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의 목소리를 들은 몇 사람은 경찰의 목소리라 이토록 친절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그들은 즉시 손을 들고 한쪽에 쪼그리고 앉았다.“…….”지환은 그들을 흘겨보고는 허리를 굽혀 이서를 안았다.그러고는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산 아래로 천천히 걸어갔다.이서는 지환의 품에 안겨 볼이 살짝 뜨거웠다.“지환 씨.”“음.”“방금 정말 멋있었어요.”지환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이고 이서를 보았다.“뭐라고?”이서의 얼굴은 이미 붉은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아니에요.”지환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 들었는데?!”“들었으면서 왜 물어요?”“다시 듣고 싶어서.”이서는 입을 오므리고 말을 하지 않았다.지환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이서를 안고 한걸음에 산에서 내려왔다.산 아래에 도착하니 구급차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지환은 이서를 안고 구급차에 올랐다.의사는 즉시 이서의 상태를 살폈다.의사에게 시야가 가려져 지환이 눈에 안 보이자, 이서는 당황한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었다.“지환 씨…….”“음, 나 여깄어.”지환은 이서의 손을 잡았다.이서는 그제야 마음이 안정되는 듯했다.위아래 눈꺼풀을 뜨기도 힘들 정도로 무거웠다.그녀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저기요, 아가씨, 뭐라고요?”이서의 입술이 또 움직였다.환자의 얘기를 듣고자, 의사는 몸을 숙여 이서의 입술 옆으로 다가갔다.그는 드디어 똑똑히 들었다.‘당신 정말 멋있어요.’천천히 몸을 일으킨 의사는 이서의 입술에 번진 미소를 보며 의아한 듯 머리가 훤히 벗겨진 정수리를 만졌다.……이때, 이서정과 조용환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온 이하영은 산기슭에 도착할 무렵 눈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들의 길을 막아섰다.앞장서 있는 사람은 바로 이천이었다.이천을 보자 이서정은 땅굴을 파고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낯이 뜨거웠다.이서정을 본 이천도 눈빛이 차가워지며 손을 흔들며 말했다.“다 잡아.”“예.”사람들이 앞으로
병원.병실 문을 열고 들어간 이천은 눈감고 침상에 누워있는 이서와 하루 밤낮을 꼬박 밤새운 지환을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이상언과 눈을 마주쳤다.“쟤 밤새 한숨 안 자고 이렇게 이서 씨 지키고 있었던 거예요?”“네.” 이천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하지만 주치의 얘기 들어보니, 신경안정제 성분의 약을 써서 내일이나 되어야 이서 씨 깨어난다고 들었는데?굳이 이렇게 지키고 있을 필요 있나요?”“누가 아니래요?” 이천이 계속 말을 이었다.“하지만 소용없어요. 사모님 곁을 지키겠다고 고집하면서, 사모님이 깨어났을 때 첫눈에 자기가 보여야 한다고…….”이상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이해가 되긴 합니다. 잃어버렸다가 어렵게 되찾았는데 또 이런 일이 생겼으니…….”“그런데, 오늘 저녁에 회장님이 민씨 집안 초대에 참여하겠다고 응하셨는데……. 조금 전에도 민호일이 회장님 언제 출발하셨는지 물어보던데…… 어떡하죠? 거절해야 할까요?”이상언은 아무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병실에 허스키한 목소리를 울려 퍼졌다.“파티 몇 시?”이천이 놀란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그는 지환이 그들의 대화를 전혀 안 듣고 있는 줄 알았다.“7시입니다.”“지금 몇 시?”“5시 좀 넘었습니다.”“준비해.”이천은 제자리에 서서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마침내 반응했다.“예.”그러나 두 발은 제자리에 묶인 듯 좀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그는 상언을 보며 아직 충격에서 가시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상언은 가볍게 웃으며 이천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가서 준비해요.”말하면서 두 사람은 나란히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엘리베이터 입구에 도착해서야 이천은 마침내 잃어버린 목소리를 되찾았다.“이 선생님, 방금 보셨죠?”상언은 눈썹을 찌푸리며 일부러 물었다.“뭘 말인가요?”“회장님…… 회장님이…….”이천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상언은 웃으며 말했다.“뭐가 달라진 거 같아요?”이천이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처럼 이성적인 모습으로
그제야 불안했던 두 사람의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저희 좀 빨리 이서한테 데려다주세요.”하나가 상언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상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슬며시 하나의 손을 빼냈다.“이 비서님께서 데려다 드릴 겁니다. 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상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나는 무엇인가 이상한 낌새 느꼈다.“두 분, 제가 모시겠습니다.”하나는 이천의 말에 어렴풋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이천의 뒤를 따르면서도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는 없었다.왜인지는 하나 자신조차도 알 수 없었다.하나와 나나가 병실로 들어서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지환의 모습이 보였다. 밤새 이서의 곁을 지키느라 한숨도 못 잔 것이 틀림없었다.하나는 차마 그런 지환에게 원망 섞인 말들을 쏟아낼 수 없었다. “왔구나.” 지환이 고개를 들어 하나와 나나, 그리고 이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이천이 막 설명하려던 찰나, 지환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서 좀 부탁할게.”“어디 가세요?” 하나가 불쑥 물었다.“결판내러.”‘결판? 민씨 그룹과의 결판?’하나는 그제야 이서를 납치한 이들이 민씨 그룹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지환은 하나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성큼성큼 병실을 나섰다.하나 역시 지환을 따라 병실을 나서려 하자, 나나가 하나를 붙잡았다. “하나 언니.” 나나는 멀어져 가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내버려 두세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계시다가는 여기 틀어박혀 죽어버리실지도 몰라요.”“그래봤자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뿐이잖아. 아무리 형부가 하은철의 둘째 삼촌의 직원이라 해도 민씨 그룹에 맞설 수 있을까? 난 정말…….”“하나 언니.” 나나가 하나를 의자에 앉혔다.“형부도 형부 나름의 해결책이 있으실 거예요. 그리고 경찰도 그 사람들을 체포했다 하니,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배후가 이하영이라고 자백만 해준다면 이하영이 감옥에 가는 건 시간문제일 거예요.”‘민씨 그룹의 기세가 이
문이 열리자, 하은철과 하도훈이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뒤를 하경철이 이었다.차가 떠날 때까지도 지환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사람들의 시선은 민호일에게서 멀어져 갔다.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민호일 역시 심히 당황했다. 그러나 이내 빠르게 걸음을 옮겨 하경철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어르신.”하경철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내가 늦은 건 아니겠지?”“아닙니다.”민호일은 정중히 하경철을 대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시종일관 하경철의 뒤를 향해 있었다. 그럼에도 지환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민호일은 참지 못하고 하경철에게 물었다. “하 대표님께서는 같이 오지 않으신 건가요?”하경철이 민호일의 말을 듣고 허허 웃으며 말했다. “지환이라…… 날 비웃을까 두렵군. 나 역시 그 아이를 본지 아주 오래되었어. 오늘 자네 덕을 보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아이를 만날 기회는 없을 것이야.”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오늘도 베일에 감춰진 지환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수선해졌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작은 비웃음마저 터져 나왔다.“아버지, 지환이 녀석을 탓할 수는 없으세요.” 하도훈이 웃으며 말했다. “국내 일로도 모자라 외국 일로 아주 바쁠 테니까요. 한 사람의 몸으로 두 사람의 일을 겨우 쳐내는 중인데, 아버지를 만나러 올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확실히.” 하경철이 민호일의 부축을 받으며 소파에 앉았다.“지환이 녀석이 짧은 시간 안에 최고의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건 노력하려 했고, 또 대담하게 노력했기 때문이지.”“맞습니다.” 심씨 가문의 가주인 심근영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후대가 하 대표님의 절반이라도 따라간다면 걱정이 없겠습니다.” 심근영이 소씨 가문의 가주인 태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님, 아드님을 외국에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YS 그룹과 협력하는 프로젝트가 있으신 모양이더군요.”소태성이 심근영을 흘겨보았다.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늙은 여우들이 아니던가.‘YS 그룹과
장차 소씨 가문의 후계자가 될 지태는 민호일에 의해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체면을 구기게 된 것이 썩 거슬렸다.지태가 반박하며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소태성과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지태는 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소태성이 담담하게 말했다. ”어르신께서 마음에 두고 계신 분이, 어찌 바닥을 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어르신?”소태성은 이 말을 들은 민호일의 기세가 조금이나마 수그러들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민호일의 기세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고, 오히려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어르신께서도 사람을 잘 못 보실 때가 있으실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은철이 심히 불쾌해하며, 인상을 크게 찌푸렸다.은철이 불쾌감을 느꼈던 것은 민호일의 오만방자한 태도 때문이 아니었다. 이서를 깎아내리려는 민호일의 속내가 훤히 드려다보였기 때문이었다.은철이 민호일을 향해 차갑게 입을 열었다. “이서가 그저 운이 좋았던 거라고요? 정말 이서가 아무런 능력도 없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물론입니다.” 민호일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 “윤 대표가 정말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이미 윤씨 그룹을 4대 가문의 반열에 돌려놓고도 남았을 겁니다.”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민호일과 은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은철이 냉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민 대표님 말씀은, 이서가 병신 같은 인간이라는 거군요. 저는 병신보다도 못하다는 거고요.”민호일이 당황한 듯 몸을 곧게 펴고 앉았다. “그러니까 제 말은…….”“모두가 아시다시피, 하윤컴퍼니는 제가 투자했던 회사입니다. 비록 이서가 윤씨 그룹의 CEO가 된 직후, 투자를 철회했었지만요. 저희가 투자를 철회하자 윤씨 그룹의 대부분의 직원이 회사를 떠났습니다. 한마디로 그때의 윤씨 그룹에게는 자금도, 사람도 없었단 말입니다. 이서 혼자 묵묵히 버텨냈던 거죠.”“하지만 하윤컴퍼니의 지금 상황은 이전과 완전히 다릅니다. 어마어마한 금액의 자금 지원, 뛰어
입구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민호일은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서야 비로소 맨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민씨 저택의 입구에는 초호화 람보르기니가 주차되어 있었는데, 차종을 보아하니 콘셉트 S인 듯했다.오픈탑 디자인의 차량이었기에 사람들은 차 안에 앉아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그 남자는 선글라스를 낀 채 강한 카리스마를 뽐내고 있었다.검은색 양복을 입은 그 남자의 옆선은 날렵하다 못해 날카로웠다.그 남자가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 탓에 사람들은 그의 관능적인 얇은 입술과 높게 솟은 콧날만을 볼 수 있었다.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민호일이 급히 차량으로 걸음을 옮겼다.“하 대표님, 드디어 오셨군요.”선글라스 아래의 지환의 눈은 칼보다 더 날카로웠다.선글라스를 사이에 두고 민호일은 오싹함을 느꼈다.“하 대표님?”지환이 턱을 살짝 든 채 거실을 향해 걸어들어갔다.민호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지환의 뒤를 따랐다.거실에서 자리를 지키던 은철이 지환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작은 아빠.”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가주가 분분히 고개를 돌려 지환을 바라보았다. ‘하 대표님을 이토록 가까이에서 뵙다니…….’‘아우라가 과연 H 국 최고의 갑부다우신걸?’“하 대표님.”두 가문의 가주 역시 지환의 앞에서는 자신들이 신분이 낮다고 생각하여 멋쩍게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살짝 고개를 끄덕인 지환은 하경철의 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선글라스를 벗었다.“작은 아버지.”하경철이 지환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지환아, 정말 오랜만이구나. 나는 네가 이 작은 아버지를 잊은 줄 알았단다.”지환은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말을 잇지는 않았다.하경철이 물었다.“어쩜 이리도 말랐니? 그동안 바삐 일하느라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은 모양이구나.아이고, 네 아버지가 너에게 일찍 결혼하라 종용했던 것은 누군가 너를 챙겨주길 바라서였거늘. 보아하니, 새색시가 영 잘하지는 못하는 것 같구나.”눈
‘내가 손윗사람이거늘, 어찌 지환이가 나를 속일 수 있겠는가.’“할아버지.”은철이 다시 한번 낮은 소리로 하경철을 일깨웠다. 하도훈 역시 급히 민호일에게 물었다. “호일아, 제수씨는 아직인가? 지환이까지 도착했는데 우리더러 기다리라는 건 아니겠지?”민호일이 웃으며 말했다.“농담이 심하십니다. 바로 사람을 시켜 내려오라고 전하겠습니다.”민호일이 사람들을 불러들였다.“빨리 가서 사모님께 내려오라고 전하게.”사람들이 급히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러나 몇 분이 지나도록 이하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민호일은 눈살을 찌푸린 채 다시 한번 사람을 재촉하고서야 사람들에게 말했다.“모두 먼저 자리에 앉으시죠. 여자는 참 번거롭습니다. 화장도 하고 옷도 갈아입어야 하니, 여러분께서 이해 좀 부탁드립니다.”사람들은 환하게 웃으며 좌석 순서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지환은 시종일관 내색하지 않았다.소태성이 이 기회를 틈 타, 술잔을 든 채 지환에게 말했다.“하 대표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께서 지엽이을 데리고 외국에서 가신 덕에 많은 재미 좀 봤을뿐더러 해외 시장도 순조롭게 넓힐 수 있었습니다.”최근 몇 년 간 해외로 진출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 소씨 가문이었다. 하지만 요령을 알지 못해 빈번히 실패해왔다.“정말 감사합니다.”지환이 술잔을 든 채 담담하게 말했다.“지엽 씨에게 감사해야죠.”소태성은 이해하지 못하고 옆자리의 지태를 바라보았다.지태 역시 오리무중이었다.“하 대표님, 무슨 말씀이세요?”“탁월한 안목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이서에게 반하셨으니까요.’지환은 어쩔 수 없이 지엽을 외국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소태성은 지환이 지엽의 사업 상의 안목이 탁월하다고 칭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과찬이십니다.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다듬어 먹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저희는…….”지환의 표정은 담담하여 이야기를 나눌 흥취가 전혀 없어 보였다. 소태성은 소씨 가문의 가주이자, H국의 제2 명문가 집안의 권력자로서 어떤
그 사람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며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이 광경을 본 민호일의 마음속에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때, 소파 한가운데 앉은 지환의 시커먼 눈동자에 독기가 스쳤다.민호일은 억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제가 올라가 보겠습니다,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시고, 이야기들 나누세요.”비틀거리며 위층으로 향하던 민호일은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2층에 다다른 민호일이 세차게 안방 문을 열어젖히자, 텅 빈 방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민호일은 집사를 향해 걸어가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누르며 물었다.“사모님은?”집사가 민호일의 발치에 풀썩 무릎을 꿇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어제 나가신 이후,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줄곧 사모님께 연락해 봤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요.”민호일이 집사의 명치를 걷어찼다.“쓸모없는 자식, 이렇게 큰 일이 났는데 왜 이제야 알려줘?”집사가 가슴을 가리며 말했다.“대표님, 이미 어제부터 사람을 시켜 사모님을 찾고 있으나, 지금까지도 연락이 없으니 경찰에 신고하시는 게 어떠신지요.”민호일이 이를 갈았다.“하나만 묻지. 어제 나가서 뭘 한다고 하던가?”“사모님…… 사모님께서는…….”집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민호일이 곧 터질 듯한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지금이 어떤 때인 줄 알고나 말을 안 하는 건가?”집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부들부들 떨며 말을 이어나갔다.“잡으러…… 윤 대표님을…….”“뭐라고?!”민호일이 목소리를 높였다.“윤 대표님을 …… 잡으러 가셨어요.”집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호일은 화를 참지 못하고 집사를 여러 번 발로 걷어찼다.“왜 걔를 잡으러 가? 설마 내가 하 대표와 계약을 체결한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비록 민호일 또한 윤이서를 죽도록 원망해왔으나, 지환과의 계약을 맺고 민씨 가문이 큰돈을 벌어들인 후로는 윤이서를 더 이상 상대하지 않으려던 참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이하영이 윤이서를 찾아가다니, 이는 재물신에게
“엄마, 뭔가 오해하신 것 같아요. 현태 씨가 왜 그 돈을 은행에서 대출받았다고 생각하세요? 현태 씨의 돈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소희의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심유인이었다.“소희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운전기사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이 있겠어?” 소희도 심유인을 따라 웃기 시작했다.“언니, 현태 오빠가 누구의 운전기사인 줄 알고나 말하는 거예요?” “뭐?”심유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이서 언니예요.”“이제 이해가 좀 되세요?”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심유인의 표정을 보고 말을 덧붙였다.“현태 오빠가 운전기사인 건 명백한 사실이에요. 하지만 또 다른 직업도 있어요. 그건 바로 이서 언니를 보호하는 거죠.” “운전기사일 뿐만 아니라, 경호원이란 말이에요.” 심유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시큰둥하게 말했다.“흥, 그게 뭐 어쨌다고 그래? 기껏해야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하는 사람인 거잖아. 우리 집에도 경호원이 있어. 경호원이라 해봤자 한달에 몇백만원을 버는 게 전부일 텐데, 90억짜리 헤어샵을 사는 게 말이나 돼?” 소희는 일부러 자랑하는 것 같아서 망설였지만, 현태의 진짜 과거를 털어놓기로 했다.“허, 몇 년 동안 UFC의 챔피언 자리를 지킨 사람한테, 몇십억이 무슨 대수라고 그러세요? 혹시 꿈이라도 꾸는 거예요?” “UFC?!”심유인은 격투기 분야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UFC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소희는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듯 말했다.“모르면 인터넷에 찾아보시던가요.”“언니, 제가 언니의 속셈을 모를 줄 알아요? 현태 오빠가 평범한 운전기사라고 생각해서 일부로 언니의 남자 친구도 부른 거잖아요.” “저희 부모님께는 남자 친구를 소개하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은 언니의 남자 친구와 제 남자 친구를 비교하고 싶은 거잖아요, 안 그래요?” “이런 말까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언니가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것 같아서 말씀해 드릴게요. 제 남자 친구가 언니의 남자 친구보다 돈이 더 많을
현태는 설명하기 시작했다,“제가 그 헤어샵을 인수하긴 했지만, 사모님께 드릴 거거든요.” “앞으로는 사모님께서 그 샵의 사장님이십니다. 미용은 하고 싶을 때 하시면 됩니다.”심씨 가문에는 전속 미용사가 있었지만, 꽤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게다가 이지숙이 미용 기계를 사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어떤 시술을 두세 달이나 반년 정도 지나야 다시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미용 기계에 먼지만 앉지 않겠는가?결국 이지숙은 헤어샵에 가서 시술받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헤어샵에 가는 것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시간을 예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가끔 일이 생겨서 시간을 놓치면, 다시 예약을 잡아야만 했다.이지숙은 진작에 헤어샵을 인수하려고 했는데, 줄곧 자신에게 적합한 헤어샵을 찾지 못했다.이지숙은 현태가 선택한 헤어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하지만 그 샵의 사장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외국에서도 적지 않은 명성을 떨치던 터라 온 가족이 외국으로 이사하기도 했다. 이지숙은 이미 그 사람과의 연락을 시도했지만, 끝내 연락이 닿지는 않았고, 모든 일은 흐지부지되었다. 그런데 바로 오늘, 생각하던 일이 이루어진 것이었다.심유인은 ‘말도 안 돼’ 라는 말만 연신 해댔다.“말도 안 돼요! 임현태 씨는 그냥 운전기사잖아요. 대통령을 위해 운전한다고 해도 헤어샵을 살 수는 없을 거라고요!”그 헤어샵은 심유인도 아는 곳이었다.‘거긴 적어도 100억은 있어야 인수할 수 있는 곳이라고!’ 이지숙도 마음속에 품었던 호기심을 드러냈다.“이 샵의 사장이 계속 외국에 있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그 사람하고 연락한 거죠?” “아, 그 부분은 하 대표님께서 힘써주셨습니다. 마침 하 대표님께서 그 샵의 사장님과 구면이라고 하시더군요. 제가 하 대표님의 곁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장님께서 흔쾌히 샵을 양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지숙이 물었다.“하 대표가 이 일에 직접 나섰다고요?” “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순조롭
심유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고작 한 세트가 다예요?”“그래도 이해는 해드릴게요. 이게 능력 범위 내에서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제품이었을 테니까요. 800만원, 900만원을 저축하려면 몇 개월은 걸려야 하잖아요, 그렇죠?” 이지숙이 곧장 입을 열었다.“유인아, 그게 무슨 말이니? 선물은 금액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거란다.” “그래.”심근영도 현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네 숙모를 위해 스킨케어 제품을 골랐다는 건, 충분히 마음을 썼다는 증거란다.”심유인이 입을 삐죽거리자,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아무리 값비싼 선물보다 마음이 중요하다지만, 조금 쑥스러워서 다른 선물도 준비해 왔습니다.”심유인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그 선물도 화장품은 아니겠죠? 또 몇백만원짜리인 건가요?”“유인아!”이지숙은 다소 불쾌해졌지만, 성격이 좋은 현태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아닙니다, 이번 선물은 스킨케어 제품보다 조금 비싼 거거든요.”현태는 이 말을 끝으로 작은 선물 상자를 꺼냈다.심유인이 목을 길게 빼며 재촉했다.“숙모, 어서 열어보세요. 목이 빠질 것 같은데, 대체 뭐예요?” 이지숙은 손에 쥔 작은 상자를 묵묵히 바라보았다.‘꽤 가벼워. 아무래도 큰 선물은 아닌 것 같아.’“밥부터 먹고 열어보자꾸나.” “지금 열어보시죠. 심유인 씨도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신 모양인데요.” 현태가 이지숙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심유인이 경멸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방금 그 스킨 케어 제품보다 조금 더 비싼 선물을 꺼내면, 내가 감탄한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허, 정말 웃겨.’‘저것도 고작 몇백 만원짜리 선물일 뿐일 거야.” “숙모, 선물한 사람도 저렇게 말하잖아요. 어서 열어보세요!”이지숙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선물 상자를 열자마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스킨케어 제품이 아니라...’‘작은 증서?’상자를 또 한 번 확인한 이지숙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이건.
“그래, 네 남자 친구도 같이 봐주마.”심근영이 대답했다.“같이 식사하자꾸나, 그럼 된 거지?” 심근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심유인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감사합니다, 삼촌, 역시 제게 정말 잘해주시네요.”소희는 그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연기가 계속될 모양이군.’ “삼촌, 민찬 씨가 선물도 사 왔어요. 이것 좀 보세요!”심유인은 심근영을 끌고 선물 더미 앞에 다다랐고, 이지숙에게 보여줬던 선물 세 개를 집어 들었다.심유인은 현태가 가져온 선물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심근영은 심유인의 말을 듣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마음은 고맙지만, 우리는 네 친부모가 아니잖니. 네 남자 친구가 우리를 위해 이렇게 많은 돈을 쓰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구나.”“우리 회사에 가서 돈을 받고, 같은 값어치의 답례품을 사주도록 하렴.” 심유인은 순간적으로 너무 기뻐서 눈꼬리를 치켜들었다.사실 그 선물들을 산 사람은 심유인이었는데, 그녀는 수중에 그렇게 큰돈이 없어서 모두 신용카드와 할부로 결제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심씨 가문의 회사에 가서 돈을 받으라니!심유인은 이 기회에 카드 빚을 메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 더 챙길 수도 있었다. 나중에 누군가 물어본다면, 민찬에게 답례 선물을 산 것이라고 하면 그만일 테니 말이다.생각할수록 심유인은 점점 더 흥분했고, 심근영이 이미 허리를 숙여 선물 상자를 하나 집어 든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 안에는 뭐가 들었지?”심유인은 심근영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말했다.“삼촌!” 심근영이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왜?” “그게...”심유인은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안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는 다른 사람이 절대 알면 안 돼.’ ‘적어도 심소희의 남자 친구라는 사람은 절대 알면 안 된다고!’ “소희의 남자 친구분도 선물을 가져왔다고 들었어요. 아직 그 선물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했는데, 그것부터 열어 보는 게 어떨까요?” 심근영은 현태를 바라보았다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심유인은 즐거워했다.“와, 가난하긴 해도 염치는 있으신가 보네요. 하지만 그게 유일한 장점이겠죠?” 선물은 현태가 스스로 준비한 것이기에, 소희도 현태가 무슨 선물을 샀는지 몰랐다.그래서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 소희는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오빠, 무슨 선물을 샀는데요?”‘소민찬보다 못한 선물이면 큰일인데.’ 소희는 선물로 심유인과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어쨌든 현태가 부모님을 보러 오는 날이니, 선물의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현태가 심씨 가문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소희는 현태가 심씨 가문의 권세나 재물 탓에 손가락질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우선 들어가자. 곧 알게 될 거야.”이지숙도 계속 밖에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말했다.“그래요, 무슨 얘기든 들어가서 하자고요.”고개를 끄덕인 소희가 현태의 선물을 들어주려 하자, 현태가 말했다.“괜찮아, 내가 들게.”이 세심한 배려는 곧장 이지숙의 눈에 띄었는데, 여자는 본래 본능적인 행동을 가장 신경 쓰기 마련이지 않은가?현태의 행동을 본 이지숙은 소희가 거짓말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겉으로 보기에는 덩치도 크고 투박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의외로 세심한 면이 있네?’이렇게 생각한 이지숙은 현태를 다소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하지만 현태는 이지숙의 반응이 조금 변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거실로 들어서자, 이지숙은 고용인에게 심근영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사실, 심근영은 일찍 깨어났기에,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심근영이 시간을 질질 끌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2층에서 현태를 관찰했기 때문이었다.고용인의 동정을 들은 심근영이 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곧 나가도록 하지.” 심근영은 고용인이 떠난 후에야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그제야 현태의 생김새를 똑똑히 보았다. 현태는 키가 크
‘게다가 한동안 운전기사로 일한 적도 있지만, 월급은 적지 않았어. 한 달에 2천만원으로 시작했고, 윤 대표님께 일이 생기면 월급도 더 올라갔으니까.’“저분은...”현태는 상대의 신분을 확실히 알아본 후, 어떤 태도로 대할지 고민하기로 했다. 소희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현태를 바라보았다.“정말 몰라서 그래요?”현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알아야 해?” 소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나한테 사건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미친 듯이 날뛰던 사람이잖아요!’ ‘대체 왜 심유인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내 사촌... 언니예요.”소희는 심유인과 가족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언니도 오늘 남자 친구를 데려왔더군요.” “사촌 언니? 소희 씨의 친언니가 아니고?” 소희가 낮게 불평을 내뱉었다.“아니에요, 우리 언니일 리가 없잖아요!”“그럼 왜 남자 친구를 데리고 소희 씨 집에 온 거야? 부모님이 안 계셔서 그런 거야?” 이 말을 들은 소희는 하마터면 웃음을 참지 못할 뻔했다. 특히 현태의 그 어리숙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은 일부러 그런 것처럼 보이게 했다. 심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다.“말이면 다인 줄 알아요?!” “제 남자 친구가 틀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소희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일반적인 경우에는 남자 친구를 부모님께 소개하잖아요. 언니처럼 남의 집으로 달려오는 게 아니고요.”“잘 모르는 사람들은 언니한테 부모가 없어서 남의 부모에게 허락받는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결국 이지숙이 나선 후에야 유인의 난처함은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어서 들어가자꾸나, 아버지께서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계셔.”“네, 엄마.” 소희는 현태의 팔짱을 끼고 심씨 가문의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몇 걸음도 안 걸었는데, 금세 정신을 차린 심유인이 또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잠깐만, 소희야,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어쨌든 오늘은 네 남자 친구가 삼촌과 숙모를 처
심유인은 한참이 흘러도 소희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갑자기 따분해졌다. “소희야, 네 남자 친구는 언제 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안 오는 게 좀 이상하네. 설마 별장에 처음 오는 거라서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이렇게 작은 곳에서 길을 잃으면 운전기사를 할 수 있겠어요?”심유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 자랑스러운 표정은 뭐야?’‘운전기사인 남자 친구를 두고도 창피하지 않다 이거야?’‘허! 심소희, 순진하긴.’유인이 막 입을 떼려던 찰나, 밖에서 고용인의 성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사, 사모님, 아가씨의 남자 친구분께서 오셨습니다!” ‘드디어 주인공이 나타나는구나!’심유인은 당사자인 소희보다 더 초조해하며 먼저 달려 나갔다.‘운전기사라더니, 몰고 온 차가 고용주 명의인 건 아니겠지?’ 밖으로 나간 유인은 마침내 차에서 내린 현태를 마주했다.그의 옷차림을 본 순간, 유인은 웃음을 터뜨렸다.‘풉, 그냥 티셔츠에 트레이닝 팬츠를 입고 온 거야?’‘여자 친구의 부모님을 만나러 오면서도 저런 옷을 입고 오다니, 비웃음을 당하려고 작정한 건가?’ 하지만 눈살을 찌푸린 건 소희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현태의 체면이 깎일까 봐 걱정한 것이 아니라, 현태가 자기 부모님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할까 봐 걱정한 것이었다. 소희는 빠르게 현태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그저께 양복도 사줬는데, 왜 양복이 아닌 캐주얼복을 입고 온 거예요?” 현태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나도 양복을 입고 오려고 했지. 그런데 그 옷은 오래 입으면 불편하더라고. 소희 씨의 부모님을 뵈면서도 온 마음을 옷에 쏟을까 봐 걱정돼서 이렇게 입었어.” “사소한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잖아?”소희가 대답했다.“그래요? 양복을 입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나 봐요. 하지만...”소희가 이지숙을 흘긋 바라보았다. 과연 이지숙의 낯빛은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물론 최선을 다해서 숨기는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현태가 불안해하며 물었다.“어머님
심유인이 그중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숙모, 민찬 씨가 특별히 준비한 팔찌예요. 마음에 드세요?” 이지숙은 흘긋 보더니 눈가에 약간의 웃음기를 띠었다.그 팔찌는 아주 훌륭한 자태를 뽐내는 것으로, 수천만원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유인이의 친엄마도 아니고, 소민찬 씨는 우리 집에 처음 오는 건데도 아주 통 크게 행동하는구나.’하지만 이지숙은 잠시 후에 소희의 남자 친구가 올 것을 떠올리자 약간 걱정이 되었다. 사실, 며칠간 이어진 심근영의 설득에 이지숙은 소희의 상대가 운전기사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그래, 어차피 우리 심씨 가문은 많은 자원과 돈이 있잖아. 그 사람이 성실하기만 하면, 우리 가문의 사위라는 이름으로 상류층은 아니어도 소소한 부자는 될 수 있을 거야.’하지만 지금 소민찬의 씀씀이를 보자, 이지숙은 또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상류사회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서로 비교하는 것이었다. 가방이나 옷 같은 큰 것들뿐만 아니라, 가끔은 화장품조차도 비교해야 하니 말이다. 이지숙은 이렇게 비교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으나, 상류 사회의 분위기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밀리면, 매번 모임 때마다 얘깃거리가 될 텐데...’ 이것이 바로 이지숙이 소희의 상대가 운전기사라는 것에 반감을 가지 이유였다.엄마로서, 자기 딸이 잘못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을 터. “숙모, 이건 삼촌께 드리는 거예요.” 심유인이 꺼내든 두 번째 선물은 시계였다. “롤렉스 시계예요. 최신 모델인데, 삼촌도 분명히 좋아하시겠죠?”이지숙은 심유인이 손에 든 시계를 보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듯했다. ‘저 시계는... 적어도 1억은 넘을 거야.’ ‘물론 유인이한테는 작은 성의일 뿐이겠지만...’ 이지숙이 불안한 표정으로 소희를 흘긋 보았다. 하지만 소희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심유인의 선물 공세가 고의로 현태를 깎아내리려는 의도인 것을 알아차렸다.‘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이런
소희는 심유인이 오늘도 트집을 잡으러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렇지 않고서야 아침 일찍 자신의 남자 친구를 데리고 올 리가 없지 않은가.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심유인이 멍청한 건 알겠는데, 남자 친구라는 사람도 멍청한 건가?’‘여기까지 따라와서 같이 소란을 피우다니.’잠시 후, 소희는 소민찬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뭐?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고? 하하, 심씨 가문 아가씨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니!”“참, 윤 대표와도 사이가 아주 좋으시다면서요?” “역시 끼리끼리군요. 남자 친구마저 똑같은 가난뱅이니까요.”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소희가 다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의 남편이 YS그룹의 전 대표인 하지환 씨라고 얘기하진 않은 모양이네요.” 순간, 심유인의 표정이 어색하게 구겨졌다.하지만 소민찬은 이 말을 듣자마자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하하’ 큰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웃겨 죽겠네요. 윤 대표의 남편이 하지환 대표님이라고요?” “유인아, 사촌 동생이라는 분이 허영에 가득 찬 분이신가 봐?” 유인은 다급하게 소민찬의 소매를 여러 번 당겼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윤 대표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면, 저는 물구나무서서 똥을 먹겠어요!” “누가 아침 일찍부터 우리 집에 와서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는 거죠?” 뒤에서부터 이지숙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돼지 멱따는 소리’라는 말에 소희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사석에서는 저런 면이 있으시구나.’ 소민찬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비록 소씨 가문의 일원이라 해도, 이지숙 앞에서는 힘을 쓸 방도가 없을 것이다.“안녕하십니까.” “소민찬 씨군요. 우리 집에는 어쩐 일로 온 거죠?” 유인이 민찬의 손을 잡고 말했다.“숙모, 민찬 씨는 제 남자 친구잖아요. 숙모께서 제 남자 친구를 한번 살펴봐 주셨으면 해서 데리고 왔어요.” 이지숙이 말했다.“네 남자 친구는 네 어머니께 보여 드려야지. 내가 허락한다고 한들, 소용없지 않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