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주경모, 증거 있어?”주경모는 얼른 앞으로 나아가 노인의 등을 주물러주었다.“어르신, 진정하세요. 제 추측일 뿐 증거는 없습니다.”그제야 노인의 숨소리가 한결 평온해졌다.“그럼 왜 그런 추측을 하는 거지?”“어르신,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윤이서 양의 배후에 누군가가 없었다면 어떻게 하씨 가문의 자금에 의존하는 하윤 컴퍼니를,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길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도련님은 이서정 씨와 함께 산다고 했는데, 이서정 씨 집에는 거의 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H국으로 가서는 또 어디서 사는 걸까요, 왜 아무런 정보도 알 수 없을까요?”“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하이먼 스웨이는 분명 도련님의 입김으로 직접 캐스팅하러 왔으니, 논리적으로 도련님의 아내인 이서정 씨를 뽑아야 하는데, 내정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서나나 씨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서나나 씨는 윤이서 양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알아낼 수도 없고, 도련님 쪽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주경모는 말을 하며 어르신의 눈치를 살폈다.노인은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5분 정도 지나자 그가 입을 열었다.“그럼 지금 당장 윤씨 그룹에 외부에서 자금이 들어오는 건 없는지 확인해 봐. 연극 캐스팅 쪽에도 가서 물어보고 무슨 일인지 알아봐. 정말 지환이라면 반드시 단서가 나올 거야.”“네!”“참, 이서정 쪽도 마찬가지야. 양쪽으로 접근하면 의외의 실마리가 나올 수도 있으니 경계를 늦출 수 없어.”“알겠습니다.”주경모는 밖으로 물러갔다.……윤이서의 집에 막 도착한 하지환은 상언의 차도 아래층에 주차된 것을 보았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여긴 왜 왔어?”“두 사람 화해했잖아. 내가 최대 공신인데 어떻게 안 와?” 지환은 몇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하나 씨 보러 온 거지?”이상언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알면서 뭘 물어. 그리고, 그때 이서 씨가 연락했을 때, 내가 제대로 손 쓰지 않았으면
“네.” 이상언이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임하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는 망설이며 물었다.“하나 씨는…… 안 왔어요?”“걔가 왜 와요?”“…….”“설마, 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죠?” 윤이서는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아, 아니 뭐…….”“아, 보고 싶지 않나 보네요. 그럼 전화 안 하길 잘했네요.”“전화할 겁니까?”“네, 하지만 그쪽이 보고 싶지 않다니까 전화하지 않는 게 낫겠어요.”“아니요!” 상언은 초조해졌다.그러다 이서가 눈이 휘어지게 웃자 순간 자기가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함께 웃었다. “이서 씨, 근묵자흑이라고 하더니, 지환이랑 가까이 지내서 점점 닮아가네요.”이서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누가 저 사람과 가깝다는 거예요. 됐어요, 들어가서 갈비찜 확인해야 해요.”그렇게 말한 후 이서는 뒤돌아 부엌으로 들어갔다.하지환도 같이 들어가려다가 상언에게 붙잡혔다.“지환아.”지환은 이마를 누르며 상언에게 휴대폰을 던졌다.상언은 재빨리 핸드폰을 잡았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지환이 부엌으로 들어가고 있었다.상언이 따라가려 했지만 지환은 무자비하게 부엌문을 닫아버렸다.여자밖에 모르는 놈.상언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휴대폰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겨우 지환의 의도를 알아차렸다.그는 휴대전화를 열고 지환의 이름을 대고 하나를 초대했다.지환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한 하나는 아무 말 없이 수락했다.화면 속 긍정의 답장을 본 상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부엌.이서가 국을 뜨는데 갑자기 두 손이 뒤로 뻗어와 이서를 꼭 껴안았다.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힘에 이서는 깜짝 놀랐다.“지환 씨.”“응.”“이거 놔요, 나 요리 중이잖아요.”“안 놔, 평생 안 놓을 거야.”지환은 이서를 꼭 껴안고 이서의 어깨에 턱을 기대며,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달콤한 향기에 흠뻑 취한 채 말했다.“여보, 이번 생에 다시는 당신 안 놓쳐.”이서는 붉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이번 생에 절대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하지환은 윤이서를 놓아주었다.하지만 키스의 여운은 한참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윤이서는 여전히 얼굴이 화끈거리며, 세차게 뛰는 심장은 금방이라도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듯이 거세지고 있었다.오랫동안 사라졌던 두근거림이 다시 그녀의 심장으로 밀려들고 있었다.미친 듯이 뛰는 심장 박동 속에서 이서는 자신이 지환에게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바로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이서가 나가려는데, 이상언의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갈게요.”들뜬 목소리가 귀한 손님이라도 온 것 같았다.이서는 부끄러움에 지환의 가슴을 콩 때리고는 호기심에 물었다.“누가 왔어요?”누구길래 이 닥터가 저렇게 흥분하는 걸까?지환은 진한 미소를 지으며 이서를 바라보았다.이서는 그의 시선에 다리가 풀렸다.올곧은 그의 시선에 이서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집에 사람 있어요.”이서는 가만히 있으라며 지환을 밀쳤다.지환은 이서의 입술을 쪼았다.밖에서 임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이서는 그제야 하나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지환을 밀어내고 밖으로 나갔다.“하나야, 왔어?”하나는 여전히 문밖에 서서 상언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훑어보았다.“응, 지환 씨가 오라고 문자를 보내서.”이서는 뒤따라 나온 지환을 돌아보았다.지환은 담담한 표정으로 태연하게 대답했다.“맞아, 내가 초대했어. 사람 많으면 좋잖아, 그렇지 여보?”“그래 하나야, 들어와. 마침 내가 장을 많이 봤어.”“그걸 내가 모를 리가 있겠어?” 하나는 중얼거리며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집으로 들어섰다. “내가 도와줄게.” “좋아.” 이서는 하나를 부엌으로 끌어당겼다.부엌에 들어선 하나는 이서에게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 상언 씨가 여기 있는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저 사람 있는 줄 알았으면 안 왔을 거야.”이서는 웃으며 채소를 싱크대에 던져 넣었다. “지환 씨가 연락한 줄 몰랐어.”“지환 씨? 이렇게 빨
하지환은 냉정하게 분석했다.“전에도 말했지만, 너랑 나는 상황이 달라. 이서와 나는 불확실한 미래를 과감히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있지만, 하나 씨는 그렇지 않아.”“어렸을 때 가정에서 생긴 트라우마로 인해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아 사랑을 믿지 않아. 그런 사람이 어떻게 네 사랑을 받아줄 수 있겠어?”“너도 예전에는 사랑을 믿지 않았잖아.”“난 이서가 믿게 만들었지.”“어떻게 믿게 했는데?”지환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자신과 이서는 많은 것을 겪으며, 일련의 사건들이 사슬로 묶인 듯 서로를 더욱 끈끈하게 이어줬다. 하지만 그에게 언제부터 사랑을 믿었느냐고 물으면, 지환은 대답할 수 없었다.“방법을 똑같이 해도 소용없어. 정말 하나 씨를 믿게 만들고 싶다면, 심리치료를 받아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두려움을 완전히 없애는 방법밖에 없어. 하지만 치료할 수 있는지, 언제 나을지 알 수 없어. 그러니 친구로서 포기하라는 거야.”이상언의 두 눈이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정말 포기하는 것만이 최선일까?”지환은 침묵했다.그는 조언만 해줬을 뿐, 나머지 길은 스스로 걸어가야 했다.상언은 소파에 앉아 말을 이어갔다.“근데 포기가 안 돼.”누군가를 그렇게 좋아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의학 공부보다 더 좋아했다.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상언을 바라보았다.……이서정의 아파트.문밖에서 초인종이 울렸을 때, 서정은 무아지경에 빠져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며칠 전 이천이 집에 데려다준 이후로는 문이 잠겨서 외출하지 못하고 있었다.매니저가 한 번 보러 왔다가 서둘러 떠난 적이 있었다.바깥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초인종이 한참 동안 계속 울리고 나서야, 문득 밖에 있는 사람이 이하영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서정은 그 정체불명의 사람과 전화 통화를 한 후 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당시 하영은 해외에 있었기 때문에 애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하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생기를 잃었던 서정의 눈동
이하영은 눈을 매섭게 떴다. “나라고 걔가 죽기를 바라지 않겠어? 두 번이나 연속으로 사람을 보냈는데, 걔가 전부 피해 갔어.”그 일을 떠올리니 이하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사모님, 이걸 제가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요.”“얘기해.”“전에 그 여자가 탈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본인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사모님이 보낸 사람들이 무능했기 때문이에요.”“너…….”“사모님, 일단 화내지 말고 진정하세요.”이서정이 말했다.“만약 민씨 가문 사람들을 보냈다면 실수 없이 깔끔하게 처리했을 겁니다.”이하영이 몸을 비틀거렸다.“민씨 집안의 힘을 빌리라는 말이니?”“네, 사모님. 따님의 원수를 갚고 싶지 않으세요?”이하영은 소파에 앉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당연히 우리 딸 원수를 갚고 싶지만, 그 양반이 이미 네 남편과 계약을 맺었어. 두 집안이 손을 잡은 이상 다시는 윤이서를 괴롭힐 수 없어.”서정은 가슴이 철렁했다.하지환이 민씨 집안과 손잡은 진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주먹을 꽉 쥔 서정의 마음속에 씁쓸함이 밀려왔다.하지환은 윤이서를 정말 사랑했다!서정은 한참을 애쓰다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끝내고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 괜찮지 않나요? 게다가 저희 남편 곁에는 저도 있으니까, 설령 일이 들통나더라도 우리가 함께 감당하면 되지 않겠어요?”“그런가?” 이하영은 들뜬 기색으로 말했다.사실 그녀도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서정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이제 서정이 감당하겠다고 했으니 당장 윤이서를 처리하고 싶었다.“물론이죠.” 이하영이 동요하는 것을 본 서정은 더더욱 밀어붙였다.“게다가 이번엔 제가 아주 치밀한 계획을 세웠으니까 꼭 성공할 수 있을 거예요.”“알았으니까 빨리 말해봐.” 이하영은 조급하게 재촉했다.그 시각, 윤이서의 집.드디어 이상언과 임하나가 돌아갔다.윤이서가 뒤돌아서는 순간 하지환이 그녀를 껴안았다.“이거 놔요…….” 이서는 수줍게 지환
긴장한 그의 표정을 보며, 윤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사람이라면 당연한 거죠. 우리 다 어른이잖아요, 욕구가 있는 건 당연하지.”하지환의 표정은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그는 이서의 입술을 깨물었다. “앞으로 그런 생각 하지 마, 알겠어?” “앗…….” 이서는 차가운 숨을 들이마셨다.“무슨 사람이 개도 아니고, 왜 물어요?”하지만 지환의 눈빛은 여전히 이서를 향해 불타오르고 있었다.“약속해, 이서야.”이서는 그의 진지한 모습에 멈칫하다, 입꼬리를 올리며 지환의 목을 두 팔로 감쌌다. “지환 씨, 당신이 날 제일 잘 알지 않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아닌지, 지환 씨가 제일 잘 알 텐데.”지환은 여전히 이서를 노려보았고, 그 강렬한 기운에 이서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여보!”이를 본 이서는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그런 생각은 안 했어요. 그냥 놀린 거지.”그제야 지환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그는 이서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그제야 포식한 짐승처럼 만족스러운 듯 이서를 놓아주었다.“잘 자.”이서가 투덜거렸다.“잘 자라니, 어이가 없네.”하지만 마음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몇 달 동안 느껴보지 못한 평온함이었다.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지환을 바라보던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고, 자신도 모르게 몸이 지환 쪽으로 기울어졌다.남자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이서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 두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젠장, 늦었어!”시간을 보고 당황한 이서가 얼른 침대에서 뛰어내려 옷을 찾으려는데, 그대로 덥석 손목이 잡혔다.지환은 이불 속에서 두 눈을 번뜩였다.“오늘은 그냥 쉬어.”“안 돼요, 이미 조씨 그룹 인수 건에 대해 지시했단…….”이서의 목소리가 뚝 멈췄다.고개를 들자 환하게 웃고 있는 지환이 보였다.말하지 않아도 이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지환이 먼저 말했다.“여보, 싸웠을 때도 당신 마음속
윤이서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지환은 이천으로부터 민호일이 자신을 만나러 회사에 찾아왔다는 전화를 받았다.지환은 어제 전해 받은 정보를 떠올리며 두 눈이 차갑게 식었다.정보에 따르면 전에 튀어나와 이서를 겁탈하려 했던 사람들은 이하영 측에서 보낸 자들이며, 그동안 이하영과 이서정은 번갈아 윤이서를 자주 괴롭혀왔다.이는 애초에 민호일과 맺은 계약을 심각하게 위반한 행동이었다.“지금 바로 갈게.”“네.”지환의 명확한 대답을 들은 이천은 전화를 끊고 대기실로 향했다.“민 대표님, 도련님께서 조금 있다가 오신답니다.”민호일은 기뻐하며 얼굴이 환해졌다.“잘됐네, 그럼 난 여기서 기다리겠네.”이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약 30분 후, 지환이 드디어 도착했다.큰 보폭으로 응접실에 들어선 지환은 민호일을 보자마자 눈을 가늘게 떴다.그가 입을 열려는 찰나, 다가오는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 민호일이 지환에게 초대장을 건넸다. “하 대표님, 모레가 제 아내의 생일인데, 생일 파티에 대표님이 참석해 주시면 어떨까 하고 찾아왔습니다.”“생일이요?” 지환은 눈앞에 놓인 초대장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초대장을 건네받아 몇 번 훑어보고는 피식 웃었다.“모레가 아내 분 생일이라고요?”“네, 그렇습니다.” 민호일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기대에 찬 얼굴로 지환을 바라보았다.“하 대표님, 참석하실 수 있으시죠?”“물론이죠.” 지환은 초대장을 테이블 위에 던졌다.“제가 특별히 아주 큰 선물도 준비하겠습니다.”이 말을 들은 민호일은 기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닙니다. 대표님께서 직접 오시는 것만으로 저희 민씨 가문의 큰 영광입니다!”지환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하지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게 있습니다. 파티에 갈 수는 있지만, 그곳에 기자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께서 워낙 겸손하신 분이라, 사람들 앞에 진짜 얼굴을 드러내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파티 당일
“아니거든요?” 소희는 이서의 손을 잡은 채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저한테만 살짝 말해보세요. 사랑 없는 제가 질투 좀 해보게.”“현태 씨랑은 어떻게 돼 가?”이서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에이, 말도 마세요.” 임현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소희의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 찼다.“저를 여전히 여동생쯤으로 생각한다니까요.”“그런 강철 같은 남자라면, 공개만이 답일지도 몰라.”“됐어요.” “만약 현태 씨가 저를 좋아하지 않는데 제가 고백하는 거라면, 앞으로 회사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녀요?” 소희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하긴, 아니면, 내가 언제 한번 현태 씨의 속마음 좀 알아봐 줄까?”“그거…… 별론데요?”이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희가 대답했다.이서는 그런 소희가 귀여워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럼 말고.” “언니!”“도대체, 알아봐달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이서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소희는 수줍게 이서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언니는 너무 짓궂어요.”“어서 일이나 하러 가자. 법률부가 가능한 한 빨리 인수 방안을 내놓게 해야 해. 내일 당장 조씨 그룹과 인수 건에 대해 논해야 하거든.”“그렇게 빨리요?”“질질 끌면 안 돼.”이서는 하루라도 빨리 지환이 하씨 가문과의 관계를 끊어내기를 바라고 있었다.‘이대로 가다가는 하은철의 둘째 삼촌이 지환 씨에게 또 무슨 일을 시킬지 몰라.’“네, 알겠어요.”소희가 자리를 떠나자 이서의 핸드폰이 울렸다.조용환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이서는 눈썹을 찡그렸다.‘인수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이지?’잠시 망설이던 이서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윤 대표님?]수화기 너머, 조용환의 목소리는 유난히 공손했다.“무슨 일이세요?”[저희 조씨 그룹을 인수하고 싶으시다는 말씀, 아직 유효한가요?]이서는 가볍게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요.”[이왕 이렇게 된 거, 내일 바로 인수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