 일이요…….”이서는 숨도 돌리지 않고 단숨에 말을 뱉었다. 예쁜 눈동자는 긴장한 듯 지환을 쳐다보았다.지환의 눈동자가 약간 굳었다.“내가 이미 그러자고 하지 않았나요?”“그런가요? 언제?”“내가 갔으면 좋겠냐고 물었을 때.”이서는 눈을 깜빡이며, 빨간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믿기 어려운 듯 재차 확인했다.“그래서, 내가 가자고 하면 간다는 얘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