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어디야?”지환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눈 앞의 건물을 올려다보며 어두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구 주택가 쪽이야.]그가 구 주택가라고 하자, 이상언은 바로 거기가 어디인지 알았다.이곳은 지환이 H 국에 들어와서 구입한 곳이었다.처치곤란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그래서 민호일을 잡은 후 여기 구 주택가 쪽에 감금해 두었다.지환이 지금 거기 가는 건, 아마 민호일을 만나러 가는 것일 것이다.이상언은 급히 말을 돌렸다.“민호일은 나중에 손보고……. 나 이서 씨랑 하나 씨랑 메이 플라워 센터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도중에 길이 막혀 노선을 바꾸었다는데, 아직도 안 오네. 설마 사고가 난 게 아닐까 걱정된다.”[무슨 소리야?] 주택 문을 열어젖히던 지환은 곧 몸을 돌려 지시를 내리려던 참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경비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가씨, 여기는 구 주택가라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요.”“그럴리가요, 방금 내 친구 남편이 이쪽으로 들어오는 걸 내 눈 똑똑히 보았거든요.”여자 목소리였다.지환은 임하나의 목소리란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순간 심장이 철렁 했다. 곧 문을 열고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문밖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아저씨, 잘 생각해 보세요. 바로 우리 앞에 들어갔어요. 방금 이쪽으로 들어가는 거 똑똑히 보았다니까요.”임하나는 경비원 복장을 한 노인을 잡고 있었다. 그 뒤에는 바로 이서가 서있었다.지환은 눈동자가 휘둥그레질 정도로 마음이 다급해졌다.마침 그때 이서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지환은 뒤로 숨으며 무의식적으로 숨까지 죽였다.‘이서에게 이곳을 들켜서는 안 돼. 그랬다간 민호일을 감금한 이유까지 설명해야 하니까.’목소리가 이미 어느 정도 멀어졌다. 지환이 한숨 돌려도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 밖에서 다시 한번 임하나의 목소리가 울렸다.“아저씨, 이 차요, 혹시 어느 집 차인지 아세요?”지환이 창문으로 빼꼼 내다보았다. 임하나가 말한 그 차가 바로 그가 타고 온 차였다.게다가
이서가 문을 여는 순간 기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 집은…….이서는 더 이상 운전기사를 거들떠보지 않고 주택 안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오래된 주택단지로 인테리어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먼지도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그리고 바닥에는 선명한 발자국도 여러 개 보였다.최근에 생긴 것 같았다.이서는 발자국을 한 번 보았다.지환 신발 사이즈랑 비슷한 자국도 있었다.뒤이어 따라온 임하나는 바닥 위의 발자국을 바라보며 물었다.“이서야, 지환 씨 여기에 들어왔어?”“아마도.” 이서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스스로 진정하도록 자기 최면을 하며 발자국을 따라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곧 그들은 열린 지하실 문을 보았다.임하나는 긴장하여 이서를 붙잡았다.“이서야, 여기 어두컴컴하고…… 위험하지 않을까? 우리 그만 가자.”이서는 잠시 고민했다.“하나야, 너 밖에서 잠깐 기다려. 30분 뒤에도 내가 나오지 않으면…….”“안돼!”임하나는 확고하게 이서의 말을 끊었다.“나도 함께 들어갈 거야.”이서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안에서 갑자기 ‘우우우’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사람 목소리 같았다.그녀는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임하나도 그 뒤를 따라갔다.곧 그들은 지하실에 도착했다.지하실도 위와 마찬가지로 인테리어 안된 상태로 먼지만 가득 쌓여 있었다.그녀들은 들어가자마자 연신 기침을 해댔다.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갑자기 놀란 목소리가 울렸다.“여보, 자기가 여기 왜 왔어?”그러고는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지하실의 불이 켜졌다.지하실 전체가 갑자기 환하게 비쳤다.이서도 마침내 눈앞의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지환은 불이 켜진 곳에 서 있었다. 그의 멀지 않은 곳에 의자에 뒤로 묶인 채 앉아 있는 민호일이 보였다.“저 사람이…… 어찌 여기 있어요?” 상상 밖의 전개에 이서는 순간 지환이 그녀를 속인 일을 잊어버렸다.임하나도 놀란 눈으로 민호일을 바라보았다.외부에서 미친 듯이 찾고 있는 민호일이 여기에 있을 줄은 전혀
“핑계 대지 마요.”임하나가 쏘아붙였다.“이곳에 민호일이 있는 걸 알고 있으면서 왜 이서에게 알려주지 않았어요? 출장 간다고 거짓말까지 해야 했어요? 나와 이서는 또 무슨 사단이 난 줄 알고…….”지환은 이서를 바라보며 사과했다.“미안해, 여보,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당신…… 당신이…….”임하나는 그제야 지환을 잘못 오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민호일은 하경철 죽음을 초래한 장본인이다.이서는 그 모든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그녀는 아직 민호일의 그늘에서 나오지 못했다.그런데 민호일과 접촉하는 것은 다시금 사건현장을 떠올리게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임하나는 그제서야 후회가 되었다.‘진작 이런 줄 알았으면 이서한테 나오자는 얘기하지 말 걸.’‘그러면 지환 씨도 만나지 않았을 텐데.’이서는 미안함을 느끼는 임하나를 한번 보곤 오히려 애써 그녀를 위로했다.“나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사실 할아버지가 자기 대신 돌아가시면서 민호일이 그녀에게 준 상처는 이미 마음속에 뿌리 깊게 박혔다.그녀는 민호일에게 다가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를 죽여버려도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았다.“민호일,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 만약 살인이 무죄라면 당신은 이미 나한테 수백 번 죽었을 거야.”그녀는 말을 하면서 주먹을 힘껏 쥐었다.그러나 몸은 여전히 부들부들 떨렸다.그녀는 정말 자신이 한스러웠다.때로는 민호일을 죽여 버리지 못한 게 한스러웠고, 때로는 그 총알이 왜 그녀의 심장에 명중한 게 아닌지 한스러웠다.민호일이 ‘우우’ 소리를 내며, 시선은 지환을 흘겨보았다.‘네 남편이 하은철 둘째 작은아버지다!’그는 반복해서 같은 말을 뱉었지만, 테이프가 입을 막고 있어 그 진실을 이서에게 전할 수 없었다.임하나는 더 이상 여기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이서는 괜찮다고 했지만 지금 무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이서야, 우리 먼저 나가자. 여기는 지환 씨에게 맡기고.”이서가 고개를 돌려 지환을 바라보았다.“여보
“네가 그 분을 본 적은 없지만, 그 분은 이미 너를 여러 번 봤을 수도 있지…….”임하나는 손가락을 꼽으며 이서에게 세어 주었다.“너 잘 생각해 봐. 지난번 민호일의 일로 작은아버지가 너를 도왔잖아. 그리고 할아버지 생신 때에서 구세주처럼 나타나서 도와줬지. 너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왜 네 일에 그렇게 관심을 가질까?”이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임하나의 말이 일리가 없지 않았다.이 세상에 이유 없이 좋은 것은 없다.“그런데,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이틀 뒤에 할아버지의 하관식이 있잖아. 너도 갈 거잖아?그때 분명히 하은철 작은아버지 볼 수 있을 거야. 그럼, 그 베일에 싸인 신비의 인물이 누군지 살짝 옆 사람에게 물어봐도 되고. 우리가 김칫국 마신 거라면 오히려 다행이지 뭐, 앞으로 좀 조심하면 되니까. 그리고 혹시나 말인데, 혹시나 너에게 정말 관심이 있다면, 지환 씨더러 빨리 회사 그만두라고 해.”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았어.”임하나가 이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이때 지하실에 있던 지환은 민호일의 얼굴에 있는 테이프를 사정없이 떼어버렸다.민호일은 살점이 뜯겨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아아아아아...”“계속 소리 질러 봐.” 지환은 불을 다시 껐다. 어둠 속에서 그는 라이터를 손에 쥐고, 손가락으로 살살 튕기었다. 그러자 라이터의 부싯돌이 마찰되면서 탁탁 소리가 났다.그의 강압적인 목소리는 마치 무자비한 조롱과 같았다. 민호일은 마침내 그의 몸부림이 모두 헛수고라는 것을 깨달았다.“죽일 거면 죽여!” 지환에게 지금까지 시달리다 보니, 죽는 걸 두려워하는 민호일도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었다.이 끝없는 고통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탁탁.불빛이 다시 밝아졌다.지환의 얼굴 옆라인이 비춰졌다.그러나 이 얼굴은 민호일 눈에는 악마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그는 이전에 외국 사람들에게서 절대로 하지환 만큼은 건드리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이 사람, 사
“하지환, 차라리 날 죽여. 아니, 내가 부탁할게. 나를 죽여줘!”지환은 구더기처럼 뒤틀린 민호일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이때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순간 민호일의 눈에 한 가닥 희망이 떠올랐다.“하하하, 윤이서가 경찰에 신고했나 보네. 쌤통이다. 한사코 네 정체를 숨기더니 윤이서가 이번 납치 사건의 배후가 자기 남편인 줄 모르고 경찰을 불러들인 거네.”지환은 불쌍한 벌레 보듯 민호일을 바라보며, 곧 입을 열어 그의 마지막 환상을 깨뜨렸다.“저건 내 사람이야.”민호일은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지환을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이서에게 그럴싸하게 보이기 위해…… 설마?!’“너…… 두렵지 않아……?”민호일은 입에서 피를 토해냈다.“두렵다니? 뭐가? 그러니까 잘 생각해봐. 가족들과 빨리 상봉하고 싶은지 아니면 십이나 이십 년이 더 지나서 상봉할 지…….”“너…….”지환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떠났다.입구에 도착했을 때, 들어온 몇 사람과 마주쳤다.몇 사람은 공손한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지환은 소리를 낮추어 문 밖에 주차된 차를 보았다.차 안, 이서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빨리 들어가, 사모님이 밖에 있잖아.”순간 몇 사람의 낯빛이 엄숙하게 바뀌며, 재빨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지환은 이서가 있는 방향으로 계속 걸어갔다.차 옆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서는 문을 열고 내렸다.지환이 몸에 새로 생긴 상처가 없다는 것을 보고, 이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안에 지금 어떻게 됐어요?” 이서가 물었다.지환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경찰에게 처리하라고 맡겼어.”“할아버지를 살해했으니, 절대 가만두어서는 안 돼요.”“그래야지.” 지환은 이서를 안았다.차가운 손이 드디어 서서히 온도를 회복했다.“저기, 두 분 닭살 행각은 집에 가서 하면 안 될까요?” 차 안의 임하나가 불만을 품고 항의했다.이서와 지환은 서로 마주보고 웃으며 차에 올랐다.임하나는 그제야 이상언이 아직 기다리고 있다는 게 생각났다.
집에 도착한 이서는 그제야 앉아서 지환의 얼굴에 어떻게 상처가 났는지 물어봤다.“싸웠어.”“누구랑요?” 이서가 긴장해서 물었다.지환은 웃으며 이서에게 물 한 잔을 건넸다.“별일 아니야. 긴장하지 마. 회사 동료랑.”“왜 당신을 때렸대요?” 이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환 씨의 동료들이 이렇게 막무가내라니.’“프로젝트 건으로 오해가 생겨서…… 다들 혈기 왕성한 나이이다 보니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것도 정상이지 뭐.”“예전에는 안 그랬던 거 같은데…….” 이서는 들을수록 미간을 찌푸렸다.“요즘 프로젝트가 잘 안 풀리니까 다들 마음이 조급해지고 예민해져서 그래.”“안 되겠어요.”이서는 너무 위험하다고 느꼈다.“지환 씨, 빨리 이 일을 그만두는 것이 좋겠어요. 지금 보니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닌 듯해요. 얼마 전에는 회사 대표 때문에 혼인 신고를 했지, 이번에는 이렇게 쌈박질도 하고……. 회사 그만 나가요.”이건 너무 말도 안 되었다.“그래. 알았어.” 지환은 이서의 부탁이라면 뭐든 다 들어줄 수 있다.“그런데 자기야,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을까?”“뭘 기다려요?”“이 프로젝트를 다 끝내고 나서…….”그는 현재 민씨 그룹의 모든 자원을 통합하고 있다. 통합 마치면 민씨 그룹을 이서에 넘길 예정이다.그때가 되면 민씨 그룹의 자원을 빌어 계속 H 국의 시장을 선점할 수 있다.민씨 그룹은 하씨 그룹만 못하지만, 그는 더 이상 하씨 집안과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이서는 잠시 침묵하며 말했다.“응, 잘 생각해 봐요. 돈 걱정은 하지 말고.”“알았어.”지환은 이서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얼른 가서 쉬어. 이틀 뒤면 또 바쁠 텐데, 지금이라도 잘 쉬어 둬야지.”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하씨 집안에 사람은 많지만, 하경철에게 아들은 하도훈 하나뿐이다.하도훈 또한 하은철 하나밖에 없다.따라서 가까이서 일을 도울 사람은 별로 없다.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웠더니 피곤했는지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지환은
고급 와인 바지환이 막 들어가자 매니저인 듯한 남자가 다가와 열정적으로 물었다.“혹시 하도훈 사장님 만나러 오셨습니까?”지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이쪽으로 오세요.지환은 매니저를 따라 룸에 들어갔다. 룸에서 차와 와인을 시음하는 하도훈을 보았다.하도훈은 지환을 보자마자 곧 일어섰다.“왔어?”지환은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하도훈이 손을 흔들자 매니저가 나갔다. 그제야 입을 열었다.“너 신분 밝히는 걸 원치 않잖아. 그래서 일부러 여기 골랐다. 괜찮지?”지환은 앉으며 말했다.“형님, 저랑 수다 떨려고 보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요?”하도훈은 호통하게 웃으며 말했다.“하하, 역시 똑똑한 사람이랑 놀아야 한다니까. 나도 뜸 들이지 않고 직설적으로 얘기할게. 이틀 뒤면 아버지 하관식인데, 올 수 있겠어?”지환은 동작을 멈칫했다.“아직 잘 모르겠어요. 스케줄을 확인해 봐야 합니다.”“지환아…….”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난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결코 화해했다고 생각 안 해. 아마도 네가 H 국에 오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우리 두 집안은 쭉 연락하지 않고 지냈겠지. 하지만 지환아,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우리 세대에는 원한이 없잖아.이제 아버지도 가셨으니 윗 세대의 원한을 내려놓고 잘 지내보는 건 어때?큰아버지한테는 내가 이미 전화해서 물어봤어.아직도 예전의 일을 내려놓지 못하고 계신 듯하더라. 하관식에 못 온다구나.뭐…… 이해 못할 바는 아니야.하지만 네가 국내에 있으면서도 참석하지 않으면 괜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를까 봐…….”지환은 몸을 뒤로 기대고 하도훈에게 시선을 돌렸다.“형님, 죄송하지만 지금 어떤 확답도 드릴 수 없습니다.”하도훈은 한숨을 쉬었다.“지환아, 도대체 뭔 일인지 나에게 말해줄 수 있겠니? 너랑 은철이 좋았잖아?그런데 어쩌다 갑자기 이렇게 된 거야?”지환은 고개를 숙이고 일어섰다.“스케줄이 확정되면 말씀드릴게요.”하도훈이 일어나기도 전에 지환은 이미 자리를 떴다.지환의 차가운 뒷모습
주경모는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평소에 덜렁대던 도련님이 맞고 나니 정신 차린 건가 오늘 따라 왜 이렇게 예민하지?’“도련님…….”하은철의 따져 묻는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주경모는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이때 병실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울렸다.“오빠, 어떻게 된 거야? 대체 누가 그랬어?”울면서 그의 품에 달려드는 윤수정을 보며 하은철은 머리가 아픈 듯 주경모를 쳐다보았다.주경모는 이 기회를 틈타 얼른 말을 돌렸다.“도련님, 아가씨가 오셨으니 저는 먼저 나가 있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벨을 누르세요.”하은철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주경모는 슬쩍 먼저 빠져나갔다.주경모가 나가자, 윤수정은 더욱 거리낌 없이 하은철을 껴안았다.“오빠, 대체 누가 짓이야?!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팰 수 있지?”“지금이 어떤 세상인데…….”하은철은 짜증스럽게 윤수정을 밀어냈다.“내가 저번에 말했잖아. 우리 앞으로 그냥 친구 하자고.”하은철의 말에 윤수정은 곧 울음을 터뜨렸다.“오빠, 오빠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는데? 혹시 내가 정말 잘못한 거 있어? 알려줘, 내가 꼭 고칠게!”하은철은 귀를 막고 싶었다. 윤수정의 징징거리는 울음소리가 이렇게 듣기 거북한지 전에는 왜 발견하지 못했을까?“네 잘못 아니야. 다만 나, 더 이상 할아버지를 실망시켜드릴 수 없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내가 이서와 함께하는 걸 보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라고 하셨어. 나 이제 할아버지의 그 한을 풀어 드릴거야. 적어도 하늘 나라에서는 우리가 함께 있는 것을 보게 해드리려고.”“그게 아니라 설마…….”윤수정은 억지로 뒤의 말을 뱃속에 삼켰다. 하은철은 할아버지를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녀는 믿지 않았다.“오빠, 이서 언니가 오빠한테 뭔 말했어?”그녀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췄다.자신을 불쌍하게 보이려고.하은철은 불편한듯 미간을 찌푸렸다.예전에 윤수정이 이렇게 말해도 그는 전혀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