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씨 가문은 이서가 하씨 가문에 새로운 생명과 젊은 힘을 불어넣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것이 바로, 서경화가 그토록 열심히 아가방을 꾸몄던 이유였다.‘물론 대표님께서 당장 이 방을 원래대로 바꿔놓으라고 하신다면 되돌려 놓아야 하겠지만, 장난…… 하시는 건가?’ ‘이 방은 당장 지금이 아닐지라도 분명 쓰게 될 텐데.’ “사장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당장 원래대로 되돌려 놓으라니까요!”지환의 표정이 몹시 좋지 않았다.정신을 차린 이서가 지환을 향해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되돌려 놓을 필요 없어. 이모님, 이거 이모님께서 하신 거죠?”“네, 맞습니다.”서경화는 지환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기에 순순히 이서의 질문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모님, 마음에 안 드세요? 마음에 안 드신다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습니다.”지환의 고함소리에 놀란 서경화는 방금 이서가 자신에게 한 말을 잊어버린 듯했다.“아니에요, 저는 마음에 들어요.”이서가 서경화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내, 이서가 다시 고개를 돌려 지환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나는 정말 마음에 들어. 거짓말 아니야.”지환의 볼의 팽팽한 핏줄은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였다.“먼저 내려가 계세요.”서경화는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으나, 지환의 말에 얼른 고개를 끄덕인 후, 아래층을 향해 내려갔다. 서경화가 자리를 떠나자, 지환이 마음이 아프다는 듯 이서를 껴안았다.“내일 중개소에 가서 다른 이모님 알아볼게.”“그러지 마.”지환의 품에 안긴 이서가 말했다. “이모님은 내 결심을 모르시잖아. 좋은 마음으로 하신 일이야. 너무 이모님을 탓하지는 마.” “그리고…….”이서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초롱초롱한 눈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비밀 하나 말해줄게. 나는 스웨이 작가님에게서 종종 진실하지 못한 모성애를 느껴.”“스웨이 작가님께서 나에게 투사하신 건지, 아니면 작가님께서 정말 나를 친딸로 여기셔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아무튼, 작가님과
‘진짜 해외 암시장에서 지환의 사진을 찾다니, 그것도 얼굴까지 선명한 걸로!’하경철은 사진을 받아서 확인한 후 지체없이 이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이걸 들이밀면 이서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겠지? 빼도 박도 못할 증거니까 변명도 못할 거고.’이서는 두통 때문에 아려 오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연신 문질렀다.[할아버지, 저 오늘 회사로 출근 안 했어요.]하경철은 순간 당황했다. “회사로 출근 안 했다고? 그럼 지금 어딘데?”[집에 있어요. 혹시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 거예요?]긴장했던 하경철의 말투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오, 하하하, 급한 일은 아니다. 그냥 너 보고 싶어서 그러지. 아니면 있다가 내가 너희 집에 잠깐 들르마.”[네, 오세요.]이서는 하경철에게 자기 집 주소를 전했다.하경철은 이 말을 듣고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여기는 너희 부모님이 사시는 그 동네가 아니냐? 너도 거기 사니?”윤재하 성지영 부부의 집은 하경철이 과거에 사준 것이었다.그래서 그는 그 집이 어느 동네에 있는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그가 알기로는 그 동네의 집은 결코 가격이 싸지 않았다.‘이서는 줄곧 자기 남편이 회사 평사원일 뿐이라고 말했는데, 일개 평사원이 이 정도 가격의 대저택을 살 정도의 돈이 있다고? 이서가 사는 것도 불가능한데.’하경철은 이서의 경제 상황도 파악하고 있었다.현재 윤씨 일가의 모든 돈은 윤재하 부부의 수중에 있다.‘이서한테는 그 정도 큰 돈이 없지. 생일 선물은커녕 살기도 꽤나 팍팍할 텐데.’GM 그룹을 인수하고 나서 회사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 나서야 이서에게 비로소 경제적 여유가 생겼다.‘이런 대저택을 구입하는 것은 이서 능력으로는 힘들 테고, 그게 아니면 이서 남편이 살 수밖에 없을 텐데.’하경철은 계속 드는 의심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수화기 너머의 이서는 하경철의 속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상냥했다.[네, 할아버지, 언제쯤 도착하세요? 미리 준비하고 있으려고요.]하경철
한 시간 여 후에 하경철이 이서가 사는 전원주택 입구에 나타났다.이서가 직접 문 앞까지 가서 하경철을 맞이했다.“할아버지, 어서 오세요.”“내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건 아니지?” 하경철은 주변을 여기저기 살피며 무심한 듯 질문했다.“네 남편은 지금 집에 있니?”“그이요…… 출근했어요. 정말 죄송해요, 할아버지. 모처럼 시간 내셔서 식사하러 오셨는데……. 여태 일정조정을 했는데도 결국 시간을 못 냈어요.”이서는 하경철 앞에서 난처해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최근 이서는 하이만 스웨이의 일을 돕느라 바빠서 할아버지와 지환이 함께 만나 식사할 일정을 마련하지 못했다.“괜찮다, 밥은 언제든 먹으면 되지. 젊은 사람들이 바쁘게 지내는 것은 오히려 좋은 일 아니냐? 그래도 너 사는 거 보고 싶어서 오늘 특별히 시간 내서 왔다. 사실 네 남편은 안 봐도 돼. 네가 행복하고 즐겁게 지내는 것을 볼 수만 있다면 할아버지는 그걸로 된다.”하경철은 이렇게 말하면서 이서의 집으로 걸어갔다.“빨리 이 할애비랑 지금 너 어찌 사는지 보러 가자.”“네.”이서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들어갔다.그들이 모두 눈치채지 못한 곳에서 분노에 가득 찬 한 쌍의 눈이 집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집 안에 들어서자 하경철은 이 집이 비록 하씨 집안의 저택만큼 호화롭지는 않지만, 곳곳에 아늑하고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하마터면 이서를 손자 며느리로 삼겠다는 수년간의 집념을 포기할 뻔했다.“오늘 보니 아주 행복하게 결혼생활하고 있는 것 같구나.”‘사실 집을 보면 결혼생활이 어떤 지 가장 확실히 알 수 있지.’‘항상 싸우는 부부의 집이 달콤하고 따스할 리 없고, 행복하고 원만한 결혼생활을 하는 부부의 집이 지저분할 리가 없지.’이서는 참지 못하고 웃기 시작했다. 입가에 옅은 미소가 배어 났다.“그렇죠? 저희가 가끔 티격태격하지만 다행히 매번 순조롭게 해결방법을 찾는 편이예요.”‘결혼의 본질은 바로 이거지. 서
“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군.” 민호일은 총으로 이서의 머리를 힘껏 내리치고는 뼈에 사무치는 딸의 불행에 대해 이서의 살을 씹고 뼈를 갈아 마시는 처절한 복수를 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의 피맺힌 원한을 다 갚을 수는 없다.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눈빛에 살기가 등등하여 이서를 쏘아보았다.이서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민호일을 자극시키지 않으려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이미 일은 벌어졌고, 이제 와서 대표님이 저를 죽여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차라리 제가 대표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지 생각해 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이서는 이렇게 말하면서 곁눈질로 이미 몰래 경찰에 신고한 서경화를 바라보았다.서경화의 빠른 대처 덕분에 이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더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결정적인 순간에 서경화가 뜻밖의 위험에 직면해서도 이렇게 침착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니가 나를 위해 뭘 할 수 있는데?!”민호일의 분노한 목소리에 이서는 다시 민호일을 바라보았다.“네까짓 게 나를 위해 뭐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바로 너 때문에, 내 딸이 미쳤고, 아내가 감옥에 들어갔고, 내 회사도 없어졌어!”“네가 우리 가족을 망쳤어! 너도 똑같이 패가망신을 맛보게 될 거야!”이서가 입을 열려고 하는 찰나에 하경철이 먼저 이서 앞으로 나섰다.“이봐, 민 대표, 마음을 좀 가라앉히게. 이서의 말도 일리가 있네. 자네가 이렇게 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이 더 복잡해질 뿐이야.”“내 말 듣고 총 내려놔. 자네 회사 일, 하씨 집안에서 나서서 해결할 수 있어. 우리 집안이 이정도 능력이 있다는 것만 믿어주게.”이서의 이마를 겨눈 총구가 약간 느슨해지자, 이서는 민호일을 설득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돌아서며 말했다.“맞아요, 민 대표님, 4대가문 중 하나로 어렵게 일군 민씨 가문이 이렇게 없어지는 걸 원치 않으시잖아요?”하경철과 이서의 설득에 민호일의 분노가
이서는 그들의 표정을 살피며 어쩔 수 없이 말을 이어갔다.“그 사람은 제 남편이 다니는 회사의 이전 사장님이예요. 그 분이 저를 돕고 있는 이유는 설명하기가 좀 복잡한데, 간단히 말하자면, 그 사람 때문에 저희 부부가 하마터면 이혼할 뻔 한적이 있어서 미안한지 저희한테 잘해줘요. 마음의 빚이 있나 봐요. 그래서 저를 돕는 거예요.”민호일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다시 물었다.“지금 네가 하는 말이 모두 사실이냐?”이서는 어쩔 수 없이 말을 이어갔다.“제가 민대표님을 속여서 뭐하겠어요? 생각해 보시면, 제가 만약 하은철의 작은아버지와 관계가 깊다면, 처음부터 GM그룹을 위해 여기저기 남에게 부탁하러 다닐 필요가 있었겠어요?”이서의 이 말은 민호일을 설득하는데 성공했지만 하경철은 여전히 이서의 말을 다 믿을 수 없었다.하경철은 지환의 사람됨이 좋지 않다는 것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정말 이서와 그녀의 남편의 감정을 깨지도록 만든 적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가 의도한 짓임에 틀림없다.하경철이 아는 지환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이서와 그의 남편에게 미안해서 만회하기 위한 도움을 줄 리가 없는 사람이었다.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지환이 이서를 돕고 있는지 확실한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특히 지금 같은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는 더 그랬다.“하하하하하.” 민호일은 갑자기 머리를 쳐들고 크게 웃었다.“나는 네가 하은철의 작은아버지와 관계가 있든 말든 상관없어. 어차피 오늘은 너 죽고 나 죽는 건데 내가 뭐가 더 무섭겠어?”그는 이서에게 다시 한번 총구를 겨누며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이서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지만 어느새 민호일의 뒤쪽으로 몰래 돌아간 서경화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하지만 황급히 시선을 돌려 민호일에게 들키지 않았다.미친듯이 뛰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이서는 민호일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려고 계속 말을 걸었다.“잠깐만요, 민 대표님, 정말 잘 생각한 거 맞죠? 지금 여기서 저를 죽이면 대표님에게도 더 이
그 자리에서 갑자기 지환을 맞닥뜨렸을 때 이서는 마치 한 줄기 희망을 본 것 같았다.“지환 씨, 빨리 할아버지를 구해요. 총에 맞으셨어…….”하경철이 지환을 보았을 때 이미 동공이 심하게 수축되고,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지환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무릎을 꿇고 하경철을 일으켜 부축해서 성큼성큼 입구로 걸어갔다.바닥에 쓰러져 있던 민호일 옆을 지날 때 민호일을 발로 한 번 냅다 걷어찼다.민호일은 이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하경철을 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미 멀어진 지환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뭐야? 윤이서 남편이 진짜 하은철 작은아버지 회사의 직원일 뿐이야? 왜 그가 하필 지금 여기 나타난 거지?”마침 민호일의 곁을 지나던 이천은 이 말을 듣고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누가 사모님 남편더러 직원이라고 말하던가요?”민호일은 이천 쪽으로 확 고개를 들었다.그는 전에 이천을 본 적이 있다.“너…… 너 하지환의 비서 맞잖아? 너는 또 왜 여기 있어?”이천은 민호일이 정말 불쌍하고 살아갈 희망도 전혀 없는 것을 알았다. 민호일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 그에게 진실을 말해 주었다.“여기가 하지환 대표의 집인데 자기 집에 일이 생겼으니 본인이 온 거죠. 이제 아시겠어요?”민호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이 상황을 들은 모든 사람이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정신없이 어떻게 된 일인지 어리둥절해하며 상황을 계산하고 있었다.이천은 그를 흘겨보고 그와 불필요한 말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입구로 가려던 참에 민호일이 이천의 허벅지를 덥석 잡고 매달렸다.“다시 한 번 똑똑히 말해봐! 도대체 여기가 누구 집이라고?”어쨌든 민호일은 윤이서가 하지환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이천은 동정의 눈초리로 민호일을 흘겨보았다.“잘 들으세요. 하지환 대표님과 윤이서 사모님 집이라고요. 이제 아시겠어요?”
시간은 조금씩 흘렀다. 응급실 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이서를 본 지환은 그녀의 얼음장 같은 손에 키스했다.“먹을 거 좀 사 올게, 얌전히 여기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이서는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지환이 자리를 비우자, 이서는 홀로 사막에 버려진 사람처럼 외롭고 쓸쓸했다. 차가운 바람이 살을 에며 그녀를 무참히 짓밟았다.머릿속에는 하경철이 쓰러지는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그녀는 불안한 듯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껴안았다.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버리려고 애썼다.‘만약 할아버지께 무슨 변고라도 생긴다면, 내가 죽어서도 용서받지 못할 거야.’‘이 세상에서 나를 진심으로 아껴준 사람은 할아버지가 처음이었어.’이서는 일찍이 하경철을 자신의 친할아버지로 생각했다.바로 이때, 복도에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졌다.곧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어떻게 된 거야? 할아버지가 왜 입원하셨어?!”하은철은 할아버지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다.그의 뒤를 따른 사람은 하도훈이었다.하도훈 역시 온 얼굴이 땀투성이였다.이서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눈물로 얼룩진 화장기 없는 얼굴 보는 사람마저 애처롭고 안쓰럽게 느꼈다. 하은철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조급해 말고 천천히 얘기해 봐.”이서는 말문을 열기도 전에, 울음이 먼저 터져 나왔다.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제대로 서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미안해……. 할아버지는 나 때문에…….”하은철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는 얼른 이서를 일으켰다.“이서야, 뭔 일인지 천천히 말해봐.”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이서는 하은철에게 들려 일어났다.병원에 막 도착한 윤수정은 마침 이 장면을 목격했다. 그녀는 열받아 돌아버릴 것 같았다.‘이러고도 네가 오빠를 꼬시지 않았다는 말이야?’‘오빠에게 찰싹 붙어 있으면서 꼬시는 게 아니라고?’수정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찌르며 고통의
의사는 이서를 향해 속수무책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심장에 총알을 맞았으니 기적이 일어난 데도 힘들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의사의 말을 전해 들은 이서는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하은철과 하도훈도 믿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선생님,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하은철은 의사의 팔을 잡았다.“뭐라도 해봐요. 아무리 비싼 의료기구라도 제가 다 공급해 드릴 테니 저희 할아버지 꼭 좀 살려주세요. 돈은 얼마나 들어도 괜찮아요. 우리 할아버지 살려주세요…….”의사는 고개를 숙였다가 하은철을 바라보았다.“하 대표님, 죄송합니다. 저희는 이미 최선을 다했습니다.”이 말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경철에게 사망선고를 내린 셈이다.삽시간에 적막감이 감돌았다.이서의 훌쩍이는 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깼다.갑자기 하은철의 격노한 목소리가 병원 복도에 울려 퍼졌다.“말도 안 돼요. 우리 할아버지 얼마나 건강하셨는데……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지금! 당장! 들어가셔서 뭐라도 해보세요!”의사는 난처했다.“진정하세요. 어르신 마지막 얼굴 보셔야지요. 얼른 들어가 보세요.”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침착한 사람은 역시 하도훈이었다.그는 하은철을 붙잡고 말했다.“어서 들어가자.”하은철은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곧 중환자실로 들어갔다.복도에는 이서와 수정만 남았다.수정은 굳게 닫힌 응급실 문을 보며 입꼬리를 치켜세웠다.하경철이 위독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그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하은철과의 결혼 길을 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 드디어 사라지게 되었으니 말이다.‘영감이 죽으면 더 이상 내가 하씨 집안으로 들어가는 걸 막을 사람이 없겠지.’하씨 집안의 작은 사모님이 되면, 첫 번째 할 일이 바로 노인네의 산소에 가서 결혼 사실을 알려주고, 그 노인네가 죽어서도 편히 못 쉬게 할 예정이다.“연기 이제 그만하지 그래?” 옆에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서를 본 수정은 대놓고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