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어디야?”지환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눈 앞의 건물을 올려다보며 어두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구 주택가 쪽이야.]그가 구 주택가라고 하자, 이상언은 바로 거기가 어디인지 알았다.이곳은 지환이 H 국에 들어와서 구입한 곳이었다.처치곤란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그래서 민호일을 잡은 후 여기 구 주택가 쪽에 감금해 두었다.지환이 지금 거기 가는 건, 아마 민호일을 만나러 가는 것일 것이다.이상언은 급히 말을 돌렸다.“민호일은 나중에 손보고……. 나 이서 씨랑 하나 씨랑 메이 플라워 센터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도중에 길이 막혀 노선을 바꾸었다는데, 아직도 안 오네. 설마 사고가 난 게 아닐까 걱정된다.”[무슨 소리야?] 주택 문을 열어젖히던 지환은 곧 몸을 돌려 지시를 내리려던 참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경비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가씨, 여기는 구 주택가라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요.”“그럴리가요, 방금 내 친구 남편이 이쪽으로 들어오는 걸 내 눈 똑똑히 보았거든요.”여자 목소리였다.지환은 임하나의 목소리란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순간 심장이 철렁 했다. 곧 문을 열고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문밖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아저씨, 잘 생각해 보세요. 바로 우리 앞에 들어갔어요. 방금 이쪽으로 들어가는 거 똑똑히 보았다니까요.”임하나는 경비원 복장을 한 노인을 잡고 있었다. 그 뒤에는 바로 이서가 서있었다.지환은 눈동자가 휘둥그레질 정도로 마음이 다급해졌다.마침 그때 이서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지환은 뒤로 숨으며 무의식적으로 숨까지 죽였다.‘이서에게 이곳을 들켜서는 안 돼. 그랬다간 민호일을 감금한 이유까지 설명해야 하니까.’목소리가 이미 어느 정도 멀어졌다. 지환이 한숨 돌려도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 밖에서 다시 한번 임하나의 목소리가 울렸다.“아저씨, 이 차요, 혹시 어느 집 차인지 아세요?”지환이 창문으로 빼꼼 내다보았다. 임하나가 말한 그 차가 바로 그가 타고 온 차였다.게다가
이서가 문을 여는 순간 기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 집은…….이서는 더 이상 운전기사를 거들떠보지 않고 주택 안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오래된 주택단지로 인테리어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먼지도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그리고 바닥에는 선명한 발자국도 여러 개 보였다.최근에 생긴 것 같았다.이서는 발자국을 한 번 보았다.지환 신발 사이즈랑 비슷한 자국도 있었다.뒤이어 따라온 임하나는 바닥 위의 발자국을 바라보며 물었다.“이서야, 지환 씨 여기에 들어왔어?”“아마도.” 이서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스스로 진정하도록 자기 최면을 하며 발자국을 따라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곧 그들은 열린 지하실 문을 보았다.임하나는 긴장하여 이서를 붙잡았다.“이서야, 여기 어두컴컴하고…… 위험하지 않을까? 우리 그만 가자.”이서는 잠시 고민했다.“하나야, 너 밖에서 잠깐 기다려. 30분 뒤에도 내가 나오지 않으면…….”“안돼!”임하나는 확고하게 이서의 말을 끊었다.“나도 함께 들어갈 거야.”이서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안에서 갑자기 ‘우우우’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사람 목소리 같았다.그녀는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임하나도 그 뒤를 따라갔다.곧 그들은 지하실에 도착했다.지하실도 위와 마찬가지로 인테리어 안된 상태로 먼지만 가득 쌓여 있었다.그녀들은 들어가자마자 연신 기침을 해댔다.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갑자기 놀란 목소리가 울렸다.“여보, 자기가 여기 왜 왔어?”그러고는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지하실의 불이 켜졌다.지하실 전체가 갑자기 환하게 비쳤다.이서도 마침내 눈앞의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지환은 불이 켜진 곳에 서 있었다. 그의 멀지 않은 곳에 의자에 뒤로 묶인 채 앉아 있는 민호일이 보였다.“저 사람이…… 어찌 여기 있어요?” 상상 밖의 전개에 이서는 순간 지환이 그녀를 속인 일을 잊어버렸다.임하나도 놀란 눈으로 민호일을 바라보았다.외부에서 미친 듯이 찾고 있는 민호일이 여기에 있을 줄은 전혀
“핑계 대지 마요.”임하나가 쏘아붙였다.“이곳에 민호일이 있는 걸 알고 있으면서 왜 이서에게 알려주지 않았어요? 출장 간다고 거짓말까지 해야 했어요? 나와 이서는 또 무슨 사단이 난 줄 알고…….”지환은 이서를 바라보며 사과했다.“미안해, 여보,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당신…… 당신이…….”임하나는 그제야 지환을 잘못 오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민호일은 하경철 죽음을 초래한 장본인이다.이서는 그 모든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그녀는 아직 민호일의 그늘에서 나오지 못했다.그런데 민호일과 접촉하는 것은 다시금 사건현장을 떠올리게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임하나는 그제서야 후회가 되었다.‘진작 이런 줄 알았으면 이서한테 나오자는 얘기하지 말 걸.’‘그러면 지환 씨도 만나지 않았을 텐데.’이서는 미안함을 느끼는 임하나를 한번 보곤 오히려 애써 그녀를 위로했다.“나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사실 할아버지가 자기 대신 돌아가시면서 민호일이 그녀에게 준 상처는 이미 마음속에 뿌리 깊게 박혔다.그녀는 민호일에게 다가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를 죽여버려도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았다.“민호일,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 만약 살인이 무죄라면 당신은 이미 나한테 수백 번 죽었을 거야.”그녀는 말을 하면서 주먹을 힘껏 쥐었다.그러나 몸은 여전히 부들부들 떨렸다.그녀는 정말 자신이 한스러웠다.때로는 민호일을 죽여 버리지 못한 게 한스러웠고, 때로는 그 총알이 왜 그녀의 심장에 명중한 게 아닌지 한스러웠다.민호일이 ‘우우’ 소리를 내며, 시선은 지환을 흘겨보았다.‘네 남편이 하은철 둘째 작은아버지다!’그는 반복해서 같은 말을 뱉었지만, 테이프가 입을 막고 있어 그 진실을 이서에게 전할 수 없었다.임하나는 더 이상 여기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이서는 괜찮다고 했지만 지금 무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이서야, 우리 먼저 나가자. 여기는 지환 씨에게 맡기고.”이서가 고개를 돌려 지환을 바라보았다.“여보
“네가 그 분을 본 적은 없지만, 그 분은 이미 너를 여러 번 봤을 수도 있지…….”임하나는 손가락을 꼽으며 이서에게 세어 주었다.“너 잘 생각해 봐. 지난번 민호일의 일로 작은아버지가 너를 도왔잖아. 그리고 할아버지 생신 때에서 구세주처럼 나타나서 도와줬지. 너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왜 네 일에 그렇게 관심을 가질까?”이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임하나의 말이 일리가 없지 않았다.이 세상에 이유 없이 좋은 것은 없다.“그런데,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이틀 뒤에 할아버지의 하관식이 있잖아. 너도 갈 거잖아?그때 분명히 하은철 작은아버지 볼 수 있을 거야. 그럼, 그 베일에 싸인 신비의 인물이 누군지 살짝 옆 사람에게 물어봐도 되고. 우리가 김칫국 마신 거라면 오히려 다행이지 뭐, 앞으로 좀 조심하면 되니까. 그리고 혹시나 말인데, 혹시나 너에게 정말 관심이 있다면, 지환 씨더러 빨리 회사 그만두라고 해.”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았어.”임하나가 이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이때 지하실에 있던 지환은 민호일의 얼굴에 있는 테이프를 사정없이 떼어버렸다.민호일은 살점이 뜯겨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아아아아아...”“계속 소리 질러 봐.” 지환은 불을 다시 껐다. 어둠 속에서 그는 라이터를 손에 쥐고, 손가락으로 살살 튕기었다. 그러자 라이터의 부싯돌이 마찰되면서 탁탁 소리가 났다.그의 강압적인 목소리는 마치 무자비한 조롱과 같았다. 민호일은 마침내 그의 몸부림이 모두 헛수고라는 것을 깨달았다.“죽일 거면 죽여!” 지환에게 지금까지 시달리다 보니, 죽는 걸 두려워하는 민호일도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었다.이 끝없는 고통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탁탁.불빛이 다시 밝아졌다.지환의 얼굴 옆라인이 비춰졌다.그러나 이 얼굴은 민호일 눈에는 악마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그는 이전에 외국 사람들에게서 절대로 하지환 만큼은 건드리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이 사람, 사
“하지환, 차라리 날 죽여. 아니, 내가 부탁할게. 나를 죽여줘!”지환은 구더기처럼 뒤틀린 민호일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이때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순간 민호일의 눈에 한 가닥 희망이 떠올랐다.“하하하, 윤이서가 경찰에 신고했나 보네. 쌤통이다. 한사코 네 정체를 숨기더니 윤이서가 이번 납치 사건의 배후가 자기 남편인 줄 모르고 경찰을 불러들인 거네.”지환은 불쌍한 벌레 보듯 민호일을 바라보며, 곧 입을 열어 그의 마지막 환상을 깨뜨렸다.“저건 내 사람이야.”민호일은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지환을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이서에게 그럴싸하게 보이기 위해…… 설마?!’“너…… 두렵지 않아……?”민호일은 입에서 피를 토해냈다.“두렵다니? 뭐가? 그러니까 잘 생각해봐. 가족들과 빨리 상봉하고 싶은지 아니면 십이나 이십 년이 더 지나서 상봉할 지…….”“너…….”지환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떠났다.입구에 도착했을 때, 들어온 몇 사람과 마주쳤다.몇 사람은 공손한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지환은 소리를 낮추어 문 밖에 주차된 차를 보았다.차 안, 이서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빨리 들어가, 사모님이 밖에 있잖아.”순간 몇 사람의 낯빛이 엄숙하게 바뀌며, 재빨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지환은 이서가 있는 방향으로 계속 걸어갔다.차 옆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서는 문을 열고 내렸다.지환이 몸에 새로 생긴 상처가 없다는 것을 보고, 이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안에 지금 어떻게 됐어요?” 이서가 물었다.지환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경찰에게 처리하라고 맡겼어.”“할아버지를 살해했으니, 절대 가만두어서는 안 돼요.”“그래야지.” 지환은 이서를 안았다.차가운 손이 드디어 서서히 온도를 회복했다.“저기, 두 분 닭살 행각은 집에 가서 하면 안 될까요?” 차 안의 임하나가 불만을 품고 항의했다.이서와 지환은 서로 마주보고 웃으며 차에 올랐다.임하나는 그제야 이상언이 아직 기다리고 있다는 게 생각났다.
집에 도착한 이서는 그제야 앉아서 지환의 얼굴에 어떻게 상처가 났는지 물어봤다.“싸웠어.”“누구랑요?” 이서가 긴장해서 물었다.지환은 웃으며 이서에게 물 한 잔을 건넸다.“별일 아니야. 긴장하지 마. 회사 동료랑.”“왜 당신을 때렸대요?” 이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환 씨의 동료들이 이렇게 막무가내라니.’“프로젝트 건으로 오해가 생겨서…… 다들 혈기 왕성한 나이이다 보니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것도 정상이지 뭐.”“예전에는 안 그랬던 거 같은데…….” 이서는 들을수록 미간을 찌푸렸다.“요즘 프로젝트가 잘 안 풀리니까 다들 마음이 조급해지고 예민해져서 그래.”“안 되겠어요.”이서는 너무 위험하다고 느꼈다.“지환 씨, 빨리 이 일을 그만두는 것이 좋겠어요. 지금 보니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닌 듯해요. 얼마 전에는 회사 대표 때문에 혼인 신고를 했지, 이번에는 이렇게 쌈박질도 하고……. 회사 그만 나가요.”이건 너무 말도 안 되었다.“그래. 알았어.” 지환은 이서의 부탁이라면 뭐든 다 들어줄 수 있다.“그런데 자기야,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을까?”“뭘 기다려요?”“이 프로젝트를 다 끝내고 나서…….”그는 현재 민씨 그룹의 모든 자원을 통합하고 있다. 통합 마치면 민씨 그룹을 이서에 넘길 예정이다.그때가 되면 민씨 그룹의 자원을 빌어 계속 H 국의 시장을 선점할 수 있다.민씨 그룹은 하씨 그룹만 못하지만, 그는 더 이상 하씨 집안과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이서는 잠시 침묵하며 말했다.“응, 잘 생각해 봐요. 돈 걱정은 하지 말고.”“알았어.”지환은 이서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얼른 가서 쉬어. 이틀 뒤면 또 바쁠 텐데, 지금이라도 잘 쉬어 둬야지.”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하씨 집안에 사람은 많지만, 하경철에게 아들은 하도훈 하나뿐이다.하도훈 또한 하은철 하나밖에 없다.따라서 가까이서 일을 도울 사람은 별로 없다.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웠더니 피곤했는지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지환은
고급 와인 바지환이 막 들어가자 매니저인 듯한 남자가 다가와 열정적으로 물었다.“혹시 하도훈 사장님 만나러 오셨습니까?”지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이쪽으로 오세요.지환은 매니저를 따라 룸에 들어갔다. 룸에서 차와 와인을 시음하는 하도훈을 보았다.하도훈은 지환을 보자마자 곧 일어섰다.“왔어?”지환은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하도훈이 손을 흔들자 매니저가 나갔다. 그제야 입을 열었다.“너 신분 밝히는 걸 원치 않잖아. 그래서 일부러 여기 골랐다. 괜찮지?”지환은 앉으며 말했다.“형님, 저랑 수다 떨려고 보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요?”하도훈은 호통하게 웃으며 말했다.“하하, 역시 똑똑한 사람이랑 놀아야 한다니까. 나도 뜸 들이지 않고 직설적으로 얘기할게. 이틀 뒤면 아버지 하관식인데, 올 수 있겠어?”지환은 동작을 멈칫했다.“아직 잘 모르겠어요. 스케줄을 확인해 봐야 합니다.”“지환아…….”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난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결코 화해했다고 생각 안 해. 아마도 네가 H 국에 오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우리 두 집안은 쭉 연락하지 않고 지냈겠지. 하지만 지환아,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우리 세대에는 원한이 없잖아.이제 아버지도 가셨으니 윗 세대의 원한을 내려놓고 잘 지내보는 건 어때?큰아버지한테는 내가 이미 전화해서 물어봤어.아직도 예전의 일을 내려놓지 못하고 계신 듯하더라. 하관식에 못 온다구나.뭐…… 이해 못할 바는 아니야.하지만 네가 국내에 있으면서도 참석하지 않으면 괜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를까 봐…….”지환은 몸을 뒤로 기대고 하도훈에게 시선을 돌렸다.“형님, 죄송하지만 지금 어떤 확답도 드릴 수 없습니다.”하도훈은 한숨을 쉬었다.“지환아, 도대체 뭔 일인지 나에게 말해줄 수 있겠니? 너랑 은철이 좋았잖아?그런데 어쩌다 갑자기 이렇게 된 거야?”지환은 고개를 숙이고 일어섰다.“스케줄이 확정되면 말씀드릴게요.”하도훈이 일어나기도 전에 지환은 이미 자리를 떴다.지환의 차가운 뒷모습
주경모는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평소에 덜렁대던 도련님이 맞고 나니 정신 차린 건가 오늘 따라 왜 이렇게 예민하지?’“도련님…….”하은철의 따져 묻는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주경모는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이때 병실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울렸다.“오빠, 어떻게 된 거야? 대체 누가 그랬어?”울면서 그의 품에 달려드는 윤수정을 보며 하은철은 머리가 아픈 듯 주경모를 쳐다보았다.주경모는 이 기회를 틈타 얼른 말을 돌렸다.“도련님, 아가씨가 오셨으니 저는 먼저 나가 있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벨을 누르세요.”하은철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주경모는 슬쩍 먼저 빠져나갔다.주경모가 나가자, 윤수정은 더욱 거리낌 없이 하은철을 껴안았다.“오빠, 대체 누가 짓이야?!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팰 수 있지?”“지금이 어떤 세상인데…….”하은철은 짜증스럽게 윤수정을 밀어냈다.“내가 저번에 말했잖아. 우리 앞으로 그냥 친구 하자고.”하은철의 말에 윤수정은 곧 울음을 터뜨렸다.“오빠, 오빠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는데? 혹시 내가 정말 잘못한 거 있어? 알려줘, 내가 꼭 고칠게!”하은철은 귀를 막고 싶었다. 윤수정의 징징거리는 울음소리가 이렇게 듣기 거북한지 전에는 왜 발견하지 못했을까?“네 잘못 아니야. 다만 나, 더 이상 할아버지를 실망시켜드릴 수 없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내가 이서와 함께하는 걸 보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라고 하셨어. 나 이제 할아버지의 그 한을 풀어 드릴거야. 적어도 하늘 나라에서는 우리가 함께 있는 것을 보게 해드리려고.”“그게 아니라 설마…….”윤수정은 억지로 뒤의 말을 뱃속에 삼켰다. 하은철은 할아버지를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녀는 믿지 않았다.“오빠, 이서 언니가 오빠한테 뭔 말했어?”그녀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췄다.자신을 불쌍하게 보이려고.하은철은 불편한듯 미간을 찌푸렸다.예전에 윤수정이 이렇게 말해도 그는 전혀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심유인과 소민찬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가까스로 하버드에 합격했다고?’‘허풍 떠는 거 아니야?’ “정말 하버드 대학교 졸업생이라고요? 하버드 학원 출신이 아니고요?” 현태는 진심 어린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저는 하버드 대학교 졸업생이 맞습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직접 조사해 보셔도 되고, 홈페이지에서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두 사람은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핸드폰을 꺼내 하버드 대학교 홈페이지를 검색했다.두 사람은 약간의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으나, 홈페이지 링크를 누르자마자 우수한 동문의 행렬에 있는 현태의 얼굴을 발견했다.이를 믿을 수 없는 것은 이지숙도 마찬가지였다.‘정말... 사진 속의 사람이 현태 씨라고?!’ ‘말도 안 돼!’‘소민찬이 어느 대학교에 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Y국에 있는 대학교 출신일 거야. 학문도, 능력도 없는 재벌 2세들이 어디서 신분 세탁을 하는지는 불 보듯 뻔한 거니까.’ Y국의 학위는 이수하기가 가장 수월해서 누구나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외부 사람은 분명히 알지 못해서 겁을 먹기 일쑤였다.심유인은 원래 소민찬의 학력을 빌미로 현태를 놀라게 하려 했다.하지만 놀래키기는커녕 본인이 놀라게 된 셈이었다. 심유인은 곧 문제점을 발견했다.“... 하버드 대학교에 체육생으로 입학한 게 아니네요? 전공은 물리학이랑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아니, 임현태 씨는 체육에 타고난 거 아니었나요? 왜 물리학을 전공한 거죠?”“아, 시험 봐서 들어간 게 아니라, 부정 입학이었나 보네요, 그렇죠?” 소민찬은 심유인의 말을 듣고, 혈색을 띠며 현태의 학력을 비웃었다.“하하, 유인아, 그런 건 부정 입학이나 비리가 아니라 기부라고 하는 거야.”“임현태 씨, 입학하는 데 얼마가 필요하던가요?”“하하, 하 대표님과 대체 무슨 사이길래 그렇게 아낌없이 돈을 쓰는 거죠?” “저는 학력을 산 적도, 학력을 위해서 돈을 쏟아부은 적도 없습니다. 정당하게 시험으로 합
심근영이 얼른 말했다.“그래, 내가 경솔했군. 하지만 현태는 내 말의 뜻을 알 거야.” “우리 소희는 어깨를 들지도, 손을 쓰지도 못해. 이 아이와 서로 보완될 수 있는 사람을 찾았으니, 아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모두 화기애애한 웃음을 짓는 반면, 옆에 있던 심유인과 소민찬만이 웃지 못했다. 더욱이 소민찬은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 사실, 소민찬이 여기에 온 것은 심유인이 돈을 주면서 자신의 남자 친구 역할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즉, 소민찬은 여기에 와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만 하면 된다는 것. 하지만 지금의 소민찬은 웃음거리로 전락했으니, 그가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생각한 소민찬은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하지만 심유인은 곧장 가서 소민찬을 끌어당겼다.“어디 가요?” 소민찬은 이미 주방에 도착한 심근영 일가를 힐끗 보았는데, 그들은 소민찬과 심유인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소민찬이 목소리를 낮추었다.“당연히 가야지! 왜, 계속 남아서 네 사촌 동생의 남자 친구한테 굴욕이라도 당하라는 거야?!” “저는... 저 사람이 그저 운전기사인 줄 알았다고요.”“일단 진정해 봐요. 어쨌든 민찬 씨는 소씨 가문의 사람이잖아요.” “소씨 가문의 도련님이 한낱 경호원보다 못하겠어요?” 소민찬은 분명 소씨 가문의 사람이지만, 소태성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더군다나 소지엽이야말로 소태성 같은 사람인데, 소민찬이 어떻게 명함을 내밀 수 있겠는가? 이것은 소민찬이 가족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외국으로 내몰린 이유이기도 했다. 심지어 이번에는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또 소태성에게 즉시 떠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지만 심유인이 시선과 체면이 하늘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 소민찬은 난감해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봤자 나는 소씨 가문의 도련님일 뿐이야. 사람을 죽일 듯이 때리는 사람은 당해낼 수 없다고.” 심유인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가요, 저 사람들의 기세를 제대로 꺾어놓자고요.”
“엄마, 뭔가 오해하신 것 같아요. 현태 씨가 왜 그 돈을 은행에서 대출받았다고 생각하세요? 현태 씨의 돈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소희의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심유인이었다.“소희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운전기사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이 있겠어?” 소희도 심유인을 따라 웃기 시작했다.“언니, 현태 오빠가 누구의 운전기사인 줄 알고나 말하는 거예요?” “뭐?”심유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이서 언니예요.”“이제 이해가 좀 되세요?”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심유인의 표정을 보고 말을 덧붙였다.“현태 오빠가 운전기사인 건 명백한 사실이에요. 하지만 또 다른 직업도 있어요. 그건 바로 이서 언니를 보호하는 거죠.” “운전기사일 뿐만 아니라, 경호원이란 말이에요.” 심유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시큰둥하게 말했다.“흥, 그게 뭐 어쨌다고 그래? 기껏해야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하는 사람인 거잖아. 우리 집에도 경호원이 있어. 경호원이라 해봤자 한달에 몇백만원을 버는 게 전부일 텐데, 90억짜리 헤어샵을 사는 게 말이나 돼?” 소희는 일부러 자랑하는 것 같아서 망설였지만, 현태의 진짜 과거를 털어놓기로 했다.“허, 몇 년 동안 UFC의 챔피언 자리를 지킨 사람한테, 몇십억이 무슨 대수라고 그러세요? 혹시 꿈이라도 꾸는 거예요?” “UFC?!”심유인은 격투기 분야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UFC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소희는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듯 말했다.“모르면 인터넷에 찾아보시던가요.”“언니, 제가 언니의 속셈을 모를 줄 알아요? 현태 오빠가 평범한 운전기사라고 생각해서 일부로 언니의 남자 친구도 부른 거잖아요.” “저희 부모님께는 남자 친구를 소개하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은 언니의 남자 친구와 제 남자 친구를 비교하고 싶은 거잖아요, 안 그래요?” “이런 말까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언니가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것 같아서 말씀해 드릴게요. 제 남자 친구가 언니의 남자 친구보다 돈이 더 많을
현태는 설명하기 시작했다,“제가 그 헤어샵을 인수하긴 했지만, 사모님께 드릴 거거든요.” “앞으로는 사모님께서 그 샵의 사장님이십니다. 미용은 하고 싶을 때 하시면 됩니다.”심씨 가문에는 전속 미용사가 있었지만, 꽤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게다가 이지숙이 미용 기계를 사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어떤 시술을 두세 달이나 반년 정도 지나야 다시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미용 기계에 먼지만 앉지 않겠는가?결국 이지숙은 헤어샵에 가서 시술받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헤어샵에 가는 것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시간을 예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가끔 일이 생겨서 시간을 놓치면, 다시 예약을 잡아야만 했다.이지숙은 진작에 헤어샵을 인수하려고 했는데, 줄곧 자신에게 적합한 헤어샵을 찾지 못했다.이지숙은 현태가 선택한 헤어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하지만 그 샵의 사장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외국에서도 적지 않은 명성을 떨치던 터라 온 가족이 외국으로 이사하기도 했다. 이지숙은 이미 그 사람과의 연락을 시도했지만, 끝내 연락이 닿지는 않았고, 모든 일은 흐지부지되었다. 그런데 바로 오늘, 생각하던 일이 이루어진 것이었다.심유인은 ‘말도 안 돼’ 라는 말만 연신 해댔다.“말도 안 돼요! 임현태 씨는 그냥 운전기사잖아요. 대통령을 위해 운전한다고 해도 헤어샵을 살 수는 없을 거라고요!”그 헤어샵은 심유인도 아는 곳이었다.‘거긴 적어도 100억은 있어야 인수할 수 있는 곳이라고!’ 이지숙도 마음속에 품었던 호기심을 드러냈다.“이 샵의 사장이 계속 외국에 있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그 사람하고 연락한 거죠?” “아, 그 부분은 하 대표님께서 힘써주셨습니다. 마침 하 대표님께서 그 샵의 사장님과 구면이라고 하시더군요. 제가 하 대표님의 곁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장님께서 흔쾌히 샵을 양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지숙이 물었다.“하 대표가 이 일에 직접 나섰다고요?” “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순조롭
심유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고작 한 세트가 다예요?”“그래도 이해는 해드릴게요. 이게 능력 범위 내에서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제품이었을 테니까요. 800만원, 900만원을 저축하려면 몇 개월은 걸려야 하잖아요, 그렇죠?” 이지숙이 곧장 입을 열었다.“유인아, 그게 무슨 말이니? 선물은 금액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거란다.” “그래.”심근영도 현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네 숙모를 위해 스킨케어 제품을 골랐다는 건, 충분히 마음을 썼다는 증거란다.”심유인이 입을 삐죽거리자,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아무리 값비싼 선물보다 마음이 중요하다지만, 조금 쑥스러워서 다른 선물도 준비해 왔습니다.”심유인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그 선물도 화장품은 아니겠죠? 또 몇백만원짜리인 건가요?”“유인아!”이지숙은 다소 불쾌해졌지만, 성격이 좋은 현태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아닙니다, 이번 선물은 스킨케어 제품보다 조금 비싼 거거든요.”현태는 이 말을 끝으로 작은 선물 상자를 꺼냈다.심유인이 목을 길게 빼며 재촉했다.“숙모, 어서 열어보세요. 목이 빠질 것 같은데, 대체 뭐예요?” 이지숙은 손에 쥔 작은 상자를 묵묵히 바라보았다.‘꽤 가벼워. 아무래도 큰 선물은 아닌 것 같아.’“밥부터 먹고 열어보자꾸나.” “지금 열어보시죠. 심유인 씨도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신 모양인데요.” 현태가 이지숙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심유인이 경멸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방금 그 스킨 케어 제품보다 조금 더 비싼 선물을 꺼내면, 내가 감탄한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허, 정말 웃겨.’‘저것도 고작 몇백 만원짜리 선물일 뿐일 거야.” “숙모, 선물한 사람도 저렇게 말하잖아요. 어서 열어보세요!”이지숙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선물 상자를 열자마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스킨케어 제품이 아니라...’‘작은 증서?’상자를 또 한 번 확인한 이지숙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이건.
“그래, 네 남자 친구도 같이 봐주마.”심근영이 대답했다.“같이 식사하자꾸나, 그럼 된 거지?” 심근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심유인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감사합니다, 삼촌, 역시 제게 정말 잘해주시네요.”소희는 그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연기가 계속될 모양이군.’ “삼촌, 민찬 씨가 선물도 사 왔어요. 이것 좀 보세요!”심유인은 심근영을 끌고 선물 더미 앞에 다다랐고, 이지숙에게 보여줬던 선물 세 개를 집어 들었다.심유인은 현태가 가져온 선물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심근영은 심유인의 말을 듣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마음은 고맙지만, 우리는 네 친부모가 아니잖니. 네 남자 친구가 우리를 위해 이렇게 많은 돈을 쓰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구나.”“우리 회사에 가서 돈을 받고, 같은 값어치의 답례품을 사주도록 하렴.” 심유인은 순간적으로 너무 기뻐서 눈꼬리를 치켜들었다.사실 그 선물들을 산 사람은 심유인이었는데, 그녀는 수중에 그렇게 큰돈이 없어서 모두 신용카드와 할부로 결제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심씨 가문의 회사에 가서 돈을 받으라니!심유인은 이 기회에 카드 빚을 메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 더 챙길 수도 있었다. 나중에 누군가 물어본다면, 민찬에게 답례 선물을 산 것이라고 하면 그만일 테니 말이다.생각할수록 심유인은 점점 더 흥분했고, 심근영이 이미 허리를 숙여 선물 상자를 하나 집어 든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 안에는 뭐가 들었지?”심유인은 심근영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말했다.“삼촌!” 심근영이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왜?” “그게...”심유인은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안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는 다른 사람이 절대 알면 안 돼.’ ‘적어도 심소희의 남자 친구라는 사람은 절대 알면 안 된다고!’ “소희의 남자 친구분도 선물을 가져왔다고 들었어요. 아직 그 선물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했는데, 그것부터 열어 보는 게 어떨까요?” 심근영은 현태를 바라보았다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심유인은 즐거워했다.“와, 가난하긴 해도 염치는 있으신가 보네요. 하지만 그게 유일한 장점이겠죠?” 선물은 현태가 스스로 준비한 것이기에, 소희도 현태가 무슨 선물을 샀는지 몰랐다.그래서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 소희는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오빠, 무슨 선물을 샀는데요?”‘소민찬보다 못한 선물이면 큰일인데.’ 소희는 선물로 심유인과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어쨌든 현태가 부모님을 보러 오는 날이니, 선물의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현태가 심씨 가문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소희는 현태가 심씨 가문의 권세나 재물 탓에 손가락질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우선 들어가자. 곧 알게 될 거야.”이지숙도 계속 밖에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말했다.“그래요, 무슨 얘기든 들어가서 하자고요.”고개를 끄덕인 소희가 현태의 선물을 들어주려 하자, 현태가 말했다.“괜찮아, 내가 들게.”이 세심한 배려는 곧장 이지숙의 눈에 띄었는데, 여자는 본래 본능적인 행동을 가장 신경 쓰기 마련이지 않은가?현태의 행동을 본 이지숙은 소희가 거짓말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겉으로 보기에는 덩치도 크고 투박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의외로 세심한 면이 있네?’이렇게 생각한 이지숙은 현태를 다소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하지만 현태는 이지숙의 반응이 조금 변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거실로 들어서자, 이지숙은 고용인에게 심근영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사실, 심근영은 일찍 깨어났기에,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심근영이 시간을 질질 끌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2층에서 현태를 관찰했기 때문이었다.고용인의 동정을 들은 심근영이 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곧 나가도록 하지.” 심근영은 고용인이 떠난 후에야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그제야 현태의 생김새를 똑똑히 보았다. 현태는 키가 크
‘게다가 한동안 운전기사로 일한 적도 있지만, 월급은 적지 않았어. 한 달에 2천만원으로 시작했고, 윤 대표님께 일이 생기면 월급도 더 올라갔으니까.’“저분은...”현태는 상대의 신분을 확실히 알아본 후, 어떤 태도로 대할지 고민하기로 했다. 소희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현태를 바라보았다.“정말 몰라서 그래요?”현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알아야 해?” 소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나한테 사건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미친 듯이 날뛰던 사람이잖아요!’ ‘대체 왜 심유인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내 사촌... 언니예요.”소희는 심유인과 가족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언니도 오늘 남자 친구를 데려왔더군요.” “사촌 언니? 소희 씨의 친언니가 아니고?” 소희가 낮게 불평을 내뱉었다.“아니에요, 우리 언니일 리가 없잖아요!”“그럼 왜 남자 친구를 데리고 소희 씨 집에 온 거야? 부모님이 안 계셔서 그런 거야?” 이 말을 들은 소희는 하마터면 웃음을 참지 못할 뻔했다. 특히 현태의 그 어리숙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은 일부러 그런 것처럼 보이게 했다. 심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다.“말이면 다인 줄 알아요?!” “제 남자 친구가 틀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소희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일반적인 경우에는 남자 친구를 부모님께 소개하잖아요. 언니처럼 남의 집으로 달려오는 게 아니고요.”“잘 모르는 사람들은 언니한테 부모가 없어서 남의 부모에게 허락받는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결국 이지숙이 나선 후에야 유인의 난처함은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어서 들어가자꾸나, 아버지께서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계셔.”“네, 엄마.” 소희는 현태의 팔짱을 끼고 심씨 가문의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몇 걸음도 안 걸었는데, 금세 정신을 차린 심유인이 또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잠깐만, 소희야,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어쨌든 오늘은 네 남자 친구가 삼촌과 숙모를 처
심유인은 한참이 흘러도 소희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갑자기 따분해졌다. “소희야, 네 남자 친구는 언제 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안 오는 게 좀 이상하네. 설마 별장에 처음 오는 거라서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이렇게 작은 곳에서 길을 잃으면 운전기사를 할 수 있겠어요?”심유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 자랑스러운 표정은 뭐야?’‘운전기사인 남자 친구를 두고도 창피하지 않다 이거야?’‘허! 심소희, 순진하긴.’유인이 막 입을 떼려던 찰나, 밖에서 고용인의 성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사, 사모님, 아가씨의 남자 친구분께서 오셨습니다!” ‘드디어 주인공이 나타나는구나!’심유인은 당사자인 소희보다 더 초조해하며 먼저 달려 나갔다.‘운전기사라더니, 몰고 온 차가 고용주 명의인 건 아니겠지?’ 밖으로 나간 유인은 마침내 차에서 내린 현태를 마주했다.그의 옷차림을 본 순간, 유인은 웃음을 터뜨렸다.‘풉, 그냥 티셔츠에 트레이닝 팬츠를 입고 온 거야?’‘여자 친구의 부모님을 만나러 오면서도 저런 옷을 입고 오다니, 비웃음을 당하려고 작정한 건가?’ 하지만 눈살을 찌푸린 건 소희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현태의 체면이 깎일까 봐 걱정한 것이 아니라, 현태가 자기 부모님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할까 봐 걱정한 것이었다. 소희는 빠르게 현태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그저께 양복도 사줬는데, 왜 양복이 아닌 캐주얼복을 입고 온 거예요?” 현태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나도 양복을 입고 오려고 했지. 그런데 그 옷은 오래 입으면 불편하더라고. 소희 씨의 부모님을 뵈면서도 온 마음을 옷에 쏟을까 봐 걱정돼서 이렇게 입었어.” “사소한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잖아?”소희가 대답했다.“그래요? 양복을 입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나 봐요. 하지만...”소희가 이지숙을 흘긋 바라보았다. 과연 이지숙의 낯빛은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물론 최선을 다해서 숨기는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현태가 불안해하며 물었다.“어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