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세 사람은 같은 여학생 사랑하게 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세 사람 역시 이 사실을 몰랐기에, 서로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그러던 어느 날, 어느 공연장에서 무대 위에 있는 여학생을 가리켰을 때, 세 사람은 자신들이 같은 여학생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그때, 우리 세 사람이 같은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단다.”옛일을 떠올리는 하경철의 얼굴에서는 예전의 위엄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는 나이가 든 탓에 표정이 굼뜬 것 같기도 했다.“다른 두 사람은 당시에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만, 후에 우리 모두가 관계를 끊은 것을 보면 그 친구들도 그렇게 생각했던 게 아닌가 싶구나.”같은 여학생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세 사람의 관계는 대단히 삐걱거리기 시작했다.처음, 세 사람 사이에서는 공정한 경쟁이라는 말도 오고 갔었다. 하지만 서로 몰래 그 여학생에게 선물공세를 퍼붓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세 사람은 신사협정이 깨져버렸다는 이유로 공개적인 싸움을 시작했다. 하경철은 첫 번째 싸움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단지, 세 사람이 운동장에서 많은 학우들의 조롱과 야유를 들으며 크게 싸웠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싸움은 세 사람의 관계를 조금도 바꾸지 못했다. 오히려 그때를 기점으로 세 사람 사이의 우정은 완전히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게다가 세 사람이 자신 때문에 싸운다는 것을 알게 된 그 여학생은 학교 내의 소문을 견디지 못하고 휴학하여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그 소식을 들은 나는 반드시 여름 방학 때 그 여자를 찾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단다.”하경철의 눈에서 빛이 났다.“그런데 네 아버지 역시 그런 생각을 했던 모양이구나. 그렇게 우리 둘은 공항에서 마주치게 되었고, 또 한 번 상대방을 막기 위해 싸움을 벌였단다.”“그때는 모든 선생님과 학우들이 우리의 신분을 알고 있는 학교에서 싸운 것과는 상황
“네가 그걸 어떻게 아니? 네 아버지가 말해준 거니? 네 아버지가 또 무슨 말을 해줬니?”지환은 자신의 눈앞에서 쩔쩔매는 하경철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그 누구도 지환의 앞에서 쩔쩔매는 이 노인이 하씨 가문의 어르신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었다. “딱 한 번, 이름만 말씀해 주셨습니다.”“제가 기억력이 좋아서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하경철은 꽤 실망한 듯했다.“네 아버지는 입이 정말 무거운 사람이란다. 말하는 것은 원하지 않아 하지.”“내가 방금 어디까지 말했더라? 아, 그래. 이서의 할아버지와 결혼한 상대가 바로 나와 네 아버지가 평생을 그리워하는 사람이란다.”“두 사람의 결혼식이 있던 날, 우리 둘은 또 한 번 말다툼을 벌였단다. 서로의 잘못이라고 탓하면서 말이야.”“그날, 우리는 꼬박 두 시간이 넘게 싸웠단다. 사실, 나는 우리가 싸워서 서로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살 줄 알았어.”“다음 날 네 아버지가 가출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지.”“우리는 H국 전체를 다 뒤졌지만, 네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단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바로 그 해, 네 아버지가 연락을 해오더구나. 우리는 그제야 네 아버지가 H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지환은 하경철의 말을 다 들은 후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지환의 아버지는 자신이 왜 출국해야만 했었는지 거의 언급하지 않았었다. 게다가 지환은 가십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환은 집안의 사업을 이어받고 나서야 H국에 친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때로는 네 아버지를 존경한단다. 내가 네 아버지의 안목을 반이라도 닮아 외국으로 나갔더라면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지는 않았겠지.” “네 아버지는 H국을 떠나 고통에서 벗어났지만, 나는, 여기 남아 있었단다.”“평생을 이서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행복하게 사는 걸 지켜보면서 말이다.”“두 사람은 연이어 여러 명의 아이를 낳았단다.” “사람들도
하경철이 지환의 말에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 “지환아, 뻔히 알면서 묻는 게냐? 은철이는 느릅나무 덩어리야. 내가 족히 10년이 가까운 시간을 들여서 마침내 은철이가 이서를 좋아할 수도 있게 만들었는데, 네가 끼어든다면 은철이 그 녀석은 물러나고 말 거야!” ‘은철이가 어떻게 지환이를 이길 수 있겠는가.’지환이 웃으며 말했다.“사랑이 아닌 다른 일이었더라면 제가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경철은 이 말이 너무도 귀에 익어 거슬리는 듯했다.“꼭 은철이와 싸워야겠다는 게냐?”하경철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네.”지환이 당당하게 하경철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하경철이 화가 나서 큰 소리로 외쳤다.“주 집사!”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주 집사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예, 어르신!”“돌아가자꾸나!”“예.”주 집사는 금세 두 사람이 이야기가 틀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바삐 하경철을 부축하여 자리를 떠났다.하경철이 떠난 후, 천천히 의자에 앉는 지환의 눈빛은 너무도 냉업했다.옆방에 있던 상언이 걸어 들어와 지환의 어깨를 두드렸다.“어르신께서 네가 이서 씨의 남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시겠지?”지환이 권태로운 표정을 지었다.“한동안 숨길 수밖에 없겠어. 계속 우리를 의심하면서 조사하실 거야.” “에이, 그러게 내가 처음부터 이서 씨에게 네 정체를 말했으면 좋겠다고 했건만, 왜 지금까지 이러고 있어.”지환은 바보처럼 구는 상언을 바라보았다. 상언이 멋쩍어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맞다, 이서정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야?”지환은 문 앞을 힐끗 쳐다보았다.“당연히 그대로 되갚아줘야지.”“무슨 말인지 알겠어.”이서정의 끝은 그날 이서가 절벽에서 떨어질 것으로 기대했던 것과 같은 방식이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발을 헛디뎌 추락한 것으로 꾸며져 며칠 후에나 발견될 것이었다.“언제 갈 거야?”볼거리가 없었던 상언은 몸을 일으켜 자리를 떠나려 했다.지환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잠시만.”“처리하지 못한
방 안에 십여 초 간의 정적이 흐른 후, 이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아니면…… 대표님, 지금 당장이라도 하이먼 스웨이 여사의 거처를 색출하라고 할까요?”‘만약 여기가 M국이었더라면, 조금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거야. 그러나 H국에서는…….’‘하지만 대표님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라면!’지환이 덤덤하게 말했다. “시간 괜찮겠어?”이천은 멋쩍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지환이 몸을 일으켰다.이천이 놀라 바삐 지환의 뒤를 따랐다.“대표님, 하이먼 스웨이 여사를 찾지 않으시는 겁니까?”지환이 담배를 눌러 끄며 말했다.“네 생각은 어떤데?”이천이 어리둥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이천은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 “그럼, 계속 조사해야 할까요?”지환이 고개를 돌려 이천을 흘겨보았다.이천 역시 불안해하며 지환을 바라보았다.지환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몇 걸음 걷다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네가 끼어들 필요 없겠어.”갑자기 이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천이 지환의 발자취를 따르며 아첨했다.“대표님, 역시 대표님이십니다, 이렇게 빨리 방법을 찾아내시다니요. 대표님께서 생각하신 방법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지환이 고개를 돌려 이천을 보았다.“정말 내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이천이 절구로 마늘을 찧듯 고개를 끄덕였다.지환이 가볍게 웃었다.“하늘에 너를 제사 지내려고.”웃음기가 만연하던 이천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네?”당황하여 안색이 변한 이천을 뒤로 한 채 이미 방을 떠나버린 지환이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이서가 잠에서 깼다.이서는 충분히 조심조심 몸을 일으켰으나, 이서의 기척을 느낀 지환 역시 잠에서 깼다.“좀 더 자.”이서가 외투를 두른 채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야.”어젯밤, 지환은 아주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도 지환에게서는 담배 냄새가 짙게 나고 있었다. 비록 지환이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지만, 이서는 지
지환은 충분히 조씨 그룹에서 활개를 칠 수 있었다.지환은 비즈니스 방면에서 아주 명석했다.“여보.”지환이 미소를 지은 채 이서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거리낌 없이 물었다. “정말 회사를 바꿀 생각은 없는 거야?”이서가 말했다.“생각은 해봤는데…… 문제는 일시적으로 기대에 부합하는 회사를 찾는 것도 그렇게 쉽지는 않다는 거야.”“나, 좋은 목표가 하나 있어.”지환을 바라보는 이서의 마음속에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솟아올랐다.“설마, 외국에 있는 그 회사를 말하는 건 아니지?”이전에 이서가 생각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지환 씨가 사직을 한다면, 가장 좋은 건 지환 씨가 돌아가서 그 회사를 경영하는 거야.’‘그렇지만, 그렇게 된다면 나는 지환 씨와 장거리 부부 생활을 해야 한다는 건데…….’일 년에 겨우 몇 번만 지환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이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지환은 이서의 눈가에 번진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 회사는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거야. 내가 상속받는 것을 동의한다고 해도, 우리 아버지께서 동의하지 않으실 거야. 게다가 아주 작은 회사잖아. 나를 원한다 해도, 내가 가지 않을 거야.” 지환의 마지막 말은 이서의 마음을 완전히 놓이게 했다.“그럼, 당신이 말하는 건…….”“MH 그룹.”“콜록…… 콜록…….”이서는 하마터면 사레가 들려 죽을 뻔했다.“뭐, 뭐라고?”이서의 목표 중 하나는 윤씨 그룹을 정상으로 복귀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서는 절대 말을 꺼낼 수 없었다.지환이 자상하게 이서를 대신하여 물 한 병을 비틀어 열었다.이서가 진정하자 지환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MH그룹은 지금 YS 그룹의 압박으로 인해 그 누구와도 협력할 수 없어. 지금이 바로 우리가 틈을 타서 들어갈 수 있는 좋은 기회야.”“MH그룹이 압박을 받고 있다고?”이서가 물었다.이서가 지체 없이 차를 갓길에 세웠고, 휴대전화를 꺼내들어 MH그룹에 관한 뉴스 기사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처음
두 사람은 곧 짐을 잔뜩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다행히도 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휴대폰까지 지환에게 맡겼다. “나는 요리랑 고기를 준비할게. 자기는 들어가서 좀 더 자.”“알았어.”고개를 살짝 끄덕인 지환이 침실로 걸어들어갔다. 이서는 지환이 너무 피곤하다고 생각했을 뿐,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환이 방에 들어가자, 이서는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방 안의 지환은 잠을 청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그렇게 기억을 더듬던 지환은 결국 하이먼 스웨이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결에 전화를 받은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화가 났다. 하지만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이서가 걸어온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리며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하이먼 스웨이 여사에게 걸려온 번호는 너무도 생소했다.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성질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누구예요?!”[접니다.]지환의 목소리는 대단히 낮았기에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매튜?!”지환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린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크게 놀랐다, 지환이 해외 시장을 넓히기 위해 출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지환과 거의 연락하지 않던 하이먼 스웨이 여사였다.[저예요.]베란다 창가를 향해 걸어가던 지환은 머리가 윙윙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먼저 전화를 주다니, 텔레파시가 통한 셈이네요.”지환은 막 입을 떼려고 했으나,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의 예민함으로 말을 바꿨다.[무슨 일로 저를 찾으려 하셨어요?]“내가 부탁했던 거, 기억하죠?”사실, 지환은 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자신에게 무엇을 부탁했는지 진작에 잊어버렸다. 비즈니스로 인해 매일 수많은 사람들과 왕래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일을 아랫사람에게 맡기곤 했기 때문이었다.[따님 찾는 걸 도와 달라고 하셨던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요.”하이먼 스웨이가 일어섰다.“사립탐정의 말로는, 내 딸아이가 H국 사람에게 입양되었다고 하더군요. 예전의 4
‘이서가 그럴 리가 없어.’‘그럼, 이서는 아닐 거야. 이서는 지금 임자가 있는 몸이잖아…….’ 지환은 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중얼거리며 사실을 배제하는 것을 그저 듣고만 있었다. 연속 세 번을 중얼거리던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결국 가장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답안을 내놓았다.“이서, 윤 이서라고요?!”[네.]지환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수화기 든 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눈을 부릅떴다.“뭐라고요? 이서가 매튜의 아내라고요?!” 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겨우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자 지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네, 이서가 제 아내입니다.]“어떻게, 어떻게 된 거예요?!”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너무도 궁금하여 당장이라도 날아가 똑똑히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환이 등나무 의자에 걸터앉았다.[말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요. 그건 천천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오늘 작가님께 전화를 드린 이유는 저를 좀 도와달라고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무슨 부탁이죠?”[이서는 제 신분을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 작가님께서 저희 집에 오셔서도 비밀을 지켜주셨으면 합니다.]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침대 머리맡에 머리를 가볍게 기댔다. ”매튜, 나를 너무 난처하게 하는 거 아닌가요? 나는 이미 매튜의 신분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잖아요. 내가 가장 못하는 게 거짓말이랍니다.”지환이 입꼬리를 치켜세웠다.[작가님,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따님을 위해서라도 할 수 있으실 거예요.] “…….”‘역시 장사꾼다워.’‘사람의 심리를 이리도 정확히 포착하다니.’ “그래요, 최선을 다하죠.”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농담을 던졌다.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결코 지환은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비록 입이 거친 사람일지라도,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지환에게 있어서 외부인이자 적이었다. 그리고,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자기 사람은 최선을 다하여 보호하는 사람이었다.단지,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M국 최고의 갑부인 지환이 어떻게 이서와 함께 할 수 있었는지가 너무도 궁금할 뿐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남편분 헤어스타일이 웃겨서 그만.”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웃느라 당기는 배 위에 손을 얹었으나, 이미 이서와 결혼을 한 지환과 눈을 마주칠 수는 없었다. 분명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왠지 모르게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지환이 하이먼 스웨이 여사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는 다섯 손가락에 살짝 힘을 주었다.“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지환의 위협적인 냉기를 느낀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살짝 눈썹을 치켜세웠다. 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가볍게 웃으며 눈을 깜박거리자, 그제야 지환이 하이먼 스웨이 여사의 손을 놓아주었다.“들어오세요.”지환의 온몸은 여전히 강렬하고 무서운 카리스마를 뽐내고 있었다. 바로 이 순간,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지환에게서 걸려왔던 전화가 부탁이 아닌 경고라는 것을 깨달았다. 보아하니, 지환은 이서를 매우 아끼는 듯했다.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소리 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은 정말이지 천진난만한 천생연분의 모습이었다.세 사람이 거실에 들어서자, 이서가 하이먼 스웨이 여사에게 물었다.“작가님,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점심에 오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는데요.”지환만을 쫓던 하이먼 스웨이 여사의 시선이 부엌으로 들어선 후에야 제자리로 돌아온 듯했다. “아, 잠이 안 와서 혹시 내가 도와줄만한 게 있을까 하고 빨리 왔지. 호텔에 있으면 무료하기만 하거든.”“작가님, 그러실 필요 없으세요. 그냥 여기가 작가님 댁이다 생각하시고 편하게 계셔주세요.”“어떻게 그러겠니, 우리는 친척도, 친구도 아닌걸.”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서야, 너한테 있어서 나는 뭐라고 생각하니?” 이서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작가님께서는 저에게 정말 잘해주시잖아요. 전혀 과장 없이, 저희 부모님보다도 더 좋으신 분이라고 생각해요.” 성지영 부부는 이서가 하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서에게 최선을 다하여 잘 해줬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