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수정은 온몸에 냉기를 두른 것 같은 하지환이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자 물끄러미 쳐다보았다.전에 성지영한테서 윤이서가 정신 나갔다며 평범한 남자와 결혼했다는 얘기를 들은 게 기억났다.그때 윤수정은, 이서의 남편이 못생기고 지지리 궁상인 남자일 거로 생각했는데……, 글쎄 하은철보다 훨씬 잘 생겼다.윤수정은 길쭉한 손톱으로 반대손 합곡 자리를 꾹 눌렀다. 눈동자는 질투로 인해 혈안이 되었다가 서서히 사라졌다.‘흥!’‘잘 생기면 뭐 해, 빚 좋은 개살구지!’……이서를 안은 지환은 그녀를 차 뒷좌석에 태웠다.이서는 몰래 그를 훔쳐보고 있었다. 얇은 입술을 앙다문 것을 보니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미안해요, 제가…… 또 폐 끼쳤죠?”원래 계획대로라면 무대에 오른 후, 하은철과의 결혼을 선포했어야 했다.그러나 단상에 서자, 하지환과의 여러 가지 추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에게 선물했던 별장 그리고 자기만의 집, 가정을 만들어 준 것……. 그녀는 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사실 대로 고백해 버린 것이었다.지환은 몸을 낮춰 그녀의 부은 복사뼈를 한 번 보았다.“병원에 데려다 줄게요.”이서는 붉은 입술을 벌리고 얘기했다.“미안해요!”지환은 고개를 들어 백미러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서를 바라보았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어린애처럼 안절부절못한 모습을 보니 안쓰러움이 밀려왔다.그는 그녀에게 화난 게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침묵을 택했을 뿐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만약 일찍이 그의 정체를 말했더라면, 아마도 오늘 밤 발을 삐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사람들이 난처하게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십여 분 뒤, 차는 북성 최고의 종합 병원에 도착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이 병원은 하씨 그룹 계열사 중 하나였다.지환은 이서를 안고 응급실로 향했다.두 사람의 등장에 사람들이 술렁이었다.이서는 지환의 탄탄한 품속에 움츠렸다. 작은 얼굴은
이서는 밤늦게야 겨우 잠이 들었다.욕실에 들어간 하지환은 두 시간 넘게 냉수욕하면서 몸의 열기를 식혔다.욕실에서 나온 그는 이서의 잠자는 얼굴을 조용히 지켜보았다.침대에 누워 있는 이서는 희고 작은 얼굴만 드러내고 있었다. 평상시처럼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아닌 뭔가 석연치 않은 듯 얼굴에 인상을 팍 쓰고 있었다.하지환은 그녀의 미간에 가볍게 키스했다.일어서려고 하는데 몸이 또 반응했다.그는 짜증난 듯 아래층으로 내려가 찬 바람을 쐬었다.1층에 도착하자 핸드폰이 울렸다.발신자 번호를 확인하고는 안색이 어두워졌다.“아버지.”[아직 안 자니? 그럴 줄 알았다.] 하지환의 아버지 하경수가 말을 이었다.[그쪽은 지금 어때? 일은 잘 되고 있는 게야?]“현재 몇몇 대형 화장품 회사를 인수 합병 추진 중입니다.”하지환의 목소리가 바람에 더욱 차가워졌다. “다음 달이면 아마 다 마무리될 듯합니다. 그때 가서 다시 말씀드리죠.”하경수는 웃으며 말했다.[네가 문제없이 잘 해낼 줄 알았다. 맞다. 언제 내 며느리 보여줄 거야?]드디어 본론으로 넘어갔다.하지환은 눈을 들어 입원병동의 방향을 바라보았다.“나중에요…….”하경수의 목소리가 갑자기 변했다.[지난 번에는 다음 달에 온다고 하지 않았어? 지환아, 너 설마 결혼했다는 거 거짓말은 아니지?]“발목을 접질렸어요. 다 나으면 그 때 갈게요.”하경수의 말투가 다시 걱정 어린 목소리로 바뀌었다.[괜찮아? 전문 의료팀을 보내줄까?]하지환은 미간을 꾹 누르며 말했다.“아버지,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녀는 제 신분도 모르고, 가정 배경도 모른다고요. 혹시 알게 되면…….”[알지, 알지…….]하경수가 말했다.[우리 며느리가 걱정되어서 그런 거지……. 됐다, 됐어. 이제 정신 차리고, 장가도 갔으니…… 나더러 평생 같이 연기하라고 해도 받아들여야지. 그건 그렇고, 그래도 내게 며느리 얼굴은 보여 줘야 하지 않겠니?]하지환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이쪽 일이 다 마무리되면 그때 만나게 해
“흥, 밀당의 귀재라고 해도 되겠어? 네가 그러고 간다고, 내가 너한테 없던 마음이 생길 거 같니?”하은철은 이서의 뒤통수를 보고 숨을 크게 들이쉬며 냉소했다.고개를 돌린 이서는 잔잔한 호수 같은 눈동자로 하은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치 그의 속마음을 간파하려는 것 같았다.“하은철, 낯짝이 두꺼운 거야? 아니면 뻔뻔한 거야? 똥 덩어리 같은 녀석아!”이렇게 상스러운 말이 윤이서의 입에서 나오자, 하은철은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했다. 한참 뒤에야 화가 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쌍스러워! 쌍스러워! 윤이서 너 너무 쌍스러워. ‘근묵자흑’ 이라더구만, 거렁뱅이한테 시집가더니 완전히 쌍스러워졌어!”이서도 질세라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야유를 퍼부었다.“맞아, 쌍스럽다. 어쩔 건데? 너처럼 인간의 탈을 쓴 짐승에 비하면, 난 적어도 떳떳하거든.” “너…….”화를 주체하지 못한 하은철은 손을 앞뒤로 내저으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그래, 윤이서, 너, 이렇게 말주변이 좋은 줄 몰랐네? 난 그래도 네가 발목이 삐었다고 여기까지 널 보러 왔는데…… 지금 보니, 너 완전 자업자득이야. 뿌린 대로 거둔 거라고!”말을 마치고, 화가 나서 떠났다.이서는 화가 난 하은철의 뒷모습을 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이전에는 화가 나서 자리 뜨는 건 그녀의 몫이었는데, 지금은 역지사지가 되었다.윤수정의 병실로 돌아온 하은철은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의자에 앉았다.“아, 열 받네! 젠장!”침대에 앉아 있던 윤서정은 일어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그냥 앉은 자리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오빠, 왜 그래?”“나 방금 윤이서 보고 왔거든!”일순 윤수정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그 여자가 글쎄 나보고, 나보고…….”하은철은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하고 아예 손을 흔들었다.“됐다 그래, 내가 평생 혼자 사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쌍스러운 여자는 사양이다. 에잇…….”윤수정은 그제야 다시 미소를 지었다.“오빠, 화내지 마. 어차피 할아버지도 이미 언니
윤이서는 아침을 먹고 나니 임하나로부터 문자가 왔다.[이서야! 너 설마 어르신 생신날에 네 결혼 사실을 선포한 거야?]가볍게 ‘응’이라고 답장한 지 1초도 되지 않아, 임하나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임하나의 들뜬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대박! 이서야, 너 초특급 울트라 캡 짱 용감한데? 용감한 거니, 무모한 거니? 그나저나 어르신은 화 안 내셨어? 너 괜찮지?]“아니, 화 안 내셨고 오히려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하셨어.”하지환을 언급하자 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임하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깜짝 놀랐잖아. 난 어르신이 노발대발하실 줄 알았는데…… 어쨌든 잘 됐다. 너 드디어 하은철 그 인간쓰레기한테서 탈출했네.]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하은철의 분노한 목소리가 들렸다.“윤이서, 너 나와!”이서는 잠깐 멍해졌다.핸드폰 저편의 임하나도 긴장한 듯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야?]“괜찮아.” 이서가 임하나를 안심시키며 말했다.“나 먼저 끊는다,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그녀는 말을 마치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휴대전화를 내려놓자마자, 초라한 모습의 윤재하와 부부가 눈앞에 나타났다.이서는 눈썹을 찌푸리며 이해할 수 없는 눈빛으로 그들 뒤에 서 있는 하은철을 바라보았다.하은철이 앞으로 한 걸음 나오며 물었다.“네 남편은?!”그러고 보니 아직 윤이서의 남편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이름조차도.이서는 무심코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무슨 일인데?”“너 눈멀었어? 네 부모님이 무슨 꼴 당했는지 안 보여?”이서는 고개를 살짝 돌려 벌벌 떨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미간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혹이 남아있었다.“네 잘난 남편이 택시 기사를 시켜 네 부모들을 야산 산꼭대기까지 데려가서 옷이랑 소지품 다 뺏고, 밤새 찬바람을 맞게 하고…….”듣다 못 한 이서가 하은철의 말을 끊었다.“사람 모함하지 마! 증거 있어?”이서의 반격에 하은철은 무려 반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
“내가 더 이상 눈 뜨고 지켜볼 수가 없었어.”하은철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너랑 결혼한 이상,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장인, 장모인데, 어떻게 처가 식구들에게 이렇게 무례할 수 있지?! 윤이서, 빨리 네 남편 불러와 사과시켜. 그럼, 이 일은 그냥 없던 일로 넘어갈게.”“잘못한 것도 없는 사람을, 내가 왜 불러?”“너 지금 작정하고 네 남편 두둔하는 거니?” 하은철은 갑자기 다가와 윤이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윤이서는 고개를 들어 태연하게 하은철을 돌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그렇다, 왜?”그녀의 당당함에 살짝 당황한 하은철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여기는 북성이고, 내 지역인 거 알지? 네 남편이 아직 북성에 있는 한, 땅을 파서라도 내가 그 새끼 찾아낸다. 그때 되면, 이렇게 쉽게 끝내지 않는다는 거 알고 있어!”말이 끝나자, 하은철은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갔다.성지영과 윤재화도 눈치껏 하은철의 뒤꽁무니를 따라 황급히 병실을 나갔다.그들이 꽤 멀리 떠난 걸 확인한 이서는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 하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때 하지환은 어두컴컴한 룸에 앉아 있었다. 넥타이는 목덜미에 느슨하게 걸려 있었고, 몸에는 술기운이 가득했다. 술이 곤죽이 되었어도 고귀함을 잃지 않았다.주위에는 이미 몇몇 여자들이 이 잘생긴 남자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술잔을 들고 지환의 옆에 오려던 그녀들은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주눅이 들어 고분고분 제자리에 잠자코 앉아있었다.이 상황을 지켜본 이상언은 술잔을 들고 하지환의 곁에 가서 앉았다.“즐기러 오자고 한 사람도 너고, 싫다고 하는 사람도 너고…… 아이고, 도련님, 도대체 원하는 게 뭡니까?”하지환은 눈앞의 투명 유리잔을 주시하며 마지막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고개를 들었을 때 맑고 투명한 눈동자에 한 줄기 막막함이 스쳐 지났다.“대체 뭔 일이야?”이상언이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설마…… 이서 씨와 관련 있는 건 아니겠지?”윤이서와 결혼한 이후로, 이 남자 비
이상언은 눈이 빠지도록 하지환을 기다렸다. 5시간 같은 5분이었다.다시 돌아온 지환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눈치 없는 여자들이 다시 다가오려고 하자, 하지환의 차가운 눈빛을 쏘아붙였다. 그러자 여자들은 그의 안색을 살피고 다들 스리슬쩍 물러났다.이상언도 하지환에게 몇 마디 하려다가 하지환의 눈빛을 보고 그만두었다.그는 어쩔 수 없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화제를 본론으로 돌렸다.“지난번에 네가 윤수정의 신장이식 공여자를 찾아 달라고 했잖아. 계속 해?”하지환의 머릿속에 울어서 빨개진 이서의 눈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혐오스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됐어. 안 찾아도 돼.”“그럼, 다행이다. 며칠 전에 윤수정 병력을 확인해 봤는데, 문제점이 꽤 많더라고…….”이상언은 술을 한 모금 마셨다.“그래서 너랑 상의 좀 하려고 했는데……. 찾을 필요 없다니, 귀찮은 일 하나 줄었네.”하지환은 가볍게 ‘응’하고 대답했다.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어서 이상언이 한 말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병원.하은철은 이서의 치료를 담당한 주치의를 찾아갔다.이서를 언급하자 의사는 정확하게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물론 기억하죠.”하은철의 눈동자가 밝아졌다.“그럼 윤이서 씨 옆에 있던 남자,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요?”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 남자요, 기품이 범상치 않았고, 검은 눈썹에 카리스마 넘치는 눈동자, 키도 크고 잘 생겼어요. 그리고 그 윤이서 환자에게 아주 지극정성이더라고요. 딱 봐도 좋은 남편이었어요!”하은철의 미간이 아래로 내려앉았다.“정말 당신이 말한 것처럼 그렇게 훌륭한가요?”의사는 웃으며 말했다.“도련님, 제가 과대포장한 게 아니라 오랜 기간 병원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렇게 아내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남편은 정말 오랜만인 듯합니다. 게다가 두 사람 선남선녀가 따로 없더구먼요. 천생연분이에요. 참 잘 어울렸어요.”“그만, 그만 해요!”하은철은 초조하게 의사의 말을 끊었다.의사는 제자리에 서서 어쩔 바를 몰랐다.하은철은 눈
“미안해요, 당신인 줄 몰랐어요.”이서는 긴장한 표정으로 하지환을 끌어서 소파에 앉혔다. 불을 켜고 상처를 보니 심장이 아파왔다. 그녀는 곧 병실에서 재빨리 구급상자를 찾아냈다.작은 상처이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하지환의 눈길은 상자 안에 널려 있는 속옷 쪽으로 갔다.대뇌가 갑자기 다운된 것 같았다.이 옷들은 그가 사람을 시켜 보내라고 한 것이다.부하직원들이 골라서 바로 보낸 거라 확인할 길이 없었다.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몸에서 오는 괴로움은 마치 곧 분출할 화산처럼 용암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하필 이때 이서는 구급상자를 들고 그의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소녀 특유의 살냄새가 코끝을 간질이며 그의 이성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었다.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알코올을 묻힌 면봉을 들고 하지환의 이마에 난 상처를 닦았다.“좀 아파도 참아요.”이서는 부드럽고 섬세한 동작으로 이마의 상처를 처치했다.지환의 목젖이 힘겹게 미끄러졌다. 그의 시선은 눈앞의 풍경에서 고정되었다. 얼굴에서 시작된 홍조는 슬그머니 귓볼까지 빨개졌다.뜨거운 시선에 윤이서는 동작을 멈칫했다. 고개를 숙이고서야 두 사람의 자세가 얼마나 야릇한 지를 깨달았다.“아, 네…… 다 됐어요…….”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공기 중에는 여전히 이상야릇한 기운이 감돌았다.이서는 아무 말이라도 해야 이 기괴한 분위기를 깨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어떻게 올라왔어요?”윤이서는 베란다를 한 번 보았다. 여기는 2층이다.‘설마 파이프를 타고 올라온 건 아니겠지?’“타고 올라왔죠.”“…….”‘정말 그렇다.’“여긴 2층인데요?!”지환이 웃었다. ‘이 정도 높이는, 식은 죽 먹기지.’“어때요? 발목은…….” 그는 윤이서의 발목을 보며, 소파에 널브러진 속옷을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아직은 좀 아프지만, 그래도 걸을 수 있어요. 이제 퇴원해도 될 거 같아요.”매일 고액의 입원비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지난번에 물어보긴 했는데 아직 확답을 못 받았어.”“설마 어르신한테 꼬리라도 밟힐까 봐 그런 건 아니겠지?”“밟힐 게 뭐 있어?”이서는 임하나가 너무 앞섰다고 생각했다.“그 사람이 정말 명문가 귀공자라면…… 윤씨 집안 사람들이 못 알아볼 리 있겠어?”임하나는 턱을 매만졌다.“그건 그렇네. 어르신이 보고 싶어 하시니까 걍 데리고 가서 어르신께 보여드려. 어르신이 아마 알아서 잘 봐주실 거야.”“됐어…….”윤이서는 고개를 숙였다.“하은철이 지금 전 북성시를 이 잡듯이 뒤지고 있어. 괜히 지환 씨를 할아버지께 데려갔다가 독 안에 든 쥐 만들 필요 없잖아.”“그건 쉽지. 어르신이 널 그렇게 예뻐하시는데 뭐가 걱정이야? 하은철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어르신께 부탁하면 되지. 그리고…….”임하나는 이서 가까이 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어르신의 인정을 받고 싶은 거 아니었어?”역시 베프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서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고 있다.대답보다는 침묵을 선택한 이서를 화장실에서 끌고나온 임하나는 침대 옆자리에 서 있는 지환을 불렀다.“지환 씨.”지환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인 채 수줍게 얼굴을 붉힌 윤이서를 바라보았다.임하나는 이서를 지환 앞으로 밀며 이서의 어깨를 툭툭두드렸다.“얘기해, 밖에서 기다릴게.”말을 마치고 병실을 나섰다.방에는 이서와 지환만 남았다.“할 얘기가……?” 고개를 숙이자, 헐렁한 환자복 속으로 가려진 소녀의 탄력 있는 몸매가 언뜻 보였다. 지환은 부자연스럽게 헛기침하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그게…… 지난번에 할아버지를 뵈러 가자고 했던 일이요…….”이서는 숨도 돌리지 않고 단숨에 말을 뱉었다. 예쁜 눈동자는 긴장한 듯 지환을 쳐다보았다.지환의 눈동자가 약간 굳었다.“내가 이미 그러자고 하지 않았나요?”“그런가요? 언제?”“내가 갔으면 좋겠냐고 물었을 때.”이서는 눈을 깜빡이며, 빨간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믿기 어려운 듯 재차 확인했다.“그래서, 내가 가자고 하면 간다는 얘기인
고이서는 두 사람이 단톡방에 보낸 메시지를 보고 꽤나 만족스러워하며 웃기 시작했다.하지만 자신이 아주 특별한 신분임을 잊지 않았고, 절대 외부인에게 자신이 원래의 ‘윤이서’라는 사실을 알리면 안 된다는 것을 되새겼다. ‘윤이서가 나와 엄마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다면, 분명히 의심할 거야.’고이서가 걱정을 털어놓자, 성지영이 무심히 말했다.[얘, 그렇게 우연히 만날 리가 없잖아. 이렇게 큰 도시에서 쇼핑하다가 윤이서를 만난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란다.]윤재하도 그런 우연이 일어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우리 딸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야. 곧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끝날 텐데,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서 골치 아픈 일을 만들 필요는 없잖아?][그래도 드레스가 사고 싶다면, 교외로 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군.][윤이서가 교외로 쇼핑가지는 않을 테니까.]성지영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교외에서 어떻게 그럴듯한 드레스를 살 수 있겠어요?] 고이서는 시내에서는 이서를 만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교외에서는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엄마, 교외에는 제대로 된 드레스가 없긴 하겠지만,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잖아요.][제가 윤씨 그룹의 대표가 되면, 시내의 드레스는 물론이고, 고급 럭셔리 브랜드의 드레스까지 전부 집으로 보내드릴게요, 네?]이 말은 성지영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어머, 우리 딸 말하는 것 좀 봐? 그래, 토요일에 시외에서 쇼핑하자꾸나.][네, 엄마.]고이서는 약속 시간을 정한 후에야 핸드폰을 내려놓고 업무에 집중했다. 한편, 최고층에 있던 이서는 전화하고 있었는데, 이는 소희가 걸어온 것이었다. [이서 언니, 긴급 상황이에요. 저 좀 도와주세요!]이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어젯밤에 부모님께 현태 오빠의 존재를 털어놓았잖아요.][그런데 오늘 아침에 아빠가 저를 서재로 부르셔서는 다음 주 월요일에 현태 오빠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셨어
“나는 과거에 살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요.”조용히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눈빛에서는 고통이 요동치고 있었고,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지환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울부짖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감정은 입술 끝에서 단 세 글자로 바뀌고 말았다.“알겠어.” 이서도 지환의 이런 모습에 마음이 괴로웠다.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마다 과거만 떠올릴 뿐, 그 누구도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그것은 그저 과거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그만 먹을래요.”이서는 황급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병실을 떠났다. 차에 오르자, 이서는 고통이 온몸으로 번지는 듯했다. ‘하지환 씨가 하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늘은 왜 우리한테 이런 장난을 친 걸까?’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차 안의 카펫을 바라보던 이서는 운전기사의 말을 듣고서야 회사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에서 내린 이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또 고이서를 마주쳤다.다시 고이서를 마주한 이서의 감정은 완전히 뒤바꾼 후였지만, 그러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고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고이서가 빙그레 웃으며 이서를 바라보았다.“윤 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젯밤에는 잘 주무셨나요?”“덕분에요.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를 마신 이후로 아주 잘 자고 있어요.” “참, 지난번에 꽃차가 부족하면 더 구해줄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큰 걸로 하나 더 구해주실 수 있을까요?”이서가 주동적으로 꽃차를 더 달라고 하자, 고이서의 눈동자에 기쁨이 번졌다.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서는 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윤씨 그룹에 들어온 거였구나.’‘재무팀 팀장을 다시 구해봐야겠어.’어쨌든 재무는 한 회사의 존망이 달린 것이지 않은가. “언제까지 구해드리면 될까요?”“어제저녁에 세어 보았는데, 아직 10포가 남았더라고요. 매일 저녁에 1포씩 먹는다고 가정하면, 10일분은 남은 셈이죠. 4일이나
“감사해요.”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구태우가 한 말을 곱씹자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날이 밝자마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알았어,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줄 여력이 없어.”‘미안해요, 소지태 씨.’이서는 평생 지태에게 대답을 줄 수 없을 것이었다.병실 문을 열자, 아침 식사를 들고 있는 이천이 보였다.“또 아침 식사를 가져오신 거예요?”‘역시 사모님이야!’놀란 이천은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뒤에서 몸을 일으킨 지환이 보였다.이서가 그를 마주하고도 표정이 구겨지지 않자, 이천이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사모님, 같이 드실래요?” “이 비서님, 말씀드렸잖아요.”“앞으로는 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시라고요.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떡해요?”이서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천은 곧장 지환의 안색을 살폈는데, 과연 이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환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지... 괜히 사모님께 식사하자고 해서 또 대표님의 기분을 나쁘게 했으니까!’ “그래도 아침은 같이 먹을게요.”이서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놀란 이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거든요.”이서가 싱긋 웃어 보였다. ‘식사하시겠다고?! 경사네, 경사야!’이천은 바삐 이서를 붙잡고 지환의 병실로 향하며 말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아니, 윤 대표님께서 같이 식사하시겠답니다!” “그래.”지환의 낯빛은 조금이나마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듯했지만, 여전히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서가 자리에 앉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천은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눈물이 눈 앞을 가렸다.‘이런 평화로운 모습이 얼마 만인 거지?’ “아, 더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이천이 음식을 내려놓고 말했다.“맛있게 드십시오. 부족하시면 더 사 오겠습니다.”이서는 멀어져가는 이천의 뒷모습을 보며
“이 꽃차를 장기간 이용할 경우, 중추신경이 손상돼서 심하면 치매를 일으킬 수 있어요.”“강력한 성분이 꽤 많이 들어 있더군요.”“음... 제 예상대로라면, 대략 보름 정도 사용하면 치매가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놀란 이서가 다시금 물었다.“그러니까, 제가 보름 동안 이 꽃차를 복용했다면, 치매에 걸렸을 거란 말씀이세요?”“네, 그래서 지인이 준 게 맞냐고 물었던 거예요.”의사가 설명서를 보고 말했다.“설명서에도 다른 나라 언어만 있잖습니까.”“그래서 그분도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에요.”“윤이서 씨, 이 꽃차를 복용하기 시작한 건 아니죠?”“그게...”이서는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고 팀장은 외국에서 자란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 나라의 언어를 모를 수 있겠어?’‘오히려 잘 알아서 이 꽃차를 사 온 걸 거야.’ 하지만 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고 팀장님이 왜... 나를 해치려 한 거지?’ ‘설마, 하도훈이 보낸 사람인 건가?’“윤이서 씨?”의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설마 벌써 며칠간 드신 겁니까?” 별안간 정신을 차린 이서가 말했다.“아니요, 딱 한 번 마셨어요.” 의사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딱 한 번만 마셨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이서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내 건강보다도 회사를 걱정할 때야.’‘고이서, 당신... 대체 누구야?!’의문을 품은 이서는 병실로 돌아간 후, 하늘에게 고이서의 모든 자료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하늘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으나, 곧장 고이서에 관한 자료를 보내왔다.이서는 한 장씩 뒤적거렸으나, 결국 고이서의 이력서에서는 어떠한 문제점도 찾지 못했다.‘지금 당장 고이서를 해고한다고 해도, 그 여자가 대체 누구인지, 왜 나를 찾아온 건지는 알 수 없을 거야.’ 이서는 별안간 지태의 곁에 있는 구태우를 떠올렸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구태우에게 연락을 취했고, 그는 두말없이 승낙했다.
병원에 도착한 이서는 우물쭈물하다가 차 안에 있는 지환을 향해 말했다.“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그 사람을 처리해 줘서?”“네.”“참,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어요? 왜 날 죽이려고 한 거죠?”“설마... 하도훈의 사람이었던 거예요?” 지환은 이서의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잠시 후에야 말했다.“하은철의 죽음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만, 하도훈은 우리 두 사람이 비밀을 누설했다고 생각하고, 우리를 죽여서 분풀이하려던 거야.” 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우리요? 누가 하지환 씨에게도 해를 가한 거예요?”“응.” 이 대답이 나오는 순간, 이서의 심장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괜찮아요?”그녀가 간신히 입을 뗐다.지환은 그런 이서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날 걱정하는 거야?” 이서는 붉게 물든 얼굴로 화를 냈다.“우... 우리는 지금 협력 관계예요! 하지환 씨한테 사고가 나면, 내가 어떻게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지환의 웃음기는 더욱 짙어졌다.“난 괜찮아. 어둠의 호리병이 있으니, 하도훈조차도 나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거거든.” “하지만...”이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어둠의 호리병은 한 사람이잖아요. 만약 하도훈이 동시에 두 사람을 보내면 어떡해요?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은 위험에 빠질 거라고요.” “걱정하지 마. 우리 곁에 고수가 있다는 걸 안 이상, 하도훈은 당분간 우리를 해치려 하지 않을 거야. 게다가 하도훈은 지금 여자를 찾아 하씨 가문의 후계자를 만드느라 바쁠걸?”이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차 안으로 돌아갔다.“하도훈이 찾는 여자한테 손을 쓸 수는 없을까요?”“무슨 뜻이야?” “하도훈은 대를 잇는 것에 집중하느라 상대의 출신은 전혀 개의치 않을 거예요. 오히려 그 사람이 더욱 중요시하는 건 상대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가 하는 거겠죠.”“만약 우리가 먼저 하도훈의 조건에 맞는 여자를 골라낸다면, 그 여자를 하도훈의 곁에 두고,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이지숙이 꽤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어머, 내 정신 좀 봐.”“나는 윤 대표더러 소희를 설득해 달라는 의미였어. 오해하지는 마.” 이서는 이미 고개를 돌려 심근영과 대화를 이어가던 지환을 흘겨보다가 이지숙을 향해 말했다.“알맞은 상대를 찾는 일은 제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이잖아요.” 이지숙이 말했다.“그거야 그렇지만... 윤 대표는 우리 소희의 친구잖아. 그러면 소희와 가치관이 잘 맞는다는 뜻이지 않겠어? 어쩌면 이 중에 두 사람 마음에 다 드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서는 소희를 힐끗 보았는데, 그녀는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현태 씨에 관해 말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네.’ 이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사진을 받고 진지하게 보기 시작했다.요리가 나오는 동안, 이서는 구실을 찾아 소희와 함께 룸을 나섰다.“소희 씨, 왜 현태 씨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거야?” 소희가 말했다.“아직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두 분이 현태 오빠를 받아들일지도 모르겠고요.”“만약 반대하신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소희의 긴장한 모습을 본 이서가 웃기 시작했다.“두 분이 현태 씨를 반대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 거야? 현태 씨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는 거네?” “이서 언니!”“그래, 인제 그만 웃을게.”“나는 두 분이 현태 씨의 출신을 전혀 개의치 않으실 거라고 생각해. 두 분에게는 현태 씨의 출신보다, 소희 씨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실 테니까.”“물론, 두 분이 소희 씨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현태 씨의 출신을 더 중요히 여기시겠지.”“그럼 소희 씨도 두 분의 의견을 신경 쓰지 않으면 되잖아?” “내 말이 틀렸어?”곰곰이 생각하던 소희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언니 말이 맞아요.”두 사람은 다시 룸으로 돌아왔다.이지숙이 다시금 중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소희는 이서를 힐끗 본 후에야 입을 열었다.“엄마, 사실... 제겐 남자 친구가 있어요.”놀란 이지숙은 대답도 잊은 채 소희를 바
이서의 심장 소리가 욕실 안을 가득 메웠다.거부할 수 없는 그의 손길, 오히려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은근한 기대가 피어올랐다.그 순간, 지환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이 많이 차갑네. 평소에 신경 좀 써.’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섰을 때는 5분이 흐른 후였다. 뺨에 오른 붉은 기운은 이미 옅어졌지만, 귓불의 붉은 기운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다시 운전석에 앉은 지환의 모습이 맑고 아름다운 풍경처럼 보이자, 이서는 방금 욕실에서 느꼈던 감정이 더욱 부끄럽게 느껴졌다. ‘지환 씨는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떨칠 수 없는 괴로움 속에서, 이서와 지환은 마침에 호텔에 다다랐다.심근영 부부와 소희는 이미 도착해 있었는데, 두 사람을 보고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게다가 심근영은 이 기회를 틈타 지환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하 대표님, 저희 체면을 세워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지환의 표정은 매우 담담했다. 하지만 심근영은 그의 행동 스타일을 일찌감치 들은 모양인지, 전혀 개의치 않고 이서와 악수를 하려 했다.그가 손을 뻗으려던 찰나, 지환이 이를 저지했다.“늦게 왔는데, 주문부터 하시죠.”심근영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지만, 곧 상황을 이해하고는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소희에게 두 사람의 일을 들은 상태였다.‘참, 두 사람이 싸우는 중이라 했었지?’‘그런데 상황을 보아하니, 곧 화해하겠는걸?’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심근영이 지환에게 메뉴를 건넸고, 지환은 이서에게 메뉴를 건넸다. 이서는 모두의 권유로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문하기 시작했다.그녀가 주문한 요리는 모두의 입맛을 고려한 것이었는데, 음식이 식탁에 오르자 모두가 만족했다. 다만, 심근영과 지환은 사업상의 일을 이야기했으며, 이지숙과 소희, 그리고 이서는 생활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의 끝은 ‘결혼’이었다.“소희야, 너도 나이가 적지 않으니, 곧 결혼해야 해.” “...엄마, 서두
‘내가 뭘 잘못했다고 저러는 거야?’‘맞는 말이었잖아.’‘당신들은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애정행각을 벌였다고!’한편, 차에 오른 이서가 지환에게 물었다.“소희 씨한테 전화해서 약속을 취소할까요?” 지환이 시계를 힐끗 보았다.“안 늦었어.”“안 늦었다고요? 하지만 나는...” 차가 갑자기 멈추자, 이서가 이상하다는 듯 지환을 바라보았다.“왜 그래요?”“도착했어.” 이서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집을 보고는 멍해졌다.순간, 지난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듯했다.‘여긴... 우리가 전에 살던 곳이잖아?’이서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익숙한 감정이 불쑥 다가와 그녀의 숨통을 조였다.‘여기서... 내 인생의 최고의 시간을 보냈었지.’“어서 들어가. 다른 사람이 보면 어쩌려고 그래?” 이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그녀는 자연스럽게 욕실로 들어가 몸에 묻은 핏자국을 씻어냈다.하지만 옷에 묻은 핏자국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옷을 갈아입어야겠어.’ ‘참, 이 집에도 옷이 있을 텐데...’잠시 머뭇거리던 이서는 욕실 문을 살며시 열었다.‘지환 씨는... 거실에 없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까치발을 들고 2층으로 향했다.하지만 계단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지환과 맞닥뜨렸다.이서는 아무 옷도 걸치지 않은 채 목욕 수건만 두른 상태였고, 한 손은 가슴 위에 얹고 있었다. 하지만 높은 곳에 서 있던 지환은 고개를 숙이기만 하면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그의 목젖이 힘겹게 미끄러지자, 이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비... 비켜요. 옷 가지러 갈 거라고요...!”지환은 힘겹게 시선을 돌려 2층을 바라보았다.“내가 가져다줄게. 너는 욕실로 돌아가.”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쏜살같이 욕실로 돌아갔다.그녀는 눈앞의 위기를 해결하느라, 이후의 어색함은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자, 한창 샤워하던 이서는 고개를 돌렸다.그 순간, 문
운전기사는 놀라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아직 의식이 남아 있던 이서는 잠시나마 그 남자의 눈동자를 응시했다.‘날 노리는 거구나.’ 이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문을 열어 도망치려 했다.하지만 문을 열기도 전에 남자의 차가운 손이 목덜미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뼈를 깎는 고통이 밀려오자, 이서는 눈을 크게 뜨고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남자는 커다란 손을 뻗어 이서의 눈을 가렸다.“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나도 너처럼 보기 드문 미인을 죽여야 하는 게 너무 안타깝거든? 그런데 어쩌겠어? 그게 내 임무인걸. 임무는...”이서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뜨거운 선혈이 자기 얼굴과 목, 그리고 온몸에 튀는 것을 느꼈다. 그 선혈은 뜨겁고 끈적거리기 그지없었다.하지만 분명히 이서의 피는 아니었다.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쿵!잠시 후, 그 남자가 굉음을 내며 그녀의 곁에 쓰러졌다. 이서는 그제야 남자의 손을 떨쳐내고 세상의 빛을 마주했다. 차량 지붕에는 굽은 칼을 현란하게 돌리고 있는 어둠의 호리병이 있었다. 그가 쥔 칼에 검붉은 선혈이 묻어 있는 것을 본 순간, 이서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당신이 죽인 거예요?!”이서는 자신이 보기에도 매우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하지만 어둠의 호리병은 개의치 않고 거들먹거리며 말했다.“왜요, 문제 있어요?” 이서는 재빨리 좌우를 살폈는데, 차가 한 대도 없었다. 그녀는 어둠의 호리병을 보며 말했다.“가능한 한 빨리 처리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거라고요!!” 어둠의 호리병은 의외라는 듯 이서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이런 일을 처리해 본 적이 있는 겁니까?”이서가 말했다.“그럴 리가요.”“아주 능숙해 보이는데요?”어둠의 호리병은 이서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라는 말, 정말입니까?” 이서는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다만, 이번에는 망설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전화 연결음이 이어지던 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