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하나 앞에서도 농담을 하는 거 보니, 오늘 우리 친구 기분이 엄청 좋은가 보네.’이상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나야 그러고 싶지, 근데 모 여사께서 협조를 안 해주네. 당신들 앞에서 자꾸 조크나 주고…….”이서도 빙그레 웃었다.“하나야, 들었지? 누군 지금 신문고 울릴 판이다. 얼른 정규직으로 전환시키고, 겹경사 파티 하자고.”“그만 해, 오늘은 너의 좋은 날이잖아, 주객전도가 되서는 안 되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큰 맘 먹고 이서와 지환 앞에서 자발적으로 이상언의 손을 잡았다.이상언은 고개를 숙이고 겹친 손을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막 입을 열려고 할 때, 임하나의 경고가 들려왔다.“적당히 하시죠.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부를 수도…….”이상언은 곧 입을 다물고, 순순히 임하나에 이끌려 자리에 앉았다.이서와 지환은 눈을 마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뭐 먹을까? 빨리 주문하자, 배고파 죽겠어.” 임하나는 이서가 놀리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그들은 얼른 음식을 주문했다.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이상언은, 하은철이 윤수정에 속은 모습을 얘기하면서 배 끌어안고 웃었다.“하하하, 하은철 표정을 봤어야 하는데…….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어!”임하나가 콧방귀를 뀌었다.“샘통이다. 전에 이서 보고 가식덩어리라고 하더니, 진짜 꽃뱀은 윤수정이잖아. 멀쩡하게 생겨서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봐. 어떻게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어. 이제 잘 됐네. 드디어 윤수정의 정체를 똑똑히 봤을 테니. 후회해도 소용없어!”지환은 고개를 돌려 이서를 보며,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지환의 시선을 느낀 이서도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그녀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눈빛으로 지환에게 ‘왜’냐고 물었다.지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이상언의 생생한 주총 현장 이야기를 들었다.임하나도 흥미진진하게 경청했다.“나중에는?”“윤수정이 하은철의 차에 오르는 것까지는 봤는데……
이서는 지환에게 숨기거나 감추거나 하지 않고 구태우에게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네, 그럼 지금 보내주세요.]잠시 뒤, 구태우의 메시지가 도착했다.[컴퓨터 바이러스로 관련 자료 복구는 불가합니다. 다행이 조사 자료를 프린트해 놓은 게 있어서……. 혹시 오후에 시간 있으세요? 제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생각해 보니 오후에 별 일도 없었다. 그래서 가볍게 답장했다.[네. 시간 있어요, 수고 좀 해주세요. 감사합니다.]구태우는 괜찮다는 간단한 답장을 하고는 더 이상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점심식사는 이서의 성화에 못 이겨 그녀가 계산했다.임하나와 이상언은 먼저 갔다.지환은 가만히 서 있었다.“오후에 출근 안 해도 돼요?”“해야지.” 지환은 손가락으로 이서의 여린 붉은 입술을 어루만지고, 다른 한 손으로 이서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그녀를 자기 몸에 찰싹 밀착시켜 꼼짝달싹 못하게 했다.“그런데 출근하기 싫어.”이서는 웃었다.“그럼 뭐 하고 싶은데요?”“너.” 지환이는 한 글자만 내뱉었다.이서는 지환이 얘기하는 바를 바로 알아차리고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아우, 참…….”지환은 이서의 귓불을 깨물었다.“자기야, 자기 또 나 꼬시는 거지?”이서는 수줍어하며 지환의 가슴을 팔로 받치며 그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얼른 출근해요.”지환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대신 오늘 저녁에 일찍 집에 오겠다고 약속해.”“어서 가요.”“약속한 거다? 알았지?”“…….”정확히 물러날 때를 잘 아는 지환은 이서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그럼 난 집에서 자기 기다릴게.”그는 말을 마치고 차에 올라 떠났다.“…….”얼굴의 홍조가 좀 사라지자 이서는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서우로 걸어갔다.지환은 백미러로서 점점 멀어져가는 이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그의 시선은 뒷좌석을 훔쳐보던 임현태의 시선과 정면으로 부딪쳤다.지환의 시선을 받은 임현태는 놀라서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오 마이 갓!’그는 연애 중
임현태는 지환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왜 이별을 고하는 말 같지?’‘설마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라는 건가?’이렇게 생각하니, 임현태의 온몸의 피가 또 들끓기 시작했다.……김청용 사무실.충격을 받은 김청용은 제자리에 서서 무려 수십 초 동안 멍해 있었다.이서는 미소를 지었다.“네, 내일 정식으로 취임합니다. 그래서 오늘 사장님께 정식으로 사직하러 왔습니다.”김청용은 박수를 쳤다.“정말 쾌거네요. 내가 듣기론 이번 경선을 위해 윤수정이 하은철 대표를 앞세워 여기저기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며 설쳤다는데…… 그러고 보면, 이서 씨가 제친 건 윤수정이 아니라 하은철인 거네요!”김청용은 정말 너무 궁금했다. 이서는 도대체 어떻게 주주들을 설득했을까?“사장님 과찬이십니다. 그냥 윤씨 그룹 내부 문제입니다. 음……. 오늘 사직서 정식 제출하고, 사장님께 인사도 드릴 겸…… 겸사겸사 들렸습니다.”“이렇게 급하게? 오늘 가려고요?”“네, 아시다시피 윤씨 그룹은 현재 난장판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부임해서 뒷수습해야죠.”김청용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서의 사직서에 서명한 후 이서에게 말했다.“앞으로 우리 다시 사업 파트너로 협력할 일이 있을 겁니다.”“물론입니다.”이서도 웃으며 말했다.“윤씨 그룹은 의류 패션사업을 위수로 하는 기업으로, 앞으로 여성 소비자를 겨냥해서 사업을 펼칠 예정입니다. 따라서 곧 머지않아 서우와 함께 협력하는 비즈니스가 있을 거라 믿습니다.”두 사람이 말하는 사이에 김청용은 사인한 사직서를 이서에게 건네주었다.“이서 씨, 미안한데,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따가 가기 전에 다시 인사해요.”“그러실 필요 없습니다.”“아니, 해야죠.” 김청용은 이서와 악수를 하고 이서가 떠나는 것을 지켜봤다.그는 이서가 처음 입사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이렇게 빠르게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는 이서를 보며, 그는 이서가 조만간 재계의 전설로 자리매김할
“언니랑 수정 씨, 완전 찐친인가 봐요? 벌써 만나러 가는 거예요……?”이서는 두 손으로 팔짱을 끼고, 무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득의양양한 장지완을 어이없게 바라보며 가볍게 비웃었다.콧방귀 소리를 들은 무리 중 한 사람이 고개를 돌려 이서를 노려보았다.마치 충견이 주인을 지키기 위해 으르렁 대는 것 같았다.“웃긴 왜 웃어요? 어, 알았다. 지완 언니가 윤씨 그룹을 방문한다니까 부러워서 그러는 거죠? 당신은 이제 평생 윤씨 그룹에 발 디딜 일은 없으니……?”이서는 하마터면 빵 터질 뻔했다.그녀는 이 루저들과 말을 섞는 시간도 아깝다고 생각했다.“현태 씨, 여기 어쩐 일이에요?”임현태는 드디어 말할 기회가 생겼다.“난…….”“윤이서…….” 하이힐을 신고 이서 앞에 다가간 장지완은 임현태의 말을 끊은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굳이 윤씨 그룹에 가고 싶다면, 내가 데려갈게.”이서는 입꼬리를 당기며 말했다.“윤씨 그룹에 가려면 혼자 가면 되지, 왜 당신이 나서?”“윤 대표가 당신을 못 들어가게 할 테니까?”“내가 왜 날 들어가게 해?” 이서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여 장지완을 흘겨보았다.장지완의 얼굴에 웃음기가 굳어졌다.“뭐라고?”“내가 윤씨 그룹 신임 CEO, 신임 대표이사인데, 왜 내가 날 못 들어가게 하냐고?” 이서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다시 한 번 말했다.장지완의 안색이 변했다.그러다가 곧 입꼬리를 치켜세웠다.“윤이서, 제대로 미쳤구나. 네가 어떻게 대표이사가 되?”“왜 안 된다고 생각하지? 나도 윤씨 집안 사람인데, 내가 CEO 자리에 못 앉을 이유라도 있나?” 이서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윤수정과 찐친 아니었나? 아직 당신에게 오늘 경선 결과를 안 알려줬나 보네?”“그럴 리 없어!” 장지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네가 어떻게 윤씨 그룹 CEO가 될 수 있어? 윤수정의 배후에는 하은철 대표가 있는데, 네가 뭐라고 하은철 대표가 미는 윤수정을 이겨?!”이서는 어처구니없는 듯 옅은 미소를 지으
장지완은 완전히 넋 놓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잠시 뒤, 그녀는 갑자기 바닥에서 일어나 이서의 손을 덥석 잡았다.“너 거짓말이지? 맞지? 네가 윤씨 그룹 CEO가 될 리 없잖아!”이서는 불편한듯 미간을 찌푸렸다.“놔!”이서의 손을 잡고 있던 장지완의 혼탁한 눈빛이, 임현태에게 떨어지면서 갑자기 눈동자가 밝아졌다.그녀는 비틀거리며 임현태에게로 향했다.임현태는 그녀의 행동에 깜짝 놀라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이서 앞으로 밀려났다.장지완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이 사람, 네 남편 맞지? 허, 알았다, 네가 수단방법 안 가리고 윤씨 그룹 CEO가 되려고 애쓰는 거, 바로 남편 먹여 살리려고 그러는 거지? 하하하, 네 남편 거지야! 가난뱅이!”이서는 관자놀이를 비비며 서늘한 말투로 말했다.“장지완, 미쳐도 좀 곱게 미쳐요.”“결혼을 했는데 남편은 남 앞에 못 보이겠다?” 장지완은 돌았다. 제 화에 못 이겨 미쳤다. 그녀는 이서를 공격할 거리를 찾지 못하자, 이서의 남편이 일반인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그녀를 필사적으로 공격하려고 했다.이서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확인해 보니 구태우가 전화한 것이었다.“태우 씨?”[나 지금 서우 1층에 있어요.]구태우는 손에 든 서류봉투를 들고 물었다.[언제쯤 시간 돼요?]이서는 그녀 앞을 가로막고 발광하는 장지완을 보며 어떤 말로도 그녀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갖다 줄 수 있겠어요? 지금 내려가기가 좀 그래서요…….”구태우는 ‘응’하고 대답했다.이서는 그제야 전화를 끊고 두 눈이 빨개진 장지완을 바라보며 말했다.“내 남편이 누구든, 당신이랑 뭔 상관이야? 오히려 당신…….”그녀는 입꼬리를 치켜세웠다.“콩밥 먹을 준비는 됐나?”장지완은 몸을 흔들며 물었다.“뭐라고?”이서는 턱을 살짝 들어올리고 몸을 돌려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장지완이 핑크 리본 공모전의 심사위원들에게 뇌물 돌린 증거를 가져갔다.이 때 구태우도 마침 올라왔다.그는 사무실 내
모두들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시선은 일제히 임현태에게 떨어졌다.이 덩치 큰 운전기사가 UFC의 무패 챔피언이라니.“윤 총괄님…….” 이미 윤 총괄이란 호칭에 익숙한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이서를 윤 총괄이라 불렀다.“남편이 정말 대단한 분이네요. 와, 격투기 챔피언이었어.”“너무 로맨틱한 거 아니에요? 격투기 챔피언이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기꺼이 격투기를 포기하고 매일 아내를 출퇴근시키다니…….”“와, 정말 몰랐어. 거친 남자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세심하다니.”“…….”임현태의 얼굴은 이미 땀투성이가 되었다.더워서가 아니라 추워서.사람들의 아부성 멘트를 들으며 이서는 의미 심장한 웃음을 지었다.“모두가 오해하셨어요. 임현태 씨는 제 남편이 아닙니다.”사람들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장지완을 쳐다보았다.“그런데 부 총괄님이…….”그 때 장지완이 그럴싸하게 얘기해서 다 믿었는데.이서의 말을 듣고 장지완은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래, UFC 격투기 챔피언이 어떻게 네 남편이 될 수 있겠니?”그러고는 곧 의미심장한 웃음을 터뜨렸다.“설마 매일 출퇴근시키려고 돈 주고 고용한 건 아니겠지? 네 가난뱅이 남편이 고용할 능력은 안 될 테고……. 그런데 어쩜 좋아? 우리 회사에는 UFC에 관심 있는 사람이 없으니,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괜히 허세 부리려다 너 헛돈 썼어……. 하하하.”이서는 장지완의 상상력에 대해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어처구니없어 입을 열어 말하려고 하는데 마침 구태우가 한걸음 앞서서 말했다.“더는 눈 뜨고 볼 수 없네. 매일 출퇴근시키고 기사를 자처한 건 짝사랑하기 때문인 걸 모르셨나 봐?!”이 말이 나오자 임현태조차도 고개를 돌려 구태우를 보았다.‘뭐? 내가 사모님을 짝사랑한다고?! 죽고 싶어 환장했나?!’구태우는 땅바닥에 흩어진 자료들 속에서 서류 한 장을 찾아 이서에게 건네주었다.“임현태 씨는 H국 사람이지만, 오랫동안 외국에서 거주했어요. 해외에 가기전에 이
“연적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최고의 평가이지?”“정말 점점 더 궁금하네, 윤 총괄님 남편은 대체 누굴까!”“…….”임현태의 방금 전 얘기를 듣고서야 이서는 비로서 긴장을 풀었다.곰곰이 생각해 보니, 임현태가 그녀에게 지나친 행동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또한 자기 감정도 드러낸 적도 한번도 없었다.‘진짜 다 내려 놓았나 봐.’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그럼 됐어요.”근데 지금은 임현태와의 일을 처리할 때가 아니었다.이서는 고개를 돌려 눈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장지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손으로 사무 책상을 긁으며 입으로 중얼거렸다.“하하, UFC무패 챔피언이 윤이서를 짝사랑 한다니. 허허, 왜 다들 윤이서를 좋아하는 거야? 왜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는 거냐고……? 왜……?”심한 외부적 자극으로 잠시 실성한 사람들을 이서는 텔레비전에서 본적이 있었다.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장지완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장지완이 핑크 리본 대자인대회 심사위원들에게 준 뇌물 증거를 꺼냈다.“이건 당신이 핑크 리본 디자인대회 심사위원들에게 송금한 기록들이야.”이서는 장지완의 귀에 다가갔다.“핑크 리본 대회는 해외에서 주최한 공모전이라 국내에서 이걸로 고소 고발할 수 없지만, 위 증거들은 당신이 자기 작품을 공모전에 제출했다는 증거인 셈이지…….”잠시 멈추었다가, 장지완의 흐리멍덩한 눈빛을 보며 이서는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당신은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자신의 작품이 공모전에 출품했다는 것을 알고 있은 거야. 다시 말해서, 당신은 강수지가 내 이메일로 당신의 작품을 주최측에 보낸 것을 알고 있었다는 거지. 지난 번에는 누명을 강수지에게 덮여 씌웠지만, 이 증거들 앞에서 이제 발뺌하기 어려울 거야.”장지완의 손에 걸린 책상들이 연쇄반응이 일어난 것처럼 겹겹이 넘어지면서 바닥에 부딪혀 ‘쿵’ 하는 소리가 냈다.그녀의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30분 뒤, 출동한 경찰은 장지완을 데리고 갔다.이서는
“소희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이서는 시종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심소희를 보며 참을성 있게 물었다.심소희는 고개를 들어 이서를 보았다. 이서의 격려의 눈빛을 보고서야 입을 열었다.“언니, 저도 윤씨 그룹으로 데려가면 안될까요?”이서는 그녀의 말을 듣고 웃었다.“나랑 같이 윤씨 그룹으로 가고 싶어?”심소희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곧 다시 말했다.“언니, 저 절대 무임 승차하려는 게 아니고……. 어, 아니다. 저 언니 옆에 딱 붙어서 언니한테 일을 배우고 싶어요…….”말하면서 심소희도 혼란스러운지 얼굴이 빨개졌다.이서는 웃으며 말했다.“네 뜻을 알겠어.”이서의 따뜻한 목소리에 심소희는 단번에 진정되었다. 그녀는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언니, 저 입사한 뒤, 언니한테 정말 많이 배웠어요. 그래서 계속 언니 옆에 있고 싶어요. 절대 언니가 대표이사가 되어서가 아니에요.”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심소희가 진심인 걸 알지만…….“소희야, 직장생활은 너무 감정적으로 대해서는 안 돼.”이서가 직설적으로 말했다.“윤씨 그룹 상황은 너도 이미 잘 알고 있지? 거긴 지금 난장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네가 지금 날 따라가면 아마 고생을 많이 하게 될 거야.”윤씨 그룹은 현재 내우외환에 처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 회사 운영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이 막중한 임무를 해결한다면, 그녀뿐만 아니라 함께 한 사람들에게도 비약적인 개인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심소희는 진지한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언니, 나 고생하는 거 두렵지 않아요. 고생한 보람이 있으면 돼요.”그녀는 이서 곁에만 있으면 자신의 고생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좋아.” 심소희의 진정성 있는 대답에 이서가 말했다.“그럼 나랑 가자.”심소희는 희색이 만면했다.“언니, 고마워요. 저 열심히 할 게요.”이서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서우 쪽 사직 절차가 마무리되면
소희는 심유인이 오늘도 트집을 잡으러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렇지 않고서야 아침 일찍 자신의 남자 친구를 데리고 올 리가 없지 않은가.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심유인이 멍청한 건 알겠는데, 남자 친구라는 사람도 멍청한 건가?’‘여기까지 따라와서 같이 소란을 피우다니.’잠시 후, 소희는 소민찬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뭐?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고? 하하, 심씨 가문 아가씨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니!”“참, 윤 대표와도 사이가 아주 좋으시다면서요?” “역시 끼리끼리군요. 남자 친구마저 똑같은 가난뱅이니까요.”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소희가 다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의 남편이 YS그룹의 전 대표인 하지환 씨라고 얘기하진 않은 모양이네요.” 순간, 심유인의 표정이 어색하게 구겨졌다.하지만 소민찬은 이 말을 듣자마자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하하’ 큰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웃겨 죽겠네요. 윤 대표의 남편이 하지환 대표님이라고요?” “유인아, 사촌 동생이라는 분이 허영에 가득 찬 분이신가 봐?” 유인은 다급하게 소민찬의 소매를 여러 번 당겼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윤 대표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면, 저는 물구나무서서 똥을 먹겠어요!” “누가 아침 일찍부터 우리 집에 와서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는 거죠?” 뒤에서부터 이지숙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돼지 멱따는 소리’라는 말에 소희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사석에서는 저런 면이 있으시구나.’ 소민찬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비록 소씨 가문의 일원이라 해도, 이지숙 앞에서는 힘을 쓸 방도가 없을 것이다.“안녕하십니까.” “소민찬 씨군요. 우리 집에는 어쩐 일로 온 거죠?” 유인이 민찬의 손을 잡고 말했다.“숙모, 민찬 씨는 제 남자 친구잖아요. 숙모께서 제 남자 친구를 한번 살펴봐 주셨으면 해서 데리고 왔어요.” 이지숙이 말했다.“네 남자 친구는 네 어머니께 보여 드려야지. 내가 허락한다고 한들, 소용없지 않겠니?
“그럼 그렇게 할게.”지환은 말을 마치자마자 이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서는 사무실에 들어가 고이서에 관한 모든 자료를 다시 살펴보았지만, 아쉽게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몇 가지 시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안 맞아.’‘하지만 내가 대체품이라는 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되는데.’ 즉, 지환이나 구태우의 조사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기다림의 시간은 항상 힘겹지만,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월요일은 피할 수 없었다. 이른 아침, 소희는 초조함 속에서 깨어났다. 고용인들이 그런 소희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곧 남자 친구분이 대표님 내외분을 만나실 텐데, 어째 긴장하는 모습이 아가씨가 그분의 부모님을 만나 뵙는 것 같네요?” 놀림당한 소희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조용히 고용인에게 다가가 물었다.“아주머니, 심씨 가문에 몇 년 동안 계셨어요?”고용인이 말했다.“4, 5년은 된 것 같은데, 왜 그러세요?”“그럼 아주머니께서는 저희 부모님께서 제 남자 친구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으세요? 심동, 그러니까 저희 오빠가 장희령을 데려왔을 때 많이 혼났다고 들었어요. 그게 사실인가요?” 고용인은 좌우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가십 매체가 그런 것도 알고 있던가요?”소희는 이 말을 듣자마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망했어.’‘그 매체에서 했던 말이 다 사실이라는 거잖아!’‘우리 부모님은 자녀의 짝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셔.’‘어쩌면 오늘 현태 오빠를 부른 것도, 혼내기 위한 걸 수도 있어.’ 소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고용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내외분께서 도련님을 혼내신 이유는, 장희령 씨의 출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에요.”“게다가 그 아가씨는 인품마저 좋지 않았잖아요. 아가씨를 겨냥하지만 않았어도 심씨 가문에 시집올 수는 있었을 텐데 말이죠.”고용인의 위로에도 소희는 여전히 걱정이 되었고, 심지어 현태에게 전화를 걸어오지 말라고 하고 싶었
“네, 소희 씨는 그 여자가 성지영의 딸이라고 했어요.”“제 기억이 맞다면, 그 여자는 나랑 동갑이에요. 즉, 그 여자가 정말 성지영의 딸이라면 두 가지 상황이 아니면 말이 안 돼요.” “나한테 쌍둥이 자매가 있는 게 아닌 이상, 내가 확실히 윤재하의 딸이 아니라는 거죠.”“아마 내 본래 이름도 ‘윤이서’가 아니었을 거예요. 그 이름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을 거고, 여전히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겠죠.” “왜 그렇게 생각한 거야?” “아주 간단해요. 고이서의 경력을 봤는데, 5살 때 화재를 당해서 피부이식수술과 성형수술을 감행했다고 했거든요.” “만약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면...”“그 여자가 피부 이식 수술과 성형수술을 받은 게 사실이라면, 그 두 가지 수술은 일정한 위험이 따를 뿐만 아니라, 회복 시간도 꽤 많이 필요했을 거예요.”“진정한 윤이서는 하은철과 약혼했는데, 수술 도중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게 알려지면 약혼이 취소되었을 거고, 하씨 가문도 다시는 윤씨 가문을 돕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의 윤씨 가문은 존재할 수 없었겠죠.” “그러니까... 윤재하가 하씨 가문과의 약혼을 지키기 위해 가짜 윤이서, 즉 너를 끌어들였다는 거야?” “네, 나를 외국에 보내서 공부하게 한 것도, 윤씨 가문 사람들이 내가 예전의 윤이서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거예요.” “게다가 나는 대여섯 살 이전의 기억이 전혀 없어요.”“이건... 절대 우연이 아닐 거예요.” “네 추측이 정확한지 알고 싶어?”지환이 물었다.“그야 당연하죠.” “이천한테 알아보라고 할게.”“아니요, 이미 알아봐 달라고 했어요.”순간 동작을 멈춘 지환이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소지엽한테?” “아니요, 구태우 씨한테요.” “그 사람은 소지엽의 친구잖아.” “그래서요?” 이서가 지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환은 바지 주머니에 넣은 손을 하염없이 떨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그래.”“우리 내기 하나 하자, 어때?
이서는 고이서의 신분을 알아내는 데 급급하여 더는 지체하지 않고 백화점 입구로 걸어갔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던 소희가 말했다.“그 여자가 누구라고 생각해요?”현태가 웃으며 말했다.“머리 쓰는 일은 나한테 묻지 마. 사모님께서 곧 결과를 알려주시겠지.”“아무래도 내 머리는 월요일에 쓰는 게 좋겠어.” 현태의 눈빛이 다소 부끄러워졌다.“월요일에 소희 씨 부모님께 순조롭게 인정받아서 우리가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 고개를 숙인 소희의 뺨도 붉게 달아올랐다.“그렇게 낯간지러운 말은 누가 가르쳐준 거예요?”“가르쳐 주긴, 솔직한... 내 속마음이야.” “청산유수네요.”소희가 현태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이만 가요, 옷 사야죠!”“그래.”현태는 흐뭇하게 대답한 후, 소희가 자신을 끌고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한편, 백화점 입구에 도착한 이서와 지환은 순조롭게 택시를 잡았다.두 사람이 차에 오른 후, 지환이 다소 풀어진 표정으로 물었다.“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말해줄 수 있어?”이서가 입술을 오므리며 중얼거렸다.“하지환 씨한테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잖아요.”“뭐가 적절하지 않아?” “우리는 곧 이혼할 거예요. 이런 시점에서 나한테 생긴 일을 하지환 씨한테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지환의 표정이 다시금 어두워졌다.앞줄에 앉아 있던 운전기사는 열정적인 노인이었는데,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지도 않은 채 ‘허허’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그 말은 틀린 것 같네요.”“두 사람은 이혼한다고 하지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라는 속담도 있잖아요?” “결혼한 이상, 두 사람은 인연인 거예요.”“나중에는 이혼하고 각자의 갈 길을 간다고 해도, 아직은 이혼한 것도 아니잖아요? 이혼하지 않았다면, 그건 두 사람의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인연이 끝나지 않은 거라면, 일이 있을 때 서로 상의하고 도울 수도 있는 거죠.” “나를 보세요, 마누라와의 관계가 다 끝나는 바람에 때로는
화장실을 나선 소희는 급히 매장으로 돌아왔고, 현태에게 물었다.“이서 언니는 어디 있어요?”“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급해 보여?” “어서요, 이서 언니부터 찾아야 해요.”소희는 현태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고, 현태는 우왕좌왕하는 그녀의 모습에 급히 이서를 찾으러 갈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그들은 매장 입구에 있는 지환을 보았으나, 이서를 찾지는 못했다. 현태는 자기도 모르게 다가가서 물었다.“대표님, 사모님은 어디 계세요?”굳은 표정의 지환은 여전히 이서가 떠난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소희가 현태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여기서 형부랑 있어 주세요. 나는 다른 곳에 가서 이서 언니를 찾아볼게요.” 하지만 이 말이 끝나자마자 돌아오는 이서의 모습이 보였다.소희가 급히 다가가 이서의 팔을 붙잡았다.“이서 언니...” 이서가 맥없이 짧게 대답했다.“응.” “언니, 왜 그래요?”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던 지환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다가와 긴장한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방금 성지영을 만났는데...” “언니도 성지영을 봤어요?”소희가 놀라며 물었다.“그럼 성지영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봤겠네요?” 이서의 눈이 반짝거렸다.“성지영 옆에 있는 사람을 봤어?”“아니요, 보지는 못했는데 화장실에서 두 사람이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그 여자, 성지영의 딸인 것 같았어요. 언니, 외동딸인 거 아니었어요? 성지영한테 언제 딸이 하나 더 생긴 걸까요?” “딸?”이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렇다니까요.”“아! 두 사람의 말투를 들어보니, 언니가 두 사람을 보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았어요.”소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언니, 언니한테 또 다른 자매가 있다는 걸 전혀 몰랐던 거예요?” 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지 않아도 그 사람이 아주 낯익다고 느끼던 참이었어. 잘 생각해 봐, 두 사람이 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소희는 한참을 생각하고서야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윤씨
성지영은 이서의 눈길을 피했지만, 아까만큼 긴장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하지만 별안간 욕설을 내뱉으며 말했다.“미친X, 네가 내 주변 사람을 어떻게 안다는 거야?!”성지영은 이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나려 했으나, 이서가 그녀의 앞길을 막으며 말했다.“그 사람, 대체 누구죠?”‘내가 그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걸 확신한 순간, 성지영의 긴장감이 눈에 띄게 풀리는 것 같았어.’ ‘내가 그 사람을 알아볼까 봐 두려웠던 모양이지?’ 이는 그 사람의 신분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성지영은 이서가 고이서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확신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 사람이 누구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윤이서, 네가 나를 부모로 여기지 않는 이상, 나도 너한테 정을 논할 필요가 없어!”“당장 비켜, 한 번만 더 내 앞길을 막으면 경찰에 신고할 줄 알라고!”이서는 한참이나 냉랭한 표정으로 성지영을 바라본 후에야 길을 비켰다. 성지영은 곧장 자리를 떠났고, 화장실에 도착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이때, 뒤에서 나타난 손에 성지영의 어깨를 세게 쳤다.화들짝 놀란 성지영이 뒤를 돌자, 고이서의 모습이 보였고, 성지영은 또 한번 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얘, 깜짝 놀랐잖니. 윤이서인 줄 알았다고!” 고이서는 마스크를 아래로 살짝 내리며 주변을 살폈고, 이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성지영을 끌고 화장실 칸으로 들어갔다. “다 엄마 때문이잖아요! 그러게 왜 시내에 오자고 하셔서.”원래 그들은 교외에서 잘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서를 만날 일이 없었다.하지만 성지영이 교외 옷이 촌스럽고 수준 낮다며 불평하기 시작했고, 꼭 시내에 가서 옷을 사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성지영은 이서를 우연히 만날 리가 없다고 확신했지만, 두 사람은 시내에 오자마자 이서를 마주치고 말았다.기민한 고이서가 성지영과 다른 길을 택하지 않았더라면 정체가 들통나고 말았을
그 그림자는 바로...성지영과 또 다른 사람!이서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이 마음속에 맴돌았고, 어느샌가 무의식중에 두 사람의 뒤를 쫓고 있었다. 이서가 움직이는 것을 본 지환은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드디어 내 옷을 골라주려는 거야!’하지만 곧 이서가 매장을 나가는 것이 보였고, 지환은 알 수 없는 분노가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람이 진짜...’‘얼마나 이혼하고 싶길래 저러는 거야?’ ‘나랑 같이 있고 싶지도 않다는 거야?”이렇게 생각한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의자에 앉았고, 계속해서 치미는 울화를 느꼈다. ...한편, 재빠르게 두 사람의 뒤를 쫓던 이서는 성지영과 다른 그림자에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뭐야, 두 사람의 발걸음도 빨라지는 것 같은데?’이서가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뒤쫓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군.’두 사람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는데, 당황한 탓에 길을 제대로 정하지 못한 듯했다. 이서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성지영의 옆에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옷차림을 보면 여자인 것 같은데.’‘나를 만나고 싶지 않은 여자라...’ 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서 두 사람의 뒤를 바짝 쫓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급기야 갈라져 걷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왼쪽으로, 또 다른 사람은 오른쪽으로.하지만 이서는 망설이지 않고 정체가 확실치 않은 여자의 뒤를 따랐다.모퉁이를 돈 이서가 그 여자의 옷과 모자를 잡으려던 찰나, 누군가가 이서의 손목을 잽싸게 낚아챘다.“이서야, 오랜만이구나.” 그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이서는 감전된 것처럼 상대의 손을 뿌리쳤고, 상대의 모습을 알아본 후에 주저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섰다.“성지영!”성지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이름을 부른다고? 이서야, 나는 아직도 네 어미 되는 사람이란다. 벌써 잊은 거니?”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나는 당신 같은
이서는 두 사람이 부끄러워하는 줄 알고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아니, 왜 결혼 얘기만 나오면 말이 없어져요?” 소희는 현태를 한번 보고서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이서 언니, 제가 알기로 우리 집 결혼식 들러리는 독신이어야 할 수 있어요...” 즉, 이서는 이미 결혼한 상태여서 결혼식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규칙이 있어?”“네.”“괜찮아, 어쨌든...”“곧 독신이 될 예정이잖아? 이혼한 사람이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규칙은 없는 거지?”차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현태는 백미러로 지환을 보았는데, 역시나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어두워져 있었다. 소희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부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이, 이서 언니... 부모님을 만날 때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요?” 이서는 차내 분위기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 듯 대답했다.“정장이 좋을 것 같아. 아무래도 격식 있어 보이니까.” “그렇구나...”소희는 이서와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차 안의 분위기는 다시금 뜨거워졌지만, 지환의 낯빛은 시종일관 어두웠다. 차가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현태가 말했다.“도착했습니다.”지환과 이서가 차례로 내리자, 소희는 몰래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현태 오빠, 어쩌죠? 방금 나왔는데, 두 사람 모두 얼굴을 찡그리고 있잖아요! 중매는 무슨, 싸우지 않게 하는 게 더 어렵겠어요!” “그렇지 않을 거야.”현태는 당황했음에도 불구하고 소희를 위로하려고 했다. “이따가 기회를 봐서 두 사람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자.” 소희는 멀찍이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깊은 의구심을 가졌다. “그래요! 이서 언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못 할 일도 없죠!” 두 사람도 차에서 내렸다.“이서 언니, 가요!”소희는 주동적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3층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계속해서 이서의 뒤를 따랐고, 맨 뒤에서 걷던 현태는 이 장면을 보고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네 사람
토요일.이서는 약속 시간까지 병원에서 소희를 기다렸다. 소희의 전화를 받고서야 밖으로 나온 이서는 지환의 병실을 지나며 안을 힐끗 보았지만,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갔나 보네.’이서는 별생각 없이 병원을 나섰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알콩달콩하게 서 있는 소희와 현태의 모습이 보였다.이 광경을 본 이서는 갑자기 심술이 나는 듯했다. ‘나도 하지환 씨와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차에 오르려던 이서는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이서는 차 안에 있는 지환을 보고는 눈을 두어번 깜빡인 후에야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 하지환 씨가 왜 여기 있어요?”이서는 망설이기 시작했다.“현태 씨가 옷을 고르러 갈 건데, 안목이 좋은 나도 같이 가면 좋겠다고 해서 왔어.” 이서가 고개를 돌려 현태를 바라보자, 현태가 어수룩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저... 소희 씨가 사모님께 전화한 줄은 몰랐어요.”“하지만 대표님께서 제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드문 기회라...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모님, 괜찮으시죠?” ‘완전 고의적이잖아!’이서는 속마음을 내보이고 싶었지만, 다음 주 월요일에 두 사람이 심근영 부부를 만나야 하는 것을 떠올리며, 한 명의 조언자가 더 있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긴, 여자인 나뿐만 아니라 남자의 조언도 같이 받는 게 더 도움이 될 거야. 화가 나긴 하지만... 조금만 참자.’ “괜찮아요, 어서 가시죠!”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조수석으로 향했다.하지만 소희가 재빨리 달려가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이서 언니, 제가 현태 오빠랑 같이 앉고 싶은데, 괜찮죠?”이서는 말문이 막혔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서 뒷좌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환과 거리를 두기 위해 창문에 바짝 붙어 앉았는데, 문이 없었다면 진작 차에서 떨어졌을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소희와 현태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아야만 했다. 그렇다. 두 사람이 지환을 불러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