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군.” 민호일은 총으로 이서의 머리를 힘껏 내리치고는 뼈에 사무치는 딸의 불행에 대해 이서의 살을 씹고 뼈를 갈아 마시는 처절한 복수를 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의 피맺힌 원한을 다 갚을 수는 없다.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눈빛에 살기가 등등하여 이서를 쏘아보았다.이서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민호일을 자극시키지 않으려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이미 일은 벌어졌고, 이제 와서 대표님이 저를 죽여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차라리 제가 대표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지 생각해 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이서는 이렇게 말하면서 곁눈질로 이미 몰래 경찰에 신고한 서경화를 바라보았다.서경화의 빠른 대처 덕분에 이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더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결정적인 순간에 서경화가 뜻밖의 위험에 직면해서도 이렇게 침착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니가 나를 위해 뭘 할 수 있는데?!”민호일의 분노한 목소리에 이서는 다시 민호일을 바라보았다.“네까짓 게 나를 위해 뭐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바로 너 때문에, 내 딸이 미쳤고, 아내가 감옥에 들어갔고, 내 회사도 없어졌어!”“네가 우리 가족을 망쳤어! 너도 똑같이 패가망신을 맛보게 될 거야!”이서가 입을 열려고 하는 찰나에 하경철이 먼저 이서 앞으로 나섰다.“이봐, 민 대표, 마음을 좀 가라앉히게. 이서의 말도 일리가 있네. 자네가 이렇게 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이 더 복잡해질 뿐이야.”“내 말 듣고 총 내려놔. 자네 회사 일, 하씨 집안에서 나서서 해결할 수 있어. 우리 집안이 이정도 능력이 있다는 것만 믿어주게.”이서의 이마를 겨눈 총구가 약간 느슨해지자, 이서는 민호일을 설득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돌아서며 말했다.“맞아요, 민 대표님, 4대가문 중 하나로 어렵게 일군 민씨 가문이 이렇게 없어지는 걸 원치 않으시잖아요?”하경철과 이서의 설득에 민호일의 분노가
이서는 그들의 표정을 살피며 어쩔 수 없이 말을 이어갔다.“그 사람은 제 남편이 다니는 회사의 이전 사장님이예요. 그 분이 저를 돕고 있는 이유는 설명하기가 좀 복잡한데, 간단히 말하자면, 그 사람 때문에 저희 부부가 하마터면 이혼할 뻔 한적이 있어서 미안한지 저희한테 잘해줘요. 마음의 빚이 있나 봐요. 그래서 저를 돕는 거예요.”민호일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다시 물었다.“지금 네가 하는 말이 모두 사실이냐?”이서는 어쩔 수 없이 말을 이어갔다.“제가 민대표님을 속여서 뭐하겠어요? 생각해 보시면, 제가 만약 하은철의 작은아버지와 관계가 깊다면, 처음부터 GM그룹을 위해 여기저기 남에게 부탁하러 다닐 필요가 있었겠어요?”이서의 이 말은 민호일을 설득하는데 성공했지만 하경철은 여전히 이서의 말을 다 믿을 수 없었다.하경철은 지환의 사람됨이 좋지 않다는 것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정말 이서와 그녀의 남편의 감정을 깨지도록 만든 적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가 의도한 짓임에 틀림없다.하경철이 아는 지환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이서와 그의 남편에게 미안해서 만회하기 위한 도움을 줄 리가 없는 사람이었다.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지환이 이서를 돕고 있는지 확실한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특히 지금 같은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는 더 그랬다.“하하하하하.” 민호일은 갑자기 머리를 쳐들고 크게 웃었다.“나는 네가 하은철의 작은아버지와 관계가 있든 말든 상관없어. 어차피 오늘은 너 죽고 나 죽는 건데 내가 뭐가 더 무섭겠어?”그는 이서에게 다시 한번 총구를 겨누며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이서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지만 어느새 민호일의 뒤쪽으로 몰래 돌아간 서경화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하지만 황급히 시선을 돌려 민호일에게 들키지 않았다.미친듯이 뛰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이서는 민호일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려고 계속 말을 걸었다.“잠깐만요, 민 대표님, 정말 잘 생각한 거 맞죠? 지금 여기서 저를 죽이면 대표님에게도 더 이
그 자리에서 갑자기 지환을 맞닥뜨렸을 때 이서는 마치 한 줄기 희망을 본 것 같았다.“지환 씨, 빨리 할아버지를 구해요. 총에 맞으셨어…….”하경철이 지환을 보았을 때 이미 동공이 심하게 수축되고,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지환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무릎을 꿇고 하경철을 일으켜 부축해서 성큼성큼 입구로 걸어갔다.바닥에 쓰러져 있던 민호일 옆을 지날 때 민호일을 발로 한 번 냅다 걷어찼다.민호일은 이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하경철을 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미 멀어진 지환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뭐야? 윤이서 남편이 진짜 하은철 작은아버지 회사의 직원일 뿐이야? 왜 그가 하필 지금 여기 나타난 거지?”마침 민호일의 곁을 지나던 이천은 이 말을 듣고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누가 사모님 남편더러 직원이라고 말하던가요?”민호일은 이천 쪽으로 확 고개를 들었다.그는 전에 이천을 본 적이 있다.“너…… 너 하지환의 비서 맞잖아? 너는 또 왜 여기 있어?”이천은 민호일이 정말 불쌍하고 살아갈 희망도 전혀 없는 것을 알았다. 민호일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 그에게 진실을 말해 주었다.“여기가 하지환 대표의 집인데 자기 집에 일이 생겼으니 본인이 온 거죠. 이제 아시겠어요?”민호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이 상황을 들은 모든 사람이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정신없이 어떻게 된 일인지 어리둥절해하며 상황을 계산하고 있었다.이천은 그를 흘겨보고 그와 불필요한 말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입구로 가려던 참에 민호일이 이천의 허벅지를 덥석 잡고 매달렸다.“다시 한 번 똑똑히 말해봐! 도대체 여기가 누구 집이라고?”어쨌든 민호일은 윤이서가 하지환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이천은 동정의 눈초리로 민호일을 흘겨보았다.“잘 들으세요. 하지환 대표님과 윤이서 사모님 집이라고요. 이제 아시겠어요?”
시간은 조금씩 흘렀다. 응급실 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이서를 본 지환은 그녀의 얼음장 같은 손에 키스했다.“먹을 거 좀 사 올게, 얌전히 여기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이서는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지환이 자리를 비우자, 이서는 홀로 사막에 버려진 사람처럼 외롭고 쓸쓸했다. 차가운 바람이 살을 에며 그녀를 무참히 짓밟았다.머릿속에는 하경철이 쓰러지는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그녀는 불안한 듯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껴안았다.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버리려고 애썼다.‘만약 할아버지께 무슨 변고라도 생긴다면, 내가 죽어서도 용서받지 못할 거야.’‘이 세상에서 나를 진심으로 아껴준 사람은 할아버지가 처음이었어.’이서는 일찍이 하경철을 자신의 친할아버지로 생각했다.바로 이때, 복도에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졌다.곧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어떻게 된 거야? 할아버지가 왜 입원하셨어?!”하은철은 할아버지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다.그의 뒤를 따른 사람은 하도훈이었다.하도훈 역시 온 얼굴이 땀투성이였다.이서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눈물로 얼룩진 화장기 없는 얼굴 보는 사람마저 애처롭고 안쓰럽게 느꼈다. 하은철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조급해 말고 천천히 얘기해 봐.”이서는 말문을 열기도 전에, 울음이 먼저 터져 나왔다.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제대로 서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미안해……. 할아버지는 나 때문에…….”하은철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는 얼른 이서를 일으켰다.“이서야, 뭔 일인지 천천히 말해봐.”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이서는 하은철에게 들려 일어났다.병원에 막 도착한 윤수정은 마침 이 장면을 목격했다. 그녀는 열받아 돌아버릴 것 같았다.‘이러고도 네가 오빠를 꼬시지 않았다는 말이야?’‘오빠에게 찰싹 붙어 있으면서 꼬시는 게 아니라고?’수정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찌르며 고통의
의사는 이서를 향해 속수무책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심장에 총알을 맞았으니 기적이 일어난 데도 힘들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의사의 말을 전해 들은 이서는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하은철과 하도훈도 믿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선생님,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하은철은 의사의 팔을 잡았다.“뭐라도 해봐요. 아무리 비싼 의료기구라도 제가 다 공급해 드릴 테니 저희 할아버지 꼭 좀 살려주세요. 돈은 얼마나 들어도 괜찮아요. 우리 할아버지 살려주세요…….”의사는 고개를 숙였다가 하은철을 바라보았다.“하 대표님, 죄송합니다. 저희는 이미 최선을 다했습니다.”이 말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경철에게 사망선고를 내린 셈이다.삽시간에 적막감이 감돌았다.이서의 훌쩍이는 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깼다.갑자기 하은철의 격노한 목소리가 병원 복도에 울려 퍼졌다.“말도 안 돼요. 우리 할아버지 얼마나 건강하셨는데……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지금! 당장! 들어가셔서 뭐라도 해보세요!”의사는 난처했다.“진정하세요. 어르신 마지막 얼굴 보셔야지요. 얼른 들어가 보세요.”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침착한 사람은 역시 하도훈이었다.그는 하은철을 붙잡고 말했다.“어서 들어가자.”하은철은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곧 중환자실로 들어갔다.복도에는 이서와 수정만 남았다.수정은 굳게 닫힌 응급실 문을 보며 입꼬리를 치켜세웠다.하경철이 위독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그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하은철과의 결혼 길을 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 드디어 사라지게 되었으니 말이다.‘영감이 죽으면 더 이상 내가 하씨 집안으로 들어가는 걸 막을 사람이 없겠지.’하씨 집안의 작은 사모님이 되면, 첫 번째 할 일이 바로 노인네의 산소에 가서 결혼 사실을 알려주고, 그 노인네가 죽어서도 편히 못 쉬게 할 예정이다.“연기 이제 그만하지 그래?” 옆에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서를 본 수정은 대놓고 비
하은철은 윤수정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서에게 말했다.“들어가. 할아버지가 할 말 있으시대.”그 말을 듣고 이서는 간호사의 팔을 뿌리치고 눈물을 닦으며 하은철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응급실은 피 냄새가 진동했다.하경철의 가슴에 박힌 총알은 꺼냈다. 총알은 흰색 쟁반 위에서 유난히 눈부셨다.이서는 빠른 걸음으로 하경철 앞에 다가갔다. 입을 열기도 전에 눈물이 이미 떨어졌다.“할아버지…….”하경철은 이서의 부름에 눈동자가 커졌다.그는 손을 들어 이서를 쓰다듬으려 했지만, 팔은 천근만근처럼 무거워 도무지 들 수 없었다.“이서야…… 할애비가…… 네 할머니의 부름을 들은 것 같아…… 우리 곧 만날 거야…….”“안 돼요, 할아버지, 안 돼요…….”생사 앞에서 그 어떤 말도 힘이 없다는 것을 이서는 그제야 깨달았다.“너무 슬퍼하지 마, 할애비…… 할애비는 살 만큼 살았다…… 네가 은철과 결혼해서 내 소원을 이루었더라면, 난 아마도 지금까지 살지도 못했을 거야…….”“할아버지…….”“이서야, 할애비 곧 떠날 거야. 떠나기…… 전에 이 할애비 소원 하나 들어줄 수 있겠냐?”이서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하경철의 입가에 드디어 가벼운 미소가 지어졌다.“그래…… 그래…… 할애비가 이뻐한 보람이 있네…….”“할아버지.”“은철아, 이리 와…….”하은철은 입술을 오므리고 다가왔다.그의 몸도 심하게 떨렸지만 꾹 참았다.“할아버지, 무슨 일이세요?”“손 줘봐!” 하경철은 힘겹게 손을 들었다.하은철은 급히 손을 할아버지에게 건네주었다.할아버지는 또 이서에게 말했다.“이서야…….”이서도 얼른 손을 하경철에게 건네주었다.하경철은 힘겹게 두 사람의 손을 함께 포개놓으려고 했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그는 생명의 기운이 점차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는 두 젊은이의 손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었다.“이서야, 내 마지막 부탁이야…… 은철 옆에서 함께 해줘라. 이 녀석을 너에게 맡겨야 내…… 내가 안심하고…… 갈 수 있을 거 같아.”하경
‘아버지가 북성시를 떠났을 때 하씨 집안과 깔끔하게 인연을 끊었어야 했어.’같은 시각, 질투에 불타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윤수정이었다.‘뻔뻔한 년, 영감쟁이 돌아간 틈을 노려 대놓고 오빠를 꼬시다니. 오빠는 왜 이 여우 손에 놀아나는 거야?’“오빠, 할아버지…… 어떻게…… 이렇게 가실 수 있어?” 윤수정은 이서처럼 울기 시작했다.그러나 하은철은 그녀의 울분을 들어줄 마음의 여유 같은 건 전혀 없었다.“조용히 해. 옆에서 징징대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잖아!”운수정은 눈물을 훔치는 동작을 멈췄다.“이서야.” 하은철은 이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목소리는 한껏 부드러웠다.“일어나, 집에 들어가 좀 쉬어. 너무 자책하지 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거 너와 아무 상관없어. 너 잘못 아니라고.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모두 민호일 그놈 짓이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이서는 맥없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나 여기 있을게. 할아버지 마지막 가시는 길 배웅해드리고 싶어.”하은철과 파혼까지 한 마당에 자리를 지킬 명분은 없지만, 이서는 이것저것 잴 여유가 없었다. 다만 할아버지 마지막 가시는 길에 최선을 다해 모시기로 마음먹었다.할아버지가 민호일에게 살해된 건 맞지만, 그래도 그녀만 아니었다면 할아버지가 이렇게 돌아가시지 않았을 테니.‘할아버지를 편히 보내 드려야 해…….’그래야 그나마 자기 마음속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것 같았다.하은철은 이서가 이대로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먼저 좀 들어가 쉬어. 그래야 장례를 치를 기운이 있지 않겠어?”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라, 이서는 하은철의 말대로 먼저 집에 가 쉬기로 했다.하은철은 즉시 사람을 보내 이서를 집으로 바래다주었다.이서가 떠나는 것을 확인한 지환은 비상계단 뒤에서 나와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이서를 뒤따라갔다.이서가 자리 뜬 것을 확인한 윤수정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그러고는 코를 훌쩍거리며 하은철의 곁으로
하은철이 보낸 사람은 이서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이서는 일찌감치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서경화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갔다.기사는 이서를 알뜰살뜰 살피는 서경화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아주머니는 살뜰한데, 남편은 어디 간 거야? 당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참 이상해.”기사가 차를 몰고 나간 뒤 얼마되지 않아 방금 전 그가 주차했던 위치에 다른 차 한 대가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주차했다.곧 차문이 열리고, 지환이 차 안에서 나와 집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거실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는 이서를 껴안았다.따뜻하면서도 익숙한 품에 안긴 이서는 지환의 품 안을 필사적으로 파고들었다.지환은 이서의 등을 애틋하게 쓰다듬으며 아무 말없이 조용히 안아줬다.지금은 조용히 옆에 있어 주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지환 품에 안긴 이서는 드디어 깊은 잠에 들었다.눈물로 얼룩진 품속의 이서를 보니 지환은 마음이 아려왔다.이서에게 하경철은 정말 특별한 의미를 가진 사람이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으니 아마 오랜 시간이 걸려야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그는 가볍게 이서를 안고 2층으로 올라갔다.침실에 도착하자, 동작은 더욱 가볍고 부드러웠다. 비록 그의 동작이 이미 충분히 가볍고 부드러웠지만 이서를 침대에 눕히는 순간 품 안의 사람은 불안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지환은 몸을 숙여 이서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이서는 그제야 찌푸린 미간을 살짝 폈다.지환의 눈동자 속에 깃든 긴장도 서서히 풀렸다.그는 침대 옆에 앉아 태블릿을 들고 민호일의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갑자기 전화가 울렸다.지환은 발신자 번호를 슬쩍 확인하고는 받지 않았다.하은철의 전화였다.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바로 하은철이다.그는 자기 기분을 참지 못하고 그를 죽일까 봐 두려웠다.그와 이서 두 사람 사이의 가장 큰 장애물을 하은철이 만든 셈이다.핸드폰이 계속 울렸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그가 나타나지 않는 것도
심유인과 소민찬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가까스로 하버드에 합격했다고?’‘허풍 떠는 거 아니야?’ “정말 하버드 대학교 졸업생이라고요? 하버드 학원 출신이 아니고요?” 현태는 진심 어린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저는 하버드 대학교 졸업생이 맞습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직접 조사해 보셔도 되고, 홈페이지에서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두 사람은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핸드폰을 꺼내 하버드 대학교 홈페이지를 검색했다.두 사람은 약간의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으나, 홈페이지 링크를 누르자마자 우수한 동문의 행렬에 있는 현태의 얼굴을 발견했다.이를 믿을 수 없는 것은 이지숙도 마찬가지였다.‘정말... 사진 속의 사람이 현태 씨라고?!’ ‘말도 안 돼!’‘소민찬이 어느 대학교에 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Y국에 있는 대학교 출신일 거야. 학문도, 능력도 없는 재벌 2세들이 어디서 신분 세탁을 하는지는 불 보듯 뻔한 거니까.’ Y국의 학위는 이수하기가 가장 수월해서 누구나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외부 사람은 분명히 알지 못해서 겁을 먹기 일쑤였다.심유인은 원래 소민찬의 학력을 빌미로 현태를 놀라게 하려 했다.하지만 놀래키기는커녕 본인이 놀라게 된 셈이었다. 심유인은 곧 문제점을 발견했다.“... 하버드 대학교에 체육생으로 입학한 게 아니네요? 전공은 물리학이랑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아니, 임현태 씨는 체육에 타고난 거 아니었나요? 왜 물리학을 전공한 거죠?”“아, 시험 봐서 들어간 게 아니라, 부정 입학이었나 보네요, 그렇죠?” 소민찬은 심유인의 말을 듣고, 혈색을 띠며 현태의 학력을 비웃었다.“하하, 유인아, 그런 건 부정 입학이나 비리가 아니라 기부라고 하는 거야.”“임현태 씨, 입학하는 데 얼마가 필요하던가요?”“하하, 하 대표님과 대체 무슨 사이길래 그렇게 아낌없이 돈을 쓰는 거죠?” “저는 학력을 산 적도, 학력을 위해서 돈을 쏟아부은 적도 없습니다. 정당하게 시험으로 합
심근영이 얼른 말했다.“그래, 내가 경솔했군. 하지만 현태는 내 말의 뜻을 알 거야.” “우리 소희는 어깨를 들지도, 손을 쓰지도 못해. 이 아이와 서로 보완될 수 있는 사람을 찾았으니, 아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모두 화기애애한 웃음을 짓는 반면, 옆에 있던 심유인과 소민찬만이 웃지 못했다. 더욱이 소민찬은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 사실, 소민찬이 여기에 온 것은 심유인이 돈을 주면서 자신의 남자 친구 역할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즉, 소민찬은 여기에 와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만 하면 된다는 것. 하지만 지금의 소민찬은 웃음거리로 전락했으니, 그가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생각한 소민찬은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하지만 심유인은 곧장 가서 소민찬을 끌어당겼다.“어디 가요?” 소민찬은 이미 주방에 도착한 심근영 일가를 힐끗 보았는데, 그들은 소민찬과 심유인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소민찬이 목소리를 낮추었다.“당연히 가야지! 왜, 계속 남아서 네 사촌 동생의 남자 친구한테 굴욕이라도 당하라는 거야?!” “저는... 저 사람이 그저 운전기사인 줄 알았다고요.”“일단 진정해 봐요. 어쨌든 민찬 씨는 소씨 가문의 사람이잖아요.” “소씨 가문의 도련님이 한낱 경호원보다 못하겠어요?” 소민찬은 분명 소씨 가문의 사람이지만, 소태성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더군다나 소지엽이야말로 소태성 같은 사람인데, 소민찬이 어떻게 명함을 내밀 수 있겠는가? 이것은 소민찬이 가족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외국으로 내몰린 이유이기도 했다. 심지어 이번에는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또 소태성에게 즉시 떠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지만 심유인이 시선과 체면이 하늘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 소민찬은 난감해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봤자 나는 소씨 가문의 도련님일 뿐이야. 사람을 죽일 듯이 때리는 사람은 당해낼 수 없다고.” 심유인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가요, 저 사람들의 기세를 제대로 꺾어놓자고요.”
“엄마, 뭔가 오해하신 것 같아요. 현태 씨가 왜 그 돈을 은행에서 대출받았다고 생각하세요? 현태 씨의 돈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소희의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심유인이었다.“소희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운전기사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이 있겠어?” 소희도 심유인을 따라 웃기 시작했다.“언니, 현태 오빠가 누구의 운전기사인 줄 알고나 말하는 거예요?” “뭐?”심유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이서 언니예요.”“이제 이해가 좀 되세요?”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심유인의 표정을 보고 말을 덧붙였다.“현태 오빠가 운전기사인 건 명백한 사실이에요. 하지만 또 다른 직업도 있어요. 그건 바로 이서 언니를 보호하는 거죠.” “운전기사일 뿐만 아니라, 경호원이란 말이에요.” 심유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시큰둥하게 말했다.“흥, 그게 뭐 어쨌다고 그래? 기껏해야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하는 사람인 거잖아. 우리 집에도 경호원이 있어. 경호원이라 해봤자 한달에 몇백만원을 버는 게 전부일 텐데, 90억짜리 헤어샵을 사는 게 말이나 돼?” 소희는 일부러 자랑하는 것 같아서 망설였지만, 현태의 진짜 과거를 털어놓기로 했다.“허, 몇 년 동안 UFC의 챔피언 자리를 지킨 사람한테, 몇십억이 무슨 대수라고 그러세요? 혹시 꿈이라도 꾸는 거예요?” “UFC?!”심유인은 격투기 분야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UFC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소희는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듯 말했다.“모르면 인터넷에 찾아보시던가요.”“언니, 제가 언니의 속셈을 모를 줄 알아요? 현태 오빠가 평범한 운전기사라고 생각해서 일부로 언니의 남자 친구도 부른 거잖아요.” “저희 부모님께는 남자 친구를 소개하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은 언니의 남자 친구와 제 남자 친구를 비교하고 싶은 거잖아요, 안 그래요?” “이런 말까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언니가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것 같아서 말씀해 드릴게요. 제 남자 친구가 언니의 남자 친구보다 돈이 더 많을
현태는 설명하기 시작했다,“제가 그 헤어샵을 인수하긴 했지만, 사모님께 드릴 거거든요.” “앞으로는 사모님께서 그 샵의 사장님이십니다. 미용은 하고 싶을 때 하시면 됩니다.”심씨 가문에는 전속 미용사가 있었지만, 꽤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게다가 이지숙이 미용 기계를 사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어떤 시술을 두세 달이나 반년 정도 지나야 다시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미용 기계에 먼지만 앉지 않겠는가?결국 이지숙은 헤어샵에 가서 시술받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헤어샵에 가는 것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시간을 예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가끔 일이 생겨서 시간을 놓치면, 다시 예약을 잡아야만 했다.이지숙은 진작에 헤어샵을 인수하려고 했는데, 줄곧 자신에게 적합한 헤어샵을 찾지 못했다.이지숙은 현태가 선택한 헤어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하지만 그 샵의 사장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외국에서도 적지 않은 명성을 떨치던 터라 온 가족이 외국으로 이사하기도 했다. 이지숙은 이미 그 사람과의 연락을 시도했지만, 끝내 연락이 닿지는 않았고, 모든 일은 흐지부지되었다. 그런데 바로 오늘, 생각하던 일이 이루어진 것이었다.심유인은 ‘말도 안 돼’ 라는 말만 연신 해댔다.“말도 안 돼요! 임현태 씨는 그냥 운전기사잖아요. 대통령을 위해 운전한다고 해도 헤어샵을 살 수는 없을 거라고요!”그 헤어샵은 심유인도 아는 곳이었다.‘거긴 적어도 100억은 있어야 인수할 수 있는 곳이라고!’ 이지숙도 마음속에 품었던 호기심을 드러냈다.“이 샵의 사장이 계속 외국에 있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그 사람하고 연락한 거죠?” “아, 그 부분은 하 대표님께서 힘써주셨습니다. 마침 하 대표님께서 그 샵의 사장님과 구면이라고 하시더군요. 제가 하 대표님의 곁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장님께서 흔쾌히 샵을 양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지숙이 물었다.“하 대표가 이 일에 직접 나섰다고요?” “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순조롭
심유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고작 한 세트가 다예요?”“그래도 이해는 해드릴게요. 이게 능력 범위 내에서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제품이었을 테니까요. 800만원, 900만원을 저축하려면 몇 개월은 걸려야 하잖아요, 그렇죠?” 이지숙이 곧장 입을 열었다.“유인아, 그게 무슨 말이니? 선물은 금액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거란다.” “그래.”심근영도 현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네 숙모를 위해 스킨케어 제품을 골랐다는 건, 충분히 마음을 썼다는 증거란다.”심유인이 입을 삐죽거리자,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아무리 값비싼 선물보다 마음이 중요하다지만, 조금 쑥스러워서 다른 선물도 준비해 왔습니다.”심유인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그 선물도 화장품은 아니겠죠? 또 몇백만원짜리인 건가요?”“유인아!”이지숙은 다소 불쾌해졌지만, 성격이 좋은 현태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아닙니다, 이번 선물은 스킨케어 제품보다 조금 비싼 거거든요.”현태는 이 말을 끝으로 작은 선물 상자를 꺼냈다.심유인이 목을 길게 빼며 재촉했다.“숙모, 어서 열어보세요. 목이 빠질 것 같은데, 대체 뭐예요?” 이지숙은 손에 쥔 작은 상자를 묵묵히 바라보았다.‘꽤 가벼워. 아무래도 큰 선물은 아닌 것 같아.’“밥부터 먹고 열어보자꾸나.” “지금 열어보시죠. 심유인 씨도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신 모양인데요.” 현태가 이지숙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심유인이 경멸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방금 그 스킨 케어 제품보다 조금 더 비싼 선물을 꺼내면, 내가 감탄한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허, 정말 웃겨.’‘저것도 고작 몇백 만원짜리 선물일 뿐일 거야.” “숙모, 선물한 사람도 저렇게 말하잖아요. 어서 열어보세요!”이지숙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선물 상자를 열자마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스킨케어 제품이 아니라...’‘작은 증서?’상자를 또 한 번 확인한 이지숙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이건.
“그래, 네 남자 친구도 같이 봐주마.”심근영이 대답했다.“같이 식사하자꾸나, 그럼 된 거지?” 심근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심유인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감사합니다, 삼촌, 역시 제게 정말 잘해주시네요.”소희는 그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연기가 계속될 모양이군.’ “삼촌, 민찬 씨가 선물도 사 왔어요. 이것 좀 보세요!”심유인은 심근영을 끌고 선물 더미 앞에 다다랐고, 이지숙에게 보여줬던 선물 세 개를 집어 들었다.심유인은 현태가 가져온 선물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심근영은 심유인의 말을 듣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마음은 고맙지만, 우리는 네 친부모가 아니잖니. 네 남자 친구가 우리를 위해 이렇게 많은 돈을 쓰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구나.”“우리 회사에 가서 돈을 받고, 같은 값어치의 답례품을 사주도록 하렴.” 심유인은 순간적으로 너무 기뻐서 눈꼬리를 치켜들었다.사실 그 선물들을 산 사람은 심유인이었는데, 그녀는 수중에 그렇게 큰돈이 없어서 모두 신용카드와 할부로 결제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심씨 가문의 회사에 가서 돈을 받으라니!심유인은 이 기회에 카드 빚을 메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 더 챙길 수도 있었다. 나중에 누군가 물어본다면, 민찬에게 답례 선물을 산 것이라고 하면 그만일 테니 말이다.생각할수록 심유인은 점점 더 흥분했고, 심근영이 이미 허리를 숙여 선물 상자를 하나 집어 든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 안에는 뭐가 들었지?”심유인은 심근영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말했다.“삼촌!” 심근영이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왜?” “그게...”심유인은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안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는 다른 사람이 절대 알면 안 돼.’ ‘적어도 심소희의 남자 친구라는 사람은 절대 알면 안 된다고!’ “소희의 남자 친구분도 선물을 가져왔다고 들었어요. 아직 그 선물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했는데, 그것부터 열어 보는 게 어떨까요?” 심근영은 현태를 바라보았다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심유인은 즐거워했다.“와, 가난하긴 해도 염치는 있으신가 보네요. 하지만 그게 유일한 장점이겠죠?” 선물은 현태가 스스로 준비한 것이기에, 소희도 현태가 무슨 선물을 샀는지 몰랐다.그래서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 소희는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오빠, 무슨 선물을 샀는데요?”‘소민찬보다 못한 선물이면 큰일인데.’ 소희는 선물로 심유인과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어쨌든 현태가 부모님을 보러 오는 날이니, 선물의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현태가 심씨 가문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소희는 현태가 심씨 가문의 권세나 재물 탓에 손가락질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우선 들어가자. 곧 알게 될 거야.”이지숙도 계속 밖에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말했다.“그래요, 무슨 얘기든 들어가서 하자고요.”고개를 끄덕인 소희가 현태의 선물을 들어주려 하자, 현태가 말했다.“괜찮아, 내가 들게.”이 세심한 배려는 곧장 이지숙의 눈에 띄었는데, 여자는 본래 본능적인 행동을 가장 신경 쓰기 마련이지 않은가?현태의 행동을 본 이지숙은 소희가 거짓말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겉으로 보기에는 덩치도 크고 투박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의외로 세심한 면이 있네?’이렇게 생각한 이지숙은 현태를 다소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하지만 현태는 이지숙의 반응이 조금 변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거실로 들어서자, 이지숙은 고용인에게 심근영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사실, 심근영은 일찍 깨어났기에,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심근영이 시간을 질질 끌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2층에서 현태를 관찰했기 때문이었다.고용인의 동정을 들은 심근영이 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곧 나가도록 하지.” 심근영은 고용인이 떠난 후에야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그제야 현태의 생김새를 똑똑히 보았다. 현태는 키가 크
‘게다가 한동안 운전기사로 일한 적도 있지만, 월급은 적지 않았어. 한 달에 2천만원으로 시작했고, 윤 대표님께 일이 생기면 월급도 더 올라갔으니까.’“저분은...”현태는 상대의 신분을 확실히 알아본 후, 어떤 태도로 대할지 고민하기로 했다. 소희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현태를 바라보았다.“정말 몰라서 그래요?”현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알아야 해?” 소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나한테 사건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미친 듯이 날뛰던 사람이잖아요!’ ‘대체 왜 심유인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내 사촌... 언니예요.”소희는 심유인과 가족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언니도 오늘 남자 친구를 데려왔더군요.” “사촌 언니? 소희 씨의 친언니가 아니고?” 소희가 낮게 불평을 내뱉었다.“아니에요, 우리 언니일 리가 없잖아요!”“그럼 왜 남자 친구를 데리고 소희 씨 집에 온 거야? 부모님이 안 계셔서 그런 거야?” 이 말을 들은 소희는 하마터면 웃음을 참지 못할 뻔했다. 특히 현태의 그 어리숙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은 일부러 그런 것처럼 보이게 했다. 심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다.“말이면 다인 줄 알아요?!” “제 남자 친구가 틀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소희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일반적인 경우에는 남자 친구를 부모님께 소개하잖아요. 언니처럼 남의 집으로 달려오는 게 아니고요.”“잘 모르는 사람들은 언니한테 부모가 없어서 남의 부모에게 허락받는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결국 이지숙이 나선 후에야 유인의 난처함은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어서 들어가자꾸나, 아버지께서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계셔.”“네, 엄마.” 소희는 현태의 팔짱을 끼고 심씨 가문의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몇 걸음도 안 걸었는데, 금세 정신을 차린 심유인이 또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잠깐만, 소희야,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어쨌든 오늘은 네 남자 친구가 삼촌과 숙모를 처
심유인은 한참이 흘러도 소희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갑자기 따분해졌다. “소희야, 네 남자 친구는 언제 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안 오는 게 좀 이상하네. 설마 별장에 처음 오는 거라서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이렇게 작은 곳에서 길을 잃으면 운전기사를 할 수 있겠어요?”심유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 자랑스러운 표정은 뭐야?’‘운전기사인 남자 친구를 두고도 창피하지 않다 이거야?’‘허! 심소희, 순진하긴.’유인이 막 입을 떼려던 찰나, 밖에서 고용인의 성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사, 사모님, 아가씨의 남자 친구분께서 오셨습니다!” ‘드디어 주인공이 나타나는구나!’심유인은 당사자인 소희보다 더 초조해하며 먼저 달려 나갔다.‘운전기사라더니, 몰고 온 차가 고용주 명의인 건 아니겠지?’ 밖으로 나간 유인은 마침내 차에서 내린 현태를 마주했다.그의 옷차림을 본 순간, 유인은 웃음을 터뜨렸다.‘풉, 그냥 티셔츠에 트레이닝 팬츠를 입고 온 거야?’‘여자 친구의 부모님을 만나러 오면서도 저런 옷을 입고 오다니, 비웃음을 당하려고 작정한 건가?’ 하지만 눈살을 찌푸린 건 소희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현태의 체면이 깎일까 봐 걱정한 것이 아니라, 현태가 자기 부모님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할까 봐 걱정한 것이었다. 소희는 빠르게 현태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그저께 양복도 사줬는데, 왜 양복이 아닌 캐주얼복을 입고 온 거예요?” 현태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나도 양복을 입고 오려고 했지. 그런데 그 옷은 오래 입으면 불편하더라고. 소희 씨의 부모님을 뵈면서도 온 마음을 옷에 쏟을까 봐 걱정돼서 이렇게 입었어.” “사소한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잖아?”소희가 대답했다.“그래요? 양복을 입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나 봐요. 하지만...”소희가 이지숙을 흘긋 바라보았다. 과연 이지숙의 낯빛은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물론 최선을 다해서 숨기는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현태가 불안해하며 물었다.“어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