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는 전화를 끊고 임하나가 보낸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이서야, 하하하하, 웃겨 죽겠다. 아까 내가 병원에 엄마 보러 갔다가 누굴 만났는 줄 아니? 하하하하, 하은철! 온몸에 붕대를 꽁꽁 감은 게 난 또 미이라 인줄. 병원 간호사 얘기로는 하씨 집안 어른에게 맞은 거래.] [하하하, 정말 세상은 공평하다니까.][어느 분인지는 몰라도 참말로 현명하신 분이네.]이서는 문자를 확인하고 답장은 하지 않았다.할아버지가 대신 총알을 막아서인지 몰라도 비록 여전히 하씨 집안과 하은철도 좋아하지 않지만, 하은철은 할아버지의 손자여서 그런지 차마 웃을 수 없었다.메시지를 확인하고 계속 답장이 없자, 임하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서야, 내가 좀 심했나?]이서는 채팅창에 뜬 메시지를 보고 멍하니 있다가 반응했다. 입가에 걱정스러운 웃음을 걸치고 있었다.[아니야, 내 문제야.][왜?][할아버지가 나 때문에 돌아가셨잖아. 하은철이 이전에 나한테 못된 짓 많이 한 건 맞아. 그러니까 내가 죽도록 미워해야 하는데……. 사람은 참말로 희한한 동물이야. 할아버지가 날 구하고 돌아가셨는데도 과거의 미운 감정은 사라지지 않더라. 물론 감사함도 사라지지 않았어. 그런데 이 두 가지 복잡한 마음이 겹치면서 지금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은철을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씨 집안 사람들도…….]임하나도 입장 바꿔 생각해보니 마음이 답답해졌다.[우선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 일은 그 때 가서 다시 생각하자.]이서는 웃었다.‘그래,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는 거야.’비록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가장 유감스러운 일이 그녀와 하은철이 함께 있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적어도 하관식을 치르는 동안만이라도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었다.[나가서 쇼핑할까?]임하나는 이서 혼자 집에서 쓸데없는 생각을 할가 봐 걱정이 되었다.[너 오늘 출근 안 해?][괜찮아.]임하나는 오후에 반차 쓸 예정이었다. [이렇게 하자. 우리 지환 씨도 같이 불
“네, 그럼 우리 메이 플라워 쇼핑센터 정문에서 합류할까요?”[네, 그래요. 바로 그쪽으로 출발할게요.]이상언과 약속을 잡고, 이서는 곧 외출준비를 했다.서경화는 상황을 보고 얼른 물었다.“사모님, 어디 나가시는 겁니까?”“쇼핑 다녀오려고요.”“그래요, 혹시 어디로 가세요?”이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메이 플라워에요. 혹시 뭔 일 있나요?”“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같은 방향인지 해서요.”이서의 눈 밑에 어렸던 불쾌감은 바로 흩어졌다.“어디 가시려고요? 태워다 드릴까요?”“아닙니다, 같은 방향이 아니에요. 버스 타고 다녀 올게요.”“그래요? 그럼 먼저 갈게요. 있다가 봐요.”“사모님, 조심히 다녀오세요.” 이서가 떠나는 것을 지켜본 서경화는 곧 지환에게 문자를 보내 이서의 행방을 알렸다.이서는 하나를 픽업하여 메이 플라워 쇼핑센터로 향했다.하지만 절반쯤 왔을 때 길이 완전 주차장이었다.“아니지?” 임하나는 고개를 내밀었다.“출퇴근 시간도 아닌데, 길이 왜 이리 막히지?”옆 차도의 차주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내밀고 두리번거리다가 임하나의 말을 듣고 한마디 했다.“앞에 교통사고 났다고 하는 것 같은데요.”임하나는 곧 들은 얘기를 이서에게 전했다.“이서야, 지금 이 길로 가면 한참 걸릴 거 같은데, 우리 다른 길로 가보자.”이서는 핸드폰을 켜고 네비게이션을 확인했다.“안 그러면 크게 한 바퀴 돌아야 하는데…….”“그래도 돌아가자, 여기에 짱 박혀 오도 가도 못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그래.” 이서도 별다른 의견은 없었다.“상언 씨에게 전화해 봐. 아마 먼저 백화점에 도착해 있을 거야.”임하나는 후진하고 있는 이서를 보고 어쩔 수 없이 이상언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바로 연결되었다.저쪽에서 이상언의 흥분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어디까지 왔어요?]임하나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누르며 애써 침착한듯 답했다.“아직 길에 있어요. 차가 많이 막혀서 지금 다른 길로 가고 있어요. 아마도 한
임하나는 이서에게 알려주고 싶은 충동을 억제한다고 했지만 여전히 이서는 하나의 이상함을 눈치챘다.“왜 그래? 왜 갑자기 말이 없어?”말하면서 이서는 하나가 보는 방향으로 바라보았다.임하나는 손을 들어 이서의 시선을 막으려 했지만 아쉽게도 이미 늦었다.차가 갑자기 멈추었다.임하나는 이서의 멍한 표정을 보면서 애써 다독였다.“이서야, 너 화내지 마. 아마 지환 씨에게도 말 못할 사정이 있을 거야…….”말하면서 임하나는 지환의 방향을 한번 보았다. 그는 마침 차에 올랐다.“우리 따라가자. 어디로 가는지 보자고. 괜히 지난번처럼 오해하지 말고…….”임하나는 이서의 소매를 잡고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서는 입술을 오므리고 잠시 후에야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무엇을 하러 가든 상관없이 이따가 내가 잡으면 반드시 등짝 스매싱 할 거야. 나 막을 생각하지 마!”“안 잡을 게, 안 잡아.”임하나는 이서의 상황을 걱정했다.“이서야, 내가 운전할게.”이서는 임하나와 자리를 바꿨다. 그리고 그녀는 뒷좌석에 앉았다.이서를 한번 쓰윽 본 하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바삐 운전석에 올라 차 시동을 걸고 지환이 탄 차를 따라갔다.차는 남쪽으로 달리는 걸 보니 교외로 나가려는 것 같았다.임하나는 이서를 위로했다.“허튼 짓 하러 가는 게 아니다에 500원 건다. 걱정 마. 지환 씨 그런 사람 아니야.”이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임하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또 말을 꺼냈다.“음악이나 듣자. 음악이 없으니 삭막하구만…….”이서는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임하나는 휴대폰으로 아무 노래나 한 곡 골라 재생했다.그런데 하필이면 노래 제목이 였다.임하나는 속으로 자신의 눈치 없는 손가락을 원망했다. 그리고는 지환을 있는 욕 없는 욕 다 보태서 한 바탕 쏟아부었다.‘남자들은 어찌 다 이 모양이야?’‘이서가 용서한 지 며칠 되었다고 또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다니.’‘정말 대단하다.’바로 이때 임하나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
“지금 어디야?”지환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눈 앞의 건물을 올려다보며 어두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구 주택가 쪽이야.]그가 구 주택가라고 하자, 이상언은 바로 거기가 어디인지 알았다.이곳은 지환이 H 국에 들어와서 구입한 곳이었다.처치곤란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그래서 민호일을 잡은 후 여기 구 주택가 쪽에 감금해 두었다.지환이 지금 거기 가는 건, 아마 민호일을 만나러 가는 것일 것이다.이상언은 급히 말을 돌렸다.“민호일은 나중에 손보고……. 나 이서 씨랑 하나 씨랑 메이 플라워 센터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도중에 길이 막혀 노선을 바꾸었다는데, 아직도 안 오네. 설마 사고가 난 게 아닐까 걱정된다.”[무슨 소리야?] 주택 문을 열어젖히던 지환은 곧 몸을 돌려 지시를 내리려던 참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경비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가씨, 여기는 구 주택가라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요.”“그럴리가요, 방금 내 친구 남편이 이쪽으로 들어오는 걸 내 눈 똑똑히 보았거든요.”여자 목소리였다.지환은 임하나의 목소리란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순간 심장이 철렁 했다. 곧 문을 열고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문밖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아저씨, 잘 생각해 보세요. 바로 우리 앞에 들어갔어요. 방금 이쪽으로 들어가는 거 똑똑히 보았다니까요.”임하나는 경비원 복장을 한 노인을 잡고 있었다. 그 뒤에는 바로 이서가 서있었다.지환은 눈동자가 휘둥그레질 정도로 마음이 다급해졌다.마침 그때 이서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지환은 뒤로 숨으며 무의식적으로 숨까지 죽였다.‘이서에게 이곳을 들켜서는 안 돼. 그랬다간 민호일을 감금한 이유까지 설명해야 하니까.’목소리가 이미 어느 정도 멀어졌다. 지환이 한숨 돌려도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 밖에서 다시 한번 임하나의 목소리가 울렸다.“아저씨, 이 차요, 혹시 어느 집 차인지 아세요?”지환이 창문으로 빼꼼 내다보았다. 임하나가 말한 그 차가 바로 그가 타고 온 차였다.게다가
이서가 문을 여는 순간 기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 집은…….이서는 더 이상 운전기사를 거들떠보지 않고 주택 안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오래된 주택단지로 인테리어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먼지도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그리고 바닥에는 선명한 발자국도 여러 개 보였다.최근에 생긴 것 같았다.이서는 발자국을 한 번 보았다.지환 신발 사이즈랑 비슷한 자국도 있었다.뒤이어 따라온 임하나는 바닥 위의 발자국을 바라보며 물었다.“이서야, 지환 씨 여기에 들어왔어?”“아마도.” 이서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스스로 진정하도록 자기 최면을 하며 발자국을 따라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곧 그들은 열린 지하실 문을 보았다.임하나는 긴장하여 이서를 붙잡았다.“이서야, 여기 어두컴컴하고…… 위험하지 않을까? 우리 그만 가자.”이서는 잠시 고민했다.“하나야, 너 밖에서 잠깐 기다려. 30분 뒤에도 내가 나오지 않으면…….”“안돼!”임하나는 확고하게 이서의 말을 끊었다.“나도 함께 들어갈 거야.”이서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안에서 갑자기 ‘우우우’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사람 목소리 같았다.그녀는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임하나도 그 뒤를 따라갔다.곧 그들은 지하실에 도착했다.지하실도 위와 마찬가지로 인테리어 안된 상태로 먼지만 가득 쌓여 있었다.그녀들은 들어가자마자 연신 기침을 해댔다.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갑자기 놀란 목소리가 울렸다.“여보, 자기가 여기 왜 왔어?”그러고는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지하실의 불이 켜졌다.지하실 전체가 갑자기 환하게 비쳤다.이서도 마침내 눈앞의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지환은 불이 켜진 곳에 서 있었다. 그의 멀지 않은 곳에 의자에 뒤로 묶인 채 앉아 있는 민호일이 보였다.“저 사람이…… 어찌 여기 있어요?” 상상 밖의 전개에 이서는 순간 지환이 그녀를 속인 일을 잊어버렸다.임하나도 놀란 눈으로 민호일을 바라보았다.외부에서 미친 듯이 찾고 있는 민호일이 여기에 있을 줄은 전혀
“핑계 대지 마요.”임하나가 쏘아붙였다.“이곳에 민호일이 있는 걸 알고 있으면서 왜 이서에게 알려주지 않았어요? 출장 간다고 거짓말까지 해야 했어요? 나와 이서는 또 무슨 사단이 난 줄 알고…….”지환은 이서를 바라보며 사과했다.“미안해, 여보,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당신…… 당신이…….”임하나는 그제야 지환을 잘못 오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민호일은 하경철 죽음을 초래한 장본인이다.이서는 그 모든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그녀는 아직 민호일의 그늘에서 나오지 못했다.그런데 민호일과 접촉하는 것은 다시금 사건현장을 떠올리게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임하나는 그제서야 후회가 되었다.‘진작 이런 줄 알았으면 이서한테 나오자는 얘기하지 말 걸.’‘그러면 지환 씨도 만나지 않았을 텐데.’이서는 미안함을 느끼는 임하나를 한번 보곤 오히려 애써 그녀를 위로했다.“나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사실 할아버지가 자기 대신 돌아가시면서 민호일이 그녀에게 준 상처는 이미 마음속에 뿌리 깊게 박혔다.그녀는 민호일에게 다가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를 죽여버려도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았다.“민호일,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 만약 살인이 무죄라면 당신은 이미 나한테 수백 번 죽었을 거야.”그녀는 말을 하면서 주먹을 힘껏 쥐었다.그러나 몸은 여전히 부들부들 떨렸다.그녀는 정말 자신이 한스러웠다.때로는 민호일을 죽여 버리지 못한 게 한스러웠고, 때로는 그 총알이 왜 그녀의 심장에 명중한 게 아닌지 한스러웠다.민호일이 ‘우우’ 소리를 내며, 시선은 지환을 흘겨보았다.‘네 남편이 하은철 둘째 작은아버지다!’그는 반복해서 같은 말을 뱉었지만, 테이프가 입을 막고 있어 그 진실을 이서에게 전할 수 없었다.임하나는 더 이상 여기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이서는 괜찮다고 했지만 지금 무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이서야, 우리 먼저 나가자. 여기는 지환 씨에게 맡기고.”이서가 고개를 돌려 지환을 바라보았다.“여보
“네가 그 분을 본 적은 없지만, 그 분은 이미 너를 여러 번 봤을 수도 있지…….”임하나는 손가락을 꼽으며 이서에게 세어 주었다.“너 잘 생각해 봐. 지난번 민호일의 일로 작은아버지가 너를 도왔잖아. 그리고 할아버지 생신 때에서 구세주처럼 나타나서 도와줬지. 너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왜 네 일에 그렇게 관심을 가질까?”이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임하나의 말이 일리가 없지 않았다.이 세상에 이유 없이 좋은 것은 없다.“그런데,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이틀 뒤에 할아버지의 하관식이 있잖아. 너도 갈 거잖아?그때 분명히 하은철 작은아버지 볼 수 있을 거야. 그럼, 그 베일에 싸인 신비의 인물이 누군지 살짝 옆 사람에게 물어봐도 되고. 우리가 김칫국 마신 거라면 오히려 다행이지 뭐, 앞으로 좀 조심하면 되니까. 그리고 혹시나 말인데, 혹시나 너에게 정말 관심이 있다면, 지환 씨더러 빨리 회사 그만두라고 해.”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았어.”임하나가 이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이때 지하실에 있던 지환은 민호일의 얼굴에 있는 테이프를 사정없이 떼어버렸다.민호일은 살점이 뜯겨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아아아아아...”“계속 소리 질러 봐.” 지환은 불을 다시 껐다. 어둠 속에서 그는 라이터를 손에 쥐고, 손가락으로 살살 튕기었다. 그러자 라이터의 부싯돌이 마찰되면서 탁탁 소리가 났다.그의 강압적인 목소리는 마치 무자비한 조롱과 같았다. 민호일은 마침내 그의 몸부림이 모두 헛수고라는 것을 깨달았다.“죽일 거면 죽여!” 지환에게 지금까지 시달리다 보니, 죽는 걸 두려워하는 민호일도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었다.이 끝없는 고통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탁탁.불빛이 다시 밝아졌다.지환의 얼굴 옆라인이 비춰졌다.그러나 이 얼굴은 민호일 눈에는 악마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그는 이전에 외국 사람들에게서 절대로 하지환 만큼은 건드리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이 사람, 사
“하지환, 차라리 날 죽여. 아니, 내가 부탁할게. 나를 죽여줘!”지환은 구더기처럼 뒤틀린 민호일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이때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순간 민호일의 눈에 한 가닥 희망이 떠올랐다.“하하하, 윤이서가 경찰에 신고했나 보네. 쌤통이다. 한사코 네 정체를 숨기더니 윤이서가 이번 납치 사건의 배후가 자기 남편인 줄 모르고 경찰을 불러들인 거네.”지환은 불쌍한 벌레 보듯 민호일을 바라보며, 곧 입을 열어 그의 마지막 환상을 깨뜨렸다.“저건 내 사람이야.”민호일은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지환을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이서에게 그럴싸하게 보이기 위해…… 설마?!’“너…… 두렵지 않아……?”민호일은 입에서 피를 토해냈다.“두렵다니? 뭐가? 그러니까 잘 생각해봐. 가족들과 빨리 상봉하고 싶은지 아니면 십이나 이십 년이 더 지나서 상봉할 지…….”“너…….”지환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떠났다.입구에 도착했을 때, 들어온 몇 사람과 마주쳤다.몇 사람은 공손한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지환은 소리를 낮추어 문 밖에 주차된 차를 보았다.차 안, 이서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빨리 들어가, 사모님이 밖에 있잖아.”순간 몇 사람의 낯빛이 엄숙하게 바뀌며, 재빨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지환은 이서가 있는 방향으로 계속 걸어갔다.차 옆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서는 문을 열고 내렸다.지환이 몸에 새로 생긴 상처가 없다는 것을 보고, 이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안에 지금 어떻게 됐어요?” 이서가 물었다.지환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경찰에게 처리하라고 맡겼어.”“할아버지를 살해했으니, 절대 가만두어서는 안 돼요.”“그래야지.” 지환은 이서를 안았다.차가운 손이 드디어 서서히 온도를 회복했다.“저기, 두 분 닭살 행각은 집에 가서 하면 안 될까요?” 차 안의 임하나가 불만을 품고 항의했다.이서와 지환은 서로 마주보고 웃으며 차에 올랐다.임하나는 그제야 이상언이 아직 기다리고 있다는 게 생각났다.
차가 심씨 가문의 고택에 다다르자, 이서는 가장 먼저 지엽을 발견했다.지엽 역시 차에서 내리는 지환을 보고 얼굴이 굳어 버렸는데, 특히 이서가 자연스레 지환의 팔짱을 낀 순간, 지엽의 눈썹이 몇 번이나 심하게 떨렸다. “두 사람...” 지엽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고택의 대문이 열리며 소희가 나왔다. “오셨네요!” 몇 초 후, 두 사람이 팔짱을 낀 모습을 본 소희는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두 분... 화해하신 거예요?” 이서는 지엽의 반응을 슬쩍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됐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엽이 떠난 뒤에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희는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하나 언니는 아직 모르죠? 지금 바로 알려줘야겠어요!” 이서는 다급하게 소희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 “잠깐만!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소희 씨 얘기부터 하자. 지엽아, 얼른 조사한 결과부터 소희 씨한테 보여줘.”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이 함께 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고, 이서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소희에게 조사 결과를 건넸다. “소희 씨에게 누명을 씌운 건 심태윤이었어요. 소희 씨가 여태 친동생인 줄 알았던 그 사람이요.”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 쪽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그 안에 다 적혀 있으니까 잘 읽어보면 돼요...” 지엽이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서야, 잠깐 나랑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서는 지환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서가 지환의 팔에서 손을 빼내려 하자, 지환은 더욱 강하게 이서의 손을 잡았다. 이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환을 올려다보며 눈빛으로 놓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 대표님, 제가 이서랑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면
이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같이 먹고, 같이 잔다고요?”지환은 그 말에 이서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지만,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응, 어쩔 수 없잖아. 어둠의 호리병을 반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당분간은 같이 지내야겠어요.” 지환의 미소는 더 깊어졌는데,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하도훈은 언제 처리할 수 있어요? 설마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죠?” 지환은 깊은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이 다크 웹의 1위와 2위의 위치만 알아낸다면, 하도훈과 정면 승부를 가릴 수 있을 텐데 말이지...”“어둠의 호리병은 그 둘의 위치를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둠의 호리병도 순위에 올라 있는 킬러일 뿐, 그 사람들과 친구는 아니거든.” “단서도 전혀 없어요?” 지환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없어.” 이서는 실망이라기보다는 하도훈이라는 골칫거리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럼, 우린 이제 어디로 가요?” “회사로.” 고개를 끄덕인 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이 탄 차는 윤씨 그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이서는 지엽의 전화를 받았다. “소희 씨에 대한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된 거야?”이서는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얼른 가서 소희 씨한테 알려줘. 분명히 엄청나게 기뻐할 거야.” 수화기 너머의 지엽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이서야, 난 소희 씨랑 이제 막 알게 된 사이라 조금 어색한데, 네가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이서는 곁눈으로 지환을 한 번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 순간, 이서를 태우고 있던 지환은 잠시 핸들을 놓칠 뻔했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
모두 반대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이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불만 있으면 사직서 쓰세요.” 이 한마디에, 회사 고위층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고 팀장님이 아닌 고 대표님이 된 거예요.”‘고 대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고이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새어 나오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기쁨에,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니 말이다.“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서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고, 고이서는 문이 닫힌 후에도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5분이 지나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의 책상으로 다가가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이 모든 건 다 내 거야...!’ 고이서는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대형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는 순간, 마치 가죽 의자가 아니라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만 차지하면... 다시 예전처럼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대로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반짝이는 보석도 망설임 없이 살 수 있고...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겠지! 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도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이서의 마음이 격렬히 요동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이서는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고,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김하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팀장님, 회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고 팀장’이라는 호칭에 고이서는 속으로 불쾌감을 느꼈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김하늘’이라는 이름을 새겨 두었다.‘며칠만 지나면 내가 정식으로 대표가 될 텐데, 그때 가장 먼저 잘라버릴 사람은 바로 네가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김하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
하지만 한 회사의 대표는 곧 하늘과도 같았다. “아직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서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한 김하늘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 사무실에도 CCTV가 있을 거 아니에요. 당장 영상 자료를 가져와 보라고요!” 김하늘은 당황하며 말했다. “대표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굳이 대표님께서 무안해지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아.’ 이 정도의 생각은 김하늘도 하고 있었으나, 이서는 아주 단호했다.“됐고, 당장 가져오세요.” 김하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고이서는 의아해졌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비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그럼 설마...’ ‘그 꽃차가 효과를 나타낸 건가?’이 가능성이 떠오르자 고이서는 속으로 흥분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대표님께서 CCTV를 보자고 하신다면 봐야죠. 만약 저희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대표님께서도 정확하게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렇죠, 대표님?”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니까요.” “만약 김 비서가 잘못 전한 거라면 엄하게 처벌하고, 정말 내가 말해놓고 잊어버린 게 맞다면, 그땐 분명히 사과할게요.” 이쯤 되니 김하늘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김하늘은 결국 CCTV 영상을 가져왔고, 영상 속에는 이서가 몇 번이나 김하늘에게 지시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고 팀장님을 불러주세요.”심지어 몇 분 간격으로 반복해서 지시하는 모습도 있었다. 이서는 그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내가 한 말이 맞다고...? 그런데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지?”“김 비서, 미안해요.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랬어요.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너무 미안해서 가방을 하나 선물로 주고 싶은데, 오늘 퇴근하기 전에 나한테 와서 받아 가요, 알겠죠?”김하늘은 이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애매하고 거절하기도
“진짜예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이서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지환은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이서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을 단순히 의례적인 질문으로 하지 않고, 정말 진심을 담아 묻곤 했다. 지환은 한동안 말없이 이서를 바라보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짜야. 생각해 봐. 네가 너희 가족 이야기를 고이서와 나눈 거잖아. 고이서 입장에선 너와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을 거야.” 이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그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병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고마워요.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어요.” 이서는 진심으로 말했고, 지환은 잠시 이서를 응시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응.”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요.” 이서는 문을 열고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서 내렸다. ...이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꽃차를 들고 의사를 찾아갔고, 의사는 꽃차를 검사한 뒤 말했다. “지난번과 성분이 똑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양이 더 많네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겠어요.” 의사는 몇 번 더 종이에 뭔가를 적더니 고개를 들었다.“3일이에요. 이 차를 마시면 3일 후에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서, 생각보다 더 조급했구나?’ 이서는 병실로 돌아가 꽃차를 우린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 덕분에 불면증이 해결됐어요. 요즘 정말 잘 자고 있답니다.]문구와 함께 사진을 올리자, 고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모든 걱정을 덜어냈다. 이제 남은 건 이서가 언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느냐였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고이서는 간절하게 속으로 외쳤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윤씨 그룹의 CEO 자리에 앉고 싶다고.’특히 이서가 회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주목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이서의 질투심이 극에 달했다.
고이서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참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듣고 있었어요. 대표님의 부모님께서 그렇게 하신 건, 뭔가 사정이 있으셨던 거 아닐까요?” 이서는 즉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짓을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어떤 부모가 자기 딸의 신장을 빼앗으려는 남자에게 딸을 내줄 수 있다는 거죠?” 고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서는 혼자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제가 두 사람의 친딸이 아니라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한 걸지도 모르죠.” 고이서는 숨이 잠시 멎는 듯했고, 이마에서 흐르던 땀은 이미 목덜미까지 흘러내려 고이서의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 세상에 다양한 부모가 있듯이, 부모의 형태도 여러 가지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서는 이미 땀에 젖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고이서를 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지운 뒤, 사과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미안해요. 이렇게 더운 날씨에 괜히 말을 길게 했나 봐요. 이만 돌아가 보세요. 더 있다가 더위 먹으면 안 되잖아요?” 고이서는 마치 구원을 받은 듯 서둘러 고개를 숙인 후 떠났고, 이서는 그녀의 젖은 등 뒤를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지환은 이서의 눈가에 깃든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웃고 싶으면 그냥 웃어.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그제야 이서는 참지 않고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이서가 지환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진심 어린 웃음을 짓는 순간이었다. 지환은 이서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이서는 그제야 눈치를 채고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오랜만에 네가 그렇게 웃는 걸 보니까 기록해 두고 싶어서. 혹시라도 불편하면 바로 지울게.” 이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황급히 말했다. “잠시만요!” 사진 속 이서의 얼굴은 오랜만에 활짝 핀 미소로 가득했다. ‘그러게, 이렇게 웃
“그럼요, 지금 바로 갈게요.” 이서는 전화를 끊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바쁘면 나 혼자 택시 타고 가도 돼요.” 하지만 지환은 이미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난 괜찮아.” 이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십여 분쯤 지나, 두 사람은 고이서를 마주했다.이서에게 꽃차를 건네주던 고이서는 지환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물론 지환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마주한 지환은 자료 속의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왠지 모르게 지환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품격이 있었다. 그 품격은 마치 높은 자리에 있는 왕처럼 다가왔고, 고이서는 알 수 없는 질투심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성지영과 윤재하는 분명 여러 번 말했었다. “윤이서 남편은 돈도 없는 놈이야.” 그런데도 고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야. 하은철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안녕하세요.” 고이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지환에게 인사를 건넸고, 이서의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윤 대표님, 꽃차가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고이서는 이곳에 더 머물렀다가 의심을 살까 싶어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럼, 별일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고이서가 돌아서려는 순간, 이서가 그녀를 불렀다. “고 팀장님.” 고이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물었다. “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고 팀장님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고이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묘한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아마 자신이 꺼림칙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었다. 이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고 팀장님이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