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주경모, 증거 있어?”주경모는 얼른 앞으로 나아가 노인의 등을 주물러주었다.“어르신, 진정하세요. 제 추측일 뿐 증거는 없습니다.”그제야 노인의 숨소리가 한결 평온해졌다.“그럼 왜 그런 추측을 하는 거지?”“어르신,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윤이서 양의 배후에 누군가가 없었다면 어떻게 하씨 가문의 자금에 의존하는 하윤 컴퍼니를,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길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도련님은 이서정 씨와 함께 산다고 했는데, 이서정 씨 집에는 거의 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H국으로 가서는 또 어디서 사는 걸까요, 왜 아무런 정보도 알 수 없을까요?”“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하이먼 스웨이는 분명 도련님의 입김으로 직접 캐스팅하러 왔으니, 논리적으로 도련님의 아내인 이서정 씨를 뽑아야 하는데, 내정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서나나 씨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서나나 씨는 윤이서 양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알아낼 수도 없고, 도련님 쪽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주경모는 말을 하며 어르신의 눈치를 살폈다.노인은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5분 정도 지나자 그가 입을 열었다.“그럼 지금 당장 윤씨 그룹에 외부에서 자금이 들어오는 건 없는지 확인해 봐. 연극 캐스팅 쪽에도 가서 물어보고 무슨 일인지 알아봐. 정말 지환이라면 반드시 단서가 나올 거야.”“네!”“참, 이서정 쪽도 마찬가지야. 양쪽으로 접근하면 의외의 실마리가 나올 수도 있으니 경계를 늦출 수 없어.”“알겠습니다.”주경모는 밖으로 물러갔다.……윤이서의 집에 막 도착한 하지환은 상언의 차도 아래층에 주차된 것을 보았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여긴 왜 왔어?”“두 사람 화해했잖아. 내가 최대 공신인데 어떻게 안 와?” 지환은 몇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하나 씨 보러 온 거지?”이상언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알면서 뭘 물어. 그리고, 그때 이서 씨가 연락했을 때, 내가 제대로 손 쓰지 않았으면
“네.” 이상언이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임하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는 망설이며 물었다.“하나 씨는…… 안 왔어요?”“걔가 왜 와요?”“…….”“설마, 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죠?” 윤이서는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아, 아니 뭐…….”“아, 보고 싶지 않나 보네요. 그럼 전화 안 하길 잘했네요.”“전화할 겁니까?”“네, 하지만 그쪽이 보고 싶지 않다니까 전화하지 않는 게 낫겠어요.”“아니요!” 상언은 초조해졌다.그러다 이서가 눈이 휘어지게 웃자 순간 자기가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함께 웃었다. “이서 씨, 근묵자흑이라고 하더니, 지환이랑 가까이 지내서 점점 닮아가네요.”이서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누가 저 사람과 가깝다는 거예요. 됐어요, 들어가서 갈비찜 확인해야 해요.”그렇게 말한 후 이서는 뒤돌아 부엌으로 들어갔다.하지환도 같이 들어가려다가 상언에게 붙잡혔다.“지환아.”지환은 이마를 누르며 상언에게 휴대폰을 던졌다.상언은 재빨리 핸드폰을 잡았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지환이 부엌으로 들어가고 있었다.상언이 따라가려 했지만 지환은 무자비하게 부엌문을 닫아버렸다.여자밖에 모르는 놈.상언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휴대폰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겨우 지환의 의도를 알아차렸다.그는 휴대전화를 열고 지환의 이름을 대고 하나를 초대했다.지환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한 하나는 아무 말 없이 수락했다.화면 속 긍정의 답장을 본 상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부엌.이서가 국을 뜨는데 갑자기 두 손이 뒤로 뻗어와 이서를 꼭 껴안았다.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힘에 이서는 깜짝 놀랐다.“지환 씨.”“응.”“이거 놔요, 나 요리 중이잖아요.”“안 놔, 평생 안 놓을 거야.”지환은 이서를 꼭 껴안고 이서의 어깨에 턱을 기대며,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달콤한 향기에 흠뻑 취한 채 말했다.“여보, 이번 생에 다시는 당신 안 놓쳐.”이서는 붉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이번 생에 절대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하지환은 윤이서를 놓아주었다.하지만 키스의 여운은 한참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윤이서는 여전히 얼굴이 화끈거리며, 세차게 뛰는 심장은 금방이라도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듯이 거세지고 있었다.오랫동안 사라졌던 두근거림이 다시 그녀의 심장으로 밀려들고 있었다.미친 듯이 뛰는 심장 박동 속에서 이서는 자신이 지환에게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바로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이서가 나가려는데, 이상언의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갈게요.”들뜬 목소리가 귀한 손님이라도 온 것 같았다.이서는 부끄러움에 지환의 가슴을 콩 때리고는 호기심에 물었다.“누가 왔어요?”누구길래 이 닥터가 저렇게 흥분하는 걸까?지환은 진한 미소를 지으며 이서를 바라보았다.이서는 그의 시선에 다리가 풀렸다.올곧은 그의 시선에 이서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집에 사람 있어요.”이서는 가만히 있으라며 지환을 밀쳤다.지환은 이서의 입술을 쪼았다.밖에서 임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이서는 그제야 하나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지환을 밀어내고 밖으로 나갔다.“하나야, 왔어?”하나는 여전히 문밖에 서서 상언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훑어보았다.“응, 지환 씨가 오라고 문자를 보내서.”이서는 뒤따라 나온 지환을 돌아보았다.지환은 담담한 표정으로 태연하게 대답했다.“맞아, 내가 초대했어. 사람 많으면 좋잖아, 그렇지 여보?”“그래 하나야, 들어와. 마침 내가 장을 많이 봤어.”“그걸 내가 모를 리가 있겠어?” 하나는 중얼거리며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집으로 들어섰다. “내가 도와줄게.” “좋아.” 이서는 하나를 부엌으로 끌어당겼다.부엌에 들어선 하나는 이서에게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 상언 씨가 여기 있는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저 사람 있는 줄 알았으면 안 왔을 거야.”이서는 웃으며 채소를 싱크대에 던져 넣었다. “지환 씨가 연락한 줄 몰랐어.”“지환 씨? 이렇게 빨
하지환은 냉정하게 분석했다.“전에도 말했지만, 너랑 나는 상황이 달라. 이서와 나는 불확실한 미래를 과감히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있지만, 하나 씨는 그렇지 않아.”“어렸을 때 가정에서 생긴 트라우마로 인해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아 사랑을 믿지 않아. 그런 사람이 어떻게 네 사랑을 받아줄 수 있겠어?”“너도 예전에는 사랑을 믿지 않았잖아.”“난 이서가 믿게 만들었지.”“어떻게 믿게 했는데?”지환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자신과 이서는 많은 것을 겪으며, 일련의 사건들이 사슬로 묶인 듯 서로를 더욱 끈끈하게 이어줬다. 하지만 그에게 언제부터 사랑을 믿었느냐고 물으면, 지환은 대답할 수 없었다.“방법을 똑같이 해도 소용없어. 정말 하나 씨를 믿게 만들고 싶다면, 심리치료를 받아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두려움을 완전히 없애는 방법밖에 없어. 하지만 치료할 수 있는지, 언제 나을지 알 수 없어. 그러니 친구로서 포기하라는 거야.”이상언의 두 눈이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정말 포기하는 것만이 최선일까?”지환은 침묵했다.그는 조언만 해줬을 뿐, 나머지 길은 스스로 걸어가야 했다.상언은 소파에 앉아 말을 이어갔다.“근데 포기가 안 돼.”누군가를 그렇게 좋아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의학 공부보다 더 좋아했다.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상언을 바라보았다.……이서정의 아파트.문밖에서 초인종이 울렸을 때, 서정은 무아지경에 빠져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며칠 전 이천이 집에 데려다준 이후로는 문이 잠겨서 외출하지 못하고 있었다.매니저가 한 번 보러 왔다가 서둘러 떠난 적이 있었다.바깥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초인종이 한참 동안 계속 울리고 나서야, 문득 밖에 있는 사람이 이하영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서정은 그 정체불명의 사람과 전화 통화를 한 후 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당시 하영은 해외에 있었기 때문에 애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하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생기를 잃었던 서정의 눈동
이하영은 눈을 매섭게 떴다. “나라고 걔가 죽기를 바라지 않겠어? 두 번이나 연속으로 사람을 보냈는데, 걔가 전부 피해 갔어.”그 일을 떠올리니 이하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사모님, 이걸 제가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요.”“얘기해.”“전에 그 여자가 탈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본인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사모님이 보낸 사람들이 무능했기 때문이에요.”“너…….”“사모님, 일단 화내지 말고 진정하세요.”이서정이 말했다.“만약 민씨 가문 사람들을 보냈다면 실수 없이 깔끔하게 처리했을 겁니다.”이하영이 몸을 비틀거렸다.“민씨 집안의 힘을 빌리라는 말이니?”“네, 사모님. 따님의 원수를 갚고 싶지 않으세요?”이하영은 소파에 앉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당연히 우리 딸 원수를 갚고 싶지만, 그 양반이 이미 네 남편과 계약을 맺었어. 두 집안이 손을 잡은 이상 다시는 윤이서를 괴롭힐 수 없어.”서정은 가슴이 철렁했다.하지환이 민씨 집안과 손잡은 진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주먹을 꽉 쥔 서정의 마음속에 씁쓸함이 밀려왔다.하지환은 윤이서를 정말 사랑했다!서정은 한참을 애쓰다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끝내고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 괜찮지 않나요? 게다가 저희 남편 곁에는 저도 있으니까, 설령 일이 들통나더라도 우리가 함께 감당하면 되지 않겠어요?”“그런가?” 이하영은 들뜬 기색으로 말했다.사실 그녀도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서정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이제 서정이 감당하겠다고 했으니 당장 윤이서를 처리하고 싶었다.“물론이죠.” 이하영이 동요하는 것을 본 서정은 더더욱 밀어붙였다.“게다가 이번엔 제가 아주 치밀한 계획을 세웠으니까 꼭 성공할 수 있을 거예요.”“알았으니까 빨리 말해봐.” 이하영은 조급하게 재촉했다.그 시각, 윤이서의 집.드디어 이상언과 임하나가 돌아갔다.윤이서가 뒤돌아서는 순간 하지환이 그녀를 껴안았다.“이거 놔요…….” 이서는 수줍게 지환
긴장한 그의 표정을 보며, 윤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사람이라면 당연한 거죠. 우리 다 어른이잖아요, 욕구가 있는 건 당연하지.”하지환의 표정은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그는 이서의 입술을 깨물었다. “앞으로 그런 생각 하지 마, 알겠어?” “앗…….” 이서는 차가운 숨을 들이마셨다.“무슨 사람이 개도 아니고, 왜 물어요?”하지만 지환의 눈빛은 여전히 이서를 향해 불타오르고 있었다.“약속해, 이서야.”이서는 그의 진지한 모습에 멈칫하다, 입꼬리를 올리며 지환의 목을 두 팔로 감쌌다. “지환 씨, 당신이 날 제일 잘 알지 않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아닌지, 지환 씨가 제일 잘 알 텐데.”지환은 여전히 이서를 노려보았고, 그 강렬한 기운에 이서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여보!”이를 본 이서는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그런 생각은 안 했어요. 그냥 놀린 거지.”그제야 지환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그는 이서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그제야 포식한 짐승처럼 만족스러운 듯 이서를 놓아주었다.“잘 자.”이서가 투덜거렸다.“잘 자라니, 어이가 없네.”하지만 마음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몇 달 동안 느껴보지 못한 평온함이었다.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지환을 바라보던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고, 자신도 모르게 몸이 지환 쪽으로 기울어졌다.남자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이서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 두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젠장, 늦었어!”시간을 보고 당황한 이서가 얼른 침대에서 뛰어내려 옷을 찾으려는데, 그대로 덥석 손목이 잡혔다.지환은 이불 속에서 두 눈을 번뜩였다.“오늘은 그냥 쉬어.”“안 돼요, 이미 조씨 그룹 인수 건에 대해 지시했단…….”이서의 목소리가 뚝 멈췄다.고개를 들자 환하게 웃고 있는 지환이 보였다.말하지 않아도 이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지환이 먼저 말했다.“여보, 싸웠을 때도 당신 마음속
윤이서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지환은 이천으로부터 민호일이 자신을 만나러 회사에 찾아왔다는 전화를 받았다.지환은 어제 전해 받은 정보를 떠올리며 두 눈이 차갑게 식었다.정보에 따르면 전에 튀어나와 이서를 겁탈하려 했던 사람들은 이하영 측에서 보낸 자들이며, 그동안 이하영과 이서정은 번갈아 윤이서를 자주 괴롭혀왔다.이는 애초에 민호일과 맺은 계약을 심각하게 위반한 행동이었다.“지금 바로 갈게.”“네.”지환의 명확한 대답을 들은 이천은 전화를 끊고 대기실로 향했다.“민 대표님, 도련님께서 조금 있다가 오신답니다.”민호일은 기뻐하며 얼굴이 환해졌다.“잘됐네, 그럼 난 여기서 기다리겠네.”이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약 30분 후, 지환이 드디어 도착했다.큰 보폭으로 응접실에 들어선 지환은 민호일을 보자마자 눈을 가늘게 떴다.그가 입을 열려는 찰나, 다가오는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 민호일이 지환에게 초대장을 건넸다. “하 대표님, 모레가 제 아내의 생일인데, 생일 파티에 대표님이 참석해 주시면 어떨까 하고 찾아왔습니다.”“생일이요?” 지환은 눈앞에 놓인 초대장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초대장을 건네받아 몇 번 훑어보고는 피식 웃었다.“모레가 아내 분 생일이라고요?”“네, 그렇습니다.” 민호일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기대에 찬 얼굴로 지환을 바라보았다.“하 대표님, 참석하실 수 있으시죠?”“물론이죠.” 지환은 초대장을 테이블 위에 던졌다.“제가 특별히 아주 큰 선물도 준비하겠습니다.”이 말을 들은 민호일은 기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닙니다. 대표님께서 직접 오시는 것만으로 저희 민씨 가문의 큰 영광입니다!”지환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하지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게 있습니다. 파티에 갈 수는 있지만, 그곳에 기자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께서 워낙 겸손하신 분이라, 사람들 앞에 진짜 얼굴을 드러내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파티 당일
“아니거든요?” 소희는 이서의 손을 잡은 채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저한테만 살짝 말해보세요. 사랑 없는 제가 질투 좀 해보게.”“현태 씨랑은 어떻게 돼 가?”이서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에이, 말도 마세요.” 임현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소희의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 찼다.“저를 여전히 여동생쯤으로 생각한다니까요.”“그런 강철 같은 남자라면, 공개만이 답일지도 몰라.”“됐어요.” “만약 현태 씨가 저를 좋아하지 않는데 제가 고백하는 거라면, 앞으로 회사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녀요?” 소희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하긴, 아니면, 내가 언제 한번 현태 씨의 속마음 좀 알아봐 줄까?”“그거…… 별론데요?”이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희가 대답했다.이서는 그런 소희가 귀여워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럼 말고.” “언니!”“도대체, 알아봐달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이서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소희는 수줍게 이서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언니는 너무 짓궂어요.”“어서 일이나 하러 가자. 법률부가 가능한 한 빨리 인수 방안을 내놓게 해야 해. 내일 당장 조씨 그룹과 인수 건에 대해 논해야 하거든.”“그렇게 빨리요?”“질질 끌면 안 돼.”이서는 하루라도 빨리 지환이 하씨 가문과의 관계를 끊어내기를 바라고 있었다.‘이대로 가다가는 하은철의 둘째 삼촌이 지환 씨에게 또 무슨 일을 시킬지 몰라.’“네, 알겠어요.”소희가 자리를 떠나자 이서의 핸드폰이 울렸다.조용환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이서는 눈썹을 찡그렸다.‘인수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이지?’잠시 망설이던 이서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윤 대표님?]수화기 너머, 조용환의 목소리는 유난히 공손했다.“무슨 일이세요?”[저희 조씨 그룹을 인수하고 싶으시다는 말씀, 아직 유효한가요?]이서는 가볍게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요.”[이왕 이렇게 된 거, 내일 바로 인수
심유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고작 한 세트가 다예요?”“그래도 이해는 해드릴게요. 이게 능력 범위 내에서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제품이었을 테니까요. 800만원, 900만원을 저축하려면 몇 개월은 걸려야 하잖아요, 그렇죠?” 이지숙이 곧장 입을 열었다.“유인아, 그게 무슨 말이니? 선물은 금액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거란다.” “그래.”심근영도 현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네 숙모를 위해 스킨케어 제품을 골랐다는 건, 충분히 마음을 썼다는 증거란다.”심유인이 입을 삐죽거리자,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아무리 값비싼 선물보다 마음이 중요하다지만, 조금 쑥스러워서 다른 선물도 준비해 왔습니다.”심유인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그 선물도 화장품은 아니겠죠? 또 몇백만원짜리인 건가요?”“유인아!”이지숙은 다소 불쾌해졌지만, 성격이 좋은 현태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아닙니다, 이번 선물은 스킨케어 제품보다 조금 비싼 거거든요.”현태는 이 말을 끝으로 작은 선물 상자를 꺼냈다.심유인이 목을 길게 빼며 재촉했다.“숙모, 어서 열어보세요. 목이 빠질 것 같은데, 대체 뭐예요?” 이지숙은 손에 쥔 작은 상자를 묵묵히 바라보았다.‘꽤 가벼워. 아무래도 큰 선물은 아닌 것 같아.’“밥부터 먹고 열어보자꾸나.” “지금 열어보시죠. 심유인 씨도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신 모양인데요.” 현태가 이지숙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심유인이 경멸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방금 그 스킨 케어 제품보다 조금 더 비싼 선물을 꺼내면, 내가 감탄한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허, 정말 웃겨.’‘저것도 고작 몇백 만원짜리 선물일 뿐일 거야.” “숙모, 선물한 사람도 저렇게 말하잖아요. 어서 열어보세요!”이지숙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선물 상자를 열자마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스킨케어 제품이 아니라...’‘작은 증서?’상자를 또 한 번 확인한 이지숙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이건.
“그래, 네 남자 친구도 같이 봐주마.”심근영이 대답했다.“같이 식사하자꾸나, 그럼 된 거지?” 심근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심유인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감사합니다, 삼촌, 역시 제게 정말 잘해주시네요.”소희는 그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연기가 계속될 모양이군.’ “삼촌, 민찬 씨가 선물도 사 왔어요. 이것 좀 보세요!”심유인은 심근영을 끌고 선물 더미 앞에 다다랐고, 이지숙에게 보여줬던 선물 세 개를 집어 들었다.심유인은 현태가 가져온 선물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심근영은 심유인의 말을 듣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마음은 고맙지만, 우리는 네 친부모가 아니잖니. 네 남자 친구가 우리를 위해 이렇게 많은 돈을 쓰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구나.”“우리 회사에 가서 돈을 받고, 같은 값어치의 답례품을 사주도록 하렴.” 심유인은 순간적으로 너무 기뻐서 눈꼬리를 치켜들었다.사실 그 선물들을 산 사람은 심유인이었는데, 그녀는 수중에 그렇게 큰돈이 없어서 모두 신용카드와 할부로 결제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심씨 가문의 회사에 가서 돈을 받으라니!심유인은 이 기회에 카드 빚을 메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 더 챙길 수도 있었다. 나중에 누군가 물어본다면, 민찬에게 답례 선물을 산 것이라고 하면 그만일 테니 말이다.생각할수록 심유인은 점점 더 흥분했고, 심근영이 이미 허리를 숙여 선물 상자를 하나 집어 든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 안에는 뭐가 들었지?”심유인은 심근영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말했다.“삼촌!” 심근영이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왜?” “그게...”심유인은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안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는 다른 사람이 절대 알면 안 돼.’ ‘적어도 심소희의 남자 친구라는 사람은 절대 알면 안 된다고!’ “소희의 남자 친구분도 선물을 가져왔다고 들었어요. 아직 그 선물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했는데, 그것부터 열어 보는 게 어떨까요?” 심근영은 현태를 바라보았다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심유인은 즐거워했다.“와, 가난하긴 해도 염치는 있으신가 보네요. 하지만 그게 유일한 장점이겠죠?” 선물은 현태가 스스로 준비한 것이기에, 소희도 현태가 무슨 선물을 샀는지 몰랐다.그래서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 소희는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오빠, 무슨 선물을 샀는데요?”‘소민찬보다 못한 선물이면 큰일인데.’ 소희는 선물로 심유인과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어쨌든 현태가 부모님을 보러 오는 날이니, 선물의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현태가 심씨 가문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소희는 현태가 심씨 가문의 권세나 재물 탓에 손가락질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우선 들어가자. 곧 알게 될 거야.”이지숙도 계속 밖에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말했다.“그래요, 무슨 얘기든 들어가서 하자고요.”고개를 끄덕인 소희가 현태의 선물을 들어주려 하자, 현태가 말했다.“괜찮아, 내가 들게.”이 세심한 배려는 곧장 이지숙의 눈에 띄었는데, 여자는 본래 본능적인 행동을 가장 신경 쓰기 마련이지 않은가?현태의 행동을 본 이지숙은 소희가 거짓말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겉으로 보기에는 덩치도 크고 투박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의외로 세심한 면이 있네?’이렇게 생각한 이지숙은 현태를 다소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하지만 현태는 이지숙의 반응이 조금 변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거실로 들어서자, 이지숙은 고용인에게 심근영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사실, 심근영은 일찍 깨어났기에,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심근영이 시간을 질질 끌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2층에서 현태를 관찰했기 때문이었다.고용인의 동정을 들은 심근영이 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곧 나가도록 하지.” 심근영은 고용인이 떠난 후에야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그제야 현태의 생김새를 똑똑히 보았다. 현태는 키가 크
‘게다가 한동안 운전기사로 일한 적도 있지만, 월급은 적지 않았어. 한 달에 2천만원으로 시작했고, 윤 대표님께 일이 생기면 월급도 더 올라갔으니까.’“저분은...”현태는 상대의 신분을 확실히 알아본 후, 어떤 태도로 대할지 고민하기로 했다. 소희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현태를 바라보았다.“정말 몰라서 그래요?”현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알아야 해?” 소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나한테 사건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미친 듯이 날뛰던 사람이잖아요!’ ‘대체 왜 심유인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내 사촌... 언니예요.”소희는 심유인과 가족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언니도 오늘 남자 친구를 데려왔더군요.” “사촌 언니? 소희 씨의 친언니가 아니고?” 소희가 낮게 불평을 내뱉었다.“아니에요, 우리 언니일 리가 없잖아요!”“그럼 왜 남자 친구를 데리고 소희 씨 집에 온 거야? 부모님이 안 계셔서 그런 거야?” 이 말을 들은 소희는 하마터면 웃음을 참지 못할 뻔했다. 특히 현태의 그 어리숙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은 일부러 그런 것처럼 보이게 했다. 심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다.“말이면 다인 줄 알아요?!” “제 남자 친구가 틀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소희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일반적인 경우에는 남자 친구를 부모님께 소개하잖아요. 언니처럼 남의 집으로 달려오는 게 아니고요.”“잘 모르는 사람들은 언니한테 부모가 없어서 남의 부모에게 허락받는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결국 이지숙이 나선 후에야 유인의 난처함은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어서 들어가자꾸나, 아버지께서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계셔.”“네, 엄마.” 소희는 현태의 팔짱을 끼고 심씨 가문의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몇 걸음도 안 걸었는데, 금세 정신을 차린 심유인이 또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잠깐만, 소희야,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어쨌든 오늘은 네 남자 친구가 삼촌과 숙모를 처
심유인은 한참이 흘러도 소희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갑자기 따분해졌다. “소희야, 네 남자 친구는 언제 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안 오는 게 좀 이상하네. 설마 별장에 처음 오는 거라서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이렇게 작은 곳에서 길을 잃으면 운전기사를 할 수 있겠어요?”심유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 자랑스러운 표정은 뭐야?’‘운전기사인 남자 친구를 두고도 창피하지 않다 이거야?’‘허! 심소희, 순진하긴.’유인이 막 입을 떼려던 찰나, 밖에서 고용인의 성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사, 사모님, 아가씨의 남자 친구분께서 오셨습니다!” ‘드디어 주인공이 나타나는구나!’심유인은 당사자인 소희보다 더 초조해하며 먼저 달려 나갔다.‘운전기사라더니, 몰고 온 차가 고용주 명의인 건 아니겠지?’ 밖으로 나간 유인은 마침내 차에서 내린 현태를 마주했다.그의 옷차림을 본 순간, 유인은 웃음을 터뜨렸다.‘풉, 그냥 티셔츠에 트레이닝 팬츠를 입고 온 거야?’‘여자 친구의 부모님을 만나러 오면서도 저런 옷을 입고 오다니, 비웃음을 당하려고 작정한 건가?’ 하지만 눈살을 찌푸린 건 소희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현태의 체면이 깎일까 봐 걱정한 것이 아니라, 현태가 자기 부모님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할까 봐 걱정한 것이었다. 소희는 빠르게 현태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그저께 양복도 사줬는데, 왜 양복이 아닌 캐주얼복을 입고 온 거예요?” 현태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나도 양복을 입고 오려고 했지. 그런데 그 옷은 오래 입으면 불편하더라고. 소희 씨의 부모님을 뵈면서도 온 마음을 옷에 쏟을까 봐 걱정돼서 이렇게 입었어.” “사소한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잖아?”소희가 대답했다.“그래요? 양복을 입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나 봐요. 하지만...”소희가 이지숙을 흘긋 바라보았다. 과연 이지숙의 낯빛은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물론 최선을 다해서 숨기는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현태가 불안해하며 물었다.“어머님
심유인이 그중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숙모, 민찬 씨가 특별히 준비한 팔찌예요. 마음에 드세요?” 이지숙은 흘긋 보더니 눈가에 약간의 웃음기를 띠었다.그 팔찌는 아주 훌륭한 자태를 뽐내는 것으로, 수천만원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유인이의 친엄마도 아니고, 소민찬 씨는 우리 집에 처음 오는 건데도 아주 통 크게 행동하는구나.’하지만 이지숙은 잠시 후에 소희의 남자 친구가 올 것을 떠올리자 약간 걱정이 되었다. 사실, 며칠간 이어진 심근영의 설득에 이지숙은 소희의 상대가 운전기사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그래, 어차피 우리 심씨 가문은 많은 자원과 돈이 있잖아. 그 사람이 성실하기만 하면, 우리 가문의 사위라는 이름으로 상류층은 아니어도 소소한 부자는 될 수 있을 거야.’하지만 지금 소민찬의 씀씀이를 보자, 이지숙은 또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상류사회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서로 비교하는 것이었다. 가방이나 옷 같은 큰 것들뿐만 아니라, 가끔은 화장품조차도 비교해야 하니 말이다. 이지숙은 이렇게 비교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으나, 상류 사회의 분위기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밀리면, 매번 모임 때마다 얘깃거리가 될 텐데...’ 이것이 바로 이지숙이 소희의 상대가 운전기사라는 것에 반감을 가지 이유였다.엄마로서, 자기 딸이 잘못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을 터. “숙모, 이건 삼촌께 드리는 거예요.” 심유인이 꺼내든 두 번째 선물은 시계였다. “롤렉스 시계예요. 최신 모델인데, 삼촌도 분명히 좋아하시겠죠?”이지숙은 심유인이 손에 든 시계를 보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듯했다. ‘저 시계는... 적어도 1억은 넘을 거야.’ ‘물론 유인이한테는 작은 성의일 뿐이겠지만...’ 이지숙이 불안한 표정으로 소희를 흘긋 보았다. 하지만 소희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심유인의 선물 공세가 고의로 현태를 깎아내리려는 의도인 것을 알아차렸다.‘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이런
소희는 심유인이 오늘도 트집을 잡으러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렇지 않고서야 아침 일찍 자신의 남자 친구를 데리고 올 리가 없지 않은가.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심유인이 멍청한 건 알겠는데, 남자 친구라는 사람도 멍청한 건가?’‘여기까지 따라와서 같이 소란을 피우다니.’잠시 후, 소희는 소민찬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뭐?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고? 하하, 심씨 가문 아가씨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니!”“참, 윤 대표와도 사이가 아주 좋으시다면서요?” “역시 끼리끼리군요. 남자 친구마저 똑같은 가난뱅이니까요.”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소희가 다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의 남편이 YS그룹의 전 대표인 하지환 씨라고 얘기하진 않은 모양이네요.” 순간, 심유인의 표정이 어색하게 구겨졌다.하지만 소민찬은 이 말을 듣자마자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하하’ 큰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웃겨 죽겠네요. 윤 대표의 남편이 하지환 대표님이라고요?” “유인아, 사촌 동생이라는 분이 허영에 가득 찬 분이신가 봐?” 유인은 다급하게 소민찬의 소매를 여러 번 당겼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윤 대표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면, 저는 물구나무서서 똥을 먹겠어요!” “누가 아침 일찍부터 우리 집에 와서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는 거죠?” 뒤에서부터 이지숙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돼지 멱따는 소리’라는 말에 소희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사석에서는 저런 면이 있으시구나.’ 소민찬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비록 소씨 가문의 일원이라 해도, 이지숙 앞에서는 힘을 쓸 방도가 없을 것이다.“안녕하십니까.” “소민찬 씨군요. 우리 집에는 어쩐 일로 온 거죠?” 유인이 민찬의 손을 잡고 말했다.“숙모, 민찬 씨는 제 남자 친구잖아요. 숙모께서 제 남자 친구를 한번 살펴봐 주셨으면 해서 데리고 왔어요.” 이지숙이 말했다.“네 남자 친구는 네 어머니께 보여 드려야지. 내가 허락한다고 한들, 소용없지 않겠니?
“그럼 그렇게 할게.”지환은 말을 마치자마자 이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서는 사무실에 들어가 고이서에 관한 모든 자료를 다시 살펴보았지만, 아쉽게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몇 가지 시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안 맞아.’‘하지만 내가 대체품이라는 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되는데.’ 즉, 지환이나 구태우의 조사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기다림의 시간은 항상 힘겹지만,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월요일은 피할 수 없었다. 이른 아침, 소희는 초조함 속에서 깨어났다. 고용인들이 그런 소희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곧 남자 친구분이 대표님 내외분을 만나실 텐데, 어째 긴장하는 모습이 아가씨가 그분의 부모님을 만나 뵙는 것 같네요?” 놀림당한 소희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조용히 고용인에게 다가가 물었다.“아주머니, 심씨 가문에 몇 년 동안 계셨어요?”고용인이 말했다.“4, 5년은 된 것 같은데, 왜 그러세요?”“그럼 아주머니께서는 저희 부모님께서 제 남자 친구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으세요? 심동, 그러니까 저희 오빠가 장희령을 데려왔을 때 많이 혼났다고 들었어요. 그게 사실인가요?” 고용인은 좌우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가십 매체가 그런 것도 알고 있던가요?”소희는 이 말을 듣자마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망했어.’‘그 매체에서 했던 말이 다 사실이라는 거잖아!’‘우리 부모님은 자녀의 짝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셔.’‘어쩌면 오늘 현태 오빠를 부른 것도, 혼내기 위한 걸 수도 있어.’ 소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고용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내외분께서 도련님을 혼내신 이유는, 장희령 씨의 출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에요.”“게다가 그 아가씨는 인품마저 좋지 않았잖아요. 아가씨를 겨냥하지만 않았어도 심씨 가문에 시집올 수는 있었을 텐데 말이죠.”고용인의 위로에도 소희는 여전히 걱정이 되었고, 심지어 현태에게 전화를 걸어오지 말라고 하고 싶었
“네, 소희 씨는 그 여자가 성지영의 딸이라고 했어요.”“제 기억이 맞다면, 그 여자는 나랑 동갑이에요. 즉, 그 여자가 정말 성지영의 딸이라면 두 가지 상황이 아니면 말이 안 돼요.” “나한테 쌍둥이 자매가 있는 게 아닌 이상, 내가 확실히 윤재하의 딸이 아니라는 거죠.”“아마 내 본래 이름도 ‘윤이서’가 아니었을 거예요. 그 이름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을 거고, 여전히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겠죠.” “왜 그렇게 생각한 거야?” “아주 간단해요. 고이서의 경력을 봤는데, 5살 때 화재를 당해서 피부이식수술과 성형수술을 감행했다고 했거든요.” “만약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면...”“그 여자가 피부 이식 수술과 성형수술을 받은 게 사실이라면, 그 두 가지 수술은 일정한 위험이 따를 뿐만 아니라, 회복 시간도 꽤 많이 필요했을 거예요.”“진정한 윤이서는 하은철과 약혼했는데, 수술 도중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게 알려지면 약혼이 취소되었을 거고, 하씨 가문도 다시는 윤씨 가문을 돕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의 윤씨 가문은 존재할 수 없었겠죠.” “그러니까... 윤재하가 하씨 가문과의 약혼을 지키기 위해 가짜 윤이서, 즉 너를 끌어들였다는 거야?” “네, 나를 외국에 보내서 공부하게 한 것도, 윤씨 가문 사람들이 내가 예전의 윤이서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거예요.” “게다가 나는 대여섯 살 이전의 기억이 전혀 없어요.”“이건... 절대 우연이 아닐 거예요.” “네 추측이 정확한지 알고 싶어?”지환이 물었다.“그야 당연하죠.” “이천한테 알아보라고 할게.”“아니요, 이미 알아봐 달라고 했어요.”순간 동작을 멈춘 지환이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소지엽한테?” “아니요, 구태우 씨한테요.” “그 사람은 소지엽의 친구잖아.” “그래서요?” 이서가 지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환은 바지 주머니에 넣은 손을 하염없이 떨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그래.”“우리 내기 하나 하자,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