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가 집에 도착했을 때, 지환도 이미 퇴근했다.그러나 그는 예전처럼 주방에서 요리를 하지 않고 이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녁은 나가서 먹자. 내가 우곡에 예약해 놨어.”우곡은 최근 뜨고 있는 핫 플레이스 레스토랑이었다.해산물 전문 식당으로, 새우만으로도 대략 50여 가지의 요리를 할 수 있으며, 게다가 요리마다 맛이 끝내준다고 했다.유일한 단점은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것이었다.지난번에 어떤 사람이 레스토랑 영수증을 인스타에 올린 적 있는데, 세 가지 요리를 주문했을 뿐인데, 족히 몇 백 만 원이 들었다.그래서 실시간 검색어까지 올랐다.“거기 너무 비싸요.” 이서는 눈살을 찌푸렸다.“왜 갑자기 거기서 밥을……?”지환은 이서의 턱을 잡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그건 당연히 내 와이프가 곧 윤씨 그룹의 신임 CEO의 선출을 미리 축하하기 위해서?”“미리 축하하는 것은 좋지 않아요. 만약 떨어지기라도 한다면?”“그럴 리가?”지환은 이서의 허리를 껴안았다. “자기야, 난 자기 믿거든.”그의 눈동자 속에 비친 무조건적인 신뢰는 장난이 아니었다.누군가에서 신뢰를 받는다는 느낌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이서는 제대로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발꿈치를 들어 지환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막 발꿈치를 내리려고 할 때, 갑자기 허리에 힘이 들어가더니, 몸자체가 위로 들렸다.지환이 손을 놓자 그녀는 그제야 얼른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마치 저녁노을 같았다.지환은 큰 손바닥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녀의 호흡을 가다듬도록 도왔다.“자기야, 체력 훈련 좀 해야겠어.”이서는 잠시 후에야 허리를 곧게 폈다.“장난 그만 쳐요. 얼른 우곡에 전화해서 예약 취소해요.”“축하파티 안 하고?”“축하는 우리 집에서도 할 수 있잖아요.”그녀는 여전히 수 백만원을 한끼 식사에 소비하는 게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다.이서의 마음을 간파한 듯, 지환은 이서의 이마에 키스했다.“자꾸 날 위해 돈을 절약할 생각하지 마.
고개를 돌려 이서를 확인한 소지엽도 의외인 마찬가지였다.“친구랑?” 그는 밤에도, 햇살 같은 따뜻한 미소를 선사했다.이서도 따라서 웃었다.“아니, 남편이랑.”소지엽의 눈동자 속에 햇살이 반쯤 사라졌다.“부부가 금슬이 참 좋구나.”이서는 겸연쩍게 고개를 숙이고 웃더니, 곧 고개를 들었다.“너는? 친구랑 왔어?”소지엽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음…… 그런 셈이지.”말이 끝나자, 두 사람은 잠시 화제가 없어 침묵하고 서 있었다. 잠시 뒤 소지엽이 다시 입을 열었다.“네 남편 좀 소개해줄 수 있어?”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서가 이렇게 큰 변화를 가져왔는 지 알고 싶었다.이서는 웃으며 눈살을 구부렸다.“당근이지. 잠깐 기다려.”그녀는 입을 삐죽거리며 프론트를 보았다.“나 계산하고…….”소지엽은 황급히 말했다.“내가 할게, 내가 사는 걸로 하자.”“아니야, 아니야.” 이서는 손을 흔들었다.“어떻게 네가 돈을 쓰게 할 수 있겠니?”두 사람이 앞다투어 계산하려고 하자, 프론트에서 방 번호를 요구했다. 직원은 컴퓨터 모니터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고는 곧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두 분, 죄송합니다. 201호실은 이미 계산 완료했습니다.”“…….”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이서는 어색하게 관자놀이를 비볐다.“남편이 계산했나 보네. 물어보고 나온다는 걸 깜빡했다.”소지엽도 따라 웃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그럼 이제 네 남편을 만나러 가도 되겠네?”이서는 ‘응’ 하고 소지엽을 데리고 룸 쪽으로 갔다.두 사람이 두 걸음 걸었을 때, 뒤에서 갑자기 애교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엽 씨.”이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소지엽과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예쁘고 얌전하게 생긴 여자애가 지엽에게 손을 흔들었다. 딱 봐도 대갓집 규수였다.소지엽의 안색이 부자연스러워졌다.그 여자는 다가와서 이서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웃기 시작했다. 입가에는 보조개가 소용돌이 쳤다.“윤이서?!”이서는 눈앞의 여자가 누군지 알
지환은 비몽사몽인 이서를 안고 별장으로 돌아와 목욕시키고, 옷을 갈아 입혀서 침대에 눕히고서야 서재로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그윽한 푸른색 빛이 그의 얼굴에 떨어졌다. 지환은 구태우가 손에 넣은 임현태의 자료를 쳐다보았다. 잠시 뒤, 그는 손을 들어 키보드를 눌렀다.같은 시각, 도시의 다른 한쪽.구태우는 건반을 두드리며 그의 뒤에서 자작자음하는 소지엽을 흘겨보았다.“야, 술 사준다며? 난 왜 네가 먹으려고 산 것 같지?”소지엽은 아무 말없이 계속 묵묵히 술만 마셨다.구태우는 마우스를 놓고, 컴퓨터가 스스로 검색하도록 세팅해 두었다.그러고는 소지엽 옆으로 가서 앉았다.“왜? 그 여자가 널 마음에 안 들어하디?”소씨 집안이 소지엽에게 맞선을 주선한 걸 구태우도 잘 알고 있었다.소지엽은 답답한 듯 술을 한 모금 마셨다.“나, 이서 만났어.”구태우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두 번 찼다.소지엽은 또 한 모금 들이켰다.“남편과 함께 식당에 왔더라고. 매번 남편 언급할 때마다 자랑스럽고 행복한 모습을 지어서 정말 대체 어떤 남자길래 이서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꿔 놓았는지 궁금했어.”구태우는 소지엽이 괴로워하는 걸 처음 보았다. 그는 소지엽의 얘기에 한참이나 멍해있다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거두었다.“친구야, 우리 안지가 벌써 몇 년째인데, 왜 네 입에서 지금까지 그녀 얘기를 한 번도 못 들었지?”“얘기할 게 뭐 있어?”소지엽은 쓴웃음을 지었다.“예전에는 하은철의 약혼녀였고, 그녀가 하은철과 파혼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또 이미 결혼했는데. 우리 둘은 인연이 없나 봐.”아마도 술을 마셔서 그런 건지, 긴 다리를 마음대로 벌리고 앉아 있는 그 모습은 평소의 밝고 긍정적인 느낌은 사라지고 오히려 여려 보였다.구태우는 묵묵히 그와 함께 한 잔을 들이켰다.“다른 사람과 시작해볼 수도 있잖아?”“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맞선을 보러 간건데……, 거기서 심가은이 친구얘기, 새로 산 가방 얘기, 그리고 유학 시절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데……
다섯 명의 주주뿐만 아니라 윤씨 그룹의 고위층 관리자들도 속속 회의실로 들어왔다.쭉 훑어보니, 거의 다 아는 얼굴들이었다.모두 윤씨 집안의 친인척들이었다.현재의 윤씨 그룹은 회사라기보다는 가족 공동 작업장 같았다.모두 연줄로 회사에 들어왔으니 회사에 관심도 없고, 성지영과 윤재하의 배임 횡령을 적발한 사람도 한 명도 없었다.이서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아직 정식 선출이 시작되기 전이라 회의실 안은 시끌벅적했다.모두 이서와 윤수정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그리 크지 않은 회의실이라,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도 다 들렸다.“윤이서 왜 온 거야? 굴욕을 자초하려고?”“흥, 윤 사장 넘어뜨리면 지가 사장 올라갈 줄 아나 봐? 회사가 정말 윤이서 손에 들어가면 그 때부터 진짜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야.”“내가 뭐랬어? 윤씨 집안의 많은 후배들 중에서 가장 나은 게 윤수정이야.”“그래, 그리고 하은철 대표가 얼마나 사랑하는데, 수정이가 회사를 맡아야 우리 그룹도 해 뜰 날이 있을 텐데.”“…….”이서는 그들의 말을 들고서도 시종 무표정했다.맞은편의 윤수정은 의기양양하여 입꼬리가 이마까지 올라갔다.그녀는 입을 오므리고는 말했다.“언니, 언니가 이번 경선에 참가하는 건 여러 사람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언니 용기는 가상해. 웃음거리가 될 줄 알면서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는 거, 이 한 가지만으로도 내 경쟁상대인 언니에게 엄지척을 내밀겠어.”말하면서 그녀는 손에 든 물잔으로 이서의 잔을 부딪치려 했다.이서는 귀찮은 듯 눈꺼풀을 젖히며 말했다.“고맙지만, 너는 내 경쟁상대가 될 자격이 없어.”윤수정의 입꼬리가 경직되었다.바로 이때 그녀 책상 위에 놓은 핸드폰이 화면이 켜졌다.핸드폰을 확인한 윤수정의 입가에 찬란한 웃음이 어렸다.“원철이 오빠 왔네. 마중 나가야겠다.”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부러운 눈빛으로 윤수정을 쳐다보았다.마음속으로도 이 CEO의 자리는 무조건 윤수정이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다.많은 얘기들 속에
하은철의 확답을 받자, 뒷걱정이 없어진 윤수정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하은철의 얼굴에 키스했다.“오빠 고마워.”말을 마친 윤수정은 도발적인 눈빛으로 이서를 쳐다보았다.이서는 그녀의 이런 수법에 대해 이미 무감각해졌다.마음속에 어떠한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그러나 윤수정의 이러한 행동거지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모두의 시선이 하은철에게 떨어졌다.윤수정에게 기습 키스를 당한 하은철은 정신이 멍했다.그리고 잠시 뒤 곧 짜증이 밀려왔다.그렇다, 짜증이 났다.윤수정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오랜 기간 동안 재계에 몸 담고 있으면서 하은철도 자기 기분을 티 내지 않는 것에 익숙했다. 그는 짜증났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눈살만 찌푸렸다.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이는 윤수정의 과감한 표현에 대한 묵인으로 보였다.묵인했다는 건 즉 그와 윤수정의 관계를 인정했다는 뜻이 된다.이는 이번 경선에서 윤수정에게 배팅한 사람들을 더욱 자신만만하게 만들었다.두 사람은 함께 이서 맞은편으로 걸어갔다.이서는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숙여 수중의 자료를 보았다.이서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표정을 보이자, 하은철의 마음은 다시 짜증이 났다.그는 이서가 예전처럼 한 번만이라도 정겹고 살갑게 웃어 준다면, 맹세코 모든 것을 버리고 윤씨 그룹의 CEO자리를 이서에게 넘겨줄 것이다.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그녀는 시종 고개를 숙이고 자료만 보았다.하은철은 주먹을 불끈 쥐고, 직원이 옮겨온 의자에 앉았다.이서 쪽에 앉은 주주들은, 하은철이 직접 주총에 온 걸 보고 마음이 뒤숭숭했다.이서가 장부를 보여 줬을 때, 그들은 이서의 능력을 매우 긍정적으로 판단했다.하지만 지금은…….하은철조차도 윤수정 편에 섰다.“심적 부담 갖지 마세요.”이서는 고개를 숙여 얘기했다. 목소리가 작았지만, 왠지 모르게 힘이 느껴졌다.“윤씨 그룹 주총이지, 하씨 그룹 주총이 아니잖아요, 하은철이 왔다고
“내가 얘기했잖아. 윤이서가 경선에 참가하는 건, 우리에게 재밋거리 선사하기 위해서라고. 설령 주주를 두 명 구슬려 삶았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야? 딱 보면 몰라, 대세가 이미 윤수정 쪽으로 기울었잖아.”“그러게, 사람이 무식하면 용감해진다는 말이 맞나 봐. 윤이서는 정말 자기편에 설 사람이 있는 줄 알았나 봐. 주주들이 바보도 아니고……. 지금 상황에서는 무조건 윤수정이지.”“윤수정 뒤에는 하은철 대표가 떡하니 버티고 있잖아. 윤이서는 뭐가 있는데?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남편……?”“…….”하은철이 있는 자리인지라 너무 대놓고 비아냥거리지는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이서는 듣지 못했다. 심지어 회의실에서 정적이 찾아왔을 때도, 그녀는 계속 자신 앞에 놓인 서류에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그녀는 경선과는 관계없는 사람처럼 보였다.이서의 곁에 앉은 두 주주는 우기광과 우기동으로, 두 사람은 사촌 형제지간이었다.그들이 애초에 윤씨 그룹에 투자했던 것도, 하씨 그룹 때문이었다.그러나 양전호, 구양태와는 또 달랐다.이들 두 형제는 전 재산을 다 털어서 투자했다.한때 윤씨 측의 적자 상황으로 두 가정은 하마터면 파탄 날 뻔했다.결국 그들이 투자한 신에너지 쪽이 대박을 터뜨리며 겨우 위기를 넘기고 살아남았다.지금은 돈이 생겼지만, 그동안 온 가족이 고생한 걸 생각하면…….우기광은 이서를 보고 마침내 큰 결심을 한 듯 말했다.“나는 윤이서 씨를 지지하겠습니다.”그는 가타부타 언급없이 바로 자리에 앉았다.장내에 킥킥거리는 비웃는 소리가 퍼졌다.우기동은 원래 윤수정을 선택하려 했지만 사촌형이 이미 이서를 선택한 이상 그도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나도, 윤이서 씨한테 한 표 걸겠습니다.”이번에는 주위의 웃음소리가 확연히 더 커졌다.수군대는 소리도 더욱 거세졌다.이때 이서는 고개를 들어 조용환을 바라보았다.“조 대표님, 기타 4명의 주주들은 이미 표결을 마쳤는데, 대표님은……?”그녀의 말을 듣고, 상황을 지켜보던 고위층들이 더
이서의 입가에 웃음이 더욱 깊어졌다. 그녀는 턱을 살짝 들어 조용환을 바라보았다.“조 대표님, 만약 내가 방금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조대표님이 윤수정을 지지한다고 말씀하신 거 맞죠?”그녀는 일부러 ‘조 대표’를 강조해서 말했다.조용환은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윤씨 그룹 주주는 당신이 아니라 당신 아들 조진명인 걸로 압니다만……, 당신은 조진명 사장 대신 그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습니다.”조용환의 얼굴색이 약간 변했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부자는 일심동체요, 우리는 같은 생각입니다.”“어, 그래요? 전화해서 물어볼까요?”“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윤수정은 비웃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가엾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언니, 정말 그렇게 윤씨 그룹 CEO, 대표이사가 되고 싶으면, 내가 양보할게. 이렇게까지 구차하게 그럴 필요 없잖아. 언니 지금 되게……억지 부리는 거 같아.”조용환한테 시선이 고정된 이서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조용환은 괜히 찔리는 듯 핸드폰을 꺼냈다.“그러죠, 이서 양이 원한다면, 내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보죠. 아들도 같은 생각이면 깔끔하게 승복하는 거죠?”말이 끝나자, 조진명에게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곧 연결되었고, 전화기 너머에서 조진명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아빠? 나 좀 살려줘…….]조용환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변하며, 스피커폰을 끄고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진명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수화기 너머의 조진명이 무슨 말을 했는지, 조용환의 음흉한 눈빛이 순식간에 이서에게 쏠렸다.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회의 테이블 옆으로 돌아왔다.이서는 두 손으로 팔짱을 꼈다.“어때요, 조진명 사장은 뭐라고 하던 가요?”조용환은 이를 꽉 깨물었다.“아들이 윤이서 양을 지지한답니다.”이 말이 나오자, 장내가 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야?”“조진명도 하 대표가 수정이 밀어
이서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그게 무슨 뜻이죠? 여기는 회사입니다. 예의를 지켜주세요.”“윤이서, 시치미 떼지 마, 너나 나나 우리 다 알고 있잖아.”“하 대표님, 똑바로 얘기하시죠, 대체 무슨 얘긴지 전혀 모르겠는데요……?”이서 앞에 다가간 하은철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고, 더 이상 이서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조진명이 왜 갑자기 생각을 바꿨을까? 네가 뒤에서 수작 부린 거 다 알 거든.”이서는 맑은 눈동자를 들어 하은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증거 있어?”하은철은 이서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한참 뒤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증거는 없지만, 조진명 부자가 갑자기 입장을 바꾼 건 수상하잖아. 틀림없이 네가 뭔 짓을 했겠지, 윤이서, 난 널 너무 잘 알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이서는 무시하는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그러고 보니, 우리 하은철 대표께서는 목적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우리 같은 사람을 아주 혐오하나 봐요.”“그래!” 하은철은 눈을 붉히며 호통을 쳤다.“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이 바로 너처럼 목적을 위해 남을 무시하고 뭉개는 사람이야!”‘오랜 기간 네가 수정이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야.’‘윤수정이 좋아하는 거라면 네가 기어코 뺏었잖아.’‘나도 그렇고!’‘그리고 오늘 CEO 자리까지!’‘어쩌면 변한 게 하나도 없어?!’이서는 입술을 올리며 가볍게 웃었다.“그래요, 하은철 대표 부디 지금 한 얘기를 잘 기억해 두길 바랍니다.”말이 끝나자 그녀는 또 조용환을 쳐다보았다.“조 대표님, 하 대표에게 얘기 좀 해주시죠. 당신 부자께서 갑자기 생각을 바꾼 게 저와 관계가 있는지……?”조용환은 고개를 들어 이서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입술이 움찔하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하 대표님, 이번 결정은 이서 양과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오로지…… 진명의 결정입니다!”조용환이 부인할수록 하은철은 이서가 한 짓이라고 확신했다.따라서 그녀에 대한 감정
“네, 소희 씨는 그 여자가 성지영의 딸이라고 했어요.”“제 기억이 맞다면, 그 여자는 나랑 동갑이에요. 즉, 그 여자가 정말 성지영의 딸이라면 두 가지 상황이 아니면 말이 안 돼요.” “나한테 쌍둥이 자매가 있는 게 아닌 이상, 내가 확실히 윤재하의 딸이 아니라는 거죠.”“아마 내 본래 이름도 ‘윤이서’가 아니었을 거예요. 그 이름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을 거고, 여전히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겠죠.” “왜 그렇게 생각한 거야?” “아주 간단해요. 고이서의 경력을 봤는데, 5살 때 화재를 당해서 피부이식수술과 성형수술을 감행했다고 했거든요.” “만약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면...”“그 여자가 피부 이식 수술과 성형수술을 받은 게 사실이라면, 그 두 가지 수술은 일정한 위험이 따를 뿐만 아니라, 회복 시간도 꽤 많이 필요했을 거예요.”“진정한 윤이서는 하은철과 약혼했는데, 수술 도중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게 알려지면 약혼이 취소되었을 거고, 하씨 가문도 다시는 윤씨 가문을 돕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의 윤씨 가문은 존재할 수 없었겠죠.” “그러니까... 윤재하가 하씨 가문과의 약혼을 지키기 위해 가짜 윤이서, 즉 너를 끌어들였다는 거야?” “네, 나를 외국에 보내서 공부하게 한 것도, 윤씨 가문 사람들이 내가 예전의 윤이서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거예요.” “게다가 나는 대여섯 살 이전의 기억이 전혀 없어요.”“이건... 절대 우연이 아닐 거예요.” “네 추측이 정확한지 알고 싶어?”지환이 물었다.“그야 당연하죠.” “이천한테 알아보라고 할게.”“아니요, 이미 알아봐 달라고 했어요.”순간 동작을 멈춘 지환이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소지엽한테?” “아니요, 구태우 씨한테요.” “그 사람은 소지엽의 친구잖아.” “그래서요?” 이서가 지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환은 바지 주머니에 넣은 손을 하염없이 떨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그래.”“우리 내기 하나 하자, 어때?
이서는 고이서의 신분을 알아내는 데 급급하여 더는 지체하지 않고 백화점 입구로 걸어갔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던 소희가 말했다.“그 여자가 누구라고 생각해요?”현태가 웃으며 말했다.“머리 쓰는 일은 나한테 묻지 마. 사모님께서 곧 결과를 알려주시겠지.”“아무래도 내 머리는 월요일에 쓰는 게 좋겠어.” 현태의 눈빛이 다소 부끄러워졌다.“월요일에 소희 씨 부모님께 순조롭게 인정받아서 우리가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 고개를 숙인 소희의 뺨도 붉게 달아올랐다.“그렇게 낯간지러운 말은 누가 가르쳐준 거예요?”“가르쳐 주긴, 솔직한... 내 속마음이야.” “청산유수네요.”소희가 현태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이만 가요, 옷 사야죠!”“그래.”현태는 흐뭇하게 대답한 후, 소희가 자신을 끌고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한편, 백화점 입구에 도착한 이서와 지환은 순조롭게 택시를 잡았다.두 사람이 차에 오른 후, 지환이 다소 풀어진 표정으로 물었다.“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말해줄 수 있어?”이서가 입술을 오므리며 중얼거렸다.“하지환 씨한테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잖아요.”“뭐가 적절하지 않아?” “우리는 곧 이혼할 거예요. 이런 시점에서 나한테 생긴 일을 하지환 씨한테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지환의 표정이 다시금 어두워졌다.앞줄에 앉아 있던 운전기사는 열정적인 노인이었는데,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지도 않은 채 ‘허허’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그 말은 틀린 것 같네요.”“두 사람은 이혼한다고 하지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라는 속담도 있잖아요?” “결혼한 이상, 두 사람은 인연인 거예요.”“나중에는 이혼하고 각자의 갈 길을 간다고 해도, 아직은 이혼한 것도 아니잖아요? 이혼하지 않았다면, 그건 두 사람의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인연이 끝나지 않은 거라면, 일이 있을 때 서로 상의하고 도울 수도 있는 거죠.” “나를 보세요, 마누라와의 관계가 다 끝나는 바람에 때로는
화장실을 나선 소희는 급히 매장으로 돌아왔고, 현태에게 물었다.“이서 언니는 어디 있어요?”“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급해 보여?” “어서요, 이서 언니부터 찾아야 해요.”소희는 현태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고, 현태는 우왕좌왕하는 그녀의 모습에 급히 이서를 찾으러 갈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그들은 매장 입구에 있는 지환을 보았으나, 이서를 찾지는 못했다. 현태는 자기도 모르게 다가가서 물었다.“대표님, 사모님은 어디 계세요?”굳은 표정의 지환은 여전히 이서가 떠난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소희가 현태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여기서 형부랑 있어 주세요. 나는 다른 곳에 가서 이서 언니를 찾아볼게요.” 하지만 이 말이 끝나자마자 돌아오는 이서의 모습이 보였다.소희가 급히 다가가 이서의 팔을 붙잡았다.“이서 언니...” 이서가 맥없이 짧게 대답했다.“응.” “언니, 왜 그래요?”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던 지환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다가와 긴장한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방금 성지영을 만났는데...” “언니도 성지영을 봤어요?”소희가 놀라며 물었다.“그럼 성지영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봤겠네요?” 이서의 눈이 반짝거렸다.“성지영 옆에 있는 사람을 봤어?”“아니요, 보지는 못했는데 화장실에서 두 사람이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그 여자, 성지영의 딸인 것 같았어요. 언니, 외동딸인 거 아니었어요? 성지영한테 언제 딸이 하나 더 생긴 걸까요?” “딸?”이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렇다니까요.”“아! 두 사람의 말투를 들어보니, 언니가 두 사람을 보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았어요.”소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언니, 언니한테 또 다른 자매가 있다는 걸 전혀 몰랐던 거예요?” 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지 않아도 그 사람이 아주 낯익다고 느끼던 참이었어. 잘 생각해 봐, 두 사람이 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소희는 한참을 생각하고서야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윤씨
성지영은 이서의 눈길을 피했지만, 아까만큼 긴장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하지만 별안간 욕설을 내뱉으며 말했다.“미친X, 네가 내 주변 사람을 어떻게 안다는 거야?!”성지영은 이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나려 했으나, 이서가 그녀의 앞길을 막으며 말했다.“그 사람, 대체 누구죠?”‘내가 그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걸 확신한 순간, 성지영의 긴장감이 눈에 띄게 풀리는 것 같았어.’ ‘내가 그 사람을 알아볼까 봐 두려웠던 모양이지?’ 이는 그 사람의 신분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성지영은 이서가 고이서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확신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 사람이 누구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윤이서, 네가 나를 부모로 여기지 않는 이상, 나도 너한테 정을 논할 필요가 없어!”“당장 비켜, 한 번만 더 내 앞길을 막으면 경찰에 신고할 줄 알라고!”이서는 한참이나 냉랭한 표정으로 성지영을 바라본 후에야 길을 비켰다. 성지영은 곧장 자리를 떠났고, 화장실에 도착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이때, 뒤에서 나타난 손에 성지영의 어깨를 세게 쳤다.화들짝 놀란 성지영이 뒤를 돌자, 고이서의 모습이 보였고, 성지영은 또 한번 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얘, 깜짝 놀랐잖니. 윤이서인 줄 알았다고!” 고이서는 마스크를 아래로 살짝 내리며 주변을 살폈고, 이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성지영을 끌고 화장실 칸으로 들어갔다. “다 엄마 때문이잖아요! 그러게 왜 시내에 오자고 하셔서.”원래 그들은 교외에서 잘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서를 만날 일이 없었다.하지만 성지영이 교외 옷이 촌스럽고 수준 낮다며 불평하기 시작했고, 꼭 시내에 가서 옷을 사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성지영은 이서를 우연히 만날 리가 없다고 확신했지만, 두 사람은 시내에 오자마자 이서를 마주치고 말았다.기민한 고이서가 성지영과 다른 길을 택하지 않았더라면 정체가 들통나고 말았을
그 그림자는 바로...성지영과 또 다른 사람!이서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이 마음속에 맴돌았고, 어느샌가 무의식중에 두 사람의 뒤를 쫓고 있었다. 이서가 움직이는 것을 본 지환은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드디어 내 옷을 골라주려는 거야!’하지만 곧 이서가 매장을 나가는 것이 보였고, 지환은 알 수 없는 분노가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람이 진짜...’‘얼마나 이혼하고 싶길래 저러는 거야?’ ‘나랑 같이 있고 싶지도 않다는 거야?”이렇게 생각한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의자에 앉았고, 계속해서 치미는 울화를 느꼈다. ...한편, 재빠르게 두 사람의 뒤를 쫓던 이서는 성지영과 다른 그림자에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뭐야, 두 사람의 발걸음도 빨라지는 것 같은데?’이서가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뒤쫓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군.’두 사람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는데, 당황한 탓에 길을 제대로 정하지 못한 듯했다. 이서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성지영의 옆에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옷차림을 보면 여자인 것 같은데.’‘나를 만나고 싶지 않은 여자라...’ 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서 두 사람의 뒤를 바짝 쫓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급기야 갈라져 걷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왼쪽으로, 또 다른 사람은 오른쪽으로.하지만 이서는 망설이지 않고 정체가 확실치 않은 여자의 뒤를 따랐다.모퉁이를 돈 이서가 그 여자의 옷과 모자를 잡으려던 찰나, 누군가가 이서의 손목을 잽싸게 낚아챘다.“이서야, 오랜만이구나.” 그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이서는 감전된 것처럼 상대의 손을 뿌리쳤고, 상대의 모습을 알아본 후에 주저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섰다.“성지영!”성지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이름을 부른다고? 이서야, 나는 아직도 네 어미 되는 사람이란다. 벌써 잊은 거니?”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나는 당신 같은
이서는 두 사람이 부끄러워하는 줄 알고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아니, 왜 결혼 얘기만 나오면 말이 없어져요?” 소희는 현태를 한번 보고서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이서 언니, 제가 알기로 우리 집 결혼식 들러리는 독신이어야 할 수 있어요...” 즉, 이서는 이미 결혼한 상태여서 결혼식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규칙이 있어?”“네.”“괜찮아, 어쨌든...”“곧 독신이 될 예정이잖아? 이혼한 사람이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규칙은 없는 거지?”차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현태는 백미러로 지환을 보았는데, 역시나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어두워져 있었다. 소희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부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이, 이서 언니... 부모님을 만날 때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요?” 이서는 차내 분위기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 듯 대답했다.“정장이 좋을 것 같아. 아무래도 격식 있어 보이니까.” “그렇구나...”소희는 이서와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차 안의 분위기는 다시금 뜨거워졌지만, 지환의 낯빛은 시종일관 어두웠다. 차가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현태가 말했다.“도착했습니다.”지환과 이서가 차례로 내리자, 소희는 몰래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현태 오빠, 어쩌죠? 방금 나왔는데, 두 사람 모두 얼굴을 찡그리고 있잖아요! 중매는 무슨, 싸우지 않게 하는 게 더 어렵겠어요!” “그렇지 않을 거야.”현태는 당황했음에도 불구하고 소희를 위로하려고 했다. “이따가 기회를 봐서 두 사람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자.” 소희는 멀찍이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깊은 의구심을 가졌다. “그래요! 이서 언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못 할 일도 없죠!” 두 사람도 차에서 내렸다.“이서 언니, 가요!”소희는 주동적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3층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계속해서 이서의 뒤를 따랐고, 맨 뒤에서 걷던 현태는 이 장면을 보고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네 사람
토요일.이서는 약속 시간까지 병원에서 소희를 기다렸다. 소희의 전화를 받고서야 밖으로 나온 이서는 지환의 병실을 지나며 안을 힐끗 보았지만,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갔나 보네.’이서는 별생각 없이 병원을 나섰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알콩달콩하게 서 있는 소희와 현태의 모습이 보였다.이 광경을 본 이서는 갑자기 심술이 나는 듯했다. ‘나도 하지환 씨와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차에 오르려던 이서는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이서는 차 안에 있는 지환을 보고는 눈을 두어번 깜빡인 후에야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 하지환 씨가 왜 여기 있어요?”이서는 망설이기 시작했다.“현태 씨가 옷을 고르러 갈 건데, 안목이 좋은 나도 같이 가면 좋겠다고 해서 왔어.” 이서가 고개를 돌려 현태를 바라보자, 현태가 어수룩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저... 소희 씨가 사모님께 전화한 줄은 몰랐어요.”“하지만 대표님께서 제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드문 기회라...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모님, 괜찮으시죠?” ‘완전 고의적이잖아!’이서는 속마음을 내보이고 싶었지만, 다음 주 월요일에 두 사람이 심근영 부부를 만나야 하는 것을 떠올리며, 한 명의 조언자가 더 있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긴, 여자인 나뿐만 아니라 남자의 조언도 같이 받는 게 더 도움이 될 거야. 화가 나긴 하지만... 조금만 참자.’ “괜찮아요, 어서 가시죠!”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조수석으로 향했다.하지만 소희가 재빨리 달려가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이서 언니, 제가 현태 오빠랑 같이 앉고 싶은데, 괜찮죠?”이서는 말문이 막혔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서 뒷좌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환과 거리를 두기 위해 창문에 바짝 붙어 앉았는데, 문이 없었다면 진작 차에서 떨어졌을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소희와 현태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아야만 했다. 그렇다. 두 사람이 지환을 불러낸
그 사람은 바로... 심유인!“언니가 왜 여기 있어요?”소희는 심근영 부부를 알게 된 후로 서서히 강한 소속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집을 자신의 영역이라고 여기게 된 찰나, 심유인이 거들먹거리며 이곳에 나타난 것을 보자, 소희는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게다가 유인은 항상 뒤에서 작은 음모를 꾸미곤 해서, 소희는 그녀를 보기만 해도 짜증이 밀려왔다.‘회사 기밀을 훔쳤다는 누명도 심유인이 벌인 짓인 것 같단 말이지...’‘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심씨 가문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조사했는데도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겠어?’‘자기 자신을 조사하는 셈이니까,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 수 있는 거지!’ “소희야, 오랫동안 널 만나지 못해서 이 언니가 특별히 너를 보러 온 건데, 날 반기지 않는 것 같네?” 이서의 배후 인물이 지환이라는 것과 하은철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심유인은 소희에게 기대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하지만 그녀에겐 이미 그럴 기회가 없었다. 소희가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떻게 과거에 있던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심유인은 오직 한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소희의 남자 친구가 월요일에 찾아온다는 것과 그녀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심유인은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네, 저는 언니를 반기지 않아요. 당장 나가주시겠어요?”심유인은 곧장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심소희, 너무 거만하게 굴지 마. 지금은 하 대표님께서 너를 지지해 주신다지만, 언제까지 그분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그리고, 그분이 너를 도와주시는 건 전적으로 윤 대표 때문이야. 네가 윤 대표와의 사이가 틀어진다고 해도, 하 대표님께서 너를 지지해 주실까?” 소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와 저의 관계는 언니와 주변 사람들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관계가 아니에요!” 심유인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그래, 두 사람의 사이가 정말 좋다는
고이서는 두 사람이 단톡방에 보낸 메시지를 보고 꽤나 만족스러워하며 웃기 시작했다.하지만 자신이 아주 특별한 신분임을 잊지 않았고, 절대 외부인에게 자신이 원래의 ‘윤이서’라는 사실을 알리면 안 된다는 것을 되새겼다. ‘윤이서가 나와 엄마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다면, 분명히 의심할 거야.’고이서가 걱정을 털어놓자, 성지영이 무심히 말했다.[얘, 그렇게 우연히 만날 리가 없잖아. 이렇게 큰 도시에서 쇼핑하다가 윤이서를 만난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란다.]윤재하도 그런 우연이 일어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우리 딸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야. 곧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끝날 텐데,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서 골치 아픈 일을 만들 필요는 없잖아?][그래도 드레스가 사고 싶다면, 교외로 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군.][윤이서가 교외로 쇼핑가지는 않을 테니까.]성지영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교외에서 어떻게 그럴듯한 드레스를 살 수 있겠어요?] 고이서는 시내에서는 이서를 만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교외에서는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엄마, 교외에는 제대로 된 드레스가 없긴 하겠지만,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잖아요.][제가 윤씨 그룹의 대표가 되면, 시내의 드레스는 물론이고, 고급 럭셔리 브랜드의 드레스까지 전부 집으로 보내드릴게요, 네?]이 말은 성지영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어머, 우리 딸 말하는 것 좀 봐? 그래, 토요일에 시외에서 쇼핑하자꾸나.][네, 엄마.]고이서는 약속 시간을 정한 후에야 핸드폰을 내려놓고 업무에 집중했다. 한편, 최고층에 있던 이서는 전화하고 있었는데, 이는 소희가 걸어온 것이었다. [이서 언니, 긴급 상황이에요. 저 좀 도와주세요!]이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어젯밤에 부모님께 현태 오빠의 존재를 털어놓았잖아요.][그런데 오늘 아침에 아빠가 저를 서재로 부르셔서는 다음 주 월요일에 현태 오빠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