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은철은 윤수정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서에게 말했다.“들어가. 할아버지가 할 말 있으시대.”그 말을 듣고 이서는 간호사의 팔을 뿌리치고 눈물을 닦으며 하은철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응급실은 피 냄새가 진동했다.하경철의 가슴에 박힌 총알은 꺼냈다. 총알은 흰색 쟁반 위에서 유난히 눈부셨다.이서는 빠른 걸음으로 하경철 앞에 다가갔다. 입을 열기도 전에 눈물이 이미 떨어졌다.“할아버지…….”하경철은 이서의 부름에 눈동자가 커졌다.그는 손을 들어 이서를 쓰다듬으려 했지만, 팔은 천근만근처럼 무거워 도무지 들 수 없었다.“이서야…… 할애비가…… 네 할머니의 부름을 들은 것 같아…… 우리 곧 만날 거야…….”“안 돼요, 할아버지, 안 돼요…….”생사 앞에서 그 어떤 말도 힘이 없다는 것을 이서는 그제야 깨달았다.“너무 슬퍼하지 마, 할애비…… 할애비는 살 만큼 살았다…… 네가 은철과 결혼해서 내 소원을 이루었더라면, 난 아마도 지금까지 살지도 못했을 거야…….”“할아버지…….”“이서야, 할애비 곧 떠날 거야. 떠나기…… 전에 이 할애비 소원 하나 들어줄 수 있겠냐?”이서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하경철의 입가에 드디어 가벼운 미소가 지어졌다.“그래…… 그래…… 할애비가 이뻐한 보람이 있네…….”“할아버지.”“은철아, 이리 와…….”하은철은 입술을 오므리고 다가왔다.그의 몸도 심하게 떨렸지만 꾹 참았다.“할아버지, 무슨 일이세요?”“손 줘봐!” 하경철은 힘겹게 손을 들었다.하은철은 급히 손을 할아버지에게 건네주었다.할아버지는 또 이서에게 말했다.“이서야…….”이서도 얼른 손을 하경철에게 건네주었다.하경철은 힘겹게 두 사람의 손을 함께 포개놓으려고 했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그는 생명의 기운이 점차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는 두 젊은이의 손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었다.“이서야, 내 마지막 부탁이야…… 은철 옆에서 함께 해줘라. 이 녀석을 너에게 맡겨야 내…… 내가 안심하고…… 갈 수 있을 거 같아.”하경
‘아버지가 북성시를 떠났을 때 하씨 집안과 깔끔하게 인연을 끊었어야 했어.’같은 시각, 질투에 불타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윤수정이었다.‘뻔뻔한 년, 영감쟁이 돌아간 틈을 노려 대놓고 오빠를 꼬시다니. 오빠는 왜 이 여우 손에 놀아나는 거야?’“오빠, 할아버지…… 어떻게…… 이렇게 가실 수 있어?” 윤수정은 이서처럼 울기 시작했다.그러나 하은철은 그녀의 울분을 들어줄 마음의 여유 같은 건 전혀 없었다.“조용히 해. 옆에서 징징대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잖아!”운수정은 눈물을 훔치는 동작을 멈췄다.“이서야.” 하은철은 이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목소리는 한껏 부드러웠다.“일어나, 집에 들어가 좀 쉬어. 너무 자책하지 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거 너와 아무 상관없어. 너 잘못 아니라고.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모두 민호일 그놈 짓이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이서는 맥없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나 여기 있을게. 할아버지 마지막 가시는 길 배웅해드리고 싶어.”하은철과 파혼까지 한 마당에 자리를 지킬 명분은 없지만, 이서는 이것저것 잴 여유가 없었다. 다만 할아버지 마지막 가시는 길에 최선을 다해 모시기로 마음먹었다.할아버지가 민호일에게 살해된 건 맞지만, 그래도 그녀만 아니었다면 할아버지가 이렇게 돌아가시지 않았을 테니.‘할아버지를 편히 보내 드려야 해…….’그래야 그나마 자기 마음속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것 같았다.하은철은 이서가 이대로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먼저 좀 들어가 쉬어. 그래야 장례를 치를 기운이 있지 않겠어?”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라, 이서는 하은철의 말대로 먼저 집에 가 쉬기로 했다.하은철은 즉시 사람을 보내 이서를 집으로 바래다주었다.이서가 떠나는 것을 확인한 지환은 비상계단 뒤에서 나와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이서를 뒤따라갔다.이서가 자리 뜬 것을 확인한 윤수정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그러고는 코를 훌쩍거리며 하은철의 곁으로
하은철이 보낸 사람은 이서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이서는 일찌감치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서경화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갔다.기사는 이서를 알뜰살뜰 살피는 서경화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아주머니는 살뜰한데, 남편은 어디 간 거야? 당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참 이상해.”기사가 차를 몰고 나간 뒤 얼마되지 않아 방금 전 그가 주차했던 위치에 다른 차 한 대가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주차했다.곧 차문이 열리고, 지환이 차 안에서 나와 집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거실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는 이서를 껴안았다.따뜻하면서도 익숙한 품에 안긴 이서는 지환의 품 안을 필사적으로 파고들었다.지환은 이서의 등을 애틋하게 쓰다듬으며 아무 말없이 조용히 안아줬다.지금은 조용히 옆에 있어 주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지환 품에 안긴 이서는 드디어 깊은 잠에 들었다.눈물로 얼룩진 품속의 이서를 보니 지환은 마음이 아려왔다.이서에게 하경철은 정말 특별한 의미를 가진 사람이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으니 아마 오랜 시간이 걸려야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그는 가볍게 이서를 안고 2층으로 올라갔다.침실에 도착하자, 동작은 더욱 가볍고 부드러웠다. 비록 그의 동작이 이미 충분히 가볍고 부드러웠지만 이서를 침대에 눕히는 순간 품 안의 사람은 불안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지환은 몸을 숙여 이서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이서는 그제야 찌푸린 미간을 살짝 폈다.지환의 눈동자 속에 깃든 긴장도 서서히 풀렸다.그는 침대 옆에 앉아 태블릿을 들고 민호일의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갑자기 전화가 울렸다.지환은 발신자 번호를 슬쩍 확인하고는 받지 않았다.하은철의 전화였다.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바로 하은철이다.그는 자기 기분을 참지 못하고 그를 죽일까 봐 두려웠다.그와 이서 두 사람 사이의 가장 큰 장애물을 하은철이 만든 셈이다.핸드폰이 계속 울렸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그가 나타나지 않는 것도
하은철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복수해야겠어요. 피 값은 피로 받아야죠. 민호일…….]“걱정 마. 이미 사람 붙였어.”[그래요? 잡으면 꼭 저에게 넘겨요. 살아 있는 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걸 느끼게 해줄 테니까.]지환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다른 건? 장례식은……?”[고마워요. 장례식은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아마 이서가 와서 도울 거예요.]지환은 미간을 찌푸렸다.“이서……? 왜 이서가……?”하은철은 지환이 이상하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서가 한다고 했어요.]“명분이 없잖아?”이서가 하경철의 장례식을 거든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장례식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신분도 숨길 수 없게 될 텐데…….[그렇긴 하죠. 하지만 할아버지를 편히 모셔야 마음이 편해질 거 같다고…… 할아버지 일에 대해 아무도 이서를 탓하지 않겠지만, 이서는…… 자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해요…….]일순 두 사람은 모두 침묵했다.사실 이서와는 상관이 없지만,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그리고…….]하은철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저도 이제야 할아버지 생각이 옳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말인데…… 할아버지 장례식이 끝나고 나면 이서와 결혼할 생각이에요.]지환은 눈을 가늘게 떴다.‘저 자식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이서 이미 결혼한 걸로 알고 있는데?!”그는 하은철의 허황된 생각에 찬물을 끼얹었다.[알아요.]하은철은 차가운 유리장에 머리를 기댔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여느 때보다 머리가 냉정했다. 사실 그도 알고 있다. 오래전부터 이미 이서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다만 할아버지가 계속 강요하던 결혼이라 오히려 반감이 생겨 줄곧 부정해 왔다.또 다른 원인은 윤수정 때문이었다. 윤수정이 그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다. 따라서 그는 차마 윤수정을 내칠 수 없었다. 그녀를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이런 책임감은 그로 하여
하경철의 비보는 곧 온 북성시에 전해졌다.그룹 입장에서의 공식적인 발표가 나가지 않자, 외부에서는 다양한 소문이 떠돌았다. 하지만 범인이 민호일이라는 건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이서의 지인들은 그날의 아찔했던 위험한 상황을 전해 듣고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이서를 걱정하고 챙겼다.임하나, 하이먼 스웨이, 심소희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이서의 집으로 달려갔다.이서는 그들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그들을 맞이했다.“나나 씨도 오고 싶어했는데, 아쉽게도 지금 해외 촬영이 있어서…….”커다란 숄을 걸친 이서는 목소리마저 힘이 없었다.그녀는 요 며칠간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잠이 들어도 늘 악몽에 시달려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나나 씨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줘. 촬영 잘 마치고, 내 걱정은 하지 말라고…….”임하나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손을 잡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서야, 너에게 알려줄 굿 뉴스가 있어.”“뭔데요? 궁금하네요.”“딸을 입양한 집안을 찾았어!”이서의 기분은 한껏 좋아 보였다.“어디예요?”“심씨 가문이더구나, 아직 누구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머지않아 곧 알게 될 거야!”심씨 집안의 여식이 적지 않지만, 조사하면 곧 나올 거라고 이서는 생각했다.그녀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는 그렇게 많지 않으니, 쉽게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정말 잘됐네요.”이서의 기분이 드디어 좀 나아 보였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엄마, 그럼 따님 되찾으면, 가장 먼저 뭘 하고 싶으세요?”“호호, 아직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하이먼 스웨이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지금까지 계속 찾아 헤맸지만, 여태껏 감감무소식이었잖아. 물론 이번에는 가능성이 좀 크긴 하지만, 그래도 난 아직 안 믿긴다.”이서는 그녀가 하는 얘기가 이해되었다.기대를 높게 가졌다가 마지막에 헛물켜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었다.“괜찮아요, 따님을 만나고 나서 계획해도
지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갑자기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곧 지환이 입을 열었다.“그럼, 저 먼저 나가보겠습니다.”“응.” 하이먼 스웨이는 과일을 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환이 나간 뒤에야 눈을 들어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아마 지금 마음이 제일 괴로운 건 지환일 것이다.오랫동안 지환을 알고 지냈으니, 그가 얼마나 워커홀릭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서를 위해 모든 걸 다 접고 집에 남아서 이서를 돌보고 있다.‘어휴!’‘이서가 하루빨리 자책하는 마음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씻은 과일을 들고나온 하이먼 스웨이는 다시 이서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이서에게 등 떠밀려 나왔다.집을 나온 심소희는 곧 눈시울이 붉어졌다. 차에 올라탄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아요. 며칠 사이에 몸이 저렇게 상해 버리다니…….”임하나와 하이먼 스웨이도 침묵했다.집으로 가는 차 안의 분위기는 극도로 침울했다.같은 시각, 집안의 분위기도 침울하긴 마찬가지였다.앉아서 멍때리는 이서를 본 지환은 곧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여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내가 해줄까?”그가 두 번 불러서야 이서는 비로소 반응했다.“응? 뭐라고요?”지환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방금 한 얘기를 반복했다.이서는 고개를 저으며 지환을 향해 팔을 벌렸다.“안아줘요.”지환은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뻗어 이서를 안았다.이서는 지환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두 사람은 이렇게 조용히 서로 껴안고 시간이 조금씩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었다.얼마나 지났을까, 이서는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지환 씨, 나 할 얘기 있어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지환의 심장이 순식간에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얘기해 봐, 무슨 일이야?”이서는 또 한참을 침묵했다.“아니에요, 나중에 다시 얘기할게요.”지환은 이서의 턱을 들어 들었다. “왜? 무슨 일인데?”이서는 지환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별로 중요
지환은 곧 휴지를 뽑아 이서의 눈물을 닦으면서 달랬다.“바보처럼 왜 또 울어? 우리 울보…….”이서는 눈시울을 붉혔다.“안 울었어요.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만…….”지환은 실내 환경을 한 번 보았다.“그래, 그래, 알았어, 눈에 뭐가 들어간 걸로 치자. 자기야, 그나저나 매운 떡볶이 계속 먹을 거야? 먹을 거면 지금 얼른 먹어. 좀 더 지나면 다 퍼질 텐데…….”이서는 눈물을 닦으며 환하게 웃었다. 곧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응.”식사를 마친 부부는 아래층에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둘은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10시가 넘어서야 이서가 일어났다. 위층으로 올라가려던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곧 지환에게 말을 건넸다.“지환 씨…….”“응?”“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난 당신이랑 함께 할 거예요.”무덤덤하게 말을 꺼낸 이서는 왠지 지환 앞에서 선서하는 것 같기도 했다.지환은 온화하게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의 말은 지환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그의 마음이 삽시간에 안정되었다.“그래, 빨리 올라가 쉬어.”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위층으로 올라갔다.문이 닫히자, 지환 얼굴의 웃음기가 순식간에 싹 걷혔다. 그는 곧 휴대전화를 꺼내 하은철에게 전화를 걸었다.곧 전화가 연결되었다.[작은아빠, 무슨 일이세요?]“어디야?”[본가에 왔어요.]며칠 뒤면 할아버지의 하관식이 있을 예정이라 마음이 헛헛했던 하은철은 본가로 돌아가 허전한 마음을 달래고자 했다.지환은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작은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서에게 뭐라고 하셨지?”[별말씀 없으셨는데요.]하은철은 어리둥절해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다만 저와 이서가 결혼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게 일생일대의 한이라고 말했어요. 작은아빠, 뭔 일이에요? 왜 갑자기 이런 걸 물으시죠?]지환의 몸이 흔들렸다.그제야 이서가 오늘 밤 보였던 여러 가지 미스터리한 행동들에 대한 합리적인 답을 찾은 것 같았다.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아니었다.하경철의 마지막
지환은 하경철이 거주하던 본가에 몇 번 가본 적이 있다. 따라서 네비게이션 안내도 필요 없어 차를 본가 쪽으로 몰았다.차에서 내리자, 누군가가 다가와 막아섰다.경호원은 지환인 걸 확인한 후, 곧 몇 걸음 뒤로 물러나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큰 집 도련님, 안녕하세요.”지환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당을 지나 성큼성큼 거실로 걸어 들어갔다.안에 있던 하은철은 바깥에서 들리는 인기척을 듣고 얼른 일어나 문 쪽으로 나와 지환을 맞이했다.“작은아빠…….”입을 열자마자, 지환의 주먹이 날아왔다.하은철이 고통스러운 듯 울부짖으며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 할 때, 지환의 두 번째 주먹이 날아와 그의 다른 한쪽 눈을 세게 내리쳤다.하은철은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그는 아픈 나머지 두 손으로 두 눈을 눌렀다.“작은아빠, 진정하세요! 나 은철이에요, 당신 조카라고요!”‘조카’라는 두 글자를 듣고, 지환의 주먹세례는 더욱 거세졌다.앞 전 두 주먹보다 강도가 훨씬 셌다.하은철은 아파서 연신 숨을 들이쉬었다.“작은아빠, 그만해요. 아무리 윗사람이라고 해도 이렇게 사람을 두들겨 팰 수는 없어요. 더 이상 멈추지 않으면 저도 맞고만 있지 않을 거예요. 반격할 거라고요!”“그래? 그럼 어디 한번 반격해 봐, 내가 바라던 바다!”지환은 하은철을 놓아주었다. 차가운 눈빛은 마치 하은철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하은철은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온 몸에 한기가 들었다.“작은아빠, 내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웃어른을 공경해서 손 안 쓰는 거예요.”“아니야!” 지환은 주먹을 꽉 쥐었다. 관절에서 우두둑 소리가 들려왔다.“오늘 밤 우리 제대로 한 번 붙어보자. 남자 대 남자로, 계급장 다 떼고 정정당당하게…….”“왜…… 왜요? 왜 굳이……?” 하은철은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전혀 몰랐다.요 며칠 줄곧 할아버지 장례식 관련 뒤처리를 하고 있었다.“이유 같은 거 없어!” 지환은 은철을 한바탕 두들겨 패고 싶었다.그래야 속에 있는 화가 조금이라도 풀릴 것 같았다.돌아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