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한 편으로 그때 거절 의사를 표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백이라도 했으면 자뻑이 심한 여자라고 생각했겠지? 생각만 해도 아찔해.’“물론이지, 얼른 들어와.”이서는 문 옆으로 비켜섰다. 소지엽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소지엽에게 물을 한 잔 따라준 뒤, 그가 전해준 서류를 펼쳤다.이서가 서류를 보고 있을 때, 그는 이서의 집을 훑어보았다.집은 크지 않았지만, 깔끔하고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아늑하고 심플했다. 소지엽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여기에 전혀 남자의 기운 같은 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이 두 사람 실종됐어?”이서의 목소리가 들리자, 소지엽은 그제야 머릿속의 잡생각을 떨쳐냈다.그는 정색하며 말했다. “응, 어제저녁에 바에 들어간 후, 나오지 않았어.”그러고는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저 사람들을 조사하는 거야?” 그 두 사람의 자료를 살펴본 소지엽은 패거리가 한 명 더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화려한 전과를 자랑하는 세 사람은 술에 취한 여자를 성폭행하고, 동영상과 사진을 찍어 유포한다며 피해 여성들을 협박해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도록 막았다.이서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들이 술집에서 나오는 CCTV 영상은 없어?”“응, 없는데.” 소지엽이 고개를 저었다.이서가 눈썹을 찌푸렸다.‘아닌데? 어제 분명 두 남자가 날 차에 태웠는데?’‘설마 내가 착각했나?’“무슨 일이야?” 소지엽은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아니야, 실종됐으면 어쩔 수 없지 뭐.”“왜 그들을 뒷조사하는지 아직 얘기 안 했다?” 소지엽이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는 이 일을 계기로 이서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었다.이서는 소지엽이 어젯밤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어젯밤에 술 먹다가 만났어.”“괜…….” 소지엽은 긴장해서 얼굴빛이 하얗게 되었다.“괜찮아. 안전하게 집에 갔어.”소지엽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썹을 찌푸렸다. “설마 혼자 술
소지엽은 아직 가고 싶지 않았다. 모처럼 이서와 같은 곳에 있을 수 있는 기회였다.구태우는 소지엽이 지금 이서의 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영상전화를 걸어왔다.[오우, 제법인데? 이렇게 빨리 상대방의 진영으로 들어갔어?] “조용히 해!”소지엽이 긴장한 듯 이서의 방 문을 한 번 쳐다보고는 움직임이 없자 그제야 화면 속 구태우를 보았다.“일이 잘못되면 가만 안 둘 거야.”구태우는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아이고, 딱 봐도 결혼하면 공처가 될 놈이네.]“뭔 상관이야? 네 앞가림이나 잘해.”[왜? 여지가 좀 보이니까 세상 밝구나? 잊지 마, 윤이서 아직 유부녀거든. 이혼 안 했다고.]소지엽이 입을 열려고 할 때, 문밖에서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누가 왔어. 나중에 통화해.”소지엽은 전화를 끊고 문 쪽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마침 문을 열려고 하던 지환과 정면으로 부딪쳤다.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지?”거실에 들어온 지환은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이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걱정했던 마음이 조금 안심되었다.“이서가 초대했어요.” 소지엽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지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지환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분명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다. 기억이 나진 않지만…….“이서가 초대했다고?” 고개를 돌려 지엽을 바라보는 지환의 눈에 비웃음이 서렸다. “난 모르는 일인데?”“둘이 싸웠잖아요!” 소지엽은 허리를 곧게 펴고 말했다. “그러니까 모를 수도 있죠.”지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소지엽의 옷깃을 잡아서 들어 올렸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인 거 몰라?”그는 일부러 ‘부부’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지환의 아우라는 점차 놀라울 정도 강해졌다. 소지엽의 눈에도 은근 비아냥거리는 표정이 나타났다. “부부싸움 칼로 물 베기죠. 하지만, 부부 싸움이 이혼의 지름길인 건 모르나 봐요.” 지환은 전신의 힘을 다해 소지엽의 옷깃을 꽉 잡았다. 하지만 잠시 뒤 소지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지환의 안색이 극도로 어두워졌다.하지만 이서는 두렵기보다는 오히려 보복의 쾌감을 느꼈다.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녀는 곧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어색하게 소지엽을 바라보았다.소지엽도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그녀가 그렇겠노라고 답할 줄은 그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거 같았다.공기 중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얼굴이 화끈거리는 이서는 고개를 숙이고 죽을 먹었다.세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점점 미묘해졌다.밥을 다 먹고 이서는 핑계를 대고 방으로 들어갔다.소지엽도 계속 머무르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그는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그가 문고리를 돌리고자 할 때, 뒤에서 지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씨 가문 이랬지?” 소지엽은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려 지환을 바라보았다.지환은 이미 몸을 돌려 설거지하러 부엌으로 갔다.이 모든 게 너무 짧은 순간에 일어났다. 소지엽은 이 모든 상황이 환각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지환이 배달 용기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왔을 때, 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그는 숨을 들이마시고는 이서 방 쪽으로 걸어갔다. “자기야, 나 간다.”안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잠시 침묵하던 지환은 몸을 돌려 집을 나갔다.집을 나선 지환은 핸드폰을 꺼내 이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씨 가문의 둘째 아들을 외국에 보낼 방법 생각해 봐.”……다음날 침대에서 일어난 이서는 어젯밤 죽 먹을 때의 어색한 장면이 머릿속에 맴돌았다.낙담한 표정을 한 그녀는, 계속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할 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슨 일 하지?’이서가 턱을 괴고 있다.회사 쪽에서는 지금 1차 생산물량을 대기하고 있고, 서나나는 웹드라마와 방영을 앞두고 있다. 즉 현재로선 회사에서 그녀가 할 일은 마땅히 없는 상태였다.하지만 곧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하나의 결백을 증명해 줄 증인을 아직 못 찾았지?’‘마침 요 며칠
이서와 임하나는 일제히 고개를 들어, 말소리가 나는 쪽을 보았다.소지엽인 걸 알고, 이서는 깜짝 놀랐다. “여기 어떻게?”“출장 가려고.”소지엽이 손을 뻗어 이서의 손에 든 큰 캐리어를 받았다.“가자, 내가 부치는 거 도와줄게.”이서와 임하나는 한 손에 각각 하나씩 끌고 소지엽의 발걸음을 따라갔다.임하나는 소지엽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타이밍 죽인다. 근데 정말 출장 가는 거 맞아?”“우연이겠지, 우리가 해외 나가는 걸 소지엽이 사전에 알 리 없잖아.”“근데 난 왜 소지엽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연출한다는 생각이 들지? 이렇게 타이밍 적절하게 공항에 나타나기가 그렇게 쉬워?”“내가 말했잖아, 여자 친구 있다고.”반박하려던 임하나는 소지엽이 큰 짐을 부치고 또 돌아서서 이서의 캐리어를 건네받는 걸 보며 입을 다물었다.“어디 가는 거야?” 소지엽이 물었다.“ML 국.” 임하나가 먼저 대답했다. “너는?”소지엽이 웃었다. “와아, 이럴 수가?! 난 ML 국에서 경유하는데?”임하나는 눈을 깜박였다.“정말? 이게 우연의 일치?”소지엽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그치? 이런 우연이……? 누가 보면 미행한 줄 알겠어?”임하나도 소지엽의 얘기가 거짓말이라는 증거가 없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이서에게 말했다. “설마 우리 같은 비행기 타고 가는 건 아니겠지?” 소지엽이 웃었다. “항공편 명이 뭐야?”임하나는 항공편을 얘기해주었다.소지엽의 얼굴에 웃음이 더욱 찬란해졌다.“와아, 대박!”“…….”이서는 이런 우연의 일치가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ML 국은 작은 나라라, 항공편이 한 주에 두 번밖에 없었다.따라서 같은 항공편을 타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우리 들어가서 기다리자.” 이서가 제안했다.“먼저 가, 나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좀 있어.”“그래.”세 사람은 이내 갈라졌다.이서와 임하나가 공항 출국장 쪽으로 들어가는 걸 본 소지엽은 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소지나에게 전
소지엽은 그 사람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모르겠어, 지금까지 하은철 둘째 삼촌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었잖아. 그런데 민씨 그룹이 그쪽과 손잡고 엔터 사업 쪽에 진출한다고 하니까…….”하은철 삼촌 얘기를 꺼내자 소지나는 잠시 숙고했다. [정말 신비주의 컨셉 제대로 잡았어. 지금까지 하씨 집안 사람들 빼고는 아무도 그 사람 모습을 본 사람이 없어. 지난번 화장품 회사 인수 합병 건으로 완전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터라 사람들은 하 회장이 나서기 좋아하고 주목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 줄로 알고 있었거든. 그래서 다들 다음 투자는 어떤 분야로 진행할지 공식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엔터 쪽 사업을 진행할 줄은 몰랐지.]앞서 이루어진 몇 건의 투자에 대해 은밀히 소씨 그룹 내부에서 SY의 종적을 포착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SY과 민씨 그룹이 협력하고 있다는 정보를 놓칠 뻔했다.“지난번 인수 합병을 대대적으로 크게 벌인 것조차가 수상했어. 하은철 삼촌은 그렇게 나대는 스타일은 아니거든. 오히려 아주 신중하고 진중한 스타일이지…….”[맞아.]소지나도 그의 말에 찬성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때 왜 그렇게 대놓고 일을 크게 벌였는지 추측이 난무했거든.]공항 라운지로 들어간 소지엽은 바로 이서의 그림자를 찾았다.“아마도 내가 M 국에 가면 알게 될지도…….”소지엽이 몇 걸음 빨리 걸었다. 이내 말투도 빨라졌다.“누나, 먼저 끊을게. 맞다. 내 스케줄 비밀로 해줘. ML 국 일 처리 끝나는 대로 M 국으로 갈 거야.”[알았어, 행운은 빈다.]이서 옆에 도착하자, 소지나와의 통화도 끝났다.이서가 웃으며 물었다. “여자 친구랑 통화했어?”소지엽의 얼굴에 비친 웃음이 살짝 경직되었다. 하지만, 이서의 경계심을 내려놓게 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소지엽, 네 여자 친구 얘기나 좀 해 봐?”소지엽의 시선이 임하나한테 떨어졌다. 얼굴에 어색한 웃음을 하고.등잔 밑이 어둡다고, 이서의 친구, 만만치 않다.“응, 우
지환의 눈은 깊고 매혹적이었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칫 빠져들어 갈 것 같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지환은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려고 했다. 그녀는 황급히 손으로 막았다. “당신이 결혼하지 않았다면, 왜 M 국의 카운티 정부에 기혼으로 등록되어 있죠? 난 못 믿겠어요.”“시스템에 오류가 생겼나 봐.” 지환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그윽한 눈으로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여보, 우리가 함께한 지도 꽤 됐잖아.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 모르겠어?”그 말에 이서는 살짝 흔들렸다.사실, 지금까지 함께 지내면서 이번 일을 제외하고는 그는 그야말로 완벽한 남편이었다.그녀는 눈을 들어 지환을 보았다. “나…… 정말 당신 믿어도 되는 거예요?”“물론이지.”그는 이서의 손을 자기의 가슴 위치에 올려놓았다.이서의 마음에 쌓였던 굳은 얼음은, 지환의 가슴에서 들려오는 투박하고 힘찬 심장박동 소리에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지환의 이름을 막 부르려던 찰나, 지환의 뒤에 갑자기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어릿광대처럼 튀어나왔다. “하하하, 바보, 또 속았네! 메롱 메롱, 우리 결혼했지롱, 아이도 있지롱. 넌 그냥 남의 남편을 뺏은 세컨드, 불륜녀야.”“아니야……!”이서가 갑자기 눈을 떴다.주위에서 쏟아지는 의문의 눈빛을 마주하고서야 악몽을 꾸었다는 것을 알았다.이서는 손을 뻗어 이마에 받치고 비명을 듣고 달려온 스튜어디스에게 미안함을 표시했다.스튜어디스가 부드럽게 물었다. “물 한 잔 드릴까요?”“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네, 주세요.”두 사람은 서로 다른 얘기를 했다.스튜어디스는 의아한 눈빛으로 되물었다.“물 한 잔 부탁합니다.”이서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었다. 스튜어디스가 몸을 돌려 물을 가지러 갔다.스튜어디스가 떠나자, 이서는 몸을 곧게 펴고 소지엽이 건네준 티슈를 받았다.“하나는?”“너무 피곤해하는 것 같아서 비지니석에 가서 쉬라고 했어. 악몽 꾼 거야?”이서는 고개를 끄덕
소지엽은 슬픈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왠지 유난히 우울해 보였다. “가끔은 여자 친구보다 가족의 관심과 사랑이 더 필요하고 그리울 때가 있는 거야.”이서는 눈을 깜빡이며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가족들이…… 잘 안 해줘?”소지엽은 불쌍한 컨셉으로 이서의 동정심을 자극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1, 2초 동안 잠시 멍해 있었다.“나…… 나 밖에서 나온 자식이잖아. 어떻게 나에게 잘해주겠어?” 그는 이상한 눈빛으로 이서를 보았다. “너 몰랐어?”이서는 눈을 깜박거리더니, 한참 후에야 문득 깨달았다.그때도 소씨 집안 배경에 어떻게 심씨 집안 딸을 중매로 맺어주나 싶었다. 결국 비슷한 집안끼리 정략결혼으로 이어지는 상류층 사회에서, 소씨 집안 정도라면 4대 가문의 여자와 결혼하는 게 맞았다.‘소지엽이 사생아라니.’이서가 전혀 모르는 눈치를 보이자, 소지엽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내가 소씨 가문으로 들어가면서 아주 시끄러웠지, 너 몰랐어?”그제야 이서가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유학길에 오른 뒤, 두 사람은 전혀 교집합이 없었다.‘내가 사생아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인데, 이서는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혹시 내가 여덟 살 이전에 일어난 일인가? 맞아?” 이서는 말을 이었다.“나는 여덟 살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전혀 기억이 없어.”소지엽은 잠시 동안 뭔가를 생각한 듯 중얼거렸다. “그때, 너 이미 유학 갔구나.”“아?” 제대로 듣지 못한 이서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소지엽을 바라보았다.소지엽은 이서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며시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이서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세 사람이 ML 국에 도착한 후, 소지엽은 목적지의 항공권을 아직 예약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서 등과 함께 그들이 묵었던 호텔로 갔다.‘지난 번에 ML 국에 혼자 왔을 때는 허탕을 쳤는데, 이번에는 이서와 함께 오다니…….’약속된 여정은 아니었지만, 하늘이 그에 대
그녀는 필사적으로 눈을 몇 번 깜박거리며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했다. “나…….”하나는 역시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이서야,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지금부터 제대로 생각해 봐. 지환 씨가 중혼인 건 확정된 사실이야. 난 네가 이 감정에 빠져 허덕이는 게 싫어. 한 위대한 철학자가 이런 얘기를 했어. 지난 사랑을 잊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거라고…….”이서가 아무 말이 없자, 임하나는 마음에 안 드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설마 그를 용서하고, 일부다처제로 함께 행복한 생활을 할 생각은 아니지?”이서는 또다시 비행기에서의 악몽을 떠올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난 싫어!”이서의 기준으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만약 두 사람 사이에, 세 번째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녀는 차라리 이 감정을 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그럼 너…….”이때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서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오, 잠깐만, 곧 갈게.”임하나는 소지엽의 물음에 대답하며, 이서의 손을 잡았다.“이서야, 지금 당장 답을 안 해도 돼. 하지만, 곰곰이 잘 생각해 봐. 이건 인생이 걸린 큰 문제야.”이서는 망연자실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가자, 먼저 밥 먹으러 가자.”이서는 숨을 몇 번 들이마시며, 이 문제로 인해 복잡한 마음을 억누른 후에야 임하나와 함께 식당으로 내려갔다.하지만 식당에 도착하니, 커플들이 참 많이 보였다. 이서의 머릿속에 하나의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이서야, 너 왜 그래?”소지엽은 저녁 식사 시간 내내 멍하니 있는 이서를 보며 걱정이 되었다.“이서야!” 하나도 눈치챘는지 이서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비행기에서 제대로 못 쉬었지?”이서가 정신을 차렸을 때 임하나가 그녀에게 눈짓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이서는 지금 머리가 흐리멍덩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임하나에 대한 믿음 하나로 그녀가 보낸 신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