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서는 하지환의 이런 행동에 감염되어 천천히 봉투를 열자 그 안에는 붉은색 집 계약서가 들어 있었다. 첫 페이지의 집주인 란에는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그녀는 지체 없이 아래로 계속 읽었다.구계18도 B좌 103.구계18도는 바로 윤이서의 부모님께서 살고 계신 별장 구역이고 B동 103은 바로 그날 함께 보러 간 별장이었다.“당신 미쳤어요!”윤이서는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당신 정말 샀어요? 얼마 주고 샀어요? 당신 어디서 이렇게 많은 돈이 생겼어요?”하지환은 눈을 가늘게 뜨고 윤이서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당신 마음에 들어 했잖아요?”그의 당당함에 윤이서는 숨이 가슴속에 틀어박혔고 말투도 조금 전보다 부드러워졌다.“아무리 마음에 든다 해도 함부로 돈을 쓰면 안 돼요. 나중에 결혼해서 생활하려면 돈 쓸데가 얼마나 많은데요!”하지환은 웃기만 했다.“저랑 같이 살 거예요?”이 몇글자는 듣기만 해도 마음이 너무 편했다. 그날 윤이서가 한 ‘계약 결혼’만큼 귀에 거슬리지는 않았다.윤이서의 귀밑은 순간 빨개졌고 횡설수설했다.“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에이, 아무튼 당신 함부로 돈을 써서는 안 돼요.”하지환은 윤이서의 손을 잡고 있었고 손끝엔 은근 힘을 주었다. 그는 마음속으로는 기뻐했지만 말투는 오히려 담담했다.“얼마되지 않아요.”윤이서는 하지환이 없으면서 자기한테 잘 보이려고 어렵게 산 거라 생각했다.그녀는 마음속으로 엄청 감동을 받았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하지환 씨, 당신이 사 준 별장 정말 고마워요. 집 계약서에 제 이름까지 적어준 것도 그렇고요. 하지만 전 이 선물을 받을 수 없어요.”하지환의 얼굴색은 약간 변했고 말투도 딱딱해졌다.“왜요?”“왜냐면 이것은 당신이 힘들게 번 돈으로 산 것이기 때문이에요. 비록 당신이 어떻게 계약금을 모았는지는 모르지만 이 집 한 채 때문에 평생 은행을 위해 아득바득 일해야 하잖아요. 저는 당신이 집 한 채를 위해 남은 인생을 망치
안돼!마음 깊은 곳으로 부터 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는 곧 하은철과 결혼 발표를 하게 될 것이니 이같이 귀중한 선물을 받을 수 없었다.하지만…….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하지환의 마음을 담은 선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 고개를 들어 하지환의 깊숙한 이목구비를 보고 마음이 더욱 복잡해졌다.눈동자에는 또 물안개가 끼기 시작했다.“왜 또 그래요?”하지환은 윤이서의 턱을 고이 받쳐 들고 애정이 어린 말투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무력함이 묻힌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왜 이렇게 잘 울어요. 정말 울보예요.”말을 마치자 하지환의 입술은 나비처럼 가볍게 윤이서의 눈꼬리에 내려앉았다. 소중히 여겨진 그 느낌은 마음 끝에 시든 작은 꽃이 새 가지를 내리게 한 것만 같았다.“그런 거 아니에요…….”윤이서는 하지환을 밀어내고 거리를 벌려 그에게 홀리지 않으려고 했다.“저는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요. 너무 오래 나와 있었어요. 할아버지께서 저를 찾으실 거예요.”하지환은 그녀의 다급한 걸음걸이와 버려진 집 계약서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윤이서는 심란한 마음을 다잡으며 총총히 그 자리를 떠났다. 발걸음이 급해서 하마터면 마주 오는 하은철과 부딪칠 뻔했다.하은철은 몸을 피하며 비웃으며 말했다“왜 또 한 번 내 품에 안겨 보려고? 너의 작은 수작 누가 모를까 봐?”윤이서는 기분이 극도로 나빠졌다. 더 이상 하은철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하은철의 옆을 돌아서 갔다.그러나, 몇 걸음 못 가서 하은철에게 끌려갔다.“윤이서, 이제 그만 감정 갖고 장난쳐!”윤이서는 독사라도 만난 듯 하은철을 재빨리 따돌렸다. 윤이서는 차가운 눈빛으로 하은철을 바라보았다.“하은철, 너의 그 잘난 척하는 얼굴 좀 걷어치워. 옛날 너를 좋아했던 거는 사실이야. 하지만 내가 사랑했던 건 내 상상 속의 너였어. 세가자제, 학문도 있고 재능도 있고 상업 천재인 너 말이야. 그러나 결혼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어. 너는 내 남편 손끝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말이야
하은철의 몸은 매섭게 흔들렸다. 그는 윤이서의 절뚝거리는 뒷모습을 보며 갑자기 마음이 허전해졌다. 그들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마치 하늘과 땅의 거리와 같았다.그는 괜히 마음이 당황해 왔고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쫓아갔다. “은철 오빠…….”구석진 곳에 숨어 이 모든 것을 훔쳐보고 있던 윤수정은 급히 휠체어를 밀며 다급히 그를 불렀다. 하은철은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눈에 윤수정의 부어오른 왼쪽 얼굴을 보고 그제야 윤이서와 결판을 내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 생각이 났다.“미안해…… 나…….”윤수정은 마치 무언가를 숨기려는 것 같이 하은철의 말을 자르며 급히 말했다.“은철 오빠,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하은철은 윤이서를 찾아 혼내 주겠다는 약속을 완전히 잊어버린 죄책감에 바삐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인데. 말해봐.”“언니가 생일파티에서 할아버지께 깜짝 선물로 오빠와의 결혼 발표를 낸다고 했어요.” 하은철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도대체 왜?”윤수정은 머리를 저으며 눈가에는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언니의 마음은 누가 알겠어요. 아마도 내가 불쌍하다고 느꼈나 봐요.”조금 전 윤이서의 그 말을 생각하며 하은철은 윤수정의 말에 찬성을 표하지 않았다.하은철의 이런 모습에 윤수정은 분노로 손톱은 이미 살 속으로 파고들었고 눈물은 더욱 세차게 흘러내렸다.“그래서 저는 은철이 오빠와 언니가 결혼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미 맹세했어요. 오빠랑 결혼 안한다고. 지금 몸 상태도 점점 더 나빠지고 있고 아마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아요. 죽기 전에 오빠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그만해, 난 윤이서와는 결혼하지 않을거야!”예전과 똑같이 하은철의 눈에는 윤이서에 대한 혐오감이 묻어나는 것을 보고 윤수정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허약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에요, 오빠는 반드시 언니와 결혼해야 해요. 오직 오빠가 언니랑 결혼해야만 제가 구천에서 눈을 감을 수 있어요.”“나는 너를
윤이서는 일부러 살짝 뜸을 들이며, 술잔을 들곤 가볍게 몇 번 톡톡 두드렸다.연회장은 일순 조용해졌다.모두의 이목이 이서에게 집중되었다.이서는 삐끗한 한쪽 발목으로 절룩거리며, 단상에 올라 마이크 앞에 섰다.“여러분, 오늘 할아버지의 생신날을 빌어 여러분께 좋은 소식을 하나 전할까 합니다.”말하면서 하은철을 힐끗 보았다.가벼운 동작이라고 해도 단상 아래 많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지는 못했다.이심전심, 모두들 들뜬 마음으로 이서의 다음 발언을 기다리고 있었다.이번 사건의 핵심 인물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특히 백스테이지에서 모니터링 중인 하지환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어둡고 정색했다.통제 불능의 느낌이 갈수록 강렬해지는 것 같았다.“저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일입니다.”이서는 추억에 빠진 듯 부드럽게 웃으며 얘기를 이어 나갔다.“모든 소녀들이 그렇듯이 저 또한 어렸을 때부터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려 왔습니다. 좀처럼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그 날이…… 드디어 왔습니다. 먼저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고 합니다…….”그녀는 또 한 번 눈을 들어 하은철을 바라보았다.이 장면을 본 하지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등에 핏줄이 불끈 솟았다.“그분은 제게…… 삭막한 요즘 세상에, 따뜻한 온정을 느끼게 해주었고, 모든 호의가 꼭 대가를 바라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분은 등대처럼 어둡고, 갈길 잃은 제 인생을 밝게 비춰주었습니다…….”이서의 진솔한 얘기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다.하은철의 심장도 여러 번 움찔했다.예의상 하는 멘트인지 알면서도…….그러나 다음 순간, 하은철의 동공이 움츠러들었다. 어두운 얼굴로 무대 옆에 서 있는 하지환을 봤기 때문이다.마치 어둠 속에 빠진 악마의 화신처럼 매섭고 날카로운 두 눈으로 하은철을 쏘아보고 있었다.하은철은 돌연 극도의 불안에 휩싸였다.하지환이 위치한 곳이 비교적 은폐된 데다 사람들의 이목이 모두 이서에게 쏠려 있어 아무도 그의 존재를 유의하지 않았다.그는 불빛에
이서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뭐라고?! 이서가 결혼했다고? 게다가 결혼 상대가 하은철이 아니야?!”“그럼, 이서가 하씨 가문의 사모님 자리를 포기한 건가?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탐내는 자리인데, 그렇게 멍청한 짓을 할 리가?”“윤이서가 일반가정의 평범한 남자와 결혼했다는 소문이 있긴 하던데, 설마 그게 사실이었던 거야?”“…….”하지환은 어둠과 빛을 사이에 두고, 눈부신 조명 아래 서 있는 소녀를 실눈으로 바라보았다.어둠을 뚫고 나와 그녀를 품에 꼭 안고 싶은 욕망이 지금처럼 강렬한 적은 없었다.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그도 하씨 집안 사람이니까.단상 아래 손님들의 수군거림이 거센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왔다.이어 이서는 손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제 남편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4대 가문도 아니고 상류층, 재벌가 자제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행복합니다. 잘 살 거예요. 그러니…… 앞으로 저와 하은철 씨를 더는 엮지 말아 주세요.”말을 마친 이서는 하은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하은철 씨, 지금까지 저랑 함께한다고 고생 많았습니다. 앞으로 자유를 마음껏 느끼면서 행복하게 사세요.”하은철의 얼굴이 새파래졌다.과거, 그는 윤이서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싶어 안달 났었다. 오늘, 드디어 소원을 이루었는데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진 홀가분함보다는 뭔가 소중한 걸 잃어버리는 헛헛한 마음이 더욱 강했다. 연회장은 삽시간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집사 주경모였다. 그는 앞으로 나가 하씨 집안 어른인 하경철에게 지시를 청했다.“어르신…….”하경철은 한 손으로 명치를 누르고, 한 손으로 손을 흔들었다.“먼저 손님들을 모셔라.”“네.”주경모는 황급히 사람을 시켜 하객들을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눈 깜짝할 사이, 큰 연회장에는 윤씨 가문과 하씨 가문 사람들만 남았다.모두들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원래의
하은철은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하경철이 다시 물었다.“그 남자가 정말 너한테 잘해 줘?”윤이서는 고개를 숙이고 ‘네’ 하고 대답했다. 백옥 같은 피부에 복숭아 꽃물이 들었다.이서의 모습을 살핀 하경철은 이서가 한 얘기가 진심이라는 걸 대번에 알아차렸다. 슬픔이 몰려오며 갑자기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아버지!” 하도훈은 얼른 앞으로 나가 하경철이 숨쉬기 편하도록 등을 쓰다듬었다.윤이서도 절룩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할아버지…….”하경철의 호흡이 서서히 되돌아왔다. 그는 쪼글쪼글한 손을 들어 윤이서의 뺨을 쓰다듬었다.“할애비 괜찮다, 괜찮아…….”이서는 눈시울을 붉혔다.“할아버지, 죄송해요……. 흑흑, 제 잘못이에요. 저를 때리고 혼내셔도 괜찮아요. 저 때문에 화병 걸리시면 안 돼요…….”하경철이 웃으며 말했다.“아이고, 바보 녀석아, 그래도 이 할애비에게 솔직하게 얘기해줘서 고맙다. 넌 내가 가장 아끼는 애야. 알지? 그래서 말인데 너랑 결혼한 사람을 할애비에게 보여줄 수 있겠니? 내가 사람을 직접 눈으로 봐야 마음이 놓일 거 같구나…….”그녀가 결혼한 사실을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하경철을 보며 이서는 기뻐서 흔쾌이 승낙하려다 곧 뭔가 떠오른 듯 붉은 입술을 다물었다.“왜, 싫어?”“아니요, 할아버지.”이서는 얼굴이 빨개지며 땅만 쳐다보았다.“먼저 그 사람 의사를 물어보고 나중에 말씀드려도 될까요?”하경철은 이서를 바라보며 눈빛에 복잡함이 스쳐 지났다. 하지만 곧 허허 웃으며 답했다.“그래, 먼저 당사자에게 물어봐야지. 이 못된 늙은이 만나러 올런지?”이서와 하은철이 함께 있는 것을 가장 바라던 하경철마저 마음이 돌아서자, 가장 당황한 사람은 성지영과 윤재하였다.“어르신, 절대 이서 말 곧이듣지 마세요! 그 남자, 저희도 본 적 있는데, 멀끔하게 생기긴 했지만, 별볼일 없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하씨 집안 손자며느리로 점 찍어 놓았던 이서가 일반사람이랑 결혼하게
윤수정은 온몸에 냉기를 두른 것 같은 하지환이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자 물끄러미 쳐다보았다.전에 성지영한테서 윤이서가 정신 나갔다며 평범한 남자와 결혼했다는 얘기를 들은 게 기억났다.그때 윤수정은, 이서의 남편이 못생기고 지지리 궁상인 남자일 거로 생각했는데……, 글쎄 하은철보다 훨씬 잘 생겼다.윤수정은 길쭉한 손톱으로 반대손 합곡 자리를 꾹 눌렀다. 눈동자는 질투로 인해 혈안이 되었다가 서서히 사라졌다.‘흥!’‘잘 생기면 뭐 해, 빚 좋은 개살구지!’……이서를 안은 지환은 그녀를 차 뒷좌석에 태웠다.이서는 몰래 그를 훔쳐보고 있었다. 얇은 입술을 앙다문 것을 보니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미안해요, 제가…… 또 폐 끼쳤죠?”원래 계획대로라면 무대에 오른 후, 하은철과의 결혼을 선포했어야 했다.그러나 단상에 서자, 하지환과의 여러 가지 추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에게 선물했던 별장 그리고 자기만의 집, 가정을 만들어 준 것……. 그녀는 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사실 대로 고백해 버린 것이었다.지환은 몸을 낮춰 그녀의 부은 복사뼈를 한 번 보았다.“병원에 데려다 줄게요.”이서는 붉은 입술을 벌리고 얘기했다.“미안해요!”지환은 고개를 들어 백미러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서를 바라보았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어린애처럼 안절부절못한 모습을 보니 안쓰러움이 밀려왔다.그는 그녀에게 화난 게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침묵을 택했을 뿐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만약 일찍이 그의 정체를 말했더라면, 아마도 오늘 밤 발을 삐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사람들이 난처하게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십여 분 뒤, 차는 북성 최고의 종합 병원에 도착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이 병원은 하씨 그룹 계열사 중 하나였다.지환은 이서를 안고 응급실로 향했다.두 사람의 등장에 사람들이 술렁이었다.이서는 지환의 탄탄한 품속에 움츠렸다. 작은 얼굴은
이서는 밤늦게야 겨우 잠이 들었다.욕실에 들어간 하지환은 두 시간 넘게 냉수욕하면서 몸의 열기를 식혔다.욕실에서 나온 그는 이서의 잠자는 얼굴을 조용히 지켜보았다.침대에 누워 있는 이서는 희고 작은 얼굴만 드러내고 있었다. 평상시처럼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아닌 뭔가 석연치 않은 듯 얼굴에 인상을 팍 쓰고 있었다.하지환은 그녀의 미간에 가볍게 키스했다.일어서려고 하는데 몸이 또 반응했다.그는 짜증난 듯 아래층으로 내려가 찬 바람을 쐬었다.1층에 도착하자 핸드폰이 울렸다.발신자 번호를 확인하고는 안색이 어두워졌다.“아버지.”[아직 안 자니? 그럴 줄 알았다.] 하지환의 아버지 하경수가 말을 이었다.[그쪽은 지금 어때? 일은 잘 되고 있는 게야?]“현재 몇몇 대형 화장품 회사를 인수 합병 추진 중입니다.”하지환의 목소리가 바람에 더욱 차가워졌다. “다음 달이면 아마 다 마무리될 듯합니다. 그때 가서 다시 말씀드리죠.”하경수는 웃으며 말했다.[네가 문제없이 잘 해낼 줄 알았다. 맞다. 언제 내 며느리 보여줄 거야?]드디어 본론으로 넘어갔다.하지환은 눈을 들어 입원병동의 방향을 바라보았다.“나중에요…….”하경수의 목소리가 갑자기 변했다.[지난 번에는 다음 달에 온다고 하지 않았어? 지환아, 너 설마 결혼했다는 거 거짓말은 아니지?]“발목을 접질렸어요. 다 나으면 그 때 갈게요.”하경수의 말투가 다시 걱정 어린 목소리로 바뀌었다.[괜찮아? 전문 의료팀을 보내줄까?]하지환은 미간을 꾹 누르며 말했다.“아버지,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녀는 제 신분도 모르고, 가정 배경도 모른다고요. 혹시 알게 되면…….”[알지, 알지…….]하경수가 말했다.[우리 며느리가 걱정되어서 그런 거지……. 됐다, 됐어. 이제 정신 차리고, 장가도 갔으니…… 나더러 평생 같이 연기하라고 해도 받아들여야지. 그건 그렇고, 그래도 내게 며느리 얼굴은 보여 줘야 하지 않겠니?]하지환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이쪽 일이 다 마무리되면 그때 만나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