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님, 1층에도 없습니다.”경찰 대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민호일에게 물었다.“민호일 씨, 이하영 씨 어디 계십니까?”“모릅니다.” 민호일이 대답했다.“조사에 협조 좀 해주시죠.”“저는 정말 모릅니다.”“그럼, 이하영 씨를 마지막으로 뵌 게 언제입니까?”“어제요.” 민호일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그러니까, 어제 이후로 돌아오지 않으셨다는 겁니까?”경찰이 민호일을 향해 물었다.“어제 이하영 씨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아십니까?”“모릅니다.”“이하영 씨께서 어제 윤이서 씨를 납치하셨는데…….”경찰의 말에 민호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민호일이 목소리를 높여 분노했다.“모른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증거 있습니까? 여기서 함부로 제 아내를 모함하다니요.”“있습니다.”경찰이 조용히 말했다.“어제 저희는 십여 명에 달하는 경호원을 체포했습니다. 그들 모두가 민씨 가문의 사람들이더군요. 그들의 진술에 따르면, 이하영 씨의 지시에 따라 윤이서 씨를 살해했다고…….”“그만하시죠!”민호일이 발끈하며 경찰의 말을 끊었다.”그만하세요, 전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요.”민호일을 바라보던 경찰 대장은 손을 내저었다.“기왕 이렇게 된 거, 더 이상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이하영 씨의 소식을 알게 되시면 가장 먼저 저희에게 연락 좀 주시죠.”말이 끝낸 경찰 대장은 대원들을 데리고 저택을 떠났다.경찰들이 떠나자 거실 전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모두가 민호일을 바라보고 있다.“호일아…….”소태성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무슨 오해가 있는 거 아니야?”소태성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민호일은 격동된 얼굴로 지환을 바라보았다.“하 대표님, 저는 정말……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지환의 두 눈은 어두운 밤에 밀려드는 파도처럼 음침했다.민호일이 막대한 두려움을 무릅쓰고 지환에게 다가갔다.지환의 앞에 선 민호일은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오는 듯했다.그는 체면을 버린 채 지환에게 풀썩 무릎을 꿇
민씨 저택의 입구.차에 시동이 걸리던 그때, 지환의 눈에 은철의 부축을 받고 나오는 하경철의 모습이 보였다.지환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차에 다다른 하경철이 차창을 두드렸다. 지환은 턱을 살짝 들어 올려 기사에게 차 문을 열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곧바로 차에서 내려 차 문을 열었다.하경철이 지환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지환아, 괜찮다면 같이 가자꾸나.”“작은 아버지, 어서 타시죠.”지환이 손을 내밀어 하경철을 부축했다.하경철이 완전히 차량에 올라타고 나서야 은철이 차량의 조수석에 올랐다.은철이 곧바로 몸을 돌려 지환에게 물었다.“작은 아빠,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이서가 왜요?”이하영이 이서에 대한 살인미수 혐의를 받고 있다는 경찰의 말을 들은 순간부터 줄곧 불안했던 은철이었다.지환이 얼굴 근육 한 치 한 치를 애써 억누르며 담담하게 말했다.“나도 잘 모르겠구나. 경찰에 의하면, 이하영이 경호원 10명을 대동하여 이서를 죽이려 했다고 하니, 그런 것이 아닐까?”“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서가 위험해요. 안돼요.”은철이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반드시 이서를 찾아 하씨 가문의 병원에 입원시켜야겠어요.”하씨 가문의 병원은 과연 H국의 최고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은철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자, 그제야 하경철이 입을 열었다.“지환아, 이렇게 큰일이 났는데, 왜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니?”“저도 방금 알았어요.”하경철이 말했다.“그래? 난 네가 알고 있었을 거라 생각했단다.”“작은 아버지, 농담 마세요. 저는 점쟁이가 아닌걸요.”지환이 물 흐르듯 매끄럽게 대답했다. 하경철은 조금의 이상함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이서가 염려되던 하경철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한참이 지나서야 은철이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할아버지, 괜찮아요. 방금 병원 측에 물어봤더니 수면제 성분이 함유된 약물을 과다 섭취한 탓에 깊은 잠에 빠진 것일 뿐이래요.”“내일이면 깨어날 수 있다 하니, 걱정하실
하경철은 안색이 약간 변하여 몸을 곧게 펴고 앉았다. “알다마다, 근데, 그거랑 무슨 상관이지?”“민예지가 미쳐버리자 민씨 가문은 줄곧 이서에게 솓을 뻗쳐 보복하려 들었어요. 저도 그때, 이서가 집안과 관계를 끊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런 이서가 혹여라도 대처할 방법이 없을까 걱정됐어요, 그래서 민씨 가문에게 협력을 제의했던 겁니다. 조건은 이서를 놓아주는 거였고요.” 하경철이 지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왜 그랬는지 물어봐도 되겠니?”지환이 하경철의 눈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다.“그럼요, 제가 이서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지환의 말을 들은 하경철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하경철이 숨을 깊게 들이 마시며 말했다.“드디어 인정하는구나.”“저는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지환이 말했다.“윤이서는…….”조수석에 앉은 은철이 뒷좌석에 흐르는 긴장감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 히죽히죽 웃어보였다.“제가 말씀드렸죠? 어른들이 특히 이서를 좋아하신다니까요.” 하경철은 너무도 무딘 은철의 모습에 말을 잇지 못했다. 하경철이 목소리를 낮췄다.“그럼, 이서정은 또 어떻게 된 거야?”“작은 아버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이서정은 단지 하씨 가문의 안주인의 몫을 잘 하면 될 뿐입니다.”하경철은 허허 웃으며 고개를 들어 지환을 바라보았다.“그래서 이서정이 결혼을 대충 얼버무렸던건가?”“네.”지환은 더 이상 하경철을 쳐다보지 않았다.“너희들은 부부야!”간단해 보일지 모르는 하경철의 이 말에는 숨은 꿍꿍이가 있었다.지환은 속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저희는 확실히 부부입니다. 그러나 결혼이 있으면 이혼도 있는 법이죠.”“다른 사람에게…… 장가를 들겠다고?”하경철이 간신히 화를 참으며 조수석에 앉은 은철을 바라보았다.“예.”“설령 그 여자가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예.”하경철이 지팡이를 꽉 움켜쥐었다.“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한 거니?”이번에 지환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잠시 침묵을 지키
잠시 후, 지환이 한 층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혹여라도 하경철을 화나게 할까 두려운 듯했다.“이서는 이제 겨우 20대입니다. 미래가 길어요. 은철이는 단지 이서와 20년을 함께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서와 30년, 40년, 나아가서는 50년 미래까지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이 말을 들은 하경철이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그래서, 앞으로 이서와 함께 하겠다는 건가?”“네.”지환의 대답에 화가 난 하경철은 곧바로 차에서 내렸고 차 문을 세차게 닫았다.차량의 옆에서 대기 중이던 주 집사는 차에서 내리는 하경철을 부축하기 위해 다가갔으나, 하경철이 그런 주 집사의 손을 뿌리쳤다. 하경철이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아차린 은철이 바삐 하경철을 뒤를 따랐다.“할아버지, 왜 그러세요?”지환은 굳게 닫힌 차 문을 흘겨보며 운전사에게 말했다.“돌아갑시다.”지환의 지시를 받은 운전사는 하씨 저택을 뒤로한 채 차를 돌렸다.……하씨 가문의 고택.하경철이 성큼성큼 서재로 걸어 들어갔다. 은철이 하경철의 뒤를 이었다.“할아버지, 도대체 왜 그러세요?”‘도대체 작은 아빠랑 무슨 대화를 나누셨길래 이러시는거야.’하경철이 은철을 노려보았다.은철은 몹시 당황스러웠다.“할아버지,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제가 뭐 거슬리게 한 거라도 있나요?”“뭐 하나 묻지.”하경철이 화가 난 채 은철에게 물었다.“도대체 너는 이서를 마음에 품고 있는 거니, 아닌 거니? 이서와 함께 있고 싶지 않니?”은철의 얼굴이 화끈거렸다.“할아버지, 왜 또 그런 질문을 하세요? 할아버지께서 밧줄을 찾아 저희 두 사람을 강제로 묶어둔다고 해서 저희가 함께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났어. 서두르지 않는다면, 지환이 너…… 다시는 이서를 볼 수 없을 거야!”은철은 하경철의 말을 믿지 않는 듯했다.“경쟁자라…… 누구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할아버지, 저는 이번 일로 확실히 알았어요. 이서의 남편은 저에게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은 사람이라는걸요…….”“더 이
“어르신, 무슨 말씀이십니까?”“만약 내가 은철이에게 이서와 결혼하라고 종용하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벌써 함께였을지도 모르겠군.”“어르신, 그건…….”“그 아이는 고집쟁이거늘. 만일 자네가 그 아이의 머리를 누르며 물을 마시라 한다면 그 아이는 한사코 마시지 않을 거야. 나는 왜 이를 예전에는 알지 못했을까.”주 집사가 하경철의 말에 동의하며 말했다.“맞습니다. 예전에는 한바탕 말다툼이 있어야만 도련님께서 이서 아가씨를 뵈러 가셨었죠. 그런데 방금은, 어르신께서 도련님과 정반대의 태도를 보이시니, 바로 이서 아가씨를 뵈러 가시는군요.”“에휴…….”하경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나는 그저 좋은 마음이었네. 앞으로는 반대로 해야겠어.”주 집사가 하경철을 안심시켰다.“어르신, 그래도 방법을 찾았지 않습니까. 머지않아 도련님께서는 도련님의 마음속에 이서 아가씨가 계신다는 것을 깨달으실 겁니다.”“시간이 없을까 걱정이군.”하경철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가로 향했다.“요즘 점점 더 힘에 부치는군. 은철이 녀석이 이서와 함께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아.”“어르신…….”주 집사는 하경철의 뒤로 걸어갔다.“단지. 최근에 좀 피곤하셨을 뿐입니다. 편히 쉬시면 회복하실 수 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반드시 장수하실 겁니다.”“오래 사니 별 재미가 없구나. 나는 그저 저 너머에서 지원이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네.”“어르신…….”하경철은 손을 흔들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자네, 서정이와 지환이 쪽을 잘 지켜봐 주게. 조금의 이상이라도 있으면 즉시 나에게 알려주고.”주 집사가 긴장한 듯 입을 열었다.“어르신, 설마 하 대표님께서…….”“이서를 좋아한다고 하더군. 그래도 이서의 남편은 아닌 눈치였어. 이서와 이서의 남편을 이혼시킬 방법을 찾고 있는 것 같더군.”“그렇다면 어르신의 의심이 잘못됐던 건가요?”“아직 결론을 내리기는 일러. 어쨌든 두 사람을 잘 지켜봐 주게.”“알겠습니다.
그 순간, 누군가에 의해 이하영의 턱이 들어올려졌다.이하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통증이 아래턱뼈에서 온몸으로 퍼지는 듯했기 때문이다.뒤틀림 속에서 이하영은 마침내 지환의 생김새를 똑똑히 보았다.“당신, 대체 누구야?”이하영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당신, 내가 누군지, 내 남편이 누군지 알아? 빨리 나를 풀어주지 않으면 당신이 죽어 묻힐 곳이 없게 할 거야.”이하영의 옆에 앉아 있던 조용환이 공포에 질려 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이내 날뛰며 소리치기 시작했다.“내 옆에 앉으신 분들은 민씨 가문의 사모님과 하씨 가문의 안주인이시다. 하씨 가문 알지? H 국 제1의 명문가.”“게다가 이 여자분은 하은철 도련님의 부인도 아닌, 하은철 도련님의 작은 아버지의 부인이시지.”“외국에 계신 그 하은철 도련님의 작은 아버지.”“당신, 하은철 도련님의 작은 아버지께서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 줄 알아?”“그분께서는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오로지 자신의 노력만으로 불과 몇 년 만에 그곳 제일의 YS 그룹을 설립하셨어!”“이 사람들 중 당신의 미움을 살만한 사람은 없다는 이야기지.”“그러니, 빨리 우리를 풀어주는 게 좋을 거야”“그렇지 않으면…….”지환의 시선이 조용환에게 떨어졌다.지환의 시선은 음산하고 무서웠다.조용환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별장에 들어선 상언은 조용환의 반복적인 고함소리에 웃음을 터뜨렸다.“지환아, 빨리 너가 누군지 알려주고, 저들이 눈 감을 수 있도록 하는 게 좋겠어.”“우…… 우릴 죽일 건가?”이하영이 창백해진 얼굴로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내 털 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가만히 있어!”이천이 이하영의 의자를 밟았다.“아직도 민씨 가문이 예전과 같은 줄 알아? 더 이상 H국 4대 가문에 민씨 가문은 없을 거야.”“뭐라고?”이천이 이하영을 향해 말했다.“오늘 하 대표님께서 민씨 가문의 잔치에 참석하셔서 앞으로 민씨 가문과의 모든 협력을 끊겠다고 하셨어. 또, 민씨 가문과 협력하려는
이하영 역시 자세를 고쳐잡고 송구스러워하며 말했다.“하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이전에 뵌 적이 없다 보니 하 대표님이신 줄 몰라뵀습니다. 모든 게 다 오해입니다. 저희 좀 풀어주시죠.”지환이 차갑게 웃었다.“당신들은 이서를 죽일 뻔했어. 내가 당신들을 살아서 나가게 둘 것 같아?”이하영은 마음속에 한기가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하영은 왜 지환이 이서를 이토록 아끼는 것인지 이해하지는 못했다.‘어르신께서 중시하시는 손자며느리가 아니던가?’“하 대표님,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르실 수도 있습니다. 비록 하 어르신, 즉 대표님의 작은 아버지께서 윤이서를 대단히 아끼실지라도, 그 여자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는 하씨 가문과 아무런 관련도 없지요. 믿지 못하시겠다면 닥터 이에게 물어보시죠. 닥터 이, 그렇죠? 윤이서는 이미 결혼했잖아요.”상언은 이하영의 무식한 모습에 크게 웃고 싶었다.“이서정이 아직도 윤 대표님의 남편이 누군지 말해주지 않은 모양이군요.”이하영이 이서정을 바라보았고 이서정이 몸을 심하게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서정아, 윤이서의 남편이 누군지 알아?”이서정의 몸은 더욱 심하게 떨렸다.“얼른 말해!” 이하영이 목소리를 높였다.“이렇게 중요한걸, 왜 진작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이서정은 죽도록 입술을 깨문 탓에 비릿한 피비린내가 목구멍으로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이하영은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이서정!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이천과 상언이 소리 없이 눈을 마주쳤다.잠시 후 이천은 시선을 돌려 이하영을 향해 말했다.“이서정 씨가 입을 열지 않으니, 제가 알려드리죠.”이하영과 조용환의 시선이 일제히 이천에게 떨어졌다.“윤 대표님의 남편분은 바로…… 하 대표님이십니다.”이천의 말을 들은 세 세사람은 폭탄이라도 맞은 듯 머리가 새하얘해졌다.이하영과 조용환은 완전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사실, 이서정은 한 가닥의 희망을 품었었다.
이 광경에 놀란 이하영이 비명을 질렀다.지환은 냉담하게 바닥에 떨어진 닭털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천천히 별장을 빠져나왔다.상언 또한 지환을 따라 별장을 나섰다.별장의 문이 열리자, 순식간에 공기가 맑아졌다.상언이 지환에게 담배 한 대를 건네주었다.“이제, 저 세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야?”지환은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담배를 코끝으로 가져가 냄새를 맡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경찰서에 보내야 할 것은 경찰서에 보내고, 묻어야 할 것은 묻고, 이서정은…… 이서정은 남겨두자.”“왜, 아까워?” 상언이 지환에게 농담을 던졌다.지환이 골치 아프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늙은 여우가 내가 이서의 남편이라고 의심하고 있어.”‘어르신?'“응.”상언이 긴장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만약 어르신께서 일의 진상을 알게 되신다면, 이서에게 네가 누군지 밝히실 게 분명해. 그때는…….”이제 겨우 한차례의 폭풍이 지나갔을 뿐이었다.“그러니까 이서정은 남겨둬야지.”지환이 말했다.“이서정을 남겨둬서 뭘 하려고?”“그건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지환이 숨을 내쉬며 말했다.“뒷일은 너한테 맡길게. 나 먼저 간다.”“너, 정말 쏜살같구나?”상언이 지환을 놀렸다.지환은 상언을 향해 담배를 던진 후, 차에 올랐다.그렇게 차량은 병원을 향해 달려갔다.같은 시각, 병원 내부.눈을 뜬 이서는 지환이 곁을 지키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서의 곁을 지키던 사람들은 뜻밖에도…….“공주님, 공주님 곁을 지킨 게 저희라서 영 실망하신 것 같네요?”하나가 말했다. 이서가 나나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여기가 어디야?”“어쭈, 방금 네 두 눈에서 실망감을 봤어.”하나가 이서의 곁으로 다가갔다.“첫눈에 본 사람이 형부가 아니라서 그런 거지?”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저으니 머리가 띵 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이서가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눌렀다.하나가 즉시 긴장하며 물었다.“왜? 어디 불편해? 의
같은 시각.호텔에 있던 이서는 잠을 잘 수 없었다.그녀는 지환이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일이 위험하다는 것만큼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지환이 그녀를 속일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엎치락뒤치락하고도 잠이 오지 않자, 이서는 아예 일어나 물 한 잔을 따랐다. 물을 들이켜고 나니, 졸음은 완전히 달아났다. 그녀는 약간의 초조함을 느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지환 씨가 외출할 때 따라갈걸 그랬나?’ ‘그저 ‘조심해서 다녀오세요’라고 말만 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그녀가 따라가는 것은 짐만 될 뿐이었다.이렇게 생각한 이서의 마음은 더욱 답답해졌다. 엉뚱한 생각의 폭을 넓혀가던 그녀는 갑자기 하경철을 떠올렸다.‘그러고 보니, 기억을 잃은 후로는 한 번도 할아버지를 뵌 적이 없어.’ ‘할아버지는 지금쯤 어떻게 지내실까?’‘몸은 예전처럼 건강하실까?’ 이서는 아직도 하경철에게 떳떳하지 못하다고 느꼈다.하경철은 그녀가 하씨 가문으로 시집오기를 바라는 유일한 하씨 가문의 사람이었고, 그녀에게 가장 잘해 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하씨 가문에 시집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반목하여 원수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아주 속상하셨을 거야.’‘그런 게 아니라면, 이렇게 오랫동안 나를 찾지 않으실 리 없어.’ 갑자기 이서의 머릿속에는 고택에 가서 하경철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싹텄다.그녀는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한편, 병원에 있던 지환은 세 번째 상대를 만났다.괴력왕은 그를 속인 것이 아니었는데, 뒤의 상대는 확실히 갈수록 강력해졌다.“하지호 사장님의 수하입니다!”이천은 단번에 맞은편에 있는 네 사람을 알아보았는데, 그들은 모두 하지호의 수하였다. “고작 네 명만 보내다니, 우리 어둠의 세력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닙니까?”어둠의 세력 조직원들이 다소 불만스럽게 말했다. 이천은 바로 설명했다.“절대 저 네 사람을 얕봐선 안 됩니다. 저 사람들은
큰 소리와 함께 목에 꽂힌 칼 두 자루가 ‘우지끈’ 소리를 냈고, 반동으로 인해 목에서 빠져나왔다.이천은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지환은 일찍이 대책이 있었다. 그는 손에 쥔 칼을 단단히 붙들었고, 칼끝을 아래로 향하게 한 후 바닥에 단단히 꽂아 내렸다. 그 칼을 바닥에 깊은 흔적을 만든 후에야 비로소 잦아들었다. 모처럼 낭패한 지환을 보며, 괴력왕은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하 대표님, 사업 수완은 뛰어나실지 몰라도, 힘으로는 저를 이길 수 없습니다.” “대표님께서 어둠의 세력 조직원 모두를 부른다고 해도 저를 이길 순 없죠.” “하지만 지금은 열댓 명만 있을 뿐이고요.” “비록 하은철 사장의 아버지와 무슨 갈등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랜 지인으로서 충고 한마디 하겠습니다.” “저를 이기지 못하신다면, 제 뒤에 남은 사람들은 절대 이길 수 없을 겁니다.”그 순간, 눈을 부릅뜬 괴력왕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뒤통수를 눌렀다. 엄청난 통증을 느낀 그는 비틀거리다가 넘어질 뻔했다.끈적끈적한 느낌은 현기증을 불러왔다. 그는 희미한 눈으로 어둠의 세력 조직원 몇 명이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들이 지환과 이야기하는 그를 기습한 것이었다.괴력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환을 보았고, ‘쿵’하는 굉음을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제... 제 약점이 뒤통수라는 걸 어떻게 아셨죠?” 이 비밀은 그가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것이었다. 지환이 천천히 일어섰다.“벌써 잊은 겁니까? 난 몇 번이고 당신을 찾아가 산에서 나오라고 부탁했었는데요.” 괴력왕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환을 보며 말했다.“그 몇 번의 짧은 만남으로 제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까?” 지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괴력왕이 고개를 들어 ‘하하’ 웃었다.“하하하, 역시 하 대표님이군요. 저는 온몸에서 힘이 넘치지만, 머리는 좋지 않아요.” “오늘밤, 전력을 다해야만 했던 것처럼요.” 괴력왕
“제가 오늘 밤에 상대할 사람이 하 대표님이었군요!”그 사람이 움직이자, 사람들은 산이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이천이 지환의 앞에 서서 말했다.“괴력왕, 당신이 어떻게 하은철 아버지의 조수가 된 거죠?”눈앞의 괴력왕은 힘으로 대동맥을 끊을 수 있는 괴물이었다.타고난 힘을 가진 그는 다른 사람과 싸우는 것을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줄곧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천은 물론이며 지금까지 괴력왕과 맞붙은 적 없는 어둠의 세력 조직원까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괴력왕은 그야말로 수수께끼의 인물이었다,사람들은 모두 그가 대단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몰랐다.“하하, 말하자면 긴 이야기입니다만, 기꺼이 말씀드리죠.”키가 큰 괴력왕은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만 지환을 볼 수 있었다.“사실 아주 간단합니다. 제 딸이 이상한 병에 걸렸는데, 그걸 알게 된 하은철 사장의 아버지께서 훌륭한 의사를 찾아 제 딸을 치료해 주신 거죠.”“그래서 제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불러 달라고 약속했습니다.”“다만, 첫 번째 임무가 하 대표님을 상대하는 건 줄은 몰랐죠.”지환의 명성은 외국에서도 대단했다.괴력왕처럼 은둔하는 사람도 알 정도였으니 말이다.‘어쩐지, 상대할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더라니.’‘상대를 알면 후회할까 봐 걱정된 모양이지?’지환은 괴력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괴력왕과 몇 번 만난 적이 있는데, 친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게다가 지환은 의리 있는 괴력왕의 성격을 아주 좋아했다.그래서 어둠의 세력 조직원으로 괴력왕을 끌어들이려 했었다.하지만 싸우기 싫어하는 괴력왕의 성격 때문에 그 계획은 빛을 보지 못했고, 지환도 더 이상 그를 찾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재회가 전쟁이 될 줄은 몰랐다. “각자의 보스나 신경 쓰도록 하죠. 시작합시다!” 지환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고, 괴력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하 대표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저쪽에 있던 하도훈은 이미 입구까지 걸어갔다.그의 곁에는 수십 명이 모였는데, 그들의 머리에는 흰색 천 조각이 씌워져 있었다. 지환을 응시하는 그들의 눈빛은 그를 소멸시키기에 충분했다.하지만 지환은 꿈쩍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병원 입구에 다다랐다. “형님, 오랜만입니다!”하도훈의 얼굴에서는 커다란 슬픔이 묻어났다. “왔구나!”지환이 말했다.“은철이 시신을 제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도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경직된 몸을 심하게 떨었다.“지환아, 너 정말 독하구나. 한 여자를 위해서 조카를 죽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니! 그 아이를 해칠 때, 네 가족이라는 생각을 하긴 했니?” “예전에 네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의 사이는 좋지 않았어. 하지만 은철이는 그걸 전혀 개의치 않았고, 너라는 작은 아버지를 꽤 친근하게 대했다지.” “매번 해외에 나갈 때마다 고향의 특산물을 가져다주곤 했는데, 그런 조카를 이런 식으로 대한 거냐?”“너는 처음엔 여자를, 이제는 목숨을 앗아간 거야.”“은철이 녀석이 본인의 이런 말로를 알았더라면, 애초에 너를 가까이 한 걸 후회했을지도 모르겠구나.”하도훈이 말했다.지환이 차갑게 하도훈을 바라보았다.“맞습니다. 우린 가족이고, 확실히 아주 가까웠죠. 아무 일도 없었다면, 우리는 잘 지낼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은철이가 이서를 어떻게 대했었죠?” “이서는 은철이의 작은어머니였습니다. 그때 은철이는 이서가 본인의 가족, 즉 친척이라는 생각을 했을까요?” 하도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았다.“그래, 보아하니 너는 네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구나.” “지환아, 너희가 목숨을 건 계약을 했다는 거, 설령 네가 내 아들을 죽였다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잘 알아. 하지만 네가 오늘 은철이를 보겠다고 한다면, 적어도 내 허락은 받아야 하는 거 아니니?!” “형님이 허락하면 어떻고,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겠습니까
이내 이천이 전화를 걸어왔다. [대표님, 모두 안배했습니다. 이제 오셔도 됩니다.]“그래.”전화를 끊은 지환은 외투를 들고 문을 나왔는데, 맞은편 방문이 한 눈에 들어왔다.그는 넋을 잃은 채 그 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이천이 한 말이 맴돌았다.‘덫일 수도 있다고...?’‘가면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라.’ 그는 이서와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막상 그녀를 마주하면 떠나고 싶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바로 이때, 문이 ‘덜컥’ 소리를 냈다. 지환이 피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는 문 뒤에 서 있는 이서를 묵묵히 바라보았고, 그녀도 지환을 바라보았다. 그가 손에 외투를 든 것을 본 이서가 물었다.“어디 나가요?”지환은 이서의 눈을 쳐다보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응.”“오, 그럼 어서 가보세요. 나는 샤워하고 잘게요.”이서의 반응은 아주 간단했는데, 이는 지환을 크게 안도시켰다. 그가 두 걸음 정도 내디뎠을 때, 뒷문이 다시 열렸고, 이서의 ‘조심해서 다녀와요’라는 한 마디가 복도에 메아리쳤다.고개를 돌린 지환은 텅 빈 복도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돌린 그의 얼굴에는 차갑고 의연한 기색만이 감돌 뿐이었다. 급히 아래층에 도착하자, 이천은 이미 어둠의 세력 조직원과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환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들은 즉시 똑바로 서서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지환은 마지막으로 호텔을 힐끗 보고는 출발했다. 병원 입구.이곳의 분위기는 아주 고요했고,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심지어 평소 경비원이 지키고 있던 입구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오히려 입구는 활짝 열려 있어, 함정에 빠뜨리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이천이 물었다.“대표님, 바로 들어가시겠습니까?” 지환은 냉정하게 반문했다.“더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 이천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이미 철통같이 포위된 듯했고, 어디로 들어가든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문으로
소희를 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서가 이전에 말한 것처럼 강해지는 것뿐이었다. 심씨 가문 사람들이 그녀에게 아부하고 싶을 정도로 강해져야만, 그들이 소희를 무시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아요.”저녁에 식사하던 이서는 지환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며 괴롭다는 듯 불평을 늘어놓았다.“더 강해진다는 건 하씨 가문을 넘어서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건 내게 있어서 불가능한 일이에요.” 맞은편에 앉은 지환은 인상을 살짝 찌푸린 이서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따뜻한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자, 그녀 얼굴의 부드러운 곡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심지어 얼굴의 미세한 동작까지도 끄집어냈다.“불가능한 일은 없어. 어쩌면 네가 하씨 가문을 넘어설지도 모르지.” “또 나를 어린아이 취급하는 거죠? 하씨 가문은 백 년의 기반을 가진 가문이예요. 내가 하씨 가문처럼 강해지기를 원한다면, 꿈속에서 하씨 가문을 이어받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요.” 하지만 이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녀와 하씨 가문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니 말이다. 바로 이때, 지환의 핸드폰이 울렸다.이천에게서 온 전화였다. 수화기 너머에서 무슨 말을 한 것일까. 지환이 핸드폰을 든 채 이서를 한 번 보았다. 이서는 영문도 모른 채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강렬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바로 지환이 그녀가 듣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 “이제 배불러요. 나는 먼저 방에 가서 텔레비전을 볼게요.” 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자기 방으로 향했다.문이 닫히자, 지환이 수화기 너머의 이천에게 물었다.“확실해?”[확실합니다. 하은철은 확실히 죽었어요. 하지만 하씨 가문의 고택 앞에서 죽었죠.] [하은철은 치타와 마찬가지로 차가 부딪쳐 날아가는 순간에 차에서 뛰어내렸을 겁니다.] [물론, 그때 누군가가 하은철을 도왔기 때문에 하씨 가문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었던 거겠죠.][하지만 제가 알아본 바로는, 부상이 너무 심해서 하씨 가문 고택
소희가 꽤 충격을 받은 듯 이서를 바라보았다.“이서 언니, 농담하는 거죠?” “그런 사람이 이득을 볼 가능성은 거의 없어. 우리가 시비를 걸지 않는 것만으로도 부처님께 감사하며 기도해야 할 일이지.” 이서가 빙그레 웃었다.“이제 내 말을 믿겠어?” 소희가 말했다.“이서 언니, 언니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언니는 제 동생을 잘 모르잖아요. 걔는 어릴 때부터 남들을 골탕 먹이던 애예요. 한 번도 남한테 당한 적이 없는 애죠. 그래서 걱정이 되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 내가 어제 이미 계획을 세워뒀어. 소희 씨가 내 말 대로 하기만 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거야.” “소희 씨, 설마 그 이상한 양부모한테서 완전히 벗어날 생각을 안 해본 거야?” 소희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확실히 생각해 본 적 있지만, 단지 생각에 불과했어.’ ‘양엄마가 얼마나 끈질기게 집착하는 사람인지 잘 아니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야...’ ‘그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철저히 말살하는 것.’ 하지만 그것은 범법행위이지 않은가.소희는 이서가 자신을 위해 손에 피를 묻히기를 원치 않았다. “이서 언니, 그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다음에 또 심태윤이 찾아오면, 그냥 무시해 버리세요.” “언니는 걔한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겠지만, 걔는 언니한테 해를 끼칠 수 있어요.” 이서가 소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아까 사당에서 있었던 일을 듣고서야 알았어. 소희 씨가 심씨 가문에서 겪는 일이 내 생각보다 더 힘들다는걸.” “소희 씨, 소희 씨는 날 위해서 심씨 가문으로 돌아갔잖아. 그러니까 나한테는 심씨 가문에 있는 소희 씨의 처지를 개선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어.”“아직 심 대표님 내외에게 정이 없다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그분들은 소희 씨의 부모님이잖아. 세 사람은 혈연으로 이어져 있으니, 언젠가는 그분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야. 그때는 지금처럼 나를 몰래 만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소희는 이서의 말에 고개를
같은 시각.차에서 칭찬받은 소희는 쑥스러워했다.‘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건데...’ 하지만 이지숙의 눈에는 소희가 혀로 수많은 유생과 싸운 제갈량처럼 보일 뿐이었다. “아주머니.” 소희가 이지숙이 계속해서 말을 잇기 전에 말했다.“물건을 좀 사러 가고 싶어요. 이따가 이 근처에서 저 좀 내려주세요.” “나도 같이 갈게.”이지숙이 열정적으로 자청했다. 소희는 그런 그녀를 어색하게 바라보았다.“저 혼자 가고 싶어요.”이지숙은 이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신과 함께하는 쇼핑을 원치 않는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저 조금 전 많은 일을 겪은 소희가 혼자 걷고 싶은 것이라 여겼다. “이해해, 다음 길목에서 내려줄게.”“소희야, 너무 걱정하지는 마. 우리가 반드시 너를 보호할 테니까.” “...”소희는 정말이지 걱정이 많았다.‘심씨 가문 사람들의 뇌 회로는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것 같아.’ “소희야.” 심근영 또한 이지숙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소희가 차에서 내리기 전에 참지 못하고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말 거라. 하늘이 무너져도... 우리는 너를 구할 거야.” 소희가 그들의 눈을 바라보았다.이 순간, 그들의 눈동자에는 진심만이 가득했다. 소희는 그들이 말하는 것이 모두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네.”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심근영 부부의 눈시울이 촉촉해진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 운전기사가 차를 몰고 떠나자마자, 소희는 택시 한 대를 잡아타고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윤씨 그룹으로 갈게요.” 운전기사는 대답한 후, 곧장 윤씨 그룹으로 향했다. 30분 후, 회사에 있던 이서는 소희가 왔다는 것을 듣고는 다소 놀랐다.“들어오라고 하세요.” “예.”김하늘은 곧장 대표실로 소희를 데려왔다. 다시 익숙한 곳으로 돌아오자, 소희의 마음속에는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이서 언니...” 문이 닫히고, 밀려오는 억울함을 느낀 그녀가 이서를 껴안았다.이서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소희
소희가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그녀는 오른쪽에 앉아 있는 6명의 어르신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어르신들, 모든 일의 원흉인 제가 한 마디 올려도 되겠습니까?” 여섯 명의 어르신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잠시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고, 중간에 앉은 그 어르신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그래.” “감사합니다.”“여러분, 여러분께서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나타남과 동시에 하씨 가문과의 협력이 중단되었으니, 저만 내쫓으신다면 하씨 가문과 심씨 가문이 진정성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겠지요, 그렇지 않나요?” “그럼 우리 생각이 틀렸다는 거야?”심유인이 비꼬듯이 대답했는데, 어조에서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 말, 아직 안 끝났어요.”소희가 심유인을 보며 말했다.“그래서 저도 여러분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심씨 가문을 떠나기만 하면, 하씨 가문은 자연히 심씨 가문을 용서하고, 다시 협력하려 할 테니까요!” ‘소희가 주동적으로 심씨 가문을 떠나겠다고 할 줄이야!’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소희야!”이지숙은 곧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이 엄마가 부족해서 너를 고생시키는구나.”소희는 역시 눈시울을 붉히던 심근영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진심이에요. 제가 쫓겨나는 걸로 하 사장님의 기분이 풀린다면... 그렇게 할게요.”그러나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조롱으로 들렸다.심근영이 중간에 앉은 어르신을 보며 말했다.“어르신, 소희의 말이 맞습니다. 그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하 사장의 기분을 풀 수 있다면, 그 사람이 과연 하 사장일까요?” “윤 대표는 하 사장과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계속해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하씨 가문을 건드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한다면, 더욱 궁지에 몰릴지도 모르지요.” 사람들의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아니야, 나는 정말이지 심씨 가문의 고택에 있고 싶지 않아!’ ‘이 사람들은 왜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