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경철이 지환의 말에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 “지환아, 뻔히 알면서 묻는 게냐? 은철이는 느릅나무 덩어리야. 내가 족히 10년이 가까운 시간을 들여서 마침내 은철이가 이서를 좋아할 수도 있게 만들었는데, 네가 끼어든다면 은철이 그 녀석은 물러나고 말 거야!” ‘은철이가 어떻게 지환이를 이길 수 있겠는가.’지환이 웃으며 말했다.“사랑이 아닌 다른 일이었더라면 제가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경철은 이 말이 너무도 귀에 익어 거슬리는 듯했다.“꼭 은철이와 싸워야겠다는 게냐?”하경철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네.”지환이 당당하게 하경철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하경철이 화가 나서 큰 소리로 외쳤다.“주 집사!”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주 집사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예, 어르신!”“돌아가자꾸나!”“예.”주 집사는 금세 두 사람이 이야기가 틀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바삐 하경철을 부축하여 자리를 떠났다.하경철이 떠난 후, 천천히 의자에 앉는 지환의 눈빛은 너무도 냉업했다.옆방에 있던 상언이 걸어 들어와 지환의 어깨를 두드렸다.“어르신께서 네가 이서 씨의 남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시겠지?”지환이 권태로운 표정을 지었다.“한동안 숨길 수밖에 없겠어. 계속 우리를 의심하면서 조사하실 거야.” “에이, 그러게 내가 처음부터 이서 씨에게 네 정체를 말했으면 좋겠다고 했건만, 왜 지금까지 이러고 있어.”지환은 바보처럼 구는 상언을 바라보았다. 상언이 멋쩍어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맞다, 이서정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야?”지환은 문 앞을 힐끗 쳐다보았다.“당연히 그대로 되갚아줘야지.”“무슨 말인지 알겠어.”이서정의 끝은 그날 이서가 절벽에서 떨어질 것으로 기대했던 것과 같은 방식이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발을 헛디뎌 추락한 것으로 꾸며져 며칠 후에나 발견될 것이었다.“언제 갈 거야?”볼거리가 없었던 상언은 몸을 일으켜 자리를 떠나려 했다.지환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잠시만.”“처리하지 못한
방 안에 십여 초 간의 정적이 흐른 후, 이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아니면…… 대표님, 지금 당장이라도 하이먼 스웨이 여사의 거처를 색출하라고 할까요?”‘만약 여기가 M국이었더라면, 조금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거야. 그러나 H국에서는…….’‘하지만 대표님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라면!’지환이 덤덤하게 말했다. “시간 괜찮겠어?”이천은 멋쩍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지환이 몸을 일으켰다.이천이 놀라 바삐 지환의 뒤를 따랐다.“대표님, 하이먼 스웨이 여사를 찾지 않으시는 겁니까?”지환이 담배를 눌러 끄며 말했다.“네 생각은 어떤데?”이천이 어리둥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이천은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 “그럼, 계속 조사해야 할까요?”지환이 고개를 돌려 이천을 흘겨보았다.이천 역시 불안해하며 지환을 바라보았다.지환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몇 걸음 걷다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네가 끼어들 필요 없겠어.”갑자기 이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천이 지환의 발자취를 따르며 아첨했다.“대표님, 역시 대표님이십니다, 이렇게 빨리 방법을 찾아내시다니요. 대표님께서 생각하신 방법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지환이 고개를 돌려 이천을 보았다.“정말 내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이천이 절구로 마늘을 찧듯 고개를 끄덕였다.지환이 가볍게 웃었다.“하늘에 너를 제사 지내려고.”웃음기가 만연하던 이천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네?”당황하여 안색이 변한 이천을 뒤로 한 채 이미 방을 떠나버린 지환이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이서가 잠에서 깼다.이서는 충분히 조심조심 몸을 일으켰으나, 이서의 기척을 느낀 지환 역시 잠에서 깼다.“좀 더 자.”이서가 외투를 두른 채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야.”어젯밤, 지환은 아주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도 지환에게서는 담배 냄새가 짙게 나고 있었다. 비록 지환이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지만, 이서는 지
지환은 충분히 조씨 그룹에서 활개를 칠 수 있었다.지환은 비즈니스 방면에서 아주 명석했다.“여보.”지환이 미소를 지은 채 이서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거리낌 없이 물었다. “정말 회사를 바꿀 생각은 없는 거야?”이서가 말했다.“생각은 해봤는데…… 문제는 일시적으로 기대에 부합하는 회사를 찾는 것도 그렇게 쉽지는 않다는 거야.”“나, 좋은 목표가 하나 있어.”지환을 바라보는 이서의 마음속에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솟아올랐다.“설마, 외국에 있는 그 회사를 말하는 건 아니지?”이전에 이서가 생각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지환 씨가 사직을 한다면, 가장 좋은 건 지환 씨가 돌아가서 그 회사를 경영하는 거야.’‘그렇지만, 그렇게 된다면 나는 지환 씨와 장거리 부부 생활을 해야 한다는 건데…….’일 년에 겨우 몇 번만 지환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이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지환은 이서의 눈가에 번진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 회사는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거야. 내가 상속받는 것을 동의한다고 해도, 우리 아버지께서 동의하지 않으실 거야. 게다가 아주 작은 회사잖아. 나를 원한다 해도, 내가 가지 않을 거야.” 지환의 마지막 말은 이서의 마음을 완전히 놓이게 했다.“그럼, 당신이 말하는 건…….”“MH 그룹.”“콜록…… 콜록…….”이서는 하마터면 사레가 들려 죽을 뻔했다.“뭐, 뭐라고?”이서의 목표 중 하나는 윤씨 그룹을 정상으로 복귀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서는 절대 말을 꺼낼 수 없었다.지환이 자상하게 이서를 대신하여 물 한 병을 비틀어 열었다.이서가 진정하자 지환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MH그룹은 지금 YS 그룹의 압박으로 인해 그 누구와도 협력할 수 없어. 지금이 바로 우리가 틈을 타서 들어갈 수 있는 좋은 기회야.”“MH그룹이 압박을 받고 있다고?”이서가 물었다.이서가 지체 없이 차를 갓길에 세웠고, 휴대전화를 꺼내들어 MH그룹에 관한 뉴스 기사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처음
두 사람은 곧 짐을 잔뜩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다행히도 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휴대폰까지 지환에게 맡겼다. “나는 요리랑 고기를 준비할게. 자기는 들어가서 좀 더 자.”“알았어.”고개를 살짝 끄덕인 지환이 침실로 걸어들어갔다. 이서는 지환이 너무 피곤하다고 생각했을 뿐,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환이 방에 들어가자, 이서는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방 안의 지환은 잠을 청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그렇게 기억을 더듬던 지환은 결국 하이먼 스웨이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결에 전화를 받은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화가 났다. 하지만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이서가 걸어온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리며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하이먼 스웨이 여사에게 걸려온 번호는 너무도 생소했다.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성질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누구예요?!”[접니다.]지환의 목소리는 대단히 낮았기에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매튜?!”지환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린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크게 놀랐다, 지환이 해외 시장을 넓히기 위해 출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지환과 거의 연락하지 않던 하이먼 스웨이 여사였다.[저예요.]베란다 창가를 향해 걸어가던 지환은 머리가 윙윙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먼저 전화를 주다니, 텔레파시가 통한 셈이네요.”지환은 막 입을 떼려고 했으나,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의 예민함으로 말을 바꿨다.[무슨 일로 저를 찾으려 하셨어요?]“내가 부탁했던 거, 기억하죠?”사실, 지환은 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자신에게 무엇을 부탁했는지 진작에 잊어버렸다. 비즈니스로 인해 매일 수많은 사람들과 왕래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일을 아랫사람에게 맡기곤 했기 때문이었다.[따님 찾는 걸 도와 달라고 하셨던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요.”하이먼 스웨이가 일어섰다.“사립탐정의 말로는, 내 딸아이가 H국 사람에게 입양되었다고 하더군요. 예전의 4
‘이서가 그럴 리가 없어.’‘그럼, 이서는 아닐 거야. 이서는 지금 임자가 있는 몸이잖아…….’ 지환은 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중얼거리며 사실을 배제하는 것을 그저 듣고만 있었다. 연속 세 번을 중얼거리던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결국 가장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답안을 내놓았다.“이서, 윤 이서라고요?!”[네.]지환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수화기 든 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눈을 부릅떴다.“뭐라고요? 이서가 매튜의 아내라고요?!” 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겨우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자 지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네, 이서가 제 아내입니다.]“어떻게, 어떻게 된 거예요?!”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너무도 궁금하여 당장이라도 날아가 똑똑히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환이 등나무 의자에 걸터앉았다.[말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요. 그건 천천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오늘 작가님께 전화를 드린 이유는 저를 좀 도와달라고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무슨 부탁이죠?”[이서는 제 신분을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 작가님께서 저희 집에 오셔서도 비밀을 지켜주셨으면 합니다.]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침대 머리맡에 머리를 가볍게 기댔다. ”매튜, 나를 너무 난처하게 하는 거 아닌가요? 나는 이미 매튜의 신분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잖아요. 내가 가장 못하는 게 거짓말이랍니다.”지환이 입꼬리를 치켜세웠다.[작가님,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따님을 위해서라도 할 수 있으실 거예요.] “…….”‘역시 장사꾼다워.’‘사람의 심리를 이리도 정확히 포착하다니.’ “그래요, 최선을 다하죠.”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농담을 던졌다.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결코 지환은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비록 입이 거친 사람일지라도,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지환에게 있어서 외부인이자 적이었다. 그리고,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자기 사람은 최선을 다하여 보호하는 사람이었다.단지,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M국 최고의 갑부인 지환이 어떻게 이서와 함께 할 수 있었는지가 너무도 궁금할 뿐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남편분 헤어스타일이 웃겨서 그만.”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웃느라 당기는 배 위에 손을 얹었으나, 이미 이서와 결혼을 한 지환과 눈을 마주칠 수는 없었다. 분명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왠지 모르게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지환이 하이먼 스웨이 여사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는 다섯 손가락에 살짝 힘을 주었다.“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지환의 위협적인 냉기를 느낀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살짝 눈썹을 치켜세웠다. 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가볍게 웃으며 눈을 깜박거리자, 그제야 지환이 하이먼 스웨이 여사의 손을 놓아주었다.“들어오세요.”지환의 온몸은 여전히 강렬하고 무서운 카리스마를 뽐내고 있었다. 바로 이 순간,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지환에게서 걸려왔던 전화가 부탁이 아닌 경고라는 것을 깨달았다. 보아하니, 지환은 이서를 매우 아끼는 듯했다.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소리 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은 정말이지 천진난만한 천생연분의 모습이었다.세 사람이 거실에 들어서자, 이서가 하이먼 스웨이 여사에게 물었다.“작가님,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점심에 오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는데요.”지환만을 쫓던 하이먼 스웨이 여사의 시선이 부엌으로 들어선 후에야 제자리로 돌아온 듯했다. “아, 잠이 안 와서 혹시 내가 도와줄만한 게 있을까 하고 빨리 왔지. 호텔에 있으면 무료하기만 하거든.”“작가님, 그러실 필요 없으세요. 그냥 여기가 작가님 댁이다 생각하시고 편하게 계셔주세요.”“어떻게 그러겠니, 우리는 친척도, 친구도 아닌걸.”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서야, 너한테 있어서 나는 뭐라고 생각하니?” 이서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작가님께서는 저에게 정말 잘해주시잖아요. 전혀 과장 없이, 저희 부모님보다도 더 좋으신 분이라고 생각해요.” 성지영 부부는 이서가 하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서에게 최선을 다하여 잘 해줬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이서가 자신의 딸이 된다면 자연스레 지환 역시 자신의 사위가 된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그렇게 된다면 지환이 하이먼 스웨이 여사를 장모님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었다.생각만 해도 아찔한 상황이었다.그러나, 하이먼 스웨이는 반드시 이서를 수양딸로 삼고 싶었다. ‘그래야 한다면 그래야겠지.’ 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미소를 지으며 지환을 바라보았다. 지환은 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지환이 이서를 바라보았다.“여보, 작가님 말씀에 동의해?” 지환의 말을 들은 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놀라 인상을 찌푸렸다. ‘매튜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물을 줄 알다니.’ 이서는 붉은 입술을 살짝 오므린 채 혼란스러워하는 듯했다. 한참 동안이나 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보내는 기대의 눈빛을 받던 이서가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좋아요.”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웃기 시작했다.“바로 그거야, 이서야. 나의 예쁜 딸!”“어머니.”이서가 소리를 냈다. “어머니라니, 얼마나 어색해. 엄마라고 불러야지. 그렇지 않니, 지환아?” 지환은 주판을 탁탁 두드리는 하이먼 스웨이 여사를 보며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 역시 하이먼 스웨이 여사의 생각을 꺾을 수 없었다. “엄마.”“그래!”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기쁜 마음으로 용돈을 꺼내어 이서에게 건네주었다.“널 위해 준비한 거란다. 오늘, 내 소원을 이룬 셈이야.”“정말 겹경사가 따로 없구나.”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지환은 알 수 있었다. 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말하는 겹경사라는 것이 이서가 하이먼 스웨이 여사의 딸이 되었다는 것과 이서와 결혼을 한 지환이 자연스레 하이먼 스웨이 여사의 사위가 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이서는 알 수 없었기에 궁금해하며 물었다.“엄마, 다른 한 가지 경사는 뭐예요?”“당연히.”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일부러 소리를 길게 끌며 얼굴 근
지환의 도움으로 푸짐한 점심 한 끼가 완성되어 식탁 위에 올랐다.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식탁에 가득 찬 음식에 약간 놀란 듯했다.“너희가 직접 요리를 만드는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못 믿었겠는걸?” ‘이 푸짐한 요리에 지환의 공도 있다니.’ ‘쯧쯧쯧, 지환이 가정적인 좋은 남자일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모두 집밥이에요. 드셔보세요.”이서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하이먼 스웨이 여사를 바라보았다. 요리 한 입 맛본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너무 맛있다. 내가 먹어본 음식 중에 제일이야. 심지어는 우리 어머니가 하신 요리 같기도 하구나.”“우리 어머니는 요리를 아주 맛있게 하시지.”“애석하게도 내가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지는 못했지만 말이야.” “괜찮아요, 마음에 드신다면 제가 앞으로 매일 만들어 드릴게요.” “그래, 그래, 그래. 최고의 딸이구나.”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의 시선이 갑자기 텔레비전의 보도로 향했다. 이서와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서정이 죽었다고?”이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나도 이서정을 싫어하긴 했지만, 왜 이렇게 갑자기 죽은 거지?’ 텔레비전 속 여성 사회자의 목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발을 헛디뎌 절벽에서 떨어진 모양이구나.”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지환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벌을 내린 셈이죠.”지환은 시종일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단지, 이서에게 반찬을 집어줄 때만 아낌없이 발휘되는 눈 밑의 부드러움만이 지환을 피와 살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줄
심유인과 소민찬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가까스로 하버드에 합격했다고?’‘허풍 떠는 거 아니야?’ “정말 하버드 대학교 졸업생이라고요? 하버드 학원 출신이 아니고요?” 현태는 진심 어린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저는 하버드 대학교 졸업생이 맞습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직접 조사해 보셔도 되고, 홈페이지에서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두 사람은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핸드폰을 꺼내 하버드 대학교 홈페이지를 검색했다.두 사람은 약간의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으나, 홈페이지 링크를 누르자마자 우수한 동문의 행렬에 있는 현태의 얼굴을 발견했다.이를 믿을 수 없는 것은 이지숙도 마찬가지였다.‘정말... 사진 속의 사람이 현태 씨라고?!’ ‘말도 안 돼!’‘소민찬이 어느 대학교에 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Y국에 있는 대학교 출신일 거야. 학문도, 능력도 없는 재벌 2세들이 어디서 신분 세탁을 하는지는 불 보듯 뻔한 거니까.’ Y국의 학위는 이수하기가 가장 수월해서 누구나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외부 사람은 분명히 알지 못해서 겁을 먹기 일쑤였다.심유인은 원래 소민찬의 학력을 빌미로 현태를 놀라게 하려 했다.하지만 놀래키기는커녕 본인이 놀라게 된 셈이었다. 심유인은 곧 문제점을 발견했다.“... 하버드 대학교에 체육생으로 입학한 게 아니네요? 전공은 물리학이랑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아니, 임현태 씨는 체육에 타고난 거 아니었나요? 왜 물리학을 전공한 거죠?”“아, 시험 봐서 들어간 게 아니라, 부정 입학이었나 보네요, 그렇죠?” 소민찬은 심유인의 말을 듣고, 혈색을 띠며 현태의 학력을 비웃었다.“하하, 유인아, 그런 건 부정 입학이나 비리가 아니라 기부라고 하는 거야.”“임현태 씨, 입학하는 데 얼마가 필요하던가요?”“하하, 하 대표님과 대체 무슨 사이길래 그렇게 아낌없이 돈을 쓰는 거죠?” “저는 학력을 산 적도, 학력을 위해서 돈을 쏟아부은 적도 없습니다. 정당하게 시험으로 합
심근영이 얼른 말했다.“그래, 내가 경솔했군. 하지만 현태는 내 말의 뜻을 알 거야.” “우리 소희는 어깨를 들지도, 손을 쓰지도 못해. 이 아이와 서로 보완될 수 있는 사람을 찾았으니, 아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모두 화기애애한 웃음을 짓는 반면, 옆에 있던 심유인과 소민찬만이 웃지 못했다. 더욱이 소민찬은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 사실, 소민찬이 여기에 온 것은 심유인이 돈을 주면서 자신의 남자 친구 역할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즉, 소민찬은 여기에 와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만 하면 된다는 것. 하지만 지금의 소민찬은 웃음거리로 전락했으니, 그가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생각한 소민찬은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하지만 심유인은 곧장 가서 소민찬을 끌어당겼다.“어디 가요?” 소민찬은 이미 주방에 도착한 심근영 일가를 힐끗 보았는데, 그들은 소민찬과 심유인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소민찬이 목소리를 낮추었다.“당연히 가야지! 왜, 계속 남아서 네 사촌 동생의 남자 친구한테 굴욕이라도 당하라는 거야?!” “저는... 저 사람이 그저 운전기사인 줄 알았다고요.”“일단 진정해 봐요. 어쨌든 민찬 씨는 소씨 가문의 사람이잖아요.” “소씨 가문의 도련님이 한낱 경호원보다 못하겠어요?” 소민찬은 분명 소씨 가문의 사람이지만, 소태성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더군다나 소지엽이야말로 소태성 같은 사람인데, 소민찬이 어떻게 명함을 내밀 수 있겠는가? 이것은 소민찬이 가족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외국으로 내몰린 이유이기도 했다. 심지어 이번에는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또 소태성에게 즉시 떠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지만 심유인이 시선과 체면이 하늘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 소민찬은 난감해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봤자 나는 소씨 가문의 도련님일 뿐이야. 사람을 죽일 듯이 때리는 사람은 당해낼 수 없다고.” 심유인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가요, 저 사람들의 기세를 제대로 꺾어놓자고요.”
“엄마, 뭔가 오해하신 것 같아요. 현태 씨가 왜 그 돈을 은행에서 대출받았다고 생각하세요? 현태 씨의 돈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소희의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심유인이었다.“소희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운전기사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이 있겠어?” 소희도 심유인을 따라 웃기 시작했다.“언니, 현태 오빠가 누구의 운전기사인 줄 알고나 말하는 거예요?” “뭐?”심유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이서 언니예요.”“이제 이해가 좀 되세요?”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심유인의 표정을 보고 말을 덧붙였다.“현태 오빠가 운전기사인 건 명백한 사실이에요. 하지만 또 다른 직업도 있어요. 그건 바로 이서 언니를 보호하는 거죠.” “운전기사일 뿐만 아니라, 경호원이란 말이에요.” 심유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시큰둥하게 말했다.“흥, 그게 뭐 어쨌다고 그래? 기껏해야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하는 사람인 거잖아. 우리 집에도 경호원이 있어. 경호원이라 해봤자 한달에 몇백만원을 버는 게 전부일 텐데, 90억짜리 헤어샵을 사는 게 말이나 돼?” 소희는 일부러 자랑하는 것 같아서 망설였지만, 현태의 진짜 과거를 털어놓기로 했다.“허, 몇 년 동안 UFC의 챔피언 자리를 지킨 사람한테, 몇십억이 무슨 대수라고 그러세요? 혹시 꿈이라도 꾸는 거예요?” “UFC?!”심유인은 격투기 분야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UFC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소희는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듯 말했다.“모르면 인터넷에 찾아보시던가요.”“언니, 제가 언니의 속셈을 모를 줄 알아요? 현태 오빠가 평범한 운전기사라고 생각해서 일부로 언니의 남자 친구도 부른 거잖아요.” “저희 부모님께는 남자 친구를 소개하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은 언니의 남자 친구와 제 남자 친구를 비교하고 싶은 거잖아요, 안 그래요?” “이런 말까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언니가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것 같아서 말씀해 드릴게요. 제 남자 친구가 언니의 남자 친구보다 돈이 더 많을
현태는 설명하기 시작했다,“제가 그 헤어샵을 인수하긴 했지만, 사모님께 드릴 거거든요.” “앞으로는 사모님께서 그 샵의 사장님이십니다. 미용은 하고 싶을 때 하시면 됩니다.”심씨 가문에는 전속 미용사가 있었지만, 꽤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게다가 이지숙이 미용 기계를 사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어떤 시술을 두세 달이나 반년 정도 지나야 다시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미용 기계에 먼지만 앉지 않겠는가?결국 이지숙은 헤어샵에 가서 시술받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헤어샵에 가는 것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시간을 예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가끔 일이 생겨서 시간을 놓치면, 다시 예약을 잡아야만 했다.이지숙은 진작에 헤어샵을 인수하려고 했는데, 줄곧 자신에게 적합한 헤어샵을 찾지 못했다.이지숙은 현태가 선택한 헤어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하지만 그 샵의 사장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외국에서도 적지 않은 명성을 떨치던 터라 온 가족이 외국으로 이사하기도 했다. 이지숙은 이미 그 사람과의 연락을 시도했지만, 끝내 연락이 닿지는 않았고, 모든 일은 흐지부지되었다. 그런데 바로 오늘, 생각하던 일이 이루어진 것이었다.심유인은 ‘말도 안 돼’ 라는 말만 연신 해댔다.“말도 안 돼요! 임현태 씨는 그냥 운전기사잖아요. 대통령을 위해 운전한다고 해도 헤어샵을 살 수는 없을 거라고요!”그 헤어샵은 심유인도 아는 곳이었다.‘거긴 적어도 100억은 있어야 인수할 수 있는 곳이라고!’ 이지숙도 마음속에 품었던 호기심을 드러냈다.“이 샵의 사장이 계속 외국에 있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그 사람하고 연락한 거죠?” “아, 그 부분은 하 대표님께서 힘써주셨습니다. 마침 하 대표님께서 그 샵의 사장님과 구면이라고 하시더군요. 제가 하 대표님의 곁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장님께서 흔쾌히 샵을 양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지숙이 물었다.“하 대표가 이 일에 직접 나섰다고요?” “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순조롭
심유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고작 한 세트가 다예요?”“그래도 이해는 해드릴게요. 이게 능력 범위 내에서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제품이었을 테니까요. 800만원, 900만원을 저축하려면 몇 개월은 걸려야 하잖아요, 그렇죠?” 이지숙이 곧장 입을 열었다.“유인아, 그게 무슨 말이니? 선물은 금액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거란다.” “그래.”심근영도 현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네 숙모를 위해 스킨케어 제품을 골랐다는 건, 충분히 마음을 썼다는 증거란다.”심유인이 입을 삐죽거리자,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아무리 값비싼 선물보다 마음이 중요하다지만, 조금 쑥스러워서 다른 선물도 준비해 왔습니다.”심유인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그 선물도 화장품은 아니겠죠? 또 몇백만원짜리인 건가요?”“유인아!”이지숙은 다소 불쾌해졌지만, 성격이 좋은 현태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아닙니다, 이번 선물은 스킨케어 제품보다 조금 비싼 거거든요.”현태는 이 말을 끝으로 작은 선물 상자를 꺼냈다.심유인이 목을 길게 빼며 재촉했다.“숙모, 어서 열어보세요. 목이 빠질 것 같은데, 대체 뭐예요?” 이지숙은 손에 쥔 작은 상자를 묵묵히 바라보았다.‘꽤 가벼워. 아무래도 큰 선물은 아닌 것 같아.’“밥부터 먹고 열어보자꾸나.” “지금 열어보시죠. 심유인 씨도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신 모양인데요.” 현태가 이지숙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심유인이 경멸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방금 그 스킨 케어 제품보다 조금 더 비싼 선물을 꺼내면, 내가 감탄한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허, 정말 웃겨.’‘저것도 고작 몇백 만원짜리 선물일 뿐일 거야.” “숙모, 선물한 사람도 저렇게 말하잖아요. 어서 열어보세요!”이지숙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선물 상자를 열자마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스킨케어 제품이 아니라...’‘작은 증서?’상자를 또 한 번 확인한 이지숙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이건.
“그래, 네 남자 친구도 같이 봐주마.”심근영이 대답했다.“같이 식사하자꾸나, 그럼 된 거지?” 심근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심유인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감사합니다, 삼촌, 역시 제게 정말 잘해주시네요.”소희는 그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연기가 계속될 모양이군.’ “삼촌, 민찬 씨가 선물도 사 왔어요. 이것 좀 보세요!”심유인은 심근영을 끌고 선물 더미 앞에 다다랐고, 이지숙에게 보여줬던 선물 세 개를 집어 들었다.심유인은 현태가 가져온 선물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심근영은 심유인의 말을 듣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마음은 고맙지만, 우리는 네 친부모가 아니잖니. 네 남자 친구가 우리를 위해 이렇게 많은 돈을 쓰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구나.”“우리 회사에 가서 돈을 받고, 같은 값어치의 답례품을 사주도록 하렴.” 심유인은 순간적으로 너무 기뻐서 눈꼬리를 치켜들었다.사실 그 선물들을 산 사람은 심유인이었는데, 그녀는 수중에 그렇게 큰돈이 없어서 모두 신용카드와 할부로 결제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심씨 가문의 회사에 가서 돈을 받으라니!심유인은 이 기회에 카드 빚을 메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 더 챙길 수도 있었다. 나중에 누군가 물어본다면, 민찬에게 답례 선물을 산 것이라고 하면 그만일 테니 말이다.생각할수록 심유인은 점점 더 흥분했고, 심근영이 이미 허리를 숙여 선물 상자를 하나 집어 든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 안에는 뭐가 들었지?”심유인은 심근영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말했다.“삼촌!” 심근영이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왜?” “그게...”심유인은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안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는 다른 사람이 절대 알면 안 돼.’ ‘적어도 심소희의 남자 친구라는 사람은 절대 알면 안 된다고!’ “소희의 남자 친구분도 선물을 가져왔다고 들었어요. 아직 그 선물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했는데, 그것부터 열어 보는 게 어떨까요?” 심근영은 현태를 바라보았다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심유인은 즐거워했다.“와, 가난하긴 해도 염치는 있으신가 보네요. 하지만 그게 유일한 장점이겠죠?” 선물은 현태가 스스로 준비한 것이기에, 소희도 현태가 무슨 선물을 샀는지 몰랐다.그래서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 소희는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오빠, 무슨 선물을 샀는데요?”‘소민찬보다 못한 선물이면 큰일인데.’ 소희는 선물로 심유인과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어쨌든 현태가 부모님을 보러 오는 날이니, 선물의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현태가 심씨 가문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소희는 현태가 심씨 가문의 권세나 재물 탓에 손가락질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우선 들어가자. 곧 알게 될 거야.”이지숙도 계속 밖에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말했다.“그래요, 무슨 얘기든 들어가서 하자고요.”고개를 끄덕인 소희가 현태의 선물을 들어주려 하자, 현태가 말했다.“괜찮아, 내가 들게.”이 세심한 배려는 곧장 이지숙의 눈에 띄었는데, 여자는 본래 본능적인 행동을 가장 신경 쓰기 마련이지 않은가?현태의 행동을 본 이지숙은 소희가 거짓말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겉으로 보기에는 덩치도 크고 투박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의외로 세심한 면이 있네?’이렇게 생각한 이지숙은 현태를 다소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하지만 현태는 이지숙의 반응이 조금 변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거실로 들어서자, 이지숙은 고용인에게 심근영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사실, 심근영은 일찍 깨어났기에,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심근영이 시간을 질질 끌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2층에서 현태를 관찰했기 때문이었다.고용인의 동정을 들은 심근영이 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곧 나가도록 하지.” 심근영은 고용인이 떠난 후에야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그제야 현태의 생김새를 똑똑히 보았다. 현태는 키가 크
‘게다가 한동안 운전기사로 일한 적도 있지만, 월급은 적지 않았어. 한 달에 2천만원으로 시작했고, 윤 대표님께 일이 생기면 월급도 더 올라갔으니까.’“저분은...”현태는 상대의 신분을 확실히 알아본 후, 어떤 태도로 대할지 고민하기로 했다. 소희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현태를 바라보았다.“정말 몰라서 그래요?”현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알아야 해?” 소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나한테 사건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미친 듯이 날뛰던 사람이잖아요!’ ‘대체 왜 심유인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내 사촌... 언니예요.”소희는 심유인과 가족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언니도 오늘 남자 친구를 데려왔더군요.” “사촌 언니? 소희 씨의 친언니가 아니고?” 소희가 낮게 불평을 내뱉었다.“아니에요, 우리 언니일 리가 없잖아요!”“그럼 왜 남자 친구를 데리고 소희 씨 집에 온 거야? 부모님이 안 계셔서 그런 거야?” 이 말을 들은 소희는 하마터면 웃음을 참지 못할 뻔했다. 특히 현태의 그 어리숙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은 일부러 그런 것처럼 보이게 했다. 심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다.“말이면 다인 줄 알아요?!” “제 남자 친구가 틀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소희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일반적인 경우에는 남자 친구를 부모님께 소개하잖아요. 언니처럼 남의 집으로 달려오는 게 아니고요.”“잘 모르는 사람들은 언니한테 부모가 없어서 남의 부모에게 허락받는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결국 이지숙이 나선 후에야 유인의 난처함은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어서 들어가자꾸나, 아버지께서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계셔.”“네, 엄마.” 소희는 현태의 팔짱을 끼고 심씨 가문의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몇 걸음도 안 걸었는데, 금세 정신을 차린 심유인이 또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잠깐만, 소희야,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어쨌든 오늘은 네 남자 친구가 삼촌과 숙모를 처
심유인은 한참이 흘러도 소희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갑자기 따분해졌다. “소희야, 네 남자 친구는 언제 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안 오는 게 좀 이상하네. 설마 별장에 처음 오는 거라서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이렇게 작은 곳에서 길을 잃으면 운전기사를 할 수 있겠어요?”심유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 자랑스러운 표정은 뭐야?’‘운전기사인 남자 친구를 두고도 창피하지 않다 이거야?’‘허! 심소희, 순진하긴.’유인이 막 입을 떼려던 찰나, 밖에서 고용인의 성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사, 사모님, 아가씨의 남자 친구분께서 오셨습니다!” ‘드디어 주인공이 나타나는구나!’심유인은 당사자인 소희보다 더 초조해하며 먼저 달려 나갔다.‘운전기사라더니, 몰고 온 차가 고용주 명의인 건 아니겠지?’ 밖으로 나간 유인은 마침내 차에서 내린 현태를 마주했다.그의 옷차림을 본 순간, 유인은 웃음을 터뜨렸다.‘풉, 그냥 티셔츠에 트레이닝 팬츠를 입고 온 거야?’‘여자 친구의 부모님을 만나러 오면서도 저런 옷을 입고 오다니, 비웃음을 당하려고 작정한 건가?’ 하지만 눈살을 찌푸린 건 소희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현태의 체면이 깎일까 봐 걱정한 것이 아니라, 현태가 자기 부모님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할까 봐 걱정한 것이었다. 소희는 빠르게 현태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그저께 양복도 사줬는데, 왜 양복이 아닌 캐주얼복을 입고 온 거예요?” 현태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나도 양복을 입고 오려고 했지. 그런데 그 옷은 오래 입으면 불편하더라고. 소희 씨의 부모님을 뵈면서도 온 마음을 옷에 쏟을까 봐 걱정돼서 이렇게 입었어.” “사소한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잖아?”소희가 대답했다.“그래요? 양복을 입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나 봐요. 하지만...”소희가 이지숙을 흘긋 바라보았다. 과연 이지숙의 낯빛은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물론 최선을 다해서 숨기는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현태가 불안해하며 물었다.“어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