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적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최고의 평가이지?”“정말 점점 더 궁금하네, 윤 총괄님 남편은 대체 누굴까!”“…….”임현태의 방금 전 얘기를 듣고서야 이서는 비로서 긴장을 풀었다.곰곰이 생각해 보니, 임현태가 그녀에게 지나친 행동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또한 자기 감정도 드러낸 적도 한번도 없었다.‘진짜 다 내려 놓았나 봐.’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그럼 됐어요.”근데 지금은 임현태와의 일을 처리할 때가 아니었다.이서는 고개를 돌려 눈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장지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손으로 사무 책상을 긁으며 입으로 중얼거렸다.“하하, UFC무패 챔피언이 윤이서를 짝사랑 한다니. 허허, 왜 다들 윤이서를 좋아하는 거야? 왜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는 거냐고……? 왜……?”심한 외부적 자극으로 잠시 실성한 사람들을 이서는 텔레비전에서 본적이 있었다.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장지완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장지완이 핑크 리본 대자인대회 심사위원들에게 준 뇌물 증거를 꺼냈다.“이건 당신이 핑크 리본 디자인대회 심사위원들에게 송금한 기록들이야.”이서는 장지완의 귀에 다가갔다.“핑크 리본 대회는 해외에서 주최한 공모전이라 국내에서 이걸로 고소 고발할 수 없지만, 위 증거들은 당신이 자기 작품을 공모전에 제출했다는 증거인 셈이지…….”잠시 멈추었다가, 장지완의 흐리멍덩한 눈빛을 보며 이서는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당신은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자신의 작품이 공모전에 출품했다는 것을 알고 있은 거야. 다시 말해서, 당신은 강수지가 내 이메일로 당신의 작품을 주최측에 보낸 것을 알고 있었다는 거지. 지난 번에는 누명을 강수지에게 덮여 씌웠지만, 이 증거들 앞에서 이제 발뺌하기 어려울 거야.”장지완의 손에 걸린 책상들이 연쇄반응이 일어난 것처럼 겹겹이 넘어지면서 바닥에 부딪혀 ‘쿵’ 하는 소리가 냈다.그녀의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30분 뒤, 출동한 경찰은 장지완을 데리고 갔다.이서는
“소희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이서는 시종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심소희를 보며 참을성 있게 물었다.심소희는 고개를 들어 이서를 보았다. 이서의 격려의 눈빛을 보고서야 입을 열었다.“언니, 저도 윤씨 그룹으로 데려가면 안될까요?”이서는 그녀의 말을 듣고 웃었다.“나랑 같이 윤씨 그룹으로 가고 싶어?”심소희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곧 다시 말했다.“언니, 저 절대 무임 승차하려는 게 아니고……. 어, 아니다. 저 언니 옆에 딱 붙어서 언니한테 일을 배우고 싶어요…….”말하면서 심소희도 혼란스러운지 얼굴이 빨개졌다.이서는 웃으며 말했다.“네 뜻을 알겠어.”이서의 따뜻한 목소리에 심소희는 단번에 진정되었다. 그녀는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언니, 저 입사한 뒤, 언니한테 정말 많이 배웠어요. 그래서 계속 언니 옆에 있고 싶어요. 절대 언니가 대표이사가 되어서가 아니에요.”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심소희가 진심인 걸 알지만…….“소희야, 직장생활은 너무 감정적으로 대해서는 안 돼.”이서가 직설적으로 말했다.“윤씨 그룹 상황은 너도 이미 잘 알고 있지? 거긴 지금 난장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네가 지금 날 따라가면 아마 고생을 많이 하게 될 거야.”윤씨 그룹은 현재 내우외환에 처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 회사 운영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이 막중한 임무를 해결한다면, 그녀뿐만 아니라 함께 한 사람들에게도 비약적인 개인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심소희는 진지한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언니, 나 고생하는 거 두렵지 않아요. 고생한 보람이 있으면 돼요.”그녀는 이서 곁에만 있으면 자신의 고생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좋아.” 심소희의 진정성 있는 대답에 이서가 말했다.“그럼 나랑 가자.”심소희는 희색이 만면했다.“언니, 고마워요. 저 열심히 할 게요.”이서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서우 쪽 사직 절차가 마무리되면
임현태가 이렇게 말하자 이서는 오히려 부끄러워했다.“그러나 드릴 건 드려야지요.”“아니요, 이미 받았습니다.”이서는 개인적인 성장이나 발전 등 정신적인 보상을 얘기하는 줄 알았다. 임현태가 방금 말한 별장과 체육관은 전혀 연관 짓지 않았다.임현태가 이렇게까지 얘기하자, 이서도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그래요, 고마워요, 임현태 씨.”임현태는 이서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지환은 이미 집에 와있었다.이서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웃으며, 그녀의 개미허리를 한 팔에 껴안았다.“우리 자기는 시간을 철저하게 지키는구나. 시간 딱 맞게 왔네.”이서는 지환의 가슴을 밀었다. 이전에 임현태가 그를 짝사랑한다는 걸 몰랐을 때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지환과 껴안고 뽀뽀하는 등 친밀한 동작을 했지만, 그러나 지금은…….지환은 이서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이서를 풀어주며 임현태에게 말했다.“우리 얘기 좀 하지.”이서는 깜짝 놀랐다. 긴장한 나머지 지환의 넥타이를 잡고 눈빛으로 임현태가 짝사랑하는 일을 알고 있는지 물었다.한편으로는 지환이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이서의 손을 잡은 지환은 괜히 마음이 찔렸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 마. 별일 없을 거야.”이서는 지환의 넥타이를 힘껏 움켜쥐었지만, 그의 깊은 눈동자에서 점점 길을 잃고 곧 넥타이를 서서히 풀어줬다.두 사람이 문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 이서는 긴장한 나머지 침을 꼴깍 삼켰다.“지환 씨, 빨리 와요.”소녀는 촉촉한 눈을 하고 있었다. 황혼 녘 햇살의 부드러운 빛이 그녀의 몸에 드리우며 그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몽환적이고 신비해 보였다.지환은 입술을 올리며 말했다.“응.”별장을 나서자 임현태는 황급히 얘기했다.“회장님 걱정 마세요. 사모님께 이제는 다 내려놓았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사모님께 다른 마음을 없을 거라고 약속했어요.”‘편히 사는 게 싫다면 모를까나…….’지환은 손에 든 라이터를 가지고 놀며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
꿈에서 반쯤 깨어났을 때, 이서는 자신이 침대가 아니라 부드러운 꽃밭에 누워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꽃밭에서 그녀는 각양각색의 꽃향기를 맡았던 것 같았다.마침내 깨어난 이서는 손가락으로 지환의 턱을 가볍게 짚었다.지환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그녀의 손에 키스했다.“괜찮아?”“음, 근데 배고파요.”지환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이천에게 음식 좀 사오라고 할게.”“지금이 몇 시인데? 퇴근했겠죠…….”“아니야.” 지환은 핸드폰을 들고 이천에게 메시지를 보내고는 핸드폰을 침대 머리맡에 놓았다.“15분 뒤면 올 거야. 먼저 내려가서 빵이나 좀 가져올 게.”“아니요.” 이서는 얼굴을 붉혔다. 그는 일어나 지환의 눈을 바라보며 잠깐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나, 당신에게 할 말 있어요.”“무슨 일인데?”“임현태 씨…….” 이서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며 말을 이었다.“임현태가 나를 짝사랑하는 일에 대해…….”여기까지 말하고, 그녀는 또 얼른 지환을 살폈다.“걱정 마요, 우리 다시는 안 만날 거예요.”지환은 볼에 달라붙은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나, 그렇게 속 좁은 남자 아니야. 이미 임현태랑 얘기 끝냈어. 앞으로 계속 자기 운전기사로 있어달라고 얘기했어.”이서가 눈을 깜박거렸다.지환은 계속해서 말했다.“게다가, 자기를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정상이지. 내 아내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데…….”이서는 다시 눈을 깜박였다.“그런데…….”“그런데 뭐?”“상언 씨가…… 당신 열등감이…….”지난번에도 소지엽과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데, 스캔들이 났다고 열등감에 달려가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셨었다.그런데 이번에는 임현태가 그녀를 짝사랑한다고 했다.지환은 잠깐 멍해 있다가 곧 이마로 이서의 이마를 받쳤다.“내가, 열등감이 있다고?”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따스함이 느껴졌다.이서의 얼굴이 빨개졌다.지환은 손가락으로 이서의 손가락을 짚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에 왠지 희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양전호와 구양태도 눈이 휘둥그레졌다.한차례 실랑이나 우여곡절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서가 이렇게 화끈하게 승낙할 줄은 몰랐다.그러자 그들은 이서가 무슨 음모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정…… 정말 우리가 투자를 철회하는 거에 동의한다는 거지?”양전호가 물었다.“싫다는 사람 잡지 않습니다. 두분께서 윤씨 그룹과 함께 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저 또한 억지로 잡을 생각 같은 건 없습니다.”CEO 선출에 성공했을 때 그녀는 벌써 이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구체적 절차는 담당직원이 안내할 겁니다. 혹시 또 다른 업무가 있을까요?”축객령이 떨어진 셈이다.“없네, 구체적 절차를 밟을 때도 이렇게 통쾌했으면 하네.”말을 마치고, 두 사람은 가버렸다.직원들은 양전호와 구양태가 이서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거라고 기대했는데, 일이 뜻밖에도 이렇게 빨리 끝나니 왠지 시시하다고 느껴졌다.윤아영은 방금 발생한 일을 얼른 윤수정에게 문자로 보냈다.문자를 막 보냈는데, 갑자기 이서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현태 씨, 모든 사람을 집합시켜 주세요!”임현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 내의 모든 사람들을 불러냈다.반항하던 사람들도, 임현태의 울근불근한 근육질을 보고는, 순순히 홀에 나왔다.약 200여명의 직원이 다 모였다.이서는 뭇사람을 훑어보았다.방금 서류를 확인해 보니 윤씨 그룹 직원은 총 225명이었다. 고위층 관리직의 90%는 윤재하 부부의 친인척으로, 할 줄 아는 거 없이 자리만 지키는 허수아비들이었다. 전부 교체해야 하지만, 한꺼번에 큰 물갈이를 하는 것은 분명히 비현실적이라 조금씩 야금야금 진행할 수밖에 없다.일반 직원 중 윤씨 부부 친인척의 비중은 45%로 고위층 관리자에 비해 그리 높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가족 기업에 비해서도 매우 높은 비율이었다.오늘 이서가 할 일은, 먼저 이 45%의 비율을 낮추는 것이었다.200여 명의 직원 앞에 나선, 이서의 카리스마는 그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았다.“여러분 중에 내가 윤씨 C
그럼에도 큰 파장을 불러왔다.제명된 홍보팀 팀장이 바로 윤아영의 엄마, 양춘매였다.윤아영을 겨냥한 결정은 아니었다. 이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현재 기업 상태로 봤을 때, 홍보팀은 있으나 마나한 부서였기 때문이다. 할 일은 없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부서였다.이서는 공밥을 먹는 사람을 그냥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 이 자리에 누가 앉았던 해고했을 것이다.그러나 양춘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과 딸이 동시에 호명되자, 그녀는 즉시 울부짖었다.“세상에, 우리 모녀를 피 말려 죽일 셈이냐? 이게 무슨 회사 사장이고 대표이사야, 살인범이지! 살인범!”히스테리를 부리는 양춘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울고불고 난리 부르스를 떨어도 이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호명되신 분들은 권고사직으로 처리되어 3개월의 임금을 위로금으로 지불할 예정입니다. 만약 소란을 피운다면 징계 해고로 처리하겠습니다.”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소란에 가담하려던 사람들도 가만히 잠자코 있었다.얼굴이 창백해진 윤아영은 윤수정에게 다시 문자를 보내고자 했다.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어느새 윤수정의 답장이 와 있었다.윤아영의 눈동자가 반짝였다.그녀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여러분, 윤이서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세요. 여러분 오늘 호명된 사람들 모두 윤씨 집안 사람들입니다. 우리 윤씨 사람들을 쫓아내고, 회사를 자기 주머니에 넣으려는 수작이 틀림없습니다.”이서가 윤아영을 바라보았다.논리가 분명한 것이 배후에 틀림없이 조언자가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이서도 이런 상황을 일찌감치 예상했다.어쩌면 윤씨 집안 친인척들에게 일부러 보여 주기식 작전이었을 지도 모른다.“우리 함께 힘을 합칩시다!”윤아영은 밖으로 나와 전체 직원들을 향해 팔을 휘두르며 소리쳤다.“우리 윤이서에게 맞섭시다. 안 그랬다간 앞으로 틀림없이 회사를 제멋대로 주무르려고 할 겁니다.”사람들은 이서와 윤아영을 번갈아 보며 소곤소곤 속삭였다.결국 인사팀의 윤재기가 나섰다.윤재하와
윤재기는 심장이 철렁했다.그러나 이미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꼬리 내리고 물러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직원들에게 말했다.“나를 따르고 싶은 사람은 나오세요!”상황을 보고 윤아영이 제일 먼저 그녀의 어머니 양춘매를 끌고 나섰다.두 모녀는 주위 사람들을 계속 부추겼다.“여러분 두려워할 거 없어요. 수정언니가 지금 새 회사 설립 중입니다. 그것도 바로 위층에서요. 여기서 나가서 바로 수정언니 새 회사에 입사할 수 있습니다.”위층에 새 회사가 들어온다는 건 다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윤수정이 새로 회사를 설립한다는 얘기에 다들 마음이 흔들렸다.윤아영과 양춘매의 뒤로 다가가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200여 명의 직원 중 절반 이상이 윤아영 쪽에 모였다.이서 쪽에는 90여 명만 남았다.남은 사람들도 저쪽으로 가야 할지 말지 망설이고 있었다.윤아영이 다시 선동했다.“이쪽으로 오세요. 내가 장담하는데, 여길 그만 두면 위층 회사로 갈 수 있어요. 거긴 수정언니 회사에요. 분명히 하은철 대표가 자금을 지원했을 겁니다.”하은철이라는 이름을 언급하자, 또 절반정도가 넘어갔다.그러나 윤아영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서를 독불장군으로 만들 심산이었다.“설마 아직 망설이는 분 있는 건가요? 윤씨 그룹이 윤이서 손에서 잘 될 거 같아요?”눈 깜짝할 사이에 또 수십 명이 넘어갔다.처음부터 끝까지 이서는 시종일관 지켜만 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윤아영이 승리의 여신마냥 득의양양한 시선으로 이서를 째려보았다. 이서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또 있습니까? 있다면 빨리 가세요. 기회는 이번뿐입니다.”이서의 말이 떨어지자, 또 몇 명이 넘어갔다.이 상황을 지켜본 임현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뭐라고 말하기가 뭐해 조용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직할 사람은 와서 이직절차를 마치시고, 남고 싶은 사람들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기 바랍니다.”이서의 말이 떨어지자, 이직하고 싶지
이서의 마지막 말에, 윤아영을 열 받아 돌아가실 뻔했다.이서가 일부러 모두의 화와 분노를 그녀에게 쏠리게 한 거였다.한껏 신 났던 사람들은 그제야 일제히 윤아영을 바라보았다.“아영아, 우리 정말 수정이 회사에 입사되는 거지?”윤아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이서를 난처하게 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뱉었을 뿐, 정말 입사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확답할 수 없었다.사람들은 그제야 상황판단이 되었다.“아영아, 너 우리 속인 거 아니지?!”“그니까, 우리 너 말만 믿고 따라왔는데, 갑자기 일자리가 없다니……, 그럼 이번 달 월급은 누가 주는 거야!”“난 몰라, 아영아, 내가 너 때문에 직장을 잃었으니 네가 책임지고 새 일자리를 구해줘!”사람들이 윤아영을 물샐틈없이 에워쌌다.임현태는 저도 모르게 이서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대단해!’‘사모님은 처음부터 이 사람들을 회사에 둘 생각이 없었던 거야.’‘그들을 직접 해고하면, 틀림없이 소란을 피웠을 텐데, 지금 이렇게 되자 사람들의 원망은 모두 윤아영에게 옮겨졌네. 사모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되고…….’‘손도 안 대고 이렇게 시원하게 코를 풀어 버리다니, 안 보이는 무형의 손으로 골칫거리를 깔끔하게 해결했어. 대단해.’회사에 남은 30~40명의 직원들은, 자신의 선택을 다행으로 생각했다.이서는 입구에서 소란스럽게 떠드는 사람을 보며 임현태에게 말했다.“현태 씨, 경비원을 불러 밖으로 내보내세요. 여기는 사무실입니다.”임현태는 웃으며 말했다.“경비원 필요 없습니다,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말하면서 그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저기…… 밖에 나가서 얘기하세요. 여기서 시끄럽게 굴면…….”임현태가 소매를 걷어붙이자, 울퉁불퉁한 팔 근육이 드러났다.“저도 부득이하게 손을 쓰겠습니다!”임현태의 근육질 몸매를 본 사람들은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분분히 떠났다. 순식간에 사무실이 조용해졌다.이서는 만족스러운 듯 임현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눈길을 돌려 열심히 일하고 있는
소희는 심유인이 오늘도 트집을 잡으러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렇지 않고서야 아침 일찍 자신의 남자 친구를 데리고 올 리가 없지 않은가.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심유인이 멍청한 건 알겠는데, 남자 친구라는 사람도 멍청한 건가?’‘여기까지 따라와서 같이 소란을 피우다니.’잠시 후, 소희는 소민찬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뭐?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고? 하하, 심씨 가문 아가씨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니!”“참, 윤 대표와도 사이가 아주 좋으시다면서요?” “역시 끼리끼리군요. 남자 친구마저 똑같은 가난뱅이니까요.”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소희가 다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의 남편이 YS그룹의 전 대표인 하지환 씨라고 얘기하진 않은 모양이네요.” 순간, 심유인의 표정이 어색하게 구겨졌다.하지만 소민찬은 이 말을 듣자마자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하하’ 큰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웃겨 죽겠네요. 윤 대표의 남편이 하지환 대표님이라고요?” “유인아, 사촌 동생이라는 분이 허영에 가득 찬 분이신가 봐?” 유인은 다급하게 소민찬의 소매를 여러 번 당겼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윤 대표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면, 저는 물구나무서서 똥을 먹겠어요!” “누가 아침 일찍부터 우리 집에 와서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는 거죠?” 뒤에서부터 이지숙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돼지 멱따는 소리’라는 말에 소희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사석에서는 저런 면이 있으시구나.’ 소민찬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비록 소씨 가문의 일원이라 해도, 이지숙 앞에서는 힘을 쓸 방도가 없을 것이다.“안녕하십니까.” “소민찬 씨군요. 우리 집에는 어쩐 일로 온 거죠?” 유인이 민찬의 손을 잡고 말했다.“숙모, 민찬 씨는 제 남자 친구잖아요. 숙모께서 제 남자 친구를 한번 살펴봐 주셨으면 해서 데리고 왔어요.” 이지숙이 말했다.“네 남자 친구는 네 어머니께 보여 드려야지. 내가 허락한다고 한들, 소용없지 않겠니?
“그럼 그렇게 할게.”지환은 말을 마치자마자 이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서는 사무실에 들어가 고이서에 관한 모든 자료를 다시 살펴보았지만, 아쉽게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몇 가지 시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안 맞아.’‘하지만 내가 대체품이라는 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되는데.’ 즉, 지환이나 구태우의 조사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기다림의 시간은 항상 힘겹지만,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월요일은 피할 수 없었다. 이른 아침, 소희는 초조함 속에서 깨어났다. 고용인들이 그런 소희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곧 남자 친구분이 대표님 내외분을 만나실 텐데, 어째 긴장하는 모습이 아가씨가 그분의 부모님을 만나 뵙는 것 같네요?” 놀림당한 소희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조용히 고용인에게 다가가 물었다.“아주머니, 심씨 가문에 몇 년 동안 계셨어요?”고용인이 말했다.“4, 5년은 된 것 같은데, 왜 그러세요?”“그럼 아주머니께서는 저희 부모님께서 제 남자 친구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으세요? 심동, 그러니까 저희 오빠가 장희령을 데려왔을 때 많이 혼났다고 들었어요. 그게 사실인가요?” 고용인은 좌우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가십 매체가 그런 것도 알고 있던가요?”소희는 이 말을 듣자마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망했어.’‘그 매체에서 했던 말이 다 사실이라는 거잖아!’‘우리 부모님은 자녀의 짝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셔.’‘어쩌면 오늘 현태 오빠를 부른 것도, 혼내기 위한 걸 수도 있어.’ 소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고용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내외분께서 도련님을 혼내신 이유는, 장희령 씨의 출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에요.”“게다가 그 아가씨는 인품마저 좋지 않았잖아요. 아가씨를 겨냥하지만 않았어도 심씨 가문에 시집올 수는 있었을 텐데 말이죠.”고용인의 위로에도 소희는 여전히 걱정이 되었고, 심지어 현태에게 전화를 걸어오지 말라고 하고 싶었
“네, 소희 씨는 그 여자가 성지영의 딸이라고 했어요.”“제 기억이 맞다면, 그 여자는 나랑 동갑이에요. 즉, 그 여자가 정말 성지영의 딸이라면 두 가지 상황이 아니면 말이 안 돼요.” “나한테 쌍둥이 자매가 있는 게 아닌 이상, 내가 확실히 윤재하의 딸이 아니라는 거죠.”“아마 내 본래 이름도 ‘윤이서’가 아니었을 거예요. 그 이름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을 거고, 여전히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겠죠.” “왜 그렇게 생각한 거야?” “아주 간단해요. 고이서의 경력을 봤는데, 5살 때 화재를 당해서 피부이식수술과 성형수술을 감행했다고 했거든요.” “만약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면...”“그 여자가 피부 이식 수술과 성형수술을 받은 게 사실이라면, 그 두 가지 수술은 일정한 위험이 따를 뿐만 아니라, 회복 시간도 꽤 많이 필요했을 거예요.”“진정한 윤이서는 하은철과 약혼했는데, 수술 도중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게 알려지면 약혼이 취소되었을 거고, 하씨 가문도 다시는 윤씨 가문을 돕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의 윤씨 가문은 존재할 수 없었겠죠.” “그러니까... 윤재하가 하씨 가문과의 약혼을 지키기 위해 가짜 윤이서, 즉 너를 끌어들였다는 거야?” “네, 나를 외국에 보내서 공부하게 한 것도, 윤씨 가문 사람들이 내가 예전의 윤이서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거예요.” “게다가 나는 대여섯 살 이전의 기억이 전혀 없어요.”“이건... 절대 우연이 아닐 거예요.” “네 추측이 정확한지 알고 싶어?”지환이 물었다.“그야 당연하죠.” “이천한테 알아보라고 할게.”“아니요, 이미 알아봐 달라고 했어요.”순간 동작을 멈춘 지환이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소지엽한테?” “아니요, 구태우 씨한테요.” “그 사람은 소지엽의 친구잖아.” “그래서요?” 이서가 지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환은 바지 주머니에 넣은 손을 하염없이 떨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그래.”“우리 내기 하나 하자, 어때?
이서는 고이서의 신분을 알아내는 데 급급하여 더는 지체하지 않고 백화점 입구로 걸어갔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던 소희가 말했다.“그 여자가 누구라고 생각해요?”현태가 웃으며 말했다.“머리 쓰는 일은 나한테 묻지 마. 사모님께서 곧 결과를 알려주시겠지.”“아무래도 내 머리는 월요일에 쓰는 게 좋겠어.” 현태의 눈빛이 다소 부끄러워졌다.“월요일에 소희 씨 부모님께 순조롭게 인정받아서 우리가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 고개를 숙인 소희의 뺨도 붉게 달아올랐다.“그렇게 낯간지러운 말은 누가 가르쳐준 거예요?”“가르쳐 주긴, 솔직한... 내 속마음이야.” “청산유수네요.”소희가 현태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이만 가요, 옷 사야죠!”“그래.”현태는 흐뭇하게 대답한 후, 소희가 자신을 끌고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한편, 백화점 입구에 도착한 이서와 지환은 순조롭게 택시를 잡았다.두 사람이 차에 오른 후, 지환이 다소 풀어진 표정으로 물었다.“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말해줄 수 있어?”이서가 입술을 오므리며 중얼거렸다.“하지환 씨한테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잖아요.”“뭐가 적절하지 않아?” “우리는 곧 이혼할 거예요. 이런 시점에서 나한테 생긴 일을 하지환 씨한테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지환의 표정이 다시금 어두워졌다.앞줄에 앉아 있던 운전기사는 열정적인 노인이었는데,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지도 않은 채 ‘허허’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그 말은 틀린 것 같네요.”“두 사람은 이혼한다고 하지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라는 속담도 있잖아요?” “결혼한 이상, 두 사람은 인연인 거예요.”“나중에는 이혼하고 각자의 갈 길을 간다고 해도, 아직은 이혼한 것도 아니잖아요? 이혼하지 않았다면, 그건 두 사람의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인연이 끝나지 않은 거라면, 일이 있을 때 서로 상의하고 도울 수도 있는 거죠.” “나를 보세요, 마누라와의 관계가 다 끝나는 바람에 때로는
화장실을 나선 소희는 급히 매장으로 돌아왔고, 현태에게 물었다.“이서 언니는 어디 있어요?”“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급해 보여?” “어서요, 이서 언니부터 찾아야 해요.”소희는 현태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고, 현태는 우왕좌왕하는 그녀의 모습에 급히 이서를 찾으러 갈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그들은 매장 입구에 있는 지환을 보았으나, 이서를 찾지는 못했다. 현태는 자기도 모르게 다가가서 물었다.“대표님, 사모님은 어디 계세요?”굳은 표정의 지환은 여전히 이서가 떠난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소희가 현태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여기서 형부랑 있어 주세요. 나는 다른 곳에 가서 이서 언니를 찾아볼게요.” 하지만 이 말이 끝나자마자 돌아오는 이서의 모습이 보였다.소희가 급히 다가가 이서의 팔을 붙잡았다.“이서 언니...” 이서가 맥없이 짧게 대답했다.“응.” “언니, 왜 그래요?”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던 지환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다가와 긴장한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방금 성지영을 만났는데...” “언니도 성지영을 봤어요?”소희가 놀라며 물었다.“그럼 성지영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봤겠네요?” 이서의 눈이 반짝거렸다.“성지영 옆에 있는 사람을 봤어?”“아니요, 보지는 못했는데 화장실에서 두 사람이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그 여자, 성지영의 딸인 것 같았어요. 언니, 외동딸인 거 아니었어요? 성지영한테 언제 딸이 하나 더 생긴 걸까요?” “딸?”이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렇다니까요.”“아! 두 사람의 말투를 들어보니, 언니가 두 사람을 보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았어요.”소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언니, 언니한테 또 다른 자매가 있다는 걸 전혀 몰랐던 거예요?” 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지 않아도 그 사람이 아주 낯익다고 느끼던 참이었어. 잘 생각해 봐, 두 사람이 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소희는 한참을 생각하고서야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윤씨
성지영은 이서의 눈길을 피했지만, 아까만큼 긴장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하지만 별안간 욕설을 내뱉으며 말했다.“미친X, 네가 내 주변 사람을 어떻게 안다는 거야?!”성지영은 이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나려 했으나, 이서가 그녀의 앞길을 막으며 말했다.“그 사람, 대체 누구죠?”‘내가 그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걸 확신한 순간, 성지영의 긴장감이 눈에 띄게 풀리는 것 같았어.’ ‘내가 그 사람을 알아볼까 봐 두려웠던 모양이지?’ 이는 그 사람의 신분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성지영은 이서가 고이서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확신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 사람이 누구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윤이서, 네가 나를 부모로 여기지 않는 이상, 나도 너한테 정을 논할 필요가 없어!”“당장 비켜, 한 번만 더 내 앞길을 막으면 경찰에 신고할 줄 알라고!”이서는 한참이나 냉랭한 표정으로 성지영을 바라본 후에야 길을 비켰다. 성지영은 곧장 자리를 떠났고, 화장실에 도착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이때, 뒤에서 나타난 손에 성지영의 어깨를 세게 쳤다.화들짝 놀란 성지영이 뒤를 돌자, 고이서의 모습이 보였고, 성지영은 또 한번 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얘, 깜짝 놀랐잖니. 윤이서인 줄 알았다고!” 고이서는 마스크를 아래로 살짝 내리며 주변을 살폈고, 이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성지영을 끌고 화장실 칸으로 들어갔다. “다 엄마 때문이잖아요! 그러게 왜 시내에 오자고 하셔서.”원래 그들은 교외에서 잘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서를 만날 일이 없었다.하지만 성지영이 교외 옷이 촌스럽고 수준 낮다며 불평하기 시작했고, 꼭 시내에 가서 옷을 사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성지영은 이서를 우연히 만날 리가 없다고 확신했지만, 두 사람은 시내에 오자마자 이서를 마주치고 말았다.기민한 고이서가 성지영과 다른 길을 택하지 않았더라면 정체가 들통나고 말았을
그 그림자는 바로...성지영과 또 다른 사람!이서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이 마음속에 맴돌았고, 어느샌가 무의식중에 두 사람의 뒤를 쫓고 있었다. 이서가 움직이는 것을 본 지환은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드디어 내 옷을 골라주려는 거야!’하지만 곧 이서가 매장을 나가는 것이 보였고, 지환은 알 수 없는 분노가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람이 진짜...’‘얼마나 이혼하고 싶길래 저러는 거야?’ ‘나랑 같이 있고 싶지도 않다는 거야?”이렇게 생각한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의자에 앉았고, 계속해서 치미는 울화를 느꼈다. ...한편, 재빠르게 두 사람의 뒤를 쫓던 이서는 성지영과 다른 그림자에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뭐야, 두 사람의 발걸음도 빨라지는 것 같은데?’이서가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뒤쫓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군.’두 사람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는데, 당황한 탓에 길을 제대로 정하지 못한 듯했다. 이서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성지영의 옆에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옷차림을 보면 여자인 것 같은데.’‘나를 만나고 싶지 않은 여자라...’ 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서 두 사람의 뒤를 바짝 쫓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급기야 갈라져 걷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왼쪽으로, 또 다른 사람은 오른쪽으로.하지만 이서는 망설이지 않고 정체가 확실치 않은 여자의 뒤를 따랐다.모퉁이를 돈 이서가 그 여자의 옷과 모자를 잡으려던 찰나, 누군가가 이서의 손목을 잽싸게 낚아챘다.“이서야, 오랜만이구나.” 그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이서는 감전된 것처럼 상대의 손을 뿌리쳤고, 상대의 모습을 알아본 후에 주저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섰다.“성지영!”성지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이름을 부른다고? 이서야, 나는 아직도 네 어미 되는 사람이란다. 벌써 잊은 거니?”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나는 당신 같은
이서는 두 사람이 부끄러워하는 줄 알고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아니, 왜 결혼 얘기만 나오면 말이 없어져요?” 소희는 현태를 한번 보고서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이서 언니, 제가 알기로 우리 집 결혼식 들러리는 독신이어야 할 수 있어요...” 즉, 이서는 이미 결혼한 상태여서 결혼식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규칙이 있어?”“네.”“괜찮아, 어쨌든...”“곧 독신이 될 예정이잖아? 이혼한 사람이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규칙은 없는 거지?”차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현태는 백미러로 지환을 보았는데, 역시나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어두워져 있었다. 소희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부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이, 이서 언니... 부모님을 만날 때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요?” 이서는 차내 분위기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 듯 대답했다.“정장이 좋을 것 같아. 아무래도 격식 있어 보이니까.” “그렇구나...”소희는 이서와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차 안의 분위기는 다시금 뜨거워졌지만, 지환의 낯빛은 시종일관 어두웠다. 차가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현태가 말했다.“도착했습니다.”지환과 이서가 차례로 내리자, 소희는 몰래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현태 오빠, 어쩌죠? 방금 나왔는데, 두 사람 모두 얼굴을 찡그리고 있잖아요! 중매는 무슨, 싸우지 않게 하는 게 더 어렵겠어요!” “그렇지 않을 거야.”현태는 당황했음에도 불구하고 소희를 위로하려고 했다. “이따가 기회를 봐서 두 사람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자.” 소희는 멀찍이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깊은 의구심을 가졌다. “그래요! 이서 언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못 할 일도 없죠!” 두 사람도 차에서 내렸다.“이서 언니, 가요!”소희는 주동적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3층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계속해서 이서의 뒤를 따랐고, 맨 뒤에서 걷던 현태는 이 장면을 보고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네 사람
토요일.이서는 약속 시간까지 병원에서 소희를 기다렸다. 소희의 전화를 받고서야 밖으로 나온 이서는 지환의 병실을 지나며 안을 힐끗 보았지만,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갔나 보네.’이서는 별생각 없이 병원을 나섰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알콩달콩하게 서 있는 소희와 현태의 모습이 보였다.이 광경을 본 이서는 갑자기 심술이 나는 듯했다. ‘나도 하지환 씨와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차에 오르려던 이서는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이서는 차 안에 있는 지환을 보고는 눈을 두어번 깜빡인 후에야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 하지환 씨가 왜 여기 있어요?”이서는 망설이기 시작했다.“현태 씨가 옷을 고르러 갈 건데, 안목이 좋은 나도 같이 가면 좋겠다고 해서 왔어.” 이서가 고개를 돌려 현태를 바라보자, 현태가 어수룩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저... 소희 씨가 사모님께 전화한 줄은 몰랐어요.”“하지만 대표님께서 제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드문 기회라...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모님, 괜찮으시죠?” ‘완전 고의적이잖아!’이서는 속마음을 내보이고 싶었지만, 다음 주 월요일에 두 사람이 심근영 부부를 만나야 하는 것을 떠올리며, 한 명의 조언자가 더 있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긴, 여자인 나뿐만 아니라 남자의 조언도 같이 받는 게 더 도움이 될 거야. 화가 나긴 하지만... 조금만 참자.’ “괜찮아요, 어서 가시죠!”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조수석으로 향했다.하지만 소희가 재빨리 달려가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이서 언니, 제가 현태 오빠랑 같이 앉고 싶은데, 괜찮죠?”이서는 말문이 막혔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서 뒷좌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환과 거리를 두기 위해 창문에 바짝 붙어 앉았는데, 문이 없었다면 진작 차에서 떨어졌을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소희와 현태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아야만 했다. 그렇다. 두 사람이 지환을 불러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