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언은 눈에 불이 붙었고, 주먹을 꽉 쥐었다.“이 사람이 새 남자친구입니까?”“네.”임하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어때요, 당신보다 더 잘생겼죠?”상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둡고 매서운 눈으로 지강현을 바라봤다.강현은 아름다움에 매료된 욕망이 절로 사라졌다. 그저 가능한 한 빨리 하나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하지만 하나는 계속해서 강현을 꽉 잡고 있었고, 당당한 눈으로 상언을 바라보고 있었다.하나는 강현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가 별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강현의 눈을 볼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상언이 떠오르곤 했다.하나는 도대체 왜 계속 상언이 떠오르는지 몰랐지만, 그를 몇 번 만난 후에야 비로소 그 이유를 알아냈다.강현의 눈은 상언과 매우 닮아 있었다.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지만, 눈동자는 따뜻한 회색 빛을 띄고 있었다.이를 깨닫자마자 하나는 강현에게 고백했다.그녀는 강현이 나쁜 사람이란 건 알고 있지만, 그저 그 눈을 보고 싶었다.지금 그녀가 상언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기분이 나빠진 하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다시 말했다.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여유로웠다.“상언 씨, 식사하러 오신 거 아니에요?”상언은 곧바로 손을 뻗어 하나를 잡아당겼다.갑작스러운 행동에 그녀는 중심을 잡지 못했고 그대로 상언의 품에 안겼다.하나는 몸부림쳤다.“이거 놔요!”하지만 상언은 냉담한 표정으로 하나를 끌고 문밖으로 향했다.곧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져갔다.서나나는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서의 귀에 속삭였다.“이서 언니,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이서는 멍하니 서 있는 강현을 힐끔 쳐다봤다.“남자친구도 가만히 있는데, 우리가 말려야 할 이유가 있겠어?”이서는 여전히 상언을 믿고 있었다. ‘상언 씨라면 하나에게 상처주는 일을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지만, 지강현이라는 이 사람은 정말…….’그는 여자친구가 저렇게 끌려가는 데 잡으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만약 이서가 하나의 친구가 아니었
윤이서는 그런 서나나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좋아, 그런데 혹시 팬들이 알아볼까 봐, 괜찮겠어……?”“괜찮아요.”나나는 마스크를 가리키며 말했다.“어두워서 빛만 없으면 알아보지 못할 거예요.”이서는 안도하고 나나와 함께 조용히 걸었다.하지환은 바로 뒤에서 그녀들의 뒤를 따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나는 이서에게 몰래 물었다.“이서 언니, 저 사람은 누구예요?”“몰라.”나나는 코웃음을 치며 웃었다.“왜 웃어?”이서가 물었다.“누가 봐도 언니 남편이고, 두 분께서 다투신 것 같은데요?”그 말과 함께 나나는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그리고 두 분이 서로를 사랑하는 게 다 보여요.”이서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역술인으로 전향하려고? 대단한 사랑이라도 했나 봐? 어떻게 그렇게 자신있게 말해?”나나가 대답했다.“아직 진정한 사랑은 안 해봤지만, 본적은 있어요.”“저 분을 봐 봐요,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언니 뒤를 지키잖아요. 저건 자신보다 언니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사소한 일로 화를 내고 여자친구를 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나나는 상당히 감정적이었다.이서가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 지환도 마찬가지였다.그는 사이가 나빠져서가 아니라,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 모임이나 연회, 심지어 길에서도 언제든지 그녀를 버릴 수 있었다.나나는 이서의 팔을 찔렀다.“이서 언니,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면 용서하세요. 가끔은 여자도 지고 들어가야죠, 안 그래요?”이서는 아무 말없이 나나를 바라봤다.순간 나나는 표정이 일그러졌다.“혹시…… 심각한 문제예요?”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예전에 한 말 기억나?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다른 여자랑 결혼했어요?”그녀의 말에 재빨리 뒷말을 덧붙인 나나는 충격에 빠진 눈으로 지환을 돌아봤고, 바로 고개를 저었다.“절대 그런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혹시 설명할 기회는 주셨어요?”이서는 손
“왜 이러세요?”윤이서는 그들이 나쁜 의도로 다가오는 것을 단박에 느꼈고, 손을 등 뒤로 보내 112에 전화를 걸었다.“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이 말을 한 사람은 그 무리의 리더일 것이다. 그는 손에 막대기를 들고 자신의 손바닥을 두드리며 말했다.“요즘 돈이 딸리지 뭐야. 돈 좀 있어?”이서가 막 입을 열려던 그때, 뒤에 있던 지환이 한걸음 한걸음 걸어 나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지환은 그 리더와 머리 하나 차이가 났다.그는 고개를 젖혀야 지환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그러나 고개를 들어 지환과 눈을 마주한 리더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눈을 마주하고 있는 그의 눈빛은 칼날보다 날카로웠고 몸에서 알 수 없는 아우라가 풍겨 보기만해도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하지만 넉넉한 보수와 남자가 한 명 뿐이라는 것을 생각한 리더는 용기를 내어 손에 쥔 막대기를 꽉 쥐었다.“왜, 돈 주기 싫어?”지환은 순간적으로 손을 들어 그의 목을 움켜 잡았다.방심한 리더는 눈을 크게 뜨고 손에 든 막대기로 지환을 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갑작스러운 상황에 다른 불량배들은 벌떼처럼 지환을 향해 달려들었다.싸움이 시작된 것을 본 나나는 이서를 뒤로 보내 보호했고, 두 다리로 달려드는 두세 명의 건장한 남자를 처리했다.이서는 깜짝 놀랐다.‘멋있다!’한편 지환은 훨씬 더 깔끔하게 제압했다.그는 화려한 나나와는 다르게 주먹으로 그들을 세게 내리쳤다.지환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한두 명씩 바닥에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가을 바람이 낙엽을 쓸어가듯, 2~30명이 두 사람에 의해 말끔히 쓸려갔다.이서의 입가에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그 순간, 지환의 뒤에서 한 사람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고, 그의 손에는 언제 꺼냈는지 모를 칼이 들려 있었다.이서가 조심하라고 소리칠 겨를도 없이 그 칼이 지환의 등에 꽂히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다.“하지환!”이서는 불안한 목소리로 소리쳤다.칼끝이 지환의 등에 꽂혔다.그는
우연의 일치로 윤이서의 남편도 하씨였다.“고마워.”이서는 그녀를 문 앞까지 배웅했다.“조심히 가고 얼른 들어가, 사람들이 알아볼라.”“네.”서나나는 마지막으로 하지환을 한번 바라본 후 뒤돌아 나섰다.그는 나나가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이서가 못 봤지만 나나는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그녀는 무술을 익혔기에 위험에 직면했을 때는 무의식적으로 상대의 반응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지환은 한 발 물러서서 자신을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했다.이는 일반적인 무술을 익힌 자라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분명 그는 일부러 이런 행동을 한 것임에 틀림없던 것이다.‘왜 그랬을까……, 이서 언니가 걱정하길 바랐던 걸까?’이 생각에 나나는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럼 이서 언니랑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 목숨까지 바친 거야? 이렇게까지 하는데 누가 하 선생님을 막을 수 있겠어.’이 생각에 나나의 발걸음은 점차 가벼워졌다.이서는 창백한 얼굴로 병상에 누워 있는 지환을 바라보았다.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의사는 그가 아직 깨어나지 못한 것은 통증 때문에 투여한 진통제 때문일 수도 있다고 했다.이서는 그때야 비로소 그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았다.‘왜 이렇게 말랐어…….’예전에는 볼에 살도 보기 좋게 붙어 있었는데 지금은 볼이 움푹 들어가 있어 더욱 안쓰럽게 보였다.이서는 괴로움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고, 지환의 손가락이 더욱 가늘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마음이 아파 손을 들어 지환의 손을 잡으려던 순간, 아주 미세하게 지환의 손가락이 움직였다.그녀는 놀란 눈으로 다시 고개를 들어 지환을 바라봤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고 깨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이서는 다시 대담하게 손을 뻗어 지환의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만졌다.이서의 손끝이 지환의 살갗을 스치자 익숙한 감촉이 그녀의 심장을 뛰게 했다.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하나를 얻으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된다.이서가 지환의 손을 잡은 후 그녀는 엄지와 중지로 지환의 손목을 둘렀
“난 괜찮아, 여긴 어떻게 왔어?”윤이서의 질문에 임하나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그녀는 일식집에서 이상언에게 끌려나간 후 한적한 곳으로 갔다.하나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도망치려 했지만, 오히려 상언은 더욱 매섭게 그녀를 나무로 밀어붙였다.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매서운 눈으로 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마치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 같았다.하나는 몸이 떨렸지만 상언의 눈을 바라볼 용기는 있었다.“왜요, 강제로 키스라도 할 거예요?”“맞아요!”그 후 상언은 정말로 그녀의 입을 맹렬하게 막았다.처음 하나는 발버둥쳤지만 결국 그녀도 정신이 혼미해져 마치 구름 위를 밟는 것처럼 멍해졌다. 점점 온몸에 힘이 빠졌기에 상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마치 해님과 달님처럼 위험에 처한 오누이에게 하늘에서 내려준 동아줄과 같았다.이를 잡으면 살 수 있는 희망이라도 있지만, 썩은 동아줄이 못미덥다고 놓아버리면 바로 호랑이에게 잡아 먹혀 죽는 것이었다.혼미한 상태의 그녀가 그 동아줄을 계속 잡고 있을지 놓을지 고민하던 때, 상언은 그녀를 놓아주었다.그의 눈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졌고, 상언의 손끝이 하나의 입술을 쓸었다.“내가 많이 그리웠나 봐요.”하나는 짜증이 났다.바로 그때 그녀의 뒤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그녀는 이 틈에 상언의 품에서 빠져나와 일식집으로 돌아가 이서를 찾았다.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이서와 지환이 병원으로 이송됐다는 강현의 말이었다.하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병원으로 달려갔다.“지환이는 괜찮아요?”상언의 상기된 하나의 뺨을 쓸어내리며 자연스레 이서의 시선을 빼앗았다.“괜찮아요, 아직 깨어나지 않았을 뿐이에요.”이서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상언을 바라봤다.“상언 씨도 지환 씨가 언제 깨어날지 모르겠죠?”상언은 고개를 숙여 지환의 상처를 바라보며 눈을 굴린 다음,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으며 이서를 바라봤다.“바로 깨울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해요.”상언은 고개를 들어 하나를 바라보며 말했다.“부탁이
윤이서는 낄낄거렸다.“왜 웃어?”임하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강현 씨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널 비웃는 거야.”하나도 웃으며 대답했다.“이 관계를 잊게 해준 사람이니 어쩔 수 없지,”“잊을 수 없으면 다시 만나 봐.”이서가 대답했다.“모든 사람이 다 네 아버지 같지는 않아. 이 세상에는 한 여자만 바라보는 해바라기 같은 남자가 있어.”“예를 들어 봐.”이서는 한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거 봐.”하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의 달을 바라보며 말했다.“지환 씨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지만…….”그러며 하나는 이서를 바라보며 속삭였다.“이서야, 네 상처에 소금을 뿌리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이서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사실 나도 최근에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봤거든.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다른 여자랑 결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이야.”“그래서 답은 나왔어?”이서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하나는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서야, 봐 봐, 사람의 감정이란 과학자들조차 감히 연구하지 못하는 아주 복잡한 거야. 난 단순하게 사는 게 좋아, 다른 사람을 만나면 감정적인 문제로 고민하는 일은 사실 별거 아닌 게 되는 거야.”이서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관계적인 면에서 그녀와 하나는 추구하는 바가 달랐다.하나가 원하는 것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고 이서가 원하는 것은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었다.삶은 정해진 방식이라는 게 없다. 삶의 방식은 옳고 그름이 없지만,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멋진 삶을 살고 있었다.그래서…….“하나야, 네가 지금처럼 살든, 이 선생님을 다시 받아들여 다른 삶을 도전하든, 난 언제나 네 편이야. 하지만…….”이서는 진지한 얼굴로 하나를 바라봤다.“또 강현 씨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난 너랑 친구 안 할 거야.”하나는 크게 웃었고, 웃음과 동시에 이서를 껴안았
어릴 때부터 모든 면에서 약간 열등했던 이상언은 하지환이 처음으로 패배하는 것을 보고 기쁨을 금치 못했다.“불러올 게.”상언은 그 말을 남긴 후, 윤이서와 임하나를 부르러 갔다.지환은 상언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눈을 뜨지 않아도 이서에게 자신이 한 일을 다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지환은 자신보다 더 안 좋은 처지에 놓여 있는 상언을 위해 이서와 하나의 앞에서 매우 우스꽝스럽게 깨어났다.지환이 깨어난 것을 본 이서는 걱정하던 마음이 비로소 괜찮아졌다.두 사람 사이의 장벽도 다시 무너졌다.이서는 병상 옆에 서서 물었다.“배고프지 않아요? 뭐라도 좀 먹을래요?”지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서를 빤히 바라봤다.그 눈빛은 맹인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뜨거웠다.이서는 지환이 환자이니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되 뇌이며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반대로 돌려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지환이도 일어났으니 우리도 이제 가자.”상언은 지환에게 몰래 감사의 표시를 한 뒤 하나를 끌고 병동을 빠져나왔다.동시에 하나의 몸부림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그러나 그렇게 강렬하지는 않았다.‘사실 하나도 그렇게 싫진 않은가 봐.’이서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들의 소리가 멀어지고 병실이 조용해지자, 문득 이서는 다시 지환과 둘만 남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이서는 고개를 숙이고 앉아 빛보다 뜨거운 시야를 이마로 느꼈다.한참이 지나 그녀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몸은 어때요?”“괜찮아.”“그럼…… 간병인을 찾아볼 게요.”지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 다른 사람의 손이 닿는 건 싫거든.”“그럼 어떻게 밥을 먹고 일어나고 씻겠어요?”지환의 시선은 자연스레 이서에게로 향했다.이서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거절했다.“전…… 그럴 시간이 없어요.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았거든요.”지금 회사는 그다지 바쁘지 않았지만 그녀는 지환을 간병하고 싶지 않았다.그가 싫은 게 아니라 이렇게 함께 시간을 보
‘그런데 생각해보면…….’윤이서의 얼굴은 분홍색으로 물들었다.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안에서 잠든 거야?”이서는 문을 열었고 고개를 들자마자 하지환의 벌어진 옷깃 사이로 보이는 가슴 근육을 보고 볼이 더욱 붉어졌다.“왜 왔어요, 잠시 앉아 있으라고 했잖아요.”“제가 변기에 빠졌다고 생각한 거예요?”이서의 볼이 붉어진 것을 본 지환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 물었다.“왜 그래? 뜨거운 물이 안 나와?”“아…… 아니요…….”두 사람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고, 지환의 살 냄새가 그녀의 코에 닿자 옛날 생각이 떠올라 그녀는 숨을 멎을 뻔했다.“다시 돌아가서 앉아 계세요, 바로 나갈게요.”지환은 다시 이서를 바라보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침대 옆으로 돌아갔다.이서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물동이를 가져와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지환은 이미 옷을 벗고 탄탄한 근육을 드러내고 있었다.이서는 그의 눈을 피해 재빨리 그의 상체를 닦아주었다.곧이어 그녀는 쑥스러워 고개를 떨궜다.지환은 머뭇거리는 이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많이 봤는데도 아직 부끄러워?”이서는 얼굴을 다시 붉혔고, 지환이 도발하는 것을 알고 꿋꿋하게 반박했다.“부끄러운 게 아니라 지환 씨가 당황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침대 옆에 손을 얹었다.이서는 말을 그렇게 했으니 이를 악물고 지환의 바지를 벗겨 닦을 수밖에 없었다.지환은 언제나처럼 침착하고 담담했다.이서는 차마 고개를 숙일 수 없어 이를 악 물고 창밖을 바라봤다.더더욱 창피했다.정말 장님의 하체를 닦는다면 그렇게 창피하지 않았을 것이다.얕은 지식으로 모든 걸 다 안다고 떵떵거리는 것은 그녀만큼 창피한 일도 아니었다.이서는 말문이 막혀 서둘러 물동이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그녀의 얼굴이 너무 뜨거워서 그 위에 계란후라이를 해도 익을 정도였다.얼굴의 열기를 식힌 후에야 이서는 화장실에서 나왔다.지환은 침대에 앉아 있었고 옷은 여전히 벌어져 있었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