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은철의 몸은 매섭게 흔들렸다. 그는 윤이서의 절뚝거리는 뒷모습을 보며 갑자기 마음이 허전해졌다. 그들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마치 하늘과 땅의 거리와 같았다.그는 괜히 마음이 당황해 왔고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쫓아갔다. “은철 오빠…….”구석진 곳에 숨어 이 모든 것을 훔쳐보고 있던 윤수정은 급히 휠체어를 밀며 다급히 그를 불렀다. 하은철은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눈에 윤수정의 부어오른 왼쪽 얼굴을 보고 그제야 윤이서와 결판을 내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 생각이 났다.“미안해…… 나…….”윤수정은 마치 무언가를 숨기려는 것 같이 하은철의 말을 자르며 급히 말했다.“은철 오빠,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하은철은 윤이서를 찾아 혼내 주겠다는 약속을 완전히 잊어버린 죄책감에 바삐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인데. 말해봐.”“언니가 생일파티에서 할아버지께 깜짝 선물로 오빠와의 결혼 발표를 낸다고 했어요.” 하은철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도대체 왜?”윤수정은 머리를 저으며 눈가에는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언니의 마음은 누가 알겠어요. 아마도 내가 불쌍하다고 느꼈나 봐요.”조금 전 윤이서의 그 말을 생각하며 하은철은 윤수정의 말에 찬성을 표하지 않았다.하은철의 이런 모습에 윤수정은 분노로 손톱은 이미 살 속으로 파고들었고 눈물은 더욱 세차게 흘러내렸다.“그래서 저는 은철이 오빠와 언니가 결혼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미 맹세했어요. 오빠랑 결혼 안한다고. 지금 몸 상태도 점점 더 나빠지고 있고 아마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아요. 죽기 전에 오빠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그만해, 난 윤이서와는 결혼하지 않을거야!”예전과 똑같이 하은철의 눈에는 윤이서에 대한 혐오감이 묻어나는 것을 보고 윤수정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허약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에요, 오빠는 반드시 언니와 결혼해야 해요. 오직 오빠가 언니랑 결혼해야만 제가 구천에서 눈을 감을 수 있어요.”“나는 너를
윤이서는 일부러 살짝 뜸을 들이며, 술잔을 들곤 가볍게 몇 번 톡톡 두드렸다.연회장은 일순 조용해졌다.모두의 이목이 이서에게 집중되었다.이서는 삐끗한 한쪽 발목으로 절룩거리며, 단상에 올라 마이크 앞에 섰다.“여러분, 오늘 할아버지의 생신날을 빌어 여러분께 좋은 소식을 하나 전할까 합니다.”말하면서 하은철을 힐끗 보았다.가벼운 동작이라고 해도 단상 아래 많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지는 못했다.이심전심, 모두들 들뜬 마음으로 이서의 다음 발언을 기다리고 있었다.이번 사건의 핵심 인물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특히 백스테이지에서 모니터링 중인 하지환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어둡고 정색했다.통제 불능의 느낌이 갈수록 강렬해지는 것 같았다.“저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일입니다.”이서는 추억에 빠진 듯 부드럽게 웃으며 얘기를 이어 나갔다.“모든 소녀들이 그렇듯이 저 또한 어렸을 때부터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려 왔습니다. 좀처럼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그 날이…… 드디어 왔습니다. 먼저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고 합니다…….”그녀는 또 한 번 눈을 들어 하은철을 바라보았다.이 장면을 본 하지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등에 핏줄이 불끈 솟았다.“그분은 제게…… 삭막한 요즘 세상에, 따뜻한 온정을 느끼게 해주었고, 모든 호의가 꼭 대가를 바라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분은 등대처럼 어둡고, 갈길 잃은 제 인생을 밝게 비춰주었습니다…….”이서의 진솔한 얘기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다.하은철의 심장도 여러 번 움찔했다.예의상 하는 멘트인지 알면서도…….그러나 다음 순간, 하은철의 동공이 움츠러들었다. 어두운 얼굴로 무대 옆에 서 있는 하지환을 봤기 때문이다.마치 어둠 속에 빠진 악마의 화신처럼 매섭고 날카로운 두 눈으로 하은철을 쏘아보고 있었다.하은철은 돌연 극도의 불안에 휩싸였다.하지환이 위치한 곳이 비교적 은폐된 데다 사람들의 이목이 모두 이서에게 쏠려 있어 아무도 그의 존재를 유의하지 않았다.그는 불빛에
이서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뭐라고?! 이서가 결혼했다고? 게다가 결혼 상대가 하은철이 아니야?!”“그럼, 이서가 하씨 가문의 사모님 자리를 포기한 건가?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탐내는 자리인데, 그렇게 멍청한 짓을 할 리가?”“윤이서가 일반가정의 평범한 남자와 결혼했다는 소문이 있긴 하던데, 설마 그게 사실이었던 거야?”“…….”하지환은 어둠과 빛을 사이에 두고, 눈부신 조명 아래 서 있는 소녀를 실눈으로 바라보았다.어둠을 뚫고 나와 그녀를 품에 꼭 안고 싶은 욕망이 지금처럼 강렬한 적은 없었다.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그도 하씨 집안 사람이니까.단상 아래 손님들의 수군거림이 거센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왔다.이어 이서는 손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제 남편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4대 가문도 아니고 상류층, 재벌가 자제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행복합니다. 잘 살 거예요. 그러니…… 앞으로 저와 하은철 씨를 더는 엮지 말아 주세요.”말을 마친 이서는 하은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하은철 씨, 지금까지 저랑 함께한다고 고생 많았습니다. 앞으로 자유를 마음껏 느끼면서 행복하게 사세요.”하은철의 얼굴이 새파래졌다.과거, 그는 윤이서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싶어 안달 났었다. 오늘, 드디어 소원을 이루었는데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진 홀가분함보다는 뭔가 소중한 걸 잃어버리는 헛헛한 마음이 더욱 강했다. 연회장은 삽시간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집사 주경모였다. 그는 앞으로 나가 하씨 집안 어른인 하경철에게 지시를 청했다.“어르신…….”하경철은 한 손으로 명치를 누르고, 한 손으로 손을 흔들었다.“먼저 손님들을 모셔라.”“네.”주경모는 황급히 사람을 시켜 하객들을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눈 깜짝할 사이, 큰 연회장에는 윤씨 가문과 하씨 가문 사람들만 남았다.모두들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원래의
하은철은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하경철이 다시 물었다.“그 남자가 정말 너한테 잘해 줘?”윤이서는 고개를 숙이고 ‘네’ 하고 대답했다. 백옥 같은 피부에 복숭아 꽃물이 들었다.이서의 모습을 살핀 하경철은 이서가 한 얘기가 진심이라는 걸 대번에 알아차렸다. 슬픔이 몰려오며 갑자기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아버지!” 하도훈은 얼른 앞으로 나가 하경철이 숨쉬기 편하도록 등을 쓰다듬었다.윤이서도 절룩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할아버지…….”하경철의 호흡이 서서히 되돌아왔다. 그는 쪼글쪼글한 손을 들어 윤이서의 뺨을 쓰다듬었다.“할애비 괜찮다, 괜찮아…….”이서는 눈시울을 붉혔다.“할아버지, 죄송해요……. 흑흑, 제 잘못이에요. 저를 때리고 혼내셔도 괜찮아요. 저 때문에 화병 걸리시면 안 돼요…….”하경철이 웃으며 말했다.“아이고, 바보 녀석아, 그래도 이 할애비에게 솔직하게 얘기해줘서 고맙다. 넌 내가 가장 아끼는 애야. 알지? 그래서 말인데 너랑 결혼한 사람을 할애비에게 보여줄 수 있겠니? 내가 사람을 직접 눈으로 봐야 마음이 놓일 거 같구나…….”그녀가 결혼한 사실을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하경철을 보며 이서는 기뻐서 흔쾌이 승낙하려다 곧 뭔가 떠오른 듯 붉은 입술을 다물었다.“왜, 싫어?”“아니요, 할아버지.”이서는 얼굴이 빨개지며 땅만 쳐다보았다.“먼저 그 사람 의사를 물어보고 나중에 말씀드려도 될까요?”하경철은 이서를 바라보며 눈빛에 복잡함이 스쳐 지났다. 하지만 곧 허허 웃으며 답했다.“그래, 먼저 당사자에게 물어봐야지. 이 못된 늙은이 만나러 올런지?”이서와 하은철이 함께 있는 것을 가장 바라던 하경철마저 마음이 돌아서자, 가장 당황한 사람은 성지영과 윤재하였다.“어르신, 절대 이서 말 곧이듣지 마세요! 그 남자, 저희도 본 적 있는데, 멀끔하게 생기긴 했지만, 별볼일 없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하씨 집안 손자며느리로 점 찍어 놓았던 이서가 일반사람이랑 결혼하게
윤수정은 온몸에 냉기를 두른 것 같은 하지환이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자 물끄러미 쳐다보았다.전에 성지영한테서 윤이서가 정신 나갔다며 평범한 남자와 결혼했다는 얘기를 들은 게 기억났다.그때 윤수정은, 이서의 남편이 못생기고 지지리 궁상인 남자일 거로 생각했는데……, 글쎄 하은철보다 훨씬 잘 생겼다.윤수정은 길쭉한 손톱으로 반대손 합곡 자리를 꾹 눌렀다. 눈동자는 질투로 인해 혈안이 되었다가 서서히 사라졌다.‘흥!’‘잘 생기면 뭐 해, 빚 좋은 개살구지!’……이서를 안은 지환은 그녀를 차 뒷좌석에 태웠다.이서는 몰래 그를 훔쳐보고 있었다. 얇은 입술을 앙다문 것을 보니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미안해요, 제가…… 또 폐 끼쳤죠?”원래 계획대로라면 무대에 오른 후, 하은철과의 결혼을 선포했어야 했다.그러나 단상에 서자, 하지환과의 여러 가지 추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에게 선물했던 별장 그리고 자기만의 집, 가정을 만들어 준 것……. 그녀는 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사실 대로 고백해 버린 것이었다.지환은 몸을 낮춰 그녀의 부은 복사뼈를 한 번 보았다.“병원에 데려다 줄게요.”이서는 붉은 입술을 벌리고 얘기했다.“미안해요!”지환은 고개를 들어 백미러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서를 바라보았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어린애처럼 안절부절못한 모습을 보니 안쓰러움이 밀려왔다.그는 그녀에게 화난 게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침묵을 택했을 뿐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만약 일찍이 그의 정체를 말했더라면, 아마도 오늘 밤 발을 삐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사람들이 난처하게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십여 분 뒤, 차는 북성 최고의 종합 병원에 도착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이 병원은 하씨 그룹 계열사 중 하나였다.지환은 이서를 안고 응급실로 향했다.두 사람의 등장에 사람들이 술렁이었다.이서는 지환의 탄탄한 품속에 움츠렸다. 작은 얼굴은
이서는 밤늦게야 겨우 잠이 들었다.욕실에 들어간 하지환은 두 시간 넘게 냉수욕하면서 몸의 열기를 식혔다.욕실에서 나온 그는 이서의 잠자는 얼굴을 조용히 지켜보았다.침대에 누워 있는 이서는 희고 작은 얼굴만 드러내고 있었다. 평상시처럼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아닌 뭔가 석연치 않은 듯 얼굴에 인상을 팍 쓰고 있었다.하지환은 그녀의 미간에 가볍게 키스했다.일어서려고 하는데 몸이 또 반응했다.그는 짜증난 듯 아래층으로 내려가 찬 바람을 쐬었다.1층에 도착하자 핸드폰이 울렸다.발신자 번호를 확인하고는 안색이 어두워졌다.“아버지.”[아직 안 자니? 그럴 줄 알았다.] 하지환의 아버지 하경수가 말을 이었다.[그쪽은 지금 어때? 일은 잘 되고 있는 게야?]“현재 몇몇 대형 화장품 회사를 인수 합병 추진 중입니다.”하지환의 목소리가 바람에 더욱 차가워졌다. “다음 달이면 아마 다 마무리될 듯합니다. 그때 가서 다시 말씀드리죠.”하경수는 웃으며 말했다.[네가 문제없이 잘 해낼 줄 알았다. 맞다. 언제 내 며느리 보여줄 거야?]드디어 본론으로 넘어갔다.하지환은 눈을 들어 입원병동의 방향을 바라보았다.“나중에요…….”하경수의 목소리가 갑자기 변했다.[지난 번에는 다음 달에 온다고 하지 않았어? 지환아, 너 설마 결혼했다는 거 거짓말은 아니지?]“발목을 접질렸어요. 다 나으면 그 때 갈게요.”하경수의 말투가 다시 걱정 어린 목소리로 바뀌었다.[괜찮아? 전문 의료팀을 보내줄까?]하지환은 미간을 꾹 누르며 말했다.“아버지,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녀는 제 신분도 모르고, 가정 배경도 모른다고요. 혹시 알게 되면…….”[알지, 알지…….]하경수가 말했다.[우리 며느리가 걱정되어서 그런 거지……. 됐다, 됐어. 이제 정신 차리고, 장가도 갔으니…… 나더러 평생 같이 연기하라고 해도 받아들여야지. 그건 그렇고, 그래도 내게 며느리 얼굴은 보여 줘야 하지 않겠니?]하지환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이쪽 일이 다 마무리되면 그때 만나게 해
“흥, 밀당의 귀재라고 해도 되겠어? 네가 그러고 간다고, 내가 너한테 없던 마음이 생길 거 같니?”하은철은 이서의 뒤통수를 보고 숨을 크게 들이쉬며 냉소했다.고개를 돌린 이서는 잔잔한 호수 같은 눈동자로 하은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치 그의 속마음을 간파하려는 것 같았다.“하은철, 낯짝이 두꺼운 거야? 아니면 뻔뻔한 거야? 똥 덩어리 같은 녀석아!”이렇게 상스러운 말이 윤이서의 입에서 나오자, 하은철은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했다. 한참 뒤에야 화가 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쌍스러워! 쌍스러워! 윤이서 너 너무 쌍스러워. ‘근묵자흑’ 이라더구만, 거렁뱅이한테 시집가더니 완전히 쌍스러워졌어!”이서도 질세라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야유를 퍼부었다.“맞아, 쌍스럽다. 어쩔 건데? 너처럼 인간의 탈을 쓴 짐승에 비하면, 난 적어도 떳떳하거든.” “너…….”화를 주체하지 못한 하은철은 손을 앞뒤로 내저으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그래, 윤이서, 너, 이렇게 말주변이 좋은 줄 몰랐네? 난 그래도 네가 발목이 삐었다고 여기까지 널 보러 왔는데…… 지금 보니, 너 완전 자업자득이야. 뿌린 대로 거둔 거라고!”말을 마치고, 화가 나서 떠났다.이서는 화가 난 하은철의 뒷모습을 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이전에는 화가 나서 자리 뜨는 건 그녀의 몫이었는데, 지금은 역지사지가 되었다.윤수정의 병실로 돌아온 하은철은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의자에 앉았다.“아, 열 받네! 젠장!”침대에 앉아 있던 윤서정은 일어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그냥 앉은 자리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오빠, 왜 그래?”“나 방금 윤이서 보고 왔거든!”일순 윤수정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그 여자가 글쎄 나보고, 나보고…….”하은철은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하고 아예 손을 흔들었다.“됐다 그래, 내가 평생 혼자 사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쌍스러운 여자는 사양이다. 에잇…….”윤수정은 그제야 다시 미소를 지었다.“오빠, 화내지 마. 어차피 할아버지도 이미 언니
윤이서는 아침을 먹고 나니 임하나로부터 문자가 왔다.[이서야! 너 설마 어르신 생신날에 네 결혼 사실을 선포한 거야?]가볍게 ‘응’이라고 답장한 지 1초도 되지 않아, 임하나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임하나의 들뜬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대박! 이서야, 너 초특급 울트라 캡 짱 용감한데? 용감한 거니, 무모한 거니? 그나저나 어르신은 화 안 내셨어? 너 괜찮지?]“아니, 화 안 내셨고 오히려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하셨어.”하지환을 언급하자 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임하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깜짝 놀랐잖아. 난 어르신이 노발대발하실 줄 알았는데…… 어쨌든 잘 됐다. 너 드디어 하은철 그 인간쓰레기한테서 탈출했네.]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하은철의 분노한 목소리가 들렸다.“윤이서, 너 나와!”이서는 잠깐 멍해졌다.핸드폰 저편의 임하나도 긴장한 듯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야?]“괜찮아.” 이서가 임하나를 안심시키며 말했다.“나 먼저 끊는다,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그녀는 말을 마치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휴대전화를 내려놓자마자, 초라한 모습의 윤재하와 부부가 눈앞에 나타났다.이서는 눈썹을 찌푸리며 이해할 수 없는 눈빛으로 그들 뒤에 서 있는 하은철을 바라보았다.하은철이 앞으로 한 걸음 나오며 물었다.“네 남편은?!”그러고 보니 아직 윤이서의 남편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이름조차도.이서는 무심코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무슨 일인데?”“너 눈멀었어? 네 부모님이 무슨 꼴 당했는지 안 보여?”이서는 고개를 살짝 돌려 벌벌 떨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미간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혹이 남아있었다.“네 잘난 남편이 택시 기사를 시켜 네 부모들을 야산 산꼭대기까지 데려가서 옷이랑 소지품 다 뺏고, 밤새 찬바람을 맞게 하고…….”듣다 못 한 이서가 하은철의 말을 끊었다.“사람 모함하지 마! 증거 있어?”이서의 반격에 하은철은 무려 반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