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시영은 그제야 하은철을 보고 다소 의외인 듯 눈썹을 올려 떴다.“하은철 씨도 여기 계셨네요.”“네.” 잠깐 딴 생각을 하던 하은철은 곧 다시 배시영을 바라보았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답이 나와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윤이서 씨 언론 홍보 대행을 의뢰받았습니다.”이 말을 들은 강수지는 믿을 수 없는 듯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하은철은 대충 직감했지만 그래도 안색이 한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배시영 씨가 웬만해선 직접 나서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하은철은 이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오늘 이렇게 오신 것은 설마…… 제 안면 때문인가요? 사실, 저와 이서는 이미 끝났어요. 그러니 굳이 그러실 필요……”배시영은 나름 하은철에게 공손했지만, 그래도 듣다 못해 그의 말을 끊었다.“아닙니다, 오늘 온 건 온전히 개인적으로 윤이서 씨를 좋아하기 때문이에요.”“…….”“별일 없으면 먼저 나가 주시겠습니까? 윤이서 씨와 따로 할 얘기가 있어서요?”하은철과 강수지는 배시영 일행에 떠밀려 사무실을 나갔다.사무실 밖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이서 사무실 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모두 배시영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사실인지 확인차 온 것이었다.하은철과 강수지가 나온 것을 보고 모두 의론이 분분했다.“무슨 일이야?”“윤이서가 배시영을 섭외한 거야?”“윤이서 완전 쩐다. 배시영이 직접 출마하다니.”“그러게. 듣기로는 배시영은 일류스타나 유명인사들만 상대한다고 들었는데?”“인맥이 개 쩐다라는 얘기밖에 할 게 없네! 완전 부럽!”“…….”밖의 수군거림에 배시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문을 닫아 모든 것을 차단했다.“윤이서 씨, 시작해도 될까요?” 배시영이 물었다.이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심소희더러 손님들에게 물을 한 잔씩 따라주라고 했다.업무 모드에 들어간 배시영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이서 씨 일은 대충 알고 있습니다. 당신 수중에 부모를 고발할 수 있는 증거가
업계에서는 그녀를 수단방법 안 가리고 업무를 진행하는 악랄하고 독한 년이라고 하지만, 눈앞의 이 가냘프고 연약해 보이는 이 여자야말로 진정한 ‘악녀’다.배시영은 이서에 대해 좀 알고 있었다. 하은철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며 고분고분하고 순둥순둥한 착한 이미지였는데, 겨우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했을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하지만 그녀는 지금 눈 앞의 이 여자, 윤이서가 마음에 들었다.“그럼 내가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요?”“그날 제가 아파트 관리 사무실에 갔다가 공격을 받았어요. 경찰이 지금 조사 중인데, 곧 용희자가 잡힐 거 같아요.”이서는 마치 다른 사람인 듯 가볍게 얘기를 꺼냈다.“용희자가 잡히면 그때 증거를 인터넷에 올립시다.”“만약 경찰이 계속 사람을 잡지 못한다면요?”이서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3일이요, 만약 3일 안에 경찰이 용의자를 잡지 못한다면, 그때는 절차를 밟읍시다.”배시영은 진심 어린 웃음을 지었다.“제가 오기 전에 이서 씨는 이미 어떻게 일을 진행해야 할지 다 생각해 놨네요.”그녀는 오기전에 걱정 아닌 걱정을 했었다. 윤이서가 문외한인데다 신분이 특별하다 보니 그녀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이렇게 일련의 절차를 다 생각해 둘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녀가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지금까지 배시영이 진행했던 업무 중에 가장 수월한 건이었다.수월할 뿐만 아니라…… 돈도 많고!이 사모님에 대한 호감도가 급상승했다.“그럼…… 얘기 끝난 건가요?” 배시영이 일어섰다.이서가 직접 배시영을 엘리베이터 입구까지 배웅하였다.“배시영 씨…….” 이서는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왜 저를 도와주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이 일은 지환이 연줄을 대준 것인 걸 이서는 잘 알고 있다.그런데 방금 배시영과 하은철의 모습을 보면, 하은철 따윈 배시영의 안중에도 없었다.지환은 하씨 산하의 중간 책임자일 뿐인데, 지환이 배시영을 섭외할 수
“그럼 기도해. 혹시 뽀록난 거라면 강운도에 가서 감자 캘 생각해.”“…….”“얼른 아래층 카페 가서 무관한 사람들 내보내지 않고 뭐해?”이천은 반 박자 느린 반응으로 황급히 대답했다.“네, 네!”이천이 떠난 후에야 지환은 초조하게 넥타이를 풀고 실눈을 뜨며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겉으로서는 별일 없는 듯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마음속은 이미 혼란의 도가니였다.심지어 만약 이서가, 그의 신분을 알았다면, 어떻게 사죄를 해야 성의를 보일지 고민하기 시작했다.10분 뒤, 그는 아래층의 커피숍에 도착했다.카페 내 직원은 모두 내부 직원으로 교체하였다.지환은 창가 쪽 자리에 앉아 무의식적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시간이 조금씩 흘렀다.매분 매초가 고문이었다.드디어 이서의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그는 눈동자가 반짝거렸지만, 심장은 누군가에 의해 쥐어뜯긴 것 같았다.다음 순간, 주차를 마친 이서는 차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카페로 걸어왔다.지환이 일어나서 이서를 마중하려고 할 때, 그녀의 코가 빨개진 것을 보았다.그의 몸이 흔들리며 발걸음이 움직이지 않았다.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서는 이미 이서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코의 홍조가 아직 가시지 않았고, 눈가도 촉촉한 것이 방금 울었던 것 같았다.지환의 심장은 바닥에 떨어졌다.“이서야…….”그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이서는 엄숙한 표정으로 지환의 맞은편에 앉았다.“지환 씨, 내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 주길 바래요.”지환은 책상 밑에 놓인 손가락을 살짝 오므렸다.“말해봐.”“배시영이랑 아는 사이예요?'지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이 배시영에게 도와달라고 한 거예요.”지환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왜 나를 도와준다고 한 거예요? 당신은 그녀에게 뭐 해주기로 약속했나요?”여기까지 말하자, 이서의 목소리가 살짝 울먹였다.지환의 심장은 순식간에 찢어지는 것 같았다.“이서야, 내가 일부러 속이려고 했던 건 아니야…….”“나 때
“바보야.”지환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웃었다.“기밀이라고 하기엔 너무 평범한 정보지. 일반 사람들에게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한 정보지만 배시영한테는 아주 중요한……?”“진짜에요?”지환은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내가 자기한테 거짓말하는 거 봤어?”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 없었다.이서의 눈에 강한 믿음이 내비쳤다. 지환은 만감이 교차했다. 이서의 절대적인 신임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몰랐다.“자, 커피 한 잔 마실까?”지환이 이서를 놓아주었다.이서는 그제야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방금까지도 지환의 품에 안겨 운 걸 생각하니, 너무 창피해서 땅굴이라도 파고 숨고 싶었다.지환은 곧 커피 두 잔을 들고 돌아와 이서 옆에 앉았다.“조금 있다가 내가 데려다 줄게.”“아니요.”이서는 붉은 입술을 살짝 내밀고 지환의 몸 옆에 기대어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 속이지 마요, 알았죠?”지환은 긴 손가락을 한 번 치켜세우다가 잠시 뒤에야 가볍게 ‘응’ 소리를 냈다.이서는 눈을 들어 맑은 눈동자로 지환을 바라보았다.“나를 속이면 어떡할 거예요?”지환은 이서의 손을 잡고 키스를 하며 떠보듯 물었다.“어떻게 하면 좋을까?”“음…….” 이서는 끝소리를 길게 끌며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 저은 후 다시 웃으며 말했다.“난 당신이 나를 속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요.”“그렇게 날 믿어?” 지환이는 이서의 코를 가볍게 문질렀다.이서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바로 답했다.“물론이죠.”지환은 갑자기 그녀의 눈을 볼 수 없어 피했다.그는 손 옆에 있는 커피를 저으며 몸이 경직되었다.“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내가 너를 속였다면?”“당신은 나를 속이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요.”이서는 지환의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시간을 확인하고는 가방을 들었다.“시간이 늦었네요, 나 서둘러 돌아가야 해요!”지환은 이서의 손목을 잡아당겼다.“그냥 이대로 가려고?”“
“그런데 삼촌왜 왜 배시영에게 이서를 도우라고 부탁해요?” 하은철은 이해할 수 없는 듯한 표정으로 하경철에게 물었다.하경철은 눈치 없는 손자가 언짢긴 했지만, 그조차도 지환과 이서가 부부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하은철은 잠시 진지하게 생각했다.“왜냐하면…… 삼촌이 이서를 좋아하니까?”할아버지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하은철의 다음 얘기에 화가 나서 피를 토했 뻔했다.“하지만 그것도 지극히 정상이예요. 어른들이 특히 이서를 예뻐하더라고요. 할아버지도 이서를 좋아하잖아요?”“…….”손자와 말이 통하지 않자, 하경철은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가서 배시영 불러와, 직접 물어 봐야겠어.”배시영은 방금 이천으로부터 앞으로 이서 앞에서 언행을 조심하라는 전화를 받았다.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또 하경철이 그녀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하은철의 전화를 받았다.배시영은 핸드폰을 쳐다보며 입술을 살짝 찡그렸다.‘윤이서가 정말 대단한 인물이구나.’배시영은 하경철을 만나러 갔다.하경철은 단도직입적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자네가 이서의 일을 대행한다고 들었네만, 내가 좀 궁금한 게 있어 자네를 불렀네. 내가 알기론 자넨 일류 대스타에다 국민적 지지도가 높은 사람들의 언론 대행만 맡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서는 인지도도 없고 스타도 아닌데 왜……?”배시영은 웃으며 말했다.“어르신이 이렇게 물으시니 저도 숨기지 않겠습니다. 사실 저는 큰집 도련님께서 연예계에 진출할 계획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윤이서 씨가 비록 하씨 집안의 며느리는 아니지만, 어르신께서 매우 아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이서 씨를 도와준다면, 어르신도 틀림없이 저를 도와 큰집 도련님과 다리를 놓아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닌가요?”하경철은 예리한 눈빛으로 배시영을 훑어보았다.“그러니까, 자네는 내가 자네를 도와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서를 도와줬다는 거네?”‘지환의 파워가 아니었던 겐가?’배시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이 사람 장난이야.”임하나는 이상언을 째려보았다. 그녀의 귓불이 약간 뜨거워졌다.“우리 아직 연인사이 아니야…….”“응? 그럼?”“지금은 연애 인턴 기간이야. 3개월 수습기간이 끝나고 심사 기준에 도달해야만 정식으로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어.”“역시 노는 물이 다르구만.” 이서는 고개를 숙이고 채소를 썰었다. “다들 나가세요. 여기에 있으니 비좁고 거치적거려.”지환은 나가지 않았다.“난 오늘 자기 주방 보조할게!”이서는 그를 밀어냈다.“아니에요.”지환은 주방에 있겠다고 버텼지만, 결국은 이서에게 쫓겨났다.“자기야…….” 지환은 주방 벽 쪽에 붙어서 고개만 빼꼼 내밀며 말했다.“나, 질문 하나만 하고 바로 갈게.”“뭔데요?”“포도 샀어?”이서는 그 속에 담긴 깊은 뜻도 모르고 눈을 깜박였다.“샀어요, 왜요?”지환은 입술을 올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 갔다. 뒷모습에서 그의 기분이 좋다는 걸 알 수 있었다.‘남자란 본래 이렇게 단순한 동물인가? 포도 하나에 이렇게 기분이 좋다니…….’지환이 가고 얼마되지 않아 임하나가 들어왔다.“왜 들어왔어? 밖에서 기다리지?”임하나는 헤헤 두 번 웃고서야 이서의 곁에 다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이서야, 동영상 그 일은……”이서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응, 왜?”임하나는 그제야 시원하게 물었다.“혹시 내가 뭐 도와줄 거 없을까?”이서가 어떤 사람인지 십여 년지기 절친인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다.이서가 나서서 해명하면 분명히 효과가 있을 텐데…….“고마워. 하지만 괜찮아, 내 쪽은 다 준비됐어.”“준비됐어?”임하나는 의외였다.“응…….” 이서는 말을 이었다.“너는 기다렸다가 좋은 구경이나 해.”임하나는 믿을 수 없었다. 이서가 그녀까지 연루될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일이 지금 커져서 여론이 분분하잖아? 이서야, 혼자 다 떠안으려고 하지 마. 비록 나도 무슨 유명인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같이 힘을 합쳐 목소리 내면 그래도 우리 얘기
“왜? 무슨 일이야?”이상언이 물었다.임하나도 지환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혹시 이서 일인가요?”지환은 눈을 들어 두사람을 담담하게 쳐다보고는 무덤덤하게 얘기했다.“별일 아니야. 오늘 저녁 인터넷에서 뭘 봤거나 혹은 누군가에서 무슨 소리를 들어도 절대 이서에게 입도 뻥긋하지 마. 하루 종일 힘들었을 텐데 그냥 푹 쉬게 하고 싶어.”임하나와 이상언은 눈을 마주보고는 둘 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서가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고 밥 먹자고 하자, 두 사람은 상차리는 걸 도와주었다.“자, 맛있게 드세요.”이서가 마지막에 자리에 앉았다지환이 가장 먼저 젓가락을 들었다. 그는 생선살 한 점을 집어 가시를 발라내서 이서 그릇에 올려주었다.“자기야, 수고했어.”이서는 그를 째려보았다.“상언 씨와 하나도 있는데.”임하나와 이상언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우리 신경 쓰지 마. 둘이 실컷 꽁냥꽁냥하셔.”둘의 호흡에 이서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상언 씨 수습 기간이 곧 끝날 것 같은데요.”이상언은 득의양양했다.“봐봐, 지환, 형수님 얘기 들었지?”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마쳤다.저녁을 먹고 임하나와 이상언은 설거지와 뒷정리를 마치고 갔다.집을 나서기 전에 임하나는 이서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얘기하라고 말할 생각이었지만 지환이 한 말이 생각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상언의 차에 올라탔다.별장에서 이서는 지환의 품에 누워 3층 베란다에서 별을 보았다.지환은 포도를 씻어 왔다.따스한 형광색의 베란다 조명은 밤하늘 아래에서 유난히 낭만적이게 느껴졌다.“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이서는 하늘의 별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 저 두 별이 바로 견우와 직녀성이죠?”지환은 손은 분주히 움직이며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고는 답했다.“아닌 거 같은데?”고개를 돌린 이서는 지환이 포도의 껍질을 까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지환의 길쭉길쭉한 손가락에서 풍기는 우아하고 고귀한 멋에 왠지 모르게 색기까지 느껴졌다.이
지환은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음이 아팠지만 손을 놓았다.이서를 곁에 두려면, 그녀를 강하게 만들어야 했다.비슷한 결의 사랑만이 오래 갈 수 있다.지환은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이 일이 끝나면 자기 원하는 거 있으면 말해. 내가 다 들어 줄게.”이서는 잠깐 생각한 뒤 말했다.“뭘 갖고 싶은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생각나면 알려 줄게요.”“그래.”이서는 웃으며 집을 나섰다. 그러나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마스크를 꺼내 쓰고 어두운 얼굴을 하며 힘들어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지환은 창문에서 그녀의 옆모습을 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이서는 차 옆에 도착해서야 임현태의 차 뒤에, 차량 두 대가 더 있는 것을 발견했다.경계하며 차에 탄 그녀는 임현태에게 물었다.“임현태 씨, 뒤에 있는 저 차들은?”임현태의 거짓말이 많이 늘었다.“동영상 사건 이후 회사에서 아가씨 신변에 해를 끼칠까 봐 보호차원에서 차량 두 대를 더 보냈습니다.”이서가 좀 감동했다.‘서우의 직원 복지가 이렇게 빈틈없다니…….’그러나 이서는 여전히 수시로 주위를 살펴보면서 이상이 없는지 신중을 기했다.듣는 말에 의하면 실력 있는 파파라치들은 창문만 찍힌 사진 한 장으로, 그 장소와 인물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이서는 인스타에 사진 올리는 것조차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혹시라도 파파라치들이 별장까지 찾아올까 봐 걱정되었다.그녀는 지환의 안정된 생활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다.이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간 듯 임현태가 말했다.“아가씨, 이렇게 신중할 필요 없어요. 아무도 여기를 찾아오지 못할 거예요.”“왜요?”민호일의 사람들이 반달동안 뒤를 밟아도 이곳을 찾지 못했다고 말하려 했지만 지환이 여러차례 말조심하라는 경고했던 게 생각이 나 잠시 멈칫 했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여긴 보안시스템이 아주 완벽하게 잘 되어 있어서 이쪽을 찾아낸다고 해도 들어갈 수는 없을 겁니다.”이서가 생각해도 그런 것 같았다.그래서 차에 누워서 눈을 감고 정신을
그 그림자는 바로...성지영과 또 다른 사람!이서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이 마음속에 맴돌았고, 어느샌가 무의식중에 두 사람의 뒤를 쫓고 있었다. 이서가 움직이는 것을 본 지환은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드디어 내 옷을 골라주려는 거야!’하지만 곧 이서가 매장을 나가는 것이 보였고, 지환은 알 수 없는 분노가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람이 진짜...’‘얼마나 이혼하고 싶길래 저러는 거야?’ ‘나랑 같이 있고 싶지도 않다는 거야?”이렇게 생각한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의자에 앉았고, 계속해서 치미는 울화를 느꼈다. ...한편, 재빠르게 두 사람의 뒤를 쫓던 이서는 성지영과 다른 그림자에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뭐야, 두 사람의 발걸음도 빨라지는 것 같은데?’이서가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뒤쫓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군.’두 사람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는데, 당황한 탓에 길을 제대로 정하지 못한 듯했다. 이서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성지영의 옆에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옷차림을 보면 여자인 것 같은데.’‘나를 만나고 싶지 않은 여자라...’ 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서 두 사람의 뒤를 바짝 쫓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급기야 갈라져 걷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왼쪽으로, 또 다른 사람은 오른쪽으로.하지만 이서는 망설이지 않고 정체가 확실치 않은 여자의 뒤를 따랐다.모퉁이를 돈 이서가 그 여자의 옷과 모자를 잡으려던 찰나, 누군가가 이서의 손목을 잽싸게 낚아챘다.“이서야, 오랜만이구나.” 그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이서는 감전된 것처럼 상대의 손을 뿌리쳤고, 상대의 모습을 알아본 후에 주저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섰다.“성지영!”성지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이름을 부른다고? 이서야, 나는 아직도 네 어미 되는 사람이란다. 벌써 잊은 거니?”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나는 당신 같은
이서는 두 사람이 부끄러워하는 줄 알고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아니, 왜 결혼 얘기만 나오면 말이 없어져요?” 소희는 현태를 한번 보고서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이서 언니, 제가 알기로 우리 집 결혼식 들러리는 독신이어야 할 수 있어요...” 즉, 이서는 이미 결혼한 상태여서 결혼식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규칙이 있어?”“네.”“괜찮아, 어쨌든...”“곧 독신이 될 예정이잖아? 이혼한 사람이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규칙은 없는 거지?”차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현태는 백미러로 지환을 보았는데, 역시나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어두워져 있었다. 소희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부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이, 이서 언니... 부모님을 만날 때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요?” 이서는 차내 분위기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 듯 대답했다.“정장이 좋을 것 같아. 아무래도 격식 있어 보이니까.” “그렇구나...”소희는 이서와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차 안의 분위기는 다시금 뜨거워졌지만, 지환의 낯빛은 시종일관 어두웠다. 차가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현태가 말했다.“도착했습니다.”지환과 이서가 차례로 내리자, 소희는 몰래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현태 오빠, 어쩌죠? 방금 나왔는데, 두 사람 모두 얼굴을 찡그리고 있잖아요! 중매는 무슨, 싸우지 않게 하는 게 더 어렵겠어요!” “그렇지 않을 거야.”현태는 당황했음에도 불구하고 소희를 위로하려고 했다. “이따가 기회를 봐서 두 사람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자.” 소희는 멀찍이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깊은 의구심을 가졌다. “그래요! 이서 언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못 할 일도 없죠!” 두 사람도 차에서 내렸다.“이서 언니, 가요!”소희는 주동적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3층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계속해서 이서의 뒤를 따랐고, 맨 뒤에서 걷던 현태는 이 장면을 보고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네 사람
토요일.이서는 약속 시간까지 병원에서 소희를 기다렸다. 소희의 전화를 받고서야 밖으로 나온 이서는 지환의 병실을 지나며 안을 힐끗 보았지만,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갔나 보네.’이서는 별생각 없이 병원을 나섰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알콩달콩하게 서 있는 소희와 현태의 모습이 보였다.이 광경을 본 이서는 갑자기 심술이 나는 듯했다. ‘나도 하지환 씨와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차에 오르려던 이서는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이서는 차 안에 있는 지환을 보고는 눈을 두어번 깜빡인 후에야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 하지환 씨가 왜 여기 있어요?”이서는 망설이기 시작했다.“현태 씨가 옷을 고르러 갈 건데, 안목이 좋은 나도 같이 가면 좋겠다고 해서 왔어.” 이서가 고개를 돌려 현태를 바라보자, 현태가 어수룩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저... 소희 씨가 사모님께 전화한 줄은 몰랐어요.”“하지만 대표님께서 제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드문 기회라...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모님, 괜찮으시죠?” ‘완전 고의적이잖아!’이서는 속마음을 내보이고 싶었지만, 다음 주 월요일에 두 사람이 심근영 부부를 만나야 하는 것을 떠올리며, 한 명의 조언자가 더 있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긴, 여자인 나뿐만 아니라 남자의 조언도 같이 받는 게 더 도움이 될 거야. 화가 나긴 하지만... 조금만 참자.’ “괜찮아요, 어서 가시죠!”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조수석으로 향했다.하지만 소희가 재빨리 달려가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이서 언니, 제가 현태 오빠랑 같이 앉고 싶은데, 괜찮죠?”이서는 말문이 막혔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서 뒷좌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환과 거리를 두기 위해 창문에 바짝 붙어 앉았는데, 문이 없었다면 진작 차에서 떨어졌을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소희와 현태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아야만 했다. 그렇다. 두 사람이 지환을 불러낸
그 사람은 바로... 심유인!“언니가 왜 여기 있어요?”소희는 심근영 부부를 알게 된 후로 서서히 강한 소속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집을 자신의 영역이라고 여기게 된 찰나, 심유인이 거들먹거리며 이곳에 나타난 것을 보자, 소희는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게다가 유인은 항상 뒤에서 작은 음모를 꾸미곤 해서, 소희는 그녀를 보기만 해도 짜증이 밀려왔다.‘회사 기밀을 훔쳤다는 누명도 심유인이 벌인 짓인 것 같단 말이지...’‘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심씨 가문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조사했는데도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겠어?’‘자기 자신을 조사하는 셈이니까,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 수 있는 거지!’ “소희야, 오랫동안 널 만나지 못해서 이 언니가 특별히 너를 보러 온 건데, 날 반기지 않는 것 같네?” 이서의 배후 인물이 지환이라는 것과 하은철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심유인은 소희에게 기대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하지만 그녀에겐 이미 그럴 기회가 없었다. 소희가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떻게 과거에 있던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심유인은 오직 한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소희의 남자 친구가 월요일에 찾아온다는 것과 그녀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심유인은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네, 저는 언니를 반기지 않아요. 당장 나가주시겠어요?”심유인은 곧장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심소희, 너무 거만하게 굴지 마. 지금은 하 대표님께서 너를 지지해 주신다지만, 언제까지 그분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그리고, 그분이 너를 도와주시는 건 전적으로 윤 대표 때문이야. 네가 윤 대표와의 사이가 틀어진다고 해도, 하 대표님께서 너를 지지해 주실까?” 소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와 저의 관계는 언니와 주변 사람들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관계가 아니에요!” 심유인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그래, 두 사람의 사이가 정말 좋다는
고이서는 두 사람이 단톡방에 보낸 메시지를 보고 꽤나 만족스러워하며 웃기 시작했다.하지만 자신이 아주 특별한 신분임을 잊지 않았고, 절대 외부인에게 자신이 원래의 ‘윤이서’라는 사실을 알리면 안 된다는 것을 되새겼다. ‘윤이서가 나와 엄마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다면, 분명히 의심할 거야.’고이서가 걱정을 털어놓자, 성지영이 무심히 말했다.[얘, 그렇게 우연히 만날 리가 없잖아. 이렇게 큰 도시에서 쇼핑하다가 윤이서를 만난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란다.]윤재하도 그런 우연이 일어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우리 딸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야. 곧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끝날 텐데,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서 골치 아픈 일을 만들 필요는 없잖아?][그래도 드레스가 사고 싶다면, 교외로 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군.][윤이서가 교외로 쇼핑가지는 않을 테니까.]성지영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교외에서 어떻게 그럴듯한 드레스를 살 수 있겠어요?] 고이서는 시내에서는 이서를 만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교외에서는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엄마, 교외에는 제대로 된 드레스가 없긴 하겠지만,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잖아요.][제가 윤씨 그룹의 대표가 되면, 시내의 드레스는 물론이고, 고급 럭셔리 브랜드의 드레스까지 전부 집으로 보내드릴게요, 네?]이 말은 성지영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어머, 우리 딸 말하는 것 좀 봐? 그래, 토요일에 시외에서 쇼핑하자꾸나.][네, 엄마.]고이서는 약속 시간을 정한 후에야 핸드폰을 내려놓고 업무에 집중했다. 한편, 최고층에 있던 이서는 전화하고 있었는데, 이는 소희가 걸어온 것이었다. [이서 언니, 긴급 상황이에요. 저 좀 도와주세요!]이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어젯밤에 부모님께 현태 오빠의 존재를 털어놓았잖아요.][그런데 오늘 아침에 아빠가 저를 서재로 부르셔서는 다음 주 월요일에 현태 오빠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셨어
“나는 과거에 살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요.”조용히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눈빛에서는 고통이 요동치고 있었고,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지환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울부짖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감정은 입술 끝에서 단 세 글자로 바뀌고 말았다.“알겠어.” 이서도 지환의 이런 모습에 마음이 괴로웠다.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마다 과거만 떠올릴 뿐, 그 누구도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그것은 그저 과거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그만 먹을래요.”이서는 황급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병실을 떠났다. 차에 오르자, 이서는 고통이 온몸으로 번지는 듯했다. ‘하지환 씨가 하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늘은 왜 우리한테 이런 장난을 친 걸까?’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차 안의 카펫을 바라보던 이서는 운전기사의 말을 듣고서야 회사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에서 내린 이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또 고이서를 마주쳤다.다시 고이서를 마주한 이서의 감정은 완전히 뒤바꾼 후였지만, 그러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고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고이서가 빙그레 웃으며 이서를 바라보았다.“윤 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젯밤에는 잘 주무셨나요?”“덕분에요.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를 마신 이후로 아주 잘 자고 있어요.” “참, 지난번에 꽃차가 부족하면 더 구해줄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큰 걸로 하나 더 구해주실 수 있을까요?”이서가 주동적으로 꽃차를 더 달라고 하자, 고이서의 눈동자에 기쁨이 번졌다.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서는 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윤씨 그룹에 들어온 거였구나.’‘재무팀 팀장을 다시 구해봐야겠어.’어쨌든 재무는 한 회사의 존망이 달린 것이지 않은가. “언제까지 구해드리면 될까요?”“어제저녁에 세어 보았는데, 아직 10포가 남았더라고요. 매일 저녁에 1포씩 먹는다고 가정하면, 10일분은 남은 셈이죠. 4일이나
“감사해요.”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구태우가 한 말을 곱씹자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날이 밝자마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알았어,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줄 여력이 없어.”‘미안해요, 소지태 씨.’이서는 평생 지태에게 대답을 줄 수 없을 것이었다.병실 문을 열자, 아침 식사를 들고 있는 이천이 보였다.“또 아침 식사를 가져오신 거예요?”‘역시 사모님이야!’놀란 이천은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뒤에서 몸을 일으킨 지환이 보였다.이서가 그를 마주하고도 표정이 구겨지지 않자, 이천이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사모님, 같이 드실래요?” “이 비서님, 말씀드렸잖아요.”“앞으로는 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시라고요.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떡해요?”이서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천은 곧장 지환의 안색을 살폈는데, 과연 이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환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지... 괜히 사모님께 식사하자고 해서 또 대표님의 기분을 나쁘게 했으니까!’ “그래도 아침은 같이 먹을게요.”이서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놀란 이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거든요.”이서가 싱긋 웃어 보였다. ‘식사하시겠다고?! 경사네, 경사야!’이천은 바삐 이서를 붙잡고 지환의 병실로 향하며 말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아니, 윤 대표님께서 같이 식사하시겠답니다!” “그래.”지환의 낯빛은 조금이나마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듯했지만, 여전히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서가 자리에 앉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천은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눈물이 눈 앞을 가렸다.‘이런 평화로운 모습이 얼마 만인 거지?’ “아, 더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이천이 음식을 내려놓고 말했다.“맛있게 드십시오. 부족하시면 더 사 오겠습니다.”이서는 멀어져가는 이천의 뒷모습을 보며
“이 꽃차를 장기간 이용할 경우, 중추신경이 손상돼서 심하면 치매를 일으킬 수 있어요.”“강력한 성분이 꽤 많이 들어 있더군요.”“음... 제 예상대로라면, 대략 보름 정도 사용하면 치매가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놀란 이서가 다시금 물었다.“그러니까, 제가 보름 동안 이 꽃차를 복용했다면, 치매에 걸렸을 거란 말씀이세요?”“네, 그래서 지인이 준 게 맞냐고 물었던 거예요.”의사가 설명서를 보고 말했다.“설명서에도 다른 나라 언어만 있잖습니까.”“그래서 그분도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에요.”“윤이서 씨, 이 꽃차를 복용하기 시작한 건 아니죠?”“그게...”이서는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고 팀장은 외국에서 자란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 나라의 언어를 모를 수 있겠어?’‘오히려 잘 알아서 이 꽃차를 사 온 걸 거야.’ 하지만 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고 팀장님이 왜... 나를 해치려 한 거지?’ ‘설마, 하도훈이 보낸 사람인 건가?’“윤이서 씨?”의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설마 벌써 며칠간 드신 겁니까?” 별안간 정신을 차린 이서가 말했다.“아니요, 딱 한 번 마셨어요.” 의사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딱 한 번만 마셨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이서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내 건강보다도 회사를 걱정할 때야.’‘고이서, 당신... 대체 누구야?!’의문을 품은 이서는 병실로 돌아간 후, 하늘에게 고이서의 모든 자료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하늘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으나, 곧장 고이서에 관한 자료를 보내왔다.이서는 한 장씩 뒤적거렸으나, 결국 고이서의 이력서에서는 어떠한 문제점도 찾지 못했다.‘지금 당장 고이서를 해고한다고 해도, 그 여자가 대체 누구인지, 왜 나를 찾아온 건지는 알 수 없을 거야.’ 이서는 별안간 지태의 곁에 있는 구태우를 떠올렸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구태우에게 연락을 취했고, 그는 두말없이 승낙했다.
병원에 도착한 이서는 우물쭈물하다가 차 안에 있는 지환을 향해 말했다.“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그 사람을 처리해 줘서?”“네.”“참,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어요? 왜 날 죽이려고 한 거죠?”“설마... 하도훈의 사람이었던 거예요?” 지환은 이서의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잠시 후에야 말했다.“하은철의 죽음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만, 하도훈은 우리 두 사람이 비밀을 누설했다고 생각하고, 우리를 죽여서 분풀이하려던 거야.” 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우리요? 누가 하지환 씨에게도 해를 가한 거예요?”“응.” 이 대답이 나오는 순간, 이서의 심장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괜찮아요?”그녀가 간신히 입을 뗐다.지환은 그런 이서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날 걱정하는 거야?” 이서는 붉게 물든 얼굴로 화를 냈다.“우... 우리는 지금 협력 관계예요! 하지환 씨한테 사고가 나면, 내가 어떻게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지환의 웃음기는 더욱 짙어졌다.“난 괜찮아. 어둠의 호리병이 있으니, 하도훈조차도 나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거거든.” “하지만...”이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어둠의 호리병은 한 사람이잖아요. 만약 하도훈이 동시에 두 사람을 보내면 어떡해요?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은 위험에 빠질 거라고요.” “걱정하지 마. 우리 곁에 고수가 있다는 걸 안 이상, 하도훈은 당분간 우리를 해치려 하지 않을 거야. 게다가 하도훈은 지금 여자를 찾아 하씨 가문의 후계자를 만드느라 바쁠걸?”이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차 안으로 돌아갔다.“하도훈이 찾는 여자한테 손을 쓸 수는 없을까요?”“무슨 뜻이야?” “하도훈은 대를 잇는 것에 집중하느라 상대의 출신은 전혀 개의치 않을 거예요. 오히려 그 사람이 더욱 중요시하는 건 상대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가 하는 거겠죠.”“만약 우리가 먼저 하도훈의 조건에 맞는 여자를 골라낸다면, 그 여자를 하도훈의 곁에 두고,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