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엽은 웃으며 문을 열었다.룸 안에 있던 사람이 고개를 들며 소지엽과 이서를 보고 일어섰다.“윤이서 씨?”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 사람은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었다.“구태우입니다. 사설 탐정업체 운영 중이고, 이 업계에서 몸 담은 지는 10년 정도 됐습니다. 우리 회사가 동종업계에서 서열 2위라고 하면, 1위를 자처할 업체는 없는…… 그런 정도입니다.”이서는 구태우의 얘기에 웃었다.“반가워요. 편하게 이서라고 부르셔도 되요.”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소지엽은 구태우에게 장난치듯 말했다.“괜히 큰 소리 치지 말고, 나중에 가서 일 처리 제대로 못하면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거야. 알지? 내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구태우는 하하 웃었다.“지엽 씨, 걱정 마. 내가 털어서 안 나오는 거면 그 사람은 깨끗한 사람이야.”이서는 그의 이 말을 듣고 크게 안심했다.“제 운전기사를 뒷조사하고 싶습니다.”“네? 누구를요?”“일이 어떻게 된 거냐면…….”이서는 일을 경유를 간단히 설명했다.“그래서 나는 왜 그 사람이 저한테 회사에서 파견한 사람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나를 속였는지 알고 싶어요. 나에게 접근한 목적이 무엇인지도요…….”소지엽은 눈썹을 찌푸리며 얼굴의 웃음기도 사라졌다.“그럼 자르면 그만일 텐데 왜 계속 옆에 두는 거죠?”이서는 눈을 깜박였다.“왜라니요?”“우선, 거짓말로 이서 씨를 속였고, 둘째, 내력이 불분명한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을 곁에 두는 건 시한폭탄과 같이 있는 거나 다름없는 건데…….”이서는 웃었다.“그런데 임현태 씨, 일 잘 하거든. 암튼 제대로 조사한 뒤 결정하려고요…….”소지엽은 입술을 오므리고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 내가 출퇴근시켜 줄까?”“아니.”구태우는 줄곧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서가 화장실에 간 틈을 타 그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소지엽에게 다가갔다.“너 이서 씨 좋아하지?”소지엽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밥이나 드셔.”구태우는 헤헤 웃었다.“좋아하면 쫓아다녀야지
서우 내부 게시판이 오늘 저녁처럼 이렇게 열기가 뜨거운 적은 없었다.첫 번째 핵폭탄급 뉴스는 오늘 오후 소지엽이 고급 외제차를 몰고 가는 사진이 찍힌 것이다.두 번째는 이서가 소지엽의 차에 올라탄 것이다.이미 어떤 사람은 인터넷에서 마세라티의 소유주가 소지엽이라는 것도 검색해냈다.구내 식당에 소씨 가문 둘째 도련님이 있다는 걸 알고 다들 난리 났다.[아아아아악! 대어 놓쳤네! 난 왜 그가 소씨 가문 둘째 도련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흑흑흑, 난 그냥 내 눈물에 코 박고 죽을 거야! 내 두 눈은 장식인가보다, 왜 그를 평범한 사람으로 봤지?!][미녀 여러분, 울지 마세요. 설령 당신들이 혜안을 가졌어도 소용없어요. 이미 윤 총괄과 결혼한 사이니……. 역시 잘생긴 남자는 누군가의 남편이든가, 아니면 아직 태어나지 않았든가, 둘 중 하나네…….][어쩐지 지난번에 윤 총괄이 구내 식당 주방을 드나든다고 했더니……, 소 팀장이 윤 총괄을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어, 흑흑흑, 두 사람은 벌써 법적으로 이어진 가족이었어.][하하하, 이서가 운전기사에게 시집갔다고 했던 사람들, 창피하겠는데? 내 개인적인 생각은 윤이서가 하은철과 결혼하지 않아도 절대로 일반인에게 시집가지 않을 거라……. 재벌들의 말은 그냥 한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리면 돼. 어떤 재벌이 그러더라. 200억이 만드는데 작은 목표라고…….]“…….”서우는 비록 화장품 회사이지만, 회사 안에 컴퓨터를 잘 다루는 고수도 적지 않다. 그들은 곧 인터넷에서 이서와 소지엽이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는 사이이고, 게다가 이서가 8살 되던 해에 유학의 길에 오르자, 얼마 되지 않아 소지엽도 같이 출국했다는 걸 검색해냈다.그것도 같은 나라, 같은 지역으로.두 학교는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고!비록 두 사람 관련 정보가 많지 많지만, 이서와 소지엽의 망붕 렌즈를 끼는 데는 전혀 방해되지 않았다.“소꿉놀이 친구로 자랐으니 망붕 렌즈 끼기 딱 좋고!”“게다가 연적인 다른 소꿉친구
촬영현장.야간 촬영은 여자 배우들이 가장 꺼리는 일 중에 하나이다.밤샘 촬영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피부가 민감한 배우에게는 특히 골치 아픈 일이었다.그러나 이제 이서정은 더는 밤샘 촬영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오늘처럼 야간 촬영이 있는 날에는, 제작진이 가장 좋은 분장실과 함께 친절하게 간이 침대까지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하씨 집안 사람은 대우가 다르긴 다르구나!’“이서정의 잘난 척하는 낯짝 제발 좀 안 봤으면 좋겠다!”스태프들은 찬바람 속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불평 불만을 털어놓았다.“성괴 얼굴에 연기도 별로인데다, 평소에 우리를 괴롭히는 건 그렇다 쳐, 촬영할 때 맡은 바 역할이나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휴, 결혼했으면 연예계 은퇴하고 결혼생활에나 집중할 것이지 사모님이 무슨 연기를 한다고?!”“쉿!” 옆에 있던 사람이 긴장한 듯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잘리고 싶어? 잊었어? 지난번에 물이 차갑다는 얘기를 안 들어줬다고 여러 명 해고했잖아.어쩌겠어? 지금은 그쪽이 실세이니까 참아야지.”두 사람이 한창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입구에서 갑자기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두 사람도 슬쩍 보고 깜짝 놀랐다.감독도 방문자를 확인하고는 손에 든 스피커를 내려놓고 황급히 달려갔다.“아이고, 사모님, 어떻게 여기까지…… 귀한 걸음하셨습니까?”눈앞의 사람은 민호일의 아내인 이하영이었다.재벌집 사모님은 이하영은 평소에는 카드놀이나 하고 피부 관리나 받고, 오늘처럼 외출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이하영은 감독은 안중에도 없는듯 본체만체하며 목을 빳빳이 세우고 물었다.“이서정 씨 어딨어요? 나 이서정 씨 만나러 왔는데……!”감독은 얼른 사람을 시켜 이서정을 불러오게 했다.분장실 입구에서 이서정의 매니저는 화가 나서 심부름 간 스태프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목소리를 깔았다.“우리 배우님이 쉬고 있는데, 귀찮게 했다가, 너희들 뒷감당할 수 있겠어?”스태프는 난처한 듯 말했다.“민회장님 부인이 오셨습니다.”매니저는 순식간에 낯빛이 바뀌
“사모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까지 안 챙기셔도 되는데……. 암튼 감사합니다.”우리 모두 같은 이씨잖아요. 600년 전 까지만 해도 우리 한 가족이었을 걸요.”두 사람은 또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고, 잠시 뒤 이하영은 하품을 하며 말했다.“오늘 촬영이 아직 덜 끝났다고 들었어요. 나 때문에 촬영이 많이 지체된 거 같으니까 나도 이젠 그만 가 볼 게요.”말을 마치고는 유유히 떠났다.이하영의 차가 멀리 떠나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이서정을 에워쌌다.“이 배우님, 너무 부러워요. 일류 스타의 일상이 사치의 끝판왕이라고 생각했는데, 명문세가들의 삶은 격이 다르네요. 백 24개를 눈도 깜빡하지 않고 선물하다니…….”“이 배우님, 당신 남편도 그렇죠? 가방만 모셔 두는 별장이 따로 있는 거 아니에요?”“부러워 죽겠어요, 이 배우님, 당신의 행운을 저에게도 좀 나눠주세요.”“…….”이서정이 원하는 게 바로 이런 거였다.비록 지환과의 결혼은 가짜지만, 민씨 집안 사람들과 자주 왕래를 하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짝퉁 하부인이라는 걸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테니.그녀는 입술을 올리며 가볍게 웃었다.“아니야, 무슨……. 그냥 고급 차량을 여러 대 보유하고, 부동산이 좀 있고, 백과 옷, 보석 등도 좀 있고……. 뭐 그 정도야.”“조금이 얼마인데요?”다들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이 배우님, 기회가 되면 남편 좀 만나게 해 주세요. 듣자니 투자의 귀재라고 하던데…….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네요. 얼굴 좀 보여주세요!”이서정의 표정은 순간 부자연스러웠지만 곧 완벽하게 감췄다.“그러지 뭐, 하지만 워낙 바쁜 사람이라, 비즈니스 때문에 매일 출장 중이야, 아마 시간이 안 될 걸?”“괜찮아요, 우리는 언제든지 시간 있어요.”“…….”이서는 다음 날 출근해서 사설 탐정사의 전화를 받았다.구태우가 아니라, 전에 신문지 광고 통해 전화했던 작은 회사에서.이서는 별 고민도 하지 않고 전화를 바로 끊었다.그런데 상대방은 끈질기게 두 번째 통화를
이서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사설 탐정 쪽도 당황했다. 그는 무의식중에 뒤에 서 있는 이천을 보며 입모양으로 물었다.“나 의심하는 거 같은데?”이천은 겉보기에는 태연자약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사설 탐정보다 더 긴장했다.한참 뒤에야 이서가 입을 열었다.“확실한가요? 20만원?”[네, 네, 네.]드디어 회답을 들은 사설탐정은 이서가 번복할까 봐 바로 물었다.[20만원에 사시겠습니까?]“네, 거래하시죠.”이서는 잠시 생각한 후 다시 말했다.“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이메일 주소로 보내주세요.”이서는 자주 쓰지 않는 메일주소를 상대방에게 주었다.사설탐정은 기분 좋게 전화를 끊고 이천에게 말했다.“나를 못 믿는 거 같은데?”이천은 그를 흘겨보았다.“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자료들 보내.”“네, 네, 저 그럼 일전에 얘기했던 2천만원은……?”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핸드폰에서 입금 안내 문자가 떴다.사설탐정은 숫자 뒤의 0이 몇 개인지 여러 번 확인하고 나서야 웃으며 말했다.“사장님 감사합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이런 좋은 일이 있으면 부디 저를 찾아주세요. 감사합니다.”“천만에. 고마워할 거면 우리 그 괴짜 회장님한테도 고마워해야지.”회사로 돌아온 이천은 회장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회장님, 서류는 이미 사모님께 잘 전달해 드렸습니다.”그는 나름 뿌듯했다.“사모님은 절대 회장님이 뒤에서 움직이는 지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지환은 눈을 들어 느긋하게 이천을 바라보았다.지환의 쳐다보는 눈빛에 이천은 두피가 찌릿찌릿했다.“회장님, 왜 그러세요?”그는 돌아오면 꽃과 박수가 기다릴 줄 알았다.근데…… 김칫국을 제대로 마신 것 같았다.지환은 태블릿을 이천에게 건네주었다.태블릿은 확인한 이천은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연예부 기사였다.보도에 따르면, 소지엽과 윤이서가 비밀리에 결혼을 했고, 함께 로맨틱한 저녁식사를 하며 달콤한 신혼을 즐긴다는 것이었다. 기자는 친절하게 두 사람의 사진도 함께 첨부하여 기사를 작성했다.
안에 있는 파일 내용도 정상이었다.처음에 봤던 샘플 파일보다 내용이 훨씬 풍부하고 다양했다.눈썹을 한껏 찌푸린 이서는 여전히 이렇게 소중하고 가치 있는 정보를 단돈 20만원에 샀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심소희는 책상 뒤에 서서 이서가 눈썹을 찌푸리고 있는 것을 보고 감히 소리도 못 냈다.한참을 기다리다가 이서가 노트북 컴퓨터를 덮는 것을 보고, 그제야 참지 못하고 물었다.“언니, 저 아직 어제의 질문에 대답 못 들었어요……!”“무슨 질문?”“바로 언니와 소지엽 팀장님 이야기요!”심소희는 눈이 초롱초롱했다.이서는 어이가 없는 듯 이마를 짚었다.“아니야, 우리 아니야. 내 남편 아니라고…….”“네?!” 심소희는 1초 간 망연자실했다가 곧 웃는 얼굴을 했다.“아! 알겠다. 설마 언니도 요즘 신혼 부부들이 많이 한다는 ‘은혼족’이에요? 하은철이 귀찮게 할까 봐 그런 거죠? 게다가 소씨 집안과 하씨 집안이 비즈니스적으로 많이 연결되어 있으니…….언니 때문에 이 모든 비지니스가 끊기면 얼마나 손해에요?”이서는 심소희의 상상력에 탄복했다.“아니라고, 우리 정말 아니야, 우리 결혼 안 했어!”“기사에 다 적혀 있던데요. 어젯밤에 둘이 같이 저녁도 드셨던데……?”이서는 어처구니없었다. 함께 밥 한끼 먹었다고 결혼한 거라면, 굳이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를 뭐 하러 해?“기사는 어디서 봤어?”심소희는 휴대전화를 꺼냈다.“바로 SNS에서요.”그녀가 다시 클릭하여 재확인하려고 할 때, 이서와 소지엽 관련 모든 보도자료는 순식간에 증발된 듯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잠깐 사이에 싹쓸이 당한 것 같았다.“소희야, 설마 너 잘못 본 거 아니야?”“아니에요, 다른 동료들도 다 봤어요. 언니, 믿지 못하겠으면 다른 직원에게 물어보세요.”잠깐 침묵을 하던 이서는 소씨 집안에서 모든 기사와 실검을 삭제했을 것으로 추측했다.“알았어. 나가서 일봐.”“네, 알겠습니다.”심소희는 의아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이서사무실을 나섰다.‘아까 기사 분명히
“상언 씨?”이상언은 몸을 곧게 펴고 앉아 이서의 목소리를 들으며, 지환의 비참한 처지를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제가 지환 씨 부모님 만나러 M국에 가기 전에, 상언 씨가 윤수정을 조사해주겠다고 얘기했던 거 기억하세요?”이상언은 잠깐 생각을 하고서야 윤수정이라는 사람을 떠올렸다.“네, 기억나요.”“얼마 전에 감옥에 수감됐는데, 그런데 출소 후 갑자기 병이 깔끔히 나았더라고요. 거기서 무슨 명의를 만났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난 지금 수정이가 지금껏 아픈 척 쇼를 한 게 아닌가 의심이 되서요.”이상언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뭐라고요? 병이 다 나았다고요?”“네, 그리고 후유증도 전혀 없어 보이던데, 세상에 정말 이런 신의 손을 가진 명의가 있을 수 있을까요?”이상언은 단호하게 말했다.“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예요. 윤수정의 병력을 본 적이 있는데 그녀의 상황은 오직 신장 이식 수술을 받아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게다가 이식 수술 후에도 장기간 휴양해야 했고요.”이서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윤수정이 꾀병을 부렸다는 자신의 추측에 더욱 무게에 실렸다.“지난번에 윤수정을 데리고 검사하면 바로 진위를 알아낼 수 있다고 했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병이 다 나았다고 하니, 검사를 한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나타나지 않겠죠?”이상언은 잠시 중얼거렸다.“만약 윤수정이 정말 꾀병을 부린 거라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을 속일 수 있을까요? 이 일은 내게 맡기세요, 내가 조사해 볼 게요.”방금까지만 해도 미간을 잔뜩 찌푸렸던 이서는 이상언의 얘기를 듣고, 그제야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어렸다.“정말 고맙습니다.”이상언은 웃으며 말했다.“별 말씀을요. 굳이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면…… 하나 씨 앞에서 제 얘기 좀 많이 해주세요.”이서는 빙그레 웃었다.“그래요, 그나저나 지금 하나랑은 어떻게 되었어요?”“괜찮아요.”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하지만 난 왠지 우리 사이에 계속 보이지 않는 장벽 같은 게 있
소지엽은 그를 째려보았다.구태우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손으로 자기 입을 툭툭 쳤다.“내 요 주둥이가 싸다, 싸.”소지엽은 먼 곳을 바라보았다.“좀 이상하지 않아? 대체 얼마나 큰 파워를 가지고 있길래 삽시간에 아 모든 기사와 실검 키워드까지 다 내릴 수 있을까?”구태우는 팔을 베며 말했다.“누구긴 누구겠어? 하씨 집안이겠지…….”소지엽은 그를 돌아보았다.“내가 듣기로는 하경철이 윤이서를 하씨 집안 손주 며느리로 점 찍어 두고, 하은철에게 윤이서와 잘 해보라고 등 떠민 걸로 알고 있거든.근데 이 노인네도 정말 이상하지 않아. 다른 명문 귀족들은 돌싱며느리를 쳐다보지도 않는데 하경철은 조금도 꺼리지 않는다는 거지. 오직 오매불망 윤이서…….”구태우는 말을 잠깐 멈추었다. 이 말에 남을 비방하는 듯한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아 함구했다.하지만 소지엽은 별 생각 없이 말했다.“그런데 최근 하은철은 윤수정이랑 아주 뜨겁던데?”“응, 윤수정을 도와 윤씨 그룹을 손에 넣으려고 한다고 들었어.”구태우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윤수정이 윤씨 그룹의 CEO가 되면 하경철이 그녀를 달리 보지 않을까 싶어서……. 어쩌면 두 사람의 혼사를 동의할 수도 있으니…….”소지엽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탁탁 두드리며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씨 집안 말고는 그만한 파워를 가진 세력이 없다고 생각하고 문득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아, 맞다, 이서가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됐어?”“그렇게 빠를 리가 있나? 아직 하루도 안 지났거든.”소지엽은 입술을 오므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퇴근할 때쯤 이서는 지환의 전화를 받았다. 오늘 저녁 다른 일이 있어 웨딩 촬영 관련 사항은 다음에 얘기하자고 했다.전화에서 지환의 말투는 매우 평온했다. 이서도 별 생각없이 전화를 끊고 집에 갔다.이때, 룸에 앉아 있던 지환은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짜증난 듯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그의 곁에 앉은 이상언은 그를 경멸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뭐 그깟 일 가지고……,
그 그림자는 바로...성지영과 또 다른 사람!이서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이 마음속에 맴돌았고, 어느샌가 무의식중에 두 사람의 뒤를 쫓고 있었다. 이서가 움직이는 것을 본 지환은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드디어 내 옷을 골라주려는 거야!’하지만 곧 이서가 매장을 나가는 것이 보였고, 지환은 알 수 없는 분노가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람이 진짜...’‘얼마나 이혼하고 싶길래 저러는 거야?’ ‘나랑 같이 있고 싶지도 않다는 거야?”이렇게 생각한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의자에 앉았고, 계속해서 치미는 울화를 느꼈다. ...한편, 재빠르게 두 사람의 뒤를 쫓던 이서는 성지영과 다른 그림자에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뭐야, 두 사람의 발걸음도 빨라지는 것 같은데?’이서가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뒤쫓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군.’두 사람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는데, 당황한 탓에 길을 제대로 정하지 못한 듯했다. 이서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성지영의 옆에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옷차림을 보면 여자인 것 같은데.’‘나를 만나고 싶지 않은 여자라...’ 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서 두 사람의 뒤를 바짝 쫓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급기야 갈라져 걷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왼쪽으로, 또 다른 사람은 오른쪽으로.하지만 이서는 망설이지 않고 정체가 확실치 않은 여자의 뒤를 따랐다.모퉁이를 돈 이서가 그 여자의 옷과 모자를 잡으려던 찰나, 누군가가 이서의 손목을 잽싸게 낚아챘다.“이서야, 오랜만이구나.” 그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이서는 감전된 것처럼 상대의 손을 뿌리쳤고, 상대의 모습을 알아본 후에 주저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섰다.“성지영!”성지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이름을 부른다고? 이서야, 나는 아직도 네 어미 되는 사람이란다. 벌써 잊은 거니?”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나는 당신 같은
이서는 두 사람이 부끄러워하는 줄 알고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아니, 왜 결혼 얘기만 나오면 말이 없어져요?” 소희는 현태를 한번 보고서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이서 언니, 제가 알기로 우리 집 결혼식 들러리는 독신이어야 할 수 있어요...” 즉, 이서는 이미 결혼한 상태여서 결혼식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규칙이 있어?”“네.”“괜찮아, 어쨌든...”“곧 독신이 될 예정이잖아? 이혼한 사람이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규칙은 없는 거지?”차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현태는 백미러로 지환을 보았는데, 역시나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어두워져 있었다. 소희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부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이, 이서 언니... 부모님을 만날 때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요?” 이서는 차내 분위기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 듯 대답했다.“정장이 좋을 것 같아. 아무래도 격식 있어 보이니까.” “그렇구나...”소희는 이서와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차 안의 분위기는 다시금 뜨거워졌지만, 지환의 낯빛은 시종일관 어두웠다. 차가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현태가 말했다.“도착했습니다.”지환과 이서가 차례로 내리자, 소희는 몰래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현태 오빠, 어쩌죠? 방금 나왔는데, 두 사람 모두 얼굴을 찡그리고 있잖아요! 중매는 무슨, 싸우지 않게 하는 게 더 어렵겠어요!” “그렇지 않을 거야.”현태는 당황했음에도 불구하고 소희를 위로하려고 했다. “이따가 기회를 봐서 두 사람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자.” 소희는 멀찍이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깊은 의구심을 가졌다. “그래요! 이서 언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못 할 일도 없죠!” 두 사람도 차에서 내렸다.“이서 언니, 가요!”소희는 주동적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3층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계속해서 이서의 뒤를 따랐고, 맨 뒤에서 걷던 현태는 이 장면을 보고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네 사람
토요일.이서는 약속 시간까지 병원에서 소희를 기다렸다. 소희의 전화를 받고서야 밖으로 나온 이서는 지환의 병실을 지나며 안을 힐끗 보았지만,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갔나 보네.’이서는 별생각 없이 병원을 나섰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알콩달콩하게 서 있는 소희와 현태의 모습이 보였다.이 광경을 본 이서는 갑자기 심술이 나는 듯했다. ‘나도 하지환 씨와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차에 오르려던 이서는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이서는 차 안에 있는 지환을 보고는 눈을 두어번 깜빡인 후에야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 하지환 씨가 왜 여기 있어요?”이서는 망설이기 시작했다.“현태 씨가 옷을 고르러 갈 건데, 안목이 좋은 나도 같이 가면 좋겠다고 해서 왔어.” 이서가 고개를 돌려 현태를 바라보자, 현태가 어수룩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저... 소희 씨가 사모님께 전화한 줄은 몰랐어요.”“하지만 대표님께서 제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드문 기회라...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모님, 괜찮으시죠?” ‘완전 고의적이잖아!’이서는 속마음을 내보이고 싶었지만, 다음 주 월요일에 두 사람이 심근영 부부를 만나야 하는 것을 떠올리며, 한 명의 조언자가 더 있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긴, 여자인 나뿐만 아니라 남자의 조언도 같이 받는 게 더 도움이 될 거야. 화가 나긴 하지만... 조금만 참자.’ “괜찮아요, 어서 가시죠!”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조수석으로 향했다.하지만 소희가 재빨리 달려가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이서 언니, 제가 현태 오빠랑 같이 앉고 싶은데, 괜찮죠?”이서는 말문이 막혔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서 뒷좌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환과 거리를 두기 위해 창문에 바짝 붙어 앉았는데, 문이 없었다면 진작 차에서 떨어졌을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소희와 현태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아야만 했다. 그렇다. 두 사람이 지환을 불러낸
그 사람은 바로... 심유인!“언니가 왜 여기 있어요?”소희는 심근영 부부를 알게 된 후로 서서히 강한 소속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집을 자신의 영역이라고 여기게 된 찰나, 심유인이 거들먹거리며 이곳에 나타난 것을 보자, 소희는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게다가 유인은 항상 뒤에서 작은 음모를 꾸미곤 해서, 소희는 그녀를 보기만 해도 짜증이 밀려왔다.‘회사 기밀을 훔쳤다는 누명도 심유인이 벌인 짓인 것 같단 말이지...’‘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심씨 가문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조사했는데도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겠어?’‘자기 자신을 조사하는 셈이니까,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 수 있는 거지!’ “소희야, 오랫동안 널 만나지 못해서 이 언니가 특별히 너를 보러 온 건데, 날 반기지 않는 것 같네?” 이서의 배후 인물이 지환이라는 것과 하은철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심유인은 소희에게 기대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하지만 그녀에겐 이미 그럴 기회가 없었다. 소희가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떻게 과거에 있던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심유인은 오직 한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소희의 남자 친구가 월요일에 찾아온다는 것과 그녀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심유인은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네, 저는 언니를 반기지 않아요. 당장 나가주시겠어요?”심유인은 곧장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심소희, 너무 거만하게 굴지 마. 지금은 하 대표님께서 너를 지지해 주신다지만, 언제까지 그분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그리고, 그분이 너를 도와주시는 건 전적으로 윤 대표 때문이야. 네가 윤 대표와의 사이가 틀어진다고 해도, 하 대표님께서 너를 지지해 주실까?” 소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와 저의 관계는 언니와 주변 사람들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관계가 아니에요!” 심유인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그래, 두 사람의 사이가 정말 좋다는
고이서는 두 사람이 단톡방에 보낸 메시지를 보고 꽤나 만족스러워하며 웃기 시작했다.하지만 자신이 아주 특별한 신분임을 잊지 않았고, 절대 외부인에게 자신이 원래의 ‘윤이서’라는 사실을 알리면 안 된다는 것을 되새겼다. ‘윤이서가 나와 엄마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다면, 분명히 의심할 거야.’고이서가 걱정을 털어놓자, 성지영이 무심히 말했다.[얘, 그렇게 우연히 만날 리가 없잖아. 이렇게 큰 도시에서 쇼핑하다가 윤이서를 만난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란다.]윤재하도 그런 우연이 일어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우리 딸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야. 곧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끝날 텐데,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서 골치 아픈 일을 만들 필요는 없잖아?][그래도 드레스가 사고 싶다면, 교외로 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군.][윤이서가 교외로 쇼핑가지는 않을 테니까.]성지영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교외에서 어떻게 그럴듯한 드레스를 살 수 있겠어요?] 고이서는 시내에서는 이서를 만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교외에서는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엄마, 교외에는 제대로 된 드레스가 없긴 하겠지만,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잖아요.][제가 윤씨 그룹의 대표가 되면, 시내의 드레스는 물론이고, 고급 럭셔리 브랜드의 드레스까지 전부 집으로 보내드릴게요, 네?]이 말은 성지영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어머, 우리 딸 말하는 것 좀 봐? 그래, 토요일에 시외에서 쇼핑하자꾸나.][네, 엄마.]고이서는 약속 시간을 정한 후에야 핸드폰을 내려놓고 업무에 집중했다. 한편, 최고층에 있던 이서는 전화하고 있었는데, 이는 소희가 걸어온 것이었다. [이서 언니, 긴급 상황이에요. 저 좀 도와주세요!]이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어젯밤에 부모님께 현태 오빠의 존재를 털어놓았잖아요.][그런데 오늘 아침에 아빠가 저를 서재로 부르셔서는 다음 주 월요일에 현태 오빠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셨어
“나는 과거에 살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요.”조용히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눈빛에서는 고통이 요동치고 있었고,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지환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울부짖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감정은 입술 끝에서 단 세 글자로 바뀌고 말았다.“알겠어.” 이서도 지환의 이런 모습에 마음이 괴로웠다.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마다 과거만 떠올릴 뿐, 그 누구도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그것은 그저 과거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그만 먹을래요.”이서는 황급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병실을 떠났다. 차에 오르자, 이서는 고통이 온몸으로 번지는 듯했다. ‘하지환 씨가 하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늘은 왜 우리한테 이런 장난을 친 걸까?’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차 안의 카펫을 바라보던 이서는 운전기사의 말을 듣고서야 회사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에서 내린 이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또 고이서를 마주쳤다.다시 고이서를 마주한 이서의 감정은 완전히 뒤바꾼 후였지만, 그러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고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고이서가 빙그레 웃으며 이서를 바라보았다.“윤 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젯밤에는 잘 주무셨나요?”“덕분에요.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를 마신 이후로 아주 잘 자고 있어요.” “참, 지난번에 꽃차가 부족하면 더 구해줄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큰 걸로 하나 더 구해주실 수 있을까요?”이서가 주동적으로 꽃차를 더 달라고 하자, 고이서의 눈동자에 기쁨이 번졌다.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서는 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윤씨 그룹에 들어온 거였구나.’‘재무팀 팀장을 다시 구해봐야겠어.’어쨌든 재무는 한 회사의 존망이 달린 것이지 않은가. “언제까지 구해드리면 될까요?”“어제저녁에 세어 보았는데, 아직 10포가 남았더라고요. 매일 저녁에 1포씩 먹는다고 가정하면, 10일분은 남은 셈이죠. 4일이나
“감사해요.”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구태우가 한 말을 곱씹자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날이 밝자마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알았어,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줄 여력이 없어.”‘미안해요, 소지태 씨.’이서는 평생 지태에게 대답을 줄 수 없을 것이었다.병실 문을 열자, 아침 식사를 들고 있는 이천이 보였다.“또 아침 식사를 가져오신 거예요?”‘역시 사모님이야!’놀란 이천은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뒤에서 몸을 일으킨 지환이 보였다.이서가 그를 마주하고도 표정이 구겨지지 않자, 이천이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사모님, 같이 드실래요?” “이 비서님, 말씀드렸잖아요.”“앞으로는 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시라고요.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떡해요?”이서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천은 곧장 지환의 안색을 살폈는데, 과연 이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환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지... 괜히 사모님께 식사하자고 해서 또 대표님의 기분을 나쁘게 했으니까!’ “그래도 아침은 같이 먹을게요.”이서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놀란 이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거든요.”이서가 싱긋 웃어 보였다. ‘식사하시겠다고?! 경사네, 경사야!’이천은 바삐 이서를 붙잡고 지환의 병실로 향하며 말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아니, 윤 대표님께서 같이 식사하시겠답니다!” “그래.”지환의 낯빛은 조금이나마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듯했지만, 여전히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서가 자리에 앉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천은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눈물이 눈 앞을 가렸다.‘이런 평화로운 모습이 얼마 만인 거지?’ “아, 더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이천이 음식을 내려놓고 말했다.“맛있게 드십시오. 부족하시면 더 사 오겠습니다.”이서는 멀어져가는 이천의 뒷모습을 보며
“이 꽃차를 장기간 이용할 경우, 중추신경이 손상돼서 심하면 치매를 일으킬 수 있어요.”“강력한 성분이 꽤 많이 들어 있더군요.”“음... 제 예상대로라면, 대략 보름 정도 사용하면 치매가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놀란 이서가 다시금 물었다.“그러니까, 제가 보름 동안 이 꽃차를 복용했다면, 치매에 걸렸을 거란 말씀이세요?”“네, 그래서 지인이 준 게 맞냐고 물었던 거예요.”의사가 설명서를 보고 말했다.“설명서에도 다른 나라 언어만 있잖습니까.”“그래서 그분도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에요.”“윤이서 씨, 이 꽃차를 복용하기 시작한 건 아니죠?”“그게...”이서는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고 팀장은 외국에서 자란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 나라의 언어를 모를 수 있겠어?’‘오히려 잘 알아서 이 꽃차를 사 온 걸 거야.’ 하지만 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고 팀장님이 왜... 나를 해치려 한 거지?’ ‘설마, 하도훈이 보낸 사람인 건가?’“윤이서 씨?”의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설마 벌써 며칠간 드신 겁니까?” 별안간 정신을 차린 이서가 말했다.“아니요, 딱 한 번 마셨어요.” 의사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딱 한 번만 마셨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이서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내 건강보다도 회사를 걱정할 때야.’‘고이서, 당신... 대체 누구야?!’의문을 품은 이서는 병실로 돌아간 후, 하늘에게 고이서의 모든 자료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하늘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으나, 곧장 고이서에 관한 자료를 보내왔다.이서는 한 장씩 뒤적거렸으나, 결국 고이서의 이력서에서는 어떠한 문제점도 찾지 못했다.‘지금 당장 고이서를 해고한다고 해도, 그 여자가 대체 누구인지, 왜 나를 찾아온 건지는 알 수 없을 거야.’ 이서는 별안간 지태의 곁에 있는 구태우를 떠올렸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구태우에게 연락을 취했고, 그는 두말없이 승낙했다.
병원에 도착한 이서는 우물쭈물하다가 차 안에 있는 지환을 향해 말했다.“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그 사람을 처리해 줘서?”“네.”“참,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어요? 왜 날 죽이려고 한 거죠?”“설마... 하도훈의 사람이었던 거예요?” 지환은 이서의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잠시 후에야 말했다.“하은철의 죽음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만, 하도훈은 우리 두 사람이 비밀을 누설했다고 생각하고, 우리를 죽여서 분풀이하려던 거야.” 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우리요? 누가 하지환 씨에게도 해를 가한 거예요?”“응.” 이 대답이 나오는 순간, 이서의 심장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괜찮아요?”그녀가 간신히 입을 뗐다.지환은 그런 이서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날 걱정하는 거야?” 이서는 붉게 물든 얼굴로 화를 냈다.“우... 우리는 지금 협력 관계예요! 하지환 씨한테 사고가 나면, 내가 어떻게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지환의 웃음기는 더욱 짙어졌다.“난 괜찮아. 어둠의 호리병이 있으니, 하도훈조차도 나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거거든.” “하지만...”이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어둠의 호리병은 한 사람이잖아요. 만약 하도훈이 동시에 두 사람을 보내면 어떡해요?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은 위험에 빠질 거라고요.” “걱정하지 마. 우리 곁에 고수가 있다는 걸 안 이상, 하도훈은 당분간 우리를 해치려 하지 않을 거야. 게다가 하도훈은 지금 여자를 찾아 하씨 가문의 후계자를 만드느라 바쁠걸?”이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차 안으로 돌아갔다.“하도훈이 찾는 여자한테 손을 쓸 수는 없을까요?”“무슨 뜻이야?” “하도훈은 대를 잇는 것에 집중하느라 상대의 출신은 전혀 개의치 않을 거예요. 오히려 그 사람이 더욱 중요시하는 건 상대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가 하는 거겠죠.”“만약 우리가 먼저 하도훈의 조건에 맞는 여자를 골라낸다면, 그 여자를 하도훈의 곁에 두고,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