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구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민호일은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서야 비로소 맨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민씨 저택의 입구에는 초호화 람보르기니가 주차되어 있었는데, 차종을 보아하니 콘셉트 S인 듯했다.오픈탑 디자인의 차량이었기에 사람들은 차 안에 앉아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그 남자는 선글라스를 낀 채 강한 카리스마를 뽐내고 있었다.검은색 양복을 입은 그 남자의 옆선은 날렵하다 못해 날카로웠다.그 남자가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 탓에 사람들은 그의 관능적인 얇은 입술과 높게 솟은 콧날만을 볼 수 있었다.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민호일이 급히 차량으로 걸음을 옮겼다.“하 대표님, 드디어 오셨군요.”선글라스 아래의 지환의 눈은 칼보다 더 날카로웠다.선글라스를 사이에 두고 민호일은 오싹함을 느꼈다.“하 대표님?”지환이 턱을 살짝 든 채 거실을 향해 걸어들어갔다.민호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지환의 뒤를 따랐다.거실에서 자리를 지키던 은철이 지환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작은 아빠.”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가주가 분분히 고개를 돌려 지환을 바라보았다. ‘하 대표님을 이토록 가까이에서 뵙다니…….’‘아우라가 과연 H 국 최고의 갑부다우신걸?’“하 대표님.”두 가문의 가주 역시 지환의 앞에서는 자신들이 신분이 낮다고 생각하여 멋쩍게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살짝 고개를 끄덕인 지환은 하경철의 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선글라스를 벗었다.“작은 아버지.”하경철이 지환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지환아, 정말 오랜만이구나. 나는 네가 이 작은 아버지를 잊은 줄 알았단다.”지환은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말을 잇지는 않았다.하경철이 물었다.“어쩜 이리도 말랐니? 그동안 바삐 일하느라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은 모양이구나.아이고, 네 아버지가 너에게 일찍 결혼하라 종용했던 것은 누군가 너를 챙겨주길 바라서였거늘. 보아하니, 새색시가 영 잘하지는 못하는 것 같구나.”눈
‘내가 손윗사람이거늘, 어찌 지환이가 나를 속일 수 있겠는가.’“할아버지.”은철이 다시 한번 낮은 소리로 하경철을 일깨웠다. 하도훈 역시 급히 민호일에게 물었다. “호일아, 제수씨는 아직인가? 지환이까지 도착했는데 우리더러 기다리라는 건 아니겠지?”민호일이 웃으며 말했다.“농담이 심하십니다. 바로 사람을 시켜 내려오라고 전하겠습니다.”민호일이 사람들을 불러들였다.“빨리 가서 사모님께 내려오라고 전하게.”사람들이 급히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러나 몇 분이 지나도록 이하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민호일은 눈살을 찌푸린 채 다시 한번 사람을 재촉하고서야 사람들에게 말했다.“모두 먼저 자리에 앉으시죠. 여자는 참 번거롭습니다. 화장도 하고 옷도 갈아입어야 하니, 여러분께서 이해 좀 부탁드립니다.”사람들은 환하게 웃으며 좌석 순서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지환은 시종일관 내색하지 않았다.소태성이 이 기회를 틈 타, 술잔을 든 채 지환에게 말했다.“하 대표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께서 지엽이을 데리고 외국에서 가신 덕에 많은 재미 좀 봤을뿐더러 해외 시장도 순조롭게 넓힐 수 있었습니다.”최근 몇 년 간 해외로 진출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 소씨 가문이었다. 하지만 요령을 알지 못해 빈번히 실패해왔다.“정말 감사합니다.”지환이 술잔을 든 채 담담하게 말했다.“지엽 씨에게 감사해야죠.”소태성은 이해하지 못하고 옆자리의 지태를 바라보았다.지태 역시 오리무중이었다.“하 대표님, 무슨 말씀이세요?”“탁월한 안목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이서에게 반하셨으니까요.’지환은 어쩔 수 없이 지엽을 외국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소태성은 지환이 지엽의 사업 상의 안목이 탁월하다고 칭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과찬이십니다.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다듬어 먹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저희는…….”지환의 표정은 담담하여 이야기를 나눌 흥취가 전혀 없어 보였다. 소태성은 소씨 가문의 가주이자, H국의 제2 명문가 집안의 권력자로서 어떤
그 사람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며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이 광경을 본 민호일의 마음속에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때, 소파 한가운데 앉은 지환의 시커먼 눈동자에 독기가 스쳤다.민호일은 억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제가 올라가 보겠습니다,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시고, 이야기들 나누세요.”비틀거리며 위층으로 향하던 민호일은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2층에 다다른 민호일이 세차게 안방 문을 열어젖히자, 텅 빈 방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민호일은 집사를 향해 걸어가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누르며 물었다.“사모님은?”집사가 민호일의 발치에 풀썩 무릎을 꿇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어제 나가신 이후,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줄곧 사모님께 연락해 봤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요.”민호일이 집사의 명치를 걷어찼다.“쓸모없는 자식, 이렇게 큰 일이 났는데 왜 이제야 알려줘?”집사가 가슴을 가리며 말했다.“대표님, 이미 어제부터 사람을 시켜 사모님을 찾고 있으나, 지금까지도 연락이 없으니 경찰에 신고하시는 게 어떠신지요.”민호일이 이를 갈았다.“하나만 묻지. 어제 나가서 뭘 한다고 하던가?”“사모님…… 사모님께서는…….”집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민호일이 곧 터질 듯한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지금이 어떤 때인 줄 알고나 말을 안 하는 건가?”집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부들부들 떨며 말을 이어나갔다.“잡으러…… 윤 대표님을…….”“뭐라고?!”민호일이 목소리를 높였다.“윤 대표님을 …… 잡으러 가셨어요.”집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호일은 화를 참지 못하고 집사를 여러 번 발로 걷어찼다.“왜 걔를 잡으러 가? 설마 내가 하 대표와 계약을 체결한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비록 민호일 또한 윤이서를 죽도록 원망해왔으나, 지환과의 계약을 맺고 민씨 가문이 큰돈을 벌어들인 후로는 윤이서를 더 이상 상대하지 않으려던 참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이하영이 윤이서를 찾아가다니, 이는 재물신에게
“대장님, 1층에도 없습니다.”경찰 대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민호일에게 물었다.“민호일 씨, 이하영 씨 어디 계십니까?”“모릅니다.” 민호일이 대답했다.“조사에 협조 좀 해주시죠.”“저는 정말 모릅니다.”“그럼, 이하영 씨를 마지막으로 뵌 게 언제입니까?”“어제요.” 민호일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그러니까, 어제 이후로 돌아오지 않으셨다는 겁니까?”경찰이 민호일을 향해 물었다.“어제 이하영 씨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아십니까?”“모릅니다.”“이하영 씨께서 어제 윤이서 씨를 납치하셨는데…….”경찰의 말에 민호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민호일이 목소리를 높여 분노했다.“모른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증거 있습니까? 여기서 함부로 제 아내를 모함하다니요.”“있습니다.”경찰이 조용히 말했다.“어제 저희는 십여 명에 달하는 경호원을 체포했습니다. 그들 모두가 민씨 가문의 사람들이더군요. 그들의 진술에 따르면, 이하영 씨의 지시에 따라 윤이서 씨를 살해했다고…….”“그만하시죠!”민호일이 발끈하며 경찰의 말을 끊었다.”그만하세요, 전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요.”민호일을 바라보던 경찰 대장은 손을 내저었다.“기왕 이렇게 된 거, 더 이상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이하영 씨의 소식을 알게 되시면 가장 먼저 저희에게 연락 좀 주시죠.”말이 끝낸 경찰 대장은 대원들을 데리고 저택을 떠났다.경찰들이 떠나자 거실 전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모두가 민호일을 바라보고 있다.“호일아…….”소태성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무슨 오해가 있는 거 아니야?”소태성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민호일은 격동된 얼굴로 지환을 바라보았다.“하 대표님, 저는 정말……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지환의 두 눈은 어두운 밤에 밀려드는 파도처럼 음침했다.민호일이 막대한 두려움을 무릅쓰고 지환에게 다가갔다.지환의 앞에 선 민호일은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오는 듯했다.그는 체면을 버린 채 지환에게 풀썩 무릎을 꿇
민씨 저택의 입구.차에 시동이 걸리던 그때, 지환의 눈에 은철의 부축을 받고 나오는 하경철의 모습이 보였다.지환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차에 다다른 하경철이 차창을 두드렸다. 지환은 턱을 살짝 들어 올려 기사에게 차 문을 열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곧바로 차에서 내려 차 문을 열었다.하경철이 지환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지환아, 괜찮다면 같이 가자꾸나.”“작은 아버지, 어서 타시죠.”지환이 손을 내밀어 하경철을 부축했다.하경철이 완전히 차량에 올라타고 나서야 은철이 차량의 조수석에 올랐다.은철이 곧바로 몸을 돌려 지환에게 물었다.“작은 아빠,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이서가 왜요?”이하영이 이서에 대한 살인미수 혐의를 받고 있다는 경찰의 말을 들은 순간부터 줄곧 불안했던 은철이었다.지환이 얼굴 근육 한 치 한 치를 애써 억누르며 담담하게 말했다.“나도 잘 모르겠구나. 경찰에 의하면, 이하영이 경호원 10명을 대동하여 이서를 죽이려 했다고 하니, 그런 것이 아닐까?”“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서가 위험해요. 안돼요.”은철이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반드시 이서를 찾아 하씨 가문의 병원에 입원시켜야겠어요.”하씨 가문의 병원은 과연 H국의 최고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은철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자, 그제야 하경철이 입을 열었다.“지환아, 이렇게 큰일이 났는데, 왜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니?”“저도 방금 알았어요.”하경철이 말했다.“그래? 난 네가 알고 있었을 거라 생각했단다.”“작은 아버지, 농담 마세요. 저는 점쟁이가 아닌걸요.”지환이 물 흐르듯 매끄럽게 대답했다. 하경철은 조금의 이상함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이서가 염려되던 하경철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한참이 지나서야 은철이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할아버지, 괜찮아요. 방금 병원 측에 물어봤더니 수면제 성분이 함유된 약물을 과다 섭취한 탓에 깊은 잠에 빠진 것일 뿐이래요.”“내일이면 깨어날 수 있다 하니, 걱정하실
하경철은 안색이 약간 변하여 몸을 곧게 펴고 앉았다. “알다마다, 근데, 그거랑 무슨 상관이지?”“민예지가 미쳐버리자 민씨 가문은 줄곧 이서에게 솓을 뻗쳐 보복하려 들었어요. 저도 그때, 이서가 집안과 관계를 끊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런 이서가 혹여라도 대처할 방법이 없을까 걱정됐어요, 그래서 민씨 가문에게 협력을 제의했던 겁니다. 조건은 이서를 놓아주는 거였고요.” 하경철이 지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왜 그랬는지 물어봐도 되겠니?”지환이 하경철의 눈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다.“그럼요, 제가 이서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지환의 말을 들은 하경철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하경철이 숨을 깊게 들이 마시며 말했다.“드디어 인정하는구나.”“저는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지환이 말했다.“윤이서는…….”조수석에 앉은 은철이 뒷좌석에 흐르는 긴장감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 히죽히죽 웃어보였다.“제가 말씀드렸죠? 어른들이 특히 이서를 좋아하신다니까요.” 하경철은 너무도 무딘 은철의 모습에 말을 잇지 못했다. 하경철이 목소리를 낮췄다.“그럼, 이서정은 또 어떻게 된 거야?”“작은 아버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이서정은 단지 하씨 가문의 안주인의 몫을 잘 하면 될 뿐입니다.”하경철은 허허 웃으며 고개를 들어 지환을 바라보았다.“그래서 이서정이 결혼을 대충 얼버무렸던건가?”“네.”지환은 더 이상 하경철을 쳐다보지 않았다.“너희들은 부부야!”간단해 보일지 모르는 하경철의 이 말에는 숨은 꿍꿍이가 있었다.지환은 속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저희는 확실히 부부입니다. 그러나 결혼이 있으면 이혼도 있는 법이죠.”“다른 사람에게…… 장가를 들겠다고?”하경철이 간신히 화를 참으며 조수석에 앉은 은철을 바라보았다.“예.”“설령 그 여자가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예.”하경철이 지팡이를 꽉 움켜쥐었다.“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한 거니?”이번에 지환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잠시 침묵을 지키
잠시 후, 지환이 한 층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혹여라도 하경철을 화나게 할까 두려운 듯했다.“이서는 이제 겨우 20대입니다. 미래가 길어요. 은철이는 단지 이서와 20년을 함께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서와 30년, 40년, 나아가서는 50년 미래까지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이 말을 들은 하경철이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그래서, 앞으로 이서와 함께 하겠다는 건가?”“네.”지환의 대답에 화가 난 하경철은 곧바로 차에서 내렸고 차 문을 세차게 닫았다.차량의 옆에서 대기 중이던 주 집사는 차에서 내리는 하경철을 부축하기 위해 다가갔으나, 하경철이 그런 주 집사의 손을 뿌리쳤다. 하경철이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아차린 은철이 바삐 하경철을 뒤를 따랐다.“할아버지, 왜 그러세요?”지환은 굳게 닫힌 차 문을 흘겨보며 운전사에게 말했다.“돌아갑시다.”지환의 지시를 받은 운전사는 하씨 저택을 뒤로한 채 차를 돌렸다.……하씨 가문의 고택.하경철이 성큼성큼 서재로 걸어 들어갔다. 은철이 하경철의 뒤를 이었다.“할아버지, 도대체 왜 그러세요?”‘도대체 작은 아빠랑 무슨 대화를 나누셨길래 이러시는거야.’하경철이 은철을 노려보았다.은철은 몹시 당황스러웠다.“할아버지,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제가 뭐 거슬리게 한 거라도 있나요?”“뭐 하나 묻지.”하경철이 화가 난 채 은철에게 물었다.“도대체 너는 이서를 마음에 품고 있는 거니, 아닌 거니? 이서와 함께 있고 싶지 않니?”은철의 얼굴이 화끈거렸다.“할아버지, 왜 또 그런 질문을 하세요? 할아버지께서 밧줄을 찾아 저희 두 사람을 강제로 묶어둔다고 해서 저희가 함께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났어. 서두르지 않는다면, 지환이 너…… 다시는 이서를 볼 수 없을 거야!”은철은 하경철의 말을 믿지 않는 듯했다.“경쟁자라…… 누구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할아버지, 저는 이번 일로 확실히 알았어요. 이서의 남편은 저에게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은 사람이라는걸요…….”“더 이
“어르신, 무슨 말씀이십니까?”“만약 내가 은철이에게 이서와 결혼하라고 종용하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벌써 함께였을지도 모르겠군.”“어르신, 그건…….”“그 아이는 고집쟁이거늘. 만일 자네가 그 아이의 머리를 누르며 물을 마시라 한다면 그 아이는 한사코 마시지 않을 거야. 나는 왜 이를 예전에는 알지 못했을까.”주 집사가 하경철의 말에 동의하며 말했다.“맞습니다. 예전에는 한바탕 말다툼이 있어야만 도련님께서 이서 아가씨를 뵈러 가셨었죠. 그런데 방금은, 어르신께서 도련님과 정반대의 태도를 보이시니, 바로 이서 아가씨를 뵈러 가시는군요.”“에휴…….”하경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나는 그저 좋은 마음이었네. 앞으로는 반대로 해야겠어.”주 집사가 하경철을 안심시켰다.“어르신, 그래도 방법을 찾았지 않습니까. 머지않아 도련님께서는 도련님의 마음속에 이서 아가씨가 계신다는 것을 깨달으실 겁니다.”“시간이 없을까 걱정이군.”하경철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가로 향했다.“요즘 점점 더 힘에 부치는군. 은철이 녀석이 이서와 함께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아.”“어르신…….”주 집사는 하경철의 뒤로 걸어갔다.“단지. 최근에 좀 피곤하셨을 뿐입니다. 편히 쉬시면 회복하실 수 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반드시 장수하실 겁니다.”“오래 사니 별 재미가 없구나. 나는 그저 저 너머에서 지원이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네.”“어르신…….”하경철은 손을 흔들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자네, 서정이와 지환이 쪽을 잘 지켜봐 주게. 조금의 이상이라도 있으면 즉시 나에게 알려주고.”주 집사가 긴장한 듯 입을 열었다.“어르신, 설마 하 대표님께서…….”“이서를 좋아한다고 하더군. 그래도 이서의 남편은 아닌 눈치였어. 이서와 이서의 남편을 이혼시킬 방법을 찾고 있는 것 같더군.”“그렇다면 어르신의 의심이 잘못됐던 건가요?”“아직 결론을 내리기는 일러. 어쨌든 두 사람을 잘 지켜봐 주게.”“알겠습니다.
“엄마, 뭔가 오해하신 것 같아요. 현태 씨가 왜 그 돈을 은행에서 대출받았다고 생각하세요? 현태 씨의 돈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소희의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심유인이었다.“소희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운전기사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이 있겠어?” 소희도 심유인을 따라 웃기 시작했다.“언니, 현태 오빠가 누구의 운전기사인 줄 알고나 말하는 거예요?” “뭐?”심유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이서 언니예요.”“이제 이해가 좀 되세요?”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심유인의 표정을 보고 말을 덧붙였다.“현태 오빠가 운전기사인 건 명백한 사실이에요. 하지만 또 다른 직업도 있어요. 그건 바로 이서 언니를 보호하는 거죠.” “운전기사일 뿐만 아니라, 경호원이란 말이에요.” 심유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시큰둥하게 말했다.“흥, 그게 뭐 어쨌다고 그래? 기껏해야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하는 사람인 거잖아. 우리 집에도 경호원이 있어. 경호원이라 해봤자 한달에 몇백만원을 버는 게 전부일 텐데, 90억짜리 헤어샵을 사는 게 말이나 돼?” 소희는 일부러 자랑하는 것 같아서 망설였지만, 현태의 진짜 과거를 털어놓기로 했다.“허, 몇 년 동안 UFC의 챔피언 자리를 지킨 사람한테, 몇십억이 무슨 대수라고 그러세요? 혹시 꿈이라도 꾸는 거예요?” “UFC?!”심유인은 격투기 분야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UFC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소희는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듯 말했다.“모르면 인터넷에 찾아보시던가요.”“언니, 제가 언니의 속셈을 모를 줄 알아요? 현태 오빠가 평범한 운전기사라고 생각해서 일부로 언니의 남자 친구도 부른 거잖아요.” “저희 부모님께는 남자 친구를 소개하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은 언니의 남자 친구와 제 남자 친구를 비교하고 싶은 거잖아요, 안 그래요?” “이런 말까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언니가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것 같아서 말씀해 드릴게요. 제 남자 친구가 언니의 남자 친구보다 돈이 더 많을
현태는 설명하기 시작했다,“제가 그 헤어샵을 인수하긴 했지만, 사모님께 드릴 거거든요.” “앞으로는 사모님께서 그 샵의 사장님이십니다. 미용은 하고 싶을 때 하시면 됩니다.”심씨 가문에는 전속 미용사가 있었지만, 꽤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게다가 이지숙이 미용 기계를 사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어떤 시술을 두세 달이나 반년 정도 지나야 다시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미용 기계에 먼지만 앉지 않겠는가?결국 이지숙은 헤어샵에 가서 시술받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헤어샵에 가는 것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시간을 예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가끔 일이 생겨서 시간을 놓치면, 다시 예약을 잡아야만 했다.이지숙은 진작에 헤어샵을 인수하려고 했는데, 줄곧 자신에게 적합한 헤어샵을 찾지 못했다.이지숙은 현태가 선택한 헤어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하지만 그 샵의 사장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외국에서도 적지 않은 명성을 떨치던 터라 온 가족이 외국으로 이사하기도 했다. 이지숙은 이미 그 사람과의 연락을 시도했지만, 끝내 연락이 닿지는 않았고, 모든 일은 흐지부지되었다. 그런데 바로 오늘, 생각하던 일이 이루어진 것이었다.심유인은 ‘말도 안 돼’ 라는 말만 연신 해댔다.“말도 안 돼요! 임현태 씨는 그냥 운전기사잖아요. 대통령을 위해 운전한다고 해도 헤어샵을 살 수는 없을 거라고요!”그 헤어샵은 심유인도 아는 곳이었다.‘거긴 적어도 100억은 있어야 인수할 수 있는 곳이라고!’ 이지숙도 마음속에 품었던 호기심을 드러냈다.“이 샵의 사장이 계속 외국에 있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그 사람하고 연락한 거죠?” “아, 그 부분은 하 대표님께서 힘써주셨습니다. 마침 하 대표님께서 그 샵의 사장님과 구면이라고 하시더군요. 제가 하 대표님의 곁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장님께서 흔쾌히 샵을 양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지숙이 물었다.“하 대표가 이 일에 직접 나섰다고요?” “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순조롭
심유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고작 한 세트가 다예요?”“그래도 이해는 해드릴게요. 이게 능력 범위 내에서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제품이었을 테니까요. 800만원, 900만원을 저축하려면 몇 개월은 걸려야 하잖아요, 그렇죠?” 이지숙이 곧장 입을 열었다.“유인아, 그게 무슨 말이니? 선물은 금액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거란다.” “그래.”심근영도 현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네 숙모를 위해 스킨케어 제품을 골랐다는 건, 충분히 마음을 썼다는 증거란다.”심유인이 입을 삐죽거리자,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아무리 값비싼 선물보다 마음이 중요하다지만, 조금 쑥스러워서 다른 선물도 준비해 왔습니다.”심유인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그 선물도 화장품은 아니겠죠? 또 몇백만원짜리인 건가요?”“유인아!”이지숙은 다소 불쾌해졌지만, 성격이 좋은 현태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아닙니다, 이번 선물은 스킨케어 제품보다 조금 비싼 거거든요.”현태는 이 말을 끝으로 작은 선물 상자를 꺼냈다.심유인이 목을 길게 빼며 재촉했다.“숙모, 어서 열어보세요. 목이 빠질 것 같은데, 대체 뭐예요?” 이지숙은 손에 쥔 작은 상자를 묵묵히 바라보았다.‘꽤 가벼워. 아무래도 큰 선물은 아닌 것 같아.’“밥부터 먹고 열어보자꾸나.” “지금 열어보시죠. 심유인 씨도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신 모양인데요.” 현태가 이지숙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심유인이 경멸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방금 그 스킨 케어 제품보다 조금 더 비싼 선물을 꺼내면, 내가 감탄한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허, 정말 웃겨.’‘저것도 고작 몇백 만원짜리 선물일 뿐일 거야.” “숙모, 선물한 사람도 저렇게 말하잖아요. 어서 열어보세요!”이지숙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선물 상자를 열자마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스킨케어 제품이 아니라...’‘작은 증서?’상자를 또 한 번 확인한 이지숙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이건.
“그래, 네 남자 친구도 같이 봐주마.”심근영이 대답했다.“같이 식사하자꾸나, 그럼 된 거지?” 심근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심유인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감사합니다, 삼촌, 역시 제게 정말 잘해주시네요.”소희는 그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연기가 계속될 모양이군.’ “삼촌, 민찬 씨가 선물도 사 왔어요. 이것 좀 보세요!”심유인은 심근영을 끌고 선물 더미 앞에 다다랐고, 이지숙에게 보여줬던 선물 세 개를 집어 들었다.심유인은 현태가 가져온 선물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심근영은 심유인의 말을 듣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마음은 고맙지만, 우리는 네 친부모가 아니잖니. 네 남자 친구가 우리를 위해 이렇게 많은 돈을 쓰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구나.”“우리 회사에 가서 돈을 받고, 같은 값어치의 답례품을 사주도록 하렴.” 심유인은 순간적으로 너무 기뻐서 눈꼬리를 치켜들었다.사실 그 선물들을 산 사람은 심유인이었는데, 그녀는 수중에 그렇게 큰돈이 없어서 모두 신용카드와 할부로 결제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심씨 가문의 회사에 가서 돈을 받으라니!심유인은 이 기회에 카드 빚을 메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 더 챙길 수도 있었다. 나중에 누군가 물어본다면, 민찬에게 답례 선물을 산 것이라고 하면 그만일 테니 말이다.생각할수록 심유인은 점점 더 흥분했고, 심근영이 이미 허리를 숙여 선물 상자를 하나 집어 든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 안에는 뭐가 들었지?”심유인은 심근영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말했다.“삼촌!” 심근영이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왜?” “그게...”심유인은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안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는 다른 사람이 절대 알면 안 돼.’ ‘적어도 심소희의 남자 친구라는 사람은 절대 알면 안 된다고!’ “소희의 남자 친구분도 선물을 가져왔다고 들었어요. 아직 그 선물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했는데, 그것부터 열어 보는 게 어떨까요?” 심근영은 현태를 바라보았다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심유인은 즐거워했다.“와, 가난하긴 해도 염치는 있으신가 보네요. 하지만 그게 유일한 장점이겠죠?” 선물은 현태가 스스로 준비한 것이기에, 소희도 현태가 무슨 선물을 샀는지 몰랐다.그래서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 소희는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오빠, 무슨 선물을 샀는데요?”‘소민찬보다 못한 선물이면 큰일인데.’ 소희는 선물로 심유인과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어쨌든 현태가 부모님을 보러 오는 날이니, 선물의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현태가 심씨 가문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소희는 현태가 심씨 가문의 권세나 재물 탓에 손가락질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우선 들어가자. 곧 알게 될 거야.”이지숙도 계속 밖에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말했다.“그래요, 무슨 얘기든 들어가서 하자고요.”고개를 끄덕인 소희가 현태의 선물을 들어주려 하자, 현태가 말했다.“괜찮아, 내가 들게.”이 세심한 배려는 곧장 이지숙의 눈에 띄었는데, 여자는 본래 본능적인 행동을 가장 신경 쓰기 마련이지 않은가?현태의 행동을 본 이지숙은 소희가 거짓말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겉으로 보기에는 덩치도 크고 투박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의외로 세심한 면이 있네?’이렇게 생각한 이지숙은 현태를 다소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하지만 현태는 이지숙의 반응이 조금 변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거실로 들어서자, 이지숙은 고용인에게 심근영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사실, 심근영은 일찍 깨어났기에,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심근영이 시간을 질질 끌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2층에서 현태를 관찰했기 때문이었다.고용인의 동정을 들은 심근영이 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곧 나가도록 하지.” 심근영은 고용인이 떠난 후에야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그제야 현태의 생김새를 똑똑히 보았다. 현태는 키가 크
‘게다가 한동안 운전기사로 일한 적도 있지만, 월급은 적지 않았어. 한 달에 2천만원으로 시작했고, 윤 대표님께 일이 생기면 월급도 더 올라갔으니까.’“저분은...”현태는 상대의 신분을 확실히 알아본 후, 어떤 태도로 대할지 고민하기로 했다. 소희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현태를 바라보았다.“정말 몰라서 그래요?”현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알아야 해?” 소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나한테 사건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미친 듯이 날뛰던 사람이잖아요!’ ‘대체 왜 심유인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내 사촌... 언니예요.”소희는 심유인과 가족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언니도 오늘 남자 친구를 데려왔더군요.” “사촌 언니? 소희 씨의 친언니가 아니고?” 소희가 낮게 불평을 내뱉었다.“아니에요, 우리 언니일 리가 없잖아요!”“그럼 왜 남자 친구를 데리고 소희 씨 집에 온 거야? 부모님이 안 계셔서 그런 거야?” 이 말을 들은 소희는 하마터면 웃음을 참지 못할 뻔했다. 특히 현태의 그 어리숙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은 일부러 그런 것처럼 보이게 했다. 심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다.“말이면 다인 줄 알아요?!” “제 남자 친구가 틀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소희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일반적인 경우에는 남자 친구를 부모님께 소개하잖아요. 언니처럼 남의 집으로 달려오는 게 아니고요.”“잘 모르는 사람들은 언니한테 부모가 없어서 남의 부모에게 허락받는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결국 이지숙이 나선 후에야 유인의 난처함은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어서 들어가자꾸나, 아버지께서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계셔.”“네, 엄마.” 소희는 현태의 팔짱을 끼고 심씨 가문의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몇 걸음도 안 걸었는데, 금세 정신을 차린 심유인이 또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잠깐만, 소희야,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어쨌든 오늘은 네 남자 친구가 삼촌과 숙모를 처
심유인은 한참이 흘러도 소희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갑자기 따분해졌다. “소희야, 네 남자 친구는 언제 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안 오는 게 좀 이상하네. 설마 별장에 처음 오는 거라서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이렇게 작은 곳에서 길을 잃으면 운전기사를 할 수 있겠어요?”심유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 자랑스러운 표정은 뭐야?’‘운전기사인 남자 친구를 두고도 창피하지 않다 이거야?’‘허! 심소희, 순진하긴.’유인이 막 입을 떼려던 찰나, 밖에서 고용인의 성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사, 사모님, 아가씨의 남자 친구분께서 오셨습니다!” ‘드디어 주인공이 나타나는구나!’심유인은 당사자인 소희보다 더 초조해하며 먼저 달려 나갔다.‘운전기사라더니, 몰고 온 차가 고용주 명의인 건 아니겠지?’ 밖으로 나간 유인은 마침내 차에서 내린 현태를 마주했다.그의 옷차림을 본 순간, 유인은 웃음을 터뜨렸다.‘풉, 그냥 티셔츠에 트레이닝 팬츠를 입고 온 거야?’‘여자 친구의 부모님을 만나러 오면서도 저런 옷을 입고 오다니, 비웃음을 당하려고 작정한 건가?’ 하지만 눈살을 찌푸린 건 소희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현태의 체면이 깎일까 봐 걱정한 것이 아니라, 현태가 자기 부모님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할까 봐 걱정한 것이었다. 소희는 빠르게 현태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그저께 양복도 사줬는데, 왜 양복이 아닌 캐주얼복을 입고 온 거예요?” 현태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나도 양복을 입고 오려고 했지. 그런데 그 옷은 오래 입으면 불편하더라고. 소희 씨의 부모님을 뵈면서도 온 마음을 옷에 쏟을까 봐 걱정돼서 이렇게 입었어.” “사소한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잖아?”소희가 대답했다.“그래요? 양복을 입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나 봐요. 하지만...”소희가 이지숙을 흘긋 바라보았다. 과연 이지숙의 낯빛은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물론 최선을 다해서 숨기는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현태가 불안해하며 물었다.“어머님
심유인이 그중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숙모, 민찬 씨가 특별히 준비한 팔찌예요. 마음에 드세요?” 이지숙은 흘긋 보더니 눈가에 약간의 웃음기를 띠었다.그 팔찌는 아주 훌륭한 자태를 뽐내는 것으로, 수천만원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유인이의 친엄마도 아니고, 소민찬 씨는 우리 집에 처음 오는 건데도 아주 통 크게 행동하는구나.’하지만 이지숙은 잠시 후에 소희의 남자 친구가 올 것을 떠올리자 약간 걱정이 되었다. 사실, 며칠간 이어진 심근영의 설득에 이지숙은 소희의 상대가 운전기사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그래, 어차피 우리 심씨 가문은 많은 자원과 돈이 있잖아. 그 사람이 성실하기만 하면, 우리 가문의 사위라는 이름으로 상류층은 아니어도 소소한 부자는 될 수 있을 거야.’하지만 지금 소민찬의 씀씀이를 보자, 이지숙은 또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상류사회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서로 비교하는 것이었다. 가방이나 옷 같은 큰 것들뿐만 아니라, 가끔은 화장품조차도 비교해야 하니 말이다. 이지숙은 이렇게 비교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으나, 상류 사회의 분위기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밀리면, 매번 모임 때마다 얘깃거리가 될 텐데...’ 이것이 바로 이지숙이 소희의 상대가 운전기사라는 것에 반감을 가지 이유였다.엄마로서, 자기 딸이 잘못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을 터. “숙모, 이건 삼촌께 드리는 거예요.” 심유인이 꺼내든 두 번째 선물은 시계였다. “롤렉스 시계예요. 최신 모델인데, 삼촌도 분명히 좋아하시겠죠?”이지숙은 심유인이 손에 든 시계를 보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듯했다. ‘저 시계는... 적어도 1억은 넘을 거야.’ ‘물론 유인이한테는 작은 성의일 뿐이겠지만...’ 이지숙이 불안한 표정으로 소희를 흘긋 보았다. 하지만 소희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심유인의 선물 공세가 고의로 현태를 깎아내리려는 의도인 것을 알아차렸다.‘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이런
소희는 심유인이 오늘도 트집을 잡으러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렇지 않고서야 아침 일찍 자신의 남자 친구를 데리고 올 리가 없지 않은가.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심유인이 멍청한 건 알겠는데, 남자 친구라는 사람도 멍청한 건가?’‘여기까지 따라와서 같이 소란을 피우다니.’잠시 후, 소희는 소민찬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뭐?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고? 하하, 심씨 가문 아가씨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니!”“참, 윤 대표와도 사이가 아주 좋으시다면서요?” “역시 끼리끼리군요. 남자 친구마저 똑같은 가난뱅이니까요.”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소희가 다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의 남편이 YS그룹의 전 대표인 하지환 씨라고 얘기하진 않은 모양이네요.” 순간, 심유인의 표정이 어색하게 구겨졌다.하지만 소민찬은 이 말을 듣자마자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하하’ 큰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웃겨 죽겠네요. 윤 대표의 남편이 하지환 대표님이라고요?” “유인아, 사촌 동생이라는 분이 허영에 가득 찬 분이신가 봐?” 유인은 다급하게 소민찬의 소매를 여러 번 당겼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윤 대표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면, 저는 물구나무서서 똥을 먹겠어요!” “누가 아침 일찍부터 우리 집에 와서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는 거죠?” 뒤에서부터 이지숙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돼지 멱따는 소리’라는 말에 소희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사석에서는 저런 면이 있으시구나.’ 소민찬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비록 소씨 가문의 일원이라 해도, 이지숙 앞에서는 힘을 쓸 방도가 없을 것이다.“안녕하십니까.” “소민찬 씨군요. 우리 집에는 어쩐 일로 온 거죠?” 유인이 민찬의 손을 잡고 말했다.“숙모, 민찬 씨는 제 남자 친구잖아요. 숙모께서 제 남자 친구를 한번 살펴봐 주셨으면 해서 데리고 왔어요.” 이지숙이 말했다.“네 남자 친구는 네 어머니께 보여 드려야지. 내가 허락한다고 한들, 소용없지 않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